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이상국문집(東國李相國集) - 해제.서

2016. 2. 25. 18:55



       동국이상국문집(東國李相國集) - 해제.서|역사 사료

솔롱고 ||2013.09.12. 15:50
   http://cafe.daum.net/ko.art./otNC/112        


 

○ 이 책의 국역대본은 신해본(辛亥本 : 1251, 고려 고종 38, 分司大藏都監板刻)의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영인본(影印本)이다. 단 백운소설(白雲小說)은 필사본(筆寫本)을 영인한

   것이다.

○ 번역은 원의(原義)에 충실을 기하였다.

○ 원문은 대체로 《동문선(東文選)》 및 다른 데에 보이는 저자의 글과 대교수정(對校修正)하여

   번역하고, 원문에 구두(句讀)를 찍어 영인하여 붙이고, 오자를 바로잡아 오두(鼇頭)를 달았다.

  한국고전번역원(http://db.itkc.or.kr)

 

 

동국이상국문집(東國李相國集)

 

 

 

●해제(解題)

 

1. 서론

 

필자는 이규보(李奎報)를 광세(曠世)의 문인(文人)이라 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의 일생의 작시가 7,8천수에 이르고, 한림별곡(翰林別曲)에도 이정언(李正言)ㆍ진한림(陳翰林)

의 쌍운주필(雙韻走筆)을 일컫고 있으니, 천성의 시인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곡예(曲藝)이기도

하였다.

 

이 주필(走筆)이란, 옆에서 호운(呼韻)하고 경각에 시를 지어 수십 운을 계속해 내는 일종의

문인들의 놀이로서, 최충헌(崔忠獻)의 군문(軍門)에서 문인의 기상을 드높인 하나의 기적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그는 변혁기를 당하여 무(武) 밑에 이사(頣使)당하고 유린당하여도 문(文)의 힘을 믿는

평화주의자이기도 하였고, 또 문장경국대업(文章經國大業)의 신봉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를 얼마간 실천에 옮긴 사람이다. 그는 또 그것을 믿고 몽고 몇 만(萬)의 대군을 문사

(文辭) 한 장으로 물러가게 한 바 있으니, 이런 문장의 마력(魔力)을 구사할 수 있는 문장의

화신(化神)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강화 천도(江華遷都) 이후에 평생 비축이 없어 다른 관원들이 전답을 사는 등 생자

(生資)의 계책에 여념이 없을 때 객사(客舍) 한 칸에 차가(借家)를 얻어 간고하게 살면서도

국가의 사명(詞命)을 도맡아 문인으로서 영광된 자리를 지켰으나 이 나라 강토가 몽고의 철기에

눌려 30만의 희생자를 내었고, 신라 이래의 귀중한 문화재가 회신(灰燼)으로 돌아갔으니, 역시

문(文)에는 한계점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을 것이다.

 

지금도 강화 길상면(吉祥面) 진강산(鎭江山)에 그의 분묘가 있어 인생무상의 감회에 젖게 한다.

그러나 그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53권은 8백 년 뒤에까지 우리들에게 남겨져 문인의

생애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한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그가 최씨 정권에 아첨하고 문객(門客)이 되었다 하여 왈가왈부하는 이가

있다. 이 점은 뒤에 언급해 보겠다.

 

2. 생애(生涯)

 

10세기의 과거법(科擧法) 시행 이후, 지방의 호족, 특히 향리층(鄕吏層)에서 이 문을 두드려 여기

에 입격(入格)하고 관원(官員)으로 부상하여 문관 계급에 진출하였다.

이들 신흥 사대부(士大夫)들이 12세기 후엽, 의종(毅宗)의 향락에 편승 오만해져, 이들 문관 관료

층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정중부(鄭仲夫)ㆍ이고(李高)ㆍ이의방(李義方) 등에 의하여 보현원(普賢

院) 거사(擧事)로써 표면화되고 대참화의 변이 있었다.

 

이보다 2년 전 의종 22년(1168) 12월 16일에 이규보(李奎報)는 황려현(黃驪縣) 즉 현 여주(驪州)

에서 호부 낭중(戶部郞中) 이윤수(李允綏)와 금양군인(金壤郡人) 김씨(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인저(仁氐)였으나, 기유년(1189, 명종19) 사마시(司馬試) 때 꿈에서 규성(奎星)이 과거에

오를 것을 알리더니 입격하였으므로 규성(奎星)의 보응(報應)이라 하여 규보(奎報)라 이름을

고쳤고, 뒤에 선적(禪的)인 데 끌려 호를 백운거사(白雲居士)라 하였고 다시 백낙천(白樂天)의

풍류에 따라 스스로 시금주삼혹호 선생(詩琴酒三酷好先生)이라고 하였으며, 당시 사람들은 그를

주필 이당백(走筆李唐白)이라고 지목하였다.

그는 이미 9세에 글을 잘하였으므로 당시 그를 신동(神童)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그가 14세가 되던 신축년(1181, 명종11) 문헌공도(文憲公徒) 성명재(誠明齋)의 문을 두드려 학업을

닦고 16세에 사마시에 응했지만 이후 세 차례나 낙방을 하는 고배를 마시다가 명종(明宗) 19년

(1189) 그가 22세 되던 해에 급기야 장원을 하였고 이듬해에 진사(進士)에 뽑혔으나 그 등차

(等次)가 하위를 차지하여 이를 물리려 하자 엄군(嚴君)으로부터 준엄한 꾸지람도 받았다.

 

당시, 무신집권(武臣執權)이라는 역사의 전환기적 상황 속에서 세상과의 화해를 거부하고 술과

시로 스스로 청고(淸高)를 자랑하던 소위 해동칠현(海東七賢)과 함께 자리를 같이하여, 마침

비어 있던 그와의 망년우(忘年友) 오덕전(吳德全)의 자리를 대신하라는 말을 듣자 그는,

“칠현(七賢)이 조정의 벼슬자리도 아니거늘 어찌 그 빈자리를 대신한단 말이오? 혜강(嵇康)ㆍ

완적(阮籍) 뒤로 그를 계승한 이가 있다고는 듣지 못했소.”하고 시를 지었다.

 

영광되이 죽림의 모임에 참여하여         / 榮參竹下會

통쾌히 동잇술 기울였네                  / 快倒甕中春

알지 못하겠네 칠현 가운데               / 未識七賢中

그 누가 오얏씨 뚫은 이기주의자이던고    / 誰爲鑽核人

 

천마산(天磨山)에 우거(寓居)하면서 백운거사어록(白雲居士語錄 전집(全集) 20권)과 백운거사전

(白雲居士傳 전집(全集) 20권)을 짓고 난 5년 뒤인 명종 27년(1197) 12월 총재(冢宰) 조영인

(趙永仁) 등 네 정승이 차자(箚子)를 올려 왕에게 추천하였으나 반대파들로 말미암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등과한 지 10년 만에 겨우 전주목사록 겸 장서기(全州牧司錄兼掌書記)에 보임

되어 관로에 등장이 되었으나 참소를 입어 얼마 안 있어 서울[京師]로 돌아왔으며, 사륜정기

(四輪亭記 전집 23권)와 남행기(南行記)를 지은 다음해인 신종(神宗) 5년(1202), 경주에서

반란이 있자, 군막(軍幕)에서는 벼슬하지 못한 자로서 문서를 다루는 수제원(修製員)을 충원

하려고 했으나 모두 출정하기를 꺼리자 그는 분연히,

“내가 비록 유약한 선비이지만 또한 국민이니 국란을 피함이 어찌 장부일까보냐?”

라 말하고 종군하여 병마녹사(兵馬錄事)로서 수제를 겸하기도 하였다.

희종(熙宗) 3년(1207) 그의 나이 40세 되던 해에는 진강공(晉康公)의 모정(茅亭)에서 이인로

(李仁老)ㆍ이원로(李元老)ㆍ이윤보(李允甫) 등과 함게 기(記)를 지으니 제일로 뽑히고 12월에

처음으로 한림(翰林)에 들었으며 강종(康宗) 원년(1212) 1월 천우위녹사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

에 제수되었다. 6월에 다시 겸직으로 한림원에 복직하였으며, 을해년(1215, 고종2) 여름, 최충헌

(崔忠獻)에게 시를 올려 참직계(參職階)에 제수되기를 구하니, 충헌이 그 시를 보고,

  “이가 분명 뜻을 높이 가진 자이다.”

라 생각하고, 전첨(典籤) 송순(宋恂)에게 뜻을 묻고서는 이에 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制誥)를

내려주어 좌우 사간(左右司諫)을 역임하게 되었다.

 

이때, 고종(高宗) 3년(1216) 5월부터 약 1년 반 동안에 한림별곡(翰林別曲)이 지어졌다. 나라에서

는 새로 급제한 사람을 위하여 학사연(學士宴)을 열거나 추천희(秋千戲)를 열어 주는 것이 향례

였다. 이때 금의(琴儀)의 문생 중에서(여대는 문인이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에서 급제를

뽑으면 바로 지공거의 문생이 되었다.) 한 사람이 일어나 별곡을 불렀다.

 

元淳文 仁老詩 公老四六

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

沖基對策 光鈞經義 良鏡試賦

 

위 琴學士의 玉笋門生 위 琴學士의 玉笋門生

위 날조차 몇 부니잇고

 

이는 문인들의 시장경(試場景)의 서술이다. 당시 이규보가 정언 벼슬에 있던 때이고, 진화(陳澕)

가 고종(高宗)의 사부(師傅)이면서 한림으로 있을 때였다.

이에 대하여는 필자가 ‘한림별곡(翰林別曲)의 창작연대’에서 고증하였다.

그러나 고종 6년(1219) 팔관회(八關會)일로 말미암아 최충헌(崔忠獻)의 탄핵을 받고 계양도호부

부사(桂陽都護府副使)로 좌천되었다.

이해 일세의 권병을 잡고 있던 최충헌이 죽었으며, 당시 이규보는 52세였다.

충헌이 죽고 난 뒤 예부 낭중(禮部郞中, 53세)으로 부름을 받고 태복 소경(太僕少卿, 55세)ㆍ

보문각 대제(寶文閣待制)ㆍ국자감 좨주(國子監祭酒)ㆍ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ㆍ판위위사

(判衛尉事)를 역임하였으나, 그의 벼슬길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으니 고종 17년(1230) 63세 때

팔관회의 시연(侍宴)의 차례가 구례(舊例)에 어긋났다 하여 11월에 위도(猬島)로 유배되었는데

이때의 모습을 잘 드러낸 시가 있다.

 

옛날에 이소경을 읽고 초신을 슬퍼하였는데   / 舊讀離騷悼楚臣

어찌 오늘 내가 이럴 줄 알았으랴            / 豈知今日到吾身

선비 되기 틀렸고 중 되기는 늦었으니        / 爲儒已誤爲僧晩

알지못게라 종내 어떤 사람 될 것인지        / 未識終爲何等人

 

고종 19년(1232) 4월에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65세)로 기용되었는데, 몽고가 국경을 넘어 병란을

일으킬 때에는 그는 사명(訶命)의 일을 도맡아 서(書)ㆍ표(表) 등을 지었으니, 이규보의 문필에

몽고왕은 크게 감탄하여 병사를 거두게도 하였으나 세과부득(勢寡不得)으로 조정은 강화(江華)로

도읍을 옮겼다 고종은 다음해 6월 그를 추밀원부사 우산기상시 보문각학사(樞密院副使右散騎常侍

寶文閣學士, 66세)에, 12월에는 상부(相府)로 들여 지문하성사 호부상서 집현전태학사 판예부사

(知門下省事戶部尙書集賢殿太學士判禮部事)에 제수하였다.

 

을미년(1235, 68세) 그해 10월, 표(表)를 올려 퇴직을 청하자 임금이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정사

를 맡기므로 나라의 일을 보다가 70세에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거듭 보이니, 고종은 수태보문하

시랑평장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태보(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太學

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太保)로 치사(致仕)하게 하였으니 바로 이해에 대장경 각판군신

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을 지었다.

그 후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평생에 즐겼던 시와 술로 낙을 삼고서 가난한 생애를 보냈으니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옛날엔 일개 유생이었는데      / 伊昔一布衣

인연이 있어 재상이 되었었네   / 夤緣作邦宰

재상 자리 이제 물러났거니     / 宰相已退老

다시 어찌 그 태도 있으랴      / 寧復宰相態

품팔이 잡된 일 하더라도       / 傭保與雜作

어느 누가 괴상히 여기랴       / 人亦何必怪

더구나 이 집은                / 況此一戶壺

몸 담고자 장만한 것           / 自奉所可辦

화로 끼고 손수 숯을 피우며    / 擁爐自添炭

술 있으면 손수 데우곤 하지    / 有酒手自煖

 

그러나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나 대외적인 서(書)ㆍ표(表) 등은 그가 계속하여 짓기도 하였다.

고종 28년(1241) 7월에 병을 얻었을 때 최이(崔怡)는 이규보가 지은 시들을 모아 판각하게 하였

으나 그는 자기의 문집을 미처 보지 못하고 사제(私第)에서 향년 74세로 운명하였으니 1241년

9월 2일의 일이었다. 나라에서는 3일 동안 조회를 보지 않았으며 시호를 문순공(文順公)으로 봉

하였고, 그해 11월 6일 진강산(鎭江山) 동쪽 기슭에 안장하였다. 지금도 강화읍에서 전등사로

가는 길목 목비(木碑) 고개에서 숲으로 300m쯤 가면 그의 묘가 있다.

 

3. 어용(御用) 시비에 대하여

 

위와 같이 그의 생애는 화려하다면 화려하였다. 이러한 생애를 놓고 그에 대한 평가로 요즈음

젊은 평론가에서 어용 시비(御用是非)가 나왔었다.

그가 최씨정권 치하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살았기 때문에, 그는 의도했건 안 했건 간에 최씨의

문객(門客)밖에 될 수 없었다. 그는 무인 정변의 2년 전인 서기 1167년에 나서 서기 1241년

74세로 죽을 때까지 국내는 무인들의 치하에 있었고 다시 북에 요(遼)와 금(金)의 침략의 위협과

또한 실제로 몽고(蒙古)의 침략을 당하여 강화(江華)에 천도(遷都)하여 4년이나 살다가 돌아갔

으니, 가위 환난동탕(患難動盪) 속에서 일생을 마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때, 민중은 자구책(自救策)으로 민족주의적 양상을 띠고, 지배자는 이에 영합하여 민족지상

(民族至上)의 철학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다.

