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시와 그림] 7.〈희서겸상인방장(戱書謙上人方丈)〉/ 임춘(林椿) 抄

2016. 2. 19. 09:57茶詩



       [차, 시와 그림] 7. 〈희서겸상인방장(戱書謙上人方丈)〉/ 임춘(林椿)  原稿 資料 抄錄





〈희서겸상인방장(戱書謙上人方丈)〉


                                            임춘(林椿, 1148~1186)

 

謙公俊逸叢林秀        겸공의 빼어남은 총림에서도 으뜸이고
玉骨巉巉淸且瘦        맑은 선골 꼿꼿하여 맑고 또 여위였네
佛祖家風傳雪竇         달마의 가풍이 설두에게 전해져
踞地便聞師子吼         (그가) 앉은 곳엔 문득 사자후가 들리네


默坐澄心牢閉口        묵묵히 선정에 들어 입을 닫은 채
不復談空還說有        다시는 공이니 유이니 말하지 않네
自知龐蘊一狂叟        미친 노인 방거사가 스스로 알고는
往往參禪來稽首        가끔 참선하러 와서 머리를 조아리네


祇笑西堂長禁酒        다만 서당에 오래도록 술을 금하는 걸 비웃고
誇我點茶三昧手        나에게 삼매의 솜씨로 차 내는 걸 뽐내네
石鼎作聲蚯蚓叫        돌솥에서 물 끓는 소리 일어나니
客遭水厄誰能救        수액 만난 객을 누가 구하리



                       

       *****   임춘(林椿)은 고려 인종 때의 문인으로. 예천 임씨(林氏)의 시조이며, 서하(西河) 출신으로

              의종 24년(1170년) 정중부의 난을 피해 목숨을 건졌다. 이른바 강좌칠현의 한 사람으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한문과 당시(唐詩)에 뛰어났던 그의 유고(遺稿)는 이인로가 서하선생집으로 편찬하였으며,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그의 시문이 기록되어 있다.











열녀도(列女图) - 고궁박물원 소장, 송인 모사본


              동진(東晉) 시대, 고개지의 <열녀인지도>



 




 
[晋]顾恺之《列女仁智图》(局部,宋摹本)



  동진(東晉) 시대의 화가 고개지(顧愷之, 344~ 406년 경)가 그린 열녀인지도(烈女仁智圖)의 송대 모사본(부분)이기는 하나, 비록 모사본이라 할지라도 위진남북조 시대의 그림 원본에 따라 그렸을 것이므로 당나라 때의 육우 <다경> 저술 이전의 차마시는 풍습이 잘 나타나 있다고 보여진다.  위 부분도에서 보면 화폭 중앙 하부에 그려져 있는 상부만 보이는 화로 위에 차솥이 올려져 있고, 주인공인 위 영공(衛 靈公)과 영공부인(靈公夫人) 사이에 낮은 찻소반(茶盤)에 찻잔이 여러개 놓여져 있으며  다담(茶談)을 나누고 있는 광경이 그려져 있다. 남자 주인공의 오른손 아래에 놓여져 있는 기물의 용도는 분명하지 않으나, 당시에 음다풍습이 뜨거운 차를 마시던 열탕법 위주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큰 대접 형태의 승반(承盤 : 현대 용어로 다茶海) 안에 뜨거운 열수(熱水)를 붓고 그 안에 달인 차를 담는 원통형 공도배를 넣어 차가 일정 시간 동안 식지 않고 뜨겁게 마실 수 있는 용도로 쓰이던 다구가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할 뿐이다. 윗부분은 마치 신선로 비슷한 형태이나, 바람을 빨아 올리는 풍구(風口)가 뚫린 받침대 부분이 없고 연통 부분이 위로 갈 수록 줄어들어 배연(排煙)을 돕는 형태가  아닌  곧은 원통형인 것으로 보아서 음식물을 즉석에서 끓이거나 데워서 먹을 수 있는 신선로가 아님은 분명하다.


