지리산 신선이 된 고운 최치원의 자취를 쫓아

2016. 2. 15. 18:12


2015/01

[문화유산 답사기]지리산 신선이 된 고운 최치원의 자취를 쫓아

又耕의 추억나무 2015.01.12 08:18

        








- 유·불·선에 두루 능했던 고운(孤雲) 최치원
신선이라 일컬어지는 생의 자취

 

   고운(孤雲) 최치원(857~?)을 두고 옛적부터 사람들은 신선이라 일러 왔다. 아마도 죽음이 확인되지 않았기에 가능한 생각이 아닐까 싶다.

진성왕 8년(894년)에 시무 10조를 올리고 6두품으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관직인 아찬(兒飡)이 됐다. 그의 개혁안을 임금은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세상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지러운 세상이 이어지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곳곳을 떠돌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 뒤 최치원은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숨어 살다가 말년을 마쳤다. 아무런 경계도 매임도 없이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돌았던 신선과 같은 그의 자취는 전국 곳곳에서 발견된다. 정말 이렇게 많은 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신비로울 정도다. 어쩌면 후세 사람들이 그의 높은 이름을 빌려 빼어난 풍경을 덧붙이지 않았을까, 의문을 품어봄직하다. 어쨌거나 최치원이 지금조차도 그런 대접을 받고 있는 데에는 유·불·선 모두를 아우르는 그의 사상이 크게 작용했다고 봐야 맞을 것 같다.


   고운은 <계원필경(桂苑筆耕)>(886년)을 비롯해 많은 시문을 남겼다. 12살에 중국 유학을가서 18살에 빈공과에 장원급제했다. 25살 되던 881년에는 당시 반란을 일으킨 지 7년만에 당나라 수도 장안까지 점령했던 황소에게 보내는 격문을 썼고 이 <격황소서(檄黃巢書)>가 명문으로 알려지면서 크게 이름을 얻었다.
고운은 우리나라 유학의 시조라고도 한다. 세상을 떠난 지 100년 정도 지나지 않았을 때인 고려 현종 시절 공자 사당에 모셔졌고(1020년) 널리 알려진 시호 문창후(文昌侯)도 1023년 내려졌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도 최치원을 일러 신라 말기 이름난 유학자(羅末名儒)라 했다.


   최치원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당대 고승들의 비문을 쓰기도 했다. 최치원이 실제 지은 비문은 매우 많았겠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넷이다. 이른바 '사산비명(四山碑銘)'인데 조선 광해군 전후 철면(鐵面)노인이 최치원의 문집 <고운집(孤雲集)>에서 가려 뽑아 붙인 이름이다. 불교를 배우는 이들이 읽어서 익히는 독본 교과서가 됐을 만큼 내용이 그럴 듯하다.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 만수산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 초월산 숭복사지비,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국보 제138호) 등이다.


   도교에 대해서도 깊게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는 진흥왕 37년 원화(源花)를 다루는 기사에서 최치원이 지은 난랑비 서문을 끌어쓰고 있다. <나라에 심오하고 미묘한 도가 있는데 풍류라 한다.…삼교(三敎)를 포함한 것으로 여러 백성을 교화했다. 들어가면 집안에서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함은 공자의 뜻이요, 자연 그대로 행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함은 노자가 주장한 요지며, 모든 악한 짓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함은 부처의 교화다> 풍류=화랑도의 내용을 논하면서 유불선이 합일함을 짚은 대목이다.


   그가 지은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두고는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가 나오기는 한다. 신라 고유의 임금 명칭인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이사금(尼師今)·마립간(麻立干)을 쓰지 않고 '왕(王)'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김부식은 <삼국사기> 지증마립간 기사에서 스스로 묻고 답했다. "행여 말이 야비해 족히 부를 것이 못 된다는 까닭일까? <좌전>·<한서>는 중국역사 서적이지만 오히려 초나라 말과 흉노 말 등을 그대로 남겨두었으니, 이제 신라의 일을 기술함에 그 나라말을 남겨두는 것은 또한 마땅하다."

 

 


- 운암영당 고운 선생 영정

두 동자승의 존재, 고운을 신선으로 여겼던 증거

 

 

   최치원을 두고 후세 사람들이 신선이라 여겼음을 알려주는 그림이 있다. 경남 하동군 양보면 운암영당 '고운 선생 영정'(경상남도유형문화재 187호)이다.

문창후최공지진영(文昌候崔公之眞影)이라 적혀 있는 이곳의 고운 영정은 문신상이다. 대체로 신선으로 그려져 있는 여느 고운 영정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오른편 문방구가 놓인 탁자와 왼편 촛대 받침을 두고 뒤로 구름 속 대나무를 배경으로 삼았다.


