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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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번째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 한국고지도

향고도 2008.10.09 16:50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는 국내외에서 인정받는 세계최초,최고의 세계지도이다.너무나 유명한 탓에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만큼이나 그 가치가 부족하지 않은 이 지도에 대해서 작금의 관심은

심드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더군다나  임란 때 약탈당한  우리의 귀중한 자산이 아닌가.
이 지도에 대해 지금 까지 알려진 바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1399년(태조8년.明,建文元年), 명나라 惠帝의 등극시 朝鮮賀使로 중국에 갔던 좌정승 김사형(金士衡:1333~1407)은 元代에 이택민(李澤民)이 제작한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와 승려 청준(淸浚)이 제작한 역대제왕 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疆理圖 )의 두 복사본을 가지고 돌아왔다.
목화씨를 가지고 온 문익점의 일화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명나라의 지도를 반출하려다 발각되면 불문곡직 목이 달아 났을 터이다.


   1402년(建文4年), 김사형은 동년에 우정승으로 임명된 이무(李茂:1355~1409), 병조정랑()을 지낸 이회(李),李澤 함께 두 지도에 이회팔도도(圖)를 합본하여 새로운 지도를 만들기로 하였고, 그에 더하여  권근(權近:1352~1409)을 함께 참여시켜 일본지도를 추가 합본하여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 내게 되었는데, 이렇게 탄생한 것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상단의 도명 아래에는 세로 쓰기로 중국 역대 제왕의 수도(國都) 및 원대의 행성부(行省府) 소재지가 기록되어 있고, 지도의 하단에는 앞서 서술한 내용(제작경위)를 기록한 발문이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지역의 지명은 원대(元代)의 지방 행정구를 기초로 하였다.


   이 지도는 조선과 명나라의 크기가 과대하게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서양에서 그려내던 지도들과는 차원이 다를 만큼 그 범위와 정밀도에 있어서는 놀라운 것이다.
이러한 지도를 그려낼 수 있었던 가장큰 이유는 13-14세기경 거대제국 이었던 몽고(원나라)의 통치 하에 만들어 진 앞의 두 종류의 지도를 바탕으로 제작하였기 때문인데, 아랍권에서 유입된 아프리카,유럽지역의 지도들이  이택민의 성교광피도  제작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바탕이 되었던 성교광피도와 역대제왕혼일강리도는 현재 전해 오지 않는다고 하나, 혼일강리도는 이후에 대명혼일도(大明混一圖)를 탄생 시키게 된다.

이상이 강리도에 대해  그 동안 향고도가 알고 있었던 내용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까지 알고 있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원본을 일본의 용곡대학(龍谷大學)도서관이 소장하고 있고 또, 그것이 유일본인 것으로 알아 왔으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현재 까지 파악한 바로는  龍谷大學圖書館,·天理 圖書館, 熊本市(쿠마모토시)의 本妙寺, 長崎県(나가사키)島原市의 本光寺 각기 한 본 씩을 소장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용곡대본을 "混一彊理歷代國都之圖". 천리도서관본은 "大明國圖天理本", 본묘사본은 "大明國地圖本妙寺本",  본광사본은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라 칭하고 있다.
이중, 천리도서관과 본묘사 소장본은 자료수집이 쉽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일본 연구자들의 견해는 용곡대 도서관본과 본광사본은 1402년에 거의 동시에 제작되었는데 이 중 본광사본은 최초 제작 이후, 몇번의 지명,지형교정이 이루어진 상태이고 천리도서관본과 본묘사본은 명나라가 수도를 남경에서 燕京(북경)으로 옮긴 1421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용곡대본과 본광사본이 남경을 「皇都」로, 북경을 「燕都」로 표기하였으나 천리도서관본과 본묘사본에는 명의 천도 이후 명칭인 남경,북경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한 주장이다.


   따라서 4본의 강리도는 각기 크고 작은 상이점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2본은  어느 본이 원본이고 어느 본이 모사본 인지를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 파악한 바로는 앞서 소개한 제작경위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의해 같은 시기에 적어도 복수 이상의 지도가 개별적으로  만들어 졌고 이 후, 복수 이상의 異本이 제작되었던 것으로 본다.
이 4본의 지도 들 중, 가장 색채가 선명하고 크기도 가장 큰 나가사키현의 本光寺 소장본은 현재 나가사키의 常盤歷史資料館에서 공개하고 있는데, 언뜻 보아 별차이가 없어 보이고 고해상 지도를 볼 수 없어 지명등은 확인키 어렵지만, 지형상으로도 여러곳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용곡대 도서관 소장본은 김사형(金士衡)이 발문을 쓴 것으로 잘못 알려졌기도 하나 용곡대본, 본광사본 은 모두 권근(權近)이 발문을 썼으며 동일한 내용이다. 모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원도(모본)가 되는 지도는 이회(李)에 의해 제작되었으나 전해오지 않는다고 말하나 이회가 제작한 원도라는 것은  명나라에서 가져온 2종의 지도에 자신의 팔도도를 합치고 거기에 대충 일본을 그려넣은 현재의 용곡대본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현존하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계열의 최고(最古)본은 용곡대본과 본광사본인데,  한 개인이 제작한 것이 아니라 동 시대의 여러 사람이 함께 제작하였기 때문에 이 지도들를 놓고 원도다 모사본이다 어느 지도가 앞 선다 하고 분별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김사형과 이무,권근은 몰년이 2년내로 거의 같다. 용곡대본과 본광사본은 동시기에 만들어 진 것은 확실하지만,용곡대본이 습작정도로 여겨지는 만면,본광사본은 그 보다 완성도가 높고 약간의 지형, 지명 변경이 이루진 것으로 보아 제작 이 후 몇 번의 교정을 거친 것으로 추정되어,  이회본-용곡대본-본광사본의 순으로 교정을 거쳐 완성된 것으로 본다.

비단에 그려진 용곡대본과  종이에 그려진 본광사본의 가장큰 차이점은 일본,대마도,유구 부분이나, 향고도가 관심을 갖은 부분은 바로 동북끝 아무르강 하구 부분이다.


   용곡대본에서는 언뜻,흑룡강으로 보이는 강이 동쪽으로 흘러 마치 호수로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그 호수는 흥개호가 아닐까 할 정도로 애매하다. 실제로 복원도를 보면 호수로 그려져 있다. 아웃라인이 없는 지도에서는 대부분 약간의 여백을 두는 것이 일반적인데 용곡대본의 지도는 마치 우단을 잘라내 버린듯한 느낌이 강하다.
그런데, 본광사본은 예의 그 호수는 호수가 아니라 아무르강 하구임을 선명히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그 서쪽의 두 호수는 경박호와 흥개호가 된다는 사실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는 대동여지도 이전의 조선지도 들이  북쪽, 특히 동북쪽을 심하게 압축시켜 표현하는 특징이 있는데 이 지도 제작 당시에도 그러했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용곡대본에는 일본열도가 90도 정도로  돌아가 있고 대마도는 조선연안에 밀착되어 그려져있다, 이 부분을 맡은 사람이 권근인데, 일본의 연구자들 중에 일부는 권근이 「行基圖」에서 일본을 횡이 아닌 종으로 표현한 전역을 들어, 권근의 지도를 김사형이 별 생각없이  합체하여 탄생한 것이 용곡대본이고, 그 직후 잘못되었음을 간파한 권근에 의해 교정 되어진 지도가 본광사본 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우리 역사상 세차례의 대규모 대마도 정벌이 있었다.
첫번째는 고려 공양왕 원년인 1389년 박위에 의해, 두 번째는 1396년(태조5)오도병마처치사(五道兵馬處置使) 김사형에 의해, 그리고 마지막이 1419년(세종1)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史) 이종무(李從茂)에 의해서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제작을 주도한 김사형은 좌정승까지를 지낸 인물이며 조선조의 일등개국공신이자 대마도를 정벌한 적이 있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대마도와 일본의 위치,지형을 몰라서 일본열도를 세로로 그리고 대마도를 조선내륙에 붙을 정도로 그렸을까?
또 한, 이 지도제작에 가장 먼저 참여한 이무는 지도가 제작되던 해에 우정승에 임명되기도 했는데, 김사형이 대마도를 정벌할 당시 함께 출정하기도 하였고, 이회 역시 무신 이기도 했으며 지도 전문가였다.

