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겨레가 우리나라 천주교회를 세운 간추린 이야기

2016. 3. 9. 00:47



       韓民族 朝鮮天主敎會 創立史 종교사상 / 연구논문

2012.05.21.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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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겨레가 우리나라 천주교회를 세운 간추린 이야기 -

 

卞   基   榮  神 父

韓國天主敎發祥地天眞菴聖


차   례

 

머리말  5


제 1 장 : 배달겨레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와 먼 준비
1. 韓民族의 由來 : 天山 산맥에서부터 槿域 三千里까지 7
2. 天祭敎 民俗信仰 生活時代  8
3. 外來宗敎文化의 收容  9

 

제 2 장 : 하느님을 찾는 배달겨레의 노력과 가까운 준비
 4. 李晬光이 소개한,『天主實義』와 『芝峯類說』은 우리겨레에게
      最初로  天學을 認識하게 하고, 實學 精神을 胎動시켰다. 10
 5. 許筠이 바치던 天主敎 祈禱文 12端과 洪吉童傳 11
 6. 소현세자와 黙菴 李慶相이 데리고 온 중국인 천주교신자들 5명 12
 7. 황해도 서해안과 두만강 주변에 생겼던 天主敎信者들  13
 8. 南京 敎區長 中國人 羅文藻 주교가 高麗 교구장서리 겸임 13
 9. 相異한 시대와 장소에서 한 때 산발적으로 있었던 천주교신자들 14

 

제 3 장 : 曠菴 李檗聖祖의 天學硏究와 實踐 및 敎會創立 活動
 10. 朝鮮天主敎會는 광암 이벽성조와 10代 後半, 20代 初半의 선비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하였다.  15
 11. “朝鮮天主敎會 創立者는  曠菴 李檗.” - 聖 Daveluy 주교 17
 12. “李檗이 조선 信徒會代表로 李承薰을 북경에 파견”-聖 Maubant신부 19
 13. “大聖賢 李檗이 저에게 天主敎를 가르쳐주셨습니다.”- 李承薰 20
 14. “天學 硏究에 탁월한 李檗博士가 李承薰을 北京에”- 金大建 神學生 21
 15. “朝鮮 天主學의 始祖는 李檗이니,” - 朝鮮王朝實錄 22
 16. “李檗은 朝鮮天主敎의 始祖다”- 李晩菜의 闢衛編 23
 17. “北京 天主堂에 가서 祈禱書를 求하고 領洗를 請하게.”- 黃嗣永 帛書 23
 18. “李承薰, 若鏞 3兄弟, 權日身 父子, 等이 李檗을 모시고 앉아서”
       -闢衛編  24


제4장 : 丁若鏞의 文獻에 나타난 天眞菴과 曠菴 李檗聖祖
 19. “聖賢의 學德과 豪傑의 氣魄을 갖춘 李檗”  24
 20. “人間世界에 내려오신 神仙나라의 학(鶴)과 같으신 曠菴 公에게서
       우리는 神의 風采를 보았었도다”  26
 21. 가을을 타고 문득 훌쩍 날아가는(乘秋忽飛去) 鶴처럼, 曠菴 公이 떠난 지
      1주년, 전처럼 붉게 물든 천진암의 가을 단풍을 보러 가서. 26
 22. “天眞菴엔 아직도 李檗의 讀書處가 그저 그대로 있는데.” 27
 23. 正祖 임금이 낸 숙제 답안을 작성해주던 광암공의 문장이 적힌 책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다던 丁若鏞  28
  

제5장 : 曠菴 李檗 聖祖 朝鮮天主敎會 創立
 24. 天眞庵에서 天學을 硏究하고 修道한 曠菴 李檗聖祖의
      朝鮮天主敎會 創立活動 31
 25. 天眞菴의 李檗讀書處와 講學堂은 젊은 선비들의 天學道場이었다. 32
 26. 嚴冬雪寒에도 天眞菴에서 10여일씩 講學會를 열던 젊은 先覺者들 34
 27. 天眞菴에 道友가 衆徒하니, 曠菴公은 聖敎要旨를 下筆하였다.
    - 1837년 丁學術의 李檗傳  35
 28. 嚴冬雪寒 深夜에 廣州山脈을 넘던 李檗聖祖의
    天眞菴 講學會 參席熱誠 - 聖다블뤼   주교의 『朝鮮殉敎史 備忘記』 36
 29. 李檗聖祖께서는 1770년부터 1783년까지 산 속 隱遁處에서
   天學 硏究와 實踐에 專念  39
 30. 韓國天主敎 發祥地 天眞菴의 來歷 41
 31. 洗禮로 天主敎信者가 되지 않고, 天主敎信者라야 洗禮를 받는다.  43
 32. 韓國天主敎會의 創立者들은 平信徒들이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46
 33. 日本은 스페인의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신부가,
      中國은 이태리의 마테오 리치신부가 宣敎  49


제6장 : 天眞菴에서 시작된 朝鮮天主敎會가 首都 서울로 發展

 34. 天眞菴에서 서울 水標洞으로, 明禮坊으로, 馬峴으로, 楊根으로 傳播된
      당시의 朝鮮天主敎會 50


제7장 : 朝鮮天主敎會가 최초로 겪는 乙巳年의 迫害와 殉敎詩
 35. 朝鮮天主敎會 最初迫害인 乙巳迫害: 李檗聖祖 殉敎, 金範禹 譯官 流配 
      52
 36. 제 살과 뼈를 태워 빛이 되어 남을 비추고, 天主께 祭物이 되는
      한 토막의 초와같이(天彛地紀限西東,一炷心香書共火)- 李承薰 53
 37. 權日身과 權哲身의 殉敎  57
 38. 李承薰, 丁若鍾 聖賢들의 殉敎: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솟아도 못 속에 있느니라(月落在天水上池盡) - 李承薰聖賢 殞命詩 59
 39. 曠菴 李檗聖祖의 殉敎 : 은하수 별자리에 둥근달 떠오르듯,
      비단옷 곱게 차려 입고서 하늘나라 가노라.- 李檗聖祖殞命詩  62
 40. 殞命을 앞두고 이벽성조께서 읊으신 聖詩  64
 41. 李檗聖祖 欽慕詩 68 
 42. 1785년에 門中과 家庭의 迫害로 32세에 殉敎하신 李檗聖祖의
     葬禮式에 와서 25세의 丁若鏞선생이 지은 輓詞 71
 43. 韓國天主敎會 創立者 洗者 요한 曠菴 德祖 李檗 聖祖의 人的事項 72
 

제 8장 : 平信徒로서 善意와 熱誠으로 司祭職務까지 隨行하던 朝鮮天主敎會 創立先祖들  
 44. 韓國天主敎會창립선조들이 平信徒들이면서도 善意와 熱誠으로 結成한
       自發的인 臨時準聖職者團의 聖務活動  76
 

제9장 : 韓國平信徒들의 自發的인 司祭 養成
 45. 평신도들로서 임시 준성직자단의 결성과 활동은 사제양성의 첫걸음  81
 46. 김대건, 최양업, 최방지거, 세 소년들 그 이전에도
      조선천주교회가 파견한 신학생들이 마카오와 요동에 있었다. 82 
 47.  李承薰 聖賢의 孫子인 李在誼 토마스(1785~1868)와 丁若鍾 聖賢의 아들 丁夏祥은 김대건(1821~1846), 최양업(1821~1861) 신학생들보다 앞선 국내 선배 大神學生으로서 大品(次副祭品) 직전이었다.  84
 
結 論
 48. 自發的인 眞理探究와 實踐 및 眞理 守護와 證據의 資質을 타고난
      民族精神 86 
 


머리말

 

한뫼들이 솟기 전에 은하수가 흐르기 전에, 하늘나라님의 얼이 한가위겨레 품어,
별지는 샛녘 강산에 선동(仙童)이 빼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부러워 모셨네.
한겨레 한 스승 李檗聖祖, 한겨레 한 스승 李檗聖祖.

 


우리 배달겨레가 하느님을 섬기며 걸어온 길을, 까마득한 저 옛날까지 더듬어 올라가며, 오늘의 우리들 생활 속에서 그 흔적들을 찾아 연구한 先人들의 각종 문헌과 자료들을 모으고 비교하며 종합하여, 좀 더 자세하고 길게 밝혀보는 일은 현재 준비중인, 『韓民族 天主 信仰史』에서 보다 상세히 다룰 것이다.
   한국천주교회의 200여년 歷史를, 韓民族의 先史時代로부터 1萬餘年의 信仰史, 즉 宗敎生活史 안에서 보고 이해하고자 시도하는 것이 이 간추린 글의 意圖이다. 아름다운 꽃봉오리와  꽃잎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러한 꽃을 피운 줄기와 뿌리에도 눈을 돌리자는 것이다. 뿌리와 줄기가 살아 있으면 꽃이야 언제라도 항상 피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주로 2세기 전 曠菴 李檗聖祖께서 韓國天主敎 發祥地 天眞菴 聖地를 本據地로 하여, 10대 후반의 청소년 선비들과 함께 선교사나 성직자없이 우리나라천주교회를 세우기 시작하던 이야기를 가급적 간결하게라도 우선 전하고자 한다.
특히 韓國天主敎會 創立史에 관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대부분이  주로 프랑스 선교사 聖 다불뤼(A. Daveluy) 주교의 『朝鮮殉敎史 備忘錄』자료를 국내 官廳記錄이나 迫害者들의 기록으로 立證, 확인하는 형식으로 쓰여졌다.
이 책에는 그러한 文獻 자료들 뿐 아니라 그 후손들과 장소에 아직까지 묻어 있는 흔적들과 깃들어 있는 선조들의 체취와, 또 새로 찾은 부수러기 자료들을 종합하고 분석하며 대조하여 정리하고 있는 내용들이 적지 않다.
앞으로 보다 상세한 내용들이 정리되어 발행될 것이며, 이를 토대로 後學들의 손에 의해서는 현재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내용들과 다른 여러 부분이 많이 추가되어, 보다 완벽한 韓國天主敎會創立史가 밝혀지고 쓰여지게 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한편, 200여년 전 한국천주교회가 시작되던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 이름을, ‘朝鮮’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후 한 동안은, ‘大韓帝國’이라 하였었고, 또 ‘日本國’에 점령되어 韓日合邦으로 우리나라 이름자체가 없어진 적도 있었으며, 지금은, ‘大韓民國’이라고 부른다. 또한 북쪽에서는, ‘朝鮮人民共和國’이라고 부르며, 高句麗와 渤海와 古朝鮮의 옛 疆土의 대부분은 지금 중국 영토가 되었고, 그중 일부는 ‘朝鮮族自治區’로 불리우고 있는 지역도 있다. 앞으로는 또 어떻게 다르게 불리울지 모를 일이요, 걱정할 일이기도 하다. 더구나 요즈음 중국의 高句麗史 언급을 보면서 과거 역사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어디서나 어느 시대나 누구나, 배달겨레이면 부담감없이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특히 한 시대의 국가조직 내에 있던 국민이 이루어 놓은 업적이라기보다도, 悠久한 역사를 가진 배달겨레 韓民族의 精神的인 資質에 시선을 더 돌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지금 준비중인 책을『배달겨레가 하느님을 섬기며 걸어온 길(韓民族天主信仰史)』이라고 제목을 붙였고, 그 중에서, 우선, “배달겨레가 우리나라천주교회를 세운 특이하고 기적적인 이야기(韓民族의 天主敎會 創立史)”를 발췌하고 간추려서 내놓는 것이다.


2004. 10. 14.
天眞菴 聖地 에서 卞基榮 神父


1 장
배달겨레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와 먼 준비


하느님은 배달겨레에게 天主信仰의 精神的 資質을 特恩으로 주셨다.    
우리겨레는 하느님의 겨레다.
우리겨레는 먼 옛날부터 늘 하느님을 위하며 모시고 살아왔고,
또 하느님께서는 우리겨레와 늘 함께 계시며, 우리겨레를 保佑하시었으니,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의 겨레이다.

 

1. 韓民族의 由來 : 天山 산맥에서부터 槿域 三千里까지

   우리겨레는 天山 산맥에서부터 해돋는 나라 동쪽을 향하여 몇 만년 동안 오랜 세월을 두고 민족이동을 해왔다. 民族移動의 이유는 수렵하기 쉬운 곳을 찾아 나선 경제적인 것도 아니고, 다른 민족들이 사는 곳을 점령하고 정복하기 위한 정치적인 것도 아니며, 하늘에 떠서 지나가는 해를 하느님으로 모시고 섬기며, 해가 거하며 다스리는 저 높은 하늘을 우러러 위하면서, 날마다 해가 떠오르는 동쪽으로 가면, 해의 나라, 맑고 밝은 ‘빛의 나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겨레는 밝은 빛을 숭상하며 흰옷을 즐겨 입던 겨레였다. 저 멀리 萬年雪로 덮여 있던 선조들의 고향 天山 山脈을 뒤로 하며 떠나온 우리겨레는 부족의 경사나 큰 날에 자기네 종족을 표시하는 흰옷을 입었으며,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로 여기던 산들을 神聖한 곳으로 믿고, 조상이 죽으면 쉽게 하늘에 오르도록 산에다 묘를 쓰기 시작하였다.


   韓國學의 선구자들, 특히 『兒時朝鮮』등을 저술한 六堂 崔南善(1890~1957)을 비롯한 學者들이 우리겨레의 古代史에 관하여 연구한 이러한 學說들은 우리겨레를 天神族으로 神聖視하는 거룩한 史話를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그리하여 지금부터 대략 일만년 전후를 해서 배달겨레는 지금의 한반도에 이르렀고, 자기들이 자리잡는 마을 이름도 빛고을(光州), 별고을(星州), 볕고을(陽城), 밝은 고을(明州), 흰 고을(白城), 맑은 고을(淸州), 빛나는 고을(華城), 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를 즐겨하였다.
따라서 이 先史 시대 우리겨레 種族 중에는 호랑이, 곰, 독수리 같은 동물을 위하는 部族들도 있었지만, 산이나 강, 바다나 별, 달이나 해나 하늘을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부족들이 많았고, 특히 해(日)와 하늘(天)에 대한 정성은 큰 나무나 동물이나 지상의 산이나 강물 공경과는 한 차원 높은 것이었다.


2. 天祭敎 民俗信仰 生活時代
   한울님을 위하던 우리겨레가 이 땅에 정착하면서
하느님을 공경하는 그 정신은, 더욱 정리되고 발전되어 거룩하고 아름답게,
특히 純粹하고 素朴하고 眞率하고 敬虔하게 生活化하여 왔다

지금부터 약 반만년 전쯤, 檀君朝鮮 시대를 전후하여서는 하늘 공경과 어른 공경, 族長 공경이나 나라님 공경이 어느 정도 제도화되고 풍습화할 정도로 발달하여, 하늘에 제사 드리는 예식이 지역을 따라 여기저기 발전하였다. 특히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관습은 보편적이며 오랜 전통으로 이어오던 신앙으로서, 우리겨레의 자연스럽고 순수하며 소박하고 眞率한 한울님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고, 현대에 와서까지도,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하는 민족신앙이 愛國歌에서도 불려지고 있듯이, 우리겨레의 마음 속에는 늘 하느님의 얼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겨레는 排他的이지 않고 마음이 넓어, 다른 나라 겨레들이 걸어온 求道의 길도 쉽게 받아들여 우리의 것과 합쳐서 새로운 우리의 것을 만들어 土着化하여가며 후손들에게 물려주기도 하였다.


3. 外來宗敎文化의 收容

   佛敎와 儒敎와 道敎와 그리스도敎, 등, 다른 나라에서 시작된 여러 종교도 우리 선조들은 폭넓고 관대하게 받아들여서 우리 것으로 만들어 土着化하였다
네팔 룸비니에서 태어난 ‘샤카무니 꿔타마 싣다르타 부다’(B.C. 540~480)의 가르침, 즉 佛敎가 三國時代에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에서는 高麗에 이르는 佛敎文化의 찬란한 연꽃이 만발하게 되었고, 中國의 孔子와 孟子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儒敎가 전해져서, 특히 高麗와 朝鮮時代에는 온 백성들의 생활관습에 이르기까지 三綱五倫으로 禮儀凡節이 확립되고, 祭祀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民俗化한 한울님 공경 思想의 터전 위에서 中國과 印度 지역에서 시작된 이러한 세계적인 종교들과, 특히 近代에서야 우리겨레에게 전해진 그리스도교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모든 宗敎精神文化가 우리겨레 안에 뿌리를 내리며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하며 풍요로운 결실을 내고 있다.

 

 

제 2 장
하느님을 찾는 배달겨레의 노력과 가까운 준비


4. 李晬光이 소개한,『天主實義』와 『芝峯類說』은 우리겨레에게 最初로  天學을 認識하게 하고, 實學 精神을 胎動시켰다.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 전파되어 있는 그리스도교가 모두 다른 나라 사람들이 선교사로 들어가 활동하므로써 시작되었으나, 우리나라 만이 선교사들의 발자욱이 나기 전에 우리겨레 스스로 천주교 책들을 外國에  나가서 가지고 들어와 읽고 연구한 후 시작하였다.
1592년에 일어난 壬辰倭亂 때 스페인 선교사 세스페데스 神父와 일본인 修士가 日本軍을 위한 軍宗神父로 동행하여 남해안 지역 鎭海의 곰내(熊川)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兵營 내에서, 포로로 잡혀온 조선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면서, 약 6개월 정도 미사를 드리고 洗禮聖事와 病者聖事 등을 거행하였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이 퇴각하면서 천주교신자들 대부분도 일본으로 이동되었고, 국내에는 천주교 신앙인들이 존속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전란 중에 3차에 걸쳐  芝峯 李晬光(1563~1628)이 明나라에 다녀오면서 『天主實錄正文』을 가지고 와서 전하므로, 조선 선비들은 천주교를 서적을 통하여 학문적으로 알기 시작하였고, 특히 芝峯類說을 통하여 서양의 새로운 지식을 얻기 시작하였으며, 나아가 實學精神을 싹틔우는 계기가 마련되게 하였다.
이 實學胎動의 계기를 16세기~17세기로 대부분의 實學 硏究書에서 전문학자들이 공감하고 있는 것은 불가피하고 지극히 합리적인 결론이라고 하겠다.


5. 許筠이 바치던 天主敎 祈禱文 12端과 洪吉童傳

   그 후, 儒敎의 교육을 받고, 佛敎와 道敎, 등 종교분야에 관심이 많던 許筠(1569~1618)은 明나라에 다녀오면서 천주교 祈禱文集인 12端을 가지고 와서 실천한, 최초의 天主敎 祈禱文을 바친 신앙인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洪吉童傳』을 저술하여 조선사회 제도개혁에 대한 問題意識의 씨앗을 뿌렸으며, 훗날 우리나라 實學 形成에도 은연 중 밑거름이 되었으니, 儒敎의 現實 위에서 佛敎와 道敎와 天主敎의 영향을 받은 이 문학작품은 한민족의 고유한 민족사상인 弘益人間의 정신적 바탕 위에서 융합된 것이라 하겠다.


6. 소현세자와 黙菴 李慶相이 데리고 온 중국인 천주교신자들 5명

   또한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靑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昭顯世子와 그 秘書官 黙菴 李慶相(李檗聖祖의 직계5대 祖父) 公이 북경의 東華門 가까이에 있던 東華館에 머물면서, 당시 북경에 와서 南堂 天主敎會를 짓고 거기에 주임신부로 있던 독일인 아담 샬 신부와 접촉하면서 천주교에 관하여 묻고 알아보며 親交를 맺었다. 그리고 1645년에 천주교 서적들과 특히 乾象崑與圖 등 기념품들을 선물로 받아가지고 귀국할 때 중국인 천주교신자 5명을 환관으로 데리고 들어와, 한동안 대궐에 머물게 하였다. 그러나 그 때 소현세자와 그 일행 중 일부가 天主敎에 입교하여 세례까지 받았는지, 혹은 받고도 비밀에 붙였는지, 등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입국한 昭顯世子가 얼마 안가서 毒殺되므로써 함께 왔던 중국인 천주교 신자들은 귀국조치되었다. 사실 소현세자 일행은 최초로 외국인 평신도 선교사 5명을 데리고 들어온 목적이 조선에 천주교를 알리기 위한 것이었으나, 당시 조정은 政敵들의 黨爭으로 이를 수용할 수 없는 思考方式과 鬪爭 속에 처해 있었다.

 

7. 황해도 서해안과 두만강 주변에 생겼던 天主敎信者들

   광암 이벽성조의 天學 硏究와 실천 및 활약으로 朝鮮天主敎會가 창립되기 그 이전에도, 조선에는 이미 천주교신자들이 산발적으로 여기저기 약간 있었다는 기록이 일성록(日省錄)과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및 朝鮮王朝實錄 등에 단편적으로나마 조금씩 엿보이고 있다. 특히 李能和의 저서에서도 간결히 집약하였듯이, 仁祖, 孝宗, 肅宗, 英祖 시대에(1650~1750) 이미 함경북도 두만강 주변과 황해도 서해안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없지 않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天主”라는 단어를 종종 “天柱”라고 표기한 곳들도 있으나, 그 종교의 내용을 보면 관리들이 “天主”를 잘못 쓰고 있을 뿐, 天主敎를 말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치 소현세자 때 일시적으로 중국인 천주교신자들이 잠깐 와서 있다가 돌아갔듯이, 한 때 산발적으로 있었던 각자 개인들의 일시적 신앙행위로 그쳤을 뿐, 團體的인 조직으로 敎會를 이루고, 대를 이어가는 신앙생활의 傳承은 없었고 불가능한 처지였다.


