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서화(詩書畵), 달관(達觀)의 경지(境地)

2016. 2. 18. 06:14美學 이야기



       김남수| ·‥‥미술평론

삼석도인 | 2010.11.15. 18:18


시서화(詩書畵), 달관(達觀)의 경지(境地)

김남수 (미술평론가)



   한국화에는 많은 장르와 예술양식이 있다. 전통과 현대가 있고, 구상과 추상이 있고, 양식과 재료에서 수묵과 채색, 담묵과 채묵 등 표현상의 다양성이 있고, 기법상으로는 발묵, 갈필, 파필과 파묵 등 수십 가지의 형태가 있다. 물론 쓰여지는 재료에 따라 그 이름은 또 달라진다. 그러나 한국미술의 장르 가운데 크게 대별을 하면 회화, 문인화, 서예로 나눌 수 있다. 얼핏보면 회화문인화는 그림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화목(畵目)에 해당되고 서예는 따로 서목(書目)으로 분류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지금 현안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서예에서 한국문인화의 분리, 독립성 문제는 기득권을 사수하려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이러한 정신과 체력의 소모전이 아닌가 싶다. 창작을 하는 예술가라면 예술인으로서의 덕망과 양식을 갖추어야 하지 않나 싶다.  흔히 우리는 문인화가를 두고 시서화에 삼절한다고 한다. 아니 이는 모든 문인화가들이 염원하고 희구하는 최후의 바램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인화가가 되는 것은 모든 이의 희망 사항이지만 결코 그 뜻을 이루기란 하늘에 별따기 만큼이나 힘들고 어렵다. 한국미술의 장르 가운데 문인화만은 시서화에 능해야 된다는 것은 선배들의 불문율 같은 것이다.


   문인화의 발상동기가 서화동원(書畵同源)이라는 원리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며, 옛날 선비나 문인, 사대부들이 글씨를 쓰고 남은 먹을 여기(餘技)로 문인화를 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문인화를 낙묵화(落墨畵)라고도 했고, 동양미술에서 추상의 효시라고도 설명이 가능했다. 묵란(墨蘭), 주죽(朱竹), 적송(赤松), 취월(翠月)등이 모두 심의적(心意的)이고 사의성(寫意性)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보면 문인화는 회화보다 훨씬 상층구조에 있으면서 문인화를 치는 이의 고차원의 정신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인화는 20세기를 종언하는 세기말적인 시점에서 관찰해 보면 엄청난 변화를 거듭해 온 것이다.


   당(唐)의 왕유, 명의 동기이나 팔대산인, 석도, 양주팔괴, 청말의 제백석, 오창석 작품의 모방이나 답습이 지난 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는 그 전철을 밟고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에도 조선조 후기의 문인사대부 강표암, 강희안, 강희맹, 추사 등 훌륭한 작가들이 있었지만 분명한 맥을 이어오지 못하다가 현대에 오면서 월전, 의재, 산정, 남정, 일랑, 행보 등 원로들이 한국문인화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그러나 그 후예들의 문인화의 현대화작업은 금석지감을 실감할 만큼 큰 변화를 하고 있으며 그 진폭은 너무 큰 것이어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체험하는 시점에 와 있다.문인화의 현대화를 표방한 작가의 한사람이 홍석창이다.


   그는 한국화를 비롯한 동양회화의 모든 예술양식을 포괄적으로 추구하고, 탐구하면서 자신의 회화영역을 완성해 낸 역량있는 화가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초기 대학을 나온 후 자신의 예술을 좀더 깊이 탐구하고 심화시키기 위해 대만에 유학했으며 그야말로 서화동원의 근원을 캐기 위해 철저한 기초작업을 깊고 폭넓게 쌓았고, 가장 완벽한 튼튼한 기초를 닦았다. 그 무렵만 하더라도 추사나 제백서, 오창석 등 근대 서화기를 연구하기 위한 학문의 차원에서 폭넓게 섭렵을 한 것이 사실이다.
그에게 화(畵)와 서(書)의 우선순위를 가리기는 힘들만큼, 그는 서와 화를 동시에 연구한 예술가라고 볼 수 있다. 시서화(詩書畵) 삼위일체라는 말이 홍석창을 두고 하는 말일 수도 있다.  문인화의 현대적 해석과 새로운 개념설정이 도입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엄격히 따지자면 문인화는 있지만 문인이 없는 세상이 됐다. 그림도 그리고, 글씨도 쓰고, 동시에 시도 지을 수 있는 상황이 변화를 한 것이다.



   대학에서 문인화가 커리큐럼으로 채택되고 있고, 많은 문인화가 공모되고 있지만, 이 세가지 요건을 겸전한 작품은 오히려 고전으로 밀려나고, 떠오른 시상(詩想)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떠오른 화상(畵想)을 글씨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분방한 문인화의 자유의 미학이 지금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문인화를 전공하는 현대작가들이 비록 문인이나 선비의 신분으로 실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격과 학덕을 선망하고 있으며, 문인화 정신만은 한국 미술의 어느 양식보다도 고매하고 청윤한 예술로 창조적인 발전은 열망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작품의 작업과정에서 고결하고 담백한 맛을 내는 일필일회성의 단필로 완성하는 표현기법 등은 생명력 있는 문인화가 다른 회화와 차별성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모든 시대적인 요건을 겸전한 역량있는 작가가 바로 홍석창임을 한국미술계는 공인하고 있다. 한국화단의 중추적인 위치에서 대학과 미술계에서 한국화, 문인화, 서예 등의 스승이요, 교수로 활약하고 있는 그의 공헌은 크다.  미술평론가 오광수씨는 그의 전시평문에서 '아마도 문인화의 정신과 형식이 맞아떨어지자면 문인의 조건에 가장 상응되는 방식의 삶을 스스로 영위 할 줄 아는 사람에게 가능한 일일 것이다.


