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17. 16:21ㆍ美學 이야기
한국 조선 미술 1st hour: Landscape Painting, An gyeon, Kang Hui-an
조선 초기 미술: 산수화, 안견과 강희안
조선시대 회화는 회화가 변한 시점을 따라 전기 1392-1550, 중기 1550-1700, 후기 1700-1850, 말기 1850-1910로 나눈다.
1. 미원계회도(薇垣契會圖), 가장 오래된 계회도 1540
풍류를 즐기고 친목을 도모하는 문인들의 모임을 그린 계회도로, 크기는 가로 49㎝, 세로 57㎝이며 누가 그렸는지는 알 수 없다. 화면 윗부분에 ‘미원계회도(薇垣契會圖)’라는 제목이 적혀 있는데, 미원이란 사간원을 일컫는 말로 사간원의 계회장면을 나타낸 것이다. 중간에는 산수를 배경으로 계회의 모습이 조그맣게 묘사되었다. 근경에는 소나무 두 그루가 언덕 위에 있고 아래쪽에는 계회를 열고 있는 모습이 보이며 그 뒤로 산봉우리를 배치하였다. 왼쪽으로는 강에 배 한 척을 띄워 운치와 시정을 자아내고 있다. 하단에는 계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관직, 성명, 본관 등을 기록해 놓았으며 그림 위쪽으로는 성세창의 글이 있어 중종 35년(1540)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오른쪽으로 치우친 편파구도를 하고 있다. 산수의 배경이 화면 대부분을 차지하고 계회의 모습이 작게 상징적으로만 나타나 자연을 중시하던 당시의 풍조가 엿보인다. 현전하는 국내 계회도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16세기 중엽 유행하던 안견파의 화풍과 계회도의 제반형식을 잘 나타낸 작품이다. 전기에는 산수가 중심으로 나타나고 글씨가 많고 사람이 작게 나타난다.
독서당 계회도
조선 선조 3년경 문인관료들의 연구소인 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던
문신들의 계회를 기념하기 위해 그린 기록화이다.
연정계회도 16 세기 중엽
16세기 중엽에 제작된 작가미상의 기록화이다. 이 작품은 계회장면을 제외한 상단과 하단 부분이 잘려나간 상태로 계회의 구체적인 내용과 참석자들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연못가의 전각 안에 7명의 선비들이 음식상을 받고 앉아 계회를 갖고 있어 '연정계회도'로 부르게 된 것이다.중단의 계회 장면을 살펴보면, 먼저 화면 하단으로 연못이 있고 그 오른쪽 위로 계회가 열리고 있는 전각이 그려져 있다.전각 안에는 일곱 명의 참석자들이 원을 그리며 앉아 있으며 그 오른쪽으로는 여인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산수의 비율이 약하고 사람이 중심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기록화는 실용 목적으로 사대부 친목 모임 기록으로 참가한 자들의 이름이 실리거나 왕실의 assembly 기록용으로 쓰인다. 전기에는 산수가 중심이지만 중기에 와서 인물에 비율을 맞추어 산수가 뒤로 물러난다.
조선전기의 미술학풍
1. 곽희파(이곽파) 학풍
북송대의 이성과 곽희에 의한 학풍으로 강북지역의 험하고 스산한 겨울풍경을 묘사하기 위해 해조묘법을 많이 쓴다. 산수는 거대하고 사람의 모습은 거의 없다.
전칭 (attributed to) 이성 918-968, 청만소사도, 북송초
사대부 이성의 그림이라고 추정되어 attribute to 가 앞에 붙는다. Hanging scroll 로서 그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곽희 1008-109, 조춘도 1072, 북송
이성의 그림을 따라서 곽희가 전형화 스타일을 만들었다.
운두준법
붓을 옆으로 뉘여서 구름이 쏟아지는 것 처럼 그리는 준법이다. 중국의 북쪽 지방의 울퉁불퉁하고 험한 바위, 나무를 그리는 방식이다.
해조묘법
북송의 입사귀 없는 나무를 게의 뾰족한 손 모양처럼 그리는 곽희파의 방식이다. 곽희는 화원의 높은 벼슬을 지냈고 임천고지 The Loaf Message of Forest and Streams 라는 책을 썼는데 산수의 훈령에 대한 chapter 산수훈에서 포유어간(절기에 따라 매 순간 변하므로 산에 들어와 살면서 산의 사계절을 면밀히 관찰한 후에 그려야 함) 을 주장했다. 또한 산수를 그릴 때 삼원법이 있는데 고원은 밑에서 위를 보는 시점, 심원은 위에서 내려다 보는 시점, 평원은 수평상태의 시점으로 거리감을 나타내는데, 이 세가지 시점이 곽희의 그림에 다 함께 나타난다.