8.  南京 敎區長 中國人 羅文藻 주교가 高麗 교구장서리 겸임

   1674년 1월 로마교황 클레멘스 10세가 中國인 최초의 司祭 나문조(Gregorio Lopez) 신부南京敎區長으로 임명하면서 高麗敎區長을 겸임토록 인사발령하였는데, 이렇게까지 될 정도로 조선은 이미 로마 교황청에까지 천주교 전교 면에서도 알려져 있었으니, 16세기말부터 17세기 중엽에 이르는 동안 우리겨레의 福音化가 먼 준비기간을 거쳐 온 결과였다. 나문조 주교는 로마교황청에 조선선교에 관하여 보고서를 작성할만큼 관심이 많았었다. 그런데 교황청이나 남경천주교회의 이러한 안목과 움직임을 낳게 한 것은 조선 사신들과 선비들의 관심과 노력이 해외에까지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수광, 허균, 소현세자 일행, 등이 북경에 출입하면서 독일, 프랑스, 포르투갈, 등 유럽에서 온 선교사들과 접촉하면서 조선이 로마교황청에까지 알려지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남경교구장의 이러한 위치와 자격과 노력은 교회의 宣敎活動上의 試圖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이역시 그 동안 우리겨레가 애써온 노력에 대한 로마 천주교회의 관심과 사목적 조치였고, 은총의 응답일 뿐이었다.


9. 相異한 시대와 장소에서 한 때 산발적으로 있었던 천주교신자들

   그러나 壬辰倭亂을 계기로 스페인 선교사와 일본인 선교사가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했었고, 丙子胡亂을 계기로 소현세자와 이경상 공이 중국인 천주교 신자들을 隨行 入國시켜 잠시 중국신자들이 국내 대궐에 체류했었으며, 남경교구장 라문조 주교가 조선교구장서리로서 조선선교를 계획하고 시도했었고, 그 외에도 황해도 서해안과 두만강 주변에서 일부 우리나라 사람들이 러시아 正敎會 신자들이나 중국 天主敎신자들과의 접촉으로 천주교를 알게 되고, 나아가 입교까지 했었다하더라도, 이런 일련의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그 당시의 몇 않되는 조선인 천주교신자들의 신앙은 散發的이고 個人的인 것으로서, 入敎의 계기나 조건이 없어지면 후대로 계승되지 않고, 단절되었다가 回生하지 않고, 얼마 안가서 거의 당대에 사라졌다.
즉, 임진왜란의 일본 점령군 부대가 철수하였다든가, 또는 정부에서 황해도 해주 지역이나 함경도 회령지역에 牧使나 縣令을 통하여 천주교 신봉 금지령을 내리자 비조직적이며 개별적이던 천주교 신앙생활은 바로 중단되고 사라졌으며, 남경교구의 라문조 주교가 사망하자 역시 조선선교계획은 무산되었다. 즉, 조선인들이 이러저러한 계기로 중국이나 일본과의 접촉선상에서 천주교신자들을 만나고 사귀고 입교도 하였으나, 하느님의 백성인 조직적 단체를 이루지 못하였고, 따라서 오늘날의 한국천주교회로 계승되지 못하였으며, 당대에 없어지고 말았다.

 


제 3 장
曠菴 李檗聖祖의 天學硏究와 實踐 및 敎會創立 活動


10. 朝鮮天主敎會는 광암 이벽성조와 10代 後半, 20代 初半의 선비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벽성조를 중심으로 天眞菴에서 시작된 젊은 소년들의 天學 연구와 信仰 실천 및 전파운동은 갖가지 난관을 극복하면서 온갖 잔인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의 한국천주교회를 이루는 뿌리가 되었으며, 조선의 사회개혁과 근대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많은 역사가들은, 李檗(1754~1785), 李承薰(1756~1801), 丁若銓(1758~1816), 丁若鍾(1760~1801), 丁若鏞(1762~1836), 權哲身(1736~1801), 權日身(1742~1792), 등 한국천주교회 創立에 身命을 같이한 주역들이 당시 南人係에 속한 선비들이고, 星湖 李瀷(1681~1763), 順庵 安鼎福(1712~1791), 등 實學者들과 선후배 관계라 하여, 實學者들이 한국천주교회를 세웠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당시 天學이라고 부르던 천주교 신앙운동의 조직적인 출발은, “實學者”라는 소리를 듣기에는 너무 어린 10대 후반의 소년들과 20대 초반의 청년들의 활약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특히 조선의 實學者들이 朝鮮天主敎會를 세운 것이 아니라, 반대로 천주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서적구입, 기도문 암송, 등으로 入門에 기울어져 천주교를 學界에 알리고 연구하고 실천까지 시도하던 조선의 초기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던 인사들, 나아가서 정신적으로는 입교예비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조선의 實學이 胚胎되기 시작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지봉 이수광이나 허균, 소현세자, 이경상 공, 등의 천주교 서적 구입과 보급, 연구와 실천시도 등은 서양세계를 알리면서, 꽉 막혀 있던 조선사회 개혁의 문제의식을 갖게 하였던 것이다. 뒤를 이어 중국에 다녀오면서 天學 서적들을 가지고 들어와 연구하던 鄭斗原이나 李頤命, 또 이를 비판적으로 보던 申厚聃, 훗날의 성호 이익이나 순암 안정복, 권철신, 권일신,이벽, 이승훈, 정약전, 약종, 약용, 등의 연구와 활약은 모두가 천주교 서적에서 그 출발의 움을 틔우고 있으며, 활동의 영역을 贊反 어떤 방향이든지 간에 넓히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실학이 천주교를 낸 것이 아니라, 천주교가 조선실학을 태동시킨 것이며,  당시 실학의 태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天學, 곧 천주교 진리 탐구와 실천에까지 노력한 선비가 바로 광암 이벽이다.


   그리하여 1770년대에 들어와 天學 연구와 실천, 및 전파에 중심적인 지도자 역할을 한 선비가 바로 광암 이벽성조인데, 당시 조선사회를 직시한다면 조선천주교회 창립은, 마치 번역이 저술보다 더 힘들다는 말처럼, 새로운 신흥 종교를 시작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면들이 적지 않았다. 왜냐하면 충분한 서적이나 지식이나 성물이나 전문인사, 즉 선교사들과 접촉하기도 힘들었고, 또, 접촉하기 위하여 출국하는 것도 정말 힘든 때였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할 수도 없었다. 예컨대, 훗날 한 때 평신도들이 마음대로 미사도 드리고 고백성사도 주었었지만, 곧 중단한 적도 있었다. 더욱이 국내에서는 天學에 대한 배타적인 沒理解와 迫害로 학습과 그 실천이 더더욱 어려웠던 조건하에서 생소한 朝鮮天主敎會를 創立하였던 것이다.


11. “朝鮮天主敎會 創立者는  曠菴 李檗.” - 聖 Daveluy 주교

   聖다블뤼 주교(1818~1866)는 1845년 김대건 신부(1821~1846)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여 21년간 선교하면서 조선천주교 殉敎史의 原本 자료집인 備忘記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집필한 프랑스인 선교사로서 조선교구5대교구장이었으며 1866년에 殉敎하였고,  聖人의 諡號를 받았다. 조선에 입국한 후 조선 천주교회사를 오랫동안 연구한 그는, 조선천주교회의 진정한 역사가 ‘李檗(1754~1785)의 위대한 講學會’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자신의 저서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
“眞正한 意味의 朝鮮天主敎會의 歷史는 李檗의 저 偉大한 講學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왕국에 처음으로 천주교를 시작하기 위하여 天主께서 간택하여 쓰신 道具는 李檗이라는 사람인데, 이름을 德祖라고 부르고, 호는 曠菴이었으며, 경주이씨 가문이었다.”
“이벽은 조선에 천주교회를 창립하기 위하여 주초로 삼고자 대학자 암브로시오 권철신을 선택하였다.
특히 1783년에 이벽성조께서 이승훈선생을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하면서 훈계하는 대목에 관한 다블뤼 주교의 다음과 같은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자네가 北京에 가게 되었음은 天主께서 우리나라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구원하고자 하심을 나타내는 標識일세. 북경에 도착하거든 바로 天主堂을 찾아가 서양 선비들과 상의하여, 모든 것에 대해 물어보고, 그들과 함께 교리를 깊이 연구하여 천주교 실천에 대한 모든 것을 상세히 알아오며, 필요한 책들을 가지고 오게. 우리민족의 生死가 걸린 일일세. 즉 來世에 관한 莫重之事가 자네 손에 달려 있으니, 가서도 가벼이 행동해서는 아니 되네.’ 이승훈은 가슴 깊이 파고드는 이러한 말을 열심히 새겨들었고, 이를 大道師, 스승의 말씀(la parole du Maître)처럼 받아들였으며, 자신도 같은 생각이었으므로 相互共同의 신념인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을 굳게 약속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 중의 하나는, 이승훈선생이 이벽성조의 말씀을 “大道師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명심하였다(la parole du Maître)는 구절인데, 여기서 스승(maître)이라는 단어의 첫 글자 m을 大文字 M으로 쓰고 있다. 프랑스어나 이태리어에서 maître가 아닌, Maître로 쓰게 되면, 보통의 선생님이 아니라 인류의 대스승들이신 孔子, 釋迦牟尼, 예수, 마호메트, 같은 분들을 가리킨다. 이는 당시 이벽선생의 위치와 신망과 지위, 學德과 권위 등이 일반 聖賢 君子의 수준을 넘는 품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와같이 聖 Daveluy 주교는, 한국천주교회 創立史의 始作을 1784년 이승훈 선생의 북경 領洗에 두지 않고, 이벽성조의 “저 위대한 講學會”에 두고 있는 것이다(1777). 더군다나 “權哲身의 講學會”라는 말은 한번도 사용하지 않는다. 사실, 권철신은 당시 신망있고 아주 점잖은 학자였지, 外國宗敎나 新興思想을 선전하고, 조직을 결성하는 推進力를 가진 革命家다운 인물은 아니었다.


12. “李檗이 조선 信徒會代表로 李承薰을 북경에 파견”- 聖 Maubant신부

   聖 Maubant신부(1803~1839)는 1836년에 조선에 최초로 들어온 프랑스선교사이며, 김대건(1821~1846), 최양업, 최과출, 15세 조선소년들을 마카오 신학교로 보낼 때 추천서를 쓴 신부인데, 그가 입국한 지 2년 정도가 지난 후에 파리에 보낸 편지와 文獻에는 조선천주교회의 창립역사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다.
 “1720년 경에 북경에 다녀간 사신 李公(역자 주. 李頤命)이 서양선교사들한테서 천주교 책들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갔는데[…] 이 책들을 구해 읽은 광이라는 사람(역자 주. 曠菴 李檗)은 후에 요한이라는 敎名을 가진 분이고, 이 사람이 천주교 교리에 同感하고 심취한 나머지, 천주교를 全心으로 받아들였고,(embrassa la religion chrétien)[…]광이라는 (曠菴 公) 이 사람은 이 새 종교에 합류한 몇몇 改宗者들(prosélytes)과 함께 힘을 합하여(de concert) 1783년에 자기들의 또 다른 代表者(autre délégué) 한 사람을 북경에 파견하였는데, 이 대표자는 1784년 2월에 베드로라는 敎名으로 세례를 받고 오게 되었습니다” 


13. “大聖賢 李檗이 저에게 天主敎를 가르쳐주셨습니다.” - 李承薰

   이벽성조에 의해 파견되어 1784년 봄에 북경에서 領洗하고 온 이승훈 선생은, 1789년에 북경 선교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간을 보냈다.
“제 일생에 聖賢을 한분 만났사온데, 이 어른은 우리 종교에 관한 책을 이미 가지고 계셨고, 그 책 내용에 대하여 아주 여러 해 동안 전념하며 자신을 거기에 적응시켰습니다. 이 어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니, 우리 종교의 여러 가지 점들, 특히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점들에 대해서까지도  아주 잘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종교에 대한 이 어른의 信德과 열성은 교리지식보다 훨씬 더 대단한 수준이었습니다. 바로 이 어른이 저를 가르쳐주신 스승이시고, 저에게 魂을 넣어주신 분이십니다. 저는 이 어른을 모시고 함께 천주를 섬기는데 있어 상부상조하였습니다”    


14. “天學 硏究에 탁월한 李檗博士가 李承薰을 北京에”- 金大建 神學生

   김대건 신부가 사제로 서품되기 전 神學生 시절, 1845년에 썼던 朝鮮天主敎會 略史 報告書 첫 머리도 광암 이벽성조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한다.
“조선에는 많은 哲人들(philosophantes)이 자발적으로 우주만물의 창조주요 주재자이신 참 天主가 계시다는 것(naturali lumine […] verum Deum […])을 자발적으로 연구하여 인식하고 섬기었는데, 그들 중에 뛰어나게 가장 유명한(inter eos celebrior) 사람은 李檗이라는 분이었습니다. 이분은 아주 깊히 연구하여 참되신 천주를 공경하고자 노력한 나머지, 당시 북경에는 천주공경이 번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을 북경에 보내어 천주교서적을 가져오게 하려고 작정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이승훈은 李檗 博士(doctor I Pieki)에게 가서 자신이 아버지 李東郁을 따라 北京에 간다는 말을 하였으며, 이벽은 이승훈에게 북경에 가거든 서양 사람들을 찾아가 천주교 서적을 얻어오라고 하였습니다.”


1785년 李檗聖祖 死後 60여년 후(1844년)에 海外 마카오에서 23세의 金大建 신학생에 의해서 쓰여진 이 내용은, 그가 충남 솔뫼에서 태어나, 7세 때 경기도 龍仁 산골로 피난와서 10여년을 살다가 15세의 소년으로 1836년 末 마카오로 떠났다는 것과, 더군다나 그 당시에 역사책도 없고, 박해 중이라서 교회 조직도 제대로 없었으며, 산골로 숨어 다니느라고 만나볼 수 있는 천주교신자들의 수도 별로 없던 시절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러한 역사지식은 김대건 소년의 스승이었던 丁夏祥 바오로(1795 ~1839)와 정하상 바오로보다 한 살 아래인 김제준 이냐시오, 즉 김대건 소년의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벽성조 死後 60여년간은 조선의 어린 소년들까지도 “조선천주교회는 탁월한 선비 이벽이 세웠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5. “朝鮮 天主學의 始祖는 李檗이니,” - 朝鮮王朝實錄

   조선천주교회를 광암 이벽성조가 시작하였다는 것은, 천주교회측의 자료뿐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정약종을 문초한 결과, “원래 처음으로 西洋學(天主敎)을 듣고 알게 된 것은 李檗이었고, 李檗은 이승훈을 몰래 변장시켜 꾸며서 아버지 이동욱 公을 따라가도록 북경에 보내었읍니다”
더욱이 천주교를 박해했던 사람들이 당시 이벽성조의 두 형제에 대해 올렸던 다음의 상소문들은, 당시 광암이벽성조에 의해 조선천주교회가 시작되었음을 모든 이가 공인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李檗은 사특한 무리들의 가장 큰 괴수이니, 우선 그 형 李格이 아직 벼슬에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매우 서글프고 안타까운 일이니, 그 형제들은 즉시 벌을 주어 내 쫓아야 한다
“사특한 무리들의 가장 큰 괴수로 말한다면 그것은 李檗이다.”


16.  “李檗은 朝鮮天主敎의 始祖다” - 李晩菜의 闢衛編
“요사스러운 전 水使 李晳의 兄 李檗은 저 邪惡한 천주교를 가장 먼저 시작한 우두머리로서 천주교인들의 始祖(一世)라는 것을 萬人이 다 알고 있는 바(共知)가 아닌가?”


17. “北京 天主堂에 가서 祈禱書를 求하고 領洗를 請하게.”- 黃嗣永 帛書

또한 李檗이 李承薰을 북경에 보내어 세례를 받아오게 하였음을, 앞에서 인용하였던 다블뤼주교의 서한, 丁若鍾의 증언,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편지 등에서 이미 보았는데, 黃嗣英(1775~1801) 進士는 이를 자신의 帛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승훈은, 벼슬하지 않고 깨끗이 살던 선비 李檗이 기특히 여기며 크게 믿음직하게 여기던(大奇之) 선비였다. 계묘년(1783년)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갈 때, 李檗이 이승훈에게 가로사대(曰), 북경에 가면 天主堂이 있고, 천주당에는 傳敎者인 서양선비가 있을 터이니, 가서 信經祈禱書를 求하고, 아울러 領洗하기를 청하도록 하게(幷請領洗). 그러면 서양선비가 자네를 무척 사랑할 걸세. 그리고 여러 聖物을 많이 얻어가지고 와야지, 결코 빈손으로는 돌아오지 않도록 하게. 이승훈은 李檗의 이 말대로(承薰 如其言) 북경 천주당에 도착하여 洗禮받기를 청하였다.[…]”


18. “李承薰, 若鏞 3兄弟, 權日身 父子, 等이 李檗을 모시고 앉아서”     - 闢衛編 

1784년 이승훈 선생이 북경에서 영세귀국한 지 1년 후에 일어난 1785년 乙巳迫害에 관한 闢衛編의 기록에도 광암 이벽성조와 당대의 다른 학자들과의 관계를 쉽게 엿볼 수 있는 표현들이 있다.,
“乙巳년(1785년) 봄에 掌禮院 앞에 있는 金範禹의 집에 李檗이라는 사람이 설교를 했었는데, 푸른 수건으로 머리와 어깨를 가리고 벽을 기대어 좌정하고 앉아 있었으며, 그 앞에는 李承薰, 丁若銓, 丁若鍾, 丁若鏞 3형제와 權日身 父子가 책을 손에 들고 李檗을 모시고 무릎을 꿇고 둘러앉아서 이벽의 설법을 듣고 있었으며, 모두가 스스로 다 자기들은 이벽의 제자들이라고 부르더라. 李檗이 저들을 가르치고 꾸짖고 하는 기품이 얼마나 엄격한지, 우리 儒敎에서 스승이 제자들에게 하는 禮儀보다도 훨씬 더 엄하게 하고 있었다.”


4장
丁若鏞의 文獻에 나타난 天眞菴과 曠菴 李檗聖祖


19. “聖賢의 學德과 豪傑의 氣魄을 갖춘 李檗” - 丁若鏞
 
   조선 천주교회 시작에 대한 역사 기록들 중에서 비교적, 소상히, 수차례에 걸쳐 광암 이벽성조에 대해서 뿐 아니라 講學會가 열렸던 天眞菴에 대해 기록을 남겨주고 있는 분은 茶山 丁若鏞이다. 그는 1777년 15세 때에, 당시 23세의 李檗 曠菴 先生을 가리켜, “聖賢의 學德과 豪傑의 氣魄을 함께 골고루 갖추셨으며(賢豪氣相投)”, 또 “ 어려서 일찍부터 德을 힘써 닦으신 어른(令德勉早修)으로” 完德의 標本이라고 여기면서 李檗聖祖를 존경하였다. 이때 지었던 “贈 李檗”이라는 시를 읽어보자.
                 
贈 李檗
(李檗선생님께 드립니다)

二儀雖不改 (이의수불개)  陰과 陽은 비록 고치거나 바뀔 수 없는 것이지만,
七曜迭舒卷 (칠요불서권)  일곱 요일은 날짜와는 달리 번갈아 바뀌는 것이니,
嘉木敷春榮 (가목부춘영)  좋은 나무들도 봄이 되면 더욱 생장력이 넘쳐나지만,
華濨易易變 (화자역리변)  무성하게 성장하고도 또 자라 늘 변하게 되는도다.
倥傯被驅迫 (공총피구박)  曠菴公은 무모한 이들한테 핍박을 받게 되어도,
不能訴餘戀 (불능소여연)  끝내 동정심으로 차마 맞 비평조차 아니하시도다.
庶物無偏頗 (서물무편파)  무릇 모든 일에 있어 결코 편파적인 법이 없으시니,
貴達安所羨 (귀달안소선)  부귀와 영달 같은 것을 뭐 그리 부러워하시리오.
賢豪氣相投 (현호기상투)  曠菴公은 聖賢의 學德과 豪傑의 氣魄을 다 갖추시었고,
親篤欣情眄 (친독흔정면)  미운 정 고운 정 다 손수 살피시며 다독이시도다.
令德勉早修 (령덕면조수)  어려서부터 일찍이 학문과 덕행을 힘써 닦으시니,
慷慨常見面 (강개상견면) 大義와 博愛의 慷慨하신 모습을 그 얼굴에서 늘 보옵니다.            

 


20. “人間世界에 내려오신 神仙나라의 학(鶴)과 같으신 曠菴 公에게서 우리는 神의 風采를 보았었도다” -丁若鏞

또한, 丁若鏞의 詩文 중 “友人李德祖 輓詞”는 1785년 이벽성조의 장례식에 가서 지은 것인데, 그 詩에서 茶山은 李檗聖祖를, “닭과 오리떼들이 시기 질투로 헐뜯는 인간세계에, 神仙나라에서 내려오신 학과 같으신 어른(仙鶴下人間, 鷄鶩生嫌嗔)”이시니, 그 어른에게서 우리는 “神의 모습을 보았도다(軒然見風神)”하였다. 23세의 정약용 선생이 지어 올린 이 輓詞에서 우리는 이벽성조의 學識과 聖德이 일반 聖賢君子의 수준이 아니라, 神聖한 超人的이었음을 알 수 있다.