   바로 이 조건에 가장 걸맞는 사람이 홍석창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한다. 이런 여건을 과거의 문인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 할만하다' -이하생략- 라고 지적하고 있는가 하면 또한 「담백하고 자유분방한 용필, 용묵」이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문인화는 소재가 갖는 의미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지만 이에 못지 않게 용필과 용묵에 그 중요성이 내재되어 있다. 특히 청말의 문인화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 용필, 용묵의 뛰어난 방법이다. 분방하면서도 일격(逸格)의 초탈성을 잃지 않는 운필의 기운은 문인화라는 간결한 소재에 의해 그 빛을 발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石槍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소재도 대단히 간결하고 담백한 것들이다. 문인화로서의 소재를 선택한다기 보다 선택된 소재가 일필에 의해 구성되고 마무리되는 간결성에 의해 문인화적인 소재가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소재를 미리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운필에 의해 소재가 얻어지고 완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하생략-  한때 수운묵장(水暈墨章)한 일련의 작업도 용필, 용묵의 실험을 통한 작품완성을 위한 프로세스에서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지난 73년 귀국 이전 시도한 묵흔(墨痕)에 의한 점과 선과 획은 작가의 내면세계에 자리잡은 도양인의 혼과 체취를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작업이 아니었나 싶다. 그의 예술은 구상과 추상이 공존하고, 호화와 문인화, 서예가 자재롭게 융화되고 조화된 종합예술의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개인전으로는 지나 10여년간 침묵을 지켜 온 작가 홍석창은 지난해 11월 선화랑 초대전에서 일련의 테마작 <광시곡(狂詩曲)>을 발표했다.


   강렬한 색조에 생동하는 운필의 세를 보여준 이번 작품전은 원숙의 경지에 이른 작가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되며 종횡무진하고 박진감 넘치는 역량을 감득하게 된다. 활달하고 중량감있는 그의 작품세계는 깊고 두터우면서 호방하고 살아 꿈틀거리는 필치를 구사하고 있으며 한국미술의 창조적 발전에 큰 획을 긋는 발표전이 아니었나 싶다. 미술 평론가 이재언씨는 '새로운 경지의 문인화를 위한 대장정'이라는 서문평의 한귀절을 인용해 보면 '그러한 그의 작업도 이순에 가까워지면서 보다 큰 변화를 보인다. 97년 독일 프란시스 갤러리에서 가진 개인전에서의 작품에서 격렬한 필치의 화면 질서로 이행하게 된다. 과거 가지런한 운필을 마치 궤도를 이탈한 것 같은 자유분방한 난필로 자주 탈바꿈하며, 수묵과 적절한 균형 내지 조화를 이루던 운치있는 담채는 수묵과 자주 충돌하는 불협화의 짙고 거친 색의 화면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전의 절제되고 관조적인 분위기와는 판이하게 내면세계의 응어리진 감성과 충돌을 발산하고 있으며 비교적 온전한 실사(實寫)의 형태들은 추상화되거나 거의 자동 기술적인 붓질에 매몰되고 만다. <광시곡>제목에서 시사하듯 대단히 격렬하고 순간적이며 분방한 충동의 계기들이 도사리고 직감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종래의 고답적인 문인화로부터 벗어나 보다 폭넓은 해석의 변수들이 증식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작가 개인적으로는 이순을 바라보면서 이제 새로운 경지에 눈을 뜨게 되는 체험의 드러남이며, 엄격한 형식에 대한 관대하고도 자유로운 유희의 충동이 무성해지는 것에 대한 솔직한 표현일 수 있다. 때로는 작위에 대한 무위의 우성(優性)을 체험적으로 사색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변화는 시대적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한 종속변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즉 근본적인 본질의 문제가 아니며 독립적인 개체로서 분화도 아니라는 것이다. 동일한 본질과 회화정신 속에 그것의 기호와 매개들이 보다 폭넓은 영역으로 확산된 부차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사실 수많은 문화적 개체들이 충돌을 거듭하고 있는 오늘의 환경 속에서 이러한 변화는 오히려 진화(進化)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이상 홍석창의 작품세계를 요약해 보면 그는 형식과 규제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미학을 구가하는 역량있는 작가다.
수묵과 채색 등 영감만 떠오르고, 표현코자 하는 충동만 일면 무엇이나 표현이 가능한 소재와 양식을 극복한 화가다. 우리 미술의 인간주의를 주창하고 한국미술의 동질성회복에 앞장 서온 그는 무분별하게 수입된 서구문화 때문에 한 때 혼돈 속에 방황해 온 지난날의 전철이 한국미술을 퇴행케 하는 원인이 됐음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다. 이제 한국미술의 국제화에 힘입어 세계양식과의 접목, 공존을 통한 21세기 새로운 전진의 이정표가 설정되기를 기대한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작품의 성향과 순도 높은 예술성 때문에 중원대륙의 중진, 원로들과 친숙한 인간관계를 맺어 왔으며, 중국의 매스컴, Beijing Weekend, 인민일보 해외판, 북경일보, 신문주간 료망(瞭望), 화성보(華聲報), 광명일보, 중국문화보, 북경만보(北京晩報), 단결보(團結報) 등에 널리 알려져 민간 차원의 예술교류에도 엄청난 기여를 했다.