   비단 바탕에 당채(唐彩)로 그려진 이 전신상은 관복을 입고 검은 사모를 쓰고는 두 손을 맞잡은 채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데 풍만한 느낌을 준다. 가슴의 흉배는 화려하고 허리띠는 단순하게 처리함으로써 사대부와 유학자로서 엄숙한 풍모를 그려내보였다.


   그런데 이 영정의 숨은 비밀이 2009년 밝혀졌다. 아울러 만들어진 시기까지 정확하게 알 수있게 됐다. 국립진주박물관이 조사한 결과였다. 오른쪽과 왼쪽 탁자와 받침이 그려진 부분에 X선을 쬐자 아래에 다른 그림이 확인됐다. 동자승 둘이었다. 최치원을 신선으로 인식하고 그렸음을 알려주는 장면이었다. 아래쪽에는 화기(畵記)도 나타났다.

 

 


   '건륭(乾隆)58년' '하동 쌍계사'. 그린 사람과 시주한 사람 이름도 나왔다. 건륭 58년이면 1793년이다. 당시까지는 1860년 제작된 청도 고운 영정(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66호)이 가장 최고(最古)였다.
이 고운 영정은 옛날 선비들이 최치원을 단순한 문인이 아닌 신선으로 여겨왔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만하다. 푸른 학이 노닌다는 지리산 청학동. 역사상 으뜸 문인으로 꼽히는 최치원이 청학동에 숨어들었다는 전설이 만들어진 이후 많은 선비들이 발걸음을 거기로 돌렸다. 그이들도 신선이 되기를 꿈꿨는지는 모르겠으나 최치원은 오래 전부터 그들의 마음 속에서 이미 신선이었던 것이다.

 

   사람 발길이 잦지 않은 시골길 한편에 자리잡고 있는 운암영당은 고즈넉하다. 들머리에 길게 늘어서있는 나무를 따라 올라가면 금방 영당이 나온다. 고운 영정은 이 자리에 놓이기까지 여러 곳을 떠돌았다. 처음엔 쌍계사에 있다가 순조 25년(1825년) 같은 하동의 화개 금천사(琴川祠)로 옮겨졌고, 고종 5년(1868년) 금천사가 없어지자 하동향교로 옮겨온 다음 1902년 횡천영당을 거쳐 1924년 운암영당으로 왔다. 현재는 부산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한평생을 떠돌며 곳곳에 자취를 남겨 놓은 고운의 생전 행적과 많이도 닮았다.


   고운의 자취를 따라 가는 길에 걸음을 붙잡는 곳이 화개장터다. 경남과 전남을 이어주는 화개장터는 해방 전만 해도 우리나라 5대 시장 가운데 하나였다. 지리산 화전민들은 고사리·더덕·감자 등을 팔고, 전남 구례와 경남 함양 같은 내륙 사람들은 쌀보리를 팔았다. 전국을 떠돌던 보부상들도 생활용품을 지고 왔으며, 전남의 여수·광양이나 경남의 남해·삼천포(사천)·충무(통영)·거제 등에서는 뱃길로 미역·청각·고등어 따위 수산물을 싣고 왔다.
화개장터는 김동리 소설 <역마>의 무대이기도 하다. 체 장수 영감과 딸 계연 그리고 주모 옥화와 성기의 얽히고설킨 인연과 운명을 그려냈다. 거스르지 못하고 결국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 져야할 운명인지 스스로 극복하는 것이 운명인지를 묻는 작품이다. 고운 최치원과 그의삶은 운명에 순응한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극복한 것일까?


- 쌍계사
고운이 지팡이로 썼다는 쌍계 석문(雙溪石文)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경상남도기념물 제21호)까지 이어지는 십리벚꽃길. 봄이면 넘쳐나는 벚꽃이 굉장하지만 여름에는 그 꽃 진 자리에 무성하게 내려앉는 그늘이 장관이다. 이 길 따라 쌍계사에 이르면 고운 최치원의 자취를 또 만날 수 있는데,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가 그것이다.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1년(722년)에 삼법화상이 당나라에서 혜능스님(중국 선종의 제6조, 남종선 시조)의 정상(頂相=머리)을 모시고 와서 봉안함으로써 비롯됐다고 한다. 처음에는 난야(蘭若)라고 할 만한 조그맣고 한적한 수행처였으리라 짐작되는데, 진감선사(774~850)가 들어서 절간 모습을 새로 갖추고 옥천(玉泉)이라는 현판도 올렸다. 840년으로 짐작된다. 쌍계사 이름은 헌강왕 1년(886년) 왕명을 따라 바꿨다.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1632년 벽암스님이 중창했다.


