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이성선, 세계사(2000)
초판 1쇄 : 2000. 10. 30
초판 5쇄 : 2003. 11. 29
P 18
沒絃琴
저 큰 산
울음
몰현금 소리
먹은 내 귀가 듣지 못하네. 산너머 안개 너머 산너머 안개 너머 줄줄이 벋어가 구름에 묻혔다 살아나고 다시 죽는 산 능선들. 바람 속에 사라지고 별에서 태어나는 현들. 우주가 내려놓은 거문고가 아니다. 줄이 없기에 울지 않는다. 잔인한 그분이 끊어 버렸고 내 귀는 열리지 않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운다. 고요한 오후의 막막한 회색빛에 우뚝 떠서. 아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 앉아 하늘 가득 운다. 가랑잎 구르는 소리 안에 집을 짓고 천년을 살아야, 맑은 천둥 속에 방 얻어 공부를 해야, 지평을 치며 솟아 앉은 달에게 차 한잔 받아야 귀가 깨어나 줄 없이 우는 저 소리를 담을 수 있을까. 새벽 우주가 돌아간 뒤에도 혼자 깊어져 내는 그분 소리를
P 24
달맞이꽃
밤하늘은 온통 전쟁중이다
그 아래 피난처 같은
강원도 정선의 너와집 같은……
들어가 일박하고 죽어버리고 싶은
쇠잔한 내 몸을 꽃잎이 잘 싸 오므렸다가
달빛 아래서만 혼자 활짝 펴드는
P 26
소식
나무는 맑고 깨끗이 살아갑니다
그의 귀에 새벽 네시의
달이 내려가 조용히
기댑니다
아무 다른 소식이 없어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이 납니다
P 27
사랑
더러운 내 발을 당신은
꽃잎 받듯 받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흙자국을 남기지만
당신 가슴에는 꽃이 피어납니다
나는 당신을 눈물과 번뇌로 지나가고
당신은 나를 사랑으로 건넙니다
당신을 만난 후 나는 어려지는데
나를 만난 당신은 자꾸 늙어만 갑니다
P 28
흔적
꽃이 문을 열어주기 기다렸으나
끝까지 거절당하고
새로 반달이 산봉에 오르자
벌레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꽃잎을
반만 먹고 그 부분에 눕다
달이 지고
서릿밤 하늘이 깊었다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을 때
산이 혼자 그림자를 내려
꼬부리고 잠든 그의 등을 덮어주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친 바람 한점 없었는데
다음날 일어나 보니
벌레는 사라지고
그 자리 눈물 같은
이슬 두어 방울만 남아 있다
P 29
흔들림에 닿아
가지에 잎 떨어지고 나서
빈산이 보인다
새가 날아가고 혼자 남은 가지가
오랜 여운에 흔들릴 때
이 흔들림에 닿은 내 몸에서도
잎이 떨어진다
무한 쪽으로 내가 열리고
빈곳이 더 크게 나를 껴안는다
흔들림과 흔들리지 않음 사이
고요한 산과 나 사이가
갑자기 깊이 빛난다
내가 우주 안에 있다
P 30
당신이 나를 스칠 때
구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산길을 걸으며
내 앞에 가시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들의 꽃 피고 나비 날아가는 사이에서
당신 옷깃의 향기를 맡았습니다
당신 목소리는 거기 계셨습니다
산 안개가 나무를 밟고 계곡을 밟고 나를 밟아
가이없는 그 발길로 내 가슴을 스칠 때
당신의 시는 이끼처럼
내 눈동자를 닦았습니다
오래된 기와지붕에 닿은 하늘빛처럼
우물 속에 깃들인 깊은 소리처럼
저녁 들을 밟고 내려오는 산그림자의 무량한 몸빛
당신 앞에 나의 시간은 신비였습니다
돌담 샘물에 떨어진 배꽃의 얼굴을 보았습니까
새벽 산에서 옷을 벗는 새벽빛을 보셨습니까
당신은 나의 길을 이렇게 오십니다
산사로 향한 따뜻한 길처럼
하늘에 새 날려보내고 서 있는 나무처럼
내 앞에 당신은 그렇게 계십니다
P 31
강물
새 학기 교실에
지난해의 아이들이 가고
지난해만한 아이들이 새로 들어왔다
떠들고 웃고 반짝인다
이 반짝임은
지난해 그랬고 그 지난해도 그랬고
그전 해 그리고 내년에도 그럴 것이다
이 교실은 해마다
요만한 아이들이 앉았다 간다. 웃고 떠들고
침묵하고
흘러간다
교실은 아이들이 흐르는 강이다
나는 강의 한 굽이에 서서
강물의 흐름을 지켜보며 그 소리를 듣는다
P 35
벌레
꽃에는 고요한 부분이 있다
그곳에 벌레가 앉아 있다
P 37
하늘의 글씨
밤하늘 위로 짐승 걸어가는 울음소리
그 아래 그들 똥을 받아
시를 쓰는 시인의 방
이런 날 밤
집 근처에 숨소리 가득 다가옴
하늘이 와서 몰래 글씨를 쓴다
풀잎을 동그랗게 먹은
벌레 입 자리가, 바로 그 상처가
하늘의 글씨다.