cafe.daum.net/gungnimbang/8pJV/10   문인화정신연구소





홍석창의 문인화화| 문인화 / 한국화

지산 |  2012.07.05. 08:08



정상옥| ·‥‥평론

삼석도인 |  2010.11.15. 18:22


『 홍석창展 』

Hong Suk-Chang Solo Exhibition :: Painting





▲ 홍석창, 仙果, 화선지에 수묵담채, 46 x 69cm, 2003






홍석창의 문인화

임두빈(미술평론가)

▣ 열린 미의식과 자유로운 운필의 힘


   나는 글을 쓰면서 최근에 본 홍석창의 문인화를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 먹선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사유(思惟)의 파장을 일으키며 종이 위를 유영하는 듯 하다. 원래 문인화란 시인이나 학자 등 선비들이 여기(餘技)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 직업적인 화가가 아닌 문인들에 의해 그려진 시적(詩的) 격조가 있는 그림을 말하는 것이다. 문인화의 시조는 당나라의 시인 왕유(王維)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그림은 직업화가와 달리 물감을 많이 사용하지 않아 수묵 위주의 맑고 우아한 정취가 흐른다. 소동파(蘇東坡)왕유를 가리켜 “그림 가운데 시가 있고 시 가운데 그림이 있다(畵中有詩 詩中有畵)”고 하여 왕유의 격조높은 예술세계를 찬양한 바 있다. 오늘날 문인화에 대한 생각들은 다소 모호하게 변질되어, 문인화 하면 사군자(四君子)같은 사대부들의 교양으로 여긴 화제나, 간결한 붓놀림에 내면적 정신의 세계를 담은 그림을 가리키기도 한다. 폭 넓은 독서량과 지적 깊이도 없는 화가들이 문인화를 그린다고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다. 문인화는 결코 능숙한 손놀림에 의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홍석창, 仙果, 화선지에 수묵담채, 130 x 162cm, 2003



▲ 홍석창, 淸香 Ⅱ, 화선지에 수묵담채, 46 x 21cm, 1997



   폭넓은 지식과 심오한 내면적 성찰과 맑은 심성을 뿌리로 해서 향기처럼 문인화는 그려질 수 있는 것이다. 권력에 눈이 먼 화가나, 세속적 지위에 연연하는 사람들이나,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은 절대로 그릴 수 없는 것이 문인화이다. 따라서 시중에 나도는 상당수의 문인화는 가짜요 허구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렇기에 진정한 문인화의 가치는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문인화를 감상하는 사람도 당연히 일정한 내면적 수준을 갖추어야 제대로 볼 수가 있을 터이다. 세속적 욕망의 때로 얼룩진 사람들은 절대로 문인화의 오묘한 그리고 맑고 소박한, 그러면서도 그 소박함이 고도의 세련미로 통하는 정신의 세계를 이해할 수는 없다.

   삶이라고 하는 ‘작은 집’에 갇힌 우리 인간들은 항상 무한한 세계를 작은 창문을 통해서만 바라 볼 뿐이다. 집 안과 집 밖을 연결하는 작은 창문은 우리 자신과 무한한 세계와의 사이에 놓인 유일한 인식(認識)의 통로인 셈이다. 그 삶의 창문에 먼지와 오물이 끼면 무한한 세계의 맑은 실상을 제대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깨끗한 삶의 창문을 지닌 자(者)는, 투명하게 세계를 응시할 수 있는 사람이며,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자, 여기 홍석창의 문인화가 있다. 무한한 세계의 입구에 놓인 암호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려진 듯한 홍석창의 문인화들이 우리의 앞에 던져져 있는 것이다.





▲ 홍석창, 心閑 Ⅱ, 화선지에 수묵담채, 32.5 x 46cm, 2003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그저 사심없이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그가 열어 보이는 세계로 들어갈 수가 있다. 《氣의 파동》이란 제목의 작품을 보자. 공간을 휘저으며 힘있게 그어나가 알 수 없는 형상의 파격적 출현을 본다. 구체적인 대상이 작가의 디오니소스적(Dionysos 的) 열정에 의해 가시적(可視的) 이미지를 버리고 추상적 선의 울림으로 변모한 것이다. 가시적 이미지는 일정한 질서를 띤 아폴로적(Apollo 的) 조화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때론 작가의 내면에서 화산처럼 분출하는 디오니소스적 열정에 의해 가시적 질서를 전복시키며 추상적 선의 울림으로 폭발하기도 한다. 현상계(現象界)를 뒤덮고 있는 이미지의 허구를 벗기고 나면, 미(美)?추(醜)를 떠난 생명의 근원적 약동만이 세계 속에 남는 것이다. 철학자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는 이것을 “삶의 意志(Wille zum Leben)"라고 했고, 니체(F. Nietzsche)는 이것을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라고 했다. 작가는 형상을 만들고 다시 그것을 부수면서 조형의 근원으로 돌아가 새로이 약동하는 창조의 가능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홍석창의 《氣의 파동》은 추상적 선의 울림을 통해 세계의 심장을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이다.