21. 가을을 타고 문득 훌쩍 날아가는(乘秋忽飛去) 鶴처럼, 曠菴 公이 떠난 지 1주년, 전처럼 붉게 물든 천진암의 가을 단풍을 보러 가서. -  丁若鏞

한편 다산은 강학회 장소였던 천진암을 매우 자주 수차례 걸쳐 방문하여 詩를 짓고는 하였다. 이를테면, 어릴 때뿐 아니라, 이벽성조께서 순교하신 지 한해가 되던 1786년 초가을에도, 24세의 다산은 단풍 구경을 할 겸 母校와 같은 천진암을 찾아 天眞菴 賞楓을 읊었다. 가을 단풍이야 다산의 고향 마재의 뒷동산과 앞의 검단산, 및 가까운 용문산 단풍도 훌륭한데, 구태여 단풍구경을 하려고 天眞菴을 찾는 다산의 허전한 심정은, 잊지 못하는 曠菴公에 대한 생각 때문이 아니랴? 조정에서 현직으로 분망한 중에도 정약용은 이하에서 보겠지만 마치 母校를 찾듯 天眞菴을 자주 찾는다. 또 종종 天眞菴의 “菴”字없이, ‘天眞’이라고만 부르기도 한다.


 天眞菴賞楓
    買酒花郞坊裏(매주화랑방리)  화랑방 동네에 들어가 술을 사가지고,
    停車鸎子峰陰(정차앵자봉음)  앵자봉 그늘에서 수레를 멈추니,
    一夜纖纖白雨(일야섬섬백우)  하룻밤 부슬부슬 내린 실 이슬비에
    雨厓欇欇紅林(우안섭섭홍림)  양쪽 산 더욱 붉고 싱싱하게 물들었네.

다산이 천진암을 방문하고 지은 시문 중에서 상당수가 교회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데, 茶山은 천진암에서 광암공의 天學道場 활동 즉, 修道와 硏究와 講學會 개최 등에 참여하였음을 전제로 하는 추억의 詩文들을 여러 편 남기고 있다. 그 중에 중요한 몇 가지를 읽어보자.


22. “天眞菴엔 아직도 李檗의 讀書處가 그저 그대로 있는데.”- 丁若鏞
   
1797년, 正祖 임금을 모시는 承旨와 副護軍 등의 현직을 역임하고 있을 때에, 35세의 茶山은 2분 형님들과 단오날 천진암에 와서 이틀 밤을 머물며 20首나 되는 詩를 지었는데, 그 중에, “端午日陪二兄游天眞菴記(단오일배이형유천진암기)”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端午日陪二兄游天眞菴記
 단오날 두 형들과 천진암에 와서 노닐며 보니,

李檗讀書猶有處(이벽독서유유처) 이벽의 讀書處는 아직도 저기 그저 그대로 있는데
苑公棲跡杳難尋(원공서적묘난심) 苑公이 깃들던 발자취는 아득히 다시 찾기 어렵도다.
風流文采須靈境(풍류문채수영경) 風流와 文采는 모름지기 神靈한 境地에서라야 하리니,
半日行桮半日吟(반일행배반일음) 그시절 그리며 한나절내 술마시고 한나절내 시를 읊노라.


 이 시는 1797년 丁巳年에 쓴 것으로서, 이벽성조께서 순교(1785年 死)하신지 12년 후이고, 天眞菴에서 講學會가 개최되었다고 거론되는 첫번째 해(1777년)부터는 20년 후다. 이 詩는 광암공이 天眞菴에서 讀書할 때 茶山이 이미 수차례 왔었거나 아니면 함께 거하며 讀書를 함께 하였었다는 것을 전제하고서만 쓸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시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이 讀書라는 말인데, 조선시대에는 고위관리의 특수 전문연구기관이었던 讀書堂이 있었으니, 讀書라는 말은, 단순히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대학원에서의 연구를 포함한 수덕적 차원을 의미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벽성조의 독서처가 천진암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이 시에서 사용하고 있는 苑公이란 말은 苑風之人으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으면서 뒤흔들고 가버린 큰 회오리바람같은 巨人을 뜻하는 것으로 이벽성조를 가리키고 있다.


23. 正祖 임금이 낸 숙제 답안을 작성해주던 광암공의 문장이

적힌 책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다던 丁若鏞
  
   茶山公이 李檗聖祖를 흠모하던 마음은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후에 쓰여진『中庸講義補』에도 절절히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은 茶山公이 1784년 正祖 임금 밑에서 太學生으로 있을 때 正祖가 中庸에 관하여 숙제로 내준 70條目의 질문에 대하여 작성했던 中庸講義를 1814년에 전라남도 강진 유배생활 중에 54세의 나이로 補完 손질한 것으로서, 이때 옛날 태학생 시절의 그 원고뭉치를 다시 어루만지면서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甲辰年(1784년)에 中庸에 대한 正祖의 질의에 답론을 쓸 때 나는 당시 水標橋에 거하던 曠菴公한테 물어서 했는데, 이제 광암공이 세상을 떠났으니 어디 누구한테도 물어볼 데가 없구나(質問無處)! 만일 광암 이벽이 살아있다면, 그의 學識과 德에 나아감이 어찌 내게 비할 수가 있으랴(使曠菴而尙存 其進德博學豈余比哉)? 이제 나는 아직 살아있으나 광암공이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으니, 광암공을 생각하며 옛 원고 책들을 움켜쥐고 어루만지며, 흐르는 눈물을 금할 길이 없도다(不禁撫券而泣涕也)!”


   특히 이벽성조 사후(1785) 거의 30여년 만에 첨삭보완하는 다산의 『中庸講義補』문장들을 읽어내려 가노라면, 몇 페이지마다 종종, “이 文章은 내가 쓴 것이 아니고, 曠菴의 文章이다(此曠菴之文)”, “이 말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고 曠菴의 學說이다(此曠菴之說)”, “이 뜻풀이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曠菴 李檗이 이렇게 뜻을 풀었다(此曠菴之義)”, “中庸을 잘 읽어봐라, 以下로는 曠菴 李檗의 文章이 아주 많으니라(觀乎中庸以下多李曠菴之文)”하며, 그 어려운 中庸講義補를 손질하며 吐露하고 있다.
또 정약용 자신이 얼마나 광암공을 따랐었는 지는, 다산이 지은 녹암 權哲身 公의 묘지명 중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다산)자신은 李檗을 추종하였고(從 李檗), 자기 형 丁若銓은 일찍이 어려서부터 李檗을 추종하였으며(嘗從李檗), 李檗이 제일 먼저 수령(首領)이 되어 天主敎를 宣傳하고 다닐 때 權日身은 熱誠的으로 李檗을 추종하였다(李檗 首宣西敎 日身熱心從檗).”
鹿菴 權哲身의 墓地銘을 쓰면서 다산이 밝힌 이와 같은 내용을 보충하는 의미로, 順庵 安鼎福의 글을 살펴보자. 順庵 安鼎福은 權哲身과 權日身 두분 성현들에게 꽤 여러 편의 서간들을 보냈는데, 그 중에 曠菴 李檗聖祖께서, 首領이 되어 天主敎를 처음 宣布하고 다녔음을 傍證하는 내용이 있다. 順庵 安鼎福이 1784년에 權旣明(=權哲身)에게 보낸 書簡 중에,
“諸君들이 평소에는 佛敎를 배척하였었는데, 이제는 天主學에 빠져서 속수무책으로 꼼짝달삭을 못하는 것을 보면 그 天主學에 무슨 특별한 내용이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군.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을 그렇게 감동을 시킬 수 있으리오. 그래서 내가 지난 번 편지에서 그 천주학 책들을 내게 좀 가져오라고 부탁을 했던 것일세. 그런데 최근에 李德操가 多少間의 몇몇 天主學 책들을 가지고 자네한테 찾아 갔었다는데, 그 사람이 여기를 지나가면서 왜 나한테는 들리지 않았는지 그 연고를 모르겠네[…].”


   여기서 權哲身은 權旣明으로, 權日身은 權省悟로, 李檗은 李德操로 부르고 있으며, 德操는 본래 德祖를 茶山과 順庵이 당시 그렇게 불렀었으니, 비록 聖賢의 學德을 지니셨으나(賢豪氣相投), 고집이 세고(다블뤼의 朝鮮殉敎史 備忘記), 또 志操가 굳세어(豪傑의 氣魄), 德祖를  自他가 德操로 불렀다. 즉 德操는, 修德을 貞操를 지키듯 志操를 가지고 마음을 잡고 계속하여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1770년 17세를 전후하여 讀書에 열중하던 광암공은 당시 관습으로 15세 전후에 결혼을 하는데, 학문 연구와 修德에 열중하기 위하여 가정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천진암 산 속에서 天學硏究에 전념하며 천주교 계명을 실천하는데 열중하였기에, 외아들 李顯模가 태어나는 것이 1784년이니, 꼬마신랑시대의 早婚 풍습이 있던 당시로서는 양반 집에서, 더구나 병조판서 대감 權?의 딸과 결혼하였다면, 병판감의 딸을 30이 넘도록 출가를 시키지 않았을 리도 없거니와, 茶山公이, 이벽성조께서는 “일찍 어려서부터 남달리 德을 닦으셨도다(令德勉早修)”하신 것을 보면, “일찍 어려서(早)부터”의 “早”라는 漢字의 용법이 당시 10세 전후를 가르키는 것이므로(예, 早失父母),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가족들과 살면서가 아니라, 남달리 특수하게 덕을 닦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이 詩는 丁若鏞선생이 15세 때 결혼하던 해에 당시 23세의 광암공에게 지어드린 獻詩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李檗聖祖의 부인 柳閑堂 권씨가 일찍 사망하는 것도, 사위 이벽이 天主學에 미쳐서 20여세의 젊은 자기 딸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고, 마치 생과부처럼 한맺힌 고통을 주어 생사람 죽였다하여, 장인  權?은, 1785년 乙巳迫害 때부터 천주교 박해에 적극 앞장섰던 것이다. 죽은 딸의 한을 생각하며, 사위 李檗에 대한 증오심이 가중된 것이었다.

 


제5장
曠菴 李檗 聖祖 朝鮮天主敎會 創立


24. 天眞庵에서 天學을 硏究하고 修道한 曠菴 李檗聖祖의 朝鮮天主敎會 創立活動

   지금까지 살펴본 역사 기록들은 모두 한결같이 광암 이벽 성조가 조선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이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제 조선천주교회가 어떻게 창립되었는 지 좀더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살펴볼 것인데 이에 앞서, 그 개요를 일목요연하게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 天眞菴 讀書處를 天學道場으로 삼아 儒․佛․天을 合流시키셨다. 
② 天主敎 敎理講學을 信仰實踐의 修鍊會로 發展, 持續시켰다.
③ 선비들을 모아 信徒團體를 結成하였다.
④ 李承薰先生을 朝鮮天主敎會 信徒 代表者로 北京에 派遣하였다.
⑤ 權哲身大學者를 비롯한 李承薰, 丁若鍾, 등 兩班들을 入敎시켰다.
⑥ 天眞菴에서 水標洞으로 集會所를 옮겨, 祈禱會 및 敎理 講座를 主管하였다.
⑦ 李家煥, 李基讓 등 儒學者들과의 公開討論會에서 大勝을 거두었다.
⑧ 明禮坊으로 集會場所를 以前하여  祈禱會 및 敎理 講座를 주관하였다.
⑨ 天眞菴에서 水標洞, 明禮坊, 馬峴, 楊根 等地로 天學信仰을 傳播하였다.
⑩ 金範禹, 崔昌鉉, 등 中人들을 入敎시켜 天主敎會에 庶民도 合流시켰다.
⑪ 乙巳迫害때,  門中迫害로 家內 軟禁, 餓死罰 毒殺로 殉敎하였다.
⑫ 李檗聖祖께서 殉敎하신 후 약 60여년간(1785~1845), 즉 김대건 신학생 때까지는 朝鮮 儒林들과 天主敎 迫害者들, 또 官僚들과 天主敎 信徒들도 曠菴 李檗聖祖를 朝鮮天主敎會 創立者 즉 始祖(一世)로 모두가 共知, 共認하고 있었다(李檗之最先溺邪一世之耶共知也)   


25. 天眞菴의 李檗讀書處와 講學堂은 젊은 선비들의 天學道場이었다

1770년 경 광암 이벽성조께서는 16세 때 천진암에 讀書處를 정하고 天學을 연구하며 실천하자, 그의 사돈들인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은 어린 나이에도 자주 천진암 讀書處 道場에 와서, 修道하던 “이벽성조를 존경하고 추종하면서, 月曆과 數學, 幾何原本, 등, 아주 심오한 것까지 듣고 배웠다”고 정약용선생은 기록하고 있다. 이때 정약전은 12살, 정약종은 10살, 정약용은 8세였다. 이들은 10여년간 천진암의 李檗讀書處에 자주 다니며, 天學道場의 기능을 겸하던 거기서 한 때 함께 修學하였음을 알리는 詩들을 지었다.


   훗날(1827년) 65세의 老人이 된 정약용 선생은 옛날 어린 시절 天眞菴에서 함께 修學하던 벗들, 곧 玄谿 令公과 石泉 翁과 季林과 聖九와 規伯 및 3 가정의 아들들과 함께 폐허가 된 천진암을 찾아왔다. 스님들은 모두 떠난 지 오래되어 아무도 없었기에, 이들은 아랫 마을 伊蒲의 안내로 3일을 머물렀다. 이때 丁若鏞 一行은 40餘首의 詩를 지어 天眞消搖集을 남겼는데, 그 중에 몇 줄을 뽑아 읽어보자.


石徑細如線 바윗돌 사이사이로 실처럼 가늘게 난 이 오솔길은,
昔我童時游 그 옛날 어린 시절 내가 와서 거닐며 노닐던 그 길인데,
紅葉題詩處 일찍이 “붉은 잎”을 題目으로 받아 詩를 짖던 이곳을,
重來愴客心 이제는 나그네로 다시 찾아오니 내 마음 한없이 슬프기만 하도다.
豪士昔講讀 호걸(豪傑)과 명사(名士)들이 일찌기 講學하며 讀書하던 이 곳에서,
尙書此燒鍊 우리는 尙書를 한권씩 외운 후 불살라 물에 타서 마시며 익혔었지.
荒寮草色深 황폐한 요사체에는 잡풀만이 무성하게 덮혀 자라나고 있고,
禪燈廢少林 참선하던 이들은 사라져 선방엔 불이 꺼지고 아주 폐쇄되고 말았구나.
寅緣慙講德  이제 전처럼 새벽부터 德目 외우기(講)는 부끄러워 차마 못해도
書帙見隨陰  산그늘지니 마음놓고 책(祈禱書,等)만은 전처럼 읽어본다오.
伊蒲容信宿  오늘밤 쉴 데없어 걱정했는데 伊蒲가 들어오라니 믿고 자야지.
何事怕輕陰  해지는 그늘이 짙어 어두워진들, 설마 무슨 일이 있기야 하랴.
[…]
前躅凄迷不可求  옛날처럼 그대로 다시 살아볼 수 없으니, 애닲으고나.
黃黧啼斷綠陰幽  꾀꼬리들 그 시절처럼 녹음 속에서 울다가 그치는데,
朽筒引滴涓涓水  물 대던 홈통은 썩어 여기저기 졸졸졸 흘러내리고,
破瓦耕翻壘壘丘  집터도 耕作하려나 기와 조각은 모아다가 수북수북 쌓았는데,
禪房無處舊人求  禪房 親舊들은 다 죽어 어딜 가도 다시는 찾아올 곳이 없네.
樓前寮舍半墟丘  우리가 공부하던 누각 앞의 기숙사들은 무너져 절반이 빈터인데,
三十年來重到客  삼십년만에 지금 내가 나그네 신세가 되어 다시 찾아오니,
猶然苦海一孤舟  나는 아직도 괴로운 바다에 뜬 외로운 배 한 척의 신세로세.


26. 嚴冬雪寒에도 天眞菴에서 10여일씩 講學會를 열던 젊은 先覺者들

1777년과 1778년 1779년에 당시 10代의 少年 선비들은 천진암에서 겨울에도 講學을 하였다. 당시에는 宗敎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天主敎도 天學이라고 불렀다. 기록자들에 따라 天眞菴에서의 겨울 講學會 개최년도를 다블뤼 주교는 丁酉年(1777년)이라 하고, 다산 丁若鏞은 己亥年(1779년)이라 하고, 丁學術의 李檗傳에서는 戊戌年(1778년)과 己亥年(1779년)이라고 적고 있는데, 결국 천진암에서의 講學會는 수차례 자주 개최되었음이 분명하다. 丁酉年을 놓고 보면 당시 정약용 15세, 정약종 17세, 정약전 19세, 이총억 14세, 이벽성조 23세, 이승훈선생 21세, 등이었다. 산너머 41세의 권철신 대학자도 관여하여,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부터 온종일 저녁까지 글을 읽고 토론을 하였으며 朱子의 性理書 76권에 나오는 敬齊箴 四勿箴 등의 글을 講學 자세 紀綱을 위하여 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강학은 練修會 성격을 띤 講學會였다.
“일찍이 기해년(1779년) 겨울에 天眞菴에서 講學이 있었을 때, 주어사는 雪中인데도 李檗이 밤중에 천진암에 이르러 촛불을 키고 經書를 談論하였다. 그후 7년(1785년), 이를 비방하는 소리가 일어나서, 다시는 그러한 강학을 더 이상 할 수 없었으니, 이른 바, 성대한 잔치는 다시 하기 어렵다는 말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그 후 7년은 명례방에 한국 최초의 천주교 박해, 즉 乙巳年의 秋曹摘發事件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7. 天眞菴에 道友가 衆徒하니, 曠菴公은 聖敎要旨를 下筆하였다.
- 1837년 丁學術의 李檗傳

천진암 강학에 관한 내용이 『이벽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戊戌(1778)년 이벽성조께서는 25세 되던 해에 星湖 李瀷先生을 따르는 제자들과 어진 벗들과 어진 선비들, 丁氏 李氏네 자제분들과 함께 학문에 힘쓰셨다. 북경에 사절로 갔던 武官 洪軍士한테서 천주교 책들을 한 상자 받으시고 밤낮으로 열중하여 읽으신 후, 깊히 묵상하고 연구하므로써 의심나는 점을 터득하시고는 山水가 좋은 곳을 노닐으시며 다니시다가, 일단 廣州에 이르러 鴛鴦山 寺, 一名 앵자산 천진암에 隱居하시매, 道를 닦는 벗들(道友들=敎友들)이 叢林(=衆徒=僧團), 곧 修道的 團體(衆徒=修道者들)를 이루게 되자, 이들에게 聖敎要旨를 지어 부르시어, 마치 敎科書처럼 받아 쓰게 하시었다”.


   여기서 道를 닦는 벗들(道友)이란 이벽성조께서 강의하는 천주교 도리를 듣고 따르는 이들, 곧 천주교로 입교한 이들이다. 지금의 종교라는 말을 당시에는 道라 하였고, 지금의 敎友라는 말도 道友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衆徒란 말은 衆生과 좀 달리 승려들을 말하는데, 당시에는 修士 혹은 修道者들, 共同體라는 천주교 용어가 아직 없을 때였다. 결국 당시에 천진암에서는 마치 예수의 제자들이나 東學 초기의 水雲 崔濟愚의 門徒들처럼 修道士的 信徒 弟子들의 단체가 形成되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단체가 바로 聖 모방 신부의 문헌에 나오는, “李檗이 改宗者들(prosélytes)과  一心團合(de concert)하여 또 다른 代表者(délégué)를 북경에 파견하던” 主體인 것이다. 『니벽전』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소상히 적고 있다.
“己亥(1779)년 이벽선생이 26세 되시던 해에는 어진 벗들과 學文에 힘쓰는 제자들이 웃어른으로 모시며(爲上), 제자들이 무리를 지어 山寺에 모여들게 되었다. 이 때 광암 이벽선생은 기묘한 學文에 아주 博識하여 天文學과 地理學 醫學과 卜術, 인간의 품성과 운명에 관한 학문에도 達通하였으며,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서 자세히 풀어서 답변하는데 있어서 흐르는 물처럼 막히는 데가 없었고, 그 門下에는 젊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마치 叢林(=僧團)을 이루듯 하여 그 名聲이 世間에 자자하여 널리 전해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젊은 선비들의 단체가 결성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28. 嚴冬雪寒 深夜에 廣州山脈을 넘던 李檗聖祖의
    天眞菴 講學會 參席熱誠 - 聖다블뤼   주교의 『朝鮮殉敎史 備忘記』

   천진암 강학회를 기록하고 있는 또다른 역사 기록은 바로 다블뤼 주교의『朝鮮殉敎史 備忘記』인데, 그 번역원문을 직접 읽어보자.
“때는 1777년(丁酉年), 유명한 학자 權哲身이 丁若銓과 학문을 사랑하는 다른 여러 학구적인 양반들과 함께 심오한 학문연구를 위하여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거기에만 몰두하고자 어떤 절(pagode)에 들어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李檗은 기쁨으로 가득찼고, 그 뛰어난 사람들의 가르침을 누릴 수 있으리라 기꺼워하며 즉시 그들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그는 밤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정 무렵에 한 절(pagode)에 다다랐다. 그러나 자신이 절(pagode)을 잘못 찾아왔고, 산너머 반대편으로 가야함을 알았을 때 그가 얼마나 낙담했겠는가! 하지만 그는 용기를 잃지 않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밤중에 넘어야 할 산은 거대한 산이었고, 눈더미에 덮여있었으며, 수많은 호랑이가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檗은 다른 스님들을 깨워 자신과 동행하게 하였다. 맹수의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손에는 쇠를 박은 몽둥이를 들고 길을 계속하여, 짙은 어둠을 뚫고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곳에 도착하였다. 이토록 奇異한 도착은 첩첩 산 중의 한 중심(dans le sein des montagnes)에 외따로 떨어져 있으면서(isolé) 폐허가 되어 못쓰는(perdu) 건물(édifice.:譯註 天眞菴을 말함)에 居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연유로 이렇게 많은 손님들이 때아닌 시각에 찾아왔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곧 모든 것이 밝혀지자 기쁨과 환희가 두려움의 뒤를 이었으며, 그토록 즐거운 만남으로 인해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이미 날이 새고 있는 것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 모임은 열흘이 넘게 계속되었는데, 하늘과 세상과 人間本性 등에 관한 모든 문제들이 깊이 다루어졌고, 모든 의문점들과 先賢들의 의견이 논의되었다. 그들은 聖敎의 모든 戒律을 즉시 실천에 옮기기를 바랐겠지만, 당시 가지고 있던 책들이 그들을 지도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으므로, 매일 아침 저녁 엎드려 黙想에 잠기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7일마다 하루씩 天主께 바쳐진 날 主日이 있다는 것을 어디선가 보아 알게 되자, 매달 음려으로 7일, 14일, 21일, 28일에 모든 세상일을 중단하고, 靈魂 修練에 대해 생각하면서 小齋 즉 禁肉齋를 지켰다.”


