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환의 文響 - 22 은제도금 참외모양 병 (銀製鍍金蓮花折枝文瓜形甁)

2016. 2. 17. 18:00美學 이야기



      

왕실의 특별한 의미를 담은 화려하고 세련된 은각 곡선미

김대환의 文響 - 22 은제도금 참외모양 병 (銀製鍍金蓮花折枝文瓜形甁)

2016년 01월 12일 (화) 16:03:20김대환 문화재평론가 editor@kyosu.net




   이 은병으로 고려인들이 추구한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참외모양병을 알 수 있게 됐다. 은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몸체의 변형이 없이 장인이 생각한 최적의 참외병 모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 사진1 은제도금 연화절지문과형병 
 

   2016년 丙申年 새해를 맞이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중요한 해외 還收 문화재 한 점을 최초로 공개한다(사진①).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은제도금 참외모양 병(銀製鍍金蓮花折枝文瓜形甁)’이다. 몸통은 참외모양이고 입구는 참외에 달려있는 꽃모양이며 銀甁아래 부분의 굽 받침은 주름치마처럼 접혀있다. 이런 형태의 甁은 고려시대 전 시기에 걸쳐 靑磁로 많이 만들어졌으며 ‘靑磁瓜形甁’이라 불린다. 현존하는 유물도 국내외 여러 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瓜形甁’이 銀으로 만들어진 사례는 처음이며 질적 수준도 국가지정문화재급이다.


   고려시대의 金屬器는 陶磁器와 같은 시기에 병행해 만들어졌으며 종류도 다양해 병, 정병, 주전자, 향로, 대접, 잔 등이 있으며 靑銅으로 만든 기물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왕실에서 사용하는 특별한 경우에 한해 금이나 銀製鍍金, 은을 사용해 화려하고 세련된 작품을 제작,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①)의 銀甁은 고려왕실의 御器로 추정되며 높이는 18.5cm이고 바닥지름과 입지름은 각각 8cm이다. 알맞게 피어난 꽃의 입부분과 몸체에 비례한 두께의 유려하게 뻗은 목선은 여덟 골의 몸통과 정연하게 주름 잡힌 굽의 높이와 조화를 이뤄 안정감 있고 세련된 자태를 품고 있다. 몸통의 연꽃문양은 은의 인장력을 활용해 陽刻의 효과를 주는 打出技法과 그 위에 섬세하게 표현하는 毛彫技法으로 조각해 고려시대 금속세공기법의 정수를 볼 수 있다. 몸통의 각 면마다 가운데 커다란 연꽃을 중심으로 작은 연꽃 두 송이와 한 개의 연밥을 정교하게 새겨 넣었다. 그러나 어깨와 굽 부분에 蓮瓣文이나 如意頭文과 같은 從屬文樣은 없고 오로지 蓮花折枝文을 주문양으로 사용했다(사진②).


  
   
 

     얇은 銀板을 단조해 만든 병으로 몸통과 목, 굽의 세 부분으로 구분되며 각기 별도로 제작해 문양을 조각한 후에 접합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몸통에서 목과 굽으로 이어지는 경계에는 볼록한 단을 만들었으며 목의 중앙부분에는 두 줄의 陰刻線을 둘렀다. 일정한 간격으로 곧게 주름이 접힌 굽은 바닥면으로 내려오면서 넓어지며 이 은병의 안정감을 높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은병의 전신에는 일정한 두께의 얇은 鍍金이 아직도 잘 남아있는데 아말감도금법(fire gilding)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아말감도금법은 금을 수은에 녹여서 아말감을 銀甁의 표면에 바르고 열을 가해 수은이 氣化돼 없어지면서 금이 銀甁의 표면에 흡착돼 남는 방법이다. 일정한 두께의 도금 상태로 보아 상당히 높은 수준의 鍍金技術을 확인할 수 있다(사진③). 銀甁에 화려하게 도금된 황금의 빛깔이 농익은 참외를 연상케 한다.



  
 ▲ 사진4 은병의 바닥과 입부분 


   고려시대 왕실용 金銀器를 제작하던 掌冶署의 숙련된 장인이 제작한 것으로 생각되며 왕실의 儀禮用이거나 생활용구로 사용됐을 것이다. 다만 이 은병의 크기로 보아 생활용구에 더 근접하게 보인다. 만약 의례용이라면 좀 더 크게 만들었을 것이다. 고려시대 제작된 金銀器는 고가의 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매우 한정된 수량과 한정된 크기로 제작될 수밖에 없었고 현존하는 유물도 극히 드물다(사진④~⑤).





  
 ▲ 사진5 은병의 바닥과 입부분 

   고려시대 靑磁로 제작된 참외모양병(靑磁瓜形甁)은 인종 장릉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靑磁瓜形甁(국보 제92호)’를 비롯해 국내외의 여러 기관에 소장돼 있다(사진⑥). 그러나 같은 종류의 靑磁瓜形甁이지만 형태는 조금씩 달라서 이 瓜形甁의 기준작을 정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병의 목이 신체에 비해 두껍거나 얇고 몸통이 크기에 비해 길거나 짧기 때문이고 굽의 높이도 유물마다 각기 다르기 때문이었다. 또한 도자기의 특성상 燔造 후에는 30%정도 몸체가 수축이 돼서 변형이 생기기 때문에 처음 생각했던 대로 병이 만들

  
   

어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연구자마다 보는 시각차이 때문에 고려인들이 추구하던 참외모양병(瓜形甁)의 진정한 모습은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은병의 출현으로 당시 고려인들이 추구한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참외모양병(瓜形甁)을 알 수 있게 됐다. 은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몸체의 변형이 없이 고려 장인이 생각한 최적의 참외병 모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잊혀진 문화재를 찾아내는 것은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하는 것과도 같다. 문화재를 소장한 기관이나 개인은 중요한 문화재가 死藏되지 않도록 노력할 책임이 있으며, 연구자들은 그 문화재를 밝혀내어 올바른 평가를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 필자 역시 새해에도 국내외의 밝혀지지 않은 우리 문화재를 찾아내어 후손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끝으로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이 은병의 연구를 위해 도와주신 해외의 知人에게 敬意를 표한다. 

 

 

 

  
   

김대환 문화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