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변증법 外

2013. 7. 16. 22:43우리 이웃의 역사

  

 

    헤겔의 변증법

 

    예로부터 동양인들은 변증법이라는 한자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서양철학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는 변증법이라는 한자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은 동양에서의 변증은 개념의 분석을 생각했던 것인데, 지금은 대화 또는 토론의 뜻을 더 많이 지니게 된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변증법의 어원은 대화로 되어 있다. 대화 또는 토론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갑은 A를 주장한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을은 A에 반대되거나 A가 아닌 B를 주장한다. 그래서 A냐 B냐를 두고 토론을 하다가 결국은 A도 B도 아닌 C를 택하게 된다. C는 A와 B를 합친 것이면서도 A와 B를 초월한 것이다. 그런데 병이 나타나 C를 반대하는 주장을 내세운다. 그것은 D라고 말한다. 그러면 C와 D를 두고 토론하던 두 사람은 C도 D도 아니면서 그것을 합쳐 초월하는 E의 결론을 얻게 된다.

 

    그래서 대화와 토론은 더 높은 차원의 결론으로 유도, 발전되는 것이다. 이렇게 반대와 대립에서 제 3의 것으로 발전하는 대화와 토론의 기능, 그것을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플라톤의 모든 저서는 대화법으로 되어있다. 그것을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계속되는 대화에서 명백하고 믿을 수 있는 개념을 얻어내는 것을 변증적 사고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헤겔은 이러한 변증법을 철학의 모든 분야에 적용시킨 것이다.

 

   인식과 역사는 물론 철학적 존재론에까지 확대시켜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 변증법의 방법은 논리학에 근거를 두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헤겔의 "논리학"을 다른 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논리학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헤겔에 있어서는 그것은 논리학이라기보다는 논리학을 포함하는 변증법이며 변증법 자체가 그의 철학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보자. 내가 셰익스피어를 읽었다. 그로부터 어떤 사상이나 예술관을 얻게 되었다. 그것을 지금 가지고 있는 정(Thesis)의 위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게 되었다. 괴테와 셰익스피어 사이에는 서로 어긋나고 반대되는 점이 있었다. 괴테는 어떤 면에서 셰익스피어에 대한 반(Anthesis)의 위상에 속하는 것이 있었다. 나는 셰익스피어와 괴테를 대립시켜보면서 더 높은 제 3의 사상이나 예술관을 갖게 된다. 그것은 정과 반의 합의 위치로 올라가는 것이다.

 

   만일 셰익스피어와 괴테가 같은 내용이었다면 즉 반이 없었다면 양적으로 더 많은 지식은 얻을 수 있으나 질적으로 더 높은 것은 탄생되지 못한다. 그 다음에는 다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다고 하자. 그 때는 합의 위치의 지식이 정이 되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반의 자리를 차지해 또 하나의 높은 차원의 사상과 예술관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되어서 인식과 지식이 성장, 발전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런 견해를 변증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해서 기독교는 오랫동안 카톨릭의 위치로 굳어져 왔다. 그 안에 갈등도 생기고 모순도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에 루터 같은 종교 개혁가가 나타나 반카톨릭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처음에는 그 세력이 미미했기 때문에 카톨릭은 루터를 파문에 처하고 추방해버린다. 그러나 루터를 비롯한 프로테스탄트의 세력이 크게 성장해 마침내는 카톨릭과 동등한 세력을 갖추게 된다.

 

    그렇게 해서 기독교는 두 갈래의 대립상대를 만들게 되나, 결국은 그 때문에 기독교는 더 성숙되고 원만한 제 3의 것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이 때 카톨릭이 프로테스탄트라는 아들을 낳지 않으려고 그 자리에 머물러버린다면 카톨릭이라는 어머니는 죽음을 스스로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대립에서 발전에의 과정을 역사에서는 언제나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런 작용을 변증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변증법이 인정받는 것이다.

 

    이 때 주의하게 되는 것은 동질적인 내용은 변증적 발전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반대되는 내용들은 어느 정도 대립과 변증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모순관계는 반드시 변증적 발전을 일으킨다. 그래서 헤겔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순의 논리를 현실화시켜 나간다. 반대개념 사이에는 중간이 있을 수 있다. 높은 산과 낮은 산은 중간 산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생과 사, 유와 무는 중간이 없는 모순관계이다 모순은 논리에서는 항상 비라는 개념을 동반한다. 유와 비유 같은 헤겔의 애용개념이 여기에 나타난다. 이런 의미를 전제로 한다면 헤겔의 변증법을 그대로 받아들일수는 없어도 변증법적 사고는 있을법하고 또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헤겔의 변증법을 수정, 발달시킨 대표자가 마르크스였고 키에르케고르였다. 

