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3. 19:36ㆍ詩
이색 (영숙 穎叔) [李穡]
원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외래사상인 주자 성리학을 바탕으로 정치사상을 전개했던 인물이다. 신흥유신으로서 현실개혁의 뜻을 가진 그의 정치적 출발은 매우 순조로웠다. 1365년 신돈이 등장하고 개혁정치가 본격화되면서 그는 제도 개혁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마저 죽자 그의 정치활동은 침체기를 맞았다.
1388년 위화도회군이 일어났을 때, 그는 이를 왕의 명령을 거역한 행위로 보고 그 주체세력이나 동조세력에 반감을 가졌다. 이런 입장 탓에 투옥과 유배를 당하며 고려 말기의 정치권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는 조선왕조가 세워질 때 당을 만들어 난을 꾀했다고 지목되어 우현보 등 56명과 함께 바닷가 오지로 유배되었다. 1396년 여주 신륵사에 가는 도중에 죽었다.
이색 영정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아버지는 찬성사 곡(穀)이다.
15세에 부음(父陰)으로 별장(別將)의 직을 얻고,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가 되었다. 1348년(충목왕 4) 아버지가 원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가 되자 조관(朝官)의 아들로 원나라 국자감의 생원이 되었다. 이색은 이제현(李齊賢)을 좌주(座主)로 하여 주자성리학을 익혔고, 이 시기 원의 국립학교인 국자감에서 수학하여 주자성리학의 요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1352년(공민왕 1) 아버지가 죽자 귀국해 토지문제·왜구대책·학교교육론·이단배척 등의 상소를 올렸다.
1353년 고려의 과거에 합격했으며, 이듬해 정동행성(征東行省) 향시(鄕試)에 1등으로 합격하고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에 가 회시(會試)·전시(殿試)에 합격하여 응봉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應奉翰林文字承事郞同知制誥) 겸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을 지냈다. 이어 고려에 돌아와 전리정랑(典理正郞)·내서사인(內書舍人)을 지냈다. 1355년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본격화되자 왕의 측근세력으로 활약하면서 〈시정8사 時政八事〉를 올렸는데 그중 하나가 정방(政房)의 혁파였다.
이 일로 이부시랑 겸 병부시랑에 임명되어 문무(文武)의 전선(銓選)을 장악하게 되었다.
신흥유신으로서 현실개혁의 뜻을 가진 이색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반영시키는 가운데 순조롭게 출세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색의 이러한 정치적 성장은 오히려 현실개혁의지를 약화시키고, 자신과 관계를 맺은 부류와 타협하게 되었다. 1357년 전녹생(田祿生)·정추(鄭樞) 등과 더불어 염철별감(鹽鐵別監)의 폐지를 논했다.
새로이 별감을 파견하면 이배(吏輩)들이 농간을 부릴 것이며 별감은 세포(稅布)를 많이 거두어서 왕의 총애를 받으려 하기 때문에, 일반 민은 소금을 받지도 못하고 포만 납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색은 왕이 재추(宰樞)와 대성관리(臺省官吏)를 모은 가운데 별감 파견의 가부를 물으려 하자 병을 칭하여 피했다. 이는 염제신과 같은 권세가가 별감 파견을 주장한 것에 대한 이색의 타협으로서, 다른 간관(諫官)이 이 일로 좌천된 것과 달리 이색은 중임되었다.
또한 1362년 성균시의 합격자를 뽑던 중 왕이 환관(宦官)을 보내어 벽승(嬖僧)의 사패(賜牌)에 어보(御寶)를 찍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색은 처음에 신하들과 의논할 일이라 하여 반대했지만 이내 왕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찍었다. 사패는 국왕이 충성의 대가로 공신이나 기타 사원에게 설정해주는 토지의 증빙문서였는데, 당시에는 권세가의 토지확대방법으로 이용되어 토지겸병과 수취체계 중첩화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이색은 국왕의 힘에 의해서 자신의 뜻을 계속 관철시키지 못하고 이를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1359, 1361년 홍건족이 침입했을 때 왕을 시종하여 호종공신 1등에 책봉되어 전(田) 100결(結), 노비 20구(口)를 받았다. 또한 아버지에게서 받은 토지·노비와 관직을 통해 얻은 수조지, 그리고 공신전으로 중앙정계에 정치적 지위에 상응하는 경제적 기반도 마련하고 있었다.