▲ 홍석창, 빛, 화선지에 수묵담채, 50.5 x 69cm, 2003




   이렇게 《氣의 파동》에서 보여 주고 있는 추상적 조형의 세계는, 그가 이번에 전시하는 다른 작품들에서는 완전히 안으로 숨어들어 간결하고 소박한 이미지로 발아(發芽)하고 있다. 《淸》, 《빛》,《心閑》,《醉紅》,《5월》,《7월》,《化生》,《淸香》,《幽香》이란 제목이 붙은 그의 그림들은 《氣의 파동》과는 매우 다른 조용하고 정돈된 단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상반된 성격의 그림들이 개인전에 함께 선보이는 것을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기세계가 확립되지 않은 미숙한 화가의 개인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우리 화단의 거목으로 인정받고 있는 원로급 화가의 개인전인데 말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일찌감치 우리 미술계가 버렸어야 할 어이없는 편견일 뿐이다.

   홍석창의 그림에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움직임과 그에 따르는 걸림이 없는 붓의 운용이 느껴진다. 나는 작년에 열린 그의 화갑(華甲)전 평론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홍석창의 회화세계를 특정한 시각으로 정의 내리고 이야기 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열려진 思考의 넓이와 깊이를 지닌 화가로서 자유로운 그림을 그려 온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매우 편안한 느낌을 준다. 인위적이거나 거창한 구호가 없이 자연스럽게 세계를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생각이 흐르는 대로 붓이 움직여 그려진 것 같은 그런 그림들이 홍석창의 회화이다. 그 자연스러움이 세계를 열어 보이는 홍석창 회화의 독특한 힘이 되고 있다” (任斗彬, 洪石蒼 채묵40년 도록 평론문에서 발췌)





▲ 홍석창, 餘香, 화선지에 수묵담채, 46.5 x 35cm, 2003




   소나무와 해바라기와 연꽃과 대나무와 장미, 국화, 난초, 조롱박, 매화, 포도, 복숭아 등을 소재로 하여 그린 그의 그림들은 전통의 향기를 시간의 다리를 넘어 따듯한 온기를 담고 전달해 준다. 이들 소재들을 작가는 특별히 파격적인 화법이나 세련된 붓의 운용으로 멋을 부리지 않고, 순진할 정도로 소박한 형태 표현과 선의 움직임에 의해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선묘는 간혹 어떤 때엔 매우 어수룩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인데, 사실은 이 어수룩함 속에 세련된 붓놀림을 능가하고 영혼의 내면적 향기가 풍겨나오고 있다. 화면에 그어나간 선(線)이 보여 주고있는 다양한 울림의 진폭을 파악하는 것. 이것은 문인화를 감상하기 위한 최초의 시각적 열쇠이면서 그 정신적 요체(要諦)인 것인데, 이것을 고도의 경지에서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 홍석창, 醉紅 Ⅰ, 화선지에 수묵담채, 34.5 x 46cm, 2002





▲ 홍석창, 淸香 Ⅳ, 화선지에 수묵담채, 46 x 69cm, 2003




   화폭 위에 그어진 선(線)은 그 화가의 모든 것을 놀랍도록 반영한다. 선은 불가사의 (不可思議)할 정도로 화가에 따라 다른 풍부한 울림의 진폭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좋은 울림을 지닌 선을 만나는 것은 큰 기쁨이다. 달필이면서도 욕망의 때가 끼어 죽어버린 선(線)이 있는가 하면, 서툰 듯한 움직임을 보이면서도 깊은 정신의 향기를 뿜어내며 살아 있는 선(線)이 있다. 고도의 경지에 오른 탈속한 선(線)은 그것 만으로도 마음을 정화(淨化)시키는 깊은 기쁨을 준다. 홍석창의 이번 그림들을 보면, 그가 세속의 잡사로부터 벗어 나와 고요한 영혼의 대지를 산책하듯 한가하고 맑은 시각으로 나무와 풀과 꽃들을 그린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대나무에서도 난에서도 국화에서도 내면의 맑은 향기가 감돌고 있다. 그가 그은 선 하나를 화면에서 떼어내 도시의 거리에 날려버리면, 번잡한 도시의 시간이 멈추고 작은 휴식에 잠겨들 것만 같다.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벗어 나온 현대인들에게 홍석창의 문인화는 그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조용한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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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록 및 평가| ·‥‥평론

삼석도인 | 2010.11.13. 15:13



어록 및 평가

 

● 평소에 가능한 한 복잡한 것이나 불필요한 욕심을 마음에서 제거하고자 노력한다.

-홍석창 (투명하게 세계를 응시하기 위한) -

 

나의 작품은 요즘 시대의 문인화이다.

