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화청자의 원류 해남, 가치와 보존대책>
(끝)해남철화청자 도요지 훼손과 보존정책 -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청자 연구에 귀중한 도요지지만 170여 가마터 중 1기만 발굴조사 더 훼손되기 전 발굴 서두르자
화원면 사동리를 중심으로 존재하는 60여기의 가마터는 우리나라 초기청자 생산지로 알려져 있다. 106기의 가마터가 존재한 것으로 조사된 산이면 진산리 일대 가마터는 우리나라 철화청자 발생지이다.
2곳의 가마터는 규모면에서 전국 최대를 자랑한다. 그러나 화원 가마터는 지표조사만 됐을 뿐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았고 산이면 가마터는 106기 중 1곳만 발굴 조사돼 그 가치를 아는 데는 한계가 있다. 두 곳 모두 청자를 생산했다는 점에선 동일하다. 다만 화원면은 청자, 산이면은 철화청자를 생산해 제작기법이 달랐다.
초기청자를 생산한 화원도요지는 한국 청자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청자의 발생시원을 밝힐 유적지로 알려져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학술연구는 더디다. 이유는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자제작기술은 중국에서 유입됐다. 그러나 유입 경로에 대해선 중부권에서 최초 도입했다는 설과 화원면이 있는 남부권이라는 설이 맞서고 있다. 화원 도요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져야 만이 해결될 사안이다.
철화청자가 생산된 산이면에는 구성리 2기, 진산리 80기, 초송리 24기의 가마터가 존재한다. 이중 진산리 17호 가마터 1기만 발굴조사가 이뤄져 고고학 자료가 매우 부족하고 연구 또한 미흡하다. 진산리 17호 요지에선 철화자기와 녹청자로 불리는 조질청자가 주로 생산됐다. 고급자기인 완을 주로 생산했던 화원지역 가마터와는 달리 산이면의 요지는 일상용기가 주를 이뤘다. 그러나 진산리 17호 가마터가 주목받게 된 것은 철화청자 때문이다. 산이 도요지에서 발굴된 철화청자는 주로 장고와 매병이다.
산이면에서 제작된 철화청자 장고 와 매병은 완도 어두리 해저에서 인양됐다. 원형 그대로 출토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철화청자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고 산이 철화청자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철화청자는 산이면이 발생지이지만 전국 여러 가마터에서도 생산이 됐다. 고려시대인 11세 중후반 이후 생산되기 시작한 철화청자는 상감청자가 나오기 전까지 활발히 유통됐다.
철화장고는 장흥 천관사와 남원 실상사에서도 출토가 됐고 장흥 신월리, 영암 월출산 제사유적 출토에서도 철화편이 수습됐다. 익산 미륵사지에선 다량의 철화장고편이 출토됐다.
이들 철화청자는 장식적인 면에서 산이 철화청자와 유사성을 보이고 있어 산이면에서 생산됐거나 산이청자의 기술을 공유한 타 지역 요지에서 생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완도 약산 어두리 해저에서 인양된 선박의 목적지는 경상도와 제주도 두 곳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산이청자는 제주도와 서남해안지역 일대 여러 출토지에서 수습되고 있다. 산이 청자는 주로 조운로와 유사한 형태의 항로를 따라 유통됐고 특히 고려시대 조운체계가 확립된 11세기 후에 유통량이 더욱 증가했다.
산이면은 낮은 구릉지대에 황토와 찰흙으로 된 지질로 이뤄져 점토를 구하기 쉽고 야산을 끼고 있고 땔감이 풍부하며 특히 바다와 인접해 있어 해남만을 통해 유통이 용이했다. 집단가마터가 들어서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84년에 발굴조사 된 진산 17호 가마터를 제외한 105기 가마터는 심각한 훼손을 맞고 있다. 가마터가 집중 발굴된 이곳은 사적지로 지정이 됐지만 지금은 형태도 알아보기 힘든 상태이다. 산이도요지는 화원의 초기청자 기술을 이어받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산이 철화청자는 단순히 자기에 그림을 그리다가 이후엔 상감기법을 이용, 원 상감청자까지 생산한다.
산이에서 출토된 철화청자는 이국적인 모란당초문을 띠고 있어 철화청자 중에서도 단정함이 더욱 돋보이는 유물이다. 그동안 고려시대의 철화청자 발생은 중국의 자주요나 광주 서촌요 등의 영향을 받아 발생한 것으로 추정해 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조사 결과 고려 자체의 기술적 기반과 전통 위에 자생적으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의 문양은 일반적인 청자의 문양과는 다른 자유롭고 활력이 있으며 해학을 담은 이질적인 예들이 많아 주목된다.
산이 청화청자와 같이 초기 철화청자를 제작했던 가마터로는 강진군 사당리가 있다. 상감청자 생산지로 유명한 강진군은 청자박물관을 짓고 체계적인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청자박물관에는 도자기 전문 학예사도 배치해 강진 상감청자를 비롯한 철화청자 연구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해남군은 청자 발생지인 화원면과 철화청자 발생지인 산이면 가마터 발굴 및 조사연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좁은 지역에 대규모 가마터가 존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강진만 해도 해남처럼 한곳에 100여기의 가마터가 밀집된 곳은 없다.
화원면 초기청자는 한국의 청자역사를 바꿀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다. 산이면 도요지는 철화청자 연구의 보고이다. 철화청자가 어떻게 탄생했고 변화했는지 풀 열쇠라는 것이다. 더 훼손되기 전에 연구조사를 위한 발굴조사를 서둘러야 한다.
한편 철화청자는 13세기 초까지 발전을 거듭하다 무신 정권에 의해 중국과의 문화 교류가 끊어지고 고려 독자적인 세계를 이루면서 상감청자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12세기 들어 자기생산은 강진과 부안을 중심으로 바뀌고 13세기가 되면 중부 이남의 조질청자 도요지가 소멸되거나 줄어든다. 산이 청자 역시 조질의 청자와 주용 생산품인 철화청자를 중심으로 요업활동을 하다가 품질의 저하로 수요 하락과 다수의 가마 운영에 의한 원료의 고갈 등으로 13세기 중반 사라진다.
박영자 기자/
사진설명 ▼철화청자는 산이면을 비롯한 고려시대 많은 도요지에서 생산됐다. 이들 철화청자는 산이면의 기술이 타 지역 요지로 확산된 것으로 추정된다.(부산박물관에 전시된 철화장고 편)-하단위 ??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철화청자-하단왼쪽 ??
▼군산 십이동파도에서 인양된 산이 청자(국립중앙박물관)-하단오른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