그런 사람들이 일본을 지도에 그릴 줄을 몰라 90도로 돌려서 그려 넣었다고?

더하여, 박돈지(朴敦之)가 사신으로 일본에 가서 일본지도를 가져 온 해는 1401년으로 원도가 제작되었다는 1402년 한 해 전이니, 자료가 없어서도 아니다.
전하지 않는 이회본과 용곡대본은 제작과정의 습작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는 이유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28년 小川琢治(오가와 다쿠지)에 의해서이고,

국내에는 고(故) 이찬 박사에 의해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두 본의 유사본이 출현했는데 천리도서관본과 본묘사본이 그것이다.
이 두 개 본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은밀히 연구되어져 왔던 것인데, 1988년에 본광사본이 추가로 출현함과 함께 한꺼번에 네 종의 유사본이 있음이  자연스럽게 공개되고 만 것이다. 조선 최고의 지도가 4본이나 있다는데, 기쁨보다는 수탈당한 아픔만 더 한다. 현재 넷상에 올려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촬영상의 색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절대다수가 용곡대본, 또는 이를 복원한 복원도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도 용곡대본을 그대로 복사한 복사본이다.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는 지도역시 용곡대본을 모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좌측: 용곡대본의 전시모습.          우측: 국립중앙박물관이 용곡대본을 복사하여 전시중인 모습.

 


 * 용곡대본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壹彊理歷代國都之圖).가로 168cm 세로 158.5cm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용곡대본의 복원도. 

 


* 네 번째로 공개된 본광사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壹疆理歷代國都地圖). 가로 276, 8 cmX 세로 219,0  

 

 

 

나가사키현 島原市의 本光寺 소장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의 내용과 지도학사적 의의
                                                          - 나가사키의 常盤歷史資料館 관련자료 인용.


*제작 내용과 개관

   지도의 상단 가득 上端로 크게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고 제목이 가로쓰여 있다.그 아래에 세로로 중국 역대 제왕의 수도 및 원대의 행성부 소재지가 열기되고 있다.지도의 하단에는, 이 지도의 제작 경위를 적은 권근의 발문이 있다. 이에 따르면, 이 지도는 원대(元代)에 이택민(李澤民)에 의해 제작된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와 중국 역대 수도의 변천을 나타낸 청준의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를 합하고 , 거기에  조선과 일본을 추가하여 그려 건문4년(1402)에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의 重臣인 「上洛金公」김사형(金士衡)과 「丹陽李公」이무(李茂)의 목숨 건 노력에 의해서 명나라로 부터 입수 한 이 2종류의 지도를 합본한 것은 이회(李)이며, 여기에 조선과 일본을 증보한 것이 권근(權近)이다.


   이 지도와 같은 계통의 지도는 그 밖에 龍谷大學圖書館,·天理 圖書館, 熊本市(쿠마모토시)의 本妙寺에도 현존하고 있다. 本光寺본은 나머지 3본의 지도와 비교하면, 도폭이 가장 크고 채색이 가장 선명하다.지도에 그려진 범위는 모두 같고, 지도의 중앙에 명나라를 크게 위치 시키고 동단은 조선,일본, 서쪽은 서아시아를 간략히 하면서 유럽과 아프리카까지를 포함하고 있다.인도차이나는 반도로 나타내지 않고, 크고 단순하게 표현된 중국 대륙의 남방에 덧붙힌 정도이다.


   게다가 인도는 그 위치와 형상이 너무 간결하여 뱅갈만과 아라비아해를 합쳤다고 보여지는 큰 만의 안쪽에서 티벳과 서아시아에 끼워진 작은 존재로 묘사 되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의 북변은 아무르강(흑룡강)이 길게 가로 놓여 동쪽으로  흐르고, 그 이북은 애매하게 묘사 되고 육지를 한정하는 해안선은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천리도서관본과 본묘사본은 대륙의 북방을 해양으로 그리고 있다.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 대륙은 현재와 같은 유사 형상은 하고 있으나, 중국 대륙에 비교해 너무 작고, 아프리카 남단은 중국 대륙 남단보다 아득한 북방에 위치하고 있고, 실제와는  相違하다.


   반대로 동쪽의 한반도·일본·琉球는 과대시되고 있고, 특히 한반도는 아프리카 대륙과 같은 정도의 크기에 그려져 있다.아시아·아프리카의 남방 해중에 많은 小島들이 산재하는 것도 특징적이다.小島들은 형태를 표시한 것이 아니라, 일률적으로 타원형으로 표현하고 그 안에 섬 이름을 표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지중해는 수면의 범위가 명확하게는 나타나지 않고, 아프리카와 유럽의 구분도 불명확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지도는 오래 전인 15 세기경의 동양에서 인식하고 있던 세계의 전역(구대륙)을 그리는 조선제 최고의 본격적인 세계 지도이다.중국과 한반도의 도형은 대체로 올바르고, 하천이나 내륙 수계의 분맥에 대해서는 특히 상세하다. 산악등을 포함해 지형적 내용을 포함시켜, 지명도 극히 풍부하게 표기되어 있다.중국에서의 지명은 원대의 地方行攻區를 기초로 하였고, 그림중에는 堯,舜,禹 三帝의 古都를 시작으로 역대  제국의 수도의 소재지를 기록한 역사 지명을 함께 나타내고 있다.
이로 인하여 이 지도는 중국의 역사 지도적인 내용을 포함한 세계 지도라는 것이 된다.

 

*양식과 내용의 특징

   紙製、彩色手書의 一鋪圖로, 전체도폭은 세로 219,0 X 가로 276, 8 cm로, 세로 37, 가로 133 cm의 용지를 세로6매, 가로3매 총 18매를 연결한 것로서 접은 형태는 매우 두텁다.종횡을 각 8분으로 접고, 절폭은 세로 28, 0, 옆 35, 0 센티미터 이다.보존 상황은 양호하지 못하며, 도지가 전체적으로 무러지고 있고, 접은 자국 부분에서의 마모나 훼손되어  떨어짐이나 변색이 눈에 띄고  특히 우하부에서의 손상이 심하다.