1365년 신돈이 등장하고 개혁정치가 본격화되면서 그는 교육·과거 제도 개혁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367년 성균관이 중영(重營)될 때 이색은 대사성이 되어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과 더불어 정주성리(程朱性理)의 학문을 부흥시키고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유신들을 길러냈다. 1371년 신돈이 제거되고 이어 공민왕이 죽자 그의 정치활동은 침체기를 맞았다. 그후 1375년(우왕 1)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판삼사사를 역임했다. 1386년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해에 판문하부사 조민수(曺敏修)의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는데 동지공거 염흥방(廉興邦)이 그를 합격시킬 것을 청했으나 거절했다. 그는 1377년 장경(藏經)을 인성(印成)하고, 1387년 서보통탑(西普通塔)의 탑기(塔記)를 짓는 등 주자성리학자이면서도 불교를 선호하며 긍정하고 있었다.
1388년 위화도회군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고려왕조의 존립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 개혁정치를 희구한 이색은 1389년(공양왕 1) 도평의사사에서의 사전혁파(私田革罷) 논의 때 이숭인·변안렬(邊安烈) 등과 같이 옛 법은 경솔히 고칠 수 없다고 반대했다. 불법적인 대토지소유에 반대하고 있었지만 사전개혁과 같은 급격한 전제개혁에도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위화도회군을 군령을 위반하고 왕의 명령을 거역한 행위로 이해했으므로 그 주체세력이나 동조세력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위화도회군의 중심인물과 동조세력은 당대의 대유(大儒)인 이색과 같은 반대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오사충(吳思忠)·조박(趙璞)·정도전(鄭道傳)의 상소로 인하여 그는 장단으로, 아들 종학(種學)은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후 김저(金佇)의 옥(獄)과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 노선을 같이하는 이숭인·변안렬·우현보(禹玄寶) 등과 더불어 투옥되거나, 금주·여흥 등지로 유배당하는 등 고려 말기의 정치권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색은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고려말에 결당모란(結黨謀亂)한 자로 지목되어 우현보 등 56명과 더불어 논죄되어, 직첩을 빼앗기고 서인(庶人)이 되어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장흥에서 석방된 그는 3년간 한산에서 지내고 1394년(태조 3) 오대산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서울로 돌아왔다. 1396년 여주 신륵사(神勒寺)에 가는 도중에 죽었다. 이색은 원나라에서의 유학과 이제현을 통하여 이 시기 선진적인 외래사상인 주자 성리학을 수용했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 말기의 사회혼란에 대처하면서 정치사상을 전개했다.
그는 원의 주자학을 받아들였으므로 그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이(理)·기(氣)·태극(太極)과 같은 주자학의 핵심개념을 사용하여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했고, 주자학의 수양론인 성학론(聖學論)을 전개했다. 그러나 주자학에서 말하는 수양론과 달리 죽음과 인간적 고뇌와 같은 초인간적·종교적 문제는 여전히 불교에 의존했다. 또한 송대의 혈연·의리·도덕·윤리 등을 말하는 도통론(道通論)을 전개한 것이 아니고 원의 형세론적 도통론을 전개했다. 즉 그의 주자성리학의 발원지인 원의 영향과 불교의 영향 속에서 송대의 주자학과 구분되는 정치사상을 전개했다.