당신 계시는 블랙홀들
길 밖에 더 큰 길이 있다.
P 38
鳥道
작은 날개로
길을 다 지우고 가 버려서
그가 떠난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가지 위에 떨림 하나
그것도 잠깐만에 사라졌다
그의 삶
不立文字
황홀한 鳥道
P 39
미시령 노을
나뭇잎 하나가
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
툭 내려앉는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너무 가볍다
P 43 ~ 44
불영사의 길
불영사 오를 때
맑고 좁다랗게 잘 다듬어진 마사토 길
비 지나가고 땅 신성하고
길바닥에 드문드문 아이 눈동자처럼
지나가는 차에 파이어 고인 물
산그림자 소나무 향기 그 속에 작게 산다
가끔 지나가는 승용차가
그 눈동자를 밟자
산이 깨지고 나무 흩어져 지워진다
조금 있다 다음 차 지나자
또 부서지고 새로 제 모습 나타난다
발 밑에서 부서지고 세워지고 사라졌다 돌아오는
그 길을 스님 한 분이 앞서간다
나도 따라간다
절은 그 속에 있다
P 45 ~ 46
티벳의 어느 스님을 생각하며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 속에 조용히 앉아 있어도
그의 영혼은 길가에 핀 풀꽃처럼 눈부시다
새는 세상을 날며
그 날개가 세상에 닿지 않는다
나비는 푸른 바다에서 일어나는 해처럼 맑은
얼굴로
아침 정원을 산책하며
작은 날개로 시간을 접었다 폈다 한다
모두가 잠든 밤중에
달 피리는 혼자 숲나무 위를 걸어간다
우리가 진정으로 산다는 것은
새처럼 가난하고
나비처럼 신성할 것
잎 떨어진 나무에 귀를 대는 조각달처럼
사랑으로 침묵할 것
그렇게 서로를 들을 것
P 48
고요하다
나뭇잎을 갉아먹던
벌레가
가지에 걸린 달도
잎으로 잘못 알고
물었다
세상이 고요하다
달 속의 벌레만 고개를 돌린다
P 50 ~ 51
야반도주
비오는 소리 종일 추녀 밖 허공을 지나
알 수 없는 곳으로 나를 이끌더니
비 개자 골목길에 물이 고였다
빗물에 새로 피어난 개난초
부끄럽게 고개를 빼고 고인 물 속을 들여다본다
나도 지나가다가 그 곁에 쪼그리고 앉아
아무 욕심 없이 보고 있다
그러나 물은 무슨 생각에선지
다른 것은 다 물리친 채
개난초 그림자만 수면 가득 펼쳐놓고 있다
나비도 들어갈 수 없는 저곳
개난초 그림자가 살아 있는 꽃보다 더 또렷이
피어난
저 안으로 나는 들어갈 수 없다
섭섭한 마음 이기지 못해 끝내 그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밤에 둘은 어떻게 잤을까
잠을 설치고 이튿날 일찍 그 자리에 가 보니
물도 없고 그 속의 개난초도 사라졌다
둘이 야반도주다
그들이 가서 숨었을 아침하늘 속이
이슬 묻어 눈부시게 더 푸르다
P 59
도반
벽에 걸어놓은 배낭을 보면
소나무 위에 걸린 구름을 보는 것 같다
배낭을 곁에 두고 살면
삶의 길이 새의 길처럼 가벼워진다
지게 지고 가는 이의 모습이 멀리
노을 진 석양 하늘 속에 무거워도
구름을 배경으로 서 있는 혹은 걸어가는
저 삶이 진짜 아름다움인 줄
왜 이렇게 늦게 알게 되었을까
알고도 애써 모른 척 밀어냈을까
중심 저쪽 멀리 걷는 누구도
큰 구도 안에서 모두 나의 동행자라는 것
그가 또다른 나의 도반이라는 것을
이렇게 늦게 알다니
배낭 질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지금
P 62
빈 꽃대 위 달무리
꽃 지고 나서 혼자 남은
빈 꽃대의 가냘픔
빈 꽃대의 섬세함
빈 꽃대의 외로움