(채색·묘사)
   채색에는 적·다·황·록·감의 오색을 이용해 내륙의 호수와 늪과 하천은 짙은 감색, 바다는 밝은 감색에서 중국이나 조선의 고지도에 많이 사용되는 기법인 물결 줄무늬가 얇게 그려져 있다.문자는 묵서.지형은 한반도의 長白,太白,小白山脈산맥이 전통적인 조선의 지도 양식으로 묘사되고 있다.이 산맥의 표현법은 「朝鮮八道統合圖」,「海島輿地圖」 등의 조선시대 전도에 잘 나타나 있는 묘사법과 공통적이다.수계도 지류까지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분수계가 명료하게 되어 있다.중국지역도 수계는 한반도와 같게 훌륭할 정도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단지, 산악에 대해서는 秦嶺山脈등이 어느 정도 산맥의 형태로
그려졌지만, 그외의 많은 산들은 독립적인 산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지명)
   지명은 꽤 자세하게 분류되고 있고, 그것을 원이나 방형 등 각종의 테두리로 둘러싸 구별하고 있다.당대지명은 물론 역사지명도 그 중요도에 따라 강조하여 큰 테두리부와 채색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 내용)
   지도면을 東部,中部,西部의 三部分으로 나누고, 각 부분에 포함되는 범위의 기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부)아시아 동부, 즉 시베리아 연해지방, 한반도, 일본, 유구등이 포함된다.도면의 상부, 유라시아 대륙의 북단부는 매우 압축해 그려, 북극해에 접한 해안선은 나타나지 않고, 육지의 한계는 애매하게 그려져 있다.한반도의 형태는 극히 뛰어나다.
미비점을 굳이 지적한다면, 반도 북서부인 현재의 북한 황해 남도가 황해를 향한 육지의 돌출이 실제보다 왜소하게 표현되었다. 앞의 기술과 같이 반도를 종단 하는 산맥의 연속적인 斜景묘사와 나뭇가지처럼 그려진 수계의 묘사가 인상적이다.지명의 표기도 많아, 弘中芳男(히로나카 요시오)(1989)에 의하면, 훼손된 부분의 31개 지명을 더하면 전부 447개 지명에 이르고, 그 중 수도인 한성(현재의 서울)은 도성의 성곽을 나타내는 톱니바퀴형의 테두리로 그리고 「조선」이라고 표기한 것을 시작해 府,牧,都護府 등 주요 19개 지명엔 短冊形의 울타리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東海(日本海)의 沿岸에는 해안에 평행하여 타원형의 모양안에 지명을 표기하여 많은 섬들일 그린 것으로 보여지지만, 이것은 연안에 점재하는 포구(浦口)들의 명칭을 나타낸 것이다.


 한반도에 관해서는 상세한 지리적 정보가 포함되어 있는데 반하여, 일본은 극히 간략하다.
이른바 치졸한 「行基圖」형태이며, 산성에 적색으로 「일본」이라고 표기해 수도의 위치를 나타내긴 하였으나, 나머지는 68개국을 국별로 구획하여 국명을 표기하는 정도다.국명 이외의 기재는 陸奧國,夷地,鎭守府,白河關이라고 표기하는 정도고 그 외에는 四國南方의 바다 가운데에 避秦人徐福祠의 표기가 보일 뿐이다. 일본부분 중, 九州와 四國의 남쪽지역이 손상되어 있어 전체의 형태를 알 수 없지만, 本州에서는 동북지방이 압축되어 常陸으로부터 下總,上總,安房國이 있는 房總半島의 긴 돌출과 志摩國이 離島가 아니고 志摩半島에 자리 매김되고 있는 등, 대체로 「拾芥抄」판본의 일본지도를 닮아 있다.단지 행기도에는 통상 볼 수 없는 琵琶湖에서 大阪灣에 흘러 드는 淀川의 강줄기가 분명히 그려져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일본의 서남 해중에는 「羅刹國」, 북동 해중에는 「雁道」가 있는데, 이 두 섬은 중세기의 일본지도에 나타나는 전설의 섬 들이다. 또, 북방 해중에는 「見付嶋」, 동방 해중에는 「扶桑」, 남방 해중에는 「女國」「方丈山」「祖州」「蓬萊山」「毛人國」이 있어, 「羅刹國」의 남쪽에는 「尼渠」「大漠」「黑齒」「勃海」「大身」「勃楚」「支」「三佛齊」가 부족이나 집단형식으로 그려져 있다.중국의 東海에 있는 仙境이라 알려진 扶桑,方丈등이 그려져 있고, 봉래산, 徐福의 기록이 있어 중국의 신선사상의 영향이 느껴진다.


   지도 상의 유구는 섬의 중앙에 「琉球國都」, 그 북방에는 「國頭城」이 있어 ,함께 조선의 수도와 같이 성벽 도시를 생각하게 하는 대형 톱니바퀴의 형태로 나타내고 있다.島內에는 산들이 묘사되고 강에의 입출입이 자유롭지않아 언제든지 왕의 성명이나 포명이 있을 시에는 도성주위를 방어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유구는 일본지역과 비교하여 지도로서의 내용이 충실한데, 이 지도에 그려진 유구의 지형 및 표기 내용은, 조선 成宗2年(1471)申叔舟가 編纂한『海東諸國紀』에 실린 「琉球國之圖」와상통하고 있어 주목된다.다만, 해동제국기에는 일본 본토 및 壹岐,對馬島 두 섬의 지도도 수록 하고 있지만, 본광사본에는 유구 이외의 두섬은 그려지지 않았다. 「해동 제국기」의 일기와 대마도의 그림은 꽤 상세한 것이지만, 본광사본에서는 두 섬을 단지 윤곽을 그리고 지명만을 표기할 정도로 간략히 취급하였다.


-(중앙부) 지도의 중앙부는 몽골과 거대한 중국이 차지하고 있고,그 남방에 동남아시아 지방이 그려져 있다.중국 남동부에 雷州半島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위치하는 해남도는 네개의 섬이 모아진 형태로 묘사되고 있다.해남도에는 元朝의 군단인 乾寧,南安,万安,吉陽의 四軍號가 있음을 단책형 형태로 나타내고 있다. 安南國(베트남)은 해남도의 동쪽에 있는 현재의 톤킨만 내에 원형으로 나타내 크고 작은 섬들군의 하나로서 묘사 되었다.그 북쪽의 연안부에 交趾(북부 베트남)가 위치한다.중국 대륙의 남서부는 雲南行省인데, 그 외변을 싸듯이 남해에 접해 暹,羅斛(타이의 고왕국), 丹馬令(말레이 반도 동해안의 고왕국), 緬國(버마의 고명) 등 西南諸蠻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다.그리고 그 서방에는 沱江路,天長路,歸化路 등 원대 安南의 지명을 기록하는 등 위치 관계는 극히 부정확하다.게다가  唐代에 동쪽은 캄보디아 지방에서 서쪽은 동인도에까지 세력을 펼쳤다고 하는 고왕국인 驃國(퓨국)은 뱅갈만과 아라비아해를 합체 했다고 생각되는 큰 만의 안쪽에 있고, 인도와 함께 버마 지방으로부터 크게 북쪽으로 떨어진 북방의 위치에 있다.따라서, 인도의 위치는 실제와 현저하게 달라 중국 주요부의 서방에 있고, 만 안쪽의 좁은 범위로 한정되고 있다.


-(서부) 이 부분에는 중앙 아시아·인도·서아시아·아프리카·유럽의 넓은 범위를 포함하고 있지만, 지도에서는 도형을 현저하게 압축해 그리고 있다.현대의 세계 지도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나타내면, 당연히 도면의 중앙부에 포함되어야할 인도가 중앙 아시아의 남쪽으로 접해 그려져 있다.인도 반도의 거대한 형태는 전혀 없고, 그 위치는 「古土蕃地」(티벳)과 함께 중국 陜西行省의 眞西와 접하고 있어 그 배치는 극히 부자연스럽다.
또, 지중해가 실제보다 넓은 수면으로서 채색되어 있으나, 수면인지 육지인지 잘 분별이 않되는 애매한 묘사가 되고 있다.유럽으로 여겨지는 지역의 도형도 이베리아반도의 형태를 그저 판별할 수 있는 정도로 전체적으로 불명확이다.또, 알프스 산맥으로 보여지는 산들의 묘사가 인정되지만, 유럽의 지명 기재는 극히 적다.서부지역의 테두리가 있는 중요 지명은 중앙 아시아의 「別失八里」(비시바리크), 久六灣(카스피해) 서해안에 위치하는 「八不魯阿不稱」 및 우크라이나 근처에 있던 「昔克那」이다.앞의 두 곳은 이중 원으로 된 테두리이지만, 마지막의 석극나는 성곽을 나타내는 톱니바퀴형의 테두리에 둘러싸여 있다.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의 형태는 비교적 실제와 닮아 있다.단지, 아프리카 중앙부에 거대한 내륙호수가 그려져 있고, 그 한가운데에 섬의 형태에서 「黃沙」라고 표기한 것은 사하라사막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또, 아프리카 남부에서 대륙의 동쪽을 Nile강으로 보여지는 긴 강이 있어 홍해로 유입하고 있는 모습이다.대호수로부터 지중해에 흘러 드는 무한정의 하류가 모이는 河口部 델타의 끝에는 다보탑의 형태를 한 건조물이 그려져 있는데, 옛 부터 알려진 알렉샌드리아의 등대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계통지도(4개본)의 내용 비교와 제작기