   여기서 ‘l'édifice isolé et perdu’란 외따로 동떨어져 있고, 폐허가 되어 쓰지 않는 凶家나 廢家屋을 의미하는데, 茶山 丁若鏞 先生은 그후 天眞菴을 찾아와 지은 詩에서, “寺破無舊觀, 즉 천진암 절간은 그나마 다 무너져서 옛 모습이 없구나!”라고 하고 있다. 또, 당시에 저술된 洪敬謨(1774~1851)의 『南漢志』에서도, “天眞菴은 鶯子山에 있는 오래된 헌 절인데 지금은 製紙工場이 있어 司饔院에서 관리하고 있다(天眞菴在鶯子山 爲古寺 造紙物 今屬司饔院)”라고 말하고 있다. 거의 동시대에 茶山도, 다블뤼 주교도, 洪敬謨도 모두 天眞菴은 폐허가 된 옛 헌 절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講學 당시 天眞菴은 鶯子山 서북쪽 한 중심 계곡에 하나뿐인 거의 쓰지 않아 폐허가 되어가는 시설물이었다.
정약용이 기록한 기해년(1779년)의 講學會나, 다블뤼주교가 기록한 정유년(1777년)의 講學會나 모두 한겨울에 폭설이 덮힌 앵자산을 이벽성조께서 힘들게 넘으셨다는 것을 보면, 講學은 폭설이 내리기 전에 시작했던 것이고, 또 폭설로 기간이 더 길어졌을 수도 있다. 또, 광암공이 道場을 차리고 있는 天眞菴에 曠菴이 으레 있으리라 믿고 모두 모였으나, 광암공이 뜻밖에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기 보다는 이왕에 왔으니, 講學은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녹암 권철신에게 공부할 겸 무슨 가르침을 들으러 정약전 이승훈 등이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權哲身 嘗於冬月 寓居走魚寺 […] 執贄請敎於鹿菴之門[…]) 曠菴公은 權哲身이 잠시 寓居하던 주어사로 갔다가 허탕을 치고, 다시 앵자산을 넘어 천진암으로 왔던 것이다. 당시 天學 공부와 天主敎 신앙의 열성으로 嚴冬雪寒에 숨박꼭질을 하면서 廣州山脈을 넘나들던 젊은 선비 광암공의 열의와 노력에 우리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9. 李檗聖祖께서는 1770년부터 1783년까지 산속 隱遁處에서 天學 硏究와 實踐에 專念

   천진암 강학회에 대한 기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 자료에서도 발견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인 1885년 Pullo-Pinang의 『天主敎大神學校 歷史 敎科書』와 1911년에 英國 Longford 교수가 집필하여 발행한 『The Story of Korea(鷄林八道誌)』이다. 曠菴 李檗聖祖를 중심으로하는 自發的인 天主敎 硏究와 講學會 개최 및 信仰實踐 試圖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Pullo-Pinang의 교과서는 李檗, 丁若銓, 權哲身, 등의 天學 硏究期間을, 1770년부터 10년간으로 밝히고 있다,
“그 당시 조선의 일부 博士들은 조용한 산골에 隱遁생활을 하면서 哲學 연구에 몰두하였고, 그 중에 널리 알려진 가장 저명한 학자 중에는 李檗이라고 부르던 李德祖와 權哲身, 丁氏네 형제들, 특히 丁若銓과 丁若鏞, 등이 있었다. 이들은 人間本性과 하늘과 땅에 대한 갖가지 의문을 던지고 답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서적들을 섭렵하기 시작하였다. 사람의 영혼과 德行과 惡習과 神의 攝理에 대한 천주교 교리가 매우 합리적이고 훌륭하다고 판단하고 나서, 즉시 자신들의 생활관습까지도 십계명 같은 하느님의 계명에 맞게 일치시켜 살아나가도록 결정하고 실천하였으니, 이는 1770년경부터였다.”


   Longford 교수는 李檗 丁若銓 등이 隱遁處에서 天學硏究와 修練에 몰두하였던 기간은 1770년부터 1783년까지 ‘13년’간으로 斷定하여 記述하고 있다. 
“1720년에 朝鮮 使臣이 北京에 와서 선교사들과 많은 對話와 討議를 하였고[…] 그들이 사가지고 간 책들을 50년간 조선의 양반 학자들이 단체별로 읽고 토론하게 되었으며, 그들 중에는 남은 일생을 그 교리대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이들도 있었고, 그 중에 훌륭한 양반 집안 출신으로 조상대대로 벼슬에까지 올랐던 집안의 한 젊은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李檗이라는 분이고, 별명이 “돌로 된 담벼락”이라고 하였다. 李檗은 1783년 이승훈을 北京에 파견할 때까지 13년간 천주교 교리를 깊이 연구하며 실천하여 거기에 아주 깊이 深醉되어 있었다.“


   광암 이벽성조를 주축으로 이렇게 천주교 신앙실천운동을 하던 천진암의 공동체가 세례를 받아오도록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다블뤼주교의 기록, 모방신부의 편지 등에서 보았었다. 특히, 이 파견은 단 한번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조선천주교회역사의 독특한 특징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즉, 다블뤼 주교는 “李檗이 여러 해동안 갖가지 시도와 노력을 하였으나, 모두 虛事였고([…]plusieres annees[…]infructuoses[…]), 李承薰先生 파견의 경우 성공을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聖 모방신부도 “또 다른 代表者(un autre délégué)로 이승훈을 보냈다”는 말, 특히 [다른 代表者]라는 문장의 앞뒤에서 “[…]autre(다른)[…]autre(또 다른)[…]autre(또 다른)를 3번씩이나 이어서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여러번 사람들이 왕래하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代理者(representant)”가 아니라, 한 組織的인 團體의 “代表者(délégué)”라는 말은 외국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天主敎信仰人들의 共同體가 있어서 이를 代表하는 資格을 주어 보내었다는 뜻이다. 이는 교회창립 면에서의 독특성과 함께, 세계 宗敎史에 없는 실로 감탄할만한 역사이다.


30. 韓國天主敎 發祥地 天眞菴의 來歷

   그러면 광암 이벽성조의 讀書處가 있었고, 젊은 선비들이 자주 모여서 약 10여년 간 修學하고 講學을 하던 天眞菴에 관하여 살펴보자.
천진암은 本來 檀君影幀 天眞을 모시고 山祭祀, 堂山祭, 山神祭 등을 올리던 天眞閣 혹은 天眞堂이라는 작은 草家 堂집이 오랜 세월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며, 훗날 天眞菴이 되어, 1779년을 전후하여 廢刹이 되어가고 있었으니, 丁若鏞 선생의 글에, “天眞菴은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없다(寺破無舊觀)”하였고, 1797년 丁巳年 당시 洪敬謨의 南漢志에서는, “天眞菴은 오래된 헌 절인데,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이다가 이제는 司饔院에서 관리하고 있다(天眞菴爲古寺造紙物今屬寺饔院)”고, 사찰로서의 기능을 言及하지 않고 있으며, 聖다블뤼 主敎는 젊은 선비들과 함께 李檗선생이 講學을 하던 곳은, 쓰지 않는 廢家이었다(isolé et perdu)고 1850년경에 기술하였다.
1779년 당시 李檗 聖祖 25세, 丁若鏞 17세, 丁若鍾 19세, 丁若銓 21세, 李承薰 23세, 李寵億 15세, 權哲身 43세, 등 주로 10代와 20代 젊은이들이 모여서 그 당시 아주 생소하고 특이한 天主敎 책을 읽고 실천하는 일을, 일반 儒敎 書堂에서나 正常的인 사찰에서, 또는 일반 가정에서는 하기 어려우므로, 다블뤼 주교의 기록대로, 폐허가 되어가는 天眞菴에서는 여럿이 모여 함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pour s'y livrer ensemble à des études profondes), 天主敎眞理를 탐구하고 실천할 수 있었으니, 天眞菴은 바로 儒․佛․天이 合流한 곳이고, 朝鮮天主敎會가 시작된 韓國天主敎 發祥地이다. 그런데 丁若鏞 선생은 종종 [天眞菴]에서 [菴]子를 빼고 그냥 “天眞”이라고만 부르기도 하였으니, “共詣天眞” 또는 “天眞之遊”, “天眞消搖集” 등에서도 볼 수 있다.


   한국천주교회 창립자이신 曠菴 李檗 聖祖께서 천진암을 根據地로 활동하신 바가, 丁若鏞 선생의 글에도 보이는데, “己亥年(1779년)에 天眞菴에서 講學을 할 때(己亥冬講學于天眞菴), 李檗이 밤중에 와서 여럿이 촛불들을 밝히고 經書를 談論하였으며(雪中李檗夜至張燭談經)”, 그후 “丁巳年(1797) 端午날에 둘째 형님(丁若銓)과 天眞菴에 와보니, 李檗의 讀書處, 곧 이벽의 修學 道場 건물이 아직도 그저 있구나(端午日陪二兄遊天眞菴 李檗讀書猶有處)”하였고, 丁學術의 李檗傳에서는, “戊戌(1778) 己亥(1779)년에 李檗 曠菴 선생이 廣州 鶯子山寺 곧 天眞菴에 隱居하시며 丁氏 李氏네들과 어진 벗들(賢友)과 학문에 열중하였으며(勉學), 그 당시, 道友가 衆徒를 이루자 聖敎要旨를 下筆하시었다.”고 밝히고 있다. 1827년 65세로 천진암을 찾은 茶山은, 聖賢의 學德과 豪傑의 氣魄을 갖춘 李檗 聖祖께서 講學하시고 讀書하시던 天眞菴의 講學堂, 讀書處, 寄宿舍 등이 암자와 함께 폐허가 되어 이미 농경지화함을 못내 서글퍼하였다(賢豪氣相投/豪士昔講讀/尙書此燒鍊/樓前寮舍半處丘/寮院無逾莚/荒寮草色深/破瓦耕翻疊疊丘).


   天眞菴 聖地는 韓國天主敎會 創立先祖들께서 선교사 없이 自發的으로 眞理를 探究하고 福音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우신,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韓國天主敎 發祥地일뿐더러, 陰曆主日제정과 실천으로 국내에서는 최초로 근로자들의 정기적인 휴식을 겸한 敬神禮節과 社會階級打破, 男女平等 實踐등이 敎會創立과 더불어 시작되어, 훗날 民族開化와 祖國近代化 및 조선 社會改革 運動의 싹이 트기 시작한, 온 겨레의 精神文化 聖地이기도 하다.
이 聖地에 한국의 民族宗敎들과 儒敎, 佛敎, 天主敎 등의 建築美 일부씩을 참고 하면서 韓民族 100年計劃 天眞菴大聖堂을 세우고 있다. 千年歲月을 두고 한겨레의 精神的 기둥이 될 이 대성당 건립에는 政權을 超越하여 各界 各層에서, 온 겨레가 子子孫孫이 뜻을 같이하고 힘을 함께 모으며, 다같이 정성을 바쳐야 하겠다. 또한 中央政府를 비롯한 地方自治團體들과 모든 기관들도 行政的으로뿐 아니라 物心兩面으로 이 거룩한 사업에 한 몫을 해야 할 것이다.


31. 洗禮로 天主敎信者가 되지 않고, 天主敎信者라야 洗禮를 받는다.
 
   혹자는 洗禮도 받지 않은 洗禮 豫備者들의 이러한 활동을 천주교회의 創立으로 볼 수 있느냐고 反問한다.
그런데, 성서의 기록을 보면, 사도바오로가 에페소교회에 세 번째 갔을 때 이미 많은 ‘신자들(multi credentes)’이 있었으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없었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때에 이미 아폴로도 에페소에 와서 꽤 오랫동안 회당에서 전도를 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는 않았었다.
또한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교회의 분열을 꾸짖으며 첫 번째 편지를 보내는데 첫머리에서 ‘나는 여러분 중에 크리스포와 가이오 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은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냈습니다’라고 하고 있다.


   이는 세례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물로 세례받기 전이라도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천주교회의 신자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교회법이 가장 엄정하게 적용되던 중세기에 교회의 공동묘지에 매장되는 것은, 신자들의 특권이었다. 그런데 물로 세례받기 전 세례예비신자로 죽어도 세례받은 신자들과 동일한 특권을 주어, 교회공동묘지에 묻히게 하였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예비신자가 사망하면 비록 세례를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회는 이들을 교회의 한 가족으로, 회원으로, 즉, 신자로 인정하고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드린다.
사실, 천주교회는 洗禮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洗禮를 聖事로 설정하고, 베풀고 관리한다. 즉, 敎會는 洗禮보다 先在하며 세례를 執行하고 管理하는 主體이니, 세례를 받아야 天主敎信者가 되는 것이 아니라, 天主敎信者라야 세례를 받는 것이며, 천주교를 신앙하지 않는 未信者나 혹시 無信仰者나 非信仰者나 信仰 反對者는 洗禮를 받지도 않겠지만, 혹 받는다하여도 그것은 無效인 것이다. 그래서 세례를 베풀기 직전 司祭는 使徒信經의 내용을 信仰하는지 질문하여 天主敎信仰人임을 확인한 후 세례를 거행한다. 그래서 천주교 信仰을 가진 信仰人들은 洗禮받기 전이라도 이미 천주교회의 會員이고, 家族이며, 構成員임을 천주교회는 제2차바티칸공의회에서 敎義로 再確認 宣言하였다.


   또한 천주교회에는 洗禮가 3가지 있어서, 일반적으로 모든 성당에서 흔히 자주 물로 이마를 씻으며 거행하는 洗禮를 水洗라 하고, 박해 중에 이러한 水洗를 받지 않고 殉敎하는 경우를 血洗라 하며, 水洗나 血洗를 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洗禮를 못받고, 오직 마음으로 領洗를 熱望하면 받게 되는 세례를 火洗라고 한다. 우리 한국천주교회창립선조들은 이 3가지 세례를 모두 받은 분들이다. 水洗前 信者들의 資格과 위치에 관하여 천주교회는, 교회헌장, 교회법, 선교헌장, 敎理書, 등 여러 문헌을 통해 밝히고 있다. 그 몇 가지를 예로 들면,
“聖神의 感導를 받아 교회에 結合되려는 명백한 意思를 表明한 豫備信者들(새 입교자들=catechumeni)은, 이 所願 자체로써 교회와  결합되는 것이므로, 慈母이신 교회는 그들을 이미 자기 자녀로 삼아 사랑하고 돌보아주며, 품에 안아 감싸주고 있다”
“세례를 志願하는자들의 법적 지위가 새로운 敎會法典에 明記되어야 한다. 그들은 교회와 결부되어 있으며, 이미 그리스도의 가족이고, 이미 信德과 望德과 愛德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이들도 드물지 않은 것이다.”
“豫備信者들은 특수한 방식으로 교회와 연결된다. 즉 그들은 성령으로 감도되어 교회에 합체되기를 명백한 의지로 소망하고, 따라서 바로 이 願意와 함께 실행하는 신덕과 망덕과 애덕의 삶으로써 교회와 결합되고, 교회는 이들을 이미 회원들로 愛護한다. 예비신자들을 특별히 보살피는 교회는 福音的 삶을 살도록 그들을 초대하고 거룩한 예식을 거행하도록 그들을 인도하며 그리스도교인들의 고유한 여러 가지 特恩을 그들에게도 베푼다.”
이런 이유로 로마 교황 요한바울로2세는 1984년에 103위를 시성하면서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던 것이다.
“조선천주교회는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성직자 없이 평신도들이 세웠으니. 이들은 마땅히 조선천주교회 창립자들이라고 불러야 한다.”


32. 韓國天主敎會의 創立者들은 平信徒들이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로마 교황 요한바울로2세는 지난 1984년 10월 14일 낮 12시에 로마 성베드로대성당에서 거행된 “한국순교자103위성인기념축일” 첫 미사 중에 한국천주교회 主敎들 全員과 전 세계에서 모인 여러 추기경(김수환 추기경참석), 大主敎, 主敎, 司祭들 앞에서 공식 강론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오늘 우리는, 참 신앙 “고백”의 상징인 성 베드로의 제단을 중심으로 모여, 지난 부활절에 서울에서 시성된 한국 순교자들을 기리는 성찬을 함께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 교우들에게 그들의 모국어로 따로 인사를 하겠습니다. 『찬미예수, 한국 순교성인들을 기리는 성찬을 교종과 함께 드리고자 이처럼 먼길을 와주셔서 참으로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 성대한 전례를 통해 우리는 비단 교회의 일치와 보편성을 증거할 뿐 아니라, 아울러 그 순교자들이 오늘의 세상과 교회에 들려주는 말씀, 곧 致命으로써 한 그 “고백”의 뜻을, 우리가 처한 현실 안에서 새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은 자신의 진실한 그리스도인다운 생활로, 오늘의 세상에서 선조들의 표양을 더욱 빛내주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1. “하늘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마태22장 2절). 이 특별한 잔치에 영원하신 아버지께서는 땅 위에 있는 모든 겨레와 나라들을 초대하십니다. 한국 민족은 2세기 전에, 여기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지난 5월에, 본인은 한국에 가서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제를 거행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한국 민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 신비로운 잔치 초대에 비상한 관심과 최선의 건설적인 노력으로 응답하였으며, 그 상급으로 한국교회 신자 공동체의 오늘과 같은 찬란한 꽃을 피울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한국에 천주교 신앙이 시작된 것은 세계 교회 역사상 유일한 경우로서,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된 것입니다. 신앙을 향한 한국인들의 줄기찬 노력은 정말 고맙게도 몇몇 평신도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민족 구원의 이러한 역사는, 바로 진리탐구로 향하는 인간 이성의 본성적인 열망이 영원한 구원을 얻는데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실상 진리 탐구에 충실한 한국의 저 평신도들 -즉, 한국의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모임인 한 단체는- 중대한 위험을 무릅쓰면서, 당시 북경천주교회와의 접촉을 과감히 시도하였고, 특히 새로운 교리서적들을 읽고, 그들 스스로가 알기 시작한 생소한 신앙에 관하여, 자기들을 밝혀줄 수 있을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남녀 이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fondatori)」이라고 해야 하며,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저들은 사제들의 도움 없이 -비록 2명의 중국인 사제들이 잠시 있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자기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1836년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성직자 없이 자기들끼리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이하 생략).“

그런데 한국천주교회 創立史에 관한 현 교황 요한바울로2세의 이러한 표현은 지난 150여년간 역대 교황들에 의해서 大同小異한 내용이 줄곧 선포되었다.
 
   예를 들면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조선교구설정 칙서에서도, “조선교회 신도들의 요청에 따라[…]”라는 한국신도들의 上向的 自發性이 언급되고 있으며, 1925년 한국 순교복자 79위 諡福 때 교황 비오11세의 講論에서와, 1968년 한국 순교복자 24위 諡福 때도 교황 바오로6세의 講論에서, 그리고 1984년 한국103위 순교성인 諡聖式과 더욱이 그 해 103위 첫 축일미사 때의 현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강론에서도 항상 강론 첫 머리의 내용은 모두, 세계 교회 歷史上 유일하게 선교사없이 한민족 스스로 교회를 세운 특성과 卓越性을 격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시대사회에서는 매우 생소하고 극난했던 천주교회 창립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그리고 어떻게 완수되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더욱이 일부 識者들 중에서까지 아직도 너무나 피상적으로만 대강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리고 “韓國 近代思想史上의 李檗先生의 位置”역시 일찍이 洪以燮 敎授가 1953년부터 몇차례 『연세춘추』와 1976년의 『韓國敎會史論文選集』 등에 논문으로 소개한 바는 있다. 그러나 그 후로 발굴된 여러 자료들을 볼 수 없던 제약이 불가피하였다. 그런데 韓國天主敎會史上에서 李檗聖祖의 위치에 대하여는, 이미 앞에서 제시한 역사 자료에서 보듯이, 교회 初期부터 일찍이 교회내외에서 共認하여오던 상태였다.
아시아 이웃나라의 천주교회 創立史와 비교해본다면, 광암 이벽성조에 의한 조선천주교회가 창립이 지닌 특성을 더욱 명료하게 볼 수 있다.