저서로 〈목은유고〉·〈목은시고〉 등이 있다. 장단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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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李穡) ♧고려시대[918~1392]♧♧◀중국:요,금(金),
1328년(충숙왕 15)∼1396(태조 5).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문인.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찬성사이곡(李穀)이며 이제현(李齊賢)의 문인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진사(進士)가 되고, 1348년(충목왕 4)원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生員)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 아버지 상을 당해 귀국하였다.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해 서장관(書狀官)이 되었다. 원나라에 가서 1354년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해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냈다. 귀국해 전리정랑 겸 사관편수관 지제교 겸예문응교(典理正郎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藝文應敎)·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다음 해 귀국해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병부낭중(吏部侍郎翰林直學士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兵部郎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해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다. 1357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어 추밀원 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지공부사(知工部事)·지예부사(知禮部事) 등을 지내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해 1등공신이 되었다. 그 뒤 좌승선(左承宣)·지병부사(知兵部事)·우대언(右代言)·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보문각(寶文閣)과 예관(禮官)의 대제학(大提學) 및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등을 지냈다. 1367년대사성(大司成)이 되어 국학의 중영(重營)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해 신유학(주자학·정주학·성리학의 이칭)의 보급과 발전에 공헌하였다. 1373년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知春秋館事兼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375년(우왕 1) 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했고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禑王)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昌王)을 옹립, 즉위하게 하였다.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해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 해에 이성계 일파가 세력을 잡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되었다. 이듬 해 함창(咸昌)으로 옮겨졌다가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는데 수재(水災)가 발생해 함창으로 다시 옮겨 안치(安置)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연루되어 금주(衿州: 현재 서울시 금천구 시흥)로 추방되었다가 여흥(驪興: 현재 경기도 여주)·장흥(長興)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죽었다. 그는 원·명 교체기 때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 말 신유학(성리학)이 수용되고 척불론(斥佛論)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을 견지하여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 때의 중흥을 주장했으며,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으로 불교의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 여부로 판단하는 인간 중심, 즉 성인·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 유교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그의 문하에서 고려왕조에 충절을 지킨 명사(名士)와 조선왕조 창업에 공헌한 사대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이숭인(李崇仁) 등 제자들은 고려왕조에 충절을 다하였으며, 정도전(鄭道傳)·하륜(河崙)·윤소종(尹紹宗)·권근(權近) 등 제자들은 조선왕조 창업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색-정몽주·길재의 학문을 계승한 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은 조선왕조 초기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저서에는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詩藁)』 등이 있다.