   고개지가 활동하고 있던 4세기 경에는 차를 약용과 기호음료용 겸용으로 달여서 마시던 약다법(瀹茶法) 또는  전다법(煎茶法)이 유행하던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육우의 <다경>에 나오는 찻맷돌(다연 茶碾)에 작은 쌀겨 크기로 찻잎을 갈아서 달이는 자다법(煮茶法)과 비교하여, 찻잎 그대로인 산차(散茶)나 단차(團茶)를 차솥(茶鐺)에 달여서 마셨기  때문에 자다법 보다는 비교적 장시간 차를 달여서 새로운 성분의 합성을 기대하고 차의 약용을 겸하는 전다법(煎茶法)이 통용되었다.

   또한 남자 주인공인 영공 주위에 둘려 있는 3폭의 그림 장식 가리개와 화폭 왼쪽 아래부분에 놓여 있는 등잔과 바람가리개를 눈여겨 볼만하다.


**** 이하 <<.....  >> 안의 내용은 카페 스크랩시 제외 要. 

   << 참고로 차를 비교적 오랜 시간 달여서 마시는 전다법(煎茶法)에 대한 용어 사용의 혼란상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대일항쟁기에 조선총독부에서 각급학교를 통하여 보급한 일본식 다도 교육에서 차를 우려서 마시는 포다법(泡茶法) 또는 엄다법(淹茶法)과 뚜껑이 있는 개완에 우려 마시는 충다법(冲茶法)을 통칭하여 일본 다도에서 전다법이라고 교육하였던 구습이 아직도 일부 다도 사범이나 심지어 근래에 개설된 대학의 차학과의 일부 교재 등에서 무분별하게 그대로 사용되고 있어 이에 대한 혼란을 더하고 있는 실정이다. 근세 일본 다도는 임진 정유 양왜란과 정묘 병자 양호란 이후 한국 중국과 일본의 문화교류의 소원으로 인하여 차를 우려서 마시는 통칭 충포법(冲泡法)이라는 당시 새로운 다법 용어 대신에 옛용어인 전다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던 일본 차문화의 폐쇄성과 후진성에 기인하고 있음을 알고 나면 우리 한국의 다우님들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야 마땅하나, 한번 통용되었던 용어들은 쉽게 고치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해하기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


  일본 다도에서 전통문화의 유지 보전이라는 좋은 점은 받아들임이 당연하나 극도로 정형화된 행다 의식과 차문화의 폐쇄성까지 수용한다는 것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에 대하여는  다우님들이 쉽게 현명하신 판단을 하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근자에 일부 다우님들이 시도하고 있는 중국 향도문화는  중국의 향도가 근세에 명맥이 끊어지고, 죽의 장막 철폐 후 일본향도의 향구(香具)나 연향법(煙香法)과 훈향법(薰香法) 등을 그대로 역수입하여 재현한 것이며, 이를 중국향도라 이름하여 우회침투하고 있는 일본향도 문화에 대하여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분별력 있는 태도를 가짐이 마땅하리라 본다.

   백제 금동용봉대향로와 고려청자 상형향로의 조형미과 다양한 상징성,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 등에 기록된 고려의 우수한 향문화와 향례, 조선조 궁중과 종묘와 서원, 사찰에서 항례, 매향(埋香)문화 그리고 어초문답(魚樵問答)에 능하지만  어리숙한 체 이를 감추고 있는 조선 어부의 유순하고 순천(順天)하는 심성을 그대로 빼어 닮은 울향(鬱香) 등을 다시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향문화가 결코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라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라는 점을 분명하게 되새김해 보아야 한다.



   또한 위진시대에 야외에서의 음다풍속을 현대의 시각으로 그린 그림이 있는데, 아래 현대 중국화가 엽군의 <죽림칠현>도에서 차화로 위에 찻주전자를 올려 놓고 차를 달이고 있는 다동과 대숲에서 청담(淸談)을 나누고 있는 칠현 앞에 놓은 작은 찻잔을 볼 수 있다. 이 현대화는 전래되는 옛그림에 나타난 다법들을 참고하였다고 여겨지나 작가의 창의성이 가미된 것으로 보여져 이름 그대로 위진남북조 시대의 야외에서 음다풍속을 재현하여 그렸는지는 다소 일말의 의구점이 들기도 한다.