현대적 문인화에는 여러 형태가 있을 수 있다. 과거를 답습하기보다는 전통 문인화의 선 과 점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이 시대의 것으로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

-홍석창 (한국 고유의 문인화를 현대적 색깔로 구현해 내는) -

 

홍석창은 형식과 규제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미학을 구가하는 역량 있는 작가이다.

깊은 전통성이 있는 예술인 동시에 가장 많이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어서 현대성 있는 예술형식을 갖출 수 있는 것이다.

-미술 평론가 샤오. 따 젼-

 

그는 대단한 천자(天資)를 가지고 태어난 수묵화가이고 사고가 깊은 예술가이다. 먹의 농담고습(濃淡故濕) 변화로 화면의 허실을 통한 공간처리는 동방 전통미수의 저력을 엿볼 수가 있다.

-미술평론가인 소대잠(邵大箴)-

 

그의 그림은 문인화로부터 출발하여 지금도 그것의 계승발전 내지는 진화의 가능성을 탐 구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익힌 한학과 서예는 바로 문인화와의 밀접한 관계를 자연스럽게 형성시키고 아울러 오래도록 지속시킬 수 있는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술평론가 이재언-

 

절제와 간결의 수묵화법을 원용하고 강렬한 색상을 조화시켜 새로운 운치를 표현하는 경지는 오로지 그의 옹골찬 천성과 탐구의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문학박사 정상옥-

 

그의 예술은 구상과 추상이 공존하고, 회화와 문인화, 서예가 자유롭게 융화되고 조화된 종합 예술의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미술평론가 김남수-

 

◈참고문헌

 

<평론>

김남수(미술평론가), 시서화(詩書畵), 달관(達觀)의 경지(境地) 「아트코리아」

정상옥(문학박사), 옹골찬 문인화가 '홍석창' 「미술세계」 1999. 7

이재언(미술평론가), 영웅적 운필과 섬세한 세필 사이 「미술세계」 1999. 7

 

<기사>

邵大 箴(샤오. 따 젼), 현대기식(現代氣息)의 충만 -洪石蒼의 水墨畵를보고- 「아뜨리에」

정명희, 자연 속에서 찾은 음율 「아뜨리에」

「현대적문인화전」갖는 홍석창교수 「동아일보」1998

 

<전시>

「홍석창 ‘채묵(彩墨) 40년’」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옹골찬 문인화가 '홍석창'

정상옥 (문학박사)

   


   1. 영운 김용진 화맥(畵脈)을 계승한 석창(石槍)


   영운(嶺雲) 김용진(金容鎭)은 조선조 말기 명문거족(名門巨族)인 장동 김씨의 영의정 영어(潁漁) 김병국(金炳國)의 손자로 태어났다. 유년시절 대대로 전습되는 가학(家學)과 당대의 석학인 백연(白連) 지운영(池雲英)으로부터 학문과 서화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지운영은 충주인(忠州人)으로 초명(初名)은 운영(運永)이며, 설봉(雪峰)과 백련(白蓮)으로 호(號)하였다. 그는 재지(才智)가 절륜(絶倫)하고 학문이 해박하며 시서화에 효통(曉通)하니 삼절(三絶)이고 유불선(儒彿仙)에 통투(通透)하였다고 한다.  


   영운 선생은 서기 1910년 한일합방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초야에서 금서시화(琴書詩畵)로 자오(自娛)하고 서기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거문고를 버리고 서화에만 전념하였다. 영운 선생은 해서(楷書)에 안진경의 마고산선단기(麻姑山仙壇記)와 안씨가묘비(顔氏家廟碑) 등과 행서(行書)에는 쟁좌위고(爭座位稿) 및 제질문고(祭侄文稿), 예서(隸書)의 장공방비(張公方碑)등으로 신수(神秀)를 얻었다. 화법은 백련 지운영과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에게 배우고, 관재(貫齋) 이도영(李道榮)과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晉) 및 심전(心田) 안증식(安中植) 등과 교유(交遊)로 안목을 높이고 서화의 경지를 넓히었다. 영운 선생이 49세 되던 서기 1926년에 내한한 중국인 방명(方 )으로부터 본격적인 새로운 화풍을 전수 받았다고 한다.


   방명은 안휘성(安徽省) 동성현(洞成縣) 사람으로 오창석(吳昌碩)의 문인으로 서법은 각 서체에 능하고 그림은 문인화를 비롯하여 산수인물 및 화조 등을 잘 하였다. 영운 선생은 40세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전념한 서화는 안진경의 서법과 오창석의 문인화풍을 터득하여 시서화 일치의 예술사상으로 평생을 보내었다.  홍석창(洪石蒼)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며 힘차게 남으로 뻗어 내려온 산맥이 태백과 소백으로 갈라지며 신비로운 비경을 연출한 강원도 영월에서 서기 1940년경진(庚辰)년 3월에 태어났다.

   낙향한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난 석창은 유년시절 외조부인 안동(安東) 김병욱(金炳旭) 공(公)으로부터 한문을 수학하고, 다시 외숙부인 안동 김용규(金龍圭)公에게 가학(家學)인 한문과 서법 및 묵화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서기 1959년 서울로 진학을 하면서 외숙부를 따라 종로구 운니동의 영운 선생 댁을 찾아 입문하고 서화를 본격적으로 수업하게 되었다. 당시 영운 선생께서는 80세의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창포(菖蒲)와 수석을 완상(玩賞)하고 화초들을 돌보시며 서화로 소일(消日)하시었다.


