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는 조선조 후기의 대경륜가(大經輪家)이며 대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의 저술로서, 수령의 치민(治民)에 대한 도리를 논한 책인데, 다산의 57세 때인 순조 18년(1818)에, 당시 유배지였던 강진읍(康津邑)에서 조금 떨어진 다산서옥(茶山書屋)에서 완성한 것이다. 다산은 영조 38년(1762) 6월 16일에 광주(廣州) 초부면(草阜面) 마현리(馬峴里)에서, 아버지 목사(牧使) 정재원(丁載遠)과 어머니 해남 윤씨(海南尹氏)의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의 이름은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鏞)ㆍ송보(頌甫), 호는 다산(茶山)ㆍ사암(俟菴), 시호는 문도(文度),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다산은 어릴 때부터 재질이 탁월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가정에서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 16세 때(1777)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유고(遣稿)를 보고난 후, 민생을 위한 경세(經世)의 학문에 뜻을 두었고, 28세 때(1784, 정조8) 이벽(李蘗)에게 서학(西學)을 배웠다. 28세 때(1789) 문과(文科)에 급제, 벼슬길에 나서 가주서(假注書) 등을 거쳐, 29세 때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올랐으나 천주교인(天主敎人)이란 이유로 충청도 해미현(海美縣)으로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 나, 4~5년 동안 삼사(三司)ㆍ성균관 등의 청직(淸職)을 두루 거치는 한편, 경기 암행 어사로도 나갔었다. 34세 때(1795, 정조19) 통정(通政)에 특진, 우부승지(右副承旨) 등에 올랐으나 청(淸) 신부(神父) 주문모(周文謨)의 사건에 연루, 금정도 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내직으로 들어왔다. 36세 때(1797) 곡산 부사(谷山府使)로 나갔다가, 38세 때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 참의 등을 지냈다.
40세 때(1801)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純祖)가 즉위하자 벽파(僻派)에 의해 천주교(天主敎) 탄압이 시작되었다. 다산은 그에 연루되어 경상도 장기(長鬐)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 사건으로 다시 전라도 강진(I来津)으로 이배(移配)되었고, 47세 때(1808, 순조8) 강진현(康津縣)에서 조금 떨어진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山亭)을 빌어 거처를 옮겨, 57세 되던 해(1818, 순조18) 8월 응교(應敎)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여기서 기거 하였는데 , 강진 적거(謫居) 18년 동안 경학(經學)에 전념하여 학문적 체계를 완성하였으며, 저술도 많이 남겼다. 다산은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벼슬에 다시 나가지 않고 18년간 향리(鄕里)에서 여생을 보내며 저술에 몰두하다가 헌종 2년(1836) 2월 22일, 75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생애를 마쳤다.
이 《목민심서》는 1표(表 《경세유표(經世遺表)》) 2서(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목민심서(牧民心書)》) 중의 하나로 총 48권, 12편(篇) 72조(條)로 엮어졌다. 판각(板刻)으로 간행되지는 못하였으나, 필사본(筆寫本)과 신활자본(新活字本)으로 국내외에 현존하는 것이 무려 수십 종이 넘는다. 필사본은 16책본, 8책본 등이 있고, 신활자본은 고종(高宗) 광무(光武) 6년(1902) 백당(白堂) 현채(玄采) 등의 교정을 거쳐 광문사(廣文社)에서 간행된 광문사본(廣文社本)과 1936년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등의 교정을 거쳐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간행된 신조선사본이 대표적인 것이다.
위의 판본(版本)에 대해 원본을 찾아보기 위하여 필사본 중심으로 국립도서관ㆍ규장각 도서관과 성대(成大)ㆍ동대(東大)ㆍ연대(延大) 등의 도서관 또는 개인 소장 등과 일본 천리대 도서관(天理大圖書館) 소장 등을 조사했으나, 원본은 발견되지 않고 성대(成大) 소장의 손리장본(巽里蔵本)이 그 중에는 조금 나은 정도였다. 그리고 활자본으로 광문사본은 분류ㆍ체재 등이 정확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내용 또한 소략하며 신조선사본은 오자ㆍ탈자(脫字) 등이 있으나 다른 본보다는 분류ㆍ체재ㆍ내용 등이 충실하므로 본국역에서는 신조선사본을 대본(臺本)으로 정하고 손리장본 등과 대교(對校)하였다.
다산은 당시 목민관(牧民官) 즉 수령이 백성을 보살피는 목민관의 정신을 망각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 추구에만 급급한 것을 개탄한 나머지, 1817년 제도나 정책개혁의 저술인 《경세유표(經世遺表)》의 저작을 중단하고 이 《목민심서》의 저작으로 옮겼던 것이다. ‘목민(牧民)’ 이란 백성을 기른다는 뜻이요, ‘심서(心書)’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다산의 자서(自序)에서 밝히고 있다. 이 《목민심서》는 다산의 학문과 사상의 집결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본래 탁월한 재품으로 학문의 조예가 워낙 깊었는데 , 18년 동안의 강진 적거(謫居) 생활에서 경학(經學)은 물론, 자사제집(子史諸集)에 이르기까지 더욱 깊이 연구하여 그야말로 학문적 체계가 완성되었다. 이 시기에 《목민심서》가 이루어지고 따라서 문인이나 후세 학자들의 손을 거쳐 보완된 것이다.
