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영의 세상이야기] 남달리 매화를 사랑했던 대인군자 퇴계(退溪)이황

2016. 2. 17. 11:14



      

오피니언
[최기영의 세상이야기] 남달리 매화를 사랑했던 대인군자 퇴계(退溪)이황
2015년 02월 20일 (금) 23:26:06

최기영  ericchoi1126@naver.com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봐도 예던 길 앞에 있네
예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예고 어쩔꼬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9〉


   ‘동방의 주자’로 추앙받는 퇴계(退溪)이황 선생은 조선중기 당대의 사회 주도층으로 성장하고 있던 사림세력의 활동에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역사상 아주 훌륭한 학자이다. 우리나라 천원권 지폐에 새겨진 대표적인 위인이기도 하다.

이황 선생의 자는 경호(景浩)이고 호는 퇴계(退溪)ㆍ지산(芝山)ㆍ도옹(陶翁)ㆍ퇴도(退陶)ㆍ도수(陶叟)ㆍ청량산인(淸凉山人)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퇴계(退溪)’라는 아호는 ‘물러나 계곡에 머문다’는 뜻의 ‘퇴거계상(退居溪上)’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흔히 옛 위인들의 이름을 찾다보면 자(字), 아호(雅號), 시호(諡號) 같은 말이 나온다.

여기서 ‘자(字)’란, 본이름 외에 부르는 이름으로, 예전에는 이름을 소중히 여겨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던 관습이 있었다. 자(字)는 남자가 성년이 되어 상투를 틀고 갓을 쓰는 의례인 관례(冠禮)를 마친 뒤에 본이름을 대신해서 부르던 이름이다. 자는 일반적으로 스스로 짓는 것이 아니라 부모나 스승 같은 연장자가 지어준다. 특히나 자(字)를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에게 부르면 실례가 된다.


   아호(雅號)는 문인이나 예술가 따위의 호나 별호를 높여 이르는 말인데 자와는 달리 아호는 누가 불러도 괜찮은 품격과 멋을 겸비한 자유로운 이름이다. 아호는 본명과는 달리 음양오행(陰陽五行)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퇴계 이황과 함께 동방18현 중의 한분이자 성리학의 대가로 손꼽히는 일두(一蠹)정여창은 자신의 호를 나무를 파먹는 한 마리의 하찮은 좀벌레라는 뜻으로 ‘좀 두 蠹’자를 써서 일두(一蠹)라 하였고, 조선조의 퇴계 이황과 함께 유학의 쌍벽으로 잘 알려진 율곡(栗谷)이이는 어려서 외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가 어려서 자란 고향의 밤나무골 지명을 빌어 율곡(栗谷)이라 하였고, 우리에게 《열하일기(熱河日記)》로 잘 알려진 실학자 연암(燕巖)박지원은 자신의 귀양지였던 황해도 연암협의 지명을 따서 연암(燕巖)을 호로 삼았으며,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자 대표적인 청백리였던 눌재(訥齋)박상 선생은 자신이 어눌하고 못났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낮추어 눌재(訥齋)라고 정했다. 또한 민족독립운동가 백범(白凡)김구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호를 백범(白凡)으로 지었다. 조선3대 명필로 유명한 추사(秋史)김정희는 추사(秋史)ㆍ완당(阮堂)ㆍ시암(詩庵)ㆍ예당(禮堂)ㆍ노과(老果)ㆍ농장인(農丈人)ㆍ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약 오백여개의 호를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시호(諡號)란, 왕ㆍ왕비를 비롯해 벼슬을 했던 사람이나 학덕이 높은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의 행적에 따라 국왕으로부터 받은 이름을 말한다. 조선 초기까지는 왕과 왕비, 왕의 종친, 실직에 있었던 정2품 이상의 문무관과 공신에게만 주어졌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대상이 완화, 확대되었다. 이에 생전에 낮은 관직에 있었던 사람도 증직되어 시호를 받는 일도 있었다. 이 때 시호 내리는 일을 ‘증시(贈諡)’라 하고, 후대에 추증해 시호를 내리면 ‘추시(追諡)’라 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을 예로 들어보면, 시호를 의정할 때는 세 가지 시호를 올리는 것. 즉, 삼망(三望)이 원칙이었다. 나라의 제사(祭祀)와 시호(諡號)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관아인 봉상시(奉常寺)에서 당시 의논한 세 가지 시호는 ‘충무(忠武)’, ‘충장(忠壯)’, ‘무목(武穆)’이었다. 그리고 이 때 의논한 자의(字意)는 위신봉상(危身奉上). 즉,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을 받드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절충어모(折衝禦侮). 즉, 쳐들어오는 적의 창끝을 꺾어 외침을 막는 것을 ‘무(武)’라 하며, 승적극란(勝敵克亂). 즉, 적을 이겨 전란을 평정함을 ‘장(壯)’이라 하고, 포덕집의(布德執義). 즉, 덕을 펴고 의로움을 굳게 지킴을 ‘목(穆)’이라 풀이하였다. 이 가운데 시호 서경을 거쳐 확정된 시호는 ‘충무(忠武)’였다고 한다.


