捫葛上雲峯 칡덩굴 거머쥐고 구름 봉우리에 올랐는데
平觀世界空 아득히 굽어보니 온누리가 아득하구나.
千山分掌上 산들은 올망졸망 손바닥 위에 놓였으니
萬事豁胸中 세상의 온갖 일들 가슴 속에서 탁 트이네.
塔影日邊雪 탑은 햇살 쬐는 눈 위에 그림자 드리웠고
松聲天半風 소나무는 하늘가에 부는 바람 따라 우는구나.
煙霞應笑我 구름과 노을이 응당 나를 비웃으리니
回步入塵籠 발걸음 돌려 다시 먼지 세상으로 들어가네.
-최치원의 운봉사에서[題雲峯寺]
雲畔構精廬 구름 가에 정사를 얽어놓고서
安禪四紀餘 선정에 몸 맡긴 지 어언 50년일세.
筇無出山步 주장자는 산 밖으로 나가 본 적 없고
筆絶入京書 붓은 서울로 보내는 글월을 끊었지.
竹架泉聲緊 대나무 홈 사이로 샘물은 졸졸 흐르고
松欞日影疏 소나무 창가에는 햇살이 성글구나.
境高吟不盡 높고 높은 경지를 시로도 다할 수 없으니
瞑目悟眞如 가만히 눈 감고 진여를 깨치려네.
-운문난야의 지광 스님에게[贈雲門蘭若智光上人]
천년 왕국 신라(新羅)가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 고려(高麗)가 들어서려는 혼란기에 최치원(857-?)은 태어났다. 천하를 경륜할 재능과 의욕을 지녔지만, 그는 육두품(六頭品) 출신이라 이미 태어날 때부터 한계가 정해진 운명이었다. 그는 이런 자신의 운명은 누구보다 적극적이고 두려움 없이 이겨내고자 했다. 12살 어린 나이로 당(唐)나라에 건너가서 7년 만인 874년에 18살 나이로 빈고과(賓貢科)에 합격한 것도 그런 그의 재능과 기상을 잘 보여주는 일화일 것이다.
최치원은 경주 최씨의 시조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가 금 돼지에게 잡혀갔다가 풀려났는데, 그 이후 그를 임신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아버지는 그를 내쳤고, 어린 나이로 최치원은 전국을 다니면서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시련에 굴하지 않고 쉼 없이 문장 수련에 전념했다. 아울러 망해가는 나라의 비참한 지경을 생생하게 목격하기도 했다.
당나라에 간 최치원은 고병(高騈) 휘하에서 당시 반란을 일으킨 황소(黃巢)를 성토하는 격문 <토황소격(討黃巢檄)>을 지어 명성을 떨쳤다. 사람뿐만 아니라 귀신들까지도 반란의 수괴를 죽일 모의를 한다는 구절에서 황소가 놀라 자리에서 떨어졌다는 얘기는 특히 유명하다. 이렇게 당나라에서 문명을 떨친 그였지만, 결국 그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곳은 조국 신라였다.
비슷한 처지의 육두품 출신 지식인들이 궁예(弓裔)나 견훤(甄萱) 같은 신흥 군벌들 밑에 들어가 미래를 도모했던 반면 최치원은 끝까지 조국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시무책(時務策)>을 올리는 등 여러 모로 조국의 회생에 힘을 쏟았지만, 쓰러지는 거목을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현실에 좌절하고 절망한 최치원은 가족들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인근으로 자취를 숨겼다가 영영 세상과 결별하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그야말로 가장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천재였다고 할 것이다.
그가 현실을 절망한 끝에 결국 가야산으로 숨어들어 끝내 신선(神仙)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고뇌와 번민이 컸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통으로 얼룩진 심신을 끌고 간 곳이 해인사라는 사찰 근처라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결국 그는 헤어날 길 없는 비통한 심정을 부처의 가르침에 귀의함으로써 찾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앞에서 읽은 두 편의 한시는 그런 그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첫 번째 시는 산사를 찾은 시인의 마음이 알알이 새겨져 있다. 힘겹게 산길을 타고 올라 사찰에 들어서니 속세의 모든 일들이 무상한 것을 깨닫게 된다. 공(空)의 세계에서 그는 비로소 답답한 가슴이 탁 트이는 열락(悅樂)을 느낀다. 아직 녹지 않은 하얀 눈 위로 탑 그림자는 드리웠고, 소나무 가지 사이로는 푸르고 화창한 바람 소리가 정겹기만 하다. 해탈한 경지의 무궁한 기쁨에 비한다면 세상의 번민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비로소 귀의처를 얻은 그의 두 눈으로 오랜만에 세상의 시비성(是非聲)이 끊긴 진정한 낙토가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속세로 돌아가야 했다. 그의 환속(還俗)을 대자연이 안타깝게 지켜보리라는 것을 잘 알지만 발길을 멈추지는 않는다. 그것은 번화한 세상에 대한 미련이라기보다는 책임감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보살정신(菩薩精神)의 또 다른 구현이었다.
사진=장명확
두 번째 시는 운문사에서 수행에 전념했던 스님 지광상인에게 준 작품이다. 허름한 암자에서 선정(禪定)에 몰입한 지 48년째(1紀는 12년이다)인 스님은 산 밖을 나선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세속의 명예를 얻으려고 권세가에게 편지 한 장 보낸 적이 없었다. 청정하게 계율을 지키는 참된 구도자의 모습을 최치원은 스님에게서 발견한다. 그리고 비록 난세를 구제하려는 순수한 동기를 지니고 있었지만 세상사에 대한 관심과 번민을 끊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시구로써 스님의 높은 깨달음의 경지를 담아 이를 자신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곧 이런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닫는다. 그것은 글로는 되지 않을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붓을 내던지고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진여(眞如)의 세계를 몸으로 체득하고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