   본광사소장의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本光寺본이라 부른다)와 유사지도로서는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용곡대학도서관 소장의 「混一彊理歷代國都之圖」(龍谷大본이라고 부른다), 천리 도서관 소장의 「대명국도」(天里본이라고 부른다) 및 熊本市 本妙寺 소장의 「대명국 지도」(本妙寺본이라 부른다)가 현재 알려져 있다.그 중 특히 용곡대본에 대해서는, 1928년, 小川琢治(오가와 다쿠지)에 의해서 그 역사적 가치가 처음 소개되었고, 이 후 천리도서관본과 본묘사본이 더해 몇 사람인가의 선학에 의해서 내용이 연구되어 왔다.따라서 여기에서는, 기왕의 연구 성과 이 외에, 새롭게 출현한 본광사본을 기존의 유사본 3점과 비교하고, 그 특징을 분명히 해 둔다. 전체적인 그림 양식과 내용이 본광사본을 닮아 있는 것은 용곡대본이다.이 두 지도는 도명이 「地圖」와「之圖」라고 한  차이는 있지만, 도명과 그 아래에 기록된 중국 역대의 수도와 원대행성도의 기록, 및 도면의 하단에 권근(權近)의 발문이 있는 것 외에 선명하게 착색이 된 점에서도 공통적이다.다만 용곡대본의 채색은 지명범위의 빨강, 내륙 수계의 파랑, 물결 줄무늬를 그리는 해양의 초록등을 제외하면 현저하게 퇴색되어, 본광사본만큼 선명하지 않다.그에 반해 천리도서관본과 본묘사본 두 지도는 도명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착색도 모두 담채색이다.이미 海野一隆(우미노일 타카시)(1958)에 의해서 지적되었듯이, 천리도서관본과 본묘사본 두 지도는 소재가 종이냐, 견포냐에 앞서서 지형,내용이 서로 동일한 동일 계통도이며, 앞의 본광사본과 용곡대본과는 내용적으로 많은 개변점이 보인다.


   본광사본과 용곡대본과는 중국의 남경을 「皇都」, 북경을 「燕都」라고 표기 했는데, 천리도서관본과 본묘사본 두 지도에서는 모두 「南京」 「北京」이라고 하고 있다.명나라는 최초 應天府(南京)에 도읍를 두었지만, 1421년(영락 19)에 順天府(북경)으로 천도하여 북경의 호칭은 이 때 부터 시작되었고, 남경의 호칭이 시작된 것은 1441년(정통 6) 이후로 추정된다.그 외 앞의 두 지도에서는  元朝의 지방 행정 제도에서 채용된 行省과 州의 중간단위인 「路」가 기록되는 등 元朝의 지명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반하여, 뒤의 두 지도에서는 분명하게 明朝의 지방 행정 제도에 근거한 지명이되고 있다.


   그 외 뒤의 두 지도에서 나타나는 현저한 차이점은, ·유라시아 대륙의 북단에 해안선을 그어 그 북방으로 해양을 그린 점, ·남방 해중에 그려진 섬의 수가 눈에 띄어 많은 점, ·황하의 원류를 크게 그려 바꾸고 있는 점, ·일본,유구 및 그 주변을 그려 바꾸고 있는 점 등이다.앞의 두 지도에그려진 황하의 원류는, 만리장성이 끝나는 「臨挑府」의 서방에서 靑海(코코노르)에 가까운 「古崑崙國」의 산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그렸으며, 「積石山河源」의 古說을 注記하고 있다.신선설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곤륜산을 황하의 수원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세계의 동방과 서방에는 신선이 사는 극락 세계가 존재하며, 서방의 樂土에 곤륜산을 대비시켜 동방의 芙蓉國으로 여기고 있었다.뒤 두 지도에서는 황하의 상류를 크게 남하시키고, 그 원류를 「崑崙山」과 함께 사천성의 서방으로 위치 시키고 있다.다만, 중국 북변에 특징적으로 그려지는 만리장성에 대해서는, 4개본 모두가 西端를 臨挑로 한 秦의 시황제 시대 이래의 형태로 나타내고 있다. 蘭州로부터 嘉峪關에 이르는 감숙성을 달리는 장성은 명의 중엽인 세종년간(1522-1566)에 축조 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4개본 어디에도 그려져 있지 않다.


   본광사본과 용곡대본은 동일 계통도이며, 중국과 그 以西지역은 기본적으로 내용이 동일하고 조선의 지명에 약간의 개정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일본과 유구의 지형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것 외에 남해에 그려진 크고 작은 섬들의 숫자에 대해서도 무시 할 수가 없어  내용 비교가 중요하다.두 지도에 표기된 400개를 넘는 조선 국내의 지명을 일일이 상세하게 비교 조합한 弘中芳男(히로나카 요시오)(1989)의 작업 결과에서는 용곡대본에는 있으나 본광사본에 없는 지명은 13개, 반대로 본광사 본에는 있으나 용곡대본에 없는 지명은 33개에 이르고 있어 , 조선에서는 지명 개정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두 지도의 특히 현저한 차이점은 일본과 유구 및 그 주변의 지형이다.용곡대본에서는 일본이 90도 횡전하고 있고, 九州를 북쪽으로 津輕半島(일본의 동부)를 남쪽으로 한 일본 열도의 그 특이한 배치가 종래 주목받아 왔다.그러나, 새롭게 출현한 본광사본에서는 일본이 정상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또, 용곡대본상의 일본에 대해서는 그림중의 배치 방향 뿐만이 아니라, 일본지역의 종류 그 자체가 문제이다.


   앞의 서술과 같이, 본광사본의 지도는 「拾芥抄」의 일본지도를 닮아 있고, 行基圖 타입이라고 해도 국토의 東北部가 꽤 치켜 올라가 있고, 그 지형 및 대륙과의 위치적 관계는 오늘의 지도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그에 반하여, 용곡대본의 일본은 房總半島나 能登半島가 반도형의 형태가 부족해서 지형에 치졸함을 느끼게 한다.또 號內海가 수면으로서 채색되지 않고, 四國과 本州가 육지와 연속되어 있는 것 같이 애매하게 그려졌다.長門을「良門」이라고 오기하거나 肥前이나 甲斐을 빠뜨리고 쓰거나 하는 등 轉寫때의 부주의도 눈에 띈다.게다가 내용적으로도 제국,나라마다의 구획과 국명의 표기 외에 九州에는 「博多大」,相模의 경우「鎌鎗」등의 지명 기재가 있어 室町期의 지리적 내용을 고집하여,본광사본의 일본지도 보다 내용적으로 덜 발전한 느낌이다.
 琉球에 대해서도 두 지도는 크게 다르다.본광사본에서는 「해동 제국기」의 「유구국지도」에 근접 하지만, 용곡대본에서는 「해동 제국기」를 닮기는 커녕, 섬의 형태를 그린 것이 아니라 다른 섬들과 같게 九州와 대륙과의 사이의 바다 중에 원형으로 그리고, 그 안에 겨우 「大琉球」 「琉球」라고 표기한 정도다.단지, 일본 본토의 남방 해역(용곡대본에서는 90도 횡전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는 서방 해역)에 존재하는 扶桑,大身,勃楚,支,三佛齊,黑齒,勃海,尼渠의 위치는 공통적이다.또, 용곡대본에서는 서남 해중에 크고 작은 섬들이 전혀 그려져 있지 않은데 반하여, 본광사본에서는 같은 곳에 20개가 넘는 섬이 그려져 있고, 그 중에는 「長洲」「大人洲」(炎洲의誤寫로 추정)「鳳麟州」등이 있어 海內十洲에의 진수를 느끼게 한다.이것은 천리,본묘사 두 지도본 보다 한층 더 발전해 서남 해중에 「聚窟洲」「流洲」、 또 동남 해중에 「生洲」「滄浪山」、 서방 해중에 「崑崙山」「崑崙島」를 더하고 있다.게다가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해양안에도 두 개의 큰 섬을 그려, 섬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十洲를 사해에 배치하려고 하는 신선적 사상을 분명히 엿볼 수 있다.


