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함께하는 철학 -퇴계와 율곡, 그리고 다산에 이르기까지

2016. 2. 21. 18:14다산의 향기



       시대와 함께하는 철학 -퇴계와 율곡, 그리고 다산에 이르기까지 자료 / 보정산방

2012.05.21.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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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진 교수(철학과) 
 2008년 03월 15일 대학신문  snupress@snu.ac.kr  
 
   하버드 대학의 뚜웨이밍교수는 항상 지갑에 퇴계와 율곡의 초상이 있는 한국의 천원권, 오천원권 지폐를 넣어 다닌다. 퇴계와 율곡을 존숭(尊崇)해서이기도 하지만 유학이, 더 나아가서는 철학이 시대를 이끌어가고 아직도 살아서 기능한다는 증표로 쓰기 위해서란다. 퇴계, 율곡,다산 등 기라성 같은 조선의 유학자들이 수용이라는 단계를 넘어 독자적인 한국유학을 전개하고 중국의 수준을 뛰어 넘은 부분도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많은 사람이 믿는 것처럼 퇴계와 율곡의 철학이 현대의 한국에서 여전히 탁월한 철학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과격하게 말하면 한국의 전통철학이 시대를 넘어 가르침을 주고 또 거기서 서양철학의 뭔가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희망이고 믿음일 뿐이다.

 

   그러면 조선의 철학은 하나의 역사적 유물일 뿐 오늘에 와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가. 앞의 말과 모순되는 것 같지만 전혀 의미가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양철학이 주류를 이룬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자기화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조선의 유학자는 시대와 함께하는 철학적 정신을 일깨워 준다. ‘이기호발’이니 ‘기발이승일도설’이니 ‘인물성동이론’이니 하는 철학의 내용에서도 어떤 철학적 영감을 얻을 수 있겠지만 항상 시대의 문제를 직시하는 삶의 태도와 정신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심성론 중심의 조선성리학, 주리론과 주기론으로 분화

 

   다 알다시피 조선은 유교국가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인기 드라마 「이산」에서는 한 꼴통 산림유학자가 감히 왕인 정조에게 “조선은 왕의 국가가 아니라 사대부의 국가입니다”라며 대드는 장면이 나온다. 드라마에서는 부정적으로 다뤘지만 사실 그럴 수 있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조선 성리학자이고 그래도 되는 나라가 조선이었다. 조선을 유교국가로 만든 사람은 조선의 첫 왕인 이성계가 아니라 정도전이다.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은 조선을 왕과 귀족의 국가가 아닌 민본주의에 입각한 사대부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정몽주, 정도전을 비롯한 고려말 조선초의 유학자들은 새로운 사회를 위해 송대의 성리학을 수용한다. 조선초 철학의 첫 번째 과제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이해하여 자기화하고 기존의 불교적 세계관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불교적 세계관의 핵심이 ‘공(空)’이라고 보고 ‘기(氣)’로써 세계를 설명함으로써 이를 부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김시습에서 서경덕에 이르기까지 기의 운동으로 자연과 생사, 귀신 등을 설명하는 기철학이 주류를 이룬다.

 

   조선의 성리학이 독자성을 확보하고 우리의 전통으로 확고하게 자리하게 되는 것은 퇴계와 율곡의 시대에 와서다. 유교적 명분과 실천으로 무장한 사림파가 여러 차례의 사화를 겪은 후 겨우 제자리를 찾은 다음 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유교적 도덕을 보편화하는 것이었다. 조선조가 유학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았으면서도 유교사회를 이룩하지 못한 것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왕을 비롯한 사대부들이 유교적·성리학적 가치를 체질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성리학적인 가치를 체현하고 실현하는 도덕운동을 통해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도덕이 정치의 근본이 되어야 하며 그 중에서도 왕의 도덕적 의지는 특히 중요했다. 이 때문에 이후 조선 성리학의 방향은 자연히 도덕의 가능성과 방법을 탐구하는 심성론으로 기울게 되었다.