 

 

 

 

 

헤겔의 변증법의 이해

 

같은 사이트에서 가져왔습니다. 아래 밝힌 것처럼, 변증법에 대한 이해는 이 부분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특히 예1과 예2 부분을 (정-반-합) 의 일반적인 이해와 비교해서 생각해 본다면 얻는 바가 클 듯 합니다. 원문 그대로입니다.
거친 이해이지만, (정-반-합)의 논리보다는 (정립-모순의 동시적 존재 인식-모순 인정을 통한 새로운 차원으로의 승화)가 헤겔 변증법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변증법(헤겔의 설명) : 변증법이란 방법적으로 형성된 규칙적인 모순의 정신이며, 이는 모든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다.
○ 매우 흔한 오해 : 변증법이란 말을 듣는 순간 대부분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 - "정립", "반정립", "종합"(3박자). → 헤겔은 한번도 이러한 형식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앞에서 설명된 내용도 오해에 해당한다.>

헤겔 변증법의 예들

예<1>- 사랑

1) 사랑을 하는 개별적 자아로서 한 인간이 있다. 그의 개별성은 이 때까지 자기 자신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독립해서 그 자신의 발로 선다. 즉 자아는 자신을 긍정하며 자신을 자기 정립으로서 파악한다.

2) 그러나 사랑 안에는 어떤 고유한 것이 일어난다. 사랑에 빠진 자는 그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자신을 몽땅 내어 바치는 그런 행위를 한다. 이것은 분명한 자기 부정이며 그 자신의 고유한 자아에 대한 부인이기도 하다. (자아가 이러한 부정에만 계속 머물러 있다면 숙명적인 결과, 즉 예속과 비극적 종말이 초래될 것이다.)

3) 그러나 이제 결정적인 어떤 것이 발생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 주면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고유한 인격을 포기하면서 그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새롭게 경험한다. 그는 타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거기서 자신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깊이로 나아간다. 헤겔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이 단계는 종합으로서 최초의 부정에 대한 부정일 것이다.

→ 자아의 최초의 부정은 스스로 부정된다. 이 이중적 부정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새로운 자아를 발견한다.

예<2>

1)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 돌은 돌이다. 그러나 이 언명으로 얻어지는 것은 전혀 없다.

2) 개개의 존재자는 자기 자신과의 구별을 지닌다.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은 다른 것과는 구별된다. 다시 말하면 사유가 더 많은 어떤 것을 언명하고자 하면 사유는 상이한 어떤 것을 불어들여야만 한다. 예를 들어, 돌은 나무가 아니다.)

3) 나의 의식은 나로부터 어떤 것을 구별한다. 혹은 나는 그 어떤 것을 그것이 관계맺고 있는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구별해 낸다.

(2)의 인식과 함께 우리는 이미 현실의 변증법적 운동 한가운데 서 있다. 나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구별을 인식하려 하며, 따라서 나의 지식을 향상시킨다.)

예<3>

1) 대상은 그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리고 대상은 나와 나의 인식과는 독립적인 존재를 갖는다. 대상은 즉자적으로 대상이다. 대상의 진리 그리고 대상의 본질은 그 자체 안에 갇혀 있다. 헤겔은 이것을 "즉자 존재"라 하며 동시에 그것을 대상의 진리와 본질로서 설정한다.

2) 다음과 같은 관계가 결과한다. 대상이 독립적인 즉자를 갖는다면 현상도 갖는다. 대상은 나에게 현상하며, 나의 의식에 관계한다. 대상은 "나에 대해서" 나무다. 헤겔은 이 존재를 "대타 존재", "대타적 의식의 존재"라 한다. 대타적인 것은 즉자의 부정이다. 즉자가 이를 통해서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 대타적인 것은 "즉자적"이었던 것과 대립해 있는 셈이다.

3) 그러나 대상은 대타 존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것은 현상으로서 또한 부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자, 즉자와 대자, 본질과 현상은 나의 지식 안에서 함께 합쳐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대상, 즉 개념(예컨대 나무)이 발생한다.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나무와 두 철자 나-무는 다르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예<4>

1) 자신의 근원적 독립성 속에서 대상은 현존한다.

2) 이 대상은 다른 대상과 구별될 때만 독립적이다.

3) 그러나 이 구별은 그 자신의 관계성을 뜻한다. : 구별된 것은 소위 독립적인 것과 관계한다. 그러므로 부정은 자기 정립과 모순의 통일로 나아간다.

예<5>

1) 개개의 대상은 우선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 그리하여 즉자이다.

2) 그러나 그 대상은 또한 구별, 즉 자신의 대립, 나 혹은 다른 것을 위한 존재를 갖는다.

3) 이 대립은 또한 지양된다. 그리고 즉자와 대타 사이의 통일은 나의 지식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지를 풍부하게 한다. 이 통일은 대자 존재에 있다.

<<이상의 예들은 모두 「쉽게 읽는 헤겔, 정신 현상학」, (랄프 루드비히, 이동희 역)에서 발췌한 것임>>

변증법 이해를 위한 명제 : 현실은 운동 속에 있다.