   서울의 명사들인 해관(海關) 윤용구(尹用求), 동강(東江) 김녕한(金 漢), 우하(又荷) 민형식(閔衡植)등 여러분들이 운니동 선생 댁을 방문하고 환담(歡談)하는 일이 많았고, 석창은 이때 이분들과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선생께 처음으로 인사를 드렸다고 하였다.  석창은 영운 선생께 안근유골(顔筋柳骨)의 유공권(柳公權) 현비탑비(玄秘塔碑)를 공부하며 서법의 근골(筋骨)을 가다듬어 이듬해인 서기 1960년 약관의 몸으로 제9회 국전에 당당히 초입선(初入選)을 하여 서화인(書畵人)으로 첫발을 내딛게되었다.


   이로 인하여 석창은 오창석으로부터 방명을 거쳐 영운 선생으로 이어지는 화맥의 계승자가 되는 매우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이때 영운 선생께서는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선생 등 서단의 중진들이 서기 1956년에 발기하여 조직한 동방연서회의 회장직에 있었다. 석창은 국전입선을 계기로 영운 선생의 안내로 당시 관수동 적산가옥(敵産家屋)의 2층에 위치한 동방연서회에 입회를 하고 일중, 여초 두 선생께 폭이 넓고 깊이 있는 서법을 배웠다.



   2. 석창의 서화에술 활동


  당시 동방연서회는 서울 장안의 명문집 자제들이 드나들며 서예를 통하여 인격을 수양하던 곳이었다. 그들은 지금 사회 각 분야에 분포되어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석창에 대하여 한가지 특이한 일은, 필자가 후일 우연한 기회로 재단법인 동방연서회의 사무국장이 되어 각종 서류를 정리하다가 석창의 입회원서를 보게된 것이다.


   수천 명에 달하는 사회 여러 계층 인사들의 입회원서가 순서대로 철하여져 있었는데, 호기심에 한 장씩 넘기다가 유일하게 모필로 쓴 입회원서를 발견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석창의 입회원서였다. 세필(細筆) 소해(小偕)로 단아하게 쓴 입회원서는 바로 석창의 옹골찬 성격을 그대로 나타낸 글씨로 아직도 기억이 새롭다.석창은 1960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에 입학을 한 뒤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교수에게 문인화와 산수화를 계속였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동방연서회에서 각종 서체를 연마하고, 수유리 4·19묘지 입구에 위치한 한 빌딩 2층에 침실 겸 작업실을 마련하고 밤을 지새며 그림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중국의 석도, 팔대산인, 양주팔괴등  여러 화가들을 두루 섭렵 연구하였고, 특히 오창석의 새로운 사조의 문인화를 탐구하는데 열중하였다. 그는 한편으로 서기 1963년 문공부가 주최한 신인상전에 안진경 해서를 출품하여 대학 재학생으로는 보기 드물게 차석상을 받게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그로부터 그는 계속 국전 서예부에 출품하여 특선 2회와 입선 6회로 크게 두각을 나타내었다. 쉬지 않고 노력하는 그는 서기 1963년 동양화 6대가 중의 하나인 심산(沁汕) 노수현(盧壽鉉) 화백에게 입문하여 산수와 문인화를 수업하며 안목을 넓히고, 이를 개인전을 통하여 산수화 및 문인화를 발표하여 많은 애호가들의 격찬을 받기도 하였다. 서기 1964년 홍익대학교 미술 대학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뒤 그는 곧 바로 대만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서기 1972년 대만 중국문화대학 예술연구소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수묵화 운동을 체계적으로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는 영운 선생으로부터 훈도(薰陶)받은 시서화 일치사상의 실천이고 또한 조지겸, 임백년, 오창석을 중심으로 한 해상화파(海上畵派)들의 영향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고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대만 유학시절 고궁박물원의 이림찬(李霖燦)교수의 중국회화사, 중국문화 대학 예술연구소 소장인 장상엄(莊尙嚴)교수의 서법실기, 왕장위(王壯爲)교수의 서예 및 전각사(篆刻史), 정만청(鄭蔓靑) 교수의 문인화 등의 강의와 이들 교수들과의 인간관계에서 파생된 결과이기도 하다. 서기 1978년에는 정부 표준의 단군의 영정을 제작하여 사직동에 위치한 현정희(顯正會) 단군성전(檀君聖殿)에 모시게 되었고, 한편으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후진의 교육에도 전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70년 후반부터 90년대에 걸친 수묵화 운동을 더욱더 조직적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개인전과 각종 단체전에 서화를 병행하여 발표하여 서화를 겸비한 화가로 그 명성을 떨치었다. 그는 현재 홍익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방연서회를 비롯한 국제서법예술연합 그리고 한중수묵화의 국제교류도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화품의 수평제고(水平提高)에도 커다란 성과를 올리고 있다.


