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시간을 어떻게 담았을가?

2016. 2. 18. 11:08美學 이야기



       그림 이야기 (10) - 그림에 시간을 어떻게 담았을가?| ▣-------- 명작보기

촌사람(이동민) |  2015.06.14. 14:01


그림은  시간이 정지된 예술의 장르이다.  시간을 어떻게 표현하였을까?

 



   디플론의 도자기 -아테네 부근의 공동묘지의 묘지 위에 얹혀있다. 장례식 장면이 그려져 있다. 묘지석의 역할을 한다.

이야기 형식이므로 결국은 이야기 속에 시간이 들어 있다.



 



   오딧세이를 보면 먼저 술을 줘서 취하게 한 후에 불에 달군 쇠챙이로 외눈을 찌른다. 시간에 따라서 순서대로 일어난다. 그러나 그림에는 손에 술잔을 쥐고 있고, 또 눈을 찌른다. 두 개의 시간을 동시에 그렸다.



 


   고개지의 낙신부도는 두루마리 양식이다. 두루마리 그림은 같은 사람(주인공)이 반복하여 나오는 만화형식이다. 서사구조의 그림이다.

 




   3만 년 전의 쇼베 동굴 벽화 -- 소의 뿔이 겹쳐지도록 그린 것은 동물의 움직임을 그린 것이다. (시간을 닮았다.)

현대 그림으로 는 이태리 미래파와 뒤샹의 그림이 있다.




 


   움직이는 개를 그렸다. 3만 년 전의 소베 동굴 벽화와 같은 양식이다.

 




로버트 모리스 조각은 관람자가 빙빙 돌아가면서 감상하도록 되어 있다. 감상자가 임의대로 시간을 소모하면서 감상한다.

 




온 카와아의 세개의 날자 이다. 아예 날자만 문자로 표현하였다.

 



          그림에 시간을 어떻게 담을까?


  지금부터는 미술 감상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해보자. 그 시대 사람의 사유세계를 파고들어가기 보다는 표현의 기법을 통하여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생각해보자. 문자가 정착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그림을 대용하였다. 문자로 내용을 표현하는 것과 대상을 형상으로 재현하는 그림에는 차이가 있다. 예술의 형식 구분에 시간이 소여 되는 형식으로는 문학과 음악이 있고, 시간이 제외된, 정지된 순간을 표현하는 형식으로는 미술을 꼽는다.

 

  인류사의 초기에는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물은 거의가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야기란 사건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림도 기본 구조는 서사 구조 즉,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다. 시간이 배제된 그림에 시간이 필수 조건인 이야기를 어떻게 담을 수 있을까? 

 

  아테네의 교외인 디플론에는 기원 전 8세기 경에 조성된 공동묘지가 있었다. 다플론 공동묘지 지역에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거대한 도자기를 발굴하였다. 유골을 담은 흔적도 없고, 땅속에 묻은 것도 아니었다. 묘지 위에 올려두므로 묘비의 역할을 하였다. 묘비에는 무덤 주인의 행적을 나타낸다. 이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은 바로 묘지의 주인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스 전통에 의하면 시신을 드러내 놓고 곡을 하면서 애도하는 장례의식을 프로테시스라고 하였다. 이 의례는 14일 간이나 순서에 따라서 진행함으로 하나의 드라마 형식을 취한다. 도자기에는 이 드라마가 그려져 있다. 그림에는 향료를 바른 시신을 책상 위에 놓고, 가족과 친지들이 애도하고 있다. 애도가 끝나면 시신을 마차에 싣고 묘지까지 운반하여 화장을 하거나, 매장한다. (사진)의 그림은 천을 어깨에 메고 황급히 걸어가는 모습이다. 이 천은 시신을 덮은 것으로, 시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천을 걷어 올린 순간을 그렸다.

 

  우리는 이 그림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디플론의 장례용 항아리에는 프로테시스 장면만을 그린 것이 아니고, 행진하는 전사나, 밀집된 전차 대열을 그려서 전투 장면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때는 무덤의 주인이 왜, 어떻게 죽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고, 생전에 용감하였던 그의 행적을 기록한 것일 수도 있다.

