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시와 그림] 6. 새로 만든 차(신차 新茶) - 정약용, 육원중, 윤영희 抄錄

2016. 2. 10. 17:02茶詩



       [차, 시와 그림] 6. 새로 만든 차(신차 新茶) - 정약용, 육원중, 윤영희   原稿 資料 抄錄





       새로 만든 차[新茶]

                                                 정약용, 육원중, 윤영희


소금장 밖에는 높다란 깃대를 세우고서          銷金帳外建高牙
게의 눈과 고기 비늘 안화가 가득하여라         蟹眼魚鱗滿眼花
가난한 선비는 점심 끼니도 채우기 어려워      貧士難充日中飯
새 샘물 떠다 부질없이 우전차를 달이도다      新泉謾煮雨前芽
백성의 근심은 신선 경계에서 묻지를 마소      民憂莫問群仙境
수액은 손 사절하는 집에 누가 나누어줄꼬      水厄誰分謝客家
스스로 믿노니 가슴 속에 막힘이 없는데다      自信胸中無壅滯
청고한 맛의 차를 마시니 더욱 자랑스럽네      喫添淸苦更堪誇

 

항상 맑은 물로 늙은 치아를 닦고자 하여         玄淡常思潄老牙
몇 군데의 명산에서 선화를 보았던고              名山幾處見仙花
곡우 전에는 어떤 이가 호구차를 주었는데       雨前人致虎口
구름 밖에선 누가 용정차를 전해 줄런고          雲外誰傳龍井芽
병든 몸 이미 말랐는데 마음은 죽지 않았고      病骨已枯心未死
옛 전원은 비록 있으나 꿈에는 집이 없다오      故園雖在夢無家
노동은 허물어진 집에 하 많이 굶주리면서       盧仝破屋多饑餒
양액의 청풍을 도리어 스스로 자랑하였네
        兩腋淸風還自誇

 

이상은 원중의 시이다.

 


문득 입 안에 진진한 맛 이는 걸 느끼어라        忽覺津津動頰牙
선생의 붓 아래 완연히 꽃이 피는 듯하네         先生筆下宛生花
사제는 몹시도 매운 향기가 떠 움직이고          麝臍酷烈浮香氣
작설의 새싹은 뾰족하게 새로 솟아나도다        雀舌尖新迸早芽
제조하는 법칙은 정채의 솜씨에 의거하고        碾硏法依丁蔡手
맵고 단 성미는 심서가의 장부에 알맞아라       辣甘性合沈徐家
시를 이루매 용육을 얘기한 내가 우스워라       詩成笑我談龍肉
오직 산나물이 있어 맛을 자랑할 만하다오       獨有山茹味可誇

 

이상은 외심의 시이다.





[주D-001]게의 …… 안화(眼花) : 게의 눈과 고기 비늘은 곧 차를 끓일 때에 물이 부그르르 끓어오르는 모양을 형용한 말이고, 안화란 눈이 어른어른하는 것을 이른 말이다.
[주D-002]우전차(雨前茶) : 곡우(穀雨) 때에 채취하여 제조한 차를 이름.

 

[주D-003]수액(水厄) : 차를 무리하게 많이 마시게 됨을 이름. 진(晉) 나라 때 왕몽(王濛)이 차를 매우 좋아하여 손이 그의 집에 가면 반드시 차를 마시게 되므로, 당시 사대부들이 이를 매우 고통스럽게 여겨, 매양 왕몽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반드시 “오늘은 수액(水厄)이 있을 것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4]선화(仙花) : 차의 별칭이 선아(仙芽)이므로 차의 꽃을 이른 말이다.

 

[주D-005]노동(盧仝)은 …… 자랑하였네 : 노동은 당(唐) 나라 때의 시인인데, 허물어진 집이란 곧 한유(韓愈)노동의 〈월식(月蝕)〉 시를 칭찬하여 지은 시에서 “낙성에 살고 있는 옥천 선생은 허물어진 집 두어 칸이 있을 뿐이네.[玉川先生洛城裏 破屋數間而已矣]” 한 데서 온 말이고, 양액(兩腋)의 청풍(淸風)이란 바로 노동이 차(茶)를 좋아하여 차를 예찬하는 시에서 “ …… 다섯 잔을 마시면 기골이 맑아지고, 여섯 잔을 마시면 선령이 통하고, 일곱 잔은 미처 다 마시기도 전에 두 겨드랑에서 맑은 바람이 솔솔 일어남을 느끼게 된다.[五椀肌骨淸 六椀通仙靈 七椀喫不得 唯覺兩腋習習淸風生]”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6]제조하는 …… 의거하고 :  정채(丁蔡)는 송(宋) 나라의 정위(丁謂)채양(蔡襄) 두 사람을 합칭한 말인데, 복건성(福建省) 건주(建州)에서 생산되는 용단차(龍團茶)를 전후에 걸쳐 이 두 사람이 제조하였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주D-007]맵고 …… 알맞아라 :  심서가(沈徐家)는 곧 당(唐) 나라의 심전사(沈傳師)와 서회(徐晦)를 합칭한 말인데, 심전사는 음식을 잘 먹었고 서회는 술을 잘 마시는 주호(酒豪)로서 일찍이 양사복(楊嗣復)이 말하기를, “서가(徐家)의 폐장(肺腸)과 심가(沈家)의 비장(脾腸)은 참으로 편안한가?" 한 데서 온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4 

 

      - 시(詩) 우세화시집(又細和詩集) [1] 제7권 / 다산시문집


- 블로그 미 <다산을 찾아서> 참조

 http://sambolove.blog.me/150101060817 



**** 전재자 註 : " 碾硏法依丁蔡手"는 정위의 제다법(웅번선화북원공차록)과 채양의 다서 <다록>에 따라 만든 용단차를 찻맷돌로 갈아

                가루차(末茶 : 韓中, 抹茶 : 日)를 만든 다음, 점다법(點茶法)으로 다완에서 찻솔로 격불하여 마시기 전에 찻맷돌에 가는 단계를 

                지칭한다.