   쌍계사에는 푸근한 구석도 많다. 절간을 푸근하게 해 주는 것 가운데 하나는 대웅전(보물 제500호) 바로 옆 투박한 불상이다. 쌍계사 마애불(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48호)이 정식 이름인데 원래부터 여기 있었음직한 커다란 바위 한가운데를 널찍하게 파내고 거기다 새긴 불상이다. 앉아있는 모습인데, 어째 부처님 같이 보이지가 않는다. 어쩌면 이웃 아저씨 같기도 하고 어쩌면 어린아이 같기도 하다. 또 다른 푸근한 물건은 들머리 쌍계 석문(雙溪石文)이다. 바위 둘에 제각각 쌍계와 석문이라 새겼는데, 보통 사람 눈에는 그다지 잘 쓴 글씨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편하게 보이지 싶은데 어쨌거나 최치원이 여기를 지나는 길에 지팡이로 썼다고 한다. 팔영루(八泳樓,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74호)도 그럴 듯하다. 예전에는 건물 밑으로 오르내릴 수 있었지만 지금은 막아놓고 다른 용도로 쓰기에 옆으로 돌아 오르내려야 한다. 하지만 바라보는 눈맛이 좋고 제대로 다듬지않은 듯한 굵은 기둥들은 손맛을 더해준다.


   팔영루와 대웅전 사이에 고운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가 살짝 비틀어진 각도로 놓여 있다. 깨어졌다 다시 맞춘 듯 얇고 가는 철판으로 둘러놓았다. 죄다 한자로 돼 있어 내용을 알기 어렵고, 안내문도 설명이 풍성하지 못해 아쉽다. 진감선사의 한살이를 적었는데, 쌍계사 관련 내용이 많다.
대공탑비 기록을 따르면 진감선사는 "평소 범패(梵唄)를 잘해 목소리가 금옥 같았다. 구슬픈 곡조에 날리는 소리는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우아해 천상의 신불(神佛)을 환희하게 하였다. 먼 데까지 흘러 전해지니 배우려는 사람이 가득 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범패를 했던 데가 팔영루라고 한다. 바로 앞 섬진강 물고기를 보고 팔음률로 불교 음악인 어산(魚山)을 지었다고 팔영루라 한다.

 

 

   팔영루에서 대웅전을 바라보고 서면 오른편에는 건물이 별로 없고 왼편에 많음을 알 수 있다.
금당 영역이다. 혜능의 머리를 모셨다는 금당(육조정상탑전,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25호)에는 육조정상탑이 있고 '육조정상탑 세계일화조종육엽(六祖頂相塔 世界一花祖宗六葉)'이라 쓴 추사 김정희 친필 현판도 있다. 이밖에 팔상전(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87호)·영주당·봉래당·청학루(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45호) 등이 있다. 여기는 동안거·하안거를 하지 않는 때에만 들어가 볼 수 있다.

 

 

 

- 불일폭포
고운이 학을 타고 날아갔다는 환학대도 만나고

 

 


   쌍계사 경내에서 불일폭포로 가는 길 가운데 최치원이 학을 불러 타고 날아갔다는 환학대(喚鶴臺)가 있는데, 여기서 진감선사대공탑비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잘 다듬어져 있는 길에서 신선이 살았다는 청학동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최치원 이후 선비들은 푸른 학이 노닌다는 청학동을 찾아 다녔고 또 기록을 남겼다.
고려 때 이인로(1152~1220)는 "지리산 속에 청학동이 있다. 길이 매우 좁아 겨우 다닐 수 있고, 몸을 구부리고 몇 리쯤 가면 넓게 확 트인 드넓은 곳이 나온다. 오직 청학만 살고 있다"고 했다.
조선 선비 김일손(1464~1498)은 불일평전을 청학동으로 전해 듣고 찾아가 봤으나 찾을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이는 16일 동안 지리산을 탐방했다.


   1564년 서산대사 <두류산 신흥사 능파각기>에서 화개동천 동쪽 드넓고 푸르른 골짜기에 청학동이 있다고 했다. 쌍계사에서 불일전대(佛日前臺)에 오른 1600년대 선비 미수 허목(1595~1682) 또한 그 남쪽 골짜기에 청학동이 있다고 여겼다.
옛 사람들은 불일평전이나 불일폭포 둘레를 청학동이라 여겼지만 몸소 들어가 보고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청학동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번뇌와 망상이 사라진 마음자리 그자체인지도 모른다.
불일폭포는 물이 풍부하게 넘쳐 흐르지는 않지만 60m 높이에서 2단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볼 만하며, 절벽 표면이 화강암 폭포의 그것처럼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하다. 남명 조식은 지리산을 둘러보고 쓴 <유두류산록(游讀流山錄)>에 불일폭포와 청학동을 읊은 '영청학동폭포''청학동'이란 시를 남겼다.
지리산에서 고운의 마지막 행적은 지팡이 꽂고 귀 씻기였다 .