   퇴계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12세에 정신적 지주이던 숙부로부터 《논어(論語)》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이황의 나이 18세에 지은 〈야당(野塘)〉이라는 시는 오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이슬을 머금은 풀은 파릇파릇 물가에 둘렀고 / 露草夭夭繞水涯(로초요요요수애)
자그만 연못이 맑고 조용하여 모래하나 없이 깨끗하구나 / 小塘淸恬淨無沙(소당청념정무사)
구름이 날고 새가 지나감은 탓할 바 없으나 / 雲飛鳥過無相管(운비조과무상관)
다만 때때로 제비가 물을 찰까 두렵다. / 只怕時時燕蹴波(지파시시연축파)


   퇴계는 을사사화 직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가 되던 해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이라는 작은 암자를 짓고, 자연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았다. 끝내 퇴거(退居)할 수 없는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자, 퇴계는 이를 피해 전임을 청해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 중 주자가 백록동서원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전임 군수인 주세붕이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이 공부하던 땅에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ㆍ서적(書籍)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사액서원이란,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을 말한다.


   퇴계의 나이 60세에 지금의 안동 땅에다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 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ㆍ수양ㆍ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薰陶)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갖추며 자주 퇴게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고사하였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어진 이를 초빙했으나 오지 않음을 탄식하다’〈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고, 이암(頥庵)송인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은 병풍을 만들어서 용상의 좌우에 두었다고 한다.


이황의 검소한 일생을 말해주는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해보면,


『 권율 장군의 아버지인 권철은 영의정을 지낸 당대의 인물로 도산서당으로 이황을 찾은 적이 있었다.

식사 때가 되자 밥상이 나왔는데 보리를 반 이상 섞은 밥에 콩나물국, 반찬으로는 콩자반, 귀한 손님이라고 해서 특별히 마련한 것이 북어 한 토막이 전부였다. 이황은 한 그릇을 다 먹었으나 권철은 체면치레로 몇 술 뜨고 수저를 놓았다.

이튿날도 같은 식사가 나오자 목에 넘어가지 않는 식사 때문에 예정을 앞당겨 떠나기로 했다. 떠나면서 좋은 말씀 한마디를 부탁했다.

이에 이황은,

“촌부가 대감께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다만 융숭한 대접을 못해드려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 식사는 백성들이 먹는 식사에 비하면 진수성찬이올시다. 이것을 드시지 못하면 관과 민의 생활이 이처럼 동떨어져서야 어찌 백성이 진심으로 복종하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한다. 』



   훗날 명종이 친정(親政)하게 되자, 퇴계를 자헌대부ㆍ공조판서ㆍ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 자주 초빙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자, 조정에서 퇴계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다시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퇴계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에 임명,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ㆍ지경연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북송오자 중의 한 사람인 정이(程蓬)의 《사잠(四箴)》, 《논어집주(論語集註)》와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등의 깊은 의미를 진강(進講)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간청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써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퇴계의 나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고향에 돌아온 후 학문 탐구에 전념하였으나, 70세가 되던 다음해 11월 병환이 악화되었다.