나의 시는 지금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너에게 닿을 수 없다
내 가슴은 이미 불꽃이 식어버려
너의 몸을 덥힐 수 없다
꽃이 진 허공은 너무 소중하여
누가 함부로 손대서는 안된다
나는 멀찍이서 너 빈 꽃대 위에
마음의 달무리를 띄우고
너를 감싸고 돈다
P 64
강물 속의 여인숙
이슬 누더기 덮고 자는 새벽강
여름날 아침 농부가 그 속에서
어깨에 삽을 메고 나오고
저녁에 달이 빠져
막노동꾼도 개도 망초꽃도
둑길을 따라가고
삿갓 쓴 산과 키 큰 풀들이
내려가 섰다. 거꾸로
늦게 돌아오던 스님도 그녀 품속에 들어가
자다가 떠나는 곳
새벽에 더 깨끗이 눈뜨는 여자
P 65 ~ 66
바람의 노래
수우족처럼은 아니지만
어릴 때 들길을 걸으면서 알았다
내 영혼은 바람이 주셨다는 것을
지금도 걸으면서 느낀다
내 눈동자 속의 눈동자에서는
그분과 하나다
나는 이것을 그치지 않고
노래하기를 열망한다.
새벽 풀잎에 별이 흐를 때
나의 귀는 듣는다
밭고랑 감자가 냇물에게 들려주는 노래
메꽃 속에 늦잠 자는
벌레의 잠꼬대 소리
바람은 이들로 향기롭다
이들은 내게 와서
들판으로부터 나를 키웠다
수우족처럼은 아니지만
나는 알았다
그리고 지금도 안다
아름다운 것은 단순하고 작다
수우족이 그렇게 살고
내가 어릴 때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P 70
티벳에서
사람들은 히말라야를 꿈꾼다
설산
갠지스강의 발원
저 높은 곳을 바라보고
생의 끝봉우리로 오른다
그러나
산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생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많은 짐을 지고 이 고생이다
P 71
내설악
달 하나가 마음의 고랑으로 내려간다
산을 들으러 가는
느릿느릿한 걸음이
시처럼 아름답다
억새풀과 쑥대로 덮인 새와 구름의 집 영시암
골짜기가 다 들어가 자는 물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의심스런 얼굴로
노승이 문 열고 나와
하늘 쪽을 살피다가 들어간다
노루나 산양 새끼의 눈빛도
떨어져 꽃이 되는 밤
가랑잎 하나가 산을 싸고 간다
P 72
설악산 큰눈
그날 밤
눈 속의 산에 사람이 죽었다
열 길도 넘는 하얀 눈의 계곡에
사람이 묻혔다
눈은 낮에도 내리고
밤에 다시 내리고
산을 덮은 눈은 하늘을 덮고
헤매는 짐승보다 더 성급히
산 위에서 길을 찾는
사람들의 발에 눈이 자꾸 내렸다
그날 밤 나는 시를 썼다
길을 잃지 않으려고
나는 불도 끄지 않았다
눈은 내려 마을을 덮고 나를 덮는데
잠들지 않으려고 시를 썼다
P 74 ~ 75
봉정암 가는 길
길 따라 굽어 흐르는 물 백 개의 연못에 백 번 얼굴을 비추고 백 번 마음을 고쳐야 열리는 山門. 귓가에 넘치는 물소리가 모두 법문이고 가지의 바람소리가 오도송이며 우거진 쑥대풀과 억새꽃이 다 詩다
골짜기로 밤에 쏟아지는 별들이 물 속에 빠져 꽃잎처럼 떠 있는 곳으로 발을 옮기는 이가 영원히 거기서 길을 잃고 나오기 싫어한다
단풍 사이로 난 좁다란 길에 노랗고 빨간 잎사귀가 떨어지고 그 곁에 찍힌 사람 발자국이 깨끗하다. 고라니 발자국 같아서 먼저 간 사슴 발자국 같아서 일찍 깬 새벽공기가 입을 대고 냄새 맡고 바람이 와서 손으로 만져본다. 사람 자취가 여기서 처음 신성하다