                   다산의 평생 친구였던 외심 윤영희가 살았던 조선조 후기에도 돈차, 청태전 등의 차(錢茶)를 손수 찻맷돌에 갈아서 만든 

                가루차를 상용하고 있었다는 사례가 되는 시이다. 여기서 연(硏 = 礳)은 상하 두짝으로 된 돌맷돌로 가루차를 만들 때 흔히 

                쓰이며, 반면에 연(碾)은 약연과 같이 배 모양의 몸체인 연발(碾鉢)에 굴렁쇠가 있는 차방아(차갈개)로 차를 가는 쌀겨 정도 

                크기의 거친 가루로  만든 다음  당대의 육우식 자다법(煮茶法)으로 달여 마시는 다법에 흔하게 쓰인다.


                   그러나 위의 싯귀에서 정위와 채양연년법(碾硏法)이라 하였으므로 단차나 병차(餠茶), 전차(錢茶)를 아주 미세한 가루로

                만들어 찻솔(다선 茶筅)로 저어 마시는 송대의 점다법으로 해석함이 바르다.

                  

                    반면에 명나라 시인인 육원중의 시에서는 눈노아(潄老牙), 호구(虎口 : 중국 소주 虎丘山의 당시 이름), 용정아(龍井芽) 

                등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포다법(泡茶法)에 의한 녹차 우려마시기가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외심 윤영희세화시에서  "사향처럼 향기로운 차에 매운 향기가 떠오르고(麝臍酷烈浮香氣)"에서 '매운 향기'는

                다산월출산 백운동에 사는 제자인  이시헌(이대아 1803~1860)에게 보낸 서간문에서 처럼 삼증삼쇄(三蒸三曬)에 의해서

                만들어진 증제일쇄차(蒸製日曬茶)인 떡차를 다려 마실 때 풍겨지는 매운 향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다산의 차운시인 우세화시에서 "새 샘물 떠다 부질없이 우전차를  다리도다( 新泉謾雨前芽)"는 곡우전 어린 

                잎으로 만든 우전차로 만든 녹차 잎차를 전다법(煎茶法)에 의하여 달여서 마신 것을 표현한 것으로, 삼인의 차운시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명과 조선에서 선호하는 다법이 서로 다르고, 평생의 벗인 다산과 윤외심산차 전다법과 단차를 찻맷돌에

                간 가루차 점다법으로 서로 화운(和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조 후기에 이르기 까지 사대부들이 찻자리의 분위기에 

                따라서 선호하는 다양한 다법으로 차를 즐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 무용총 벽화



                                    서역에서 온 불승(佛僧)으로 보이는 2명의 손님을 접대하는 묘주인의 모습이 그려진

                                                           중국 지린성 지안현의 무용총 안칸 안쪽 벽의 벽화.

                                    왼쪽 2명이 불승이고 가운데 시중드는 작은 남자를 마주보고 있는 사람이 묘주인이다. 


묘주인과 서역승 앞에 각각 놓인 낮은 상에는 식기인지 다기인지 확실하게 구분하기 어려우나

   대일항쟁기에 만주지방의 고구려 옛무덤에서 출토된 떡차(團茶)의 표본이 실재하고 있음은

고구려 고분이 만들어진 4 ~7세기 경에도 음차문화가 보편화되어 있음을 뜻하며

손님을 접대할 때 식사대접과 접빈다례가 함께 이루어졌음을 유추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이러한 사실은 허황후(許黃玉, 33~ 89년)에 의한 가야차의 전래설(48년)과 함께 우리의 차문화의 기원을

김대렴에 의한 중국에서 차전래를 기록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 3년(828년)의 기록보다

약 500~800 여년 앞당겨주는 일이 된다.




<참고자료>

   고구려 떡차 = 일본인 사학자 아오끼(靑木正兒) 소장 - 고분출토 유물 -고구려의 옛무덤에서 출토된 떡차 3개이다.
 「나는 고구려의 옛 고분(古墳)에서 출토되었다는 모양이 둥글고 얇은 작은 병다(餠茶) 한 조각을 표본으로 간직하고 있는데, 직경이 4cm 정도의 엽전(葉錢) 모양에 두께는 닷푼(5分) 가량이 된다.」

                                                           [출처] 一味茶禪 / 첫 맛과 마음수행. 떡차(餠茶)의 정의 |작성자 후현


 





***   이하 참고자료 


                     

다산 정약용의 그림과 시| 문화유적 탐방


李相仁 | 조회 209 |추천 0 | 2016.03.23. 10:50           



고전산책에 재미있는 글이 올라와 있어 옮깁니다. 