 

  묘비적인 성격의 그림은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이야기에는(서사구조에서는) 시간이 흘러가기 마련이다. 한 화폭에 이야기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서사 양식에는 ‘생략’ 기법이 있다. 영화에서 집을 나와서 백화점에 가는 이야기를 할 때 현관을 나오는 장면과 백화점에서 쇼핑히는 장면만 보여준다. 거리로 나와 버스를 타고, 백화점 앞에서 내리는 장면은 생략해버려도 관람객은 모두 알고 있다. 디플론의 항아리는 바로 생략 기법으로 그렸다. 관습화된 내용이나 개념화된(신화적 구조) 사건은 이미 서사구조로 관념 속에 각인 되어 있으므로 부수적인 것을 생략하고 특정의 장면만을 표현해도 관람자는 시간이 투여된 이야기를 이해한다.

 

  디플론 도자기 그림의 바깥에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있다. 그림을 그렸던 사람도 살았고, 도자기를 만든 사람도 살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글을 모르는 문맹자라고 하였다. 이 시대 사람에게는 영웅숭배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테네의 명문 가문은 자신들의 선조를 트로이 전쟁에 참여하였던 영웅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림을 통하여 도자기 그림의 바깥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이나 사유도 읽을 수 있다. 시간은 그림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관람자는 항아리 그림의 바깥에 존재하였던 역사적인 시간도 읽을 수 있다. 현대 미술도 같은 방법을 동원하여 감상한다.

 

  트로이 전쟁이 끝나자 전쟁 영웅이었던 오딧세우스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뱃길에 풍랑을 만나서 섬에 상륙하였다. 여기에는 폴리테모스라는 외눈박이 괴물이 살았다. 이들 일행은 괴물에 붙잡혀서 동굴 속에 갇혔다. 외눈박이는 식사 때마다 한 사람씩 잡아 먹었다. 공포에 떨던 그들은 모의를 하였다. 포도주로 폴리테모스를 취하여 쓰러지게 한 후에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눈을 찌른 후에 도망을 가는 그림을 도자기에 남겼다. (사진) 괴물은 양 손에 사람의 다리만을 쥐고 있고, 일행 중의 한 사람은 포도주를 주고 있다. 여러 사람들은 긴 꼬챙이로 눈을 찌르고 있다. 신화에 의하면 그림의 장면에서 묘사한 행위는 동시에 일어 날 수가 없다. 시간에 맞추어서 순차적으로 일어난다. 이 그림은 오딧세우스의 모험 이야기를 한 장면에 모두 담고 있다.

 

  엄격히 말하자면 그림에서 오딧세우스의 모험담을 모두 담을 수는 없다. 시간을 따라서 진행되는 이야기를 그림에 담는 독특한 방법을 그리스인들은 창안하였다. 시간을 압축하는 개요성(synoptic)이라는 방법을 이용하였다. 그리스 초기의 미술가들은 이야기(신화)의 내용을 요약하여 전달할 때는 시간성을 무시하고 동시성으로 압축하여 표현하는 방법을 생각해내었다.

 

  도자기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 살았던 시대의 사회상을 읽어보자. 그리스의 음유 시인들은 각지로 떠돌아 다니면서 트로이 영웅의 무용담을 낭송하였다. 그들이 낭송한 시 한 구절을 읽어봄으로 도자기의 그림을 마음으로 느껴보자. ‘우리는 벌겋게 달아오른 창끝을 그의 눈에 박은 다음, 나무 사이로 번지는 피가 부글부글 끓어 오를 때까지 드릴처럼 마구 돌렸다.’ 이들은 신화의 내용을 꿰뜷고 있었다. 우리의 선대가 춘향전을 꿰뜷고 있듯이.

 

  그리스인들은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를 수만 점 남겼다. 우리는 그리스 도자기 그림에서 단순히 신화의 내용만을 읽는 것이 아니다. 관람자는 수천 년의 시간 여행을 하여 도자기 바깥에서 살았던 그리스 사람들의 생활과 사유도 읽는다. 그림 읽기는 그렇게 하여야 바른 읽기를 하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그림에 시간을 어떻게 담았을까? 중국의 전국시대의 초나라 무덤에서 비단 바탕에 먹으로 그린 그림을(백화) 출토하였다. 중국 최초의 회화로 인정하고 있다. 묘주인은 여자로서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있다. 앞에는 고개를 위로 향하여 날아오르는 봉황과 몸을 구부리고 역시 위로 오르는 자세를 하고 있는 용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하늘에 살고 있는 성수인 봉과 용이 죽은 자의 영혼을 인도하여 하늘 나라로 올라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성수의 인도는 여주인이 여행하는 목적지가 천국의 이상향임을 말하고 있다. 입고 있는 비단 옷은 지상의 삶에서 그의 신분을 말해준다. 이 그림은 지상에서 복된 삶을 누린 묘주가 천국으로 여행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야기를 더 진행하여 그곳에서도 복된 생활을 누린다는 것까지 말하고 있다.