변증법의 의미 : 사물을 인식하는 정신의 변화과정(혹은 운동과정)을 형식화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헤겔에게 있어서 세상의 모든 것은 정신이기도 하므로 이제 그 정신의 변화과정은 곧 세상 모든 것의 변화과정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헤겔의 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 그래서 이해하기 쉬운 것은 내가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변증법을 사물 자체의 운동 과정으로서 파악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헤겔의 변증법 이해에 있어서의 변증법

1) 최초의 변증법 이해 : 그것은 단순한 이해이다. 그것은 하나의 출발이기도 하다.

2) 최초의 변증법 이해의 부정 :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새로운 변증법 이해와 대립시킨다.

3) 대립의 지양 : 자기 부정을 통한 지양과 새로운 자기 정립(변증법이란 무엇인가를 새롭게 정립한다.)

→ 여기서 우리는 왜 잘못된 변증법 이해로 출발하는가? 그것이 쉽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정확한 이해로부터만 출발하려 하면 출발하지 못한다.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단순한 것에서부터 자기부정과 지양을 통해서 발전하는 지식의 한 예를 여러분이 스스로 경험하고 있다.

○ 헤겔 변증법 이해의 한 방식

헤겔의 변증법은 순수한 정신의 운동양식이다. 즉 정신이 어떤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1단계) 그것에 대해서 반성하고(2단계) 그 반성을 통해서 종합적으로 확장하는 것(3단계)을 기술한다. 


헤겔의 변증법 이야기

 

   칸트가 인간의 이성으로 사유할수 있는 능력의 한계, 즉 넘지 말아야할 금단의 영역을 넘게 해준 매개가 헤겔의 변증법이다. these, antithese, synthese로 구성된 헤겔의 변증법은 기존에 존재하는 인간의 생각인 정명제, 정명제의 본질적 모순에 반하는 반명제, 이 둘의 상호작용에 의해 생산된 종합적 결론인 종합명제라는 순서로 알려져있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명제와 반명제가 서로 공존할수 없는 성질의 것으로 보고 이 둘이 동시에 증명되는 모순이 일어나는 상황은 바로 인간이 이성으로 사유해서는 안되는 영역을 침범한 결과물이라고 말하였다. 이 둘이 서로 공존할수 없는 전혀 다른 성질의 가치라는 전제가 잘못된 것이다.

 

    인간의 생각에 대해 칸트는 고정되어 있는 것, 절대이성으로 본 반면에 헤겔은 인간의 생각을 움직이는 것, 곧 운동으로 보았다. 두 철학자간의 큰 차이가 여기서 보인다.

 

    여기서 잠시 메주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메주의 예를 이해하면 칸트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이해할수 있다. 콩을 삶아서 소금과 섞어서 절구로 찧어서 메주를 만드는 과정을 반추해보자. 할머니가 메주를 만드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어린 소년의 눈엔 '콩이 사라졌다.' 내지 '소금이 녹아버렸다.' 그리고 '메주란 녀석이 갑자기 나타났다.'라는 단견을 가지게 되지만 사실 콩과 소금은 아직 메주 속에 살아있다. 본연의 성질을 잃어버린 것이지만 콩과 소금의 성질의 일부는 남아서 메주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사물의 형태의 변화에도 변치않고 남아있는 본질의 가치는 존재한다.

 

    간혹 광장이나 당에서 헤겔의 변증법을 공부했다는 회원이나 당원들을 만나서 대화를 해보면서 아직 이들이 변증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과거의 생각, 즉 정명제와 현재의 생각, 즉 반명제가 서로 단절된 전혀 다른 성질의 것으로 파악하는 부분이다. 이는 명백히 헤겔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과거의 생각을 쓰레기통에 버리자는 반이 아니라 과거의 생각을 현재의 생각으로 바라보자는 의미에서 반이다. 현재의 생각에 과거의 생각은 녹아들어가 있다. 이를 철학적 용어로 현재화라고 부른다.

 

     간혹 정신분석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정신분석은 유사과거나 과거의 범주로 해석하고 분석하는 비효율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헤겔의 변증법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오류이다. 현재는 절대 과거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만일 인간의 정신이나 현재가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면 그것은 혼자만의 상상으로 만든 공상영화일 뿐이다.

 

 

 

헤겔의 변증법과 전체주의

 

헤겔은 정반합(正反合)의 개념으로 변증법을 정형화 하였습니다.

 

변증법은 만물이 본질적으로 끊임 없는 변화 과정에 있음을 주창하면서, 그 변화의 원인을 내부적인 자기부정, 즉 모순에 있다고 보았죠. 즉, 원래의 상태를 정()이라 한다면 모순에 의한 자기부정은 반()입니다. 만물은 이 모순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운동하며 그 결과 새로운 합()의 상태로 변화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최고의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이러한 변화는 계속된다는 것이죠. 헤겔은 인간의 정신이 이러한 변증법적 과정을 경유해서 자연 · 역사 · 사회 · 국가 등의 현실이 되어 자기 발전을 해가는 체계를 정리하였습니다.

 

전체주의개인의 모든 활동은 민족ㆍ국가와 같은 전체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이념 아래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상을 말합니다. 이는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독일의 나치즘이 대표적이죠.

 

정리하자면 자기발전은 곧 국가와 민족의 발전이다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