하피첩(霞帔帖)과 매조도(梅鳥圖)

  저 남녘땅 강진 백련사는 갈 때마다 늘 좋다. 찻집 만경다설(萬景茶說)에서 바라본 배롱나무, 그 너머로 펼쳐지는 강진의 바다, 다산초당(茶山艸堂)으로 넘어가는 아늑한 산길. 이 길을 두고 소설가 한승원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했다. 그 길을 걸을 때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그림 한 폭이 생각난다. 다산이 그림을 그렸다고 하면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다산은 몇 편의 그림을 남겼다.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한 지 10년째 되던 1810년, 남양주에 있던 부인 홍씨 다섯 폭짜리 빛바랜 치마다산초당으로 보내왔다. 부인 홍씨가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였다. 그 치마를 보자 깊은 곳에서 그리움이 사무쳤다. 다산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다산은 치마폭을 오려 거기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하피첩』(보물 1683-2호,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매조도(梅鳥圖)>(고려대박물관 소장)다.

  『하피첩』은 두고 온 두 아들을 위해 1810년 교훈이 될 만한 글을 적어 책자 형식으로 만든 3권짜리 서첩이다. 하피는 노을빛 치마라는 뜻으로, 부인이 보내준 붉은 치마를 가리킨다. 지난해 9월 한 미술품 경매에서 국립민속박물관이 7억5000만 원에 사들여 화제가 되었던 바로 그 서첩이다. 머리말을 보자.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는데 병든 아내가 다섯 폭짜리 헌 치마를 보내왔다. 그것은 시집올 때 가져온 훈염(纁袡, 시집갈 때 입는 붉은 활옷)이었다. 붉은빛은 이미 바래 담황색이 되어 서본으로 쓰기에 알맞았다. 이를 잘라 마름질하고 작은 첩을 만들어 손 가는 대로 훈계의 말을 지어 두 아들에게 전한다. 훗날 이를 보고 감회를 일으켜 어버이의 자취와 흔적을 생각한다면 뭉클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余在耽津謫中 病妻寄敝裙五幅 蓋其嫁時之纁袡 紅已浣而黃亦淡 政中書本 遂剪裁爲小帖 隨手作成語 以遺二子 庶幾異日覽書興懷 挹二親之芳澤 不能不油然感發也]

  유배 생활을 하면서 다산이 가장 걱정한 것 가운데 하나는 폐족(廢族)이었다. 자신과 자신의 형들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된다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을까. 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두 아들 학연학유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 아들에게 늘 근면과 수양, 학문을 독려하는 편지를 보냈고 이렇게 『하피첩』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이 글은 다산의 문집인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도 실려 있다. 문학작품 같은 글이 아니라 짧은 머리말 글이지만 오랜 세월 다산의 마음이 전해지면서 고전 같은 분위기로 다가온다.

  『하피첩』을 만들고 3년 뒤인 1813년 다산은 남은 치마폭을 오려 딸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 <매조도>로 불리는 이 그림은 참 단순해 보인다. 매화꽃 핀 나뭇가지에 참새 두 마리…. 하지만 사연을 들여다보면 그 애잔함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다산은 그림 아래쪽에 시 한 편을 적었다.


<매조도(梅鳥圖)>(고려대박물관 소장)


저 새들 우리 집 뜰에 날아와
매화나무 가지에서 쉬고 있네
매화향 짙게 풍기니 그 향기
사랑스러워 여기 날아왔구나
이제 여기 머물며
가정 이루고 즐겁게 살거라
꽃도 이미 활짝 피었으니
주렁주렁 매실도 열리겠지

翩翩飛鳥
息我庭梅
有烈其芳
惠然其來
爰止爰棲
樂爾家室
華之旣榮
有蕡其實

  이어 그 옆에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도 함께 써넣었다.

  강진에서 귀양살이한 지 몇 해 지나 부인 홍씨가 해진 치마 6폭을 보내왔다. 너무 오래되어 붉은색이 다 바랬다. 그걸 오려 족자 네 폭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이 작은 그림을 그려 딸아이에게 전하노라.[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敝裙六幅 歲久紅渝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爲小障 以遺女兒]

  이 사연은『하피첩』의 머리말과 흡사하다. 부인이 보내온 해진 치마, 그걸 오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던 다산. 유배 전부터 치마를 오려 표지 장정으로 사용하기를 즐겨했던 다산이었지만, 그럼에도 『하피첩』과 <매조도>엔 유배객의 쓸쓸하고 곤궁한 삶이 그대로 전해온다. 곤궁한 삶 때문인지 그리움은 더욱 진하게 묻어난다. 다산은 아홉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여섯을 어린 나이에 병으로 잃고 두 아들과 딸 하나만 남았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 갈 때, 막내 딸아이는 겨우 여덟 살이었다. 아비로서 다산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여덟 살짜리 딸을 남겨 두고 기약도 없이 이어지는 유배생활. 그런데 때마침 얼마 전 그 딸이 출가를 했다. 아비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도 딸아이는 잘 커서 혼인까지 했다. 미안하고 고맙고, 다산의 가슴은 미어지고 또 미어졌을 것이다. 다산은 그런 마음을 담아 이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보면, 매화와 참새는 참 맑으면서 처연하다. 참새는 얼마 전 출가한 딸의 부부를 상징하는 것 같다. 먼 데를 바라보는 참새의 모습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인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딸의 모습이 그렇지 않았을까. 그 그리움은 곧 딸에 대한 아버지의 그리움이기도 하다. 애틋한 부정(父情)이다. 매화와 새 그림은 다소 처연하지만, 시의 메시지는 희망적이다. 딸 부부가 매화향 가득한 집에서 자식 잘 낳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기 때문이다. ‘너무 오래되어 붉은 색이 다 바랬다[歲久紅渝]’는 표현에선 한없이 처연해지는데, ‘이제 여기 머물며 가정 이루고 즐겁게 살거라[爰止爰棲樂爾家室]’는 표현에선 끝내 가정의 화목을 꿈꾸게 된다. 그 대비 또한 오래오래 머리에 남는다.