 

33. 日本은 스페인의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신부가, 中國은 이태리의 마테오 리치신부가 宣敎

   우선 우리 주변의 다른 나라 天主敎會創立史를 보면, 우리나라 천주교회 創立史의 특징을 쉽게 분명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면, 일본천주교회는 1549년 스페인 사람 프란치스꼬 하비에르(1506~1552) 선교사가 일본 가고시마에 上陸하여 傳敎하면서 시작되었고, 중국천주교회는 1292년에 이태리 사람 몬떼코르비노가 와서 傳敎하였으나, 1582년부터 마테오 리치 선교사가 더욱 발전시켰으며, 심지어 로마의 천주교회도 서기 60년경 그리스도의 제자인 유태인 선교사 베드로와 바울로가 세웠다.
전 세계 모든 나라의 천주교회가 다른 나라 출신 선교사들에 의해서 세워졌으나, 우리나라 천주교회만이 1770년경부터 10여년간에 걸친 젊은 선비들의 天眞菴 講學을 계기로, 우리 민족이 自發的으로 信仰團體를 시작하여 출발함로써 세계교회 역사상 유일하게 외국인 선교사없이 한국인들에 의해서 창립된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특이하고 위대한 宗敎精神文化를 이루는 자질을 가진 민족임을 人類歷史에 드러내 보였다.


   中東 지역의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의 啓示眞理를 “받은 민족”이다. 예를 들어 귀를 막아도, “사무엘, 사무엘”하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가 없었고,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고 해도 보이는 狀況, 곧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세상이 끝나는 광경을 요한은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天主聖子의 降生역시 이스라엘 민족이 받은 계시진리 자체이셨다. 로마 대제국의 여러 민족들은 이스라엘의 使徒 聖 베드로와 聖 바오로 등의 전교로 하느님의 啓示眞理를 “들은 민족”이다.
그러나 우리 배달겨레는 빛을 따라서 샛녘(東쪽)으로 민족이동을 하면서 항상 하느님을 공경하며 자발적으로 眞理를 探究하고, 된녘(北쪽)을 거쳐 하늬바람(西風)에 묻어오는 啓示眞理를 “찾아나선 민족”이다.



제6장
天眞菴에서 시작된 朝鮮天主敎會가 首都 서울로 發展


34. 天眞菴에서 서울 水標洞으로, 明禮坊으로, 馬峴으로, 楊根으로 傳播된 당시의 朝鮮天主敎會

   天眞菴에서 순수하고 소박하고 眞率하고 열성적인 李檗聖祖와 함께 젊은 선비들이 시작한 조선천주교회는 1784년 봄 北京에 파견된 이승훈 선생이 領洗, 歸國한 후, 1784년 여름부터 本據地를 天眞菴에서 서울 水標洞에 마련된 李檗聖祖의 자택으로 옮겼다. 『推案及鞫案』이나 『闢衛編』에 나오는 ‘水標橋 李檗家’가 바로 그곳이다. 大學者 李家煥과 李基讓과의 天․儒 討論會, 즉 天主敎와 儒敎에 대한 大討論會가 열렸던 시기가 바로 이 때였고, 장소도 水標洞 李檗聖祖 自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서울 水標洞에 있던 李檗聖祖의 집은 慶州李氏 양반의 집이라서 兩班네들은 자유로이 모일 수 있으나, 常民들에게는 出入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더욱이, 水標洞 李檗聖祖의 자택의 안채 즉 안 사랑에서는 眞書라 부르던 漢文을 사용하는 兩班出身의 漢文 祈禱書 使用 信徒모임이 있었고, 행랑채 즉 바깥 사랑에서는 주로, 漢文을 모르던 머슴꾼들이나 종들, 常民 出身의 信徒들이 당시 諺文이라 부르던 한글기도서를 사용하는 모임이 있었으므로, 신도들의 一致와 和睦 면에서 불편한 점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의 明洞大聖堂이 있는 明禮坊으로 옮기게 된다. 평소 兩班 常民 人間差別을 하지 않으시던 李檗聖祖께서는, 정약용의 표현대로, “무릇 모든 일에 있어 결코 편파적인 법이 없으시고(庶物無偏頗), 미운 정 고은 정 다 손수 살피시며 다독이시는(親篤欣情眄), 聖賢의 學德과 豪傑의 氣魄을 고루 갖추시었으니(賢豪氣相投), 李檗聖祖을 따르던 中人들이 많았으므로, 그 중에 明禮坊, 지금의 明洞大聖堂 터 바로 아래 살던 金範禹 선생의 집으로 集會所를 옮기게 된 것이다. 金範禹(1751~1787)는 정식 通譯官 國家考試에 합격한 사람으로 당시의 역관들은 주로 中國語 譯官으로서 대부분 韓藥材商들이나 韓醫師들과도 가깝게 지내곤 하였지만, 中國語를 가르치는 外國語學院이나 韓醫院, 藥材商, 등을 직접 兼業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金範禹 譯官은 正之라는 이름으로 당시 더 불렸고, 아버지는 金義瑞이며, 단독으로 宗家의 族譜 편찬을 할 만큼 富裕하였다. 형제들은 金履禹, 金亨禹, 金觀禹, 金積禹, 金聖禹, 金槿禹, 등 모두 8형제였다.
兩班, 常民, 男女, 老少, 貧富, 貴賤을 막론하고 누구나 쉽게 自由出入하는 中人 金範禹 譯官의 집에서 朝鮮天主敎會는 社會 階級打破와 男女差別 打破 운동이 曠菴 公의 주도로 저절로 실천되고 있었다. 당시 漢陽 兩班社會에서는 도저히 收容할 수도 없고, 黙過할 수도 없는 현상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天學道人들의 信仰團體가 아니라, 당시 조선의 계급사회 윤리관을 파괴하면서 社會革命의 불을 지르는 것으로 정부와 儒林에서 절대로 容納할 사항이 아니었다.

 


제7장
乙巳年에 朝鮮天主敎會가 최초로 겪는  迫害와 殉敎詩


35. 朝鮮天主敎會 最初迫害인 乙巳迫害: 李檗聖祖 殉敎, 金範禹 譯官 流配

1785년 봄에 결국 朝鮮天主敎會 最初의 迫害인 乙巳迫害가 일어났다. 사실 이 박해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正祖 임금의 사랑을 받는 丁若鏞 선생이 거기에 참석할 뿐 아니라, 아예 서울 자택을 1784년(甲辰年)부터 明禮坊 金範禹 선생 집 가까이에 함께 정하고 있었고(甲辰夏余在明禮坊), 1797년(丁巳年)까지 거의 10년간 명례방에 거하였는데(丁巳之夏余在明禮坊), 丁若鏞 先生을 猜忌하고 嫉妬하고 憎惡하던 政敵들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이기도 하였다.
秋曹判書 金華鎭이 보낸 秋曹禁吏들은 李檗聖祖를 비롯한 權日身, 權相問 父子와 丁若銓, 丁若鍾, 丁若鏞, 李承薰, 등 兩班出身의 重鎭 信徒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만만한 집주인 金範禹 譯官만을 잡아다가 구속시키고 심한 拷問을 가하였다.
이를 알게 된 權日身 沙右居士는 용감히 秋曹判書 앞에 나아가, “우리 양반들도 김범우와 함께 같은 종교를 신봉하였으니, 金範禹를 벌한다면 우리 양반들도 함께 벌해야 한다”고 强辯하였으나, 부하들을 시켜 강제 귀가시킬 뿐 집 주인 김범우 譯官만을 몹시 곤장을 쳤다.


   한마디로 天主學을 하면 中人인 너 金範禹가 兩班이 되느냐는 것이고, 兩班 집 나리들을 집에 모아 접대하면서 함께 하면 中人階級에서 양반계급으로 올라가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 때 金範禹 譯官은 함께 천주교를 믿고 기도하러 모였던 양반들 대신 혼자서 모진 매를 맞아, 경상남도 밀양군 丹場面으로 유배되었다. 귀양지로의 1000리 길을 가면서 고문으로 받은 상처가 더 악화되었고, 流配生活도 혹심하였으므로, 그곳에서 1787년(丁未年) 음력 7월 16일(양력 9월14일)에 殉敎者의 최후를 마쳤다. 그곳에는 아들 仁考와 양자로 온 仁老와 仁蓍(인시)가 따라가서, 아버지의 流配地에서 한동안 그 부근에서 같이 거기서 살았고, 딸은 삼랑진 부근 마을 하동에 사는 정혜좌의 아들 鄭信國에 출가하였다.


   한편, 乙巳年 迫害 때 安東權氏 집안에서는, 당시 權哲身 大學者가 49세 된 著名人士요, 동생 權日身도 43세 된 저명한 學者였으며, 權濟身 權得身 權益身,  5형제가 모두 저명하고 門中의 首長 급에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門中에는  迫害를 앞장서서 그리 심하게 선동할 宗中의 사람들이 없었다.
그리고 羅州丁氏 丁若鏞선생 역시 이미 正祖 임금이 무릎을 치며 격찬할 만큼 각종 시험에 계속 일등 합격하여 賞品을 몇 차례나 받고, 왕의 총애를 받으며, 함께 宴會에 자주 참석하며 官職 길에서 乘勝長驅하던 터이고, 아버지 丁載遠 公도 화순, 충주, 등지에서 郡守와 市長 급의 비교적 高官이었으므로, 감히 丁若鏞先生에게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박해를 가할만한 羅州丁氏 집안 사람들은 없었다. 그저 일부 종친들이 불만불평을 할 정도였다.


36. 제 살과 뼈를 태워 빛이 되어 남을 비추고, 天主께 祭物이 되는 한 토막의 초와 같이(天彛地紀限西東,一炷心香書共火)- 李承薰

   平昌李氏 李承薰 先生 집안 역시 아버지 李東郁公이 中國에 史臣으로, 지금 표현으로 外交官으로 활약하여, 書狀官, 및 司直 參判, 등 나중에는 中國가까이에 있는 義州府尹 등으로 갈 만큼의 勢道家였고, 李承薰先生도 당시 매우 유망한 29세의 成均進士로서 후에 平澤縣監으로 갈만큼 重鎭들 틈에 끼기 시작할 때였으므로, 李承薰 선생을 迫害하는데 앞장 설만한 宗親들은 門中에 거의 없었다. 다만 아버지의 체면을 깎는 사건이라서, 그 아버지 李東郁 公이, 아들이 가진 천주교 서적들을 모두 빼앗아다가 안 마당에 쌓아 놓고 불로 태우는 정도였다. 하여간 아버지가 하는 천주교서적 燒却에 아들 이승훈 선생은 속수 무책이었다. 이 때 이승훈 선생이 지은 名詩는 사실 뜻을 잘 이해하면 聖詩가 아닐 수 없다.
 
天彛地紀限西東暮壑虹橋唵靄中(천이지기한서동모학홍교암애중)
一炷心香書共火遙瞻潮廟祭文公(일주심향서공화요첨조묘제문공)
 
풀어쓰면,

天彛와 地紀는 西와 東을 限하는데, 暮壑은 虹橋를 唵靄하는 中이니,
一炷의 心香도 書와 함께 불에 태우매, 이제는 저 멀리 潮廟나 遙瞻하며 文公께 祭하노라

天彛와 西, 地紀와 東을 연결하여 對句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西洋의 天上 法道(天彛=天主敎)와 東洋의 地上 紀綱(地紀=儒敎)은 전혀 다르고 한계가 있다는 뜻이니, 요사이 흔히 쓰는 표현으로서 이른 바, “文化의 差異”, 혹은 “文明의 差異”를 말함이다. 저녁 어둠의 구렁텅이는 현세를, 무지개 다리는 천주교를 뜻하며, 안개에 가려서 사람들이 못알아보고 있는데, 오로지 하나밖에 없고 딴 마음이 없던 一片丹心 자기 마음의 精誠(一炷心香)은 자신의 아버지가 천주교 책들을 불사를 때 어찌 함께 불타지 않을 수 있었겠으며, 그리하여 일찍이 중국 潮州에서 早失父母한 후, 자신처럼  沒理解 속에서 외롭게 孤軍奮鬪하다가 끝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억울하고 안타깝게 세상을 마쳤다고 여긴 文公(退之, 韓愈)을 자신의 先輩로 삼아 존경하며, 자신은 저 韓愈의 뒤를 따르는 後輩답게 文公에게 祭祀를 올린다는 뜻이다.


   옛날에 촛불이나 등잔불, 특히 들기름 등잔불의 심지는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여기서 一炷心香의 一炷는 李承薰 선생이 자신의 신앙을 이에 비유한 표현으로서, “어찌 두 가닥 心志가 있는 촛불이 있으랴? 내 마음 속에 信仰心 역시 儒敎와 天主敎 두 가지 생각이 있을 리 없다.”는 뜻으로 쓴 것이다.
천주교 신앙에 대한 一片丹心을 이보다 더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글은 없다. 만일 李承薰先生께서 천주교를 포기한 背敎者였다면 一炷心香이란 표현은 나올 수가 없고, 오히려 천주교에 속았다든가 크게 잘못된 길에 빠졌었다든가 몹시 후회한다든가 하는 표현이 나왔어야 할 것이다.


   특히 여기서 中國을 大國으로 숭배하던 시대에 이승훈 성현께서는 潮州에서 英雄視하여 공경하던 文公 韓愈의 祠堂을 마치 북경에 있는 天主堂을 염두에 두고 이 詩를 읊으신 듯 하다. 李承薰 선생이 文公으로 존경받는 唐나라의 韓愈(768~824)를 欽慕하는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韓愈가 唐과 宋의 八大文章家 중의 한 사람으로서 中國 近世文章의 始祖로 꼽히고 있기 때문에 文章家였던 蔓川 李承薰 선생은 이 분의 글을 좋아하여 존경하고 크게 영향을 받았음은 蔓川遺稿 跋文에서도 엿볼 수 있다. 더욱이 韓愈 역시 억울하게 沒理解와 反對를 받았었음이 자신의 처지와 같기 때문에 그의 祠堂에 祭祀한다는 것이다. 이는 北京聖堂에 祭祀한다는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이제 蔓川遺稿 跋文을 이 기회에 잠시 聯想하여보자. 蔓川은 李承薰先生의 號였다.
“蔓川公의 행적 중에는 려문(儷文, 唐 시대에 韓愈를 중심으로 流行하던 文學的인 특수 文體)으로 된 문장들이 적지 않았었는데 불행히도 모두 불에 타서 없어졌기 때문에 한 장의 글도 구해보기 어렵더니, 천만 뜻밖에도 몇 편의 詩와 文章 일부 조각들이 남아 있다가 발견되기에 이를 내가 다시 모아 베껴서, 蔓川遺稿라고 表題를 붙였다. 東風이 불기 시작하면 얼었던 땅이 풀리기 시작하고, 봄이 되면 枯木에도 움이 트고 싹이 돋듯이, 이 역시 天上의 上帝님께서 무한한 섭리로 안배하심이 아니랴?”


   여기서 이승훈 선생의 文學的 原稿들이 모두 불에 타서 없어졌다는 말은 분명 乙巳迫害 때 그 아버지 李東郁 공이 문중 압력에 못 이겨, 친지들을 모아놓고 이승훈 선생의 천주교 책들을 모아서 마당에서 불태운 것을 가리키며, 그 책 속에는 천주교에 관계된 문학적 작품들이 없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사실은 李承薰 先生 자신이 1791년과 1801년 두차례에 걸쳐 밝히고 있다. 즉,
“저의 아버지께서 乙巳年에 종친들을 모으고 그 책들을 모두 불살랐습니다.”
결국 한 마디로 말해서 자신은 潮州 文公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필자 나름으로 위의 闢異詩를 먼저 漢字語를 섞어 풀이한 후 요즈음 젊은이들이 알기 쉽게 다시 옮겨 본다. 이를 좀더 알기 쉽게 풀어가 보면,

"天上의 변함없는 法道와 地上의 人生紀律은 西邦과 東邦을 限界지어 서로가 다르니. 日沒 후 天과 地 사이의 어두운 구렁에 찬란한 무지개 橋梁은 이를 마셔버리는 안개 속에 묻혀 가리워지도다. 오직 한 마음으로 바치던 精誠(香)은 책들이 불에 탈 때, 어찌 함께 아니 타고 마음 편하였으랴. 이제는 하는 수 없이 저 멀리 潮廟나 바라보며, 내 처지와 흡사하게 살다간 文公 韓愈을 追慕하며 後輩답게 祭祀를 올리노라."


   이제 좀 정리하여 옮겨보자.

“天上 法道와 地上 紀綱은 西와 東을 限界지어, 서로 아주 다른데,
해진 후 어둠 속 무지개 다리를 짙은 안개가 삼키듯이 가리네.
그 책들이 불타오를 때 오롯한 내 마음인들 어찌 함께 아니 불타고 있었으랴?
이제는 하는 수 없이 저 멀리 潮州의 祠堂이나 바라보며,
나처럼 이런 길을 앞서간 文公께 후배로서 祭 올리노라.”

또한 우리말 관습상으로는 東을 西보다 먼저 말해야 한다. 따라서, 天彛地紀 限東西, 하지 않고, 限西東하는 표현은 분명 천주교를 앞세워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天彛地紀限西東이라는 구절에서 특히 限西東, 즉 西方의 天主敎와 東方의 儒敎가 相異하다(限)는 표현은 1791년 辛亥迫害 때 순교한 權日身 大學者의 글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엿보인다.


37. 權日身과 權哲身의 殉敎
  
   天主敎는 대저 孔孟의 가르침과 다른데(其學大抵異於孔孟之學) - 權日身
몽둥이로 타살한 죄인들은 이가환 권철신, 강이천 등이다
(杖斃罪人秩 李家煥 權哲身 姜彛天(邪學懲義) - 權哲身
 
稷菴 權日身 大學者의 問招錄 중에 이른 바, “其學大抵異於孔孟之學"의 문맥에서도 천주교는 유교와 다르다는 것을 闡明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뒤에 이어서 말하는 妖誕不正 등은 박해자들의 추가 표현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니, 권일신 성현의 입에서나 이승훈 성현의 입에서 그런 소리는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일뿐더러, 그 漢文 문맥상 妖誕不正을 붙이기 위해서는 앞 문장이 더 강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於“라는 글자를 친지들이 써 넣어서 권일신 성현께서 천주교를 비하하는 글을 썼다고 조작 보고함으로써 배교하였다고까지 과장하여 선전하였던 것은 가소로운 것이다. 글자 하나를 남들이 대신 써 넣고 안 넣고하여 背敎와 殉敎를 따진다는 것은 그 옛날 시골 마을 우물가 아낙네들의 말싸움에서나 볼 수 있는 수준이다. 순교인가 혹은 배교인가의 문제는, 죽였느냐 살렸느냐, 아니면 죽었느냐 살았느냐 하는 인간 최대의 결정적인 의미와 가치를 지닌 生死事實 자체를 가지고 다루어야할 일이다.


   이 문제는 후에 기회가 있을 때 더 자세히 알려야 할 것이다. 그래도 乙巳迫害와 辛亥迫害를 전후하여 李承薰, 權日身, 등 學者들이 天主敎를 儒敎 立場에서 판단하지 말도록 그 差異를 목이 터지도록 辯論하며 論證하기 위하여 피를 뿌리며 목숨까지 바쳤었던 흔적을 우리는 이 분들의 最後 殞命詩에서 엿볼 수 있다. 즉 ‘其學大抵異孔孟之學妖誕不正’하면, ‘天學(其學)은 아주 다른 것이니, 孔孟의 學은 요사스럽고 바르지 못한 것’이라고 풀이 할 수도 있고, 또 ‘天學이라는 요사스럽고 바르지 못한 孔孟의 學과 아주 크게 다른 것’이라고도 풀이할 수도 있으므로, 天學이란 孔孟의 學과 전혀 다른 것으로 요망하고 부정한 것‘이라고 명확히 하기 위하여, ‘於’라는 글자를 친구들이 더 써 넣어  ‘其學大抵異於孔孟之學妖誕不正’라고 보고하게 하여 死刑을 면하고 流配刑을 바게 하였다는 것인데, 여기서 천주교가 공자맹자의 가르침인 유교와는 전혀 다른 것임을 표현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요사스럽고 바르지 못하다는 말은 問招하는 조사관이나 혹은 친구들이 덧붙인 단어로밖에 볼 수 없는 이유는 문장의 흐름에 전혀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철로 위에서 기차를 타고 가다가 기차 앞에 있는 같은 鐵路上에 있는 말마차로 옮겨 탔다는 식이다.

 

38. 李承薰, 丁若鍾 聖賢들의 殉敎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솟아도 못 속에 있느니라 (月落在天水上池盡)
  - 李承薰聖賢 殞命詩

그 후 1801년 辛酉迫害 때 李承薰先生이 斬首 직전에 刑場에서 지어서 그 집안에 전해오는 다음 詩는 그 분의 확고한 천주교 신앙을 또 한번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月落在天水上池盡 (월락재천수상지진)
月은 落하여도 天에 在하나, 水가 上하면 池는 盡하느니라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솟아올라도 못은 다하고 말리라.


   이 詩는 李承薰 선생의 집안에 대대로 전승되어 내려오는 것으로서, 이승훈 선생이 西小門 刑場에서 칼을 받기 직전에 동생 李致薰이 따라가서, “형님, 天主學을 하지 않겠다고 한 말씀만 하시면 상감께서 살려주신답니다”하며 소매자락을 잡고 애원하였으나, 李承薰 선생은 동생의 손을 뿌리치며, “무슨 소리냐! 月落在天水上池盡이니라”하시고, 칼을 받고 참수되셨다는 것이다.
이는 이승훈 선생의 6대 종손 李炳奎 翁이 故 주재용 신부, 오기선 신부, 류홍렬 박사 및 필자에게 전해준 것이다.  李炳奎 옹은 이러한 漢詩를 짓거나 조작할만한 知識人이 아니며, 李炳奎 옹을 여러 차례 상면하여 遷墓 作業을 상의하면서 필자 역시 그분의 漢文知識이 이런 詩를 지을 수준에 전혀 미치지 못함을 확인하였다.