   천리본과 본묘사본에서는 일본 및 유구의 도형·기재 내용 모두 「해동 제국기」와의 관련성을 강하게 읽어낼 수 있다.쿄토는 이중 원형의 지명표식를 가지고 「日本國都」라고 표기했다.近江의 琵琶湖는 단지 「湖」라고만 주기하고, 거기에서 오사카 만에 淀川이 흘러나오고 있는 묘사, 「鎌倉殿」과「富士山」을 환륜으로 둘러 싸 나타내 보이는 위치도 「해동 제국기」의 「일본 본국지도」 및 「해동 제국총도」와 완전히 같다.즉, 단책형의 테두리로 둘러싼 五畿七道圖의 도명의 기재 위치, 九州에는 서해도와 함께 같은 단책형 범위로 「九州」라고 적고 있는 것 등, 표기 방법은 「해동 제국기」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다만, 천리도서관본과 본묘사본 두 지도에서는 國(일본의 지방단위)界의 분활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또, 일본 주변의 섬들에서도 見付島이나 佐渡島 및 夷島등이 명기되어 있는 가운데, 方丈山,鳳萊山등 신선사상에 의한 삼신산이나 羅刹岡,雁道 등 전설의 섬들에 대해서는, 「해동 제국기」에서와 동일한 각각의 섬의 위치에 지형을 그렸지만, 왠지 섬의 명칭은 미표기(천리도서관본에서는 「雁道」를 표기)하여 공백으로 남겨 뒀다.


 이상과 같은 내용상의 다름과, 이들 유사 4개본의 계보와 성립의 전후 관계를 추정하면, 용곡대본과 본광사본은 건문4년 원도의 내용을 잘 전하는 같은 계보도임이 성립되지만 용곡대본이 간발의 차이로 앞선작으로 본다.용곡대본이 제작된 뒤, 특히 일본 배치의 잘못을  눈치 채, 그 후에 입수한 일본지도와 유구도(유구도는 「해동 제국기」지도와 같다)에 의해서 보정한 것일 것이다.천리도서관본과 본묘사본 두 지도는 용곡대본과·본광사본 두 지도의 동일한 원도로부터 나온 異本이다.용곡대,본광사 두 지도가 제목,발문을 갖춘 그림의 체재, 원말부터 명초에 걸친 중국의 지명 기재 등 原圖(명나라에서 입수한 2종지도)의 내용을 충실하게 전하는데 반해, 천리,본묘사 두 지도는 조선 지나, 일본 및 그 주변의 지형 개정 뿐만이 아니라, 중국 지명도 명대 중기의 자료에 의해서 개정하고 있다.그러한 개정 결과와 지도의 상단에 기록한 원대행성 정부의 소재지나 하부에 記職 한 발문이 지도의 내용과 맞지 않게 되어, 제목도 맞추어 지도로서 불식 된 것이라고 추측된다.거기에 따라 생긴 지도 상단의 공백부에 원도에서는 그려지지 않았던 아시아대륙 북단의 해안선을 직선에 가까운 상태로 그림으로서 북단의 가장자리를 채워 도면의 불안정함을 보정한 것이라 본다.


   이미 기존에 알려져 있던 용곡대본과 천리도서관본,본묘사 3본 지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대체적인 제작 시기가 밝혀지고 있다.용곡대본은, 靑山定雄(1938)의 고증에 의하면 명,건문4년(1402)의 원도 제작후 적어도 2회의 군명 개정을 거쳐서, 조선 성종원년(1470 년)전후 무렵에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한편, 천리도서관본은 海野一隆(1958)의 고증에 의하면, 16세기 중반무렵의 내용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본광사본의 구체적인 제작 연대를 구명하려면 , 유사책의 경우와 같게 지도가 만들어진 조선 본국내의 지명을 검토하는 것이 제일 유효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신설,폐지가 있던 신,구의 지명이 병존 하고 있고, 어느 특정의 시점에 현존 하고 있던 행정 지명을 망라한 것은 아닌 것 같기 때문에 지명의 검토만으로는 이 지도의 제작 시기를 엄밀하게 특정하는 것은 곤란같다.선학들이 취한 연대 고증을 원용하여 이 본광사본의 제작 시기를 생각해 보면, 咸鏡道의 압록강 상류부에서 후세에 廢四郡으로 불리는 지역의 虞○,閭延,茂昌의 三郡에 「古」를 붙여 군명이 기재되어 있다.이 3군은 세조 원년(1456)까지 존재한 것이며, 1456년 이후는 폐군이 되었다.


   위경도의 「明川」과「吉州」는 용곡대본에는 없고 본광사본에서는 나타난다.「증보 문헌 비고」권18(1770 제작, 1908간)에 의하면 明川은「중종7년(1512) 入吉州、明年復置」라고 기록되어 있고, 길주에 대해서는 「太祖七年(1398)陞州、睿宗元年(1469)降吉城県、中宗七年(1512)復陞」이라고 기록되어 있다.睿宗元年에 위경도의 길주는 吉城県으로 격하되었는데, 그 때 길주에서 떨어져 나간 明川(県)은 있지만,  격하된 길성(県)이 눈에 띄지 않고, 대신에 길주의 이름이 보인다.이것은 일단 격하된 길성이, 다시 길주로 돌아온 중종7년(1512) 이후의 내용이다.이 두 지방명이 병기 되는 것은 중종8년(1513) 이후의 상황으로 추정된다.


   전라도의 광주와 충청도의 충주가 표기되어 있다.광주는 成宗20년(1489)부터 연산군7년(1501) 동안, 격하되어 光山県이 되었다.또 충주는 명종4년(1549)부터 동22년(1567) 동안, 惟新県으로 격하되고 충청도는 淸洪道가 되었었다.따라서, 이 양기간은 지도 제작기간으로 볼 수가 없다.
경상도의 거제도에 水營이 표기되어 있지만, 거제도의 烏兒浦에 있던 수영은 선조 37년(1604)에 固城의 頭篭浦에 이전해, 이조 말기까지 변하지 않았다.또, 같은 경상도의 창원에 있던 兵營은 만력계묘년(1603)에 普州의 轟石山城에 옮겨, 이조 말기까지 변하지 않았다.한편으로 거슬러 올라가 울산에 水營이 위치하게 되는 것은, 적어도 임진란이 시작되는 1592년 이전이다.【長正統(1982) 참조】
   이상의 네 가지의 조건을 채우는 기간은 1513-1549년 및 1567-1592년이라는 것이 되어, 본광사본의 성립은 이 몇개의 기간내로 보여진다.