   외유내강한 그의 성품은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위계질서를 존중하는 옹골찬 선비화가이다. 그러한 그는 각종 초대전, 기획전, 대한민국미술대전을 비롯한 각종 공모전의 운영과 심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석창은 한국미술협회를 중심으로 미술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하고 있기도 하다. 90년 중반부터 그는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심상을 문인화에 근본한 새로운 사유의 추상세계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석창의 명성이 국내외에 알려져 중국과 독일에 초대되어 많은 애호가들에게 회자되었다.



   3. 석창의 서화예술에 대한 국내외 평가


  석창은 80년대이래 꾸준한 작업을 통하여 전통 문인화를 시대적 사조에 걸맞게 융합발전 시킨 결과는 아래 국내외에 많은 평론가들의 평으로 대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동양 회화의 발상지인 중국 북경의 중국미술관 대전람청에서 가진 그의 전시회를 보고「북경만보(北京晩報)」"전문가들이 보기에는 그의 작품들은 매우 격정적이고 천진난만한 풍격으로 채색을 거침없이 풍부하게 사용하는 것은 작가의 높은 역량이다. 강렬한 개성과 시대적인 감각은 매우 뛰어나며 새로운 정신 세계의 추구가 잘 표현되고 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중앙미술학원 교수이며 미술평론가인 소대잠(邵大箴)의 글에서 "그는 대단한 천자(天資)를 가지고 태어난 수묵화가이고 사고가 깊은 예술가이다.

그의 회화는 선명한 동방의 색채를 띠고 있는데, 이는 그가 동방인의 특유한 심리적 경험과 심미적 흥취를 통해서 세계를 관찰한 것이며, 또한 그의 내재적 격정을 잘 표현한 것이다.수묵화라는 언어를 통하여 단순하면서도 풍부하게 자유자재로 표현된 그의 작품은 작가의 인격과 역량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는 체험으로 시공을 초월한 추상의식을 느끼고, 유구한 동양의 철학사상과 미학이론의 기초가 단단하게 확립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서양을 앞지르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서방의 화가들이 동방의 수묵화를 주의 깊게 연구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는 것이다. 홍석창 선생은 서예를 통하여 닦여진 필력은 견실하고 중후한 필화의 미를 보여주고 있다. 먹의 농담고습(濃淡故濕) 변화로 화면의 허실을 통한 공간처리는 동방 전통미수의 저력을 엿볼 수가 있다"라고 논술하였다. 


    미술평론가 이재언"그의 창작은 체질적으로 비교적 선이 굵고 우직해 보이며, 상당히 긴 호흡의 리듬을 갖고 있다. 이러한 기초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예상된다.
그의 그림은 문인화로부터 출발하여 지금도 그것의 계승발전 내지는 진화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그가 문인화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은 고품위의 화격에 기인한다. 특히 어려서부터 익힌 한학과 서예는 바로 문인화와의 밀접한 관계를 자연스럽게 형성시키고 아울러 오래도록 지속시킬 수 있는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논평하고 있다.  석창의 화품은 강인한 면모와 응축된 내면의 심상이 기운생동한 운필로 자유분방하게 표현된다. 이것은 그의 천자와 쉬지 않고 꾸준히 탐구한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절제와 간결의 수묵화법을 원용하고 강렬한 색상을 조화시켜 새로운 운치를 표현하는 경지는 오로지 r의 옹골찬 천성과 탐구의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안식년인 석창을 5월 초순 인사동서 우연히 만났는데, 오는 대화중에 중국 산동성에서 거행한 국제연날리기 대회에 참석하고 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내년 1월에 우리의 고유한 연에 문인화를 그려서 한없이 넓은 창공을 전시장으로 최초 연문인화전(鳶文人畵展)을 열겠다는 기상천외한 포부를 밝혀 필자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이상 석창을 간단하게 조명하여 보았다.
그 결과는 오로지 석창은 "외유내강한 성격으로 깊은 사유를 통하여 옹골차게 새로운 정신 세계를 탐구하는 선비 화가"라는 말 외는 더 이상 무엇으로 그를 표현할 수 있겠는가?(
미술세계 1999.7)

cafe.daum.net/gungnimbang/8pJV/11   문인화정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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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창展 / HONGSUKCHANG / 洪石蒼 / painting 2015_0520 ▶ 2015_0616





홍석창_별꽃_화선지에 채묵_34.5×46cm_2010


초대일시 / 2015_0520_수요일_06:00pm

갤러리 H 개관기념 초대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HGALLERY H서울 종로구 인사동 9길 10Tel. +82.2.735.3367



졸박한 심미, 그 천진한 자유로움의 세계 ● 동양회화의 전통은 결국 문인화로 귀결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일반적으로 통칭하는 형식으로서의 문인화가 아니라 정신으로서의 문인화이다. 주지하듯이 문인화는 품격과 격조의 그윽한 정신세계이다. 기능의 숙련에 앞서 학문과 교양을 강조하고, 형상의 표현은 그 속에 사상과 감정이 내재되어 있어야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형상을 통해 전해지는 조형의 시각적 자극보다 이를 통해 읽혀지는 의미의 요체를 파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문인화이다. 동양회화의 정수라 일컬어지는 사의(寫意)가 바로 그것이며, 독화(讀畫)의 요구는 바로 이러한 특질들에 대한 해설에 다름 아닌 것이다.