   한편, 水上在池라야만 月落在天과 더 어울리는 對句가 될 수도 있어서, “月落在天水上在池”로 보고, 水上을 못 속에서 치솟는 샘물의 뜻으로 보고, “물이 비록 치솟지만 못 속에서 있을 뿐이다”라고 풀이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李炳奎 翁은 水上池盡, 즉 “물은 치솟아도 연못이 다하면 말라버린다”는 뜻으로 우리에게 말하였으므로, 후손들의 傳承을 더 존중하여, 月落在天水上池盡으로 읽어,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달려 있으나, 물이 오르니, 못은 다하고 말리라.”라고 풀이함이 타당할 것이다.
水上이, 물의 逆流를 말함인지, 蒸發을 뜻함인지, 아니면 池底에 湧出하는 泉水와 같이 치솟는 물을 뜻함인지 확실치 않으나 모두가 類似하고 나아가 同一한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月落在天 즉,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달려있다는 것은 李承薰 선생께서 자신의 천주교 신앙은 칼로 목을 자른다고 해도 변함없이 항상 천주께 가 있다는 뜻이며, 또 水上池盡이라는 말은, 지금 당장 칼을 휘두르는 勢道家들이 得勢를 하며 박해를 하지만, 마치 못 속의 물처럼, 물이 아무리 치솟아도 연못 속에 가라앉듯이, 혹은 물이 위로 증발하거나 上流로 逆流하고나면 연못은 끝나고 말 듯이, 박해자들의 세력과 칼날은 지상에서 끝난다는 뜻이다. 月落在天水上池盡이라는 詩를 보다 알기 쉽게 풀어가보자.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나,
물이 위로 치솟아 오르면 못은 마르고 끝나리라.
혹은, 물은 치솟아도 못 속에서 다하느니라.

여기서도 月은 자신의 신앙을, 水는 박해자들의 勢道를 뜻하고, 하늘은 천국을, 연못은 물이 고여서 깃들이고 있는 세속권력집단을 말한다. 만일 信仰을 抛棄하고 後悔하는 識者라면, 과거 신앙행위가 속은 것이었다던가 혹은 한 때 잘못된 길에 빠져 있었다던가 하는 내용의 詩가 나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詩는 죽음에 직면하여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도 아니고, 신앙을 후회하고 탓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確固하고 眞率한 굳은 천주교 신앙인이 아니고서는 읊을 수 없는 거룩하고 용감한 殉敎者의 詩가 아닐 수 없다. 칼에 목이 떨어지는 순교의 죽음 다음으로 소중하고 고귀한 것이 이 마지막 殉敎詩라고 하겠다.'


1801년 辛酉迫害 때 순교한 천주교회의 중추적인 지도자들의 처형에 관하여, 박해자들이 직접 기록한 내용을 邪學懲義에서 읽어보자.
“천주교신자들 중에 이번에 조정에서 잡아다가 문초하며 고문을 하여도 끝까지 뉘우치지 않는(終不悔悟) 자들은 3차례 혹형을 더 받게 하였는데(加刑三次), 그래도 목석처럼 눈도 깜짝하지 않고 고통스러워하는 빛조차도 전혀 없는 그런 자들은 신유년 2월에 고문하며 문초하던 데서 끌어내어 묶어가지고 가서 칼로 목을 베었으니(“自本曺捕來訊覈而 終不悔悟 加刑三次 殆同木石 少無苦楚之色 辛酉二月自鞫廳 掌去正法), 丁若鍾, 李承薰, 崔昌鉉, 洪樂敏,周文模,,,.”등이라고 하였으며, 이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특히 丁若鍾은 상감의 명을 어겼으므로 재산을 몰수하였고若鍾(姓丁 以犯上不道 籍沒家産), 李承薰은 號가 蔓川이다(“自本曺捕來訊覈而 終不悔悟 加刑三次 殆同木石 少無苦楚之色 辛酉二月自鞫廳 掌去正法,  若鍾(姓丁 以犯上不道 籍沒家産),  承薰(姓李 邪號 晩泉),  崔昌顯,  洪敎萬, 洪樂敏, 金伯淳, 李喜英 , 周文模”)”
 
   邪學懲義는 주로 1801년 신유년 박해 후에 박해의 중심에 있던 儒林들, 특히 이기경 등이 저술편집한 것으로서, 천주교를 사특한 종교로 규정하고 이를 징벌하여 정의를 확립하였다는 뜻에서 편찬된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다가 고문하여 배교하는 이들은 훈방조치하고 또, 주요 인사들은 배교하더라도 유배조치하며, 배교하지 않고 끝까지 굴복함없이 신앙을 고백하고 지키겠다는 이들은 斬首하였음을 적은 글이다. 즉, 박해자들 자신이 기록한 글이기에 그 신빙성과 가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39. 曠菴 李檗聖祖의 殉敎

   은하수 별자리에 둥근달 떠오르듯, 비단옷 곱게 차려 입고서 하늘나라 가노라.     - 李檗聖祖殞命詩 -

그 時代社會와 門中과 家長의 迫害로 殉敎하시는 李檗聖祖의 경우는 보다 정신적이고 윤리적이었다. 사실 1785년 이 乙巳年迫害 때 가장 잔인하게 迫害를 받고 고통을 받아 순교한 분은 한국천주교회 창립자 李檗聖祖였다. 당시 상황을 보면, 이벽성조의 집안은 武官 집안이었고, 형과 동생이 兵士라는 그리 높은 직위도 아닌데다가 아버지 李簿萬公은 매우 괄괄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聖다블뤼 주교는 『朝鮮殉敎者備忘錄』에서 당시에 수집한 자료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李檗의 아버지는 天性이 激情的인 사람으로, 天主敎에 連累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었는데, 天主敎에 깊이 빠진 듯이 보이는 자기 아들의 마음으로부터 그러한 종교적 心性을 뿌리뽑기 위하여 최고의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자기 계획이 성공하지 못하자 자살하기 위해 목을 매달기에 이르렀다. 檗은 그러한 광경에 無感할 수 없었다. 더이상 버틸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굴복한 상태는 아니었다. 天主敎人이라고 부르기도 不當한 어떤 敎人 하나가 그에게 찾아와, 그가 느끼고 있는 듯 보이던 動搖를 完結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檗을 背敎시키는 데 성공하기 위해 가능한 온갖 수단을 다 썼고, 상상할 수 있는 온갖 術數를 다 동원하였다. 檗은 지치고, 그토록 시달림을 받아 정신이 昏迷해졌어도 공개적으로 背敎를 선언하지는 않았으며, 자기 앞에 놓여있는 모든 불행을 물리치기 위하여 婉曲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의 마음은 무너져내렸다. 오호라!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가 잃지 않고 간직한 신앙심은 그의 가슴속에서 자연적인 人情에 끊임없이 공격을 가했다. 한 편에는 하느님 아버지가 계셨고 다른 한 편에는 친아버지가 계셨다. 어찌 天主를 否認하겠는가? 어찌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하겠는가? 이러한 끊임없는 싸움은 그를 筆舌로 묘사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서글프고 우울해졌으며 말이 없어졌다. 밤낮으로 눈물이 그치지 않았고, 시간마다 신음소리가 들렸다. 衣冠도 더이상 벗지 않았고, 잠은 눈에서 멀리 달아나 버렸다. 아직은 가끔 음식에 손을 대기는 했지만, 입맛을 완전히 잃었으므로, 아무 맛도 없고, 몸을 위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黑死病(중국인들 말로 疫病)에 걸렸고, 8, 9일 앓고 난 후, 그가 땀을 흘리기 시작하자 간호하던 사람들이 여러 겹의 이불로 덮었는데, 이 무거운 이불 밑에서 숨이 막힌데다가 땀이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였으므로, 온갖 간호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른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위의 기록에서 몇가지 바로잡을 것이 있다. 李檗聖祖의 殉敎年度는 1786년이 아니고 1785년이니, 慶州李氏 族譜 古本(1813년본)의 기록 ”乙巳卒”과 葬禮式에 와서 丁若鏞先生이 輓詞 저작년도가 乙巳年이고, 또 1786년에는 페스트도 돌지 않았으므로 잘못 訛傳된 것이다.
이제 가정에 감금되어 10여일을 家長의 餓死罰로 斷食하다가 脫盡해가면서 面壁上에 써붙이고 黙想과 祈禱 중에 만 31세로 일생을 마치실 때 지은 殞命詩의 내용을 보자.


40. 殞命을 앞두고 이벽성조께서 읊으신 聖詩

原文:  “무협즁봉디셰샤입듕천은하열슉디년금환텬국”
漢譯: 巫峽中峰之勢死入重泉 (무 협 중 봉 지 세 사 입 중 천)
  銀河列宿之月現 錦還天國 (은 하 열 숙 지 년 금 환 천 국)
韓譯: 巫峽 中峰에 서 있는 形勢로다. 이제는 죽어서 黃泉 길로 들어가나,
 銀河水 별자리에 떠오르는 달처럼, 비단옷 곱게 차려 입고 하늘나라 가노라.

이 詩는 丁學術의 [李檗傳] 끝에 나오는 것으로서, 李檗聖祖께서 門中과 嚴親의 무서운 박해로 집안에 감금되어 食飮을 전폐하고 杜門不出한 상태에서 殞命하시기 직전에 지으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까지 漢文 原本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오로지 音譯된 古文 한글본만이 전해지고 있어, 그 참된 뜻을 讀解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사실 漢文으로 되어 있어도 讀解하기가 쉽지 않은데, 한글로 된 것을 다시 漢文으로 復原하여 풀어본다는 것은 훨씬 더 신경을 써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人物과 場所와 事件의 性格과 先後 左右 上下 內外의 狀況을 念頭에 두고서, 달리는 생각하기 어려운 결론에 이르러 原文의 漢文을 復原, 解讀한 것이다. 그러면 丁學術의 [니벽전] 끝에 나오는 한글 古語 원문부터 살펴보자.
“병오시셰공이두문불츌이러가쟈져텬쥬밀험긔쟉야시니부이로ᄡㅓ 진로야비오쟈라l언시드라시벽샹에투필l셔하l왈무협즁봉디셰샤입듕텬은하열슉디년금환텬국이라드라후둉젹감추드니필경득도야뉴월십일시에승텬직로시다나니라.”


   이를 그 詩句만 제외하고 현대문에 가깝게 바꾸면,

“丙午 是歲에 公이 杜門不出하시다가 自著 천주밀험기를 作하야 示하니, 父 이로써 震怒하야 非吾子라 大言하시더라. 時에 壁面에 投筆大書하되 曰, 무협즁봉디셰샤입듕텬은하열슉디년금환텬국이라 하더라. 그後 蹤迹을 감추드니 畢竟 得道하여 유월 십사일 子時에 昇天直路하시다 하느니라.”

이를 다시 그 難解한 詩句만 제외하고 보다 좀더 알기 쉽게 풀어본다.

“丙午년에 이벽선생이 杜門不出하게 되시었는데 『天主密驗記』라는 글을 지어서 아버지에게 보이시니, 아버지가 크게 노하여, ‘이는 내 아들이 아니로다’하며 안할 말까지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 때에 이벽선생은 방 안의 벽에다가 붓을 대어 큰 글씨로 글을 써 붙였으니 이르기를, ‘무협즁봉디셰샤입듕텬은하열슉디년금환텬국’이라고 하였다. 그 後에 종적을 감추시어 도무지 알 수가 없었는데, 마침내 得道하시어 유월 십사일 밤 열두시에 운명하시고 바로 하늘에 올라가시었다고 한다.”


   이제 한글로 음역된 李檗聖祖의 殞命詩를 漢文으로 옮기고, 그 漢文 單語에 대한 註解를 하자.

 巫峽中峰之勢死入重泉 (무 협 중 봉 지 세 사 입 중 천)
 銀河列宿之月現 錦還天國 (은 하 열 숙 지 년 금 환 천 국)

巫峽: 中國의 四川省 巫山縣의 동쪽 계곡. 四川省과 湖北省 巴東縣과의 경계지역. 兩岸이 絶壁으로 重疊된 천길 만길의 벼랑으로 보이는 險峻한 峽谷이다. 동양에서는 西陵峽, 瞿唐峽, 巫山峽을 三峽이라 하며, 그 중에 巫峽을 가장 險惡한 峽谷으로 친다. 따라서 四面八方이 모두 막혀 죽을 수 밖에 없는 처지를 비유할 때 쓰인다.
中峰: 사방이 모두 벼랑으로 된 絶壁의 산들이 疊疊이 둘러쌓인 深山 峽谷의 봉우리들 중에 한 가운데 있는 봉우리로서, 사방이 모두 수천길 벼랑 구렁텅이로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여, 건너갈 길이나 다리가 없이 막혀 있으므로, 날아다니는 독수리나 새들 외에는 아무도 오고갈 수 없는 바위산 뾰족한 봉 꼭대기를 말한다. 즉 더 이상 어떻게라도 해볼 수 없어, 죽을 수밖에 없는 최후의 最終 狀況이라는 뜻이다.
勢  : 形勢, 身勢의 뜻이다. 처지와 상황을 말한다.
死入: 할 수 없이 죽어서 重泉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重泉: 黃泉의 强調語, 즉 죽어서 저승으로 가는 두렵고 괴로운 힘든 죽음의 길이다. 특별히 최악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전제로 한 黃泉 길을 말할 때 종종 쓰이는 강조용법의 표현이다.
銀河: 하늘의 은하계, 즉 높고 맑고 고요한 평화의 하늘나라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巫峽에 對語가 되는 단어다.
列宿: 맑은 밤하늘에 별들이 무한히 넓게 그러나 한없이 고요하고 평화스러이 벌려 자리한 은하수 광경이다. 여기서는 中峰에 對語가 되는 단어다.
月現  :  고요하고 맑은 밤 하늘에 밝게 떠오르는 둥근 달. 여기서는 勢에 對字가 되는 글자다. 즉 中峰之勢와 列宿之月現 은 마치 巫峽中峯과 銀河列宿처럼 對句가 된다.
錦還: 비단 옷 입고, 고향에 돌아간다는 뜻인, “錦衣還鄕”과 유사한 표현의 준 말. 여기서는 死入에 對語가 되는 단어다.
天國: 흔히 말하는 天堂과 다른 표현이다. 天堂이 死後에 個人的인 善行의 상급으로 가는 곳이라면, 天國은 視角을 달리해서, 天學 즉 天主敎를 거부하고 박해하는 당시 사회와 국가와 달리, 天主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이니, 地上의 국가도 아니고, 黃泉, 즉 사람이 죽으면 땅 속 무덤에 묻히듯이, 地下의 死後 어두운 冥府도 아닌 맑고 밝고 평화로운 天學으로 통치되는 나라다. 여기서는 重泉에 對語가 되는 단어다. 
投筆大書: 特筆大書를 읽는 소리를 잘못 받아 적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나 특별한 붓을 가지고 크게 글을 써붙인다는 뜻이라는 점에서 大同小異한 표현이다.


   여기서 巫峽과 銀河, 中峯과 列宿, 勢와 月現 , 死入과 錦還, 重泉과 天國은 對句를 이루고 있음을 주시하게 되는데, 그 당시 韓國天主敎會 創立先祖들의 遺詩의 構造가 이러한 對立 구조로 짜여진 것은 그분들의 信仰과 權勢者들의 迫害가 서로 相剋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무협중봉지세를 巫峽重峰之歲로 즉 巫峽의 큰 12개 中峰으로서 12歲를 의미하는 것으로, 또 은하열숙지년을 銀河列宿之年, 즉 銀河水의 24 星座로서 24歲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풀이도 시도해보았으나 이는 전혀 作詩者 본인의 상황과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高麗 때 李仁老(1152~1220)가 지은 破閑集에서 文昌公 崔致遠 孤雲(857~?)에 관한 記錄 중에 당시 유사한 文體가 나오고는 있으나, 200여년 전 乙巳迫害(1785년) 당시 李檗聖祖께서 혹시 破閑集을 전에 읽으시고, 孤雲의 詩文에 몇몇 文字를 교체 代入하여 作詩하였을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박해 당시의 상황을 두루 直視하면서 限定된 漢字語의 언어세계 안에서 풀이할 수밖에 없는 주어진 조건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문장을 위의 註解를 전제로 한 걸음 더 풀어보자.


“四面八方 어느 쪽을 굽어봐도 천길 만길 벼랑끝이 보이지 않는 巫峽인데, 그 중에도 絶壁으로 된 봉우리들이 첩첩이 들어 서 있는(重峰) 한 가운데 봉우리(中峰)에 홀로 서 있는 形勢이니, 이제는 더 이상 한 발자국 어디로도 내딛을 수 없이 꼼짝 못하고 죽을 수밖에 별 도리가 없는 처지로다. 즉 나를 에워싼 이 地上의 勢力들은 巫峽 重峰의 中峰같은 威勢이니, 이제는 수 없이 곧 죽어서 黃泉 중에 가장 들기 힘든 重泉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도다(死入黃泉). 그러나 저 높은 밤하늘에 銀河水의 별들은 나란히 드넓게 자리하여 고요히 평화로운 가운데, 밝고 맑게 비추며 둥근 달 떠오르듯, 나는 이제 곱디고운 비단옷 차려입고서 훨훨 날아서 내 고향 하늘나라로 돌아가고 있노라(錦衣還鄕).”

그런데 의미는 비록 유사한 것이지만 作詩者 본인과 박해자들의 위치를 달리하여 음미할 수도 있으니, 박해자들의 그 당당하고 사나운 威勢를 巫峽의 疊疊重峰 중의 中峰에 비유하고, 자신은 드높고 고요하며 맑고 밝은 銀河水 星群들의 列宿을 배경으로 떠오르는 둥근 달(月이 現하는)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즉,

“내 앞을 가로막고 내 주위를 둘러싼 敵將들의 勢力이 마치 巫峽의 重峰之勢와 같구나. 그러니 나는 이제 畢竟 死하여 黃泉 길 중에도 가장 힘든 重泉 길로 入하고 있으나, 사실은 銀河水 별나라에 둥근 떠오르듯, 上帝의 聖恩으로 마련된 비단옷 곱게 차려 입고서 하늘나라로 돌아가고 있노라.”
 

41. 李檗聖祖 欽慕詩

李檗聖祖의 殞命詩가 본인이 지은 것이라면, 다른 이가 李檗聖祖의 德望과 學識과 人品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아래 欽慕詩이다.
15세의 정약용 선생이 1777년에 당시 23세의 이벽성조를 존경하고 흠모하면서 지어올린 獻詩, 즉 “贈李檗”과 맥을 같이하는 李檗聖祖 欽慕詩는, 李承薰 先生 作으로 거의 의심이 없다. 作詩年代가 불분명하나, 李檗聖祖께서 水標洞에서 甲辰年(1784년)에 李家煥, 李基讓 당대의 두 巨物 大學者들과 公開的인 天主敎와 儒敎의 敎理 비교 討論會에 大勝을 거두고, 丁若鏞 선생이 正祖 임금이 낸 中庸에 관한 質疑 70條目 宿題를 解答해주던 時期를 전후해서 지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襟懷灑落光風霽月之無邊 (금회쇄락광풍제월지무변)
思慮淸明長天秋水之相暎 (사려청명장천추수지상영)

옷깃에 품은 바를 모두 씻어 내리는 光風과 霽月의 無邊함이여,
생각과 마음이 모두 맑고 밝으니 長天과 秋水가 서로 비춰 채움이로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 단어의 뜻을 보자.

襟懷: 옷깃에 품어 있는 것들,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들.
灑落: 물뿌리고 쓸어내리다.
光風霽月: 도량이 넓고 시원하다는 뜻. 특히 날씨개인(霽) 후에 구름사이로 뜨는 달이 한없이 시원하게 비추듯 하는 人品을 말한다. 모르는 것이 거의 없고, 못하는 말이 거의 없는 博學多識하고 能辯達筆의 名人名師를 일컫기도 하는 표현인데, 어느 시대나 該博한 지식과 정확한 事理判斷과 분명하고 신속한 狀況判斷으로 識者들을 照明해주는 合理的이고 明快한 達辯家나 名文章의 인사들을 예전에는 光風霽月이라고 불렀다. 즉, “그 사람이야 光風霽月이지”.
  이 光風霽月이라는 표현에 해당되는 문맥이 『이벽전』에도 보이는데, 특히 “奇學多博”, “達通”, “註答如流水”등이다.
  “一到 廣州 鴛鴦山寺(즉 天眞菴)에 隱居하시매, 道友가 衆徒하니 聖敎要旨를 下筆하시더라. 己亥 是歲에 이십육세시에 賢友勉學이 爲上하여 衆集山寺하니, 公이 奇學多博하여 天文 地理 醫藥 卜術 性命之術에 達通치 아니함이 없으니 註答하시기 如流水하고 其 門下가 如叢林이라 巷間에 널리 그 名聲이 傳誦되더라”(니벽전).
思慮: 생각과 마음, 襟懷에 對語이다.
淸明: 순수하여 맑고, 진솔하고 정직하여 밝다는 뜻이다. 灑落에 對語이다.
長天: 높고 넓고 멀고 맑은 긴 하늘. 光風에 對語이다.
秋水: 가을 연못물, 강물, 등은 불순물이 가라앉아 맑고 고요하다. 秋水는 霽月에 對語다.
相暎: 하늘과 물이 서로 비추어 맑음과 밝음을 서로 더해주고 채워줌을 말함이니, 天上 上帝께서 保佑하시는 恩寵과 地上의 李檗聖祖의 心性 學德이 相互一致하여 더욱 완전하게 빛남을 의미한다. 이 역시 無邊에 대한 對句다. 위의 賢豪氣相投와 같은 文脈이다.