 조선 국내에 표기된  府,牧,郡등의 행정 지명 외에 兵營,水營,行營등의 소재가 표기되어 있다.천리도서관본과 본묘사본에서는 이러한 군사거점을 중시해 특히 円형의 도형후 착색해 나타내 보이고 있다.군사거점의 신설,폐지,이동은 국가의 중요사 이기 때문이며, 정부에 의한 관찬 지도에 표기되어 있다는것은 비교적 정확한 정보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용곡대본에는 없고 본광사본에 보이는 지명 가운데, 경상도의 「熊川」이 표기된 것도 걸린다.「해동 제국기」(1471간)에 의하면, 웅천은 朝聘應接의 관공서가 위치한 三浦의 요지이며, 倭館도 있어 일본인 거류지이기도 했다.성종5년(1474)의 본광사본의 증보 시에는 東萊 富山浦 및 울산 塩浦와 같이 三浦의 하나로써 「熊川齊浦之都」(재포는 「乃而浦」의 조선음을 한역한 것)이 추가 보충 되고 있다.그 그림에 의하면, 같은 곳의 灣內에 나타나는 小浦名도 본광사본의 내용과 일치하지만, 용곡대본과 상이 하여, 대마도를 너무 반도에 접근시키고 있어 「해동 제국기」의 표기와는 크게 동떨어져 있다.동서의 간행·증보와 전후 해 작성되었다고 보여지는 용곡대본에 대해 熊川의 지명이 없는 것은 그야말로 부자연스럽고, 향후의 검토 과제일 것이다.

 

*지도학사적인 의의
   기존에 알려져 있던 용곡대본에 대해서는, 앞의 기술과 같이 일찍부터 小川琢治(오가와 다쿠지)(1928)에 의해서 中國元代地圖學의 내용을 규지 할 수 있는 조선제 지도이다라고 하며 지도의 역사,지리학적 가치를 밝힌 이 후, 다른 유사한 두 개 본이 출현되고 몇 몇의 선학에 의해서 내용이 연구되어 왔다.이 본광사본은 용곡대본과 내용이 비교적 비슷하다고는 해도 일본·九州(큐슈)와 그 주변에서는 분명한 상이점이 있고, 또 다른 2도와는 내용상의 상이점도 인정되므로, 이 들 유사본상호의 상세한 비교 검토는 중요한 과제가 된다.본 도면은 15 세기 초인 조선 초기에 이회(李) 에 의해서 작성된 세계도 그 자체가 아니고, 건문4년(1402)에 생긴 원도로부터의 전사 수정된 지도이지만, 원도의 내용을 잘 전하는 조선 최고의 현존 세계 지도로서 지도학 사상의 가치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지도는 중국의 전통적인 국토 전도와 서방을 자세하게 그린 이슬람제 지도, 거기에 조선 팔도도의 세 개가 합체 해서 완성된 합성도라고 하는 격을 가지고 있다.17 세기가 되어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가 제작 될 때까지는 동양에서 제작ㅎㄴ 가장 뛰어난 세계지도였다.이러한 귀중한 지도가 조선(한국)에 전해지지 않고, 전사도라고 해도 그 계통의 지도가 4점이나 일본에 현존 하는 것은 한자문화권에 있어서의 문화 교류사라고 하는 관점으로 봐도 그 의의는 크다.


 小川琢治(오가와 다쿠지)의 탁견에 의해서, 이런 종류의 조선제 세계 지도가 중세 이슬람 지도의 영향을 받았고,  한층 더 고대 프트레마이오스의 지도학을 계승한 것임을 가리키고 있다고 高橋正(다카하시 타다시)(1963)는 용곡대본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다.高橋正(다카하시 타다시)에 의해서, Nile강의 河源의 도시와 설명이 프트레마이오스 지도에 대응하는 것, Nile강의 하류부에 표기된 「1密思」와「阿哈明」이 이집트와 파나포리스를 의미하는 아라비아어의 음역인 것이 해명되고 있다.또, 고대그리스인에 맛시리아로 불리고 있던 지중해의 항구도시 마르세유가 「麻里昔里那」의 한자 지명으로 나타나고 있는 등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소재지도는 중국보다 뒤쳐 진 것이지만, 지도의 인도 以西지역에 관한한 아라비아인이 제작한 지도에 의거 한 진취성을 보여주고 있다.이 지도의 좌측 3 분의 1의 범위에 해당하는 중세 이슬람 세력하에 있던 이베리아반도,북부아프리카,서아시아에 있어 지명 표기가 농밀한 것도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역대 중국 왕조 속에서 元왕조 만큼의 광대한 판도를 가진 정권은 없었다.그 때문에 원대에는 서방과의 경제·문화의 교류가 극히 활발했다.그러한 환경 이었기에 원대의 지도들에서 이슬람 지도의 영향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원대의 대표적인 지도인 朱思本의 「輿地圖」를 명대에 증보 개정한 羅洪先의 지도책 「광여도」에 수록된 「서남해이도」에는, 남해의 크고 작은 섬들에 더하여,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 부분까지 그려져 있지만, 그것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제작의 소재지도의 한 축인 이택민의 「성교광피도」로부터 얻어진 결과이며, 본광사본이 그 부분의 지형과 공통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 덧붙여 용곡대본에 있어서의 일본,유구에 대해서는, 靑山定雄(아오야마정유우)(1939)가 「이조실록」에 보이는 일본을 방문한 使節 朴敦之가 大內氏家臣에게서 얻어 가지고 돌아간 일본지도와 관련이 있지않나 추정되고 있다.그러나, 海野一隆(우미노일 타카시)(1981)는 연대적으로 보면, 그 가능성은 있다고 해도, 이조실록의 「頗ル詳備」 「細密ニシテ未ダ觀覽シ易カラズ」의 기록에 의하면, 관련부분이 너무도 간략하게 취급되고 있다 하여 의문을 나타나고 있다.새롭게 출현한 본광사본에 대해서도 일본의 지형, 내용에는 별로 현저한 진전은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는 향후의 검토 과제이기도 할 것이다.조선으로부터 일본에의 중계지로서 관계가 깊었던 대마도와 壹岐의 표현이, 여타 지도와 비교해도  불완전하고 진전이 적은 이유도 설명이 필요하다 하겠다.


 또, 용곡대본에 대해서는, 그 지도에 그려진 일본 열도가 남북 방향의 특이한 표현이 되고 있는 것부터, 위지 왜인전의 邪馬台國 기록과 관련하여 고대 중국인의 일본 방위관에 관한 논거 자료로 삼아 왔다.그러나,  천리도서관본과 본묘사본에서는 일본이 정상적으로 가까운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한층 더 새롭게 출현한 본광사본에서도 일본의 배치는 정상적이다 하는 것으로 용곡대본만이 가지는 특이성에 다름없음이 한층 명백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끝.



blog.daum.net/sabul358/18198435   향고도






조선 이방원이 만든 우리 첫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지도의 의미는?

 


     

‘지도가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지도를 모방한다.’ 지도강국 일본에서 회자되는 지도에 관한 아포리즘이다. 독도를 두고 일본이 수십 년째 자기네 땅이라고 우긴다. 그 근거는 뭘까. 간단히 보자. 1618년 도쿠가와 막부가 일본 어부에게 내준 죽도도해(어업)면허와 1905년 을사조약으로 독도를 정식으로 일본 영토에 편입시켰다고 주장하는 것이 가장 큰 근거다. 반면 우리나라는 중세와 근대 제작된 거의 모든 지도에 독도가 한반도에 속한 영토라고 나온다. ‘현실이 지도를 모방’한 결정적 근거가 된다. 역설적이지만 일본을 이를 무시한다.

지도는 한 국가의 영토를 표시하는 가장 압축적이고 역사적인 자료가 된다. 특히 유럽의 제국 열강 시절엔 수많은 지도가 제작됐다. 자국의 지도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의 야망을 드러낼 아시아로의 침략 자료로 지도를 제작했다. 지도를 따라 아프리카로, 인도로, 중국으로, 일본으로, 한반도로 진출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왕족과 귀족의 독점물이었고, 제한적 소유가 가능했다. 지도에 나온 지리는 국토의 지형지세․토지․인구 및 물산을 파악하여 국정의 기초자료를 마련하려는 의도였다. 간단히 얘기해서 세금을 걷기 위한 기초자료였던 것이다.

지도는 왕족에서 귀족으로, 이어 서민에게로 일반화 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거친다. 초기의 지도는 통치수단으로 왕족이, 이어 제국주의 시대엔 귀족들 중심으로 옮겨졌다가 현대에 들어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단계로 진전되어 왔다. 지도의 역사적 흐름이다. 우리도 예외 아니다.