이규보가 민에 있을 때, 우리의 민족서사시(民族敍事詩)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쓴 것은 바로

이런 배경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이보다 4백 년 뒤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있었다. 이 임진왜란에는 재야의 민중 속에서 의병

(義兵)들이 봉기하여 새로운 양상을 띠었지만, 고려의 몽고 침략 때에는 세외교(世外敎)인

불교를 종교로 하였기 때문인지 이런 항거가 민중 속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배층은 문(文)ㆍ무(武)로 갈라져 상호 견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호 견제 정도가

아니라 문이 무에 이사(頣使)당하고 있던 시대이니, 한림별곡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문이 아무리

자존자대(自尊自大)해도 당시의 패권자 최충헌(崔忠獻)의 눈에 들지 않으면 오덕전(吳德全)과

같이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몸을 담다가 자기 고향으로 낙향(落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농민으로 전락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지방의 향리(鄕吏)로서

과거의 문을 뚫고 올라온 사대부 계급에 있어서는, 조상의 이름을 빛내고 자기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참을 수 없는 전락인 것이다. 이런 상황 설명을 모씨는, 이규보로 대표되는 지식분자들은

무인정권이 장악하고 있는 사회에서 유교의 이념을 왜곡하고 거기다 유가의 입세철학을 엄호하면

서 권귀(權貴)에 붙어 이런 강권 정치하에서 지식인들이 국수주의자로 위장하여 외적에 저항할

것을 외치면서 안으로는 시문으로 아유첨미(阿諛諂媚)의 공세를 펴고 권귀(權貴)에 대하여는

고관후록(高官厚祿)을 바라고 시문은 입신출세의 요구로 쓰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규보가 26세 때 쓴 동명왕편(東明王篇)도 같은 이론 밑에서, 오국본위천하성인지도

(吾國本爲天下聖人之都)를 내세우며 민족감정을 고무하고 당시 사회의 모순을 왜곡하고 당시의

무인정권의 연장을 꾀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를 두지 않더라도, 이규보가 어용문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점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동명왕편도 최씨정권수립(1196)의 3년 전의 소작이라는 데에는 이상의 소론이

얼마나 관념적이라는 것인가 알 수 있다.

 

그러니 여기에 나오는 권세, 아부, 유교이념, 국수주의, 외적 침략에 저항할 것을 고취하는

등의 사적은 불교도들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그 뒤의 일연법사(一然法師)도 그런 성향이니,

이것은 외적의 위협하에 있던 당시인들의 공통된 성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규보의 행적 속에서 그가 그의 문필을 어떻게 출세의 도구로 삼았는가를 볼 때에 그가 최충헌

의 사자인 최이(崔怡)의 택중에서 천엽류화시(千葉榴花詩)를 쓴 것은 그의 32세 때이다.

그리고 모정기(茅亭記)를 쓴 것은 40세 때이다. 그동안 그의 관직은 미관말직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그러다가 최이와 알고 최충헌 앞에 끌려가 주필(走筆) 헌시(獻詩)하여 최충헌을 감동

시켜 탁용(擢用)의 뜻을 두게 한 것은 46세 때이다. 그러나 그는 최충헌이 소망을 말하라 할

때에 당시 8품 벼슬에서 겨우 7품을 소망하였을 뿐이다.

이는 그의 천부의 재능에 의하여 얻은 것이지 결코 아첨 수단이나 권문에 가까워지려고 한 것은

아닐 것으로 본다.

 

그의 조명풍(釣名諷)

 

물고기 낚음은 고기 때문이지만    / 釣魚利其肉

이름 낚음은 무엇 때문인지        / 釣名何所利

이름은 바로 실의 객이니          / 名乃實之賓

주 있으면 저절로 객 이르네       / 有主賓自至

실 없으면 헛된 이름일 뿐이니     / 無實享虛名

모두 이름으로 생긴 누일레        / 適爲名所累

 

에서 보면 이규보는 허명을 버리고 정도를 걸어간 인사라고 보여진다. 또 그의 무관탄(無官嘆)

을 보면,

 

벼슬 없어라                         / 常無官常無官

떠돌며 밥 비는 건 내 마음 아니고    / 四方糊口非所欲

한가히 지내며 세월 보내기로 했네    / 圖兎居閑日遣難

아 인생 이 운명 이다지도 궁상스런고 / 噫噫人生一世賦命何酸寒

 

하였으니 이 얼마나 철저한 자학(自虐)인가. 그의 뜻은 한결 높은 데에 있었다.

그의 자찬(自贊) 시에서 보면

 

뜻은 본디 우주 밖에 있어                                        / 志固在六合之外

천지도 날 제한 못해                                             / 天地所不囿

기모(氣母 원기(元氣)의 모체)와 함께 무하향(無何鄕)에서 노니려네 / 將與氣母遊於無何乎

 

하였으니, 가히 그의 인생의 철리의 심각함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안전의 욕망을 승화시키고 우주 사이에 참여하고 있으면서 자기의 생을 무하(無何)의 지경에

묻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람 보고 어찌 아첨을 일삼는다고 할 수 있는가.

그가 한림별곡에 있는 대로 좌사간(左司諫)에 임명된 때는 이미 52세 때였다. 인생 50이면 하나의

단락이 될 수 있다. 그 뒤에 그에게 주어진 여명(餘命)은 주어진 것이지 단순히 구해서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또 그동안에도 여러 번 유배(流配)를 당하였다. 63세에 최충헌이 죽고 최이 치하에서 63세에

다시 위도(猬島)에 유배당하였다. 65세에 강화로 피난가기 2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그는 강화에 가서 여축이 없어 몸을 담을 집도 없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그가 광세의

문재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렇게 간고했다는 것은, 일상적인 의미에서 어용(御用)과는 인연이

멀었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4. 시관(詩觀)

 

이규보는 우선 시인이었다. 그의 호가 시금주삼혹호 선생(詩琴酒三酷好先生)이란 백낙천(白樂天)

의 그것을 차용하고 있는 것으로 자칭하면서, 고려 일대가 당에서 멀지 않음으로 해서 아직

구투(舊套)에 철주(掣肘)당함이 없이 자유자재로 시사(詩思)를 구사할 수 있어 신선미가 있고,

또 고풍시(古風詩)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시는 생동하고 기골[氣套]에 차 있다.

그의 전후에 많은 시인이 배출되었지만, 완전한 문집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전모를 밝힐 수

없다는 사실이 그의 시를 높이 평가해 줄지는 몰라도,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시를 보면 놀랄 만한

대가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자기의 작시법에 대하여 시론을 남겨 놓고 있으므로,

여기서 그의 시에 대하여 품평은 하지 않겠다. 그의 주필(走筆)에 대하여는 생애편에 언급하였

으나, 이는 문인들의 놀이에 불과하였다. 그의 장기는 운(韻)을 따라 시상(詩想)을 형식 속에

자유자재로 채워 넣는 굉재(宏才)에 있었다.

그래서 장편(長篇)에 능하여 차운오동각세문정고원제학사삼백운(次韻吳東閣世文呈誥院諸學士三

百韻)은 무려 3백 2운(韻)에 이르고 개원천보영사시(開元天寶詠史詩)는 41수에 이르며,

그의 동명왕편(東明王篇)은 1백 41운이나 되어 우리에게 이미 없어진 구삼국사(舊三國史)의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그의 평생에 쓴 시가 7천~8천 수에 이른다는 것도 그의 마르지 않는 시상을 말하여 주는 것이지만

그가 만년에 이를 불태웠다는 것도 그의 준엄한 비판안을 보여 주고 남음이 있다.

최자(崔滋)는 그의 시를 평하여 ‘일월(日月) 같아 칭찬을 초월한다.’ 하였고,

다시 ‘천재준매(天才俊邁)라 하고 탁연(卓然) 천성(天成)’이라 하였다. 중국 시인에 비하면,

두보와 같은 침음(沈吟)이 아니라 이백(李白)과 같이 일기가성(一氣軻成)으로 신운(神韻)이 약동

하는 것 같다. 아울러 그의 시 가운데도 이백다운 시상과 이미지가 넘쳐흐르는 곳이 많이 산견

된다. 우선 그는 술에 대한 찬가로 속장진주가(續將進酒歌)를 지었는데, 이것은 당 나라 이하

(李賀)의 장진주를 화(和)한 것이지만, 이백의 장진주사가 그 조형이 되는 것은 자명할 것이다.

특히 이백이 경도한 달에 대한 이미지도 이규보의 시에서 많이 산견된다.

 

이규보의 정중월(井中月) 시에

 

중은 달빛을 탐내어             / 山僧貪月色

한 병의 물에 달까지 담았네     / 並汲一甁中

절에 이르러야 깨달았지         / 到寺方應覺

병이 기울면 달 또한 없어짐을   / 甁傾月亦空

 

하는 해학적인 시 이외에도 달을 읊은 시는 많다. 이리하여 그는 달의 이미지 속에 달을,

마음의 그늘과 낭만(浪漫)을 그리고, 청신(淸新)함을 나타내기도 하고, 희망과 이상의 상징

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5. 영물시(詠物詩)

 

그에게는 많은 영물시(詠物詩)가 있다.

작게는 자기 신변의 물건으로부터 자기 집 주위의 구체적인 물상에 이르기까지 -

이것은 송시(宋詩)의 영향이라 하면 그만이지만 - 이규보는 존재하는 만물의 구체적인 아름다움

을 통해 그의 실존의 밑바탕이 되는 물세계(物世界)와의 조화를 일깨워 준다.

접과기(接菓記 전집 (全集) 23권)ㆍ사륜정기 등의 글은 사물(이곳에서의 사물은 존재표상으로서

의 모든 세계를 가리키고 있다)을 독립된 세계로 인식하려는 모습을 암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모습은 답석문(答石問 후집 (後集) 11권) 같은 글과 시루의 깨어진 원인을 구명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시에서는 즉물적(卽物的) 개방성(開放性) 속에서 자신과 궁극적인 조화를 이루는 영물시

(詠物詩)로 변모되는데 이 과정에서 먼저 그는 사물을 자기화하여 의식을 백지화한 상태에서

단순화된 외부의 형태만을 글로 그리고 있다. 섬(蟾 전집 13권)ㆍ주망(蛛網 전집 14권)에서와

같이 두꺼비와 거미의 모습을 단순한 자성(自性)속에서 서술하고 있으며, 칠호명(漆壺銘 전집

19권)에서는 대상을 단지 있음의 상태로 극대화시켰다.

 

박으로 병을 만들어 / 自瓠就壺

술 담는 데 사용한다 / 貯酒是資

목은 길고 배는 불룩하여 / 頸長腹枵

막히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는다 / 不咽不欹

그래서 내가 보배로 여겨 / 我故寶之

칠을 칠해 광채나게 했네 / 漆以光之

 

한편 그는 관념을 해체시키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사물을 의인화하였는데 이 의인화는 사물에

육체를 부여함으로써 보편적인 개념에 탄력성 있게 맞서고자 하는 작가의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더욱 발전되어 쥐를 통해서 사물의 교환 가치와 도구적인 효용성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비판한 아래의 시를 그 예로 들 수 있는데, 결국 그가 사물에 투명한 시선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는 까닭 중의 하나는 물(物)과의 참된 모습 속에서 인간의 존재 양식을

제시하고자 하려는 때문이다.

 

사람은 천생의 물건을 훔치는데 / 人盜天生物

너는 사람의 훔친 것을 훔치누나 / 爾盜人所盜

다같이 먹기 위해 하는 일이니 / 均爲口腹謀

어찌 너만 나무라랴 / 何獨於汝討

 

이규보의 영물시가 갖는 또 다른 내용은 사물에 대한 초월적인 인식이다. 문조물(問造物 후집

11권) 중에서 ‘물자생자화(物自生自化)’는 모든 사물의 독자적인 존재 이유를 부여하여 우주

자연의 원리를 구명하는 그의 독특한 세계관으로부터 나온 언어이며, 또한 괴토실설(壞土室說

전집 21권)은 자연이 인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규보의 세계는 인간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가치 중심의 세계가 아니라, 슬견설

(蝨犬說 전집 21권)에서와 같이 이와 개의 죽음을 동일하게 봄으로써 인간 존재의 한계를 보여

주며 금명(琴銘 전집 19권)에서는 소리를 해체시켜 공(空)이라는 다른 차원을 통하여 파악하기

어려운 절대 체계를 시로 형상화하였다.

이러한 그의 무한한 시선은 모든 존재의 굴레가 영원히 돌아가며 그 커다란 틀 속에 인간이 자리

하고 있기 때문에 우주의 실상을 통해 관조된 삶을 이룩하고자 하는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다.

 

6. 민족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

 

이규보는 명종 23년(1193) 그의 나이 26세 되던 해 4월에《구삼국사(舊三國史)》를 얻어 대하

같은 글로 서(序)와 함께 1백 41운(韻) 2백 82구(句) 1천 4백 10언(言)의 장편 서사시(敍事詩)

동명왕편(東明王篇 전집 3권)을 지었으니, 그것은 당대 문학의 압권일 뿐만 아니라, 한국 서사

문학의 한 좌표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이규보가 갖는 시대적 정신이기도 하다. 김부식(金富軾)이 유교적인 관점에서 삼국의 역사

를 신라(新羅) 중심으로 편찬하였지만, 그는 동명왕의 이야기를 괴력난신(怪力亂神)으로만 보지

않고 당시 민중들에게 구전(口傳)되어 오던 설화와 《구삼국사》를 통해서, 《위서(魏書)》와

《통전(通典)》에 상세히 기록되지 않은 것을 중국에 대하여 비판적인 관점에서, 고구려(高句麗)

를 계승하고 있다는 고려인(高麗人)의 자부심과 함께 동명왕의 사적이야말로 우리 민족에게 영원히

전해야 할 민족정신의 지주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끊임없이 외적으로부터 침입을 당했던 시대에 서경(西京)을 북진 기지로 삼고 웅혼한 뜻을

다시 한 번 대륙에 펴고자 했던 고려 민중의 실천적인 소망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동명왕편은 해모수(解慕漱)와 유화(柳花) 사이에서 태어나기 이전의 과정과 탄생시 주몽(朱蒙)의

신비한 모습을 신화로써 그리고, 그가 시련 속에서 자라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고대 국가를 건설

한, 역사적인 대업을 천신(天神)과 산악(山嶽)을 숭배하던 우리의 고유한 신앙 속에서 근원적

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끝으로 왕자 유리(類利)의 왕위 계승과 함께 이규보는 왕위에 오르는 임금들이 관인(寬仁)과 예의

(禮儀)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희망했는데 구체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가 우의(羽衣)를 날리며 하늘과 인간 세상을 오르내리더니 하백(河伯)의

세 딸이 패옥을 쟁쟁이며 웅심연(熊心淵)에서 노니는 것을 보고 비(妃)를 둘 뜻이 있어 동실(銅室)

을 차리고 큰 딸 유화를 잡았다.

이에 하백이 크게 노하여 신통(神通)을 시험하고서는 술자리를 베풀어 딸과 함께 혁여(革輿)에

태워 천상으로 오르도록 했다. 그는 술에서 깨어나 놀라고는 황금꽂이로 가죽가마를 찢고 혼자

하늘로 올라가 버리니, 하백은 딸의 입술을 석 자나 되게 한 뒤 우발수(優渤水)로 추방하였다.

어느 날 어부가 기수(奇獸)를 보고서는 금와왕(金蛙王)에 고하여 건져 입술을 자르고 보니 해모수

의 비였다. 별궁에서 햇빛을 받아 주몽을 알로 낳으니 모든 짐승이 지켜주었다.

그가 자라 재능이 날로 늘자 부여의 왕자들이 투기하여 참소하니 왕은 목마(牧馬)를 시켜 그의 뜻

을 떠보았을 때, 주몽은 남쪽으로 떠날 뜻을 어머니에게 고하고서는 붉은 말 혀에 바늘을 꽂아

자기의 말로 만들어 남행(南行)할 적에 엄체(淹滯)에 다다라 배가 없자, 하늘을 향하여 호소하니

자라들이 다리를 놓아 주었다. 주몽이 시련에서 벗어나 왕도(王都)를 정하고 군신의 자리를 대략

이루었을 때, 비류(沸流)의 송양왕(松讓王)이 다가와 재주를 겨루어 보다 크게 놀라고 또한 동명

왕의 신하 부분노(扶芬奴) 등 세 사람이 비류국의 고각(鼓角)을 취하였으나 감히 다투지 못하였다.