 

   퇴계는 육체적인 욕망의 속박에서 완전히 해방된 순수한 영혼이 마음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도덕적 직관이 가능하며, 성인이 될 수 있을까 하고 묻는다.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은 ‘일반적인 마음은 기(氣)의 드러남이지만 도덕적 정신은 리(理)가 드러난 것’이라는 독창적인 주장이었다. 이러한 퇴계의 주장에 기대승이 반론을 제기하면서 소위 ‘사단칠정논쟁’이라는 조선시대 최대의 성리학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아마도 퇴계는 도덕을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의 문제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퇴계는 도덕적 감성을 일반적인 감성과 분리하고 리를 기에서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형이상학을 전개하게 되고 지적인 훈련보다는 감성적 수양을 중시하게 된다.

 

   율곡은 퇴계의 이원론적인 주자해석에 반대한다. 마치 순수한 삼각형 자체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순수한 삼각형에 대한 관념이 없으면 현실의 삼각형도 존재하지 않듯이 리와 기의 존재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래서 마음에 대한 퇴계의 두 명제 중 ‘도덕적 감성을 포함한 모든 감성은 기의 드러남이지만 리의 규제를 받는다’만 인정한다. 그는 리를 사물이나 인간의 보편적 성질 내지는 규범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도덕적 행위는 도덕적 감성의 발현이 아니라 리 즉 보편적 규범의 인지와 실천의지의 문제가 된다. 율곡은 도덕적 행위에서 이성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마음 즉 감성의 수양보다 올바른 판단을 위한 지적 훈련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감성과 이성, 리와 기 어디에 무게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퇴계와 율곡의 철학은 모든 부분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이게 되고 이후 조선성리학을 주리철학, 주기철학 양갈래로 나누게 된다. 퇴계학파와 율곡학파가 조선성리학의 정통성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는 과정에서 유학은 점차 근본주의적 성향을 띠게 되었고 마침내는 사회적, 개인적 모든 행위를 유교적 규범으로 얽어매고자하는 예교주의적 경향을 띠게 된다. 조선성리학이 근본주의화 되면서 현실적 탄력을 잃고 사회의 발전과 괴리를 보이게 되자 주자중심의 성리학이 지닌 한계를 느낀 일군의 유학자들은 주자학 바깥에서 탈출구를 모색하고자 했다.

  

 

성리학이 근본주의화 되면서 돌파구로 실학이 등장해

 

   양명학과 한학 등 여러 새로운 경향이 선보였지만 한국철학이 획기적으로 변하는 세 번째 계기는 서양사상의 수용과 더불어 이뤄지는 실학사상의 성립이다. 근본주의화한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미 근대의 싹을 보이고 있던 사회적 분위기를 좇아가기 위해 일군의 학자들은 연구의 주제를 도덕이론과 수양에서 토지제도 등의 현실적 문제로 옮겨가게 된다. 후에 이러한 경향을 묶어 ‘실학’이라 칭하게 되었는데 많은 실학자들은 당시 막 수용되기 시작한 서양사상-천주교와 서양과학-과 전통성리학절충함으로써 그 철학적 돌파구를 찾는다.

 

  실학의 집대성자인 다산은 경전의 재해석을 통해 초기유학의 실천적 정신을 되찾으려고 함과 동시에 유학과 천주교의 접합을 시도했고 북학파의 학자들은 서양과학과 전통 성리학의 접합을 모색했다. 정약용의 천주교적 유학, 홍대용의 과학적 성리학, 최한기의 경험적 인식론으로 대표되는 많은 철학적 시도가 18~19세기에 걸쳐 이뤄졌다. 이 모두가 당시 새로이 수용된 서양사상과 전통성리학을 접합시키고자 한 노력의 결과였다. 이들의 새로운 철학적 모색은 조선왕조의 붕괴와 더불어 이후의 한국철학 형성에 연결되지 못한 채 철학사적 흔적으로만 남게 된다. 그렇지만 이들의 정신은 우리에게 철학은 시대와 함께하는 것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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