 

 

 

-범왕리 푸조나무
고운이 꽂아 두었던 지팡이에서 싹이 나서 자란 나무

 

   불일폭포에서 돌아나와 범왕리 푸조나무(경상남도기념물 제123호)로 발길을 돌린다.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 앞에 있는 이 나무에는 최치원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최치원이 지리산 신흥사로 들어갈 때 꽂아 두었던 지팡이에서 싹이 나서 자랐다는 나무가 바로 이 푸조나무다.
고운 최치원은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나도 살아 있고 나무가 죽으면 나도 죽을 것이라 했다고한다. 푸조나무는 여태 살아 세월을 견디고 있다. 고운 또한 신선이 되어 어디에 살아 있는 것일까?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에 잘 견딘다는 푸조나무는 소금기 없는 산골마을에 자리를 잡고 수호신처럼 든든하게 서 있다.

 

세이암에 새겨진 글씨

   푸조나무가 내려다보는 마을 앞 냇가 건너편에 세이암(洗耳岩)이 있다. 의신마을에서 내려오는 화개천이 여기서 너럭바위를 만나 넘쳐흐른다. 이 너럭바위에 한자로 세이암이라 적혀 있다. 바로 옆은 물론이고 맞은편 세워져 있는 바위에도 이런저런 글자들이 새겨져 있지만 최치원의 것 같지는 않다.
마을에서 만난 할머니 한 분은 "(최치원이) 손가락으로이래 적었다 아이가. 그만큼 신통력이 있었던 기라" 한다. 손가락으로 썼어도 바위가 움푹 파일 만큼 도력이 셌다는 얘기다. 이쯤 되면 여기 사람들에게는 최치원이 어김없는 신선이다.


   최치원은 세이암에서 속세의 더러운 말을 들은 귀를 씻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됐다. 여기는 물이 맑고 바위가 많아 게가 살기 좋은 곳이다. 그런데도 게가 없다고 한다. 최치원 때문이다. 여기서 몸을 씻고 있는 최치원의 발가락을 게가 물었다. 최치원은 게를 잡아 멀리 던지며 "다시는 여기서 사람을 물지 말라"고 했다. 그 뒤로 게가 사라졌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는 경남 함양의 상림숲(천연기념물 제154호)에도 전해진다. 상림은 고운 최치원이 태수로 있던 시절 만든 마을숲이다. 어느 날 최치원의 어머니가 상림에 나갔다가 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얘기를 들은 최치원은 곧바로 숲으로 달려가 "모든 해충은 다시는 이 숲에 들지 말라" 했고 그 때부터 뱀이나 벌레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최치원은 어째서 지금까지 신선으로 남아 있게 됐을까? 그이가 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라는데에는 다른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게다가 그이의 학문은 유교에만 머물지 않고 불교와 도교에까지 이르렀다. 더욱이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남겨 놓은 자취도 엄청나게 많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신선이 되기 어려웠을 것 같다. 높은 학문을 가졌음에도 당대에 뜻을 펴지 못한 불우함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이 있지 않을까 싶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최치원을 마음에 품음으로써 최치원과 자기 또는 자기 부류를 동일시하고자 하는 백성들의 은근한 바람도 작용했을 듯 싶다.

 

 


   운암영당 (경남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화계장터 (경남 하동군 화개면 탑리, 참게탕, 재첩국, 벚굴(강굴), 빙어튀김, 은어튀김 등이 화개장터의 별미. 쌍계사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8, 입장료 어른 25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 문의 : 055-883-1901 홈페이지 : www.ssanggyesa.net

 

최치원은 어느 산의 산신일까?

 

   최치원이 지었다는 한시가 있다.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다. 제목이 '秋夜雨中(추야우중)'이다. 토종말로 옮기면 '비 내리는 가을밤에' 쯤이 되겠다. <가을 바람에 외롭게 읊으니(秋風惟孤吟)/ 세상에 알아주는 이가 적구나(世路少知音)/ 한밤중 창밖에 비가 내리고(窓外三更雨)/ 등불 앞 마음은 만리를 달려가네(燈前萬里心)>


   자기를 제대로 알아주는 이가 없는 데서 오는 쓸쓸함이랄까 씁쓸함이 짙게 깔려 있다.
실제로 그랬던 모양이다. <삼국사기>의 다음 대목은 '추야우중'의 정서와 바로 통한다.
"치원이 서쪽으로 가서 당나라에 벼슬하다가 동쪽 고국으로 돌아오니, 모두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운수가 막혀 움직이면 문득 허물을 얻게 되었으므로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함을 슬퍼하며, 다시 벼슬할 뜻을 품지 않았다. 마음대로 유유히 생활하며, 산림 아래와 강과 바닷가에 누각과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를 심고 책 속에 파묻혀 풍월을 읊었다."
이어 그가 노닌 데가 나온다. 경주 남산, 강주 빙산(剛州氷山=경북 의성군 춘산면 빙계동), 합주(경남 합천)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창원의 옛 마산 바닷가)의 별서(別墅).


