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시와 그림] 8. 취차사가운 증산상인(醉次四佳韻 贈山上人) / 매월당 김시습 抄錄

2016. 2. 22. 01:29茶詩


[차, 시와 그림] 8. 취차사가운 증산상인(醉次四佳韻 贈山上人)  /  매월당 김시습 原稿 資料 抄錄


      



醉次四佳韻 贈山上人

                                        雪    岑


山中無紀曆 景物可能知 산중무기력 경물가능지

日暖野花發 風薰簷影遲 일난야화발 풍훈첨영지

園收霜栗後 爐煮雪茶時 원수상률후 로자설다시

且莫窮籌算 百年推類玆 차막궁주산 백년추류자



  취해서 사가(四佳)의 운을 따라 지어 산 대사에게 주다

                   

산중에 기록할 책력 없네만 풍물 보면 짐작해 알 수 있다네

날 따뜻해지면 들꽃이 피어나고 바람 훈훈해지면 처마 그늘 더디가네

동산에서 서리 맞은 밤 거둔 뒤요 화로에는 눈으로 차 끓일 때라

아직은 그리 깊이 계산하지 마라 백년 쯤은 유추(類推)하여 이를 알리라


           ****   四佳 : 조선초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徐居正의 호 四佳亭





페데리코 안드레오티  < 차 마시는 오후   An Afternoon Tea>    

(Federico Andreotti / 1847~1930)





(차 마시는 오후   An Afternoon Tea)


예전 귀족들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너무 화사하고 즐거워 보여서 오히려 속이 쓰립니다.

 이 그림을 거실에 걸어 놓고 옛날을 회상하는 귀족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어느 누군가는 불을 지르고 싶은 마음도 들었겠습니다.

 

안드레오티는 해부학 시간에 배운 인체에 대해 정확한 지식과 그의 정밀한 기술 그리고 당시 인상파 화가들이

시도했던 새로운 색상 이론을 받아들여, 더욱 로맨틱한 분위기를 그의 작품 속에서 만들어 냈습니다





   위의 매월당 김시습의 <취해서 사가(四佳)의 운을 따라 지어 산 대사에게 주다(醉次四佳韻 贈山上人)> 의 한시에 나오는 "동산에서 서리 맞은 밤 거둔 뒤요 / 화로에는 눈으로 차 끓일 때라... "의 차맛과  아래 그림 이탈리아의 화가 페데리코 안드레오티가 그린  <차 마시는 오후   An Afternoon Tea> 에서 그려진 유럽 귀족들의 오후차의 차맛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유로는 매월당의 한시의 다음 구절 "아직은 그리 깊이 계산하지 마라 백년 쯤은 유추(類推)하여 이를 알리라."에서 잘 나타난다. 그림 <차 마시는 오후   An Afternoon Tea>에서 나이든 가족들이  야외용 티테이블에 앉아 다담을 나누고 있는 사이 젊은 연인들이 서로 정담을 나누는 광경을  화가 안드레오티가 그림 전면에 배치하여 강조하고 있다. 매월당이 "백년 쯤은 유추하여 이를 알리라.'표현한 것과 그림 왼쪽에 서 있는 세사람 중 귀부인이  젊은 남녀에 흐뭇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은 동일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버들개지가 피면 봄이 머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풍경이나 사람의 행동과 태도 또는 표정 등을 보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어느 정도 미리 예측할 수 있다라는 것은 동서 고금을 달리하지 아니하고 같이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동 쌍계사에 있는 국보 제47호 진감선사탑비(雙磎寺 眞鑑禪師塔碑)에 어느 이름 모를 석수장이가 새겨 놓은 글귀 처럼


" 차라는 것이 다만 배를 적셔주는 물건일 뿐" 일때  굳이 차맛을 서로 구별하는 것은 무슨 소용이  따로 더 있을 수 있겠는가? 


구인 체(體)에 탐닉하다 보면 본래의 쓰임인 용(用)을 망각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어떤 물건이든 그 용도에 알맞게 사용하면


뿐이다. 가끔은 소비가 미덕이라는 오늘날의 차모임 등에서 본말이 전도된 경우를 흔하게 보아온 터라 한마디 덧붙인다.






  < 참고 자료>


김시습(金時習, 1435년 ~ 1493년)은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강릉, 자(字)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불교 법명은 설잠(雪岑)이다.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수양대군단종에 대한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은둔생활을 하다 승려가 되었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일설에는 그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경기도 노량진(현재의 서울 노량진 사육신 공원)에 암장했다고도 한다.

1493년 조선 충청도 홍산군 무량사에서 병사한 그는 이계전(李季甸), 김반(金泮), 윤상(尹祥)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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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코 안드레오티  (Federico Andreotti / 1847~1930)


 Italian Academic Classical artist /1847 ~ 1930



19세기 대부분 유럽 사회는 혁명과 전쟁 그리고 산업혁명의  혼란기였으나 

예전의 평화롭고 낭만적인 시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그림과 화가들이 등장했고,

작품에 대한 인기도 아주 높고 페데리코 안드레오티(Federico Andreotti / 1847~1930)도

그 화가들 중의 한 명이었다

 

 

안드레오티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으며 피렌체의 붉은 지붕과 좁은 골목길

 그리고 다리들... 피렌체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한 안드레오티의 그림은

보는 사람 모두를 즐겁게 한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안드레오티는 학교를 졸업한 후 16 ~ 17세기 귀족들의 우아하고 달콤한 생활을

주요 주제로 작업을 했는데 그 이유는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어지러운 현실에 빗대어

 과거에 대한 향수가 유행했기 때문입니다

 

안드레오티의 작품은 곧 많은 인기를 얻게 됩니다.

 여러 사람이 그의 작품을 예약하고 후원했는데, 최대 후원자는

이탈리아 왕국의 왕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안드레오티의 그림이 밝고 화사한 것은 주제도 주제이지만,

 이런 경제적인 걱정으로부터 자유스러웠기 때문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