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韓山: 현재 충청남도 서천)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 현재 경상북도 영덕)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서 제향(祭享)된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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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에 사신 떠나는 정몽주(鄭夢周 字는 達可)를 보내며[東方辭] 이색(李穡)
저 동방에 임금 있어 / 詹東方之有君兮
태고로부터 자존했네 / 肇大始以自尊也
그 사람들이 의와 인을 숭상하고 / 其人佩義而服仁兮
기는 세차고 말은 온순했었네 / 厥氣勁而詞溫也
그러나 그 뒤 세도가 변천하매 / 越世道之升降兮
강렬만을 숭상하여 / 尙剛烈而專門也
걸핏하면 목숨 버림이 / 其輕生而敢死兮
북궁유(北宮黝)로도 못 비길지라 / 何北宮黝之足言也
주말 전국을 본뜬 풍속 / 倣周季之戰國兮
오싹 소름이 끼치고 간담을 서늘케 하네 / 凜凜乎使人毛竪而驚魂也
던져 주는 밥 먹지 않고, 눈 흘김도 원수를 갚아 / 嗟來不食兮睚眦必報
아비와 형도 모르거니 자식ㆍ손자 아랑곳할까 / 上忘父兄兮下忘後昆也
하물며 처자와 하인들을 / 矧妻孥與輿臺兮
보기를 개돼지만도 못하고 / 視之不啻犬豚也
이 몸이 시어져도 / 蓋此身兮澌盡
이름만은 남긴다네 / 羌名譽兮求存也
선비는 죽일지언정 / 士可殺
욕되게는 못할것이요 / 不可辱兮
의관으로 욕 다함은 나라의 치욕이로세 / 辱衣冠痛在國也
이렇듯 백성을 가다듬어 풍습을 길렀으니 / 劘于民而陶俗兮
그들로선 그럴듯한 일, 무엇을 책할쏘냐. / 亦其宜而何責也
사물이 극하면 반드시 변하는 법 / 極而罔有不變兮
예양의 풍속이 혹 금시 이뤄질 듯 / 揖讓或在於旦夕也
중국의 의관은 몇 번이나 제도가 바뀌었으나 / 中華衣冠之幾更制兮
우리는 아직 옛날 그대로이네 / 我迺猶夫古昔也
천하 만국이 모두 서로 교통하건만 / 舟車所至之必通兮
우리는 아직 문턱을 넘은 일도 없네 / 我迺足不踰閾也
해 뜨는 곳의 천자가 / 日出處之天子兮
부상 땅에 터전을 잡았도다 / 奄宅扶桑之域也
원래 만물이 자라고 큼은 / 惟萬物之生育兮
동풍이 따스하게 불어 주는 때문이요 / 迺谷風之習習也
온 누리를 환하게 내리비춤은 / 惟下土之照臨兮
저 햇님이 혁혁히 떠 있음이라 / 迺陽烏之赫赫也
이 두 가지가 나오는 고장은 / 之二者之所出兮
과연 천하 무적의 나라이건만 / 信天下之無敵也
어쩌다 군흉들이 틈타 내달아 / 胡群兇之竊發兮
지금껏 저렇게 창궐하였는가 / 至于今其猖獗也
악명을 천하에 뿌리고 죄가 이미 극도에 이르니 / 播惡名於天下而旣稔兮
지사ㆍ인인들이 모두 동방을 위하여 애석히 여기네 / 志士仁人莫不爲東方惜也
이는 천하의 전쟁을 불러 일으킬 징조 / 是將動天下之兵端兮
의심 없으니 점칠 것도 없네 / 不疑又何卜也
볼과 턱뼈는 서로 의지하는 것 / 輔車相依兮
우와 괵이 거울이요 / 虞虢是監
초 나라가 잔나비를 잃으면 화가 온 수풀에 미치는 법 / 楚國亡猿兮禍林木也
교빙을 하면서도 진정으로 하잖으면 / 旣交聘兮或不以情
위에 계신 신명이 정직히 감찰하시리 / 上有神明兮司正直也
이제 그 권이 그대에게 있으니 / 今其權兮有所在
그대는 음식을 부디 삼가고 / 子其愼兮飮食也
일상 생활에 생각을 줄이세 / 少思慮兮興居
건강을 보전하여 그 직책을 다하소 / 保厥躬兮供厥職也
서투른 나의 글이 필력이 쇠했으니 / 謇予詞兮筆力衰
말은 끝났어도 뜻은 그지없사외다 / 言有盡兮意無極也
선수집 서(選粹集序) -이색(李穡)
시대순으로 글월을 모으는 것은 공자의 법이다. 그러므로 상고(上古)의 서는 명목을 우서(虞書)ㆍ하서(夏書)ㆍ상서(尙書)ㆍ주서(周書)라 하였다. 또한 체(體)로 시를 모으는 것도 역시 공자의 법이다. 그러므로 제후 나라의 시는 명목을 풍(風)이라 하고, 천자의 서는 아(雅)ㆍ송(頌)이라 하였다. 공자가 요순(堯舜)을 조술(祖述)하고 문왕ㆍ무왕은 헌장(憲章)하여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을 산정하고 정치를 내고 성정(性情)을 바르게 하여, 풍속을 한결같이 하고 만세 태평의 근본을 세웠으니, 이른바, “사람이 생긴 이래로 공자보다 더 훌륭한 이는 없다.”는 말이 어찌 미덥지 아니하랴. 중간에 진(秦)의 화재에 타버리고 겨우 공자 사당 벽에서 나왔으나, 시ㆍ서의 도가 없어져 흩어지고 어지러워졌다가 당(唐)에 이르러, 한유(韓愈)가 홀로 공자를 존숭할 줄을 알았으므로 문장이 드디어 변하였지만, 원도(原道) 한 편으로써 족히 그 득실을 볼 수 있다. 송(宋)의 세대에 이르러 한유를 숭배하여 고문(古文)을 배운 자는 구양수(歐陽脩) 등 몇 사람일 따름이요, 공ㆍ맹의 학을 강명하여 노자ㆍ석가를 배척하고, 만세를 깨우친 것에 있어서는 오로지 주(周)ㆍ정(程)의 공이었다. 송 나라 사직(社稷)이 없어지자 그 설이 북방으로 흘러 들어가서, 노재(魯齋) 허(許) 선생이 그 학을 써서 원 세조(元世祖)를 도와 중통(中統) 지원(至元)의 정치가 모두 이에서 나왔으니, 아, 거룩하다.