  <매조도>의 글씨체도 인상적이다. 약간 기우뚱한 여성적 분위기의 서체는 이 그림의 또 다른 매력이다. 그림과 글씨 모두 단아하고 깔끔해서 보는 이를 더 슬프게 한다.

  1813년 다산초당의 봄날 풍경은 그러했다. 한 폭의 그림처럼 시정(詩情)이 가득했다. 그 풍경을 바라본 다산의 눈이 해맑고 차분하다. 백련사에서 초당으로 오르는 길, 지금쯤 동백이 선연할 것이다.

글쓴이 : 이광표  
  • 동아일보 오피니언팀장
  • 주요 저서
    -『한국의 국보』, 컬처북스, 2014
     『한국미를 만나는 법』, 이지북스, 2013
     『명품의 탄생-한국의 컬렉션 한국의 컬렉터』, 산처럼, 2009
     『한국미술의 美』, 효형출판, 2008(공저)


  • 출처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 낙암 (정구복)





一味茶禪 / 첫 맛과 마음수행. 떡차(餠茶)의 정의 차 이야기                                            

2013. 10. 30. 18:57

복사 https://blog.naver.com/julyway/50182216399

번역하기 전용뷰어 보기


 

  첫맛의 알아차림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과거나 미래지향적인 생각은 고정된 이미지입니다.

‘첫’이라는 의미는 바로 고정화되고 조작된 이미지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마음이 한 대상에 집중되었을 때 일어납니다.

  말하자면 과거에 맛보았던 차맛을 가지고 현재의 맛과 비교하여 차맛을 본다면 그 차맛은 첫맛이 아니라 두 번째 맛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첫맛의 첫은 감정과 생각이 개입되지 않는 순수함을 말합니다. 따라서 차맛 변화의 흐름속에서 과거의 맛과  비교하지 않고 맛본다면 그 맛은 늘 첫맛입니다.

    우리는 불안정하며 혼돈된 의식과 의식이 상대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덧없는 대상과 환상으로 인해 흐트러지고 교란된 마음에서 벗어나 고요한 마음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고요한 마음이란 어느 특정한 시기나 제한된 대상만을 향해 방향지어진 것이아니라, 모든 방향과 시점을 통합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마음상태입니다.

   첫맛이라는 ‘한 점에 집중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특정한 대상을 향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오목렌즈를 통과할 때 하나의 초점으로 모아진 태양의 빛처럼, 혹은 산길을 홀로 걸으며 온 사위의 고요함을 느끼듯이, 여러 생각의 타래를 적정(寂靜)으로 통합하고 무화(無化)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렌즈의 초점이 분산된 빛들로 하여금 하나의 단일한 점에서 태양의 완전한 모습을 재창조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초점은 비록 공간을 점유하지 않지만 그 초점을 통과하는 각 빛들이 지닌 고요함의 무한성을 나타냅니다.

   첫 맛을 느끼고 맛의 변화를 알게 될 때 마음은 하나로 집중되어 들뜨지 않고 차분해집니다. 우리의 의식을 한 점에 집중하는 것은 렌즈의 초점과도 유사합니다. 한 점에 집중할 때의 의식은 다른 대상을 배제시킬 뿐만 아니라 대상을 따라가지 않아 의식 자체에 머물러 일념(一念)의 앎으로 통합됩니다.

집중으로 통합된 일념(一念)의 앎은 마치 거울에 비친 상(相)을 통해 거울의 존재를 알아차리듯, 보이는 대상(객체)을 통해 바라보는 주체자를 인식하며 일념(一念)의 인식주체인 의식 자체에도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되면 관찰자는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거나 몰두하지 않습니다. 이때는 앎만이 있을 뿐, 대상에 대한 인식이나 의지력, 지적(知的) 활동의 간섭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수많은 대상에 이끌리고 집착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의 대상에 관심을 집중시키거나 초점을 맞춤으로써 대상물의 다양성과 감각적 인상들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내부의 모든 방해물들을 제거하는데 일단 성공하면, 그 다음엔 관심을 집중시켰던 하나의 대상물조차 버릴 수 있게 됩니다.