 

동명왕이 서쪽으로 사냥나가 흰 사슴을 잡아 해원(蟹原)에 매달고는 위협하여 비를 이레 되도록

오게 하여 송양을 물바다로 만들고서 그 백성들을 갈대풀로 구하니 송양왕은 백성을 이끌고 항복

하게 되었다. 이어 왕은 상서로움으로 궁궐을 이루고 황천(皇天)에 절하고서는 재위(在位) 19년

만에 승천하게 되는데 그 뒤를 이어 원자(元子) 유리가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설움 속에서 자라

다 어머니의 말을 듣고 부러진 칼을 찾아 왕위를 잇고서는 고구려를 더욱 빛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남아있음으로 해서 우리나라 신화학(神話學)의 전개를 가능케 해 주고 있다.

 

7. 시론(詩論)

 

그의 시론은 우선 기(氣)에 대한 해명부터 시작된다.

기(氣)는 작품 이전의 것이요, 의(意)는 작품이 담고자 하는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하겠

으나, 기와 의는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이를 함께 묶어서 다루고자 한다.

문학에서 기(氣)는 작가와 작품의 유기적인 연관성과 작품의 미적(美的) 기준으로 나타난다고

하겠다. 이는 작가의 개성을 중시하고 문학의 자주성을 인식하여 유교(儒敎)의 도덕적 가치관

에서 차원을 높여, 철학적으로 의미를 확대하고 문학을 더욱 심화(深化)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규보가 시의 원리에서 주목하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기(氣)였다.

 

시는 의(意)가 주가 되므로 의를 잡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맞추는 것은 그 다음이다.

의 또한 기(氣)가 위주가 된다. 기의 우열에 따라 뜻의 깊고 얕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기란 천성(天性)에 딸린 것이어서 배워서 이룰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가 떨어지는 사람은

글 다듬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의를 앞세우지 않는다. 대체로 글을 깎고 다듬어 구(句)를 아롱

지게 하면 아름다움에는 틀림없다 하나 거기에 심후(深厚)한 의가 함축되어 있지 않으면 처음에는

볼 만하지만 다시 씹어보면 맛이 없어진다.

 

즉 시는 의를 주로 하며 그 기는 하늘에 근본하고 있기 때문에 후천적으로는 취할 수 없다는 것

으로, 기가 시를 낳게 하는 근원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규보가 말한 기는 만물을 생성하는 도구

이며 시를 낳게 하는 시재(詩才)로서 이는 하늘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입신(入神)의 경지에 도달

함이 최고의 시가 된다는 것인데, 실제《백운소설》에서는 그가 꿈에 신선과 만나 시를 화작

(和作)하거나, 시적인 영감(靈感)을 얻는 경우를 기술하고 있다. 또한 기의 우열에 따라 뜻의

깊고 얕음이 생기고, 기가 부족한 사람은 조루(雕鏤)와 단청(丹靑)을 일삼고 함축(含蓄)이나

심후한 뜻을 찾으려고 하지 않아, 작품이 가볍게 된다는 본질적 문제를 제시하고, 자연 시를 짓는

어려운 점을 ‘설의최난(設意最難)’이라고 이론적으로 체계를 확립시켰다.

 

결국 이규보는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하여 뜻을 중시하게 되고 신의론(新意論)을 내세우게 되었

는데, 구속과 집착으로부터 해방된 세계에서 인생을 만끽하고 문학을 통하여 이상향(理想鄕)을

펴려는 그의 사상적 일면을 많은 시에서 바라볼 수 있으니, 이러한 입장이 강조되어 호방하고

개성을 중시한 그가 시론에서 기를 뜻의 으뜸으로 삼은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한편 이규보는 흥(興)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였는데 이는 시적인 감흥을 뜻하는 것으로 생활과

사고에서 얻어진 시흥을 자연스럽게 표현함이다.

 “시라는 것은 자신이 본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 그는 시가 경치나 사물에 촉발(觸發)되어 시흥을 얻는 것으로 보고, 아름다운 경치를 보다가

저절로 시를 읊게 되는 시흥의 경지를 시작과정(詩作過程) 속에서 서술하고 있다.

 

한번은 주사포(主史浦)에 간 일이 있었는데, 명월(明月)이 산마루를 나와 모래강변을 환하게

비춘다. 속이 유달리 시원해져, 고삐를 풀고 달리지 않으며, 창해(滄海)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침음(沈吟)하니 말몰이꾼이 이상해한다. 시 한 수가 되었다……나는 전연 시를 지으려고 생각

지도 않았었는데 모르는 결에 갑자기 절로 지어진 것이다.

 

이는 자연을 관조하고 달관하여 침잠의 세계에 몰입한 무아의 경지에서 시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며, 이것은 시본호심(詩本乎心)의 시관으로 보며 이러한 과정에서 제작된 시는 곧 입신

의 경지요 조탁한 시구보다도 차원이 높은 작품임을 말해준다.

 

이상에서 이규보는 시의 본질을 어떻게 보았는가 정리하였다.

다음은 이러한 시관을 기초로 하여 작시법(作詩法)은 어떠하였는가.

 

그는 시서육경(詩書六經)ㆍ제자백가 및 사가(史家)의 글을 비롯하여 궁벽한 경서ㆍ불서(佛書)ㆍ

도가(道家) 등을 다 자기 약롱(藥籠) 중에 넣고 정화를 모아 작시에 응용하였다.

그러나 이를 기초로 하여 그는 신의(新意)를 주장하였다.

 

당시 고려의 시인들은 당송(唐宋)의 시문을 숭상하여 이를 규범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숙독하는

것을 시의 정도(正道)로 생각하여 그들의 시체(詩體)를 본받아 어려운 시경(詩境)을 개척해 나가

려는 의도는 표절로 변질되고 말았다. 표절은 어느 시대의 문학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규보는 이렇게 표절을 일삼는 당대의 시풍을 지양하고 새로운 의경(意境)을 개척하려는 시에

대한 자세를 신의로 주장하였다.

 

그가 표절을 도덕에 비유한 것은 탁견이 아닐 수 없다. 고인의 시를 많이 읽어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소화하지 못함을 비유한 것이다. 이규보는 ‘구불의체(九不宜體)’에서 옛사람들의 의경을

따 쓰는데 잘 훔쳐 쓴다 해도 나쁜데, 더욱 훔쳐 쓴 것도 잘되어 있지 않은 것을 ‘졸도이금체

(拙盜易擒體)’라고 꼬집어 말하고 있다.

 

한편 이규보는 용사(用事)를 많이 한 것을 ‘재귀영거체(載鬼盈車體)’라 하였고, 용사의 기교가

부족한 것을 ‘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라 하여 꺼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용사는 경서나 사서

또는 제가의 시문이 가지는 특징적인 관념이나 사적(事迹)을 두세 어휘에 집약시켜서 원관념을

보조하는 관념의 소생이나 관념배화(觀念倍化)에 원용하는 수사법이다. 그러나 당시의 용사가

동파(東坡)를 숭상함에 있어 시의 정도를 밟지 못하여 모방과 표절에 끝나게 된 것을 지적하면서

이의 사용에는 정교한 기교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더욱 이규보는 평측(平仄)을 굳이 맞추어 시의 기교에만 힘쓸 필요는 없다는 지론을 펴고 있다.

대개 한시는 엄격한 정형시다.

복잡한 평측을 맞추어야 하고 대(對)를 짝해야 하는 규율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음률을 중시하여

가창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주원인이 될 것이다. 그 엄격한 시형에서 성률을 무시

한다는 것은 과감한 변혁이 아닐 수 없다. 복잡한 시법을 맞추느라 본래의 시의(詩意)를 이루지

못하는 병폐를 제거하려는 진보적인 작시 태도로 개성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작시관을 그는 주장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작시론에서 특기할 만한 것을 고찰한다면 이규보는 청경(淸警)ㆍ웅호(雄豪)ㆍ연려(姸麗)ㆍ

평담(平淡)한 것을 섞어 모든 체와 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시작의 다양성을 주장하고 있으며 그에

게서 가장 특이한 작시론으로 ‘시유구불의체(詩有九不宜體)’를 정리해 본다.

 

1. 재귀영거체(載鬼盈車體) : 고인의 이름을 많이 쓴 것

2. 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 : 고인의 뜻을 훔친 기교가 부족한 것

3. 만노불승체(挽弩不勝體) : 근거없이 억지 운을 쓴 것

4. 음주과량체(飮酒過量體) : 압운이 지나치게 어긋난 것

5. 설갱도맹체(設坑導盲體) : 험자(險字)를 써 미혹하게 하는 것

6. 강인종기체(强人從己體) : 말이 순하지 않은데 억지로 인용한 것

7. 촌부회담체(村夫會談體) : 상말을 많이 쓴 것

8. 능범존귀체(淩犯尊貴體) : 공맹(孔孟)을 범하기 좋아하는 것

9. 낭유만전체(莨莠滿田體) : 수사가 거친 것

 

1ㆍ6ㆍ8은 용사론이고, 2는 환골탈태론, 3ㆍ4는 성률론, 5ㆍ7ㆍ9는 수사론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것을 종합하면

 

1. 용사를 지나치게 과용하지 말 것

2. 환골탈태를 피할 것

3. 압운법에 집착하지 말되, 지나치게 벗어나지 말 것

4. 수사에 있어 험자(險字)와 상말을 피할 것

 

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규보의 이러한 입장이 작품을 평가함에 있어, 자구의 기교보다는 작품 전체가 갖는 품격을

중시하고 귀어정(歸於正)하여 사무사(思無邪)이어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보아 먼저 기골의격

(氣骨意格)을 살피고 다음에 사어성률(辭語聲律)을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즉 작품 평가에 풍골(風骨)을 적용한 것이다. 풍은 작가의 생각을 작품에 뚜렷하게 나타낸

것이고 골은 수사(修辭)에 있어서 정확한 결구(結構)를 말하는 것으로 미사여구만 늘어 놓은

시는 골(骨)이 없는 것이요, 작가의 생각이 나타나지 못한 것은 풍(風)이 없는 시다.

그러므로 뜻이 곡진(曲盡)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8. 산문(散文)

 

문집 19권에서 41권까지는 그의 산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진정표(陳情表) 하나로 몽고의 군사

(軍師)를 거두게 하였다는 것은 그의 산문도 그의 시 못지않게 설득력이 있었고, 그 바람에 그는

국가의 사명(詞命)을 맡아 최씨 막부(幕府) 하에서도 고려 문치주의의 실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국문학면에서는 국선생전(麴先生傳 전집 20권)과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 전집 20권)이

있어 임춘(林椿)을 이어 조선조 소설에의 맥락을 이어주고, 시화(詩話)에 있어서는 백운소설

(白雲小說)이 있어 조선조 시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현재의 백운소설은 시화(詩話)만 있고, 이야기[稗官小說]가 없다는 것은 도중에 산일되었을 것이

라고 이병기(李秉岐) 선생은 추측하였지만 정곡(正鵠)을 잡았는지 알 수 없다.

그의 산문은 국가의 사명(詞命)으로 쓴 것은 현재에도 고문서(古文書) 연구에 커다란 범(範)이

되고 자료가 되고 있다.(전사(前謝)ㆍ중사(中謝) 등의 사사(謝辭) 같은 용어 등)

 

그의 시론에서 언급한 대로 많은 고전적 지식 위에 용필하였기 때문에 그의 문(文)은 유교뿐만

아니고, 도교ㆍ불교의 용어와 운축을 경도한 것이어서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엄유(奄有)한 느낌

이고, 이런 글에 탈속(脫俗)ㆍ표고(飄高)한 맛을 지녀 그가 단순히 최씨 정권에 아첨한 것이 아닌

그의 진면목을 보여 주고도 남음이 있다.

 

특히 그의 문중에서 우리나라 금속활자(金屬活字) 주조의 사실을 알려줌은 망외의 유주(遺珠)가

아닐 수 없다.

 

9. 문집(文集) 출간 및 구성

 

벼슬에서 물러난 지 4년 뒤인 신축년(1241) 그의 나이 74세 되던 7월, 병을 얻으니 진양공(晉陽

公)이 이 사실을 듣고 명의(名醫)를 보내는 한편 이규보가 평생에 지은 글들을 모아 공인(工人)

에게 명하여 판각하게 하였으나 그는 자기 문집을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 일이 워낙 방대하여

그의 생전에 이룩하려고 했던 것은 연보(年譜)의 기록과 상서예부시랑(尙書禮部侍郞) 이수(李需)

가 쓴

  其平生所著 不蓄一紙 嗣子監察御史涵 收拾萬分之一 得古賦古律詩牋表碑銘雜文幷若干首 請爲文

集 公可其請 分爲四十一卷 號曰東國李相國文集 涵又請曰 集已成矣 不可無序”

 

란 문집 서로 미루어 보아 41권만이 편성(編成)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후집 서에는

 

“大人平生所著多矣 然本不收蓄 又爲人取去不還 或焚棄之 前集有焚稿詩 僅存十之二三 故難於編綴

凡大人所嘗遊踐儒家釋院及交遊士大夫間 無不搜覓 得詩之凡若干首 分爲四十一卷 編成前集 侍郞李

需序之 集成之後 又得遺逸及近所著古律詩 八百四十七首雜文五十首 成後集十二卷”

 

이라 되어 있으니 《동국이상국집》전집 41권 후집 12권 총 53권은 아들 함(涵)에 의해서 고종

28년(1241) 12월을 중심으로 편간(編刊)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초간본(初刊本)이 ‘欲及公之眼見 以慰其情也’ 하려는 의도에서 급하게 간행되었기

때문에 탈루(脫漏)함이 매우 심해, 신해년(1251, 고종38)에 분사도감(分司都監)에서 대장경

(大藏經) 판각을 마쳤을 때 고종의 칙명을 받들어 사손(嗣孫) 익배(益培)가 개간(改刊)하니

동국이상국집발미(東國李相國集跋尾)의

 

“嗣孫益培言 祖文順公全集四十一卷 後集十二卷 年譜一軸 行于世者尙矣 多有訛舛 脫漏之處 今者

分司都監雕海藏告畢之暇 奉勅鏤板 予幸守此郡 以家藏一本 讐校流通耳”

 

한 기록이 그것이다.

 

이것이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임란 전과 후에도 몇 번 간행되었다는 사실을 영본(零本)으로

전하는 여러 책들로 추정할 수 있는데, 실본(失本) 되었던 것을 일본(日本)에서 입수하여 다시

간행하였다는 이익(李瀷)의 말로 오늘날 완전히 전해지는 판본을 영정(英正) 시대의 복각본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제 일부 조사된 판본의 서지적 관계는 아래와 같다.