2. 마하파 학풍
남송의 화원 화가인 마원과 하규에 따른 풍으로 곽희파는 강북지역의 거대한 산수를 그리지만 마하파는 남송의 온화한 기후의 나즈막한 산, 안개에 싸이고 물이 많은 강남의 풍경을 주로 그리며 변각구도에 의한 시적인 분위기에 부벽준을 즐겨쓴다.
마원, 산경춘행, 12세기말-13세기 초
한쪽으로 밀어부친 일각, 변각 구도이며 여백을 남겨놓아 인간이 사색하는 분위기를 준다.
하규, 계산청원도, 남송
마원과 하규는 남송의 도화원의 화원이다. 중국 남쪽의 강남지역은 산이 둥글고 물이 많아 위와 같은 그림이 나타난다. 각도는 일각(변각)구도 one corner composition로서 한 부분에 point 를 주고 멀리 보이는 원경을 suggest 하고 있다.
양팽손 1488-1544, 산수도 1521-1545
곽희파 그림이기도 하면서 마하파의 일각구도를 따랐다.
이상좌 (전칭), 송하보월도 15세기 말
꺽인 소나무와 점같은 사람이 보이며 마하파 구도이다.
부벽준
곽희파는 붓을 찍어서 도끼처럼 그리는 방식을 많이 쓴다.
3. 미법 산수화풍
북송대의 미블과 미우인 부자에 의힌 학풍으로 미점을 사용하여 비가 온듯한 안개낀 자연 묘사를 효과적으로 한다.
최숙창 산수도
최숙창, 서운보는 15세기 후반 조선 중기의 화원인데 사대부 미블 Mifu 부자의 화법 영향을 그대로 받아 전형화된 느낌이 나타난다.
미점준은 점을 찍어 산, 바위가 마치 안개에 쌓인듯 표현하는 준법으로 우점준과 비슷하며 미법산수화에서 쓰는데 곽희파가 유행하던 시기에 새로운 스타일로 등장했다.
4. 안견 몽유도원도 1447
<몽유도원도>는 세종 29년 1447년 4월에 안견이 그린 그림으로, 가로 106.5cm 세로 38.7cm 의 대작이다.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에게서 꿈에서 본 도원 이야기를 들은 안견이 사흘 만에 그린 작품으로, 거의 남아있지 않은 조선 초기 회화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어느날 안평대군은 도연명이 쓴 도화원기를 읽는다. 정치의 풍파를 피해서 이상향인 도원에서 산다는 내용을 읽은 안평대군은 도원의 풍경을 상상하다가 잠이 드는데 박팽년과 같이 몽유도원에 가서 거니는 꿈을 꾼다. 꿈의 내용을 안견에게 말해주고 그리게 한다.
몽유도원도는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는데 왼편에는 현실세계의 일상 마을이 있고 가운데는 깎아지른 절벽과 무릉도원으로 가는 동굴 등 험난한 길이 이어지고 오른쪽에 복숭아 나무가 많은 마을인 무릉도원이 나타난다. 몽유도원도는 Hand scroll 이며 그림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전개되고 어부, 사람, 개가 등장을 한다. 첫번째 입구를 지나고 강을 건너 두번째 입구가 나오는데 현실 세계의 산림이 치솟아 있고 계속 가면 산악으로 둘러싸인 복숭아도원이 나오고 하늘에 달려있는 듯한 동굴도 보인다. 복숭아 나무는 분홍색이며 잎은 금박이었지만 지금은 색이 다 사라지고 없다. 곽희파에 가까운 울퉁불퉁한 산수이며 중국 산수의 영향을 받았지만 똑같다고 할 수 없다. 그림을 부탁한 patron 인 안평대군과 꿈 속에 함께 있었던 박팽년이 그림에 보이지 않는다.
안평대군은 평소에 안견을 좋아하여 옆에 두고 자신의 collection 을 보여준다. 그러나 안견은 안평대군이 정치적으로 불리해지자 그와의 인연을 끊기 위해 중국에서 가져온 안평대군의 귀한 먹을 일부로 훔쳐서 그의 눈밖에 나는 행동을 하여 안평대군과 사이가 멀어진다. 안평대군과 그의 주변 인물이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할 때 안견은 유일하게 살아남는다. 안견은 모방을 아주 잘했는데 몽유도원도는 곽희파와 비슷하지만 안견의 독특한 스타일이 가미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몽유도원도는 19세기 말부터 일본에서 소장하고 있다.