魏晋风度与茶饮


叶君的《竹林七贤》

엽군의 <죽림칠현>

叶君的《竹林七贤》-魏晋风度与茶饮 士族 文化


灵公夫人夜坐》_君华_新浪博客

《烈女传·仁智·卫灵夫人》--泛泛居士的个人空间--凤凰网博客




   <참고자료>


   고개지(顧愷之, 344~ 406년 경)는 중국 동진의 화가이다. 호는 호두이며, 장쑤 성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미술의 기틀을 닦아 놓은 위대한 화가로 인물, 동물, 풍경화 등 각 방면에 재주가 있었으며, 특히 인물화에 뛰어났다. 송나라 육탐미, 양나라 장승요와 함께 6조의 3대 화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교묘한 필치와 예리한 관찰로 형체의 특징을 놀랄 만큼 정확하게 묘사하여 당시의 사람들은 재절, 화절, 치절의 3절이란 말로 그를 평가하였다. 현존하는 작품 여사잠도권은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중국 그림 중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유명하다.

  

   고개지(344? - 406?)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동진(東晉)의 화가로 자()는 장강(長康), 호두(虎頭)이다. 강남 명문호족 출신으로 그림뿐만 아니라 시부(詩賦)서법(書法)에도 능했으며 박학 다식했다. 성격이 솔직하고 소탈하여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일러 화절(畵絶), 재절(才絶), 치절(癡絶)을 갖춘 삼절(三絶)이라 칭했다. 특히, 인물화, 산수화에 뛰어났는데 인물을 그리면서 몇년이고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면 "정신을 비추어 내는 곳이 바로 눈동자이다." 라고 했다. 그는 기존의 형사(形似) 위주의 화풍과는 달리 신사(神似)를 중시하여 인물화에서 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고개지의 기행(奇行)에 얽힌 고사성어도 있다. 고개지는 감자(甘蔗, 사탕수수)를 즐겨먹었는데 늘 가느다란 가지부터 먼저 먹었다. 사실 사탕수수는 뿌리부분으로 내려갈수록 더 달다. 이상하게 생각한 친구들이 물었다. "자네는 사탕수수를 항상 덜 단 부분부터 먹던데 무슨 까닭이 있는가? 그러자 고개지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야 갈수록 점점 단맛이 나기 때문이지[점입가경(漸入佳境)] 그 뒤부터 점입가경은 경치나 문장 또는 어떤 일의 상황이 갈수록 재미있게 전개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줄여서 가경(佳境) 또는 자경(蔗景)이라고도 한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뛰어 났다. 20세 쯤에 와관사(瓦官寺)에 벽화를 그렸더니 그림을 구경하러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그들이 낸 시주금이 순식간에 일만금을 넘어섰다는 일화는 그의 재능과 명성이 당대에도 유명하였음을 말해주는 전설이다.

   중국회화의 모든 개설서가 고개지를 다룬다. 그런데도 고개지가 누구인가? 라는 의문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다. 중국의 고대 역사가 다루는 인물은 역사적 사실보다도 신화적 전설을 기록한 것이 많다. 왜냐면 인물이 활동하였던 당대에는 남긴 기록이 없는 수가 많다. 후대에 와서 명성이 높아지고 난 뒤에 비로소 기록을 남긴 것이므로 허구와 진실이 뒤섞여 있다. 고개지도 마찬가지이다. 중국 회화사에서 두루마리 그림이 널리 유행하고서야 고개지가 명성을 얻어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개지의 작품으로 전해오는 것은 여사잠도(女史箴圖, 女史箴图卷(完美版)), 낙신부도(洛神賦圖, 洛神赋图), 열녀인지도(烈女仁智圖)가 있다. 세 그림은 모두 두루마리 양식이다. 두루마리 양식은 고개지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양식이라고 말한다.


 ‘약(略)과 전신(傳神)’의 이론을 받침하는 또 다른 이론에 풍격(風格)기운(氣韻)이 있다. 풍격과 기운을 완성해내는 방법론으로 용필(用筆)을 내세웠다. 붓은 중국 회화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요소이고 붓의 사용은 그만큼 중요하였다. 고개지의 용필은 선 긋기이다. 남북조 시대는 선묘에 의존하여 형상을 표현하고, 형상 표현을 통하여 기운과 풍격을 나타낸 것이 회회의 기본이었다.