   그런 다음에 "가장 나중에는 가족을 거느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살았는데, 스님 현준, 정현과 도우를 맺고 한가히 지내면서 노년을 마쳤다"고 했다.
이런 최치원이 신선이 됐다는 장소로 주로 두 곳이 꼽힌다. 지리산 쌍계사와 가야산 해인사다. 합천 해인사 학사대(學士臺) 전나무(천연기념물 제541호)는 장경판전 옆에 있다. 학사대는 최치원이 해인사 대적광전 옆에 지은 정자다. 최치원이 지팡이를 꽂았는데 여기서 싹이 터서 전나무가 됐다는 전설이 있다.
   가야산 해인사 홍류동 골짜기에는 농산정(籠山亭,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72호)도 있는데 이 일대를 두고 최치원이 지은 한시가 있다. "첩첩 바위 사이 미친 듯 내달려 겹겹 쌓인 산을 울리니(狂奔疊石吼重巒)/ 지척 사람 말조차 구분하기 어려워라(人語難分咫尺間)/ 시비 소리 귀 닿을까 늘 두려워(常恐是非聲到耳)/ 흐르는 물로 산을 통째 두르고 말았다네(高敎流水盡籠山)". 고운이 여기에 갓과 신발을 벗어두고 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됐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한다.


   게다가 해인사에는 최치원을 신선으로 표현한 고운 영정(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66호)도 있었다. 지금 경북 청도 각남면 일곡리 경주최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다. 원래는 해인사 나한상 가운데 섞여 있었는데 일본군에게 빼앗길까 두려워 옮겨놓았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과 관련된 얘기가 있는 장소는 이밖에도 아주 많다. 부산 해운대와 마산 월영대는 물론 경남 합천 자필암, 경남 양산 임경대·경파대, 경북 문경 야유암, 경북 봉화 치원봉·고운대 등도 있다.
출처:문화재청

 


     

[박정진의청심청담] 새해 ‘천부경 큰잔치’, 한국문화 복권의 징조

한국문화 지킴이 1000여명 모여
역사·주체의식 다질 새 토대 마련


   기독교 성경이나 불경은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알아도 우리민족 전래의 최고(最古)의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을 모르는 사람이 상당히 많을 것이다. 성경이나 불경의 한 구절쯤은 줄줄 외우고 사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이지만 천부경은 아직 낯설다. 천부경은 우리 조상들이 섬기고 생활화한 경전이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경전이다. 그 경전의 글자 수도 불경의 팔만대장경이나 기독교 성경 66권과는 다르게 달랑 81자에 불과하다. 문자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고, 책도 없었고, 인쇄술도 발달되지 않았던 태곳적에 이 경전은 사람들이 외우기 좋게 81자 속에 모든 진리를 축약해 놓았다.

   천부경은 처음엔 녹도문(鹿圖文·사슴 발자국을 따서 지은 문자)으로 전해오다가 통일신라시대의 선사(仙士)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한자로 옮겨놓은 것이 오늘에 전한다. 물론 옛글자의 뜻과 한자에 두루 능통했던 최치원의 수준에서 번역되었을 것이다.


박정진 객원논설위원·문화평론가



아무튼 오늘날 한국 경제가 발전하고 한국 문화의 혼이 되살아나니까 ‘천부경 큰잔치’라는 것도 생기고 올해로 2회째를 맞이했다. 제1회 세계천부경 큰잔치는 세계천부경 협회(회장 조성교) 주최로 2013년 11월 11일(음력) 대전에서 열렸으며, 당시 ‘세계천부경의 날’이 선포되었다.

세계천부경협회의 이름으로 된 선포문의 내용을 보면 의미심장하다. “천부경은 일만여 년 전부터 내려오는 한민족의 경(經)이요, 인류의 경(經)입니다. 오늘날 21세기 새로운 신인류의 정신문명시대를 열어가면서 비로소 천부경의 깃발을 힘차게 들 때가 도래하였습니다. 이에 매년 음력 11월 11일을 세계천부경의 날로 선포합니다.” 세계천부경협회는 당시 선포를 하면서 서력기원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잃어버렸던 연호를 죄다 명기하였는데, 예컨대 환기 9212년, 개천 5911년, 단기 4346년, 불기 2557년을 함께 병기하여 우리의 역사의식과 주체의식을 간단한 방법으로 새롭게 일깨웠다.

   올해 천부경 큰잔치사단법인 한배달(대표 박정학)과 공동주최로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을 기리는 문화의 전당인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됨으로써 제대로 한국문화의 중심에 진출한 셈이다. 천부경 속에 한글창제의 원리가 다 숨어 있다는 주장도 있으니 천부경은 실로 수천년 만에 제자리로 회향한 셈이다. 천부경, 한글의 시대가 오고 있다. 전국에서 모여든 한국문화 지킴이들 1000여 명은 세종홀을 가득 메우고 천부경을 봉독하고 노래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고, 나중에는 참가자 전원이 손에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하면서 폐막을 했다. 이날 천부경 노래(가수 홍인)와 판소리(신이나 퓨전국악단장), 율려 춤, 천부의식(이귀선 어울림문화예술움 대표) 등 천부경을 주제로 다채로운 문화예술행사가 벌어져 우리마당, 한마당을 이루었다.