   말하자면,

茶 수행자가 차맛(대상)과 하나가 되는 순간, 대상으로서의 차맛(대상물)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차맛의 형태와 대상에 의해, 또는 목표와 의도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 상태인 직관적인 수용성과 주객 자타의 상호소통이 이루어져, 어떤 것에도 묶임이 없는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게 됩니다.    ㅡ [지운스님]

 
 

떡차(餠茶)의 정의


   떡차(餠茶)란 떡처럼 틀에 박아내서 만들은 덩어리차(固形茶)를 말한다. 차를 떡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떡을 만들어 먹던 사람들이 차를 만들 때 떡의 모양을 모방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떡차라고 이름하게 되었으며, 먹을 것이 귀하던 때에 떡은 귀족들의 귀한 음식으로 차를 떡처럼 귀하게 여겨 떡을 모방해서 만들은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전래된 떡차는 귀족사회에 빠른 속도로 성행을 하기에 이르렀다. 차떡은 떡을 만드는 재료에 차를 넣어서 만들은 떡을 말하는 것으로 차는 아니다. 떡차의 모양은 대개 둥글거나, 네모지거나. 또는 오각. 육각. 팔각. 원추형이나. 새나 물고기 모양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졌다.


   떡차의 종류는 크게 두종류가 있다. 첫째는 증제떡차와 둘째는 부초떡차이다. 증제떡차란 차잎을 증기로 익혀서 만들은 것이고 부초떡차란 차잎을 가마솥에 넣어 볶아서 틀에 박아내서 만들은 차를 말한다. 증제떡차를 만드는 방법은 생차잎을 시루에 넣어 쪄낸 다음, 절구통에 넣어 찧어 내 틀에 박아내서 건조시킨 덩어리 차를 말한다. 이러한 떡차의 종류는 병차, 뇌원차. 유차, 전차 등이 있다. 부초떡차는 차 잎을 볶고 비비고. 건조해서 잎차를 만든 다음 선별해서 강한 증기로 쪄서 틀에 넣어 박아내서 만들은 잎차 떡차이다. 이런 떡차는 보이차처럼 차잎의 모양이 그대로 살아있다. 이런 차의 종류는 금릉월산차. 백운옥판차. 보림백모차 등이 있다.



2. 떡차(餠茶)의 역사


(1). 삼국시대 떡차 = 500년대에 시작/병차(餠茶)시대


① 한명(漢茗)=진감국사 비명/떡차 - 떡차를 가루내지 않고 그대로 끓여 마셨다.
   신라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선생이 왕명을 받아서 찬(撰)한 지리산 쌍계사(雙磎寺)에 있는「진감선사 대공탑비명(眞鑑禪師大空塔碑銘)」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어떤 사람이 호향(胡香)을 선사하니 기와에 잿불을 담아 환(丸)을 짓지 않은 채 태우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냄새가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마음만 경건히 할 뿐이다』했으며, 다시 중국차(漢茗) 공양하는 이가 있으니, 섶나무로 돌솥(石釜)에 불 지피고 가루를 만들지 않은 채 끓여 마시며 말하기를 『나는 이 맛이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배(창자)를 적실뿐이다』했으니 참(眞)됨을 지키고 속(俗)됨을 싫어함이 다 이와 같았다.」


② 점다(點茶)=남행월일기/원효방/떡차 - 사포 성인이 원효성사께 끓여 들였다.
   고려 때 이규보(李奎報)동국이상국집 가운데,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보면, 「차를 달여 원효대사께 바치려고 했으나 샘물이 없어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나왔다. 물맛이 아주 달아 젖과 같았다. 그래서 사포는 이 물로 차를 달였다.(點茶)」


③ 팽다(烹茶)=삼국유사=보천효명태자/정거천인 팽다 -정거천인이 보천태자께 끓여 들인 차이다.
   삼국유사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조에 보면, 「두 태자는 항상 골짜기 속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煎茶) 공양하고 밤이 되면 각각 자기 암자에서 도(道)를 닦았다.(중략) 또 50년 동안 참 마음을 닦았더니 도리천(?利天)의 신(神)이 3시(三時)로 법을 듣고, 정거천(淨居天)의 무리들은 차를 달여(烹茶) 바치고 40명의 성인(聖人)은 열자 높이 하늘을 날면서 항상 그를 호위해 주었다.

(二公每汲洞中水, 煎茶獻供. 至夜名庵修道.(중략)又修眞五十年. 兜利天神三時聽法. 淨居天衆烹茶供獻. 四十聖승空十尺. 常時護衛)」


④ 녹유(綠乳)=계원필경=사신다장/녹유 -고변 태위에게서 선물 받은 떡차이다.
   「사신다장(謝新茶蔣)」 「치원은 아뢰옵니다. 오늘 중군사(中軍使) 유공초(兪公楚)가 처분을 받들어 전달하고 전에 부탁드린 차(茶芽)를 보내왔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촉산(蜀山)에서 빼어난 기운을 받았고, 수원(隋苑)에서 꽃다움을 날렸으며, 비로소 제다(製茶)하는 공력(功力)을 가하여 바야흐로 정화(精華)로운 맛을 갖추었으므로, 녹유(綠乳:차)를 금정(金鼎)에 끓이고 향고(香膏)를 옥구(玉?:찻잔)에 띄워야 마땅할 것이옵니다. 만약 고요한 선옹(禪翁)을 모시지 않는다면 바로 한가한 우객(羽客)을 맞아야 할 것이거늘, 뜻밖에 훌륭한 선물이 외람되이 범상한 사람에게 미치오니, 매림(梅林)을 빌려오지 아니해도 절로 능히 갈증이 그치고, 훤초(萱草)를 구하지 아니해도 근심을 잊게 되었습니다. 내려주신 은혜를 느끼어 황공하고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삼가 감사의 글월을 올리옵니다.」