 

[서울대본]

목판본 53권 13책 시주쌍변 19.5×15cm 유계 10행 18자 상하내향화문어미

 

[연대본]

1. 목판본 33권 10책(영본) 사주쌍변 19.8×15.2cm 유계 10행 18자 상하내향화문어미

《徐首生 白雲李奎報의 문학연구 韓國詩歌硏究 형설출판사 1974 개정판 p.125》

2. 목판본 12권 2책 사주단변 23×19.5cm 무계 12행 17자 무어미(고려시대본으로 추정)

[성암조명순본]

1. 목판본 8권 2책(영본) 사주단변 21×17.4cm 무계 10행 18자 무어미

2. 목판본 4권 1책(영본) 사주단변 21×17.4cm 무계 10행 18자 무어미

3. 목판본 4권 1책(영본) 사주쌍변 19×14.8cm 유계 10행 18자 상하내향화문어미

4. 목판본 6권 2책(영본) 사주쌍변 20×15cm 유계 10행 18자 상하내향화문어미

5. 목판본 32권 7책(영본) 사주쌍변 19.5×15cm 유계 10행 18자 상하내향화문어미

6. 목판본 5권 1책(영본) 사주쌍변 18.6×14.3cm 유계 10행 18자 상하내향화문어미

 

[고려대만송문고본]

1. 목판본 2책(영본) 사주쌍변 19.8×14.7cm 유계 10행 18자 상하내향화문어미

2. 목판본 4권 1책(영본) 사주단변 21.8×17.3cm 무계 10행 20자 무어미

3. 목판본 4권 1책(영본) 사주단변 21.8×17cm 무계 10행 20자 무어미

4. 목판본 2책(영본) 사주쌍변 21.7×17.4cm 10행 18자 상하흑구내향어미

 

[국립도서관본]

목판본 16권 4책(영본) 사주단변 21.5×18.2cm 무계 10행 18자 무어미

 

[용재백낙준본]

목판본 12권 3책(영본) 사주쌍변 19.6×15.2cm 유계 10행 18자 상하내향화문어미

1913년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는 조선군서대계속(朝鮮群書大系續) 22ㆍ23집에

활자본으로 상ㆍ하 2책을 간(刊)하였으며, 1958년 동국문화사(東國文化社)에서는 서울대 규장각

(奎章閣)본을 영인하여 출간하였고, 1973년 성균관대학교(成均館大學校) 대동문화연구소(大東文

化硏究所)에서 고려명현집(高麗名賢集 1)에 다시 영인본을 내놓았으며, 민족문화추진회는 이를

대본으로 하여 1979년부터 3년에 걸쳐 번역과 원문을 실어 7책으로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동국이상국집》이란 명칭은 문집의 서(序)에 《동국이상국문집(東國李相國文集)》을 통칭한

것이다. 전집(全集)에는 연보(年譜)ㆍ부(賦)ㆍ시(詩)ㆍ상량문(上樑文)ㆍ송(頌)ㆍ찬(贊)ㆍ명(銘)ㆍ

운어(韻語)ㆍ어록(語錄)ㆍ설(說)ㆍ서(序)ㆍ잡문(雜文)ㆍ기(記)ㆍ방문(牓文)ㆍ조서(詔書)ㆍ서장

(書狀)ㆍ표전(表箋)ㆍ교서(敎書)ㆍ비답(批答)ㆍ마제(麻制)ㆍ관고(官誥)ㆍ비(碑)ㆍ지(誌)ㆍ뇌서

(誄書)ㆍ애사(哀詞)ㆍ제문(祭文)ㆍ도량(道場)ㆍ초소(醮疏)ㆍ불도소(佛道疏)ㆍ석도소(釋道疏)

등이 수록되었고, 후집에는 시(詩)ㆍ찬(贊)ㆍ서(序)ㆍ기(記)ㆍ잡기(雜記)ㆍ문답(問答)ㆍ서(書)ㆍ

표(表)ㆍ묘지(墓誌) 등을 실었고, 권말(卷末)에는 뇌서(誄書)와 묘지명(墓誌銘)이 들어 있는데

구체적인 구성은 다음과 같다.

 

 

내역

내역

全集

 

7

古律詩 59首

年 譜

 

8

古律詩 52首

1

古賦 6首 古律詩 6首

9

古律詩 66首

2

古律詩 73首

10

古律詩 78首

3

古律詩 64首

11

古律詩 68首

4

古律詩 43首

12

古律詩 56首

5

古律詩 44首

13

古律詩 77首

6

古律詩 96首

14

古律詩 82首

15

古律詩 64首

28

書狀 表

16

古律詩 90首

29

17

古律詩 80首

30

表牋狀

18

古律詩 103首

31

19

雜著 上樑文 口號 頌 贊 銘

32

20

雜著 韻語 語錄 傳

33

敎書 批答 詔書

21

說 序

34

敎書 麻制 官誥

22

雜文

35

碑銘 墓誌

23

36

墓誌 誄書

24

37

哀詞 祭文

25

記 牓文 雜著

38

道場齋醮疏祭文

26

39

佛道疏 翰林修製

27

40

釋道疏祭祝翰林誥院幷

 

 

41

釋道疏

後集

 

7

古律詩 97首

1

古律詩 105首

8

古律詩 57首

2

古律詩 105首

9

古律詩 58首

3

古律詩 101首

10

古律詩 41首

4

古律詩 98首

11

贊 序 記 雜識 問答

5

古律詩 98首

12

書 表 雜著 誄書 墓誌銘 踐尾

6

古律詩 97首

 

 

 
























 

〈參考文獻〉

金東旭 變革期의 文學人 李奎報. 比較文學 및 比較文化 第3ㆍ4輯 서울 韓國比較文學會 1979

金時鄴 李奎報의 現實認識과 農民時. 大東文化硏究 12 서울 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 1978

金禹昌 궁핍한 시대의 詩人. 서울 民音社 1978

金鎭英 白雲居士 李奎報의 文學世界. 金亨奎博士頌壽紀念論叢 1971

徐首生 白雲 李奎報의 文學硏究. 韓國詩歌硏究 대구 螢雪出版社 1974

申東旭 高麗詩評考. 韓國現代文學論 서울 博英社. 1972

李能雨 李奎報의 詩論. 心象 서울心象社 1974, 1

李庸昱 李奎報 硏究-白雲小說을 中心으로 서울大碩士學位論文 서울大大學院 1968

李相翊 麗朝散文學小考-白雲小說ㆍ破閑集. 箕軒孫落範先生回甲紀念論文集 1972

李石來 韓國의 名著. 東國李相國集 玄岩社 1969

李佑成 高麗 中期의 民族敍事詩. 成均館大學校論文集 7 서울成均館大學校 1962

張德順 英雄敍事詩 東明王. 인문과학 5 인문과학연구소

全鎣大 高麗의 詩學 韓國古典詩學史 서울 弘盛社 1979

鄭在洪 李奎報의 假傳體文學考 曉星女大國語國文學硏究論文集 8 曉星女大 1959

趙東一 李奎報. 韓國文學思想史試論 서울 知識産業社. 1978

趙東一 假傳體의 쟝르規定. 藏菴池憲英先生華甲紀念論叢 1971

崔雲植 李奎報의 詩論-白雲小說을 中心으로. 韓國漢文學硏究 第2輯 서울 韓國漢文學會 1977

 

김동욱(金東旭) 1980년 12월 25일

 

[주D-001]주필 이당백(走筆李唐白) : 후집(後集) 12권 뇌서(誄書).

[주D-002]시가 있다 : 전집(全集) 17권 입도작(入島作).

[주D-003]다음과 같은 시 : 후집 7권 옹로(擁爐).

[주D-004]사람은……나무라랴 / 何獨於汝討 : 전집(全集) 16권 방서(放鼠).

[주D-005]시는……없어진다 : 백운소설(白雲小說).

[주D-006]한번은……것이다 : 백운소설(白雲小說).

 

 

내역

내역

全集

 

7

古律詩 59首

年 譜

 

8

古律詩 52首

1

古賦 6首 古律詩 6首

9

古律詩 66首

2

古律詩 73首

10

古律詩 78首

3

古律詩 64首

11

古律詩 68首

4

古律詩 43首

12

古律詩 56首

5

古律詩 44首

13

古律詩 77首

6

古律詩 96首

14

古律詩 82首

15

古律詩 64首

28

書狀 表

16

古律詩 90首

29

17

古律詩 80首

30

表牋狀

18

古律詩 103首

31

19

雜著 上樑文 口號 頌 贊 銘

32

20

雜著 韻語 語錄 傳

33

敎書 批答 詔書

21

說 序

34

敎書 麻制 官誥

22

雜文

35

碑銘 墓誌

23

36

墓誌 誄書

24

37

哀詞 祭文

25

記 牓文 雜著

38

道場齋醮疏祭文

26

39

佛道疏 翰林修製

27

40

釋道疏祭祝翰林誥院幷

 

 

41

釋道疏

後集

 

7

古律詩 97首

1

古律詩 105首

8

古律詩 57首

2

古律詩 105首

9

古律詩 58首

3

古律詩 101首

10

古律詩 41首

4

古律詩 98首

11

贊 序 記 雜識 問答

5

古律詩 98首

12

書 表 雜著 誄書 墓誌銘 踐尾

6

古律詩 97首

 

 

 

 

 





















 

동국이상국문집(東國李相國集, 원문 및 번역문)

 

동국이상국문집 서(東國李相國文集序)

 

공의 성은 이씨, 이름은 규보(奎報), 자는 춘경(春卿)이다. 처음에는 이름을 인저(仁氐)라고

했다가 꿈에 규성(奎星 28수(宿)의 열다섯 번째 별)이 이상한 상서를 보여 주는 것을 보고 규보

로 고쳤다. 아홉 살 때 능히 글을 짓자, 세상에서 기동(奇童)이라고 일컬었고 조금 커서는 경사

(經史)ㆍ백가(百家)ㆍ불서(佛書)ㆍ도질(道秩 도가서(道家書)) 등을 두루 읽지 않은 것이 없었

는데 무엇이든지 한 번만 보면 다 기억하였다. 시문(詩文)을 지을 적에 옛사람의 혜경(蹊徑)을

따르지 않았으며 빨리 짓기로 유명하였다.

왕공(王公)ㆍ대인(大人)들이 그 소문을 듣고 불러들여 아주 표현하기 어려운 영물시(詠物詩)를

짓도록 했는데 늘 글귀마다 강운(强韻)을 불러 주었다. 그러나 공은 고시(古詩)건 율시(律詩)건

간에 당장 붓을 휘둘러 한 편씩 이루었는데, 재빠른 모습은 바람에 달리는 돛대와 진중(陣中)

으로 나아가는 말도 비할 수 없을 듯하였다.

 

관례(冠禮)도 하기 전에, 세상에서 명유(名儒)로 소문난 오세재(吳世才) 선생은 평생을 남을

허여하는 일이 적었으나, 공을 처음 만나자마자 기이하게 여기면서 나이를 잊고 교제하자고

하였다. 어떤 이가 나무라면서 이르기를 ‘선생은 나이가 이(李)보다 30여 세나 더 많은데 왜

이 미련한 어린애를 가까이하여 교만하게 만듭니까?’ 하니, 선생은 대답하기를 ‘너희들은

모를 것이다. 이 아이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어서 나중에 반드시 크게 될 것이다.’ 하였다.

 

공은 젊은 때부터 세속에 구속받지 않고 백운거사(白雲居士)라고 자호하면서 늘 술 마시고 시

짓기만 일삼자, 남들은 공을 훌륭한 경제사(經濟士)로 대우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명성이 해외(海外)에까지 떨치고 삼한(三韓)에서 독보(獨步)가 되어 옥당(玉堂)과 금중(禁中)

에서 드날리면서 왕언(王言)과 제고(帝誥)ㆍ고문(高文)과 대책(大冊)이 모두 공의 손에서 나오게

되고 10년이 안 되어 직위가 삼공(三公)까지 이르렀으니 오(吳)는 참 인물을 잘 알아보았다

하겠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오 선생 한 사람만 공이 크게 될 줄 알았을 뿐 여러 사람들은 몰랐

을까.

공이 금인(金印)과 자수(紫綬)를 갖고 조정에 서 있으니 진주처럼 빛나는 눈동자와 눈처럼 흰

수염이 빼어났다. 좌우에서는 모두 가리키면서 인중용(人中龍)이라 하였으니 그 특이한 자질과

위대한 명망이 보통 사람과 같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재상이 된 이후부터는 늘 우뚝한 모습을

가져 남들이 모두 정직한 대신(大臣)이라 하여 이간 붙이는 말이 없었다.

이로 본다면 공이 처음에 행동을 검속(檢束)하지 않은 것은 다만 해학과 방랑으로 세상을 살았을

뿐이었는데, 노경에 이르러서는 《세심경(洗心經)》읽기를 좋아하고 가끔 대연수(大衍數)를 연구

하였으니 옛사람이 ‘천지의 이치를 통한 것을 유(儒)라 한다.’ 한 말이 공을 두고 한 말인

듯하다.

정유년(1237, 고종 24)에 굳이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원하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태보문

하시랑평장사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예부한림원사 태자태보(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太學士

監修國史判禮部翰林院事太子太保)로 치사(致仕)하였다.

벼슬을 그만둔 이후에도 외국에 관해 교빙(交聘)ㆍ징고(徵誥)에 대한 문자를 모두 맡아 보았기

때문에 임금의 예우가 줄지 않고 달마다 받는 봉록이 현직 재상(宰相)보다 못하지 않았다.

 

공은 평생에 저술한 글을 쌓아 두지 않았기에 아들인 감찰어사(監察御史) 함(涵)이 만분의 일쯤

주워 모았었다. 고부(古賦)ㆍ고율시(古律詩)ㆍ전표(箋表)ㆍ비명(碑銘)ㆍ잡문(雜文) 따위 몇 편을

한데 합쳐서 문집을 만들도록 간청한 결과, 공이 그 간청을 옳게 여기고 이리저리 갈라 41권으로

만들어 이름을 동국이상국문집(東國李相國文集)이라 하였다. 함(涵)은 또 공에게 간청하기를,

“문집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서문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므로 공은 나에게 서문을 쓰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나는 본래 재주가 모자라고 또 공의 아들과 같은 또래로서 첫머리에 쓰는 서문을 감히 지을

수 없다고 사양했지만 공의 명이 더욱 신근하기에 이 몇 마디의 말로 서문을 적는다.

신축년(1241, 고종 28) 8월 일에 입내시 조산대부(入內侍朝散大夫) 상서 예부시랑 직보문각 태자

문학(尙書禮部侍郞直寶文閣太子文學) 이수(李需)는 서한다.

 

 

[주D-001]대연수(大衍數) : 《주역(周易)》 계사 상(繫辭上)에 “대연수 50이니 그 용(用)은 49이다.

” 하였는데, 50이라는 숫자는 천수(天數)인 1. 3. 5. 7. 9의 합계 25와 지수(地數)인 2. 4. 6. 8.

10의 합계 30을 합한 수 55를 크게 잡은 것이다.

이 천지의 수는 천지간의 만상(萬象)을 연출하기 때문에 대연 50이라 한다.