내 친구 김경숙(金敬叔)이 개연히 탄식하며 말하기를, “문중자(文仲子)가 경(經)을 속찬하여 《논어(論語)》를 체 받았으니, 거의 참람하고 분에 넘치는 짓이나 논하는 자가 또한 일찍이 용서를 하였다. 이로써 나는 천박하고 고루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옛날에 들은 바를 편집하여 □ 지금에 이르렀다. 그리고 무릇 몇 명의 시문(詩文)이 풍화(風化)와 성정(性情)에 관한 것이 있는 몇 편을 정리하여 몇 권을 만들었다.” 하였고, 아무 벼슬을 지낸 아무개가 또 와서 말하기를, “김경숙이 세상에 나서 그 뜻을 실행하지 못하고 늙어 버렸으니, 나로서도 역시 슬프게 여기는 바다. 그가 다행히 전장(典章)을 널리 구하여 모아서 한 기록을 만들었는데, 선생께서 이름을 《주관육익(周官六翼)》이라 지어주었고, 또 고금의 시문 몇 권을 모았는데, 선생께서 이름을 《선수집(選粹集)》으로 하라 하였으니, 선(選)은 소명태자(昭明太子)의 《문선(文選)》에서 취하였고, 수(粹)는 요현(姚鉉)의 당문수(唐文粹)에서 취한 것이니 그 의미는 그 정수를 뽑았다는 것이다. 선(選)하면 정수하게 되고 정수하면 곧 선한 것이니, 그 작자를 탄미(嘆美)한 까닭이요, 그 배우는 자를 흠동(歆動)케 하자는 것이다. 원컨대 선생은 인해서 글 한 편을 주어 편 머리에 싣게 하여 달라.” 하였다.
나는 사양하다 못해서 자신의 일을 들어서 말하기를, “이색(李穡)이 젊었을 적에 중국에 놀며 진신(搢紳)선생의 말을 들었는데, 문은 한(漢)을 법받고 시는 당(唐)을 법받아야 한다.” 하였는데, 그 까닭을 몰랐었다. 한림(翰林)에 들어가게 되자 천하가 너무 어지럽고 어머니도 늙으셨기에, 직을 사면하고 돌아와서 그릇되게 공민왕의 지우를 얻어 관에 봉직하여 허물이 없기를 힘쓰고 있기 때문에, 능히 문학에 전심하지 못하고 한두 가지의 소득조차 다 소멸되어 거의 없어졌다. 그런데 지금 경숙의 수립(樹立)한 것이 이와 같이 우뚝함을 보니, 어찌 이마에 땀이 흐르지 아니하랴. 비록 그러나 이 책이 전하면 나의 서문이 전해질 것을 알 수 있고, 서문이 전해지면 이름이 전하는 것이니, 내가 어찌 사양하겠으며 다른 날에 중국의 문장을 상고하여 한 책을 만들어내는 자가, 공자의 노서(魯誓)ㆍ노송(魯頌)ㆍ상송(商頌)의 예를 본받아서, 혹시 한두 편을 취택하여 편의 말미에라도 두게 되면 그야말로 큰 행이니, 내가 어찌 사양하겠는가.