고구려 떡차 = 일본인 아오끼(靑木正兒)소장 - 고분출토유물 -고구려의 옛무덤에서 출토된 떡차이다.
   「나는 고구려의 옛 고분(古墳)에서 출토되었다는 모양이 둥글고 얇은 작은 병다(餠茶) 한 조각을 포본으로 간직하고 있는데, 직경이 4cm정도의 엽전(葉錢) 모양에 두께는 닷푼(5分) 가량이 된다.」


(2). 고려시대 떡차 = 918년 - 1392년/단차(團茶)시대


뇌원차(腦原茶)): 고려사 -고려시대 왕실의 어용차이다. 임금이 신하들에게 뇌원차을 많이 하사한 기록이 전한다.
용봉차(龍鳳茶): 고려사, 고려도경 -고려사와 고려도경에 중국 송나라에서 용봉차를 선물로 보내왔다.
유 차(孺 茶): 동국이상국집-노규선사 - 지리산 운봉에 사는 노규선사가 이규보에게 유차를 선물했다.
고려 떡차: 조선의 차(아유가이): 개성출토 떡차 -일본인 아유가이는 개성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떡차와 떡차를 갈던 멧돌를 소장하고 있었다.
고려 떡차: 대원군: 예산 대덕사탑/떡차4개 - 대원군을 자기 아버지(남연군)의 무덤을 쓰기 위해서 예산 대덕사의 고려 때 석탑을 헐어내었는데, 이때 석탑 속에서 떡차 4개가 출토되었다.
향차(香茶): 충렬왕 16년 (1292년)8월에 원나라 공물로 보냄 - 고려 왕실에서 원나라에 홍선(洪銑)장군과 홍군상(洪君祥)을 보내어 뇌원차와 향차를 받쳤다.
증갱차(曾坑茶): 원감국사의 시 - 금장대선사가 선물. - 금장대선사가 원감국사에게 증갱차를 만들어 선물하였다. 국사는 시를 지어 보답하였다.
쌍각용차(雙角龍茶): 고려 예종12년(1117) 4월 2일 : 청연각을 세움 - 청연각을 새로 짓고 곽여(1059~1130)에게 쌍각용차를 하사했다.
엄 차(淹茶): 원감국사(1226~1292)시: 난송선사(蘭松禪師) - 원감국사가 송광사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병중에도 엄차를 마심


(3). 조선시대 떡차 = 1392년~1910년/전차(錢茶)시대


용척다병(龍脊茶餠): 신위의 시구 - 이천사람의 돌솥을 선물하기에 신위가 손수 용척다병을 다리며 시를 지어 보답하였다.
보림백모(寶林白茅): 신위의 시구에 등장 - 초의선사가 만든 떡차 4개를 신위에게 선물하자 시를 지어 보답하였다.
초의떡차 : 다병서(금령 박영보) - 금령 박영보가 초의선사에게 떡차를 선물 받고 시문을 지어 보내었다.
초의떡차 : 나주 불회사, 운흥사초의선사의 떡차를 만듬- 조선의 다와 선(가입일웅 저)에 보면, 불회사. 운흥사에 떡차 만드는 방법이 전해지는데 이것은 초의선사에게 배운 떡차 만드는 방법이다.
다산떡차 : 다신계절목=떡차2근/다신계원 제다 -다신계원이 입하 경에 차잎을 따서 떡차 2근을 만들어 능내에 사는 스승인 다산에게 보냈다.
보림차(寶林茶): 음청사(김윤식) 고종19년 정월13일/천진 유총관 필담 - 김윤식이 고종때 중국 천진에 가서 유총관과 만나서 필답을 나눌 때 가지고 간 떡차가 장흥 보림사에서 만든 초의선사의 제자가 보림백모이다.



(4). 일제시대 떡차 = 1910년~1945년/전차시대


나주 불회사 = 초의선사 떡차 제다법 전수 - 나주 불회사 운흥사에서 초의선사의 제자들이 떡차를 만들었다.
백운옥판차 = 이한영 - 월출산 성전면 -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에 사는 이한영씨가 만든 부초떡차이다.
금릉월산차 = 이한영 - 월출산 성전면 -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에 사는 이한영씨가 만든 부초떡차이다.
장흥 보림사 = 떡차 - 장흥 보림사에서 조선시대부터 계속해서 떡차를 만들어서 광주에 가져다 팔았다.
천관사 수양리 = 떡차 - 장흥군 관산면 수양리 천관산 밑에서 고려 때부터 떡차를 만들었다.
강진 목리 김씨댁에 전해진 떡차 - 강진군 목리에 사는 김씨댁에는 오래된 떡차가 전해지는데 언제 어디서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는 전차(錢茶)가 전해지고 있다.