 

  영화는 정지된 필림을 1초에 16장씩 내보면 눈의 착각에 의하여 움직이는 듯이 보인다고 하였다. 그 원리를 이용한 것이 영화이다. 우리는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는 한 장면만 보아도 전후의 사건을 유추해내는 능력이 있다. 고대 그림에서 신화나 민담의 한 장면을 그리므로 전체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여 이야기 구조로 만드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앞에서도 말하였지만 관습적인 관념이나, 개념적인 이야기는 한 장면에 요약하여 전체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줄 수 있다. 동양화이든, 서양화이든 고대의 그림은 이런 방식으로 시간이 소여된 이야기를 담아 낸다.

 

  중국인들은 시(詩)나, 부(賦)를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부는 이야기가 기본 구조인 서사시를 일컫는다. 시간을 따라 사건이 진행되는 부를 그림으로 담아내기 위해서 중국인들은 어떤 기법을 생각해 내었을까?

 

  삼국지의 영웅인 조조는 문필가로 유명한 조식이라는 아들을 두었다. 조식이 낙수를 지나다가 전설상으로 뻬어난 미모를 지닌 여신인 낙수신 복비를 만나 사랑을 나눈다는 상상을 하였다. 여신과 인간의 사랑은 현실에서는 이루어 질 수가 없다. 그리움과 이별이 뒤섞인 애틋한 심정을 서사시 형식인 부로 남긴 것을 ‘낙신부’라고 한다. 동진의 화가 고개지는 낙신부를 그림으로 그렸다. 왼쪽에서 시작한 그림은 낙신부의 중요 장면을 연속적으로 그리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주인공인 조식은 각 장면마다 등장하여 이야기의 흐름을 끌고 나간다. 관람자는 낙신부도를 마치 오늘의 만화를 보듯이 읽어 나간다. 그림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이야기는 한 장면, 한 장면씩 연결된다. 이런 그림의 양식을 두루마리(卷軸) 그림이라고 한다. 두루마리 양식은 그림에 시간을 담는 가장 확실한 방식으로, 오늘까지도 중국에서 성행하고 있다. (*중국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것이 관행이다.)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도 바로 이런 양식으로 그린 그림이다(*몽유도원도는 관행과 다르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다). 고개지의 낙신부도와 다른 점은 장면으로 나누어서 묘사하지 않고, 하나의 화폭에 그렸다. 감상자는 눈으로 그림을 훑어 보면서 시간 여행을 한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도원’을 찾아 갔던 사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산과 들, 복숭아 꽃이 만개한 도원이 연속으로 이어지면서 하나의 화폭에 길게 그려져 있다. 내용은 하나의 장면이 아니고,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겪었던 일을 이야기로 펼치고 있다. 몽유도원도에 담겨 있는 시간은 현실의 시간이 아니고, 상상의 시간이다.

 

  기원 1000년경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오토 대제의 기도서에는 삽화가 그려져 있다. 예수가 죽기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다는 것을 그린 것이다. 이 장면의 배경으로 커튼이 쳐져 있고, 그 너머에 찬란히 빛나는 교회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예수가 죽기 직전의 사건을 재현한 것이지만, 교회를 그리므로 예수가 천국으로 돌아간다는 미래를 표현한 것이다.

 

  낙신부도에 등장하는 상상의 시간이나. 몽유도원도의 꿈속의 시간, 그리고 오토 대제의 기도서에 나오는 미래의 신국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이 아니다. 현실이 아닌 이상향의 시간을 그림에 담아 낸 것이다. 상상하거나, 꿈꾸거나, 신국의 시간은 모두가 미래를 지향하는 시간이다. 미래는 막연하기 짝이 없지만, 경험하지 않았던 시간이므로 순전히 가능성만으로 존재한다. 가능성은 상상을 통한 재현을 할 수 있다. 가능성의 시간은 작가에 의하여 조작이 이루어 질 수 있으므로 예술에서 가장 선호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상상에 의하여 펼쳐지는 시간이 그림에 어떻게 담기는가를 몇 점의 그림을 사례로 살펴보았다.