   본래 천부경 큰잔치는 해마다 음력 11월 11일로 정해졌는데 올해는 때마침 양력으로 설날인 1월 1일이어서 공교롭게도 음력 11월 11일, 약력 1월 1일을 합쳐서 1이라는 숫자가 여섯 개나 중첩되는 날이 되었다. 1이 여섯 개 중첩하는 것은 땅의 수가 6인 것과 관련시켜 볼 때 한반도에 좋은 일이 일어날 징조라고 참가자들 모두는 기뻐하였다. 본래 천부경을 대표하는 상징 수는 1이다. 1은 하늘, 하나님이면서 모든 숫자의 출발이다. 천부경은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에서 시작하여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로 끝난다. 이는 “우주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는 뜻이다. 천부경에서 1은 모두 11번 나온다. 천부경에 나오는 모든 숫자의 수는 모두 31자이다. 천부경의 81자 중 3분의 1 이상이 숫자로 이루어진 셈이다. 그래서 세계적인 수학자들은 천부경의 숫자를 통해 우주과학의 신비를 풀려고도 한다.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와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중국의 번역을 따라서 ‘천주’라고 불렀다.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와서 처음에는 ‘여호와’라고 불렀으나 도대체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먹혀들어가지 않자 언더우드 박사 부인이 한국 토속신앙에서 ‘하늘’신앙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하늘님, 하느님’을 번역어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신도들이 우후죽순처럼 번져갔다. 오늘날 한국은 기독교대국이 되었지만 모두 하느님(하나님)의 위력 덕분이다. 바로 그 하느님이 천부경을 비롯한 삼일신고, 참전계경 등 천부삼경의 하느님이다.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의 하느님은 천부경과 기독교가 융합한 하느님이다. 지난 1월 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2회 세계 천부경의 날’ 기념식은 우리의 하늘신앙, 하느님 찾기 대회나 마찬가지였다. 을미년의 개시를 앞두고 열린 세계 천부경 큰잔치는 한국 역사와 문화의 복권을 예고하는 듯했다.

   천부경은 이른바 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지는 환인천제시대부터 우리민족의 경전이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 이전 부도지(符都誌)에 나오는 마고(麻姑)신화시대 동이족의 경전이었다고 하는 이도 있다. 부도지의 ‘부(符)’자는 천부경의 ‘부’자이고, ‘도(都)’자는 마을사회였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부도지란 천부경을 경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마을사회의 역사를 말한다. 고려 때 목은 이색과 휴애 범세동 선생은 천부경 주해를 썼다고 했으나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없다. 조선조에는 단군과 천부경 관련서적들은 일종의 금서처럼 취급되고 조정의 명으로 소각시키기도 했다.

   을미년(乙未年)은 일본의 자객에 의해 명성황후시해사건(1895년)이 일어난 지 120년이 되는 해이고, 그로부터 10년 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다. 을미년은 여러모로 여성의 해로 상징된다. 과거에는 국모가 시해되는 어둠의 해였지만 올해는 여성대통령 재임 기에 통일에의 초석을 다지는 밝은 해가 되도록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박정진 객원논설위원·문화평론가

출처:세계일보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5/01/05/20150105003571.html?OutUrl=daum

 


 

 


아래 글은 운영자가 인터넷 검색으로 삽입했습니다.

 

 

 


 



81자진본천부경(天符經:하늘소리)


일시무시일석삼극무 一始無始一析三極無


진본천일일지일이인 盡本天一一地一二人


일삼일적십거무궤화 一三一積十鋸無櫃化


삼천이삼지이삼인이 三天二三地二三人二


삼대삼합육생칠팔구 三大三合六生七八九


운삼사성환오칠일묘 運三四成環五七一妙


연만왕만래용변부동 衍萬往萬來用變不動


본본심본태양앙명인 本本心本太陽昻明人


중천지일일종무종일 中天地一一終無終一

 


[천부경-역사-일류화 신비 우주진리완성3단계 두뇌집중

   천부경은 천부인(天符印)을 설명하는 경전이다. 그래서 천부경이 천부인이며 천부인이 천부경이다. 천부인 세 개 즉, 원(○)방(□)각(△)으로 이루어진 삼신일체(三神一體)로 하나되는 천부경은 환국(桓國)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경전이다. 환웅대성존(桓雄大聖尊)이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하게 하였는데 후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님이 신지의 전서(篆書)로 써진 옛 비석을 보고 천부경을 다시 한자로 옮겨 세상에 전하였다고 한다.