(5). 대한민국 떡차 = 1945년~1950년/전차시대


백운옥판차 = 이한영 - 월출산 성전면 -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에 사는 이한영씨는 6.25전쟁 직전까지 떡차를 생산하여 인근에 가져다 팔았다.
금릉월산차 = 이한영 - 월출산 성전면 -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에 사는 이한영씨는 6.25전쟁 직전까지 떡차를 생산하여 인근에 가져다 팔았다.
강진 출토 전차 = 산지 불명
장흥 보림사 = 떡차



(6). 현대의 떡차 = 1975년~2003년/다양한 떡차


① 생산 중지 = 1950년~1975년까지 = 25년간 쇠퇴기 - 6. 25 동란을 계기로 차 생산이 중지 되었다. 차를 만들던 사람들이 죽거나 생활이 어려워져 차를 사서 마시는 사람이 없어졌다.
해남 일지암 떡차 = 단차(團茶), 전차(錢茶) /용운스님 제다 - 초의선사의 떡차를 연구하여 다시 재현하였다.
지리산 떡차 = 병차. 단차. 전차, 기타/떡차 공예/용운스님 제다 - 한국의 전통 떡차를 재현하고, 나아가 떡차를 공예 예술로 발전시키고자 떡차로 꽃, 다기, 다완, 찻잔, 찻잔받침, 글씨. 과일, 인물, 현판, 탑, 악세사리, 송편 등 각종 예술품을 떡차로 만들었다.


3. 떡차(餠茶)의 제다법


(1). 삼국시대 떡차 = 증제떡차 / 1창2.3기


▶ 공정도 : 채다 → 증엽 → 도엽 → 성형 → 일광건조 → 화건 → 포장 → 도말 → 팽다
① 채다 - 차잎을 따는 일
② 증엽 - 차잎을 시루에 넣고 증기로 찌는 일
③ 도엽 - 시루에서 차잎을 꺼내 절구통에 넣고 찧는 일
④ 성형 - 잘 반죽된 차로 떡 모양으로 병차(餠茶)를 만드는 일
⑤ 일광건조 - 햇볕에 한나절 동안 말리는 일
⑥ 화건 - 숯불에 1자 간격을 때어 구어서 말리는 일
⑧ 포장 - 차통에 넣어 포장하는 일
⑨ 도말 - 멧돌에 갈아서 가루를 내는 일
⑩ 팽다 - 돌솥에 찻물을 끓이고 그 속에 가루차를 넣어 끓이는 일


(2). 고려시대 떡차 = 증제단차 / 맥과


▶ 공정도 : 채다 → 증엽 → 도엽 → 성형 → 일광건조 → 화건 → 도말 → 반죽 → 성형 → 화건 → 포장 → 분말 → 점다
① 채다 - 차잎을 따는 일
② 증엽 - 차잎을 시루에 넣고 증기로 찌는 일
③ 도엽 - 시루에서 차잎을 꺼내 절구통에 넣고 찧는 일
④ 성형 - 잘 반죽된 차로 둥근 모양의 단차(團茶)를 만드는 일
⑤ 일광건조 - 햇볕에 한나절 동안 말리는 일
⑥ 화건 - 숯불에 1자 간격을 때어 구어서 말리는 일
⑧ 포장 - 차통에 넣어 포장하는 일
⑨ 도말 - 맷돌에 갈아서 분말을 내는 일
⑩ 점다 - 다완에 분말차를 넣고 돌솥의 끓은 찻물을 떠내 다완에 붇고 다선으로 저어서 찻가루를 푸는 일

(3). 조선시대 떡차 = 증제전차 / 1창4.5기


▶ 공정도 : 채다 → 증엽 → 도엽 → 성형 → 일광건조 → 화건 → 포장 → 전다
① 채다 - 차잎을 따는 일
② 증엽 - 차잎을 시루에 넣고 증기로 찌는 일
③ 도엽 - 시루에서 차잎을 꺼내 절구통에 넣고 찧는 일
④ 성형 - 잘 반죽된 차로 동전 모양의 전차(錢茶)를 만드는 일
⑤ 일광건조 - 햇볕에 한나절 동안 말리는 일
⑥ 화건 - 숯불에 1자 간격을 때어 구어서 말리는 일
⑧ 포장 - 차통에 넣어 포장하는 일
⑨ 전다 - 다관에 전차를 넣고 끓은 찻물을 다관에 부어 우려서 찻잔에 고루 따라서 마시는 일 



4. 떡차(餠茶)의 행다법


(1). 삼국시대 떡차 = 팽다법(烹茶法)


▶ 팽다법 순서 : 화건 → 냉각 → 도말 → 장다합 → 석정투다 → 음다
① 화건(火乾) - 뭉긋한 불기운에 가볍게 구어서 오염된 습기나 잡내를 제거하여 차의 기운을 다시 살리는 일
② 냉각 - 차를 시원한 곳에 펴 널어놓아 화기가 빠지도록 하는 일
③ 도말 - 냉각된 차를 멧돌에 넣고 갈아서 가루를 만드는 일
④ 장다합 - 가루을 낸 가루차를 다합에 넣고 밀봉한다.
⑤ 석정투다 - 돌솥에 찻물을 넣고 끓여서 물이 끓으면 뚜껑을 열고 가루차를 돌솥에 넣고 한번 더 가볍게 끓인다.
⑥ 음다 - 차가 다 익으면 뚜껑을 열고 표주박으로 차를 떠내 찻잔에 고루 따라서 나누어 마신다.

(2). 고려시대 떡차 = 점다법(點茶法)


▶ 점다법 순서 : 화건 → 냉각 → 분말 → 장다합 → 다완점다
① 화건(火乾) - 뭉긋한 불기운에 가볍게 구어서 오염된 습기나 잡내를 제거하여 차의 기운을 다시 살리는 일
② 냉각 - 차를 시원한 곳에 펴 널어놓아 화기가 빠지도록 하는 일
③ 분말 - 냉각된 차를 맷돌에 넣고 갈아서 분말을 만드는 일
④ 장다합 - 가루을 낸 가루차를 다합에 넣고 밀봉한다.
⑤ 다완점다 - 다완에 적당량의 분말차를 넣고 끓인 물을 부어 다선(茶筅)으로 저어서 잘 섞이도록 푼다.
⑥ 음다 - 차가 다 풀어지면 다완을 손님에게 가져다 드려서 마시도록 한다.