   그가 죽기 바로 전날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고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愁)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ㆍ홍문관ㆍ예문관ㆍ춘추관ㆍ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언대로 소자연석에 자신이 죽기 전 직접 쓴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죽은 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도산서원을 가보면 서원 정중앙에 〈 陶 山 書 院 〉 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한눈에 봐도 당대의 최고 명필가가 쓴 글씨임이 느껴지는 멋진 글씨이다. 그런데 그런 글씨 중 유독 첫 번째 글자인 ‘질그릇 도 陶’자가 눈에 띄게 비뚤어져 있고 필자는 그것이 하도 의아하여 그 연유를 알아보니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 선조는 어느 날 당대 최고의 명필인 석봉(石峯)한호를 불러 글씨를 쓰게 하였다. 당시 선조는 한석봉에게 도산서원의 현판을 쓰게 하려한다고 말하려했으나,

‘내가 만약 도산서원 현판 글씨를 쓰라고 석봉에게 말하면, 놀란 가슴에 붓이 떨려 글씨가 잘 안 나올 테지.’

그리하여 선조는 한석봉에게 이를 일러 주지 않고 도산서원 네 글자를 거꾸로 한 자, 한 자 불렀다. 이에 한석봉은 영문도 모르고 받아쓰게 되었다.

선조는 맨 처음에 “집 원 院”자를 부르고, 다음에 “글 서 書”자를 부르고, 그 다음에 “뫼 산 山”자를 불렀으며, 마지막에 “질그릇 도 陶”자를 쓰게 하였다.

한석봉은 순서대로 ‘원’자, ‘서’자, ‘산’자를 쓰고 나서 급기야 선조가 ‘도’자를 부르자,

‘아하. 이거 내가 도산서원 현판을 쓰는 구나’하고 알아차렸다.

한석봉은 자신이 도산서원 현판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가슴이 두근대는 중에 붓을 떨며 마지막 ‘질그릇 도 陶’자를 완성하였다. 그래서 도산서원 현판 글씨가 약간 비뚤어져 있는 것이라 한다. 』


   퇴계선생의 문인인 조선 중기의 문신 지산(芝山) 조호익은 이황 선생의 학적ㆍ지위를 매우 적절하고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주자가 작고한 뒤, 도(道)의 정맥은 이미 중국에서 두절되어 버렸다. 퇴계는 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하였다. 조선에서는 감히 견주어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이황이 이처럼 마음이나 인간의 내면에 대한 철학적 해명에 관심을 둔 데에는 당대의 철학적 사조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려면 도덕성 회복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전제된 것이었다. 당대뿐 아니라 앞 시대 집권세력에 의해서 자행되던 정치 사회적 비리나 폐단을 목격한 상황에서 그가 제시한 해답이라 하겠다.

이황의 이상과 같은 학문적 또는 사회적 활동은 비리와 부패로 점철된 시대를 청산하고 도덕적으로 완성된 사림에 의해 주도되는 사회로 나아가려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퇴계의 학문은 당대뿐 아니라 이후 조선 사회에서 상당한 파급력을 가지며 확산되면서 이른바 ‘퇴계학파’라는 조선조 학파의 큰 맥을 형성하였다. 비록 이후 시기 그의 문인이나 후학들이 정치적으로 당대 주도세력과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여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학문은 대부분 논자들이 성리학의 정수로 인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 문집이 일본에 유입되어 일본 내 주자학의 주류로 자리매김하였다. 오늘날 퇴계에 대한 연구는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일본과 대만, 미국, 중국 등 국경을 초월해 이루어지고 있다. 아마도 그가 탐구하려고 하였던 큰 주제가 인간의 보편적 본성에 대한 것이기에,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퇴계선생께서는 자신이 지으신 매화시(梅花詩) 91수를 모아 《梅花詩帖(매화시첩)》이라는 시집을 유묵으로 남기셨다. 매화시는 모두 75제 107수(시첩 62제 91수)로 단일 소재로는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매화는 세속의 티끌 한 점 없는 맑고 깨끗한 마음과 더러운 풍속에 굴하지 않는 절개와 봄날 같은 희망을 상징하는 꽃으로 많은 문인들이 달과 함께 맑고 깨끗한 시로 표현하기에 적절한 소재로 인식되어 왔다. 또 매화를 좋아하는 이유로 혹독한 겨울을 이기고 제일 먼저 꽃망울을 틔워 봄이 왔음을 알리는 봄의 전령사로서 사랑하기도 하였다.