 

東國李相國文集序 001_283a

 

公姓李。諱奎報。字春卿。始名仁氐。夢奎星報異瑞因改之。九歲。能屬文。時號奇童。稍長。經史百

家。佛書道秩。無不遍閱。一覽輒記。爲詩文。略不蹈古人畦徑。以詩捷稱。王公大人聞其能。邀致之

請賦難狀之物。令每句唱強韻。若古若律。走筆立成。風檣陣馬。不足況其速也。方未冠時。有吳先生

世才者。世所謂名儒。平生小許可人。一見奇之。許以忘年。人或非之曰。先生長於李三十餘年矣。

何媟此頑孺子。使之驕耶。先生曰。非爾輩所知也。此子非常人。後必遠到矣。少放曠。自號爲白雲居

士。酣飮賦詩爲事。人不以經濟待之。無何。名振海外。獨步三韓。翺翔玉堂。出入鳳池。王言帝誥。

高文大冊。皆出一手。不十年。位至台鼎。則吳之知人。信矣。何一吳先生知公遠到。而衆莫之知也。

當公之擁金紫立朝端。珠瞳雪髭。輝映人物。左右皆指之曰人中龍。其奇資偉望。不類於常者如此。

自作相來。屹立爲正直大臣。人無間言者。然則公之初不自檢束。特謔浪翫世耳。晚年。嗜讀洗心經。

窮大衍之數。古之人云通天地曰儒。公之謂歟。於丁酉歲。固乞退。以金紫光祿大夫守大保門下侍郞平

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翰林院事大子大保致仕。雖家居。外國交聘徵誥文字。皆委之。以是

眷遇不衰。每受俸。多小與現官宰輔相等。其平生所著。不蓄一紙。嗣子監察御史涵。收拾萬分之一。

得古賦古律詩牋表碑銘雜文幷若干首。請爲文集。公可其請。分爲四十一卷。號曰東國李相國文集。涵

又請曰。集已成矣。不可無序。於是公乃命予。予固不才。亦諸子之伍。莫敢以冠首爲讓。公命益勤。

姑序一二。辛丑八月日。入內侍朝散大夫尙書禮部侍郞直寶文閣太子文學李需。序。

 

 

동국이상국문집 연보

 

○ 연보 서(年譜序)

 

아들 함(涵)이 가공(家公)의 전후 문집을 만들고 나서 잇달아 공이 손수 지은 가장(家狀)에 따라

또 연보(年譜)를 만든다.

함이 옛사람의 문집과 연보를 보니 모두 연보 중에 그 저술한 본말과 이유를 소상히 적어 서로

참고가 되도록 하였으나 대개 옛사람의 시집(詩集)은 모두 저술한 연월을 꼭 나타내지는 않는다.

무엇에 의거하여 소상하게 실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가공의 문집에는 연월을 표시하지 않은 것이 많으므로 연대를 하나하나 다 기록할 수 없고

다만 10분의 1 정도쯤 적어 놓을 뿐이다. 그러나 공의 저작만은 한 해치이건 한 달치이건 간에

어찌 빼버릴 수 있겠는가?

 

東國李相國文集年譜序 001_284a

 

嗣子涵旣撰家公前後文集。因據公之手草家狀。又成年譜。涵觀古人文集年譜。各於年中。備詳所著本

末端由。以相參考。大抵古人詩集。未必皆著所述年月矣。未知據何本而載之之詳耶。今家公文集。

其不標年月者亦多。故不得各隨年載。一一標之。但存十之一二耳。然公之著作。雖一年一月。寧有所

闕者耶。

 

○연보(年譜)

 

무자년(1168, 고려 의종(高麗毅宗) 22년)

 

공이 이해 12월 16일 계묘(癸卯)에 탄생했는데 이름은 규보(奎報), 자는 춘경(春卿)으로 황려현

(黃驪縣)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윤수(允綏), 벼슬은 호부 낭중(戶部郎中)까지 이르렀으며,

어머니는 김씨(金氏)로 금양군(金壤郡) 사람이었다.

외조부(外祖父)의 이름은 중권(仲權), 나중에 시정(施政)으로 고쳤는데 중고(中古)의 명유(名儒)

로서 급제(及第)로 뽑혀 벼슬이 울진 현위(蔚珍縣尉)까지 이르렀다.

공은 난 지 석 달 만에 나쁜 종기가 온 몸에 번져, 여러 가지 약을 써도 잘 낫지 않았다.

가군(家君)이 화가 나서 송악사우(松嶽祠宇)로 들어가 산가지를 던져서 생사(生死)를 점쳤는데

점괘에 ‘산다’ 하였다.

다시 무슨 약을 쓸 것인지를 점치자, 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후부터는

다시 약을 붙이지 않아서 온 몸이 헐고 터져서 얼굴을 분별할 수 없게 되자, 유모(乳母)는 늘 양쪽

어깨에 흰 가루를 뿌린 다음에 안고 다녔다.

하루는 유모가 공을 안고 문밖에 나갔더니 어떤 노인이 자나가다가 이르기를 ‘이 아이는 천금같이

귀한 아이인데 왜 이렇게 내버려 두느냐 잘 보호해야 한다.’ 하므로, 유모가 빨리 달려와 엄군

(嚴君)에게 말하니 엄군은 그가 신인(神人)인가 하여 사람을 보내 뒤쫓아가도록 하였다.

길이 세 갈래로 되어 세 사람을 보내었으나 모두 그 노인을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공은 처음에 인저(仁氐)라고 이름하였는데, 기유년(1189, 명종 19) 사마시(司馬試)에 나아가려고

했을 때, 꿈에 어떤 촌백성인 듯한 노인들이 모두 검은 베옷을 입고 마루 위에 모여 앉아 술을

마시는데 옆 사람이 이르기를 ‘이들은 28수(宿)이다.’ 하므로, 공은 깜짝 놀라 황송한 마음으로

두 번 절하고 묻기를,

“내가 금년 과시(科試)에 합격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한 사람이 옆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면서,

“저 규성(奎星)이 알 것이다.”

하므로 공은 즉시 그에게 나아가 물었으나 그의 대답을 미처 듣기 전에 꿈을 깨어 그 결과를 다

듣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조금 후에 또 꿈을 꾸었는데, 그 노인이 찾아와 이르기를,

“자네는 꼭 장원(壯元)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 이는 천기(天機)인 만큼 절대로 누설하지 말아야

한다.”하였다. 그래서 지금 부르는 이름으로 고치고 과시에 나아갔는데 과연 제일인으로 합격

하였다.

 

기축년(1169, 의종 23년)

경인년(1170, 의종 24년)

신묘년(1171, 명종 1년)

이해에 엄군(嚴君)이 성주(成州) 원으로 나갔는데 공도 그 임소(任所)로 따라갔다.

 

임진년 금(金) 대정(大定) 12년(1172, 명종 2)

계사년 대정 13년(1173, 명종 3)

갑오년 대정 14년(1174, 명종 4)

이해에 엄군이 내시(內侍)로 피소(被召)되자, 공도 경사(京師)로 따라왔다.

 

을미년 대정 15년(1175, 명종 5)

병신년 대정 16년(1176, 명종 6)

정유년 대정 17년(1177, 명종 7)

무술년 대정 18년(1178, 명종 8) 공의 나이 11세.

이해에 숙부(叔父) 직문하성(直門下省) 이부(李富)가 성랑(省郞)에게 자랑하기를,

 

“나의 조카는 나이 아직 어리지만 글을 잘 지으니 불러들여 시험 보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니, 모든 낭관(郎官)이 기쁘게 여기면서 불러들이도록 하여 연구(聯句)를 지으라 하였다.

이 때 바로 외군(外郡)에서 들어온 공지(貢紙)를 받아 놓았기에 지(紙) 자를 넣어 짓도록 하였다.

공은 응해서 부르기를

 

종이 면에는 모학사(毛學士 붓)가 줄곧 횡행하고 / 紙路長行毛學士하자, 모든 낭관이 손수 받아

 

쓴 다음에 또 대(對)를 맞추라 하였다. 공은 당장 부르기를

 

술잔 속에는 국선생(麴先生 술)이 늘 들어 있네 / 杯心常在麴先生하니, 낭관들이 모두 탄복하고

공을 기동(奇童)이라 일컬으면서 매우 권면하여 보냈다.

 

기해년 대정 19년(1179, 명종 9)

경자년 대정 20년(1180, 명종 10)

신축년 대정 21년(1181, 명종 11) 공의 나이 14세.

 

이해에 비로소 문헌공도(文憲公徒)가 되어 성명재(誠明齋 최충(崔㓍)이 설치한 구재(九齋)의 하나)

에 들어가 학업을 익혔다. 해마다 하과(夏課) 때면 선달(先達)들이 제생(諸生)을 모아 놓고 정한

시간 안에 운(韻)을 내어 시(詩)를 짓도록 했는데 이 명칭을 급작(急作)이라 하였다.

공이 계속 일등으로 뽑히므로 모든 선비가 비로소 공을 뛰어나게 여겼다.

 

임인년 대정 22년(1182, 명종 12) 공의 나이 15세.

이해 6월에 또 하과(夏課) 급작(急作)을 지었는데 이때 마침 성명재(誠明齋) 안에 한림(翰林)에

제수된 자가 있어 ‘내직옥당(內直玉堂)’ 네 글자를 편제(篇題)로 삼고 운(韻)을 내었다.

공의 시(詩)는

 

혼자서 숙직하니 전각이 더 쓸쓸한데      / 獨直偏知殿閣涼

연꽃 같은 촛불만 화당에 비치누나        / 金蓮花燭炤華堂

이슬 맺힌 선인장에는 가을 기운 썰렁하고 / 露凝仙掌驚秋冷

달 밝은 사창에는 밤도 참 길다           / 月透紗窓信夜長

칠보상 앞 궁루 흘러내리고               / 七寶床前宮漏永

구화장 속 어로 향내 풍기네              / 九華帳裏御爐香

샛별이 돋을 때까지 시 한 편 다 끝내니   / 詞頭草罷銀河曙

높은 하늘 아침해 기뻐 보인다            / 喜見高天瑞日光

 

하였는데, 선달(先達) 함순(咸淳) 등이 모두 탄복하고 칭찬한 다음, 이 시를 첫째로 뽑아 1등에는

오직 공만이 차지하였으니, 그 뛰어난 점을 보인 것이다. 이 시는 어릴 때 지은 것이어서 문집

속에는 실리지 않았다.

 

계묘년 대정 23년(1183, 명종 13) 공의 나이 16세.

봄에 엄군이 수주(水州)의 원으로 나갔는데 공은 경사(京師)에 머물러 있으면서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가을에 수주로 가서 근친(覲親)하였다.

 

갑진년 대정 24년(1184, 명종 14) 공의 나이 17세.

을사년 대정 25년(1185, 명종 15) 공의 나이 18세.

봄에 수주에서 경사로 들어와 드디어 사마시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가을에 또 수주로

되돌아갔다.

 

병오년 대정 26년(1186, 명종 16) 공의 나이 19세.

봄에 엄군이 수주 원에서 갈리게 되자 공은 경사로 따라왔다.

정미년 대정 27년(1187, 명종 17) 공의 나이 20세.

이해 봄에 또 사마시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공은 이 4, 5년 동안 술에 쏠려 멋대로

놀면서 마음을 단속하지 않고 오직 시 짓기만 일삼느라고 과거(科擧)에 대한 글은 조금도 연습

하지 않아서 계속 응시했어도 합격하지 못하였다.

 

무신년 대정 28년(1188, 명종 18) 공의 나이 21세.

기유년 대정 29년(1189, 명종 19) 공의 나이 22세.

이해 봄에 사마시에 응시하여 첫째로 뽑혔다. 10자의 운(韻)을 달아 지었는데 그 시제(詩題)는

‘옛날 임금이 헌면(軒冕)을 만들어 귀천(貴賤)을 나타내도록 하고 아름다움은 구하지 않았다.

[先王制軒冕著貴賤不求美]’였는데, 공이 지은 파제(破題)에 이르기를

 

상고 시대에는 헌면도 없었는데       / 太古無軒冕

누가 귀천이란 등급을 구분했으랴     / 誰分貴賤流

만들어낸 후라야 나타내게 되므로     / 制之然後著

아름다운 것은 본래 구하지 않았다오  / 美也不曾求

하였고, 또 한 글귀에 이르기를

 

황제가 처음 만들었다 들었는데       / 始造聞黃帝

공구인들 어찌 그냥 걸어다니랴       / 徒行豈孔丘

했었는데, 좌주(座主 고시관(考試官)) 유공(柳公)이 탄복하여 마지않고 드디어 공의 시를

첫째로 뽑았다.

 

경술년 대정 30년(1190, 명종 20) 공의 나이 23세.

6월에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하여 동진사(同進士)에 뽑혔는데, 공은 과제(科第)가 낮은 것을

못마땅히 여겨서 사양하려 하였으나 아버지가 준절히 꾸짖었고 또 전례(前例)도 없으므로 사양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술에 만취하여 하객(賀客)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과제는 비록 하등(下等)에 뽑혔으나 어찌 3, 4차 도야된 문생(門生)이 아닌가?”

하자, 모든 하객들이 입을 가리면서 몰래 웃었다.

공은 과거(科擧)에 대한 글을 일삼지 않았으므로 글 짓는 것이 거칠고 서툴러서 격률(格律)에 잘

맞지 않았고, 또 과장(科場) 안에서 봉명승선(奉命承宣) 박순(朴純)이 좌주(座主)와 더불어 선온

(宣醞)을 받고 공을 불렀는데, 큰 잔으로 한 잔 마시고 곧 취해서 휘갈겨 쓴 글을 찢어 버리려

하자 옆에 앉았던 손득지(孫得之)가 빼앗아 올렸다. 그 시제(詩題)는 임금을 떠받드는 데는 마치

큰 거북이 큰 산을 머리에 인 것처럼 해야 한다. [戴君若鰲冠靈山]’였는데,

공의 시 넷째 글귀에 이르기를

 

웅장한 모습 삼신산을 인 듯한데   / 壯似支三聳

육오(六鰲)를 누가 감히 낚아 가랴 / 憂無釣六逃

 

하였고, 다섯째 글귀에는,

 

하늘 받드는 태도 우뚝해 보이고   / 奉天呈屹屹

산악을 짊어진 형세 끊어짐 없지   / 負嶽出滔滔

 

했는데, 지공거(知貢擧) 이지명(李知命)이 이 구절을 좋아하여 드디어 물리치지 않았다.

 

신해년 금(金) 명창(明昌) 2년(1191, 명종 21) 공의 나이 24세.

8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자, 천마산(天磨山)에 우거하여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자칭하고

천마산(天磨山)를 지었는데, 중간에 유실되어 전집(前集)에는 기록하지 못했다가 나중에 찾아서

후집(後集) 첫째 권에 실었다. 첫째 구에 이르기를,

 

사람들은 다만 산이 우뚝하다 하여   / 世人但取山崔巍

여기에 천마산이라 이름 붙였다.     / 乃以天磨而號之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나중에도 늘 이 산에 들어와 노닐면서 시를 지었는데

북산잡제(北山雜題)’니 ‘중유북산(重遊北山)’이니 하는 시가 바로 이것이다.

 

임자년 명창 3년(1192, 명종 22) 공의 나이 25세.

이해에 《백운거사 어록(白雲居士語錄)》과 전(傳)을 저술하여 자신의 행지(行止)를 차례로

이야기하였다.

계축년 명창 4년(1193, 명종 23) 공의 나이 26세.

이해에 백운시(百韻詩)를 지어 시랑(侍郞) 장자목(張自牧)에게 올렸는데, 장공이 후히 대우하여

매양 찾아뵐 때마다 술을 차려 함께 마셨다.

4월에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얻어 동명왕(東明王)의 사실을 보고 이상히 여겨 고시(古詩)를

지어서 그 특이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갑인년 명창 5년(1194, 명종 24) 공의 나이 27세.

이해에 논조수서(論潮水書)를 지어 동각(東閣) 오세문(吳世文)에게 바쳤고 천보영사시(天寶詠史詩)

43운(韻)을 지었는데, 모두 협주(挾註)하였으며 또 이소원기(理小園記)도 지었다.