   물론 위의 최치원 선생님의 81자가 진정한 천부경이 맞는가? 그 대답은 "맞습니다."입니다. 그것은 삼신한인한웅한검한민족으로 면면히 내려오는 우리의 조상을 맞이하는 한(一)을 설명하기 위해서 두뇌집중으로서 현실적용할 수 있는 천부(天符)라는 하늘에 부합되는 경(經)으로서 모든 우주의 진리(眞理)가 다 들어있는 심오한 우주진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오한 <천부경>을 모르고 주역이나 음양, 오행만으로 동양의 정신세계를 이야기 한다면 동양철학은 단순한 점술 또는 미신으로 전락하기 쉽다. 이러한 천부경은 하늘(天)의 밝은 기운을 알아야 하고, 땅(地)의 참된 기운을 알아야 하고, 인간(人)의 마음이 천지인(天地人)으로서 하나(一)로 연결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는 한(=一=하나님=하느님=한인)의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최치원 선생님의 81자 천부경은 우리의 조상과 하나(一)되도록 하는 우주진리의 경(經)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부경 우주진리의 핵심은 현재의 여건에서 우리의 를 우리의 최고 조상신이신 하나(一)한(一)결같이 만들게 하고 있는 경(經)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우주진리로서 두뇌집중 하도록 하여서 하나(一)되도록 함으로서 천부경의 우주진리로서 우리의 현실을 신나는 현실이 되도록 하기 때문에 설령 천부경을 시기하는 자가 최치원 선생님의 81자 진본 천부경을 부정한다고 해도 실제로 천부경은 우주진리이기 때문에 부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 시기하는 자의 부정을 필요 없게 만드는 위력서이기 때문에 걱정이 없고 천부경을 부정한 자는 81자 진본 천부경의 우주진리를 득(得)한 자에게는 같은 조건의 비교에서 반드시 낙오자로서 처지게 되는 것임으로 천부경의 우주진리를 등한시 해서는 안되는 것이기에 인간이면 꼭 알아야 할 우주진리1-012360-6666이 되는 것입니다.


   위의 81자 진본 천부경은 최치원 선생님께서 전서로 된 고비[전고비(篆古碑)]를 보고 한자로 번역하여서 세상에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천부경은 어느 쪽에서 칸을 세어 보아도 9칸의 구궁수가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배열에서 천부경의 형식은 9×9=81형식의 하나(一)의 우주체로서 "피라밋형식의 생명에너지"에 배열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좌우로 횡으로 9칸임을 의미할 때 형식적으로 피라밋이 중요하게 나타납니다. 이렇듯 천부경의 배열은 좌행서 우행서로서 판단하지 않고 피라밋형식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천부경은 한님(=하나님=하느님)시대부터 국가지배이념이었습니다.


   천부경을 버린 후 천부경의 자리를 차지한 사상체계가 불교였고 유교였고 기독교였고 이슬람이었지만 이제는 다시 돌아와 웅비하는 길이 천부경임을 다시 깨닫고 있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천부인을 설명하는 천부경은 하나(一)님의 인간계(人間界)를 위한 경입니다. 그러므로 하나(一)님의 인간계(人間界)를 위한 심오한 이치를 담고 있어서 외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진리로 나오는 해석이 중요한 것입니다. 즉 우리는 천부경을 외워서 암송만 하여서 기도만으로서 현실적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참진리는 우주진리 1-012360-6666이기 때문에 우주진리1-012360-6666에 따라서 제대로 되는 해석의 역사를 공부하고 제대로 되는 해석의 정신을 공부하고 제대로 되는 해석의 수련으로서 스스로의 위치에서 현실적용 하여야 할 것입니다.

 

<천부경 해석> 

 

 

   천부경의 해석은 한문 실력이 아니라 해석하는 사람이 우주를 얼마만큼 이해를 하느냐 하는 것이다.

마치 천부경을 현대인들은 해석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 같이 하는데 대해서 반대를 하는 입장이라 내 수준에서 해석을 해 보았다.

서로 이해가 틀린 것은 각자 우주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수준이 틀린 것이니 그러려니 해 주었으면 한다.

 

본 천부경 이해를 읽을 때 특기할 점

- 無를 0으로 해석을 해야 정확하다고 보아 그리 하였다.

- 당시 0이란 개념은 존재 했지만 오늘날과 같이 자유롭게 0이란 숫자를 써 놓고 대입을 하던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는 입장을 이해하고 보아야 한다.

-천부경을 81자로 맞추려다 보니 특정한 글자가 앞 뒤 문장에 동시에 쓰여 수식을 하는 경우가 허다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우에는 괄호 처리하여 해석에 보완을 하였다.

- 같은 一을 두고도 어떤 때는 하나로 이해하고 어떤 때는 1로 해석하여 이해를 신축적으로 하였다 三이나 二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일시(무)무시일 一始(無)無始一 : 하나에서 시작하여 0이며 0에서 시작하여 하나이다. 