퇴계는 특히 절우(節友). 곧, 매화 梅ㆍ난초 蘭ㆍ소나무 松ㆍ대나무 竹ㆍ국화 菊) 중에도 유독 매화를 가장 사랑하였다. 매화로써 적막함을 달랬고, 매화를 찾는 것을 신선과 봄과 같이 여겼으며, 돈독하게 좋아하는 정은 가까운 벗과 같이 친하였고, 사모하는 마음이 일일이 여삼추 같았으며, 어느 때고 관심이 식은 적이 없고, 조급할 때나 위태로울 때에도 매화를 잊지 않았으며, 매화를 읊음은 심사를 의탁하였다.

선생께서 임종직전에 본인의 불결한 모습을 매화분재에게 보이기를 싫어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 하시고,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매화분재에 물을 주라”였다고 한다.



“매형에게 불결하면 내 마음이 미안해서 그렇다 / 於梅兄不潔 心自未安耳(어매형불결 심자미안이)”


   본인의 추한 모습으로 인하여 매화도 추해질 것을 걱정하였고, 운명 직전에 주위사람들에게 매화분에 물을 주라고 하였으니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까지 매화를 잊지 못하였다고 한다.

   퇴계 선생의 시 연구의 권위자인 대만의 왕소 교수는,

“선생께서 시에 관하여 읽지 않은 것이 없는듯하여 지극히 광범위하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나 ‘주로 도연명의 감정, 두보의 품격과 규칙, 소동파의 아름다운 말씨, 주자의 사상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사람의 감정이란, 사랑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함이 즐겨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도연명ㆍ두보ㆍ소동파에 대한 태도는 좋아하고 사랑할 뿐이지만 주자에 대하여는 사랑할 뿐 아니라 좋아하고 즐겨하기에 조금도 권태로움이 없이 평생 한결같으셨다”고 하였다.


   조선 중기의 문신 상촌(象村)신흠은,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즉, 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고 하였다. 옛 문인들의 시문에 매화가 자주 등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매화의 그런 곧은 절개를 인간은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다.

지금도 퇴계 선생이 노년을 보내신 도산서원의 후원에는 잘 생긴 매화나무가 그득 하다. 선생의 매화시를 몇 편을 소개하며 오늘의 [최기영의 세상이야기]를 갈무리하고자 한다.


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이 차가운데 / 獨倚山窓夜色寒(독의산창야색한)
매화나무 가지 끝엔 둥근 달이 오르네 / 梅梢月上正團團(매초월상정단단)
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도 이니 / 不須更喚微風至(부수경환미풍지)
맑은 향기 저절로 뜨락에 가득 차네 / 自有淸香滿院間(자유청향만원간)

몇 해 전엔 돌아와 향기 맡아 기뻐했고 / 往歲行歸喜裛響(왕세행귀희읍향)
지난해엔 병석을 털고 다시 꽃 찾았다네 / 去年病起又尋芳(거년병기우심방)
어찌 이제 와서 차마 서호의 절경을 / 如今忍把西湖勝(여금인파서호승)
우리 비옥한 땅 바쁜 일과 바꿀 손가 / 博取東華軟土忙(박취동화연토망)

늦게 핀 매화가 참됨을 다시 알아선지 / 晩發梅兄更識眞(만발매형경식진)
이 몸이 추위를 겁내는지 아는지 / 故應知我怯寒辰(고응지아겁한신)
가련 하구나 이 밤에 병이 낫는다면 / 可憐此夜宜蘇病(가련차야의소병)
밤이 다가도록 달과 마주 하련만 / 能作終宵對月人(능작종소대월인)







▲ [글. 한림(漢林)최기영 선생]



2015.02.20 | 한국정경신문







雨中賞蓮(우중상련) 빗속에서 연꽃을 보며


畵樓東畔俯蓮池(화루동반부연지) 그림같은 누각 동쪽에서 연못을 굽어보며

罷酒來看急雨時(파주래간급우시) 술자리 파하고 내리는 소나기를 바라보니

溜滿卽傾欹器似(류만즉경의기사) 연잎이 젖혀질 때는 기울어진 그릇 같고

聲喧不厭淨襟宜(성훤불염정금의) 빗소리 요란해도 싫지 않아 옷깃 여민다네.


朝鮮 李滉(이황:1501~1570) 字는 景浩(경호), 號는 退溪(퇴계),陶叟(도수),

退陶(퇴도), 諡號는 文純(문순)의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