안견의 작품 중 진위가 가장 확실하게 밝혀진 그림인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의 발문과 찬시 그리고 신숙주, 박팽년 등 당대의 명현 21명의 찬시가 붙어 있다.
진나라 태원(太元) 연간 (376~396)에 무릉(武陵)에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이 살았다. 어느날 내를 따라 가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갑자기 복사꽃 숲을 만나게 되었다. 냇물 양편 기슭은 수백 보에 걸쳐 복숭아나무 이외에는 잡나무가 일체 없고, 향기로운 풀들만이 산뜻하고 아름다우며 떨어지는 꽃잎들이 펄펄 날리고 있었다. 어부가 매우 이상히 여겨 복사꽃 숲이 끝나는 곳까지 가 보았다.
숲이 끝나는 곳에 물이 흐르고 산 하나가 나타났다.
그 산에는 조그마한 굴이 있는데 그 뒤에서 빛이 비치는 듯 하였다. 곧 배를 버리고 굴을 따라 들어가는데 처음은 아주 좁아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으나 수십 보를 가니 확 뚫리며 밝아졌다.
땅은 평평하고 넓으며, 집들이 뚜렷하고, 좋은 밭과 예쁜 연못, 줄지은 뽕나무와 대나무 등이 있었다. 길은 사방으로 뚫려 있고,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서 왔다갔다하며 씨 뿌리고 농사짓는 남녀의 옷 모양새는 모두 다른 세상 사람들 같았는데 노인이나 아이나 모두 기쁘고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어부를 보고 놀라며 어디서 왔는가를 묻자 어부가 사실대로 대답하였더니 집으로 데려가서 술을 내고 닭을 잡아 음식을 대접하였다. 온 마을 사람들이 어부가 왔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왔는데 그들 스스로 말하기를, "옛 조상들이 진나라 때의 난을 피하여 처자와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이 절경에 와서는 다시 나가지 않았소. 그래서 결국 바깥 세상 사람들과 영영 멀어진 것입니다."하면서 요즘은 어떤 세상이오?" 하고 물었다. 한나라가 있었던 것도 모르니 위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부가 일일이 들은 바를 말하니 모두들 놀라고 탄식하였다.
그 후 다른 사람들도 각각 자기 집으로 청해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이렇게 며칠을 머물렀다 떠나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바깥 사람들에게는 얘기하지 마시오"하였다. 그러나 어부는 밖으로 나와 찾아온 길을 되짚어가면서 곳곳에 표시를 해두었다.
군에 이르러 태수를 뵙고 이 같은 사실을 말하였다. 태수는 사람들을 보내 표시를 찾도록 했지만 끝내 그 길을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 남양에 사는 유자기라는 사람은 고상한 선비다. 이 얘기를 듣고 기꺼이 도원을 찾아보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한 채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죽었다. 그 뒤로는 그곳으로 가는 길을 묻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전칭 (Attribute to) 안견, 소상 팔경도, 화첩 15세기 중기
사계절을 8 scenes 으로 나누어 그렸다.
5. 강희안 1419-1464, 고사관수도 15세기
남종문인화의 영향을 받고 절파의 그림을 따라서 더욱 단순해졌다. 학자의 meditation 을 나타내는 사대부화이며 일필휘지로 그리는 calligraphy 처럼 묵에 힘을 주어 글씨를 쓰듯 그림을 그린다. 안견과 더불어 강희안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6. 강희맹 1423-1483, 독조도, 15세기 중엽
강희맹은 강희안의 동생으로 두 사람 다 절파에 속한다. 배타고 나가서 사색을 하는 장면으로 나무를 해조묘법으로 그렸다.
한국 조선 미술 4th hour: Late Joseon, Landscape Painting, Jeong Son 조선 후기 회화 산수화 1700-1850, 겸재 정선
조선 전기 중기의 학풍
1. 곽희파
곽희 (조춘도1072) 안견 (몽유도원도1447)
조선 중기까지의 미술의 화풍은 곽희파, 마하파, 미법산수, 절파로 크게 나뉜다. 조선 초기에는 북송의 웅장한 산수를 묘사한 곽희파가 주류를 이루는데 중국 강북 지방의 추운 곳의 나무 모양을 게의 뾰족한 손처럼 그리는 해묘법과 산과 바위를 구름처럼 그리는 뭉굴뭉굴한 운두준법을 사용했다. 조선 초기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곽희파를 따랐지만 바위 묘사가 평면적 추상적이며 부드럽다는 점에서 안견의 독창성이 가미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미법 산수
최숙창 (산수도15세기 후반) 이정근 (미법 산수도16세기)
북송의 미불 부자가 시작한 미법 산수는 점을 찍어 안개에 싸인듯한 산수를 표현하는 미점준법을 쓰며. 조선 중기의 최숙창, 서운보가 이를 따라서 그리는데 판에 박은 듯 독창성이 별로 없다.