選粹集序
類書以代。孔氏法也。故上古之書目曰。虞書,夏書,商書,周書。類詩以體。亦孔氏法也。故侯國之詩目曰風。天子之詩曰雅曰頌。孔氏祖述堯舜。憲章文武。刪詩書。定禮樂。出政治。正性情。以一風俗。以立萬世大平之本。所謂生民以來。未有盛於夫子者。詎不信然。中灰於秦。僅出孔壁。詩書道缺。泯泯棼棼。至于唐。韓愈氏獨知尊孔氏。文章遂變。然於原道一篇。足以見其得失矣。宋之世。宗韓氏學古文者。歐公數人而已。至於講明鄒魯之學。黜二氏。詔萬世。周程之功也。宋社旣屋。其說北流。魯齊許先生用其學。相世祖。中統至元之治。胥此焉出。嗚呼。盛哉。吾友金敬叔慨然嘆曰。文中子續經法論語。幾於僭越。論者亦甞末减。是以不揆淺陋。編輯舊聞。以贅▣▣▣▣▣▣▣至于今。凡若干家詩文。有關於風化性情者若干篇。釐爲若干卷。某官某又來曰。金敬叔生。不得行其志。老且至矣。雖吾亦爲之悲焉。幸而博求典章。叢爲一錄。先生名之曰。周官六翼。又集古今詩文若干卷。先生又名之曰。選粹集。選取昭明。粹取姚妶。其義則選其粹也。選則粹。粹則選。所以嘆美其作者也。所以歆動其學者也。願先生仍賜一言。冠諸篇端。予不獲讓。自敍之曰。穡少也。游中原。聞搢紳先生之論曰。文法漢詩法唐。未知其所以也。旣入翰林。天下大亂。母且老。掛冠而歸。誤爲玄陵所知。奉職救過。不能專志。所得一二。亦皆消磨殆盡。今觀敬叔樹立。卓卓如此。寧不泚顙。雖然。是集也傳。則予序之傳也可知矣。序之傳也。名之傳也。予何讓焉。異日冊中國文章。著爲一書者。法孔氏魯誓,費誓,魯頌,商頌之例。或取一二篇。置之篇末。則其幸大矣。予何讓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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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 괴시리 마을과 목은 이색(李穡), 기념관 방문
영해 터미널에 내리니 영해시장이 바로 있다.
시장 통로를 축 따라가면 로터리가 나오는 곳에 괴시리 마을이 있다
괴시리 마을보다는 전통마을이라고 묻는게 지역주민에게 물으면 더 잘 안다.
괴시마을(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은
경북 민속자료 제75호, 전통가옥이 30여동이 있고, 1995.03.10 지정되었다고 한다.
괴시리 전통 마을은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松川) 주위에 늪이 많고 마을 북쪽에 호지(濠池)가 있어 호지촌이라 부르다가 고려말 목은 이색 선생이(1328~1396)이 문장으로써 원 나라에 이름을 떨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구양박사(歐陽博士) 구양현(歐陽玄)의 괴시 마을과 자신이 태어난 효지촌의 시야가 넓고 아름다운 풍경이 비슷해 괴시(槐市)라 고쳐 이름지었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기름진 영해평야가 펄쳐져 있으며, 남동쪽의 망일봉(望日峰)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세가 마을을 입(入)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이러한 자연지형에 맞추어 대부분의 가옥들이 서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고려말에 함창 김씨(咸昌 金氏)가 마을에 처음 입주하였고
그후 조선 명종(明宗:1545~1567)년간에는 수안 김씨(邃安 金氏)와 영해 신씨(寧海 申氏),
인조 8년(1630)에는 영양 남씨(英陽 南氏)가 시거(始居)하였다.
그후 3성은 점차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지금은 영양 남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괴시 마을은 경북 동해안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전통 건축이 매우 잘 보존되고 있으며
문화와 예절이 훌륭하게 전승(轉承)되고 있다.
또한 영양 남씨 괴시파종택(槐市波宗宅:경북 민속자효 제75호)을 비롯하여
여러 지정 문화재와 고가옥 30여호가 밀집되어 있어 조상들의 생활과 멋을 엿볼 수 있는 마을이다.
괴시리마을 길목에서 3은 중 한명인 목은 기념관 안내판을 만났다. 고려 말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3은으로, 3인의 호(號)에 각각 ‘은(隱)’자가 들어 있는 데서 유래한다. 이들은 중국 원(元)나라에서 들어온 성리학을 연구하여 성리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정계에 나가 벼슬도 하였으나 고려가 망하자 끝까지 지조를 지키고 살아 남은 사람들도 후진( 後進)을 육성하여 학통을 계승시켰다. 야은 길재 대신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을 넣기도 한다. 고려말 충신 목은을 만나러 화살표를 따라가니 멀리 홍련암이 보이고 그 위에 정갈하게 가꾸어진 소나무 숲 속에 목은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계단을 올라 기념관 앞에 서 보니 자동문으로 시설이 잘 되어 있는데 내가 방문한 시간이 낮시간대라서 인적이 없어 닫혀 있나하고 뒤돌아 나와서 다리도 쉴겸 기념관앞 정자에 누워서 천장을 보니 나무을 이용해 끼워 맞춘 한옥의 멋이 느껴지는 나무의 정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정자에서 잠시 누워서 귓가에 스치는 바람결에 솔향을 맡았다. 목은의 시를 떠올리려 해도 한 수도 아는 것이 없음에 당혹스럽다. |
옛날 중국까지 이름을 알린 문장가로 성리학의 기초를 확립하고
인간적으로는 이백에 못지 않은 애주가였다는 것이다.