산 전체가 구름 옷을 벗고 있다. 산이 깨어나는 소리 듣는다. 산이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사이 빗물 머금은 산빛과 산내음이 물소리에 실려 세상 아래로 떠간다. 구름이 산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길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내가 있다 없다 한다
P 76
설악을 가며
수렴동 대피소 구석에 꼬부려 잠을 자다가
밤중에 깨어보니 내가 아무것도 덮지 않았구나
걷어찬 홑이불처럼 물소리가 발치에 널려 있다
그걸 끌어당겨 덮고 더 자다가 선잠에 일어난다
먼저 깬 산봉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쫓겨서
옷자락 하얀 안개가 나무 사이로 달아난다
그 모습이 꼭 가사자락 날리며
부지런히 산길을 가는 스님 같다
흔적 없는 삶은 저렇게 소리가 없다
산봉들은 일찍 하늘로 올라가 대화를 나누고
아직 거기 오르지 못한 길 따라 내 발이 든다
길옆 얼굴 작은 풀꽃에 붙었던 이슬들
내 발자국 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물소리가 갑자기 귓속으로 길을 내어 들어오고
하늘에 매달렸던 산들이
내 눈 안으로 후두둑 떨어진다
오르지 못한 길 하나가 나를 품고 산으로 숨는다
P 83
구름詩
구름은 허공이 집이지만 허공엔 그의 집이 없고
나무는 구름이 밟아도 아파하지 않는다
바람에 쓸리지만 구름은 바람을 사랑하고
하늘에 살면서도 마을 샛강에 얼굴 묻고 웃는다
구름은 그의 말을 종이 위에 쓰지 않는다
꺾여 흔들리는 갈대 잎새에 볼 대어 눈물짓고
낙엽 진 가지 뒤에 기도하듯 산책하지만
그의 유일한 말은 침묵
몸짓은 비어 있음
비어서 그는 그리운 사람에게 간다
신성한 강에 쓰고 나비 등에 쓰고
아침 들꽃의 이마에 말을 새긴다
구름이 밟을수록 땅은 깨끗하다
P 87
연꽃잎 속 이슬
우다이푸르* 정류장에서
푸쉬카르행** 버스를 기다리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며
맑게 웃어주는 저 남루한 아이의
이슬 같은 눈동자 속에 살짝 숨어 들어가 목욕하고 나오다
비로소 이 먼지의 땅이 연꽃 속이구나
이제 나무를 바라보는 법으로 사람을 바라본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우다이푸르: 인도 서북부의 조용한 고도. 아름다운 호수로 더 매력을 지닌 곳.
** 푸쉬카르: 라자스탄 중앙부에 위치한 고원지대 〈신성한 연꽃의 도시〉. 여기서부터 서북쪽으로 사막이 펼쳐진다.
P 88 ~ 89
라자스탄*의 밤 사막에 누워
사막의 밤하늘에 가득히 반짝이는 주먹만한 별들
그 이불 덮고 누워 대지에 귀를 댄다
당신의 넓게 두근거리는 심장 뛰는 소리가
내 가슴에 노래로 내려박힌다
바람의 옷 입고
당신 목소리 찾아 먼 여기까지 흘러왔거니
막막한 광야 어디에 짐승 소리 울리고
숨은 성자의 목소리 들려오는가
몸 위로 하늘의 말씀이 쏟아져
기운 四更의 달빛이
대지를 쓸어 어루만지며 내 이마를 짚어준다
사랑하는 이여
나 여기 와 누워 처음으로 당신의 사람이다
지는 해의 긴 낙타 그림자에 실려
말이 그친 곳 그리움도 절한 곳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는 지상의 마지막에 돌아와
떨어지고 있는 별 사이로 당신의 꽃을 받느니
곁에 잠들지 않은 낙타의 방울 소리가
외로운 내 꿈을 더 먼 곳으로 이끈다
나 이 사막에 누워 비로소 당신과 하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라자스탄: 인도 서북부의 지방. 타르사막이 펼쳐져 있으며 인도의 어느 곳보다 색깔이 강하다.