 

(3). 조선시대 떡차 = 전다법(煎茶法)  *포다법(泡茶法)의 오기로 보임
▶ 전다법 순서 : 화건 → 냉각 → 장다합 → 다관투다
① 화건(火乾) - 뭉긋한 불기운에 가볍게 구어서 오염된 습기나 잡내를 제거하여 차의 기운을 다시 살리는 일
② 냉각 - 차를 시원한 곳에 펴 널어놓아 화기가 빠지도록 하는 일
③ 장다합 - 가루을 낸 가루차를 다합에 넣고 밀봉한다.
④ 다관투다 - 다관에 전차 한개를 넣고 끓인 물을 부어 다관에서 잘 우러 나오도록 기다린다.
⑤ 음다 - 차가 알맞게 울어나면 찻잔에 고루 따라서 손님에게 드려 마시도록 한다.







  * 전재자 註 : 조선 시대의 떡차 음용법을 전다법(煎茶法)이라 함은 대일항쟁기 때 조선총독부의 명으로 각급학교에서 실시한 다도교육에서 포다법(泡茶法)을 일본에서 전다법(煎茶法)이라 잘못 부르고 있고, 녹차 산차(散茶)를 전차(煎茶)라고 하는 것을 일본식 다도 용어 그대로 잘못 교육한 것에서 오용된 것이다. 이러한 행다법 이름의 혼용 또는 오용은 광복 후에도 부산 경남지방을 비롯하여 일본식 다도가 유행한 지역을 중심으로 계속되어 왔으나, 우리 나라는 임진왜란 후에도 중국 명청과 긴밀하고 자유로운 사신교류로 중국과 한국에서 쓰이는 다법의 용어가 동일함을 볼 때(예  가루차= 말차 : 한국 중국 - 末茶, 일본 - 抹茶) 바른 행다법 이름으로 고쳐야 함이 마땅하다.


    전다법(煎茶法)이라 함은 당나라 육우시대 이전 상고시대 이래로 차의 약음료 혼용시대에 사용되었던 행다법으로 마치 한약을 달일 때 처럼 숯불이나 차화로에서 차를 오랫 동안 달여서 진하게 마시는 약용 행다법을 지칭한다. 그러나 최근에 중국에서는 육우식 당나라 자다법(煮茶法 - 윗 글에서 삼국시대의 팽다법 烹茶法으로 혼용한 행다 내용과 동일함)을 전다법(煎茶法)이라고 혼용하여 부르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올바른 용법이 아니다.


    또한 윗글에서 언급한 행다법 중 삼국시대 떡차 - 팽다법, 고려시대 떡차 - 점다법과 그리고 조선시대 떡차 - 포다법 등은 그 시대에 휴행하던 대표하는 행다법을 간략하게 구분한 것으로 보이나, 우리나라 상고시대에도 구다국(句茶國)이라는 이름에 차(茶)자가 들어가는 나라가 있었으며, 백산차(白山茶)라는 진달래과 식물을 이용한 것이 중국과 한국의 문헌에 보인다. 상고시대~삼국시대 이전에 약용 전다법(煎茶法)이 주로 활용되던 시기에도 엄다법(淹茶法) 또는 약다법(㵸茶法)이란 명칭의 우려마시기(泡茶法)이 활용되고 있었음이 각종 문헌과 차관계 유물과 유적들에서 확인된다. 


    떡차의 역사 항목에서 삼국시대 떡차 - 병차, 고려시대 떡차 ㅡ 단차(團茶), 조선시대 떡차 - 전차(錢茶)라는 분류도 중국 문헌들을 통하여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차제품 종류를 가지고 분류한 것으로 보인다. 어느 시기에나 중요 음식물과 차를 포함한 기호식품들은 지역 특성과 그 제품을 사용하는 왕실과 사찰 그리고 백성들의 선호도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제품들이 생산 유통되고 있음이 일반적이다. 각종 시문들과 역사 기록 등에서 각 시대에도 개인과 다회 참석자들의 기호에 따라서 다양한 차제품과 행다법이 그때그때 적합하게 사용되었음이 명나라 시인 육원중의 시에 차운한 다산 정약용과 외산 윤영희의 시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에 주목한다. 유물에서 나타난 다양한 행다법의 일례로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도금은제찻잔과 잔탁은 포다용 찻잔이며, 경주 안암지에서 출토된 "차(茶)"자가 쓰여진 토기다완은 점다용 찻사발이 분명하다. 대원군이 부친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하여 허문 불탑에서 나온 고려시대 떡차 4개도 크기가 작은 전차(錢茶)였고,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떡차(餠茶)도 직경 4cm 내외의 중간 크기 전차(錢茶)였음으로 볼 때에 윗글 시대별 떡차의 일반적인 차제품 분류법은 서로 모순된다.


  더구나 시대별 떡차의 제다법 항목은 오류와 헛점 투성이여서 이 주(註)에서 상세하게 거론하는 것을 피하고, 별도의 글에서 상술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