위나라 영공의 부인 고사

  

   위(衛)나라 영공(靈公)의 부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공과 그의 부인이 어느 날 밤에 마주앉아 있는데 

수레 달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런데 대궐 앞에 이르러 그 소리가 잠시 멎었다가 

대궐 문을 지나면서 다시 들렸다. 

  영공이 부인에게 

“저 수레를 타고 가는 사람이 누구인 것 같소?”

하고 물었다. 영공의 부인은 

“저이는 거백옥(蘧伯玉)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영공은 다시 어떻게 거백옥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이에 부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예기』에 보면 공의 문앞에 이르러서는 내려 

공의 말에게 예를 표한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은 공경함이 깊다는 뜻입니다. 

  충신과 효자는 쉽게 

변절하지도 않고 몰래 나쁜 짓을 하지도 않습니다. 

거백옥은 우리 위나라의 어진 대부입니다. 

어질고도 지혜가 있으며 공경으로 윗분을 섬깁니다. 

  이것으로 보아 그 사람이라면 누가 보지 않아도 

예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이가 거백옥인 줄 안 것입니다.”


공이 사람을 시켜 알아 오게 하니 과연 거백옥이었다. 

  공은 부인을 놀려 주려고 

그 사람을 거백옥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부인은 공에게 두 번 

  절하고 잔을 들어 권하면서 공에게 축하를 하였다. 

부인의 거동을 보고 궁금해진 공이 그 연유를 불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나를 축하하는 겁니까?”

영공의 부인이 대답하였다. “저는 위나라에서는 

거백옥 한 사람만이 예를 지키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 위나라에 거백옥과 나란히 할 사람이 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공에게 두 충신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라에 현명한 신하가 많다는 것은 곧 나라의 행복입니다. 

  저는 이것을 축하드리는 것입니다.” 

공이 놀라며 훌륭하다고 찬탄하며 부인에게 사실대로 

그 사람이 거백옥이었음을 실토하였다. 

  

  군자가 말하였다. 

“위나라 부인은 사람을 알아보는 도리에 밝았다. 

거짓으로 속일 수 없었으니 현명하고 지혜로웠다. 

『시경』에 ‘나는 그 소리만 듣고 그 사람은 보지 

않는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詩』云. 我聞其聲, 不見其人, 此之謂也.

  

  송에 이렇게 말하였다. 

위 영공이 밤중에 부인과 함께 앉아 있었네. 

요란한 수레 소리 대궐 문 앞에서 멈추니 

부인은 그 수레 주인이 거백옥임을 알아보았네. 

지혜로운 자만이 어진 이를 알아보는 것, 

어떻게 아느냐 한다면 신의가 있음으로 알았다 할 것이네. 


                         - 열녀전 인지 위 영부인 - 《烈女传·仁智·卫灵夫人》

                         

 거백옥은 공자(孔子)가 당대에 가장 존경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춘추전국시대 전국 7웅 가운데 위나라 세 군주, 헌공, 양공, 영공을 섬겼다. 



cafe.daum.net/jnhsbaekun/R8d/693   화순 백운마을






 고개지(顧愷之)의 열녀인지도(列女仁智圖)


   그의 제자인 송나라의 육탐미와 양나라의 장승요, 이렇게 세 사람은 육조시대의 3대가라고 합니다. 

인물을 표현할 때 몰골법을 이용해서 입체적인 묘사를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환영적농담변화기법-<중국회화사>, 제임스 캐힐의 표현)


  현재까지 내려오는 그의 그림 중 대부분은 유교 경전의 줄거리를 그대로 묘사한 내용이 많습니다.

아래 그림들은 열녀인지도列女仁智圖 화첩의 그림(부분도)으로, 고개지 그림의 송나라(13세기) 모사본입니다.

한나라 때 씌여진 열녀전 列女傳의 내용을 토대로, 여성들의 모습을 표현하고 간단한 설명을 붙였습니다.

4세기에 그려진 그림임에도,  펄럭이는 옷자락의 표현이나 인물의 묘사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위 네 그림

<열녀인지도列女仁智圖> 화첩 일부 발췌, 4세기 작품의 송대 모사본, Palace Museum, Beizing


爱国女诗人-顾恺之简介以及<<列女仁智图>...  ,북경고궁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