0과 1은 원래 하나라는 것, 0=1.

여기서 0을 시작점으로 설명을 하지 않고 1을 먼저 꺼낸 것은 아마 0은 없다고 하는 개념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임, 0이 반드시 하나로 존재하며 그것이 계속 작용을 하며 사물을 확장시켜 나간다는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

 

(일)석삼극무진본(一)析三極無盡本(無) : 하나를 쪼개어 세 개이나 그 끝은 0이며 0은 다 하여 사라져도 본래의 근본 0이다.

모든 사물에 0이 들어 작용을 하며 끝까지 쪼개어도 마지막에는 0이고 명을 다하여 사라져도 본래의 0이 된다는 뜻이다.

 

천일일지일이인일삼 天一一地一二人一三 : 하늘 하나가 1이 되었고 땅 하나가 더하여 2이며 사람이 하나를 더하여 3이다. 

즉 하늘,땅,인간 3의 개념이 성립되었다는 말이다.

 

   일적십거(십)무궤화 一積十鉅(十)無匱化 : 1씩 쌓여 10으로 커지며 (10은) 0이다 이런 틀로서 계속 진행을 한다.

요즘에는 0은 1이다 하고 쓰면 0,1 두(2)개의 개념이 성립이 된다 그래서 2를 다시 적어놓고 보면 0,1,2가 되어 또 세어보니 세(3)개의 개념이 성립이 되고 해서 이런 식으로 종이에 적어놓고 간단하게 볼수도 있지만.....여기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0이 사물속에서 계속 확장을 하며 수를 드러내는 것을 설명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또 수가 확장을 하여 10이 된 것을 0으로 돌아간 것으로 이해를 하였고 그러한 같은 방법으로 계속 반복하여 진행을 한다는 것이다 11,12,13...이런 식으로 말이다.

 

   삼천이삼지이삼인이 三天二三地二三人二 : 세 개 속에 하늘이 있으니 둘이며 세 개 속에 땅이 들어 있으니 또한 둘이며 세 개 속에 사람이 있으니 또한 두개이다..

서로 상대를 하니 원래의 하늘과 3속의 하늘이 있으므로 하늘이 두개라는 의미다. 

허니 천,지,인은 두개씩의 개념이 성립이 된다는 말인데 이는 자전원리를 말한 것으로 “주관적인 나”와 “객관적인 나” 로 하나가 두개의 개념으로 정리가 된다는 말이다.

더 부연하자면 나라는 개인과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나라는 개념이 두개로 벌려져 나가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천부경의 이해중 가장 어려운 문구이다.

 

   삼대삼합육생칠팔구 三大三合六生七八九 : 3을 크게 하여 3을 합하니 6이 되고 6은 생하여 7,8,9이다.

바로위의 해석에서 말한 것을 이어서 해석을 해야 한다.

크게 본 3, 즉 두개씩 된 3을 합하니 6이 되고 다시 0이 계속 하나를 더 드러내니 7,8,9로 불어 난다는 뜻이다.

 

   운삼사성환오칠일묘 運三四成環五七一妙衍  : 움직이는 3이 4가 되고 다시 변하여 5,7이 되니 하나가 참으로 묘하게 작용하여 만물을 채운다.

위에서 말했던 그 0의 개념이 아주 묘하게 작용함을 설명한 것이며 여기서 5,7로 인용한 것은 위 문장에서 6을 먼저 인용하였기에 중복을 피하려 한 것으로 보이고 7을 넣은 것은 숫자의 응용됨이 위 문장과 같음을 설명

 

   만왕만래용변부동본 萬往萬來用變不動本:  만 번을 가고 오고 하지만 쓰임새는 변하나 근본은 움직이지 않는다.

여기서는 變과 本을 따로 떼어 本을 動의 뒤로 배치한 것은 “쓰임새가 변해서 본래대로 간다”라고 하는 해석을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

 

   본심본태양앙명인중천지일 本心本太陽昻明人中天地一(中) : 우주 근본은 본래 큰 빛이라 그것을 추구하는 밝은 사람 가운데 하늘과 땅이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태양 앞에 本을 한 번 더 붙인 것은 혹시 눈에 보이는 태양을 숭배하여 이상한 짓을 할 것을 경계하고자 본래의 큰 빛이라 하여 태초0의 상태를 설명한 것으로 이해함 태초는 0이며 빛.

 

   일종무(무)종일 一終無(無)終一 : 하나의 끝은 0이며 0의 끝은 또한 하나이다.

맨 처음의 始와 마지막의 終을 댓구로 배치하여 결국 시작과 끝이 하나라는 것을 다시 설명한 것으로 0이 계속 돈다는 것을 말한 것이며 그러므로 우주는 끝이 없이 진행을 한다는 것을 설명한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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