 

을묘년 명창 6년(1195, 명종 25) 공의 나이 28세.

이해에 오동각에게 화답한 삼백운시(三百韻詩)를 지었다.

 

병진년 명창 7년(1196, 명종 26) 공의 나이 29세.

4월에 경사(京師)에 난이 일어나서 자부(姊夫)가 남쪽 황려(黃驪)로 귀양갔었는데 5월에 공이

자씨(姊氏)를 데리고 자부에게 찾아갔었다. 이해 봄에 어머니는 상주(尙州) 원으로 나간 둘째사위

에게 가 있었다. 6월에 공이 황려에서 상주로 가 어머니에게 문안하고 한열병(寒熱病)에 걸렸는데

몇 달 동안 낫지 않아 10월에야 돌아왔다. 시집(詩集)에 실려 있는 남유시(南遊詩) 90여 편이

모두 이때 황려와 상주에 있으면서 지은 것이다.

 

정사년 승안(承安) 2년(1197, 명종 27) 공의 나이 30세.

12월 어느 날 총재(冢宰) 조영인(趙永仁)ㆍ상국(相國) 임유(任濡)ㆍ상국(相國) 최선(崔詵)ㆍ상국

(相國) 최당(崔讜) 등이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공을 추천하였다. 우선 외기(外寄)에 보충

시켰다가 후일의 문한(文翰)에 대한 책임에 대비하도록 간청하여 임금이 드디어 윤가(允可)하였

는데 어떤 장주 승선(掌奏承宣)이 일찍이 공에게 조금 감정이 있어서 차자(箚子)를 빼앗아 천조

(天曹)에 붙이지 않고 거짓말로 갑자기 잃어 버렸다고 핑계하니, 총재도 그 차자를 붙이지 않았

다는 것으로 해명하여 공을 등용하지 않았다.

시집(詩集)에 조 영공(趙令公)에게 올린 시가 있는데 아래와 같다.

 

옛날에 은배가 공중으로 날아갔다는 말을 들었더니    / 昔見銀杯嘗羽化

오늘날 차자도 갑자기 신선이 되어 갔구나            / 今聞箚子忽登仙

 

했는데, 사림(士林)이 탄식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또 상조태위서(上趙太尉書)를 지어 나중에 그

이유를 아뢰기도 하였다.

 

무오년 승안 3년(1198, 신종1) 공의 나이 31세.

기미년 승안 4년(1199, 신종2) 공의 나이 32세.

5월에 지주사(知奏事) 상공(相公) 나중에 진강공(晉康公)이 되었다. 댁에 천엽 유화(千葉榴花)가

만발하자 손님을 불러 구경시키고 이어 시인(詩人) 이인로(李仁老)ㆍ함순(咸淳)ㆍ이담지(李湛之)

와 공을 불러 시를 짓도록 하였다. 그 다음 어느 날 상공이 우연히 좌우에게 이르기를,

 

“요즈음 듣자니 글하는 선비 네 상국(相國)이 아무를 추천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 차자

를 빼앗은 사람도 있었다는데.”

하고, 잇달아 이르기를,“글하는 사람은 서로들 질투하는 마음이 대개 이렇구나.”

하면서, 이때 비로소 공을 등용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6월 반정(頒政) 때에 공을 전주목 사록(全州牧司錄)으로 보임하여 서기(書記)를 겸임하도록 하므로

가을 9월에 전주로 부임했는데, 이해에 지은 고시(古詩)와 율시(律詩)가 무려 15, 16편이나 되었다.

 

경신년 승안 5년(1200, 신종3) 공의 나이 33세.

이해에 지은 시는 30편이 훨씬 넘었다.

겨울 12월에 파직을 당해 전주를 떠나게 되었다. 처음 공이 전주를 다스릴 때 통판 낭장(通判郎將)

인 어떤 이가 탐하고 방자하였는데, 공이 굽히지 않아서 공사(公事)로 인해 여러 차례 노여움을

격발시켰다. 통판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또 제마음대로 하려고 드디어 터무니없는 말을 이리저리

꾸며서 공을 모함했기 때문이다.

광주(廣州)에 이르렀는데 마침 섣달 그믐날이었다. 이때 처형(妻兄) 진공도(晉公度)가 서기(書記)

로 있었으므로 그의 집에 들어가 함께 과세(過歲)하면서 시 한 편을 써서 주었는데, 첫구에 이르

기를

 

우연히 하찮은 녹을 바라 강남까지 갔었구나 / 偶霑微祿宦江南 하였으니, 바로 이것이었다.

 

신유년 승안 6년(1201, 신종4) 공의 나이 34세.

정월에 광주(廣州)에서 왔다.

여름 4월에 죽주(竹州)로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경사(京師)로 왔다. 이보다 앞서 자서(姊壻)가

황려(黃驪)에서 죽주 감무(竹州監務)에 보임되었기 때문에 자씨와 어머니가 그 임소(任所)에 가

있게 되었는데, 5월에 어머니가 경사로 돌아오려고 하자, 공이 가서 모시고 왔으니 죽주만선사

(竹州萬善寺)가 바로 이때 지은 것이다.

5월에 사륜정기(四輪亭記)를 지었고, 6월에 남행기(南行記)와 자죽주여모부장안시(自竹州與母赴

長安詩)를 지었다.

 

임술년 태화(泰和) 2년(1202, 신종5) 공의 나이 35세.

5월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12월에는 동경(東京)의 반도(叛徒)가 운문산 적당(雲門山賊黨)과 군사를 일으키므로 조정에서

삼군(三軍)을 내어 정벌하게 되었다. 군막(軍幕)에서 산관(散官)ㆍ급제(及第) 등을 핍박하여

수제원(修製員)으로 충당시킬 때 세 사람을 거치도록 모두 꾀로 회피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공에게 이르자 공은 개연(慨然)한 모습으로 말하기를,

 

“내가 나약하고 겁이 많은 자이기는 하나 역시 한 국민인데 국난(國難)을 회피하면 대장부가

아니다.”하고, 드디어 종군(從軍)하였다. 따라서 막부(幕府)에서는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임금께

주달하여 공을 병부 녹사 겸수제원(兵部錄事兼修製員)으로 삼았으니 이는 대개 공의 마음을 펴 준

것이다. 이달에 청주(淸州)로 가서 막중서회고(幕中書懷古) 18운(韻)을 지어 동영(同營)의 제공

(諸公)에게 주고, 또 상주(尙州)로 나가 ‘김 상인의 초서를 보고[觀金上人草書]’라는 고시 15운

(韻)을 지었다.

 

계해년 태화 3년(1203, 신종6) 공의 나이 36세.

이해에 공이 동경(東京)의 군막(軍幕)에 있었다.

2월에 상도통부사서(上都統副使書)를 지었고 전망(戰亡)한 사람들 장사 지낼 일을 의논하였으며

고시(古詩)와 율시(律詩)도 10여 편이나 지었다.

 

갑자년 태화 4년(1204, 신종7) 공의 나이 37세.

3월에 군사들이 개선하고 돌아오자, 공도 따라 경사(京師)로 왔었는데 시집(詩集)에

 

이번 싸움에 세운 공이 누가 제일이냐 / 獵罷論功誰第一

지금도 지휘한 사람은 기억조차 않는다네 / 至今不記指縱人

한 글귀가 실려 있다. 이때 군사들은 상을 많이 받았으나 공만은 참예하지 못했던 까닭에 감정이

없을 수 없어 이 시를 지었다.

 

을축년 태화 5년(1205, 희종1) 공의 나이 38세.

이해에 상최상국서(上崔相國書)를 지어 벼슬을 구하였다.

 

병인년 태화 6년(1206, 희종2) 공의 나이 39세.

정묘년 태화 7년(1207, 희종3) 공의 나이 40세.

12월에 직한림원(直翰林院)에 권보(權補)되었다. 공은 이미 세상에 불우한 신세가 되어 문을 닫고

들어앉아 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마다 사관(史館)ㆍ한원(翰院)ㆍ국학(國學) 등에서 유관(儒官)

들이 인물을 추천할 때면 늘 공을 우두머리로 삼았고, 또 좌우에서도 공을 칭찬하는 이도 많았다.

이래서 진강후(晉康侯 최충헌(崔忠獻))도 여러 사람의 뜻을 반대하기가 어려워 공을 등용할 생각이

있었으나 쓸만한 계제가 없는 것을 늘 서운해 하였다.

이때 바로 그가 모정(茅亭 지붕을 띠로 덮은 정자)을 짓고, 이인로(李仁老)ㆍ이원로(李元老)ㆍ

이윤보(李允甫)와 공에게 명하여 기문(記文)을 지으라 하고, 이어 유관 재상(儒官宰相) 네 사람

으로 하여금 시험 보이도록 했는데, 공이 첫째로 뽑히자 현판에 새겨 모정 벽에 걸어놓았다.

그리고 12월에 이르러 이 관직을 맡게 되었는데, 초입한림(初入翰林) 2수를 짓고 지지헌기

(止止軒記)도 지었다.

 

무진년 태화 8년(1208, 희종4) 공의 나이 41세.

6월에 한림의 권보(權補)를 면하고 진보(眞補)되었다.

 

기사년 태화 9년(1209, 희종5) 공의 나이 42세.

경오년 대안(大安) 2년(1210, 희종6) 공의 나이 43세.

신미년 대안 3년(1211, 희종7) 공의 나이 44세.

임신년 대안 4년(1212, 강종1) 공의 나이 45세.

정월에 천우위 녹사 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가 되고, 6월에 한림겸관(翰林兼官)에 궐원이 있자,

반정(頒政) 때를 기다리지 않고 겸직한림원(兼直翰林院)이 되었으며 본직은 그대로 가졌다.

재입옥당(再入玉堂) 2편을 지었다.

 

계유년 숭경(崇慶) 2년(1213, 강종2) 공의 나이 46세.

12월에 진강후(晉康候)의 아들인 상국(相國)이 야연(夜宴)을 크게 베풀고 모든 고관(高官)을 불러

모았는데, 공은 홀로 8품(品) 미관(微官)으로 부름을 받고 참석하였다.

밤중에 상국이 공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문장을 잘한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아직 보지는 못했다. 오늘 한번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이인로(李仁老)를 시켜 운(韻)을 부르도록 했는데, 40여 운(韻)에 이르렀다. 촛불을 시제

(詩題)로 삼고 이름난 기생에게 먹을 갈도록 하였다. 시가 완성되자 상국은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다음날 상국은 그 시를 가지고 부(府)로 나아가 진강후에게 아뢰고 공을 불러들여 재주를 시험해

보라고 하였다. 진강후가 처음에는 쾌히 승낙하지 않다가 두 번 세 번 여쭌 후에 공을 불러들이

도록 하였다. 공이 부(府)에 이르자 상국이 진강후에게 여쭈기를,

 

“이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시를 제대로 짓지 못한답니다.”

하고 바로 빠른 자를 시켜 집으로 가서 술을 갖고 오도록 했는데 술이 미처 이르기 전에 진강후는

벌써 술상을 차려 놓고 함께 마시고 있었다. 상국은 또 말하기를,

 

“이 사람은 취한 다음이라야 시를 짓습니다.”

하고 술잔을 번갈아가면서 취하도록 마시게 한 뒤에 이끌고 진강후 앞으로 나아갔다. 진강후의

앞에 바로 필갑(筆匣)이 있고 붓도 열 자루가 넘었는데, 상국이 친히 그중 좋은 붓을 골라서 공

에게 주었다. 이때 마침 뜰에서 오락가락하는 공작(孔雀)이 있기에 진강후가 이 공작을 시제(詩題)

로 삼고 금 상국(琴相國)을 시켜 운(韻)을 부르게 했는데 40여 운(韻)에 이르도록 잠시도 붓을

멈추지 않으니 진강후는 감탄하여 눈물까지 흘렸다. 공이 물러나오려 할 때 진강후가 이르기를,

 

“자네가 만약 벼슬을 희망한다면 뜻대로 이야기하라.”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내가 지금 8품(品)에 있으니 7품만 제수하면 됩니다.”

하자, 상국이 여러 번 공에게 눈짓을 하면서 바로 참관(參官)을 희망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날 상국은 집으로 돌아와 공을 불러 꾸짖기를,

 “자네가 벼슬을 희망하는 것이 왜 그렇게 낮으냐? 무슨 이유로 참관을 희망하지 않았느냐?”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나의 뜻이 그럴 뿐입니다.”

했었는데, 12월 반정(頒政) 때에 이르러 7품을 뛰어 사재승(司宰丞)에 제수되었다.

 

갑술년 정우(貞祐) 2년(1214, 고종 1) 공의 나이 47세.

을해년 정우 3년(1215, 고종 2) 공의 나이 48세.

7월에 공이 시를 지어 참직(參職)의 품계를 구하자 진강후(晉康侯)가 그 시를 가지고 그 부(府)의

전첨(典籤) 송순(宋恂)에게 내보이면서 이르기를,

 

“이 사람은 뜻이 고상한 자라서 품계 올려주기를 희망하지 않을 텐데 임시로 자신을 굽혀 말한

듯하다. 만약 임금께 주달하여 바로 참관(參官)을 제수한다면 그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하니, 순이 대답하기를,

 

“그렇게 하면 그도 기쁨을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고, 여러 사람도 그것을 바랄 것입니다.”

하였다. 하비(下批)에 우정언 지제고(右正言知制誥)로 삼았다. 7월에는 초배정언(初拜正言)를

지었고, 10월에는 조향태묘송(朝享太廟頌)을 지었다.

 

병자년 정우 4년(1216, 고종 3) 공의 나이 49세.

정축년 정우 5년(1217, 고종 4) 공의 나이 50세.

2월에 우사간 지제고(右司諫知制誥)를 제수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하였다.

이해 가을에 공사(公事)가 정체(停滯)되었다는 것으로 상진강후서(上晉康侯書)를 지었다.

 

무인년 정우 6년(1218, 고종 5) 공의 나이 51세.

정월에 좌사간(左司諫)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겸직(兼職)은 그대로였다.

 

기묘년 정우 7년(1219, 고종 6) 공의 나이 52세.

봄에 공이 탄핵을 당하여 면직되었다. 지난해 12월 어느 날 외방(外方) 수령들이 팔관하표

(八關賀表)를 미처 올리지 못한 자가 있자 공이 탄핵하려 했으나 금 상국(琴相國)이 굳이 그만

두도록 하였다. 이달에 이르러 진강후(晉康侯)가 이 내용을 조사하여 상국과 공을 탄핵하였는데

상국은 용서되고 공만 파직 당하였다. 4월에 외직(外職)인 계양도호부부사 병마금할(桂陽都護府

副使兵馬鈐轄)이 되어 5월에 계양으로 부임하였다.

 

경진년 정우 8년(1220, 고종 7) 공의 나이 53세.

여름 6월에 시예부낭중 기거주 지제고(試禮部郎中起居注知制誥)로 소명(召命)을 받고 계양(桂陽)

에서 경사(京師)로 돌아왔다. 지난해 9월에 진강후가 죽고 그의 아들 상국(相國)이 대신 정권을

잡은 까닭에 이 소명이 있었다. 12월에는 시태복소경(試太僕少卿)에 옮기고 기거주(起居注)는

그대로 두자 양사표(讓謝表)를 짓다.