3. 마하파
마원 (산경춘행 12세기 말), 양팽손 (산수도16세기)
남송의 물이 많고 산세가 완만한 강남을 중심으로 마원과 하규가 시작한 마하파는 한쪽으로 치우친 일각구도, 사색적인 분위기의 여백, 도끼로 꺽은 듯한 부벽준법을 사용한다. 조선 초기의 양팽손이 일각구도를 따라 그린다.
4. 절파
강희안 (고사관수도 15세기), 이경윤(고사탁족도16세기 말)
사대부 문인화 (남종화)를 따르면서 절파 학풍을 가미한 조선 초기의 강희안은 중기 절파 화가들의 시조격이다. 마하파의 학풍을 이어받고 명나라의 대진, 오위의 화풍을 따르는 절파는 인물 중심으로 사대부가 일필휘지의 글씨를 쓰듯 그린다. 조선 중기의 김시, 이정근은 강희안의 절파를 이어가며 중기의 특징은 화가들이 특정 학풍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화풍을 가미하여 섞어서 그렸다는 점이다.
조선후기 1700-1850, 정선 1676-1759
조선 후기에 들어와 겸재 정선이 나타나 조선의 독자적 화풍인 진경산수를 수립한다. 이전의 화가들은 중국의 산천과 화풍을 그대로 그렸으며 한국의 산천을 그리되 방법은 여전히 중국의 준법을 사용하는 실경산수를 그렸다. 당시의 사대부들은 중국적인 모습을 당연시 하였는데 겸재가 subject matter 를 조선의 산수로 바꾸며 창의적인 준법을 개발하고 화가의 이념을 담아내어 그리는데 이를 진경산수라 한다.
정선의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이며, 가세가 몰락한 한미한 양반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고, 그 재주 때문에 관료로 추천을 받았다. 당시 노론의 거두 김수항의 아들인 김창집 형제의 도움으로 벼슬길에 올라 양천 현감 등 화가로서는 파격적인 높은 벼슬을 지냈다. 그는 또한 예술을 사랑하는 당대의 유명한 문인들과도 긴밀한 교유를 하였는데, 이들과의 사귐은 그의 회화 세계를 넓히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의 산천을 소재로 하여 그리는 진경산수를 그는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필묵법으로 화면에 담아내었다. 강한 직선의 수직준법, 대담한 산형의 변형, 굵은 미점 등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자연미의 특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었다. 그는 어느 화가보다 많은 작품을 남겼고, 후대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정선, 신묘년풍악도첩 중 장안사 1711
정선이 30대에 최초로 금강산에 가서 그린 13점의 그림을 신묘년풍악도첩이라 하며 점묘법과 수직준법이 나타난다.
정선, 신묘년풍악도첩 중 단발령 망금강 1711
단발령은 금강산 입구의 산으로 올라서서 보면 경치를 보면 머리를 깍고 속세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하여 단발령이라 부른다. 원경은 수직이며 금강산을 환상의 산으로 묘사했고 자신의 본 이미지의 효과를 증대하기 위해 산을 단순화시킨다.
정선, 해악전신첩 중 단발령 망금강 1747
1712년에 두번째로 금강산에 가서 그린 해악전신첩의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70이 넘어서 세번째로 금강산을 가서 해악전신첩을 다시 만든다. 단발령에서 본 금강산으로 미점준법을 많이 썼다. 묘사가 상세하고 숙련되어 보인다. 겸재의 금강산도가 나오면서 선녀와 나무꾼이 사는 금강산이 몽유도원도의 역활을 한다.
정선, 금강산전도
겸재 이전에는 조선의 화가들이 중국식의 준법을 따르면서 조선의 산수를 실제로 보면서 그렸는데 이를 실경산수라고 한다. 겸재는 독특한 방법을 개발해서 그림의 내용도 묘사도 한국적인 스타일로 그린다. 금강산도의 뒤쪽은 단순히 정선의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서 현실을 넘어선 세계로 surrealism 나타난다. 화가의 관념, 개념이 그림에 들어가며 겸재는 조선의 진경산수를 확립시킨다.