P 90 ~ 91
깊은 강
바라나시* 저녁 하늘에 붉게 해 지고
저무는 강가**강 물결 위에 꽃등 뜨네
고요히 숨결 깊어진 수면 위로 슬픈
꽃등 그림자 떨어져 흔들리며 떠가네
눈이 맑은 소녀야
작은 손으로 꽃을 팔며
미소 띤 얼굴에 노래부르는
너에게 꽃 하나 사서 불을 붙여
기도하듯 두 손으로 강물 위에 놓느니
달빛 젖은 강물 위로 꺼질 듯
작은 생명 하나 불꽃 시를 쓰며 가는구나
어둠의 강가강에 혼자 앉아 다짐한다
이제 삶이 무엇인지 더 묻지 않으리라
내가 누구인지도 다시 묻지 않으리라
시간의 강물인 대지 위를 흐르며
저 꽃등처럼 목숨 사르어 시를 쓰며 떠가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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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라나시: 북인도의 힌두교 성지. 영적인 빛으로 충만된 이 도시를 성스러운 강 강가 (Ganga)가 굽어 흐른다.
** 강가: 갠지스(Ganges)강
P 96
별을 바라보는 우물
사막 작은 나무 곁의 별 아래서 몸을 오그리고 잠을 잤다. 옆에는 모래밭을 헤매며 풀을 뜯는 염소들을 위한 우물이 있었다. 낮에는 몰랐으나 밤에 우물은 눈을 뜨고 하늘을 쳐다보며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었다. 내가 누워 눈을 감은 동안에도 우물은 혼자 눈을 뜨고 있었다. 사막이 다 잠든 뒤에도 우물은 깨어 별을 바라보았다. 잠들지 않은 내 귀가 우물 속으로 별이 퐁당퐁당 빠지는 소리를 들었다. 우물 속에 내려와 떠드는 별들의 소리도 들었다. 하늘의 염소가 물을 마시러 내려와 별 사이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다음날은 그곳을 떠났지만 나는 그 후로 내 마음의 사막 한곳에 밤이면 깨어 눈을 뜨고 별을 쳐다보는 우물 하나를 갖게 되었다
P 101 ~ 102
인도의 詩 1
시간이 멈춘 땅에 강가가 흐른다
죄수 수송차 같은 이등열차가 흐르고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죽는
사람들이 어디서나 앉고 눕는다
맨발로 걷는 성자들의 대지에서
바람의 손이 신전을 만지고
더러운 그들의 발을 만지고
비쩍 마른 낙타의 다리와
사막 끝에 떠오른 찌그러진 달도 만진다
골목에 시체가 쓰러져 웃고
거리에는 소와 흩어진 꽃잎과 똥과 사람들
거룩함과 소음과 거지와 현자
나의 에고로는 도저히
그 복판에 들어설 수 없구나
작열하는 태양의 모래 위에 오래
벗고 앉아보아야 그대 맥박 소리가 들릴까
지평에 숨은 작은 마을에 찾아 들어야
그대 신비에 닿을 수 있을까
편견을 던져버려 영원히 늙지 않는 땅
소보다 깊은 눈을 가진 사람들의 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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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출가한 시인이었습니다.
자연으로 …
시인은 세상에서의 고행을 마치고 2001년 5월 4일 자연으로 귀의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시집인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가장 많이,
자주 여러 번 읽었던 시집입니다.
정효구 문학평론가(충북대 국어 국문학과 교수)의 해설처럼,
‘~ 서로 조용히 몸을 기대며 조금은 외로운 듯하나 자유로운 삶을, 조금은 적막한 듯하나 평화로운 삶을 사는 것이 출가한 자가 바라는 은밀한 기쁨의 세계이다.’
조금은 외로운 듯하나 자유롭고, 적막한 듯하나 평화로운.
저도 꿈꾸는 삶입니다.
- 2014년 2월 14일(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