 

신사년 정우 9년(1221, 고종 8) 공의 나이 54세.

6월에 보문각대제 지제고(寶文閣待制知制誥)를 제수하자, 양사표(讓謝表)를 지었다.

 

임오년 정우 10년(1222, 고종 9) 공의 나이 55세.

6월에 태복소경 즉진(太僕少卿卽眞)이 되었다.

 

계미년 정우 11년(1223, 고종 10) 공의 나이 56세.

12월에 조산대부(朝散大夫) 시장작감(試將作監)이 되었는데, 대제(待制)는 그대로였다.

 

갑신년(1224, 고종 11) 공의 나이 57세.

여름 6월에는 장작감 즉진(將作監卽眞)으로 되었고, 겨울 12월에는 그 다음 해의 사마시 좌주

(司馬試座主)가 되자 양사표(讓謝表)를 지었다. 12월에 또 조의대부(朝議大夫) 시국자좨주

한림시강학사(試國子祭酒翰林侍講學士)가 되고 지제고(知制誥)는 그대로였는데 양사표를 지었다.

 

을유년(1225, 고종 12) 공의 나이 58세.

봄 2월에 사마시(司馬試) 시관(試官)으로 시부(詩賦)에는 이유신(李惟信) 등 16인을 뽑고 음시

(音詩)에는 안겸일(安謙一) 등 5인을 뽑고 명경(明經)에는 강득희(康得希) 등 3인을 뽑아 임금께

아뢰고 방방(放榜)하였다.

12월에는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제수 받았으나 딴 직함은 그대로 있었으므로 양사표(讓謝表)

를 지었다. 이해에 왕륜사장륙영험기(王輪寺丈六靈驗記)를 지었으며, 또 칙명(勅命)을 받고 태창

니고상량문(太倉泥庫上樑文)도 지었다.

 

병술년(1226, 고종 13) 공의 나이 59세.

12월에 좨주 즉진(祭酒卽眞)이 되었다.

 

정해년(1227, 고종 14) 공의 나이 60세.

무자년(1228, 고종 15) 공의 나이 61세.

정월에 중산대부(中散大夫) 판위위사(判衛尉事)가 되었는데 딴 직함은 그냥 있었다.

5월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춘장(春場)에는 이돈(李敦) 등 31인, 명경(明經)에는 국수규

(鞠受圭) 등 4인을 각각 뽑아 임금께 아뢰고 방방(放榜)하였다.

 

기축년(1229, 고종 16) 공의 나이 62세.

경인년(1230, 고종 17) 공의 나이 63세.

11월 21일에 멀리 위도(猬島)로 귀양 갔다. 이해 팔관회(八關會) 잔치를 열 때 옛날 규례에

어긋난 일이 있었는데 이는 추밀(樞密) 차공(車公)이 시킨 것이었다.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왕유(王猷)가 밑에서 일보는 자가 제대로 따르지 않은 것을 몹시 꾸짖자, 차공은 왕유가 재상

(宰相)을 꾸짖었다고 오해하여 임금께 일렀다. 마침 공과 좌승상(左丞相) 송순(宋恂)도 그 좌석에

있었으므로 왕유를 도왔을 것이라고 의심하여 모두 먼 섬으로 귀양 보냈다.

공은 이날 바로 청교역(靑郊驛)으로 나가 자고, 12월에 보안현(保安縣)에 이르러 머물다가 순풍

(順風)을 기다려 26일에 위도로 들어갔다.

 

신묘년(1231, 고종 18) 공의 나이 64세.

정월 15일에 고향인 황려현(黃驪縣)으로 양이(量移 멀리 귀양간 죄인을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것)

되자 22일에 죽주(竹州)에 이르러 만선사(萬善寺)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공이 옛날 신유년(1201,

신종 4)에 나그네로 이 절을 유람할 때 제공(諸公)의 판상운(板上韻)을 화답한 그 끝구에 이르기를

 

푸른산 한없이 좋게 있지            / 好在靑山色

벼슬을 그만두고 다시 찾아올 거야   / 休官欲重尋

 

했는데, 이때 우연히 면직되어 거듭 오게 되었으니, 이는 아마도 시참(詩讖 자신이 지은 시가

우연히 뒷일과 꼭 맞는 것)인 듯하다.

또 시 두 편을 화답하였다. 7월에 황려(黃驪)로부터 경사(京師)에 이르렀고, 9월에 호병(胡兵)에

대비하기 위해 백의종군(白衣從軍)하여 보정문(保定門)을 지켰으니, 이는 시집(詩集)에,

 

장기(瘴氣) 꽉 찬 저 더운 지방에서       / 猶勝炎州嵐瘴地

허리 굽혀 해촌 백성 상대하기보다 낫다오 / 折腰甘向海村民

한 것이다. 공은 산관(散官)에 있으면서도 달단(達旦 몽고)에게 통하는 서표(書表)와 문첩(文牒)

을 모두 맡아 지었다.

 

임진년(1232, 고종 19) 공의 나이 65세.

지난 기축년(1229, 고종 16)에 왕사(王師)가 죽었는데 이해에 문인들이 임금께 아뢰자 공에게

비명(碑銘)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4월에 귀양에서 풀려나 정의대부(正議大夫)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 경성부우첨사 지제고

(判祕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右詹事知制誥)에 제수되었다.

6월에 도읍을 옮겼는데 공은 이 서울에 있었으나 집을 마련하지 못해 하음 객사(河陰客舍)의

서랑(西廊)에 살면서 시 두 수를 지었다. 9월에 유수중군 지병마사(留守中軍知兵馬事)가 되었다.

 

계사년(1233, 고종 20) 공의 나이 66세.

6월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부사 좌산기상시 한림학사 승지(樞密院副使左散騎常

侍翰林學士承旨)에 제수되었는데 아들 함(涵)이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된 까닭에 친혐(親嫌)을

피하기 위해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로 바꾸었다.

8월에 추밀원(樞密院)에서 숙직하면서 시 네 수를 지어 내성(內省) 상국(相國) 김인경(金仁鏡)

에게 부쳤다.

12월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지문하성사 호부상서 집현전태학사 판예부사(知門下省事戶

部尙書集賢殿太學士判禮部事)를 제수받고 또 양사표(讓謝表)를 지었다.

 

갑오년(1234, 고종 21) 공의 나이 67세.

5월에 춘장 지공거(春場知貢擧)로 열시(閱試)하여 김연성(金鍊成) 등 31인과 명경(明經)에

이방수(李邦秀) 등 2인을 뽑아 방방(放榜)하였다.

12월에 정당문학 감수국사(政堂文學監修國史)에 제수되어 칙명(勅命)을 받고 송광사주(松廣社主)

법진각국사(法眞覺國師)의 비명(碑銘)을 지었다.

 

을미년(1235, 고종 22) 공의 나이 68세.

정월에 태자소부(太子少傅)가 되었다.

12월에 참지정사 수문전태학사 판호부사 태자태보(參知政事修文殿太學士判戶部事太子太保)가

되었다.

 

병신년(1236, 고종 23) 공의 나이 69세.

5월에 지공거(知貢擧)로서 춘장(春場)을 고시하여 박희(朴曦) 등 29인과 명경(明經)에 이극송

(李克松) 등 3인을 각각 뽑아 방방하였다.

12월에 걸퇴표(乞退表)를 올렸으나 임금이 그 표문을 궐내(闕內)에 머물러 두고 내시(內侍)

김영초(金永貂)를 보내어 극진히 타이르고 다시 벼슬하도록 했는데, 공은 병이 위독하다고 핑계

하였다.진양후(晉陽侯 최우(崔瑀))가 호적(戶籍)에서 나이를 줄였다고 하면서 머물러 있도록

권면하므로 공은 하는 수 없어 12월에 다시 나아가 일을 보았다. 그러나 늘 불안한 생각을 갖고

여러 차례 시를 지어 편치 못하다는 뜻을 나타냈다.

공은 특히 호적에서 나이를 줄였다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지 않고 사실대로 아뢰었으니 사퇴할

생각이 진실로 간절한 것이었다. 그래도 물러날 수 없자, 늘 읊은 시가 있었는데

 

얼굴이 있어도 감히 바로 들 수 없으니  / 有面不敢擡

부끄러운 일 벌써부터 적지 않구나      / 慚愧已不少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정유년(1237, 고종 24) 공의 나이 70세.

7월에 칙명(勅命)을 받들고 동궁비주(東宮妃主)의 시책문(諡冊文)과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공은 또 표를 올려 걸퇴(乞退) 하기를 매우 간절히 했다.

12월에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태보(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太保)로 치사

(致仕)하였다. 이해에 또 칙명을 받고 대장경 각판(大藏經刻板)에 대한 군신 기고문(君臣祈告文)

을 지었다.

 

무술년(1238, 고종 25) 공의 나이 71세.

12월에 칙명을 받들고 몽고 황제(蒙古皇帝)에게 올릴 표장(表狀)과 진경당고관인(晉卿唐古官人)

에게 보낼 편지를 지었다.

 

기해년(1239, 고종 26) 공의 나이 72세.

칙명을 받들고 몽고 황제에게 올릴 표장을 지었다.

12월에 또 몽고 황제에게 올릴 표장과 진경(晉卿)에게 보낼 편지를 지었다.

 

경자년(1240, 고종 27) 공의 나이 73세.

신축년(1241, 고종 28) 공의 나이 74세.

공은 비록 벼슬에서 물러나 집에 있었으나 국조(國朝)에 대한 고문대책(高文大冊)과 이조(異朝)에

오가는 서표(書表) 등 일이 있으면 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7월에 병이 심해지자, 진양공(晉陽公)이 듣고 이름난 의원들을 보내 문병과 치료를 끊임없이

하였다. 또 공의 평소에 저술한 전후 문집(前後文集) 53권을 모두 가져다가 공인(工人)을 모집

하여 빨리 새기라고 독촉까지 한 것은 공이 죽기 전에 한번 보이고 마음을 위안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역이 워낙 거창하여 그만 끝을 보지 못한 채 9월 초이튿날 갑자기 늘 누었던 자리를 떠나

바로 서쪽을 향해 누워 오른쪽 갈빗대를 자리에 붙이고 밤이 되자 잠든 듯이 졸하였다. 임금이

부음(訃音)을 듣자, 놀라고 애통해 하면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초상을 잘 치르도록 하고 또

근시(近侍)를 시켜 뇌시(誄詩)를 지어 잘 죽은 것을 찬미하게 하고, 문순공(文順公)이란 시호

(諡號)를 내렸다.

12월 6일 경인(庚寅)에 진강산(鎭江山) 동쪽 기슭에 장사 지냈다. 공은 평생에 집안 살림은 경영

하지 않고 늘 시(詩)와 술로 오락을 삼았는데 비록 의상(蟻床 침상)에 누워서도 시를 끊임없이

읊었다. 또 《능엄경(楞嚴經)》을 좋아하여 심지어 경(經)을 등지고 앉아 외기까지 하였다.

나중에 임종 때 이르러서는 아내와 자식들을 물리쳐 시끄럽게 떠들지 않도록

하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으니 활달하고도 참다운 군자(君子)라 하겠다. 아, 함(涵)은 이때 외직으로 홍주(洪州)에

나가 있었으므로 임종을 미처 보지 못했으니 평생에 애통한 심정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으랴.

 

[주D-001]선인장(仙人掌) : 신선이 손에 쟁반을 받쳐든 모양으로 만들어 감로(甘露)를 받게 한 것.

  《한서(漢書)》 교사지(郊祀志)에 “무제(武帝)가 구리로 승로반(承露盤)을 만들었는데 위에다

선인장을 설치하여 감로를 받도록 했다.” 하였다.

[주D-002]궁루(宮漏) : 궁중에서 쓰던 물시계. 그릇에 담은 물이 새어 흐르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

[주D-003]구화장(九華帳) : 화려한 휘장 이름.

[주D-004]어로(御爐) : 어전(御前)에서 쓰던 화로.

[주D-005]헌면(軒冕) : 옛날 귀인들이 타던 수레와 쓰던 면류관. 전(轉)하여 높은 벼슬아치를

말한다.

[주D-006]황제(黃帝) : 상고 시대 삼황(三皇)의 하나인 헌원씨(軒轅氏).

[주D-007]은배(銀杯)가……날아갔다 : 《당서(唐書)》 유공권전(柳公權傳)에 “유공권이 모든 공경

(公卿)에게 글씨 값으로 선물받은 돈이 누만금(累萬金)이나 되었는데 종들이 거의 다 훔쳐 써버리

고 또 선물로 들어온 은배(銀杯)도 한 상자쯤 있었는데, 하루는 종이 여쭈기를 ‘상자 속의 은배가

모두 없어졌습니다.’ 하니, 공권은 웃으면서 ‘은배가 날개가 생겨 다 날아갔다는 것이냐?’

하고 더 꾸짖지 않았다.” 하였다.

[주D-008]반정(頒政) : 관리의 임면(任免)ㆍ천전(遷轉)ㆍ출척(黜陟)에 관한 명령을 반포하는 일.

[주D-009]자금어대(紫金魚袋) : 뿌연 구리로 물고기 모양을 새겨 만든 주머니. 임금이 고관(高官)

에게 하사하는 물품의 일종.

[주D-010]팔관하표(八關賀表) : 팔관회는 고려 때 개경(開京)과 서경(西京)에서 토속신에게 제사

지내던 의식인데 이날 각 고을 수령들이 글을 올려 하례하고 외국의 상인들이 방물(方物)을 바치고

축하하였다.

[주D-011]춘장(春場) : 예부(禮部)에서 보이던 과장(科場). 춘관(春官)이 예부의 별칭이란 데서

나온 말.

[주D-012]걸퇴(乞退) : 늙은 재신(宰臣)이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임금에게 청원하는 것.