정선, 여산폭포
정선의 사실적인 묘사법인 수직준법이다. 삼을 늘어뜨린 듯한 피마준도 보이고 나무는 점을 찍어 묘사했다. 후기작으로 그림이 무르익어 보인다.
정선, 설경산수도 1719
겸재의 후기에는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이 남종화를 쫒아서 그렸는데 겸재의 그림도 시적 운치가 짙은 남종화와 비슷해지고 겸재의 원래 스타일이 없어진다. 겸재 정선이 44살 때 그린 사계산수첩 가운데 겨울 설경인데 나트막한 산자락과 강가에 빈 누각이 보이며 성긴 가지의 나무 몇 그루가 있다. 오른쪽 산에 보이는 피마준법이 보인다.
정선, 인왕제색도 1751
정선의 후기 작품으로 백악산 (인왕산) 밑으로 이사를 가서 그린 그림이다. 1751년에 친구 이병련이 세상을 뜬 슬픔으로 바위가 어두워 보이며 남종화 스타일에 가까워지며 날카로움이 없어지고 부드럽다.
정선, 박연폭포 18세기
초기의 금강산도는 수직방향의 수직준법이 나타났지만 후기의 박연폭포는 정선 나름의 해석이 들어간 추상화같은 느낌을 준다.
정선, 비로봉도
겸재의 말년 작품으로 사실적인 묘사를 넘어서고 화가의 관점이 확연히 나타나는 추상화의 느낌이 진하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수도원장 이형우 아빠스)은 한국 파견 100주년을 맞아 2009년에 왜관수도원 성당 지하전시실에서 열리는 100주년 기념전시회 중 '화종(畵宗)'으로 불린 겸재의 화첩을 공개했다. 당대에 '화종(畵宗)'으로 불린 겸재의 화첩은 원래 1925년에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연합회 초대 수석아빠스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 가 국내에 4개월간 체류하던 중 입수, 독일로 가져갔던 걸작들로, 국외에 반출된 지 80년 만인 2005년에 한국에 돌아왔다.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수도원장 예레미야스 슈뢰더 아빠스)은 크리스티와 같은 미술품 경매업체의 집요한 경매 권유를 뿌리치고 2005년에 한국의 수도형제들(왜관수도원)에게 영구임대 방식으로 돌려주였다.
화첩 2개 면에 걸쳐 그려진 '금강내산전도(金剛內山全圖)'(55×33㎝)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23~25×28~30㎝ 정도의 소품들로 화첩의 오른쪽 면에만 그림이 실려 있다. 겸재 작품은 화첩에 묶여 있어 한 쪽씩 넘겨가며 선보이며, 21폭 전작은 영인본으로 공개된다. 겸재의 진경산수화 7점과 관념산수화 4점(송학도 1폭 포함), 고사인물화 10점 등 총 21점이 실려 있을 뿐 화첩 내력을 담은 발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작품에 겸재 낙관(落款)이 찍혀 있고, 화첩 표지에는 수도원 소장 사실을 알려주는 도장이 찍혀 있을 뿐이다.
산수화의 준법
산이나 돌의 주름을 표현하는 붓자국, 필촉, 터치, 산이나 돌의 질감, 양감, 명암 등이 표현된다.
① 피마준 : 삼을 가지런히 펼쳐서 훑어 놓은 모양으로 표현하는 준이다.
(같은 방향으로 평행하게 부드럽게 긋는 선)
② 부벽준 : 도끼로 나무를 직은 자국과 같은 효과의 준이다.
③ 하엽준 : 연잎의 잎맥 모양으로 형세를 표현하는 준이다.
④ 절대준 : 바위를 쌓아 놓은 듯이 그리는 준이다.
⑤ 미점준 : 쌀알 모양의 작은 점이다.
⑥ 우점준 : 빗방울 모양의 작은 점. 작은 산이나 언덕을 그릴 때 쓰인다.
⑦ 우둔준 : 산보우리를 구름으로 휘감아 올리듯이 그리는 붓자국이다.
⑧ 해색준 : 끈을 풀어 놓은 것 같은 붓자국이다.
⑨ 마아준 : 말의 이빨처럼 뾰족한 붓자국이다.
① 피마준 ② 부벽준
③ 하엽준 ⑤ 미점준
blog.daum.net/wongis/7090752 그 어느날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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