목은 기념관을 관리하고 있는 권영순님은 낯선 여행객에게 차와 물을 권하고 영덕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혼자 근무하는 곳이라 적적할 때도 있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기념관에 근무하고 있어서 정말 좋다고 하신다.
목은 기념관 앞 쪽은 블루로드 3코스 안내판이 있어서 도보 여행객들의 필수 코스가 되고 있다.
권여사님은 아무래도 군청소속 사람일 텐데 이웃 친지처럼 기념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니 도보여행으로 지친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되어 주시고, 목은 기념관을 둘러 싼 멋진 소나무가 나그네를 품어 주는 것 같다.
여행지에서 차를 대접 받고 거기다 병곡까지 고래불 해수욕장까지 올드팝을 들으면서 드라이브를 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 이 지역을 아름다움을 서로 얘기를 나누면서 해안도로를 따라 십리길의 고래불해수욕장을 봐라 보고, 다시 해안도로척산에서 이곳 사람들만 지나다닌다는 괴시리마을로 넘어가는 높은 언덕을 넘어 차가 산으로 올랐다. 멀리 바다가 보였다.
이색의 시 몇 수를 올려 본다.
부벽루 -목은 이색-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잠시 부벽루에 올랐네
성은 텅빈 채로 달 한 조각에 떠 있고,
오래된 조천석 위에 천년의 구름 흐르네
기린아는 떠나간 뒤 돌아오지 않는데
처손은 지금 어느 곳에 노니는가?
돌다리에 기대어 휘파람 부노니
산은 오늘도 풀고 강은 절로 흐르네.
팥죽(목은 이색)
나라 풍속 동지에는 팥죽을 되게 쑤어
푸른 사발 그득 담자 짙은 빛깔 뜨는구나
산꿀을 섞어 타서 후루룩 마시면
삿된 기운 다 씨겨서 뱃속이 든든하리.
고려청자 (목은 이색)
푸르게 빛나는 옥은
푸른 하늘에 비치네.
한번 보는 내 눈조차
맑아지는 것 같아라
물거품 같은 인생이 출몰하는 이 속세에
사문이 점점 쇠하니 눈물 자주 흐르누나
까마득한 바람 먼지는 백발에 불어오고
아득한 황천길은 푸른 산을 둘러 있네
일평생이 참으로 꿈같음은 잘 알거니와
만사가 한가함이 제일임은 누가 알리오
목은 이색기념관~목은 등산로 입구
괴시리에서
괴시(槐市)란 이름은 그 어감이 과히 좋지 않다.그러나 알고보면 홰나무(회화나무)가 있는 마을이란 뜻이니 그런 생각은 지워야할 것 같다. 당초에는 호지(濠池)마을이라 했으나 목은 선생이 중국에서 과거를 볼 당시 시관이었던 구양현(歐陽玄)이 살던 마을과 비슷하다 하여 이름을 괴시마을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목은 선생은 가정(稼亭) 이곡(李穀:한산이씨)선생의 외아들로 이곳 괴시리의 외가(함창 김씨, 외조모는 영양남씨)에서 1328년에 출생했다. 고려조와 원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에 올랐으며, 1361년 홍건적의 침략으로 공민왕이 안동으로 파천할 때 호종하여 1등공신이 되었고,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도로 쫒겨나자 조민수와 함께 창왕을 옹립하고, 수상인 문하시중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이성계 일파를 제어하고 고려를 지키려 하였다. 위화도회군의 중심인물과 동조세력은 당대의 대유(大儒)인 이색과 같은 반대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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