 * 용곡대본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壹彊理歷代國都之圖).가로 168cm 세로 158.5cm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이 만든 우리나라 첫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전도.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엔 없고 일본에만 보존돼 있다.



우리는 지도에 있어 전형적 후진국이다. 아직 규제가 일부 남아 있지만 이제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단계에 왔다.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계간 <고지도>가 국내 처음으로 지도 전문잡지로 창간됐다. 초대 편집장을 맡은 최선웅씨는 지도를 한 마디로 하면 “그 시점의 역사”라고 말한다. 지도는 당시 상황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한 자료라는 의미다. 지도에 담긴 지리정보, 역사적 내용, 지형지물 등 읽어낼 수 있는 수많은 정보를 기호로, 문자로 표시한다. 정복자들도 침략지에 가면 제일 먼저 보는 것이 그 나라의 지도였다. 어찌 보면 침탈과 식민지의 역사만 겪은 우리의 고지도가 일본이나 유럽 등에 많이 나가 있는 것은 당연한 역사적 귀결일지 모른다.

고지도는 원시시대 벽화부터 시작된다. 벽화에는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그걸 지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읽어낸다.

우리나라에서 그린 첫 세계지도는 일반인들에게 다소 생소하지만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다. 태종 이방원이 왕의 권위를 세우고 통치하기 위한 자료로 1402년 제작했다.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세계지도이고, 당시로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훌륭한 세계지도라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과 일본의 지도와 조선의 이전 지도를 밑바탕으로 그렸다고 한다. 희망봉을 발견하기 전 아프리카 희망봉이 지도에 나올 정도로 상세하게 그려진 훌륭한 지도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소유하지 않고 있다. 임진왜란 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 일본 류코쿠대학 도선관에 소장돼 있다.

<고지도> 창간호에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특집으로 다뤘다. 우리 민족이 만든 세계 최초의 지도를 강조하고 있다. 책에는 이 지도의 지도사적 의의와 제작과 내용, 현존 사본 현황, 모사본 등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 소개하고 있다.

그는 “우리 민족의 혼이 들었고 우리 선조들의 유산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일본으로부터 반환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 문화재가 명확한데 왜 가만히 있느냐”고 되물었다. 사실 이 지도를 일본인이 강제로 가져갔다는 사실이 입증만 되면 반환운동을 명확히 벌일 수 있지만, 만에 하나 지도 소유자가 국제 경매를 통해 구매해서 가져갔다면 소유권을 주장하기 힘들어진다. 하지만 현재는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다. 언제, 어떻게 일본에 건너갔는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환운동을 벌이면 소유관계가 명확히 들어날 수 있다고 최씨는 주장한다.

<고지도>2호도 벌써 기획은 끝냈다. 원고를 받고 있다. 2호 특집은 ‘천하도’. 조선 후기에 제작된 작자 미상의 세계지도다. 기존 지도와는 조금 다른 일반인들이 많이 쓰던 지도다. 지리적 정보를 담은 내용보다는 대부분 중국 고대 지리서인 <山海經(산해경)>에 나타나는 지명들이다. 국명도 가상적인 상상으로 이뤄졌다. 사람이 죽지 않는 나라라고 하는 불사국(不死國), 머리가 세 개 달려 있다는 삼수국(三首國), 그리고 삼신국(三身國) 등이 나온다. 천하도의 내용은 대체로 중국 고대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으나, 중국․일본 등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세계지도다. 일반인이 쓰던 지도였으니 개인소장본도 많고 규장각도서와 국립중앙도서관, 영국 대영박물관 등에도 소장돼 있다.


국내 처음으로 지도 전문잡지로 창간된 계간지 의 표지.

국내 처음으로 지도 전문잡지로 창간된 계간지 <고지도>의 표지.



최 씨는 창간호를 내면서 <고지도>라는 제한적이고 전문적 제호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했다. 첫 마디가 “그건 <월간산>과 마찬가지다”라고 하며 웃었다. 하지만 소재는 무궁무진하다고 덧붙였다.

“고지도는 규장각에 6,000점, 국립중앙박물관에 5,000점 등 국내에만 소장돼 있는 게 약 2만 여점 가량 됩니다. 앞으로 소개할 자료도 무궁무진합니다. 고지도뿐만 아니라 고지도와 얽힌 스토리․사람․지명까지 소개하면 더욱 풍부한 계간지가 될 것입니다. 면수가 100면 내외로 제한돼 있지만 앞으로 산뜻한 기획과 더불어 더욱 볼거리 있고 안정되고 좋은 잡지를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고 포부를 밝혔다.

사실 우리나라는 지도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매우 낮은 편이다. 더욱이 고지도에 대한 연구는 더욱 미약하다. 고지도 연구하는 교수와 전문가를 전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다. 잡지 <고지도>를 통해 고지도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대중적 인지도를 얻을 생각이다.

초대 편집장 최씨는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고지도 전문잡지를 창간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의외의 상황이 발단이 됐다. 한국고지도연구학회에 같은 회원인 고지도․고서․유물 유통회사를 운영하는 티메가코리아(TMECCA KOREA) 김태민 회장과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지난 춘계 학술대회에서 마주쳤다. 대뜸 김 회장이 “<고지도> 잡지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반신반의하며 “경기나 광고 등 여러 상황이 좋지 않은데 가능하겠느냐”며 대꾸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이미 결심이 굳은 듯했다. 유럽과 서구를 상대로 지도와 고서 유통사업을 계속 해왔으니, 이에 대한 판단이 서 있었다. 유럽에서는 지도전문샵이나 뉴스레터 등이 활발하게 성업 중인 사실을 이미 본 것이었다. 그러면서 최씨에게 “광고도 자신 있다”고 했다. 최씨는 “그러면 한 번 해보자”며 기획서를 심사숙고 작성해서 전달했다.

창간호는 1,500부 발간했다. 두께는 100페이지 내외로 하기로 했다. 기사는 외국 업체를 겨냥해서 내용마다 영문을 따로 덧붙여 실었다. 한국고지도연구학회와 지리학회 등 전문가를 중심으로 일단 배포했다. 대중 독자반응은 살피고 있는 중이다. 차츰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현재까지 광고는 주로 외국계 지도 관련업종이 주류를 이룬다.

“1차 목표는 정기독자 500부와 시중판매 500부 정도로, 많이 잡지 않았습니다. 외국 고지도나 고서관련 딜러들 반응이 좋습니다. 우리 <고지도> 창간이 소프트랜딩 한 것 같습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인 고지도에 관해서도 일반의 관심이 확대되는 계기가 됐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물론 그러면 우리 잡지에 대한 인식도 높아지고 반응도 덩달아 좋아지겠지요.”



blogs.chosun.com/pichy91/2014/11/03/%EC%A1%B0%EC%84%A0...   조선미디어 기자블







혼일강리역대국지도 VS 칸티노지도 | 상식마당

재똥이 2012.08.07 17:20



혼일강리역대국지도 VS 칸티노지도                

 

제작한 나라에는 없는 현존 최고의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jpg

 


혼일강리역대국지도 VS 칸티노지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현존하는 세계지도는 1402년(태종 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이고, 포르투갈 최고의 현존하는 세계지도는 칸티노지도(Cantino Planisphere)이다.

그러나 이 두 지도는 공교롭게도 자국에는 없고 제3국에만 존재한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일본 교토(京都)의 류코쿠대학(龍谷大學) 도서관에, 칸티노지도는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도시 모데나시(Modena) 에스텐세(Estense)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크기가 가로 168cm 세로 158.5cm이고, 비단에 그려진 채색본으로, 지도 상단에는 우측에서 좌측으로 자간을 벌려 지도 제목이 커다랗게 차지하고, 그 밑으로는 종서로 지도 제목에 부합하는 중국 역대 제왕의 국도(國都)와 원나라의 행정부 소재지가 나열돼 있다.