홍석창_행복_화선지에 채묵_46×34.5cm_2011





홍석창_별꽃_화선지에 채묵_35×46cm_2014



   주지하듯이 작가 홍석창은 문인화로 평생을 일관하였다. 특유의 문기(文氣)와 분방한 화면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것이었다. 그의 화면은 언제나 천진한 여유로움과 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낭만적인 분위기가 여실하였다. 이는 오랜 기간 동안 단련된 서예에서 비롯된 운필에 대한 장악력과 수묵, 혹은 문인화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것임은 자명한 것이다. 일탈과 파격은 그의 작품세계를 개괄할 수 있는 중요한 단어일 것이다. 그것은 법(法)에 머무르지 않고 예(藝)에 노니는 것이다. 파격을 통해 끊임없는 자기 변신을 추구하고, 일탈을 통해 그 단서를 포착하는 것이 바로 석창의 예술세계라 할 것이다. 그에게 지필묵은 자신이 속한 시공과 소통하는 효과적인 매개였으며, 자유롭고 거침없는 필선과 수묵은 바로 그 호흡을 반영하는 진솔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필은 구애됨이 없으며, 그의 수묵은 주저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문인화라는 동양회화 예술의 정수이자 전통의 실체에 접근하는 방법이자 정신이었다라고 해설할 수 있을 것이다.





홍석창_별꽃_화선지에 채묵_35×46cm_2014





홍석창_별꽃_화선지에 채묵_49×75cm_2011


   한 작가의 예술세계는 그 자신의 삶을 반영하는 것인 동시에 자신이 속한 시공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기도 하다. 석창의 작업은 전통과 현대라는 민감한 접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전통에 대한 학습과 훈련을 통해 그 요체에 육박하고, 과감한 실험을 통해 현대를 마주하였다. 부단한 탈각의 과정을 거쳐 그가 실천한 것은 바로 시대정신의 발현이었다. 이는 그의 예술 생애에 몇 차례에 걸친 기억할만한 변화를 통해 기록되고 있다. 그것은 한국화라는 실체에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수묵의 현대화 과정이었다. 그것은 현대라는 새로운 가치를 통해 전통을 심화하는 것이었으며, 법칙과 규율에서 벗어나 문인화와 수묵 본연의 정신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홍석창_악귀를 쫒는 호랑이_화선지에 채묵_45.5×54cm_2012





홍석창_별꽃_화선지에 채묵_24×35.5cm_2013


   격에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며, 일탈의 분방함을 만끽하지만 어지럽지 않음은 그의 작업이 지니는 장점이다. 이는 전통에 대한 오랜 학습과 견고한 이해가 전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평생을 일관한 작업에의 지향과 그것에 대한 믿음은 근작에 들어 더욱 극명하게 발현되고 있다. 그의 신작들은 화려하고 현란하다. 거침없는 운필과 자유자재한 재료의 사용, 그리고 어떤 것에도 구애됨이 없는 일탈과 파격의 화면은 어쩌면 그가 평생을 통해 일궈온 예술 세계의 총체일 것이다. 이제 그에게 예술은 호흡이며 신명이라 느껴진다. 흐드러진 원색들은 거침이 없으며, 일상의 소소함까지 스스럼없이 화면에 옮겨 온 듯 분방한 조형은 기성의 가치로 규정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는 스스로 한국화라는 틀을 깨고 문인화라는 고정된 인식을 타파함으로써 스스로 비상할 수 있는 시공을 열고 있는 것이다. 유법(有法)에서 무법(無法)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다시 이루어지는 유법(有法)의 변증적 과정을 상기한다면, 그는 이제 자신의 법을 확인하고 이를 과감하고 거침없이 펼쳐 보이는 것이다.





홍석창_산산산_화선지에 채묵_38×29cm_1990




홍석창_별꽃_화선지에 채묵_45×36cm_2012


   천진함은 그의 신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가치이다. 마치 유희와도 같은 그의 화면은 거리낌 없는 표현으로 가득하다. 법칙이나 규율에 앞서 본능적이고 즉발적인 그의 행위는 고스란히 화면에 담겨있다. 그것은 질박하고 소탈하며 거칠고 원색적인 졸박(拙朴)의 심미이다. 이에 이르면 온갖 상념에서 벗어나 오로지 화면에만 몰입하는 해의반박(解衣槃礴)의 고사가 절로 연상된다. 더불어 그가 전통에 대한 오랜 학습과 수련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을 상기한다면, 이는 득어망전(得魚忘筌)을 떠올리게 된다.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은 잊혀지게 마련이고, 뜻이 통하면 말은 필요 없어진다. 그에게 전통은 통발이었으며, 물고기는 자유로움이었을 것이다. 그가 전하고 싶었던 뜻은 본질을 관조하는 질박함이었으며, 한국화, 문인화, 수묵 등은 이를 해설하기 위한 말과 같은 것이었다라고 해설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천진함과 졸박함은 단순히 근작에 나타나는 조형의 시각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그것은 그가 평생을 일관하며 궁구해 온 동양회화의 요체이자 문인화의 정신이며 한국화의 본질인 것이다.


김상철

Vol.20150520i | 홍석창展 / HONGSUKCHANG / 洪石蒼 / painting



www.neolook.com/archives/20150520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