 

東國李相國文集年譜 001_284a

戊子

公生於是年十二月十六日癸卯。諱奎報。字春卿。黃驪縣人也。考諱允綏官至戶部郞中。母金氏。金壤

郡人。考諱仲權。後改施政。中古名儒也。擢高第。官至蔚珍縣尉。公始生三月。惡瘇滿身。衆藥不理。

嚴君憤之。詣松岳祠宇。擲筴卜生死。曰生。問藥理與否。曰勿藥理。自是不復傅藥。皮皆爛。未辨面

目。乳嫗常以白麪鋪兩臂。然後抱持之。一日。乳嫗抱出門外。有一老父過曰。此兒千金之子。何棄之

如此。宜善護養。乳嫗走白嚴君。君疑其神人。使人追之。以路有三歧。遣三人追之。皆不見而還。始

諱仁底。己酉歲。將赴司馬試。夢有人類村甿。皆着緇布衣。群飮堂上者。旁人曰。此二十八宿也。公

驚悚再拜。問今年試席捷否。有一人指一人曰。彼奎星乃知之。公卽就問。未及聞其言而寤。恨未終其

夢。俄復夢。其人來報曰。子必占狀元。勿慮也。此天機。但莫洩耳。因改今名赴試。果中第一。

己丑

庚寅

辛卯

 

是年。嚴君出倅成州。隨之任。

壬辰大金大定十二年

癸巳大定十三年

甲午大定十四年

 

是年。嚴君以內侍被召。隨至京師。

乙未大定十五年

丙申大定十六年

丁酉大定十七年

戊戌大定十八年公年十一

 

是年。叔父直門下省李富誇於省郞曰。吾猶子年可若干。能屬文。召試之可乎。諸郞欣然使迎之。命爲

聯句。時方受外郡貢紙。以紙字占之。公應聲唱曰。紙路長行毛學士。諸郞手書之。又令爲對。卽曰。

盃心常在麴先生。郞皆嘆伏。號奇童。慰勉遣之。

己亥大定十九年

庚子大定二十年

辛丑大定二十一年公年十四

 

是年。始籍文憲公徒誠明齋肄業。每夏課。先達輩會諸生。刻燭占韻賦詩。名曰急作。公連中榜頭。

諸儒始奇之。

壬寅大定二十二年公年十五

 

是年六月。又於夏課急作。適有齋中拜翰林者。以內直玉堂爲題占韻。公詩曰。獨直偏知殿閣涼。

金蓮花燭炤華堂。露凝仙掌驚秋冷。月透紗窓信夜長。七寶床前宮漏永。九華帳裏御爐香。詞頭草罷銀

河曙。喜見高天瑞日光。先達咸淳等皆嘆賞不已。升爲第一一等唯置公。示其異也。此詩少時所作。

不載集中。

癸卯大定二十三年公年十六

 

春。嚴君出守水州。公留赴司馬試不捷。秋。之水州覲省。

甲辰大定二十四年公年十七

乙巳大定二十五年公年十八

 

春。自水州至。遂赴司馬試不捷。秋還。

丙午大定二十六年公年十九

 

春。嚴君見代。隨至京師。

丁未大定二十七年公年二十

 

是年春。又赴司馬試不捷。公自四五年來。使酒放曠不自檢。唯以風月爲事。略不習科擧之文。故連赴

試不中。

戊申大定二十八年公年二十一

己酉大定二十九年公年二十二

 

是年春。擧司馬試。中第一。以十韻詩賦之。其題。先王制軒冕。著貴賤不求美。公破題云。太古無軒

冕。誰分貴賤流。制之然後著。美也不曾求。又一句云。始造聞黃帝。徒行豈孔丘。座主柳公嗟賞不已。

遂擢第一。

庚戌大定三十年公年二十三

 

六月。赴禮部試。擢第同進士。公嫌其科劣。欲辭之。以嚴君切責。且無舊例。不得辭。因大醉。謂賀

客等曰。予科第雖下。豈不是三四度陶鑄門生者乎。坐客掩口竊笑。公旣不事科擧之文。其作賦荒蕪。

不合格律。又試圍內奉命承宣朴純。與座主受宣醞。次召公飮以一觥。卽大醉亂書。欲裂棄之。傍座孫

得之奪而呈之。其詩題。戴君若鼇冠靈山。公詩第四句云。壯似支三聳。憂无釣六逃。第五句云。奉天

呈屹屹。負岳出滔滔。知貢擧李諱知命愛此句。遂不擯之。

辛亥大金明昌二年公年二十四

 

秋八月。丁父憂。寓居天磨山。自稱白雲居士。作天磨山詩。失之不錄前集。後追覓之。載後集初卷。

首句云。世人但取山崔巍。乃以天磨而號之者是也。後常遊此山作詩。若北山雜題重遊北山者是也。

壬子明昌三年公年二十五

 

是年。著白雲居士語錄及傳。自敍己之行止。

癸丑明昌四年公年二十六

 

是年。作百韻詩。呈張侍郞自牧。張公厚遇。每謁。常置酒與飮。四月。得舊三國史。見東明王事奇之。

作古詩以紀其異。

甲寅明昌五年公年二十七

 

是年。作論潮水書。呈吳東閣世文。作天寶詠史詩四十三首。皆挾注。又作理小園記。

乙卯明昌六年公年二十八

 

是年。著和吳東閣三百韻詩。

丙辰明昌七年公年二十九

 

四月。京師亂。姊夫南流黃驪。五月。公携姊氏往焉。是年春。母家後壻出守尙州。六月。自黃驪赴尙

州覲省。得寒熱病。數月不愈。至十月方還。詩集中有南遊詩。無慮九十餘首。是黃驪尙州所著也。

丁巳承安二年公年三十

 

冬十二月日。冢宰趙 永仁 任相國 濡 崔相國 詵 崔相國 讜。聯名上箚子。薦公請補外寄。以備將來文

翰之任。上遂允可。掌奏承宣某。以嘗有微憾。至是奪箚子。不付天曹。佯稱忽失。冢宰亦以箚子不付

爲解。便不調之。詩集有上趙令公詩云。昔見銀盃嘗羽化。今聞箚子忽登仙。士林莫不嘆之。又作上趙

大尉書。追訴其由。

戊午承安三年公年三十一

己未承安四年公年三十二

 

五月。知奏事相公宅。後爲晉康公。千葉榴花盛開。召賓客賞之。因致詩人。李仁老,咸淳,李湛之及

公賦之後。一日偶謂左右曰。聞文儒四相國薦某不遂。又有奪箚子者。因曰文人相嫉如此。於是始有用

公之意。夏六月。頒政。補全州牧司錄兼掌書記。秋九月。赴全州。是年所著。无慮古律十五六首。

庚申承安五年公年三十三

 

是年所著。无慮三十餘首。冬十二月。被廢發全州。初公之理州也。通判郞將某。貪且偃肆。公不屈。

因公事屢激怒之。通判不勝其憤。又欲自專。遂搆貝錦之詞。行次廣州。適値守歲。妻兄晉公度爲書記。

迎到其居守歲。贈詩一首。其首句云。偶霑微祿官江南是已。

辛酉承安六年公年三十四

 

春正月。至自廣州。夏四月。之竹州迎母至京師。先是。姊壻自黃驪補竹州監務。姊與母之其任居焉。

是年四月。母永還京師。公迎侍而至。有遊竹州萬善寺詩是也。五月。作四輪亭記。六月。作南行記及

自竹州與母赴長安詩是也。

壬戌泰和二年公年三十五

 

夏五月。丁母憂。冬十二月。東京叛。與雲門山賊黨擧兵。朝廷出三軍征之。軍幕逼散官及第等。充修

製員。歷三人。皆以計避不就至公慨然曰。予雖懦怯。亦國民也。避國難非夫也。遂從軍。於是幕府欣

然。奏爲兵馬錄事兼修製。盖暢其情也。是月。行次淸州。作幕中書懷古詩十八韻。呈同營諸公。又次

尙州作觀金上人草書古詩十五韻。

癸亥泰和三年公年三十六

 

公在東京軍幕。二月。作上都統副使書。論葬戰亡人事。作古律詩无慮十餘首。

甲子泰和四年公年三十七

 

三月。兵馬凱還。公隨至京師。詩集有獵罷論功誰第一。至今不記指縱人。軍士多受賞。公獨未尒。

故不能无情。有是作。

乙丑泰和五年公年三十八

 

是年。作上崔相國 詵 書求官。

丙寅泰和六年公年三十九

丁卯泰和七年公年四十

 

冬十二月。權補直翰林院。公旣陸沈。杜門不出。然每歲史館翰院國學等儒官薦人。常以公爲首。

又左右多有揄揚者。晉康侯重違衆志。有用之之意。嫌其無因。時方搆茅亭。命李仁老,李元老,

李允甫及公作記。仍使儒官宰相四者科。公爲第一。獨上板釘壁。至十二月。補是官。作初入翰林詩二

首。又作止止軒記。

戊辰泰和八年公年四十一

 

夏六月。翰林除權卽眞。

己巳泰和九年公年四十二

庚午大安二年公年四十三

辛未大安三年公年四十四

壬申大安四年公年四十五

 

正月。除千牛衛錄事參軍事。六月。有翰林兼官闕員。不待頒政。除兼直翰林院。仍本官。作再入玉

堂詩二首。

癸酉崇慶二年公年四十六

 

十二月。晉康侯嗣子相國。大設夜宴。召搢紳貴介赴座。公獨以八品微官蒙召預焉。及夜半。相國謂曰。

聞君走筆。未之見也。今日試之何如。因使李仁老唱韻。多至四十餘韻。以燭爲題。命名歧편001研墨。

及成。相國大嗟賞不已。明日。將其詩詣府。白於侯。請召試其能。侯初不肯之。再三白之。然後召之。

及到。相國曰。此子不飮。則不得如意。卽命捷步者往其宅取酒來。未及到。侯已置酒觴之。相國又曰。

此子醒醉得中然後可也。乃計盞飮之。至醺乃率詣侯前。侯前有筆匣。筆有十餘事。相國親擇善者授之。

時庭中有孔崔편002遊戱。侯以其崔편003爲題。使琴相國唱韻。多至四十餘韻。筆不容一瞬。侯嘆息至

垂涕。及欲退。侯曰。子若望官。卽言所志。公曰。吾今八品。除七品則足矣。相國屢目之。意欲令直

望參官。其日相國還第。召讓曰。子之望官何劣也。何不以參官爲望耶。公曰。予志也。及十二月頒政。

越七品除司宰丞。

甲戌貞祐二年公年四十七

乙亥貞祐三年公年四十八

 

夏六月。公作詩求參職階梯。晉康侯將其詩出示其府典籤宋恂曰。此子志高者也。應不以階梯爲望。

權屈而言之耳。若奏上直除參官。則想其志謂何也。恂曰。然則其喜不可言。亦衆望也。及下批。

爲右正言知制誥。七月。作初拜正言詩。十月。作朝享大廟頌。

丙子貞祐四年公年四十九

丁丑貞祐五年公年五十

 

春二月。除右司諫知制誥。賜紫金魚袋。是年秋。以公事停。公作上晉康侯書。

戊寅貞祐六年公年五十一

 

春正月。遷左司諫。餘如故。

己卯貞祐七年公年五十二

 

春。公被劾免官。前年十二月日。外方八關賀表有不及進呈者。公欲彈之。琴相國固止之。至是月。

晉康侯考其由。卽劾相國及公。相國見原而公獨免官。四月。出爲桂陽都護府副使兵馬鈐轄。五月。

赴桂陽。

庚辰貞祐八年公年五十三

 

夏六月。以試禮部郞中起居注知制誥見召。七月。至自桂陽。前年九月。晉康公薨。嗣子相國代秉政權。

故有是命。十二月。遷試太僕少卿。仍起居注。作謝表。

辛巳貞祐九年公年五十四

 

夏六月。除寶文閣待制知制誥。作讓謝表。

壬午貞祐十年公年五十五

 

夏六月。太僕少卿卽眞。

癸未貞祐十一年公年五十六

 

冬十二月。除朝散大夫。試將作監。仍待制。

甲申公年五十七

 

夏六月。將作監卽眞。冬十二月。爲明年司馬試座主。作讓謝表。十二月。拜朝議大夫。試國子祭酒翰

林侍講學士。仍知制誥。作讓謝表。

乙酉公年五十八

 

春二月。閱司馬試。詩賦得李惟信等一十六人。十音詩得安謙一等五十人。明經得康得希等三人。

奏御放牓。冬十二月。拜左諫議大夫。餘仍舊。作讓謝表。是年。作王輪寺丈六靈驗記。又受勑作太倉

泥庫上梁文。

丙戌公年五十九

 

冬十二月。祭酒卽眞。

丁亥公年六十

戊子公年六十一

 

春正月。除中散大夫判衛尉事。餘仍。夏五月。以同知貢擧閱春場。得李敦等三十一人。明經得鞠受圭

等四人。奏御放牓。

己丑公年六十二

庚寅公年六十三

 

冬十一月二十一日。長流于猬島。是年八關會侍宴次事有戾於舊例者。是樞密車公所使也。知御史臺事

王猷怒叱執事者不從。車公誤以王猷訶宰相愬之。時公及宋左丞恂夾座。故疑其助揚之。皆流于遠島。

是日出宿靑郊驛。十二月。至保安縣。留待順風二十六日。入猬島。

辛卯公年六十四

 

春正月十五日。量移桑梓黃驪縣。二十二日。行次竹州。寓宿萬善寺。公曾於辛酉歲。客遊此寺。

和板上諸公詩。落句云。好在靑山色。休官欲重尋。今落職重來。是幾於詩讖也。復和二首云。秋七月。

自黃驪至京師。九月。仍備胡兵。以白衣守保定門。詩集有猶勝炎州嵐瘴地。折腰甘向海村民是也。

公在散官。凡達旦通和書表文牒。皆委之。

壬辰公年六十五

 

歲己丑。王師薨。至是年。門人等聞于上。命公作碑銘。夏四月。復舊除。拜正議大夫判祕書省事寶文

閣學士慶成府右詹事知制誥。六月。移都。公於此京未搆屋。借河陰客舍西廊居之。作詩二首。秋九月。

爲留守中軍知兵馬事。

癸巳公年六十六

 

夏六月。拜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左散騎常侍翰林學士承旨。嗣子涵爲直翰林院。故以親嫌改爲寶文

閣學士。八月。直樞院。作詩四首。寄內省金相國 仁鏡。冬十二月。拜金紫光祿大夫知門下省事戶部

尙書集賢殿大學士判禮部事。又作讓謝表。

甲午公年六十七

 

夏五月。以春場知貢擧閱試。得金諫成等三十一人。明經得李邦秀等二人放牓。冬十二月。拜政堂文學

監修國史。受勑作松廣社主法眞覺國師碑銘。

乙未公年六十八

 

春正月。拜太子少傅。冬十二月。拜參知政事修文殿大學士判戶部事太子大保。

丙申公年六十九

 

夏五月。以知貢擧閱春場。得朴曦等二十九人。明經李克松等三人放牓。冬十二月。上表乞退。上留其

表於內。遣內侍金永貂。敦諭令復起。公稱病篤。晉陽侯亦以戶籍縮歲爲辭。勉留之。公不得已至十一

月起視事。然惶恐不自安。屢作詩見其意。公殊不以縮歲爲幸。以實陳之。乞退固切。然猶不得謝 常

有詩云。有面不敢擡。慙愧已不少是也。十二月。拜守大尉。

丁酉公年七十

 

秋七月。奉勑作東宮妃主謚哀冊。公又上表乞退甚懇。冬十二月。以金紫光祿大夫守大保門下侍郞平章

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大保致仕。是年。又承勑作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

戊戌公年七十一

 

冬十二月。承勑作上蒙古皇帝表狀及送晉卿唐古官人書。

己亥公年七十二

 

承勑作蒙古皇帝上表狀。冬十二月。又作同前表狀及送晉卿書。

庚子公年七十三

辛丑公年七十四

 

公雖解位家居。於國朝有高文大冊及異朝往來書表等事。無所不爲。秋七月。寢疾。晉陽公聞之。遣名

醫等問診不絶。乃取公平生所著前後文集凡五十三卷。募工雕印。其督役甚急。欲及公之眼見。以慰其

情也。然以役巨未能告畢。越九月初二日。忽離常寢。向西而臥。以右脅著於席。至夜翛然而化。上聞

訃震悼。命有司庀喪事。又令邇臣作誄書以美終。仍贈謚曰文順公。十二月初六日庚寅。葬于鎭江山東

麓。公於平生。不營產業。常以詩酒自娛。雖在蟻床。猶不絶於諷詠。又嗜讀楞嚴。至背經輒誦。及臨

大期。屛妻息等勿令喧擾。自然拋世。可謂豁達眞人君子也歟。噫。涵時出守於洪州。未及見其終也。

其平生傷悼。曷可容言。

東國李相國年譜

 

 

[편-001]歧 : 妓

[편-002]崔 : 雀

[편-003]崔 : 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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