   이 글은 李檗聖祖의 親筆, 즉 “德操戱筆”과 半行의 원본 두루마리에 함께 나오는데, 작자와 연대가 정확하지 않으나, 내용은 광암 李檗聖祖의 德望과 人品과 학식과 문장력 등을 欽慕하여 쓴 것이라는 점에는 누구도 異義가 없겠으며, 문장의 내용과 구성을 보면 일반 書生들의 수준을 훨씬 넘는 大家들의 筆致가 아닐 수 없고, 또 李檗聖祖에 대하여 잘 알고 평소에 진심으로 존경하던 學者라야 하므로, 필자가 누군지 한계가 좁혀진다.
적어도 李檗聖祖를 미워하고 천주교를 박해하던 자들이 이런 글을 쓸 리가 만무하며, 李檗聖祖의 親筆을 소장할 정도라면 매우 친밀한 관계인이라야 하므로, 丁若鏞 선생이나 李承薰 선생으로 한계를 좁혀서 보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自一, 原河  冊主 李一’이라는 글이 나오나, “一”을 글씨라기보다 手決의 標識로 본다면, 사실 이 글의 작자는 李承薰선생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이 자료들이 蔓川遺稿와 함께 발견된 점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고, 책이나 글을 몹시 아끼던 분이며, 북경주교에게 보낸 李承薰 先生 서한의 문맥에서 다행이 同質性을 띤 유사한 표현을 발견하게 되고, 같은 흐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書翰도 漢文 원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고, 佛語 번역문만이 우리 손에 들어와 있다. 즉 李承薰 聖賢께서는 李檗聖祖를 가리켜, 博學多識한 大聖賢道師로 표현하였기에 프랑스선교사들은 이를 번역할 때, “un savant”, 혹은,  “un Maître”, 등으로 써야 할 만큼 저들에게 認識되었을 것이니, 이는 바로 光風霽月과 같은 인물에 대한 표현으로서, 이 詩의 著者가 당시 李承薰 聖賢이었음을 짐작 이상으로 확신할만한 것이다. 특히 詩句의 형태가 儷文體를 띠고 있음을 볼 때, 丁若鏞의 글이라기보다는 李承薰 聖賢의 글임을 확신시켜준다고 하겠다.


   이 글에서도, 襟懷와 思慮, 灑落과 淸明, 光風과 長天, 霽月과 秋水, 無邊과 相暎이 對句를 이루고 있는데, 당시 天學(天主敎)을 실천하던 이들과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박해하던 이들이 겪는 상반된 고충이 漢詩의 對句 성격을 더욱더 强化시켰다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兩極對立化 現實에서 쓰여진 詩文들임을 알 수가 있다.
이 詩를 원문에서 현대문으로 옮기기 전의 중간 단계 풀이와 단어 연결을 해보는 것이 현대 학도들에게는 더 쉽고 재미있을 수도 있다. 즉,

襟懷를 灑落하는 光風霽月의 無邊함이여,
그 思慮의 淸明함은 長天과 秋水가 相暎함이로다.

한마디로 曠菴 李檗聖祖를 光風霽月로 표현한 것이다. 특히 長天과 秋水의 相暎이란 하늘의 무한한 恩德과 땅의 맑고 밝은 品性의 合一과 合成을 뜻하는 것으로서 李檗聖祖의 德과 人格을 말하고 있다. 


42. 1785년에 門中과 家庭의 迫害로 32세에 殉敎하신 李檗聖祖의 葬禮式에 와서  25세의 丁若鏞선생이 지은 輓詞

   李檗聖祖의 葬禮式에서 丁若鏞先生이 지은 輓詞는  李檗聖祖의 神仙같은 인품과 聖賢君子의 德望과 豪傑의 氣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동시에 위의 殞命詩를 共感케 한다.

仙鶴下人間(선학하인간)  신선나라 학이 인간세계에 내려오시니
軒然見風神(헌연견풍신)  그 모습에서 우리는 흔연히 神의 풍채를 보았도다.
羽翮皎如雪(우핵교여설)  날개와 깃털은 희기가 눈과 같았으니,
鷄鶩生嫌嗔(계목생혐진)  닭과 오리떼들이 샘을 내고 골을 부리며 미워하였도다.
鳴聲動九宵(명성동구소)  그 학의 울음소리는 아홉하늘까지 진동시켰고,
嘹亮出風塵(료량출풍진)  그 학의 울부짖음은 풍진세상에 뛰어났었도다.
乘秋忽飛去(승추홀비거)  때가 되니 가을을 타시고 훌쩍 훨훨 날아가버리시니,
怊悵空勞人(초창공로인)  아무리 슬퍼하며 애통해 한들 무슨 소용있으리오.
   

43.  韓國天主敎會 創立者 洗者 요한 曠菴 德祖 李檗 聖祖의 人的事項

李檗聖祖의 이름과 死亡年度 등에 관해서 이미 몇 차례 여러 곳에서 밝혔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확인해 두고자 한다. 李檗聖祖의 死亡年度에 관해서는 李檗聖祖의 慶州李氏門中에서 편찬․발행한 木版本 族譜(1813년 癸酉년 발행)에, 李檗聖祖의 사망연도를 “乙巳(1785년) 卒”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족보는 자료 수집과 편찬시기가 그 부친 李簿萬(1727~1817)과 동생 李晳(1759~1829) 형 李格(1748~1812) 및  아들 李顯謨(1784~1847) 등, 직계 가족들의 생존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兩班大家에서 직계가족들이 살아 생전에 편찬한 족보에 '乙巳年 卒'로 되어 있으니, 이것이 가장 信憑性있는 기록이다. 더구나 특히 乙巳年에 다산 丁若鏞이 李檗聖祖의 葬禮式 때 輓詞를 지었고, 이 輓詞가 乙巳年 作으로 아직까지 茶山의 詩文集에 年代順序대로 收錄되어 남아 있다. 만일 李檗聖祖께서 丙午年(1786년)에 死亡하셨다고 한다면, 死亡 1년 전에 輓詞를 지어 葬禮式을 치렀다는 것인데,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하겠는가?
아직도 일부 교회 서적에서는 李檗聖祖의 사망연도를 1786년으로 계속 그대로 옮겨 적고 있는데, 앞으로는 모든 著述家들이 좀 관심을 가지고 보다 정확히 해야 하겠다.


   특히 李檗聖祖의 死亡原因에 대해서도 틀린 주장이 교회 역사서에 전재되고 있는데, 달레신부의 敎會史에는 당시 페스트에 걸려 죽었다고 하나 이러한 주장도 虛僞인 것이, 1786년 봄 당시 각종 기록을 보면 한국에 쥐통병이 퍼진 적이 없으며, 전국에서 그 무서운 쥐통병 즉 페스트로 李檗聖祖 한 사람만 죽을 수도 없는 것이다. 사실 李檗聖祖의 사망연도는 그 어른의 죽음을 놓고 殉敎냐 病死냐를 확정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근거자료가 되는 것이다. 李檗聖祖의 死亡年度가 1785년 乙巳年임을 입증하는 사실 중에는 경주 李氏 족보에 李檗聖祖를 중심으로 上下左右로 여러 형제들과 조상들과 후손들의 死亡年齡을 볼 때 그 집안에서 31세 이하의 젊은 죽음을 한 사람은 李檗聖祖 한 분뿐이니, 만일 당시에 쥐통병이라고 부르던 그 무서운 傳染病인 페스트가 조선에 돌았었다고 하면, 예방약이나 치료방도가 거의 없던 그 시절에 가족 중에나 그 집안에서나 마을에서나 가문에서 같은 해 봄에 사망한 이들이 한 두 명이라도 있음직하나, 그렇지 않고 全無한 것으로 보아 이 역시 달레의 교회사 기록은 잘못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는 마치 '李檗'이라는 이름은 “이벽선생이 固執이 세어서 그 부친이 아들을 '벽'이라고 이름지었다”는 것과 같이 잘못된 것이니, 檗이라는 글자는 고집을 뜻하는 고집 '벽'자가 아니고, 횡경나무 '벽'자이며, 이벽 선생의 친형제들과 사촌, 육촌, 팔촌들이 모두 나무 '木'자의 行列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예로, 그 형은 格, 동생은 晳, 사촌들은 樸, 栢, 楨, 林, 檍, 棟 등 모두 외자로 나무 木字 변에 쓰는 이름들이다.
더욱이 족보에 기록하는 이름은 宗親會의 족보 관계자들이 짓거나 아니면 이들과 상의하면서 그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짓더라도 아들의 장래에 대한 희망이나 소원을 따라 짓게 되지, 아이의 고집이 세어서 그 성격을 보고 지을 수는 없으니, 그 이유는 고집이 세고 안 세고를 알만한 연령이 되기 전에 作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茶山 丁若鏞의 末年期의 기록에까지도 종종 틀리고 있는 것은 李檗聖祖의 이름 글자 중에 字를 李德操라고 하며, '操'字를 쓰고 있는 것인데, 족보에서 밝혀지고 있는 당사자의 이름이나 묘지나 출생년도나 사망년도에 관한 한 다산의 문학적인 그 어떤 기록보다도 門中의 族譜上 기록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다고 하겠다.


   특히 傍證資料들이 더 있는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즉 그 족보 기록에 李檗聖祖뿐 아니라 그 형제분의 字가 모두 老人이나 始祖의 '어른', 혹은 '할아버지'라는 의미를 갖는 이름글자로 통일되어 있다. 즉 그 형 李格은 字가 天老(하늘에서 내려온 노인)이고, 李檗聖祖는 德祖(德이 있는 할아버지)이며, 그 동생 晳은 字가 大叟(큰 늙은이)이고, 사촌들 중에도 拭은 字가 敬老이고, 樸은 聖老이니, 李檗聖祖의 字는 다산 정약용의 기록에 나오는 德操가 아니라 족보에 나오는 德祖임이 확실하다. 그러면 ‘德祖’를 왜 ‘德操’라고도 하였을까? 그 이유는 이벽성조의 天學修道에 집착하여 어린 소년시절부터 결혼생활을 돌보지 않고 마치 당시의 스님들처럼 천진암 산속에 들어가서 入山修道에 전념하며, 아버지의 권유나 소원도 듣지 아니하고, 修德生活에 집중하는 태도 때문에 족보상의 형제들이 가지고 있는 字의 同類를 떠나서 德祖를 德操로 쓰기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自他가 그렇게 부르고 사용했었으리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그리고 官 기록이나 『闢衛編』등에서, 이벽의 벽을 蘗으로 쓰고 있으나, 이 역시 잘못 전해진 것이고, 李檗聖祖의 墓誌石과 친필서명에서 확인된 바대로, 위에 이미 밝힌 '檗'字임을 재확인하여 알리는 바이다.
그러므로 韓國 天主敎會 創立者 李檗 聖祖의 정확한 人的事項은 다음과 같다. 즉, 姓氏는 慶州李氏(月城李氏라고도 함)이며, 號는 曠菴(庵이 아니고, 菴이다)이며, 字는 德祖(操가 아니고 祖이다)이고, 이름은 檗(蘗이 아니고 檗이다)이며, 誕生年은 1754년, 甲戌年(족보대로다)이고, 殉敎는 1785년, 乙巳年(1786년, 丙午年이 아니고, 1785년 乙巳年이다)이다. 生日은 전해지지 않고 있고, 다만 臨終日은 음력 6월 14일 밤 子時로 丁學述 著 「니벽전」에 나올 뿐이다. 誕生地가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배알미리)이라는 설(丁氏 관계기록)과, 경기도 포천군(내촌면 화현리) 승천고을(丁學術의 「니벽전」), 두가지 설이 있는데, 이벽 성조의 묘와 그 부모 형제들의 묘가 발견된 포천 花峴里를 탄생지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며, 필자는 이를 확신하고 있다(앞으로 기회가 있을 때 재론할 것이다). 臨終地는 당시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보건대 서울 水標洞이나 경기도 廣州郡 東部面 斗米(윗 배알미리)에 있던 시골집(鄕邸)보다는 포천군 內村面 花峴里의 新基洞에 있는 아버지 李簿萬公의 自宅이었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이 역시 앞으로 재론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聖敎要旨』나 『天主恭敬歌』, 明禮坊 集會나 乙巳迫害에 관한 기록, 丁學述의 『니벽전』이나 丁若鏞 선생이 기록한 여러 墓誌銘, 또 당시 정부의 『推案及鞫案』, 『朝鮮 王朝實錄』이나 샤를르 달레의 『韓國天主敎會史』, 『慶州李氏 族譜, 『慶州李氏 家乘』, 宗親 후손들의 傳承과 權哲身, 李家煥, 李溥萬 등의 여러 친필 書簡등에 나오는 각종 자료들은 相互補完的인 것으로서, 部分을 全體視하지도 말아야 하고, 一面的인 相異點들을 全面的인 相反 內容化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 동안 필자가 대조한 바로는 墓誌石에 새겨진 내용과 父母와 친 兄弟들과 친아들(27세 때)의 생존시에 편찬된 族譜의 기록 내용이 가장 정확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 8장
平信徒로서 善意와 熱誠으로 司祭職務까지 隨行하던
朝鮮天主敎會 創立先祖들 


44. 韓國天主敎會창립선조들이 平信徒들이면서도 善意와 熱誠으로 結成한 自發的인 臨時準聖職者團의 聖務活動

   교회 역사상, 성직자나 수도자,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이 스스로 교리를 연구하여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자기들 중에 대표자를 해외에 파견하여 더욱 천주교회를 알아오게 하고 성직자가 없는 상태에서 臨時聖職團을 결성하여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여러 지방에 전도 책임자를 정하여 활동하는 한편 미사를 드리고 고백성사를 집전하였다는 것은, 우리 한국천주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이 얼마나 순수하고 열성적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들이 거행한 미사나 고백성사가 비록 현행 敎會法規上으로는 無效라 하더라도, 당시 신도들에게는 信仰心을 강화하는데 매우 풍성한 결과를 냈던, 사목적으로는 효과적인 조치였다. 이에 대한 연구와 분석과 해석은 지금 준비 중인, 『韓民族 天主敎 信仰史』에서 細論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우선 다블뤼 주교가 집필한 자료로 편찬한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한편 항상 매우 활발하고 전교 사업을 하던 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얼마동안 고요한 곳으로 물러가 있을 필요를 느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그의 유일한 스승이었던 聖神의 학교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하고자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먼저 聖花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 알았었다. 이를 위하여 그는 규칙적인 避靜을 할 결심을 하고, 자기의 계획을 더 쉽게 실천하기 위하여 龍門山에 있는 어떤 적막한 절로 들어갔다. 친구들 중에서는 오직 한 사람, 趙東暹 유스띠노 만이 그를 따라갔다. 절에 도착하여 그들은 피정 동안에는 내내 서로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그들은 우리 主와 그 성인들을 본받고자 하는 원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信心修業에만 전심하면서 절에서 8일을 지냈다. 진정한 천주교 정신에 잘 맞는 이러한 실천은 그들 자신과 그들이 피정 후에 가르친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얻게 하였음이 확실하다. 이듬해 丁未(1787)년에는 천주교를 반대하던 소리가 차차 가라앉고 반대도 덜 심해져서, 폭풍우에 쓰러졌던 사람들 중의 많은 이가 그들의 뉘우침을 나타냈다. 그 중에도 마음이 약하여 흔들렸던 李承薰 베드로가 權(日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와 丁若鏞, 丁若銓 형제를 다시 만나러 왔다. 이들은 두 팔을 벌려 그를 맞아들였다.
 이 무렵에 복음의 전파를 더 쉽게 하고 新入교우들의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하여, 權(日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李(承薰) 베드로, 丁若鏞 형제 및 다른 유력한 신자들이 자기들끼리 敎職制度를 세우기로 계획하였다. 이런 생각이 아무리 괴상해 보이더라도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기는 하였다. 그들의 본보기가 된 중국의 천주교인들처럼, 서양에서 온 牧者들을 가지는 행복을 누리지 못한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한 교회가 지도자 없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司祭職의 本質을 모르고, 그것이 大司祭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지지 않는 계통으로 傳承되어옴을 모르는 그들은, 자기들끼리 주교와 신부를 내는 것보다 더 잘 하는 일은 없다고 믿었었다.


    (李)承薰 베드로는 北京에서 주교, 신부, 그 밑의 성직자들로 된 가톨릭의 敎職制度가 실지로 적용되는 것을 보았었다. 그는 그 도시의 성당에서 미사 聖祭에도 참여하였고, 그가 있는 데에서 성사가 거행되는 것도 보았었다. 그는 자기의 모든 기억을 되살렸고, 그들은 신자용 禮節書나 교리서에 있는 여러 가지 설명을 빌어 완전한 조직 계통을 세우고, 곧 牧者들의 선정에 들어갔다.
   그 지위와 학식과 덕망으로 가장 뛰어난 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주교로 지명되고, 李承薰 베드로, 李「단원」(存昌) 곤자가의 루도비꼬, 柳(恒儉) 아우구스띠노, 崔昌顯 요한, 그 밖의 여러 사람이 신부로 선출되었다. 주교 成聖式이나 司祭 敍品式 비슷한 어떤 의식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들은 각기 자기 임지로 직행하여, 설교하고, 聖洗를 주고, 告白聖事와 堅振聖事를 주었다. 그리고 미사聖祭를 드리고, 신자들에게 聖體를 領하여 주는 등 일종의 신자 행정을 시작하였다. 그 시대의 기록에는 이 성사들에 대하여만 말이 있다. 이 목자들이 준 영세는 확실히 유효하여 再生의 은총을 주었다. 그들이 준 다른 성사는 무효였음도 물론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들의 聖職 수행이 도처에 열심을 촉진하고 전국에 신앙을 전파함에 새로운 충동을 주었음은 확실하다. 그 때 천주교인들이 열광적이었다는 것과 禮節에 참여하고 성사를 받는 데에 거룩한 열성을 가졌었다는 말을 지금도 하고 있다. 조선의 처음 본토인 신부요 유명한 순교자인 金大建 안드레아의 할머니는 자기에게 영세를 준 자기 삼촌 李「단원」(存昌) 곤자가의 루도비꼬는, 미사를 드릴 때 금잔을 썼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祭衣는 화려한 중국 비단으로 만들었었는데, 그 모양은 우리 祭衣같지가 않고, 조선사람들이 제사드릴 때 쓰는 옷과 비슷한 것이었다. 신부들은 중국에서 가톨릭 예식을 집행할 때에 쓰는 冠을 썼다. 신자들의 告白을 들을 때 그들은 단 위에 높은 의자를 놓고 앉았고 告白하는 사람들은 그 앞에 서 있었다. 보통 補贖은 희사였고, 더 중한 죄에 대하여는 신부가 직접 회초리로 죄인의 종아리를 때렸다. 조선 예법에 따라 지체있는 부인들을 보는 것을 피해버릇한 신부들이 처음에는 그런 부인들의 고백을 듣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하도 간절히 졸랐기 때문에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신부들이 천주교인들을 방문하지 않고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와서 성사를 청하였다. 그들은 걸어서 다녔으며 언제나 허영과 교만을 피하도록 서로 격려하였다.


  서울에서는 崔貫泉 요한이 집 한 채를 세내어 성사를 거행케 하였다. 그는 매우 활동적이고 몹시 총명하여 신부들을 영접하고 교우들을 준비시키는 등 모든 일을 처리하였다. 그는 귀찮음과 피곤함도 꺼리리 않고 밤낮으로 이 직분에만 몰두하였다. 그는 교회의 總會長 격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비록 천주교를 신봉하지는 않았으나, 자기 집에서 행하여지는 많은 집회를 반대하기는커녕 도리어 할 수 있는 대로 그것을 두호하였다.
  임기응변의 이 조선 聖職者들은 많은 성과를 거두며 또 완전한 善意로 거의 2년 동안 이렇게 그 직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己酉(1789)년에, 교회서적의 어떤 구절을 더 자세히 연구한 결과, 주교와 신부들의 머리에는 자기들의 선출과 그 職品의 有効性에 대한 중대한 의혹이 생겨났다. 그들은 일체의 성직 수행을 경솔한 처사로 생각하여, 즉시 중지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하여 北京 주교에게 문의하는 편지를 쓰기로 결의하였다. 모든 신자들 앞에서 그런 직위에 올랐다가, 일반의 웃음거리가 될 염려가 있는데도, 즉시 그 직위를 버린다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뜻은 올바르고 그들의 신앙은 진실하였으므로, 그들은 어떠한 구실로도 거룩한 것을 모독할 위험을 당하기는 원치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즉시 平信徒 자리로 돌아갔고, 그 때부터는 신입교우들을 가르치고 외교인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일에만 전심하였다.


  北京 주교에게 문의하는 편지는 (李)承薰 베드로와 權(日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가 썼고, 그것을 확실히 전달할 방도를 모색하였다. 年例의 使臣 행차가 자연스러운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중국 천주교회와 필연적으로 비밀이어야 하는 연락을 취하는 위험한 사명을 맡고자 할 유능하고 헌신적인 인물을 찾아내야만 하였다. 使臣 일행에는 천주교 신자가 없었으므로 외교인들 모르게 신자를 한 사람 거기에 들여보내도록 해야만 하였다. 이 중요한 사명을 위하여 예비신자 尹有一 바오로에게 눈을 돌렸다.
  (尹)有一바오로는 驪州 지방의 양반집 후손으로 權씨 집의 제자였고, (權日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가 그에게 교리를 가르쳤었다. 그의 성격이 온순하고 친절하며 비밀을 잘 지키므로 계획된 이 사업의 적임자였다. 그는 그에게 맡기는 사명을 수락하여 주교께 드리는 편지를 지니고 장사꾼으로 변장하여 1789년 그 해 10월에 北京을 향하여 떠났다.