지도 중앙부에는 거대한 중국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 동쪽에 조선이 위치하며, 그 아래쪽으로 일본이 조그맣게 그것도 방위가 틀어져 그려져 있다.

중국 대륙 서쪽으로는 아라비아 반도라 여겨지는 돌출된 서아시아와 마치 혀 모양으로 늘어진 아프리카와 유럽이 대단히 불완전한 형태로 압축되어 표현되어 있다.

지도 하단에는 이 지도의 제작 경위를 밝힌 권근(權近)의 발문이 종서로 적혀 있는데, 그의 저서 양촌집(陽村集)에도 나와 있는 이 발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에서 제작된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와 중국 역대 국도의 변천을 나타낸 천태승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를 합쳐 하나로 만들고, 거기에 조선과 일본을 그려 넣어 건문(建文) 4년(1402년)에 완성한 것이고, 조선의 중신 김사형(金士衡)과 이무(李茂)의 명에 따라 이회(李)가 두 지도를 편집하고 조선과 일본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일본 류코쿠대학에 있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진본은 아니고 16세기에 모사한 것이며, 이 지도가 일본에 전해진 경위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본의 역사학자 오다 다케오(織田茂雄)에 따르면 메이지(明治) 시대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이라 한다.

 

   1988년에 일본 큐슈 시마바라시(島原市) 혼코지(本光寺)에서 이와 유사한 지도가 발견되었는데, 지도 제목 끝 부분이 ‘~之圖’가 아니라 ‘~地圖’로 되어 있는 것만 다르고, 지도 내용도 거의 같고, 제목 밑의 주기나 권근의 발문도 그대로인데, 지명의 가감삭제가 다소 다르다고 한다.

이밖에 일본에는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쿠마모토(熊本)의 혼묘지(本妙寺)에 헌납한 대명국지도(大明國地圖)와 천리대(天理大) 도서관에 있는 대명국도(大明國圖)가 이 지도와 같은 계통의 지도로 본다. 다만 이 두 지도는 제목과 권근의 발문이 없으며, 내용도 바뀐 곳이 많다. 

 


 

                            칸티노지도.jpg   

             ▲ 일본 류코쿠 대학에 소장되어 있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이탈리아

                  모데나시 에스텐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칸티노지도.

 

   현재 우리나라에는 고려대 인촌기념관(仁村紀念館)에 이와 비슷한 지도가 소장되어 있으나 지도 제목이 혼일역대국도강리도(混一歷代國都疆理圖)로 되어 제목이 약간 다르고, 1980년대에 일본으로부터 구입해 온 것이라 한다.

이밖에 류코쿠대학 소장본을 고 이찬(李澯) 선생이 사람을 시켜 모사해온 것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돼 있다. 하여튼 이 지도는 중국의 전통적인 국토 전역과 서방세계를 자세하게 그린 이슬람지도, 거기에 조선8도도가 합쳐진 것으로, 17세기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가 제작되기까지는 동양에 있어 가장 빼어난 세계지도라 할 수 있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인 칸티노지도는 15세기 대항해 전성기 때 포르투갈에서 제작된 세계지도를 훔치기 위해 이탈리아의 페라라 공작(Duke of Ferrara)이 밀파한 알베르토 칸티노(Alberto Cantino)의 이름을 딴 지도다. 말 장사를 하던 칸티노는 페라라 공작의 밀명을 받고 포르투갈에 잠입하여 왕실 지도사를 매수하여 1502년 9월 중순에서 10월 중순까지 약 1개월간 세계지도를 몰래 모사하였고,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를 주도하면서 항해를 위한 해도를 제작하였는데, 모든 지도는 비밀히 취급되고 왕실에 엄중히 보관하고 있었으나 1755년 수도 리스본을 덮친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왕실에 비장되었던 지도가 모두 불타고 말았다.

한편 이탈리아로 가져간 칸티노지도는 페라라에서 모데나로 옮겨져 1859년까지는 모데나의 에스테가 궁전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그해 시민폭동이 일어나자 지도가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9년 뒤인 1868년 에스텐세 도서관장인 보니가 시내를 지나다가 정육점의 뒷벽 가리개로 쓰고 있는 이 지도를 우연찮게 발견하여 오늘에 전해지게 되었다.

 

   최근 이 지도를 다룬 <世界地圖의 誕生>이란 책이 일본에서 출간되었는데, 저자 오지 도시아키(地利明)는 이 지도가 전하는 다채로운 메시지를 사상성, 예술성, 실용성, 과학성의 네 가지 특질로 그 의의를 풀이하고 있다.

이 지도의 크기는 가로 220cm, 세로 105cm이고, 지도 좌측 아래쪽에 ‘인디아스의 여러 지방에서 근년 발견된 섬들의 항해를 위한 해도’라고 써 있어 당시 포르투갈이 파악하고 있던 인도를 향한 항해지도로 보고 있다. 지도 중앙부는 유럽과 아프리카가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고, 그 동쪽으로 인도와 인도양의 섬들이 묘사되어 있으나 코끼리 코 모양의 인도지나 반도가 과장되게 그려져 있고, 그 동쪽은 아예 밋밋하게 생략되어 있다.

 

서쪽으로는 중앙아메리카의 섬들과 남미의 일부만이 묘사되어 있으나 항해에 필요한 컴퍼스 로즈(compass rose)가 도면 곳곳을 장식하고 그로부터 방위선이 사방으로 뻗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꼭 100년 간격으로 제작된 귀중한 이 두 지도는 정작 제작한 나라에는 남아있지 않고 제3국에만 존재한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일지는 모르겠지만,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는 최고의 세계지도로서 지도사상 걸작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모사본이 일본에만 여러 본 남아있다는 것은 역사의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 최선웅 한국산악회 부회장·매핑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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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610주년 기념 학술대회


일본 류코쿠 대학 소장본을 기초로 복원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이미지.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 국립중앙도서관(관장 심장섭)은 1402년 제작된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610주년을 기념해 국제학술대회를 연다고 24일 밝혔다.

오는 30일 오후 1시 서초동 본관 5층 지도자료실 세미나실에서 열리는 이 학술대회에서 한·중·일의 연구자 3명이 주제논문을 발표한다.

중국과학원 자연과학사연구소 왕치앤진(汪前進) 연구원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대명혼일도(大明混一圖) 비교' 논문을 발표한다.

왕 연구원은 비슷한 시기에 한국과 중국에서 제작된 두 지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히고, 14세기 아프리카와 유럽까지 포괄했던 동아시아의 세계관과 세계지도의 제작 수준을 논할 예정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소장처인 일본 류코쿠(龍谷)대학 오카다 요시히로(岡田至弘) 교수는 이 지도에 수록된 5천여곳 지명의 복원에 참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디지털 보존'을 발표한다.

오상학 제주대 지리교육과 교수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담론의 비판적 고찰'문을 발표한다. 이어 이상태 한국고지도연구학회장의 사회로 김기혁 부산대 교수, 배우성 서울시립대 교수, 양보경 성신여대 교수 등 3명의 전문가가 토론을 벌인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조선 태종 2년에 만든 세로 148㎝, 가로 164㎝의 대형 세계지도로 아시아·유럽·아프리카를 포함하는 구대륙 지도이다. 현재 남아 있는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지도이다.

지도 하단에 권근(權近)이 쓴 발문과 '양촌집(陽村集)' 제22권 '역대제왕혼일강리도지(歷代帝王混一疆理圖誌)'에 의하면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와 천태승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를 중국에서 들여와 우리나라와 일본을 추가해 새로 편집한 지도이다.

원본은 없고 사본이 류코쿠대학 도서관 등에 있다. 임진왜란 전후나 일제 강점기에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ckchung@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2/04/24 11:11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