 

  인류사에서 20세기는 기계 문명이 인류의 예찬을 받으면서 도래하여 새로운 시대를 연 시대이다. 기계 문명의 상징은 속도이고, 운동감이다. 빠른 운동감은 미래의 시간을 장밋빛으로 물들여 주는 상징이 되었다. 그림에서도 속도감 있는 시간의 표현이 화가의 관심을 끌었다. 이태리의 미래파 화가들은 과학을 찬미하고, 정지된 화면에 흐르는 시간을 담아내기 위하여 과학의 산물인 사진기의 기법을 응용하였다. 사진을 저속으로 찍을 때 흐릿한 영상이 연속으로 겹쳐지면서 나타난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그림에 도입하였다. 그들은 입체파가 물상을 분석하여 나누었듯이 시간도 나누어서 표현하였다. 우리는 이미 3만 년 전에 그린 쇼베 동굴 그림에서 보았던 기법이다. 피카소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는 바로 형상을 연속적으로 겹치게 그리므로 시간성을 부여하였다. 미래파 화가들은 그림을 서사 중심의 구조에서 시간 중심으로 바꾸어서 시간 자체를 화면에 담으려고 하였다.

 

  1965년에 로버트 모리스는 사각 형태의 스테인레스 막대를 ㄱ 자 형태로 만들었다. 2.4m * 2.4m 크기의 세 개를 바닥에 배치하여 전시하였다. 감상자는 한 지점에 머물지 않고 그 주변을 돌아가면서 관람한다. 관람자의 위치에 따라서 느껴지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감상자는 시간을 소비하면서 작품을 즐긴다. 이제 시간은 감상의 조건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시간은 미술품에 포함되어 동일한 속도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감상자가 임의대로 시간의 속도를 조절해가면서 소비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감상자가 작품을 둘러 볼 때의 속도는 감상자 임의대로이다.)

 

  일본인 화가 온 카와라는 1966년 1월에 ‘세 날자의 그림’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화면은 1966. 1. 15와, 1966. 1. 18, 그리고 1966. 1. 19의 수자만을 나열한 세 점의 작품을 나란히 전시하였다. 이처럼 수자만 나열한 화면을 두고 미술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세 날자의 그림’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니까 그림임은 맞다. 그렇더라도 전통적인 미술 기법인 형상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단순히 시간의 재현이라고 하여야 할까? 이 날자에 일어났던 기억할 만한 사건을 불러내는 작용을 하는 작품이다. 이 날자에 어떤 일이 일어 났을까? 그 기억은 우리에게 어떤 미적 느낌을 안겨줄까? 만약에 우리 앞에 1979. 10. 29. 라는 수자를 쓴 작품 앞에 선다면 박정희 시해 사건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기억에 뒤따라 오는 미적 체험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을 존경하는 감상자가 느끼는 것과 독재자라면서 비난하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다를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해프닝이나, 퍼포먼스처럼 시간은 미술의 장벽을 뛰어 넘어 멀리, 멀리 뛰쳐나간다.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우리는 그림에서 시간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개략적이나마 살펴 보았다. 그림에서 시간성은 서사의 부대 조건으로 표현하였지만, 현대에 와서는 시간 자체가 미술의 주제로 등장하는 것도 보았다.

 

  시간은 흑암과 혼돈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살고 있는 곳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시간은 인간을 표현하는 미술 작품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시간은 흐름과 변화를 속성으로 한다. 그림의 존재 방식이 시간의 표현에는 부적합하지만 그림이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상 시간의 존재는 불가피하다. 시간이 흘러가는 자리에는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앞으로 달려가는 곳을 향한 궤도도 없다. 그래도 시간에는 인간이 있고, 흐름이 있고, 변화가 있다.

 

  흘러가는 것이 시간의 속성이지만 우리 앞에는 영원히 현재만이 있다. 우리가 미술 작품 앞에 서 있을 동안은 언제나 현재일 뿐이다. 미술을 보면서 기억을 통하여 과거로 여행하고, 기대를 통하여 미래 여행을 한다. 기억과 기대는 인간의 의식 영역에 속한다. 결국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은 우리의 의식을 통하여 시간 속을 여행하면서 의미를 수용하는 인식의 문제로 귀착한다. 물리적 시간은 동일한 방향으로, 동일한 속도로, 지속적으로 흐른다. 그러나 그림 속의 여행은 과거로도, 미래로도 흐를 수 있다. 흐름도 일정하지 않고, 심지어는 특정 지점에 머물므로 오래 동안 시간은 흐르지 않고 정체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시간 여행을 하는 사이에 감상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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