더욱이 다산은 내직으로 있을 때 논(論)ㆍ책(策)ㆍ의(議) 등을 많이 올렸었고, 경기 암행 어사로 나가 지방행정의 부패 문란과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의 고통을 직접 보았으며, 곡산 부사(谷山府使)로 나가 수령으로서 직접 체험도 해 보았으며, 유배지(流配地)에서 또한 수령과 서리의 협잡, 민간의 고통을 직접 듣고 보았다. 그리고 소년 시절부터 그의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이 여러 지방의 수령을 역임할 때 직접 백성 다스리는 법과 수령으로서의 몸가짐을 보고 배웠다. 이와 같은 경험과 견문ㆍ지식을 바탕으로 삼아 이 《목민심서》를 엮었다. 그런만큼 이 책이 야말로 다산의 학문과 사상의 집결인 동시에 자신의 경륜을 제시한 것이라 하겠다.
《목민심서》의 12편(篇 강(綱)) 72조는 《경세유표(經世遺表)》 의 수령고적(守令考績)에서 제시한 9강 54목을 확대, 구현 시킨 것이라 하겠다.
《목민심서》의 12편 72조는 다음과 같다.
1. 부임(赴任) 제배(除拜)ㆍ치장(治裝)ㆍ사조(辭朝)ㆍ계행(啓行)ㆍ상관(上官)ㆍ이사(莅事) 2. 율기(律己) 칙궁(飭躬)ㆍ청심(淸心)ㆍ제가(齊家)ㆍ병객(屛客)ㆍ절용(節用)ㆍ낙시(樂施) 3. 봉공(奉公) 선화(宣化)ㆍ수법(守法)ㆍ예제(禮際)ㆍ문보(文報)ㆍ공납(貢納)ㆍ왕역(往役) 4. 애민(愛民) 양로(養老)ㆍ자유(慈幼)ㆍ진궁(振窮)ㆍ애상(哀喪)ㆍ관질(寬疾)ㆍ구재(救災) 5. 이전(吏典) 속리(束吏)ㆍ어중(御衆)ㆍ용인(用人)ㆍ거현(擧賢)ㆍ찰물(察物)ㆍ고공(考功) 6. 호전(戶典) 전정(田政)ㆍ세법(稅法)ㆍ곡부(穀簿)ㆍ호적(戶籍)ㆍ평부(平賦)ㆍ권농(勸農) 7. 예전(禮典) 제사(祭祀)ㆍ빈객(賓客)ㆍ교민(敎民)ㆍ홍학(興學)ㆍ변등(辨等)ㆍ과예(課藝) 8. 병전(兵典) 첨정(簽丁)ㆍ연졸(練卒)ㆍ수병(修兵)ㆍ권무(勸武)ㆍ응변(應變)ㆍ어구(禁寇) 9. 형전(刑典) 청송(聽訟)ㆍ단옥(斷獄)ㆍ신형(愼刑)ㆍ홀수(恤囚)ㆍ금포(禁暴)ㆍ제해(除害) 10. 공전(工典) 산림(山林)ㆍ천택(川澤)ㆍ선해(繕癖)ㆍ수성(修城)ㆍ도로(道路)ㆍ공작(工作) 11. 진황(娠荒) 비자(備資)ㆍ권분(勸分)ㆍ규모(規模)ㆍ설시(設施)ㆍ보력(補力)ㆍ준사(竣事) 12. 해관(解官) 체대(遞代)ㆍ귀장(歸裝)ㆍ원류(願留)ㆍ걸유(乞宥)ㆍ은졸(隱卒)ㆍ유애(遺愛) 위와 같이 매 편에 6조씩 나뉘고, 매 조에 또 강목(綱目)의 체재를 이루었는데 강에서는 자신의 의견으로 대강(大綱)만 제시하고, 목에서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경전(經典)ㆍ사서(史書)ㆍ법전(法典)ㆍ문집(文集) 등에서 구체적인 사례(事例)를 들고, 비판을 가하고 결론을 짓고 경우에 따라서는 처리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기본 원리는 유교 경전에 두고 있다. 인용한 전적은 여러 분야에서 고루 나왔으나, 중국 전적으로는 특히 사서(四書)ㆍ육경(六經)과 사기(史記)ㆍ한서(漢書) 등 중국 정사(正史)인 23(史)와 당대(唐代) 두우(杜佑)의 《통전(通典)》, 원대(元代)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文獻通考)》, 명대 정선(鄭瑄)의 《작비암일찬(昨非菴日纂)》, 명말 청초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日知錄)》 등에서 많이 인용하였으며, 우리나라의 전적으로는 《경국대전(經國大典)》으로부터 《대전통편(大典通編)》까지의 조선왕조의 기본 법전과 《고려사(高麗史)》 또는 정재륜(鄭載崙)의 《공사문견록(公私聞見錄)》ㆍ안정복(安鼎福)의 《임관정요(臨官政要)》 등을 특히 많이 인용하였다.
다산은 끝내 민생에 대한 걱정이었으며, 따라서 《목민심서》에서 제시한 개혁안이 나라에서 시행되기를 몹시 갈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61세 회갑년에 지은 자찬묘지(自撰墓誌)에서 “아는 자는 적고 비방하는 자는 많으니, 만약 하늘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불태워버려도 좋다.”고 울분을 토하였다. 이러한 다산의 애끊는 애민(愛民) 정신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겠는가. 각 편의 내용은, 당해편의 해설에서 소개한다.
1986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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