  서울서 北京까지는 3천리 길이다. 겨울 동안에 외국 땅에서 하는 이 긴 여행은 매우 고생스럽고 진정한 위험을 동반하였다. 使臣 일행 중의 여러 사람이 도중에 걸린 병으로 인하여 쓰러지는 것을 보는 것도 드물지 않다. 어려서부터 공부에만 전심하고 집안에만 들어앉아 있기만 하여서 아무러한 여행 경험도 없고 또 모르는 동행들 가운데 인간의 아무런 도움도 없이 외로운 存在로 있는 (尹有一) 바오로에게는 보통의 피로도 훨씬 더 큰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같은 직업을 가진 것처럼 꾸미는 모든 사람들처럼 걸어서 길을 가야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全能한 은총으로 지탱되던 만큼 다행히 北京에 도착하였다. 그는 곧 주교를 찾아가 자기가 가져 온 편지를 전해 드리고 조선에서 일어난 모든 것과 새로 태어나는 천주교인 집단의 기쁨과 고민을 아주 자세하게 이야기해 드렸다. 뜻하지 않은 (尹有一) 바오로의 도착은 北京교회에 큰 기쁨을 주었다. 아무 신부도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파한 일이 없는 나라에서 와서, 그 나라에 신앙이 얼마나 기묘하게 보급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이 천주교인의 존재는 선교사들과 특히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가장 즐거운 광경이었다. 주교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이 새로운 양들에게 서둘러 司牧敎書를 썼다. 


  庚戌(1790)년 봄에 (尹有一) 바오로는 使臣 행차를 따라 귀국 길에 올랐다. 그는 北京에서 영세와 聖體와 堅振聖事를 받았었다. 이 천상의 도움으로 힘을 얻은 그는 모든 어려운 고비를 교묘하게 벗어날 수 있었고, 의심을 받지 않고 국경을 넘어 아무런 곤란한 문제도 당하지 않고 서울로 돌아왔다.
  주교의 회답은 (尹有一) 바오로가 그것을 옷 속에 더 쉽게 감춰서 더 확실하고 더 쉽게 조선에 들여 올 수 있도록 명주 조각에 쓰였었다. 편지 받을 사람은 李(承薰) 베드로와 權(日身) 사베리오로 되어 있었다. 주교는 우선 신앙에 불러 주시는 헤아릴 수 없는 은혜에 대하여 지극히 착하시고 지극히 위대하신 천주께 不減의 감사를 드리라고 신입교우들을 권면하였다. 그는 또한 복음의 은총을 보존하기 위하여 필요한 방법을 쓸 것과 항구한 마음을 가질 것을 권하였다. 믿을 교리와 천주교 윤리의 간단한 설명이 있었고 (李承薰) 베드로와 (權日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가 함부로 司祭聖職에 개입한 데 대한 책망이 있었다. 주교는 그들이 神品聖事를 받지 않았으므로 미사聖祭를 절대로 거행할 수 없고, 영세를 제외한 성사를 행할 수가 절대로 없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교우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며 未信者들을 입교시킴으로써 하느님께 대단히 기쁜 일을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이러한 행동을 꾸준히 계속하라고 격려하였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린 이 답장은 이제는 아무런 의심도 남겨 놓지 않았다. 이 편지는 완전히 복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졌고, 각자는 聖職 수행을 중단하는 슬기를 가졌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조선 교우들은 성사를 받을 마음이 간절하였다. (尹有一) 바오로가 北堂에서 본 성당이며, 복음을 전하러 땅의 극변에서 온 서양 선교사들이며, 그들과 가졌던 대화와 그가 받은 성사에 대하여 말하는 그의 이야기로 흥분한 신자들은 北京 주교께 새로 편지를 보내어, 傳道로써 그들을 가르치고 성사 거행으로 그들을 힘있게 해 줄 수 있을 신부들을 보내 달라고 간청하기로 결심하였다. 마침 기회는 좋았었다. 1790년 9월 (양력)에 80회 탄신을 맞는 乾隆 황제를 축하하기 위하여 別使 일행이 떠날 참이었다. 그래서 尹(有一) 바오로는 다시 중국 길을 떠났다. 이 둘째 번 여행에는 禹라는 예비신자가 동반하였는데, 이 사람은 조선 왕의 관리로서 왕의 명령을 받아 北京에서 몇 가지 물건을 사 오기로 되어 있었다. 이 두 使者는 사고 없이 도착하여 동포들의 편지를 주교께 전하였다.


  그 편지에는 목자를 얻기 위한 신입교우들의 간청 외에, 자기들 나라의 계약 관계와 迷信과 조상숭배와 그 밖의 몇 가지 어려운 점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도 들어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주교는 학식있고 열성있는 선교사들의 의견을 들은 다음, 조선사람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고 그들에게 신부를 보내 주겠다고 언약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신부의 입국을 준비하고 도울 수 있도록 어느 시기에 어떤 모양으로 그 신부가 국경에 나타날 것인지를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제9장
韓國平信徒들의 自發的인 司祭 養成


45. 평신도들로서 임시 준성직자단의 결성과 활동은 사제양성의 첫걸음


   그런데, 한국천주교회의 특징적인 자랑 중의 하나는, 평신도들이 성직자들의 성소를 싹틔우고 키우고 마침내 성직자 양성을 뒷받침하였다는 것이다. 일찍이 교회 초기에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천주교회의 법규와 규정을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임시 準聖職者團을 결성하여 사제직을 수행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당시 교회 규정상 평신도들이 사제직을 합법적으로 받지 않고서 미사봉헌이나 고백성사 거행이 합당한 지 의심을 갖게 되어, 자발적으로 중단하고 북경 주교에게 문의하였다가 불법임을 알고는, 적어도 1789년경부터는 더 이상 聖事擧行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신도들은 조금씩 신앙심이 약해지고 잘 모이지도 않고, 심지어 교회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司祭를 보내달라고 북경교회에 청하였으나 이것도 그리 쉽지 않았다. 북경교회자체도 당시 사정을 보면 사제가 부족한 편이었다. 더군다나 신해년박해(1791년)와 을묘년박해(1795년), 혹심했던 신유년박해(1801년)가 일어나면서 北京敎會와의 연락자체도 어려워졌다.


   을묘년박해 때 태어났던 丁夏祥이 성장하여, 이후에 다시 북경교회와 연락을 취하기 시작하였고, 성직자 파견을 다시 요청하였지만, 이 역시 어려웠고, 다만,  사제가 될 수 있는 지원자를 朝鮮에서 뽑아 보내면 신학교육을 받게 하고 사제품을 주어 조선에 귀국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사제들의 獨身制度 때문에 결혼하지 않은 청년을 보내야 하는데,  당시 우리 나라 사회 관습에는 이른바 ‘꼬마신랑’, 즉 早婚 풍습 때문에 마음놓고 북경에 보낼 만한 청년들은 대개 결혼한 상태였다. 예를 들어, 정약용선생이 15세에 이미 결혼하였었다. 그리하여 정하상 자신이 16세 경에 북경 교회에 일찍 가게 되는 것도 단순한 연락관계만은 아니고, 사제지망자로서 신학생이 되기 위한 목적이 더 컸었다. 그러나 북경 주교로부터 국내 교회를 보살피고 또, 어머니와 누이 가족들을 보살피라는 명을 받고, 신학교 입학은 미루고 귀국하는 수밖에 없었다.


46. 김대건, 최양업, 최방지거, 세 소년들 그 이전에도

이미 조선천주교회가 파견한 신학생들이 마카오와 요동에 있었다.

1813년 북경 교구 사목국장 신부의 사목계획보고서에는, 조선에 사제성소가 많으니 뽑아다가 사제를 만들어 북경에서 활동하도록 하자는 계획이 성문화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국내에는 당시 18세의 정하상 뿐 아니라 사제지망하는 소년들이 더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827년에 조선인 허신학생이 신부가 되기 위하여 마카오에 와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음을, 당시 마카오의 교황청 관리자(administrator apostolicus)로 있던 움피에르(Umpierres) 신부가 보고하자,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에서는 그 조선인 신학생을 대강 빨리 가르치도록 하여(acceler) 조속히 조선에 귀국시켜 다른 사제지망자들을 보내게 하라는 답서까지 보낸 바 있다.


   1835년에, 초대조선교구장이었던 브뤼기에르(Mgr. Brughier) 소주교(1792~1835)가 조선교구 신자들에게 최초로 보낸 편지는 라틴어로 되어 있고, 마카오로 보내졌는데, 그 이유는 그 때 마카오에는 이미 조선인 신학생들이 있어서 이를 라틴어에서 朝鮮語로 번역하여 요동을 거쳐(?) 조선 국내의 정하상 회장 등 교우 대표들에게 전달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브뤼기에르 소주교는, 죽기 전에 요동 펠리구에서 파리 외방전교회로 보낸 마지막 서간에서, “요동에 있는 조선 신학생들을 보니 아주 희망적인 좋은 학생들이며, 앞으로 조선인 사제 양성을 위하여는 마카오보다 기후가 조선과 비슷한 요동에 신학교를 세우는 것이 합당하겠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1836년 말에 김대건, 최양업, 최과출 3명의 소년들이 마카오로 떠나는 것이 최초가 아니고, 그보다 훨씬 전에, 즉 적어도 10여년 전에 이미 한두 명이 아닌 꽤 여러 명의 조선인 司祭 志望者들이 요동과 마카오에 와 있었음은 확실하다.
다만 이들이 사제품을 받아 사제가 되었다는 기록이 아직 발견되지 않을 뿐이다. 필자는 앞으로 언젠가는 분명히, 김대건 신부보다 먼저 사제가 된 조선인 젊은이들이 조선에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이나 혹은 동남아 지역 등에 어디엔가에서 있었음이 들어나리라고 확신하고 있으며, 이를 밝혀내는 것은 장차 後學들이 해야할 일 중의 하나다.


47. 李承薰 聖賢의 孫子인 李在誼 토마스(1807~1868)와 丁若鍾 聖賢의 아들 丁夏祥(1795~1839)은, 김대건(1821~1846), 최양업(1821~1861), 최과출(1822~1838) 신학생들보다 앞선 국내 선배 大神學生으로서 大品(*次副祭品부터 司祭品을 通稱하는 말) 직전이었다.

   정하상을 중심으로 하는 당시 조선천주교회 평신도들은 聖召者들을 은밀히 발탁하여 키우면서 해외로 보낸 것이 확실하고, 특히 정하상 자신은 마카오 신학교에 유학가지는 못할 망정 때를 기다리며, 스스로도 사제직을 준비하는 한편, 제자들을 選拔, 교육 및 준비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 증거로 丁夏祥 회장 자신도 사제가 되기 위하여 결혼을 하지 않고, 신학교도 없고 교수도 없는 국내에서 獨學으로 라틴어(Latina)와 敎理神學, 倫理神學 등을 배우고 있었다. 앵베르 범주교의 글에는 정하상 바오로에게 바로 부제품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쓰고 있을 정도로 정하상은 열심히 신학공부와 라틴어 공부에 매진하였었다.
또 李承薰 성현의 손자 李在誼 토마스(1785~1868)도 정하상 회장보다 비록 12살 아래였지만, 국내에서 라틴어와 神學을 배우고, 부제품까지 받았었다. 이재의 토마스가 부제품을 범주교(Mgr. Imbert)에게서 받았는지, 아니면 마카오나 북경에서 어느 주교한테 받았는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그러나 그가 능숙한 筆體로 쓴 5통의 라틴어 보고서 맨 끝에는 번번히, “부제 토마스 이재의”라는 서명이 있음은 필자 자신이 확인한 사실이다.


   다만 李承薰, 尹有一, 등이 북경을 왕래하며 서양의 천주교 신부들과 북경에서 접촉하면서 聖事를 받고 성물과 서적을 가져오고 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박해는 더 심해졌고, 더욱이 신유박해 때 알렉시오 黃嗣英進士의 帛書가 발각되자, 해외 西洋 신부들과의 접촉을 철저히 금하며 감시하던 당시 조정의 눈을 피하느라고 조선 천주교회의 丁夏祥 會長을 비롯한 평신도지도자들은 국외로 출국시키는 神父 志望生들에 관한 모든 사항을 너무나 철저한 비밀에 붙였기 때문에, 지금 국내에는 자료가 전해지지 않고 있고, 어쩌다가 해외 자료에 조금씩 묻어 나오는 흔적으로 김대건 신부 유학 이전에도 이미 조선천주교회 평신도들은 사제 성소자들을 해외로 파견하였었음을 겨우 알 수 있을 뿐이다.
1831년에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1836년에 서양인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정하상회장의 인도로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 성 모방신부는, 정하상 회장의 안내로 공소를 방문하면서, 이미 평신도들이 20여년 간 힘써 온 邦人司祭 養成을 위하여, 미리 선발 교육하여 대기상태에 있던 김대건, 최양업, 최과출, 등 세 소년들을 마카오로 보내는 데에 추천서를 쓰게 되었다. 


   1836년 12월 9일 당시 15세의 김대건, 최양업, 14세의 최과출 세 소년들은 정하상 회장의 안내로 신의주까지 가서 중국인 余恒德 파치피코 신부와 중국교우들과 함께 북경까지 간 후, 계속하여 걸어서 1837년 6월 6일에는 마침내 마카오에 도착하게 되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나이의 이 소년들은 영하30도까지 내려가는 만주벌판을 지나서, 다시 북경과 제남을 거쳐 영상 30도까지 오르내리는 무더운 남쪽 나라 상해 마카오까지 약 2만리길을 6개월동안 걸어갔다. 물론 세 소년이 모두 병에 걸려 한 달 정도 심하게 앓았으나, 김대건과 최양업은 소생하여 십여년 후 사제가 되어 왔다. 그러나 최과출은 일어나지 못하고 7개월 이상을 앓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한국평신도들의 교회창립활동과 함께 조선교구설립추진 및 사제양성의 자발적인 열성과 업적은 전세계 어느 나라 교회사에서도 볼 수 없는 갸륵하고 거룩하고 실로 위대한 영웅적인 사실이다.

 

結 論

48. 自發的인 眞理探究와 實踐 및 眞理 守護와 證據의 資質을 타고난 民族精神

   朝鮮天主敎會는 10代 後半과 20代 初半의 靑少年 선비들이 宣敎師없이, 聖職者나 修道者없이, 韓國天主敎 發祥地 天眞菴 聖地를 本據地로 하여 10여년간 自發的인 眞理探究와 實踐, 證據와 傳播의 民族精神으로 創立되었다.
일찌기 新羅의 少年들이 深山窮谷에서 修道하던 花郞道는 당시 소년들이 15세에 入山修道를 시작하여 18세에 花郞이 되면 下山하여, 國家를 지키는 정신적인 지주였으며, 훗날 3국을 統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佛敎도 22세에 殉敎한 이차돈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니, 적어도 10代 후반, 즉 17세 전후에 이미 약 4~5년간 佛道를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東學 역시 16세에 早失父母하고 求道의 길을 시작하는 崔濟愚 大禪師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10代의 소년 소녀들로서 겨레와 나라를 위하는 大義에 身命을 바치던 젊은 영웅들, 10대 소년시절의 김구선생, 10대 소녀 시절의 유관순 언니, 10대 소년시절의 이범석 장군, 윤봉길 의사, 등, 현대로 이어지는 愛國의 영웅들 역시 그 出發期를 보면 모두 10대 후반의 청소년들이다. 이 純粹하고 素朴하고 眞率하고 勇猛한 이 젊은 民族精神의 뿌리를 살리고 자라게 하여, 전 세계로, 未來로 繼承發展하게 해야 하겠다.


   우리 민족의 이러한 정신적 자질은 國家와 民族을 위하는 大義 앞에 주저하지 않고 身命을 바치는 정신이요, 祖上과 父母에게 孝道하는 정신이며, 남편을 위하여 守節하며 사랑하던 여성들의 정신이고, 이러한 정신은 민족정신의 그 뿌리와도 맥을 함께하는 정신이다.
오늘날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천주교회가 사회의 경제발전에 반비례로 司祭와 修道者 聖召의 격감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한국은 사회의 산업화 발전에 정비례하여 아직도 대신학교가 증설될 정도로 聖召가 적지 않음은 우리겨레의 특은이며, 배달겨레 종교정신의 자질이 선천적으로 특수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벽성조께서 엄동설한 폭설로 뒤덮힌 경기도 광주산맥을 넘던 眞理探究와 傳播의 열성은 그 강학의 내용자체보다 더 고귀한 것이다. 이승훈 선생을 북경 천주교회에 파견하여 天學을 더 자세히 알아오게 하던 일도 북경에서의 영세 그 자체이상으로 갸륵한 것이니, 세례야 지난 2000년 동안 전 세계 어디서나 있는 일이니, 설사 세례를 받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하더라도, 그 공로와 가치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임시준성직자단을 결성하여 사제직무를 수행하던 일도, 교회법규상의 문제 그 이상으로 거룩한 가치를 지닌 정신자세이며, 의심이 나자 스스로들 중단하였던 태도는 겸손하고 진솔한 성덕의 확증이다.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하던 정신이나, 황사영이 백서를 쓰던 정신 역시 그 백서내용보다 못지 않게 위대한 것이며, 정하상이 북경 3천리, 왕복 6천리 길을 자발적으로 유진길과 함께 번갈아 20여차례 왕래하던 열성과 정신은 조선교구설정이라는 그 결실 자체이상으로 위대한 것이다.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이 자신이 혼자서 자발적으로 입국한 것이 아니라 정하상을 비롯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데리고 들어오거나 아니면 안내하여 들어오게 함으로써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역시 우리겨레의 자발적인 준비와 협력과 희생과 봉사의 터전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김대건 최양업 최과출 어린 소년들이 한 겨울 추위와 한여름 더위를 무릅쓰고 사제가 되기 위하여 마카오까지 2만리 길을 6개월간 걸어가던 정신은 그들이 받은 사제서품 자체 못지 않게 거룩한 가치가 있는 덕행이요 정신 자세이다.
이러한 천주신앙 정신은 우리 나라의 대부분의 본당 설립에 있어서도 성직자들이 현장에 가기 전에 평신도들이 먼저 자발적으로 신자공동체를 만드는, 실로 다른 나라에서 보기 어려운 특이한 정신이다.
심지어 거의 대부분의 해외 교포본당 설립 역시 성직자가 파견되기 전에 먼저 평신도들끼리 신자공동체를 결성하고 성직자의 부임을 요청하고 있다. 또 거의 대부분의 입교신자들 역시 성직자들이 직접 傳敎하는 경우보다는 평신도들이 미신자들을 인도하여 오든가, 혹은 미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천주교회의 문을 두드리며 들어오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일맥상통하는 사실들은 우리 배달겨레의 거룩한 종교정신이 原動力이 되고, 바탕이 되어 이루어지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신앙 선조들의 천주공경 정신을 우리는 밝히 보고 깨달아 하느님께서 주신 이 특은에 감사드리며 후대에 전승시키고, 나아가 세계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크게 이바지해야 할 사명을 절감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특은은 다른나라나 다른 민족들의 敎會史에서볼 수 없는 현실이니, 배달겨레의 이러한 정신적 자질은 우리나라 천주교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하여, 나아가 전 세계 교회를 위한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부르시고 계신 것임을 깨닫고, 우리겨레에게 주어진 이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는 어떠한 난관도 용감히 극복하며, 날이 갈수록, 해를 더할수록, 보다 더 강화시키고 발전시키어, 天主께 보다 더 큰 무한한 영광을 드리고 전 세계 인류 救援事業에 우리겨레의 몫을 다해야 할 것이다. ?
 
 


  발행일  : 2004. 10. 14
  교구장  : 최덕기 주교
  저술․발행 : 변기영 신부
  편  집  : 최현순
  발행처  :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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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天主敎會 創立先祖 遺詩
 <卞基榮 神父 譯>      
 ①李檗聖祖 殞命詩  <1785년, 殞命 直前  曠菴 李檗聖祖 作> 
巫峽中峰之勢死入重泉   무 협 중 봉 지 세 사 입 중 천
銀河列宿之月現 錦還天國   은 하 열 수 지 년 금 환 천 국
巫峽의 中峰에 서 있는 形勢로다. 이제는 죽어서 黃泉 길로 가야 하나,
銀河水 별자리에 떠오르는 달이 되어, 비단옷 곱게 입고서 하늘나라 가노라.
         
 ②李檗聖祖 輓詞 <1785년 乙巳年, 李檗聖祖 葬禮式에 丁若鏞 作>
仙鶴下人間 軒然見風神   선학하인간헌연견풍신
羽翮皎如雪 鷄鶩生嫌口眞     우핵교여설계목생혐진
鳴聲動九霄  嘹亮出風塵   명성동구소료량출풍진
乘秋忽飛去 怊悵空勞人   승추홀비거초창공로인
神仙 나라 鶴이 人間世에 내려오사, 神聖한 風采를 보이셨네.
히고 힌 날개와 깃털, 눈같이도 하얗더니,
닭과 오리 떼들 샘내며 골부리고 미워했었네.
울음소리 九重天을 振動시키고, 그 맑은 목소리 風塵世에 出衆하셨었지.
어느덧 가을 되어 문득 날아가시니, 애닲아 탄식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③李檗聖祖 欽慕詩  <1785년 前後(?)  蔓川 李承薰(?) 作>
襟懷灑落光風霽月之無邊   금회쇄락광풍제월지무변
思慮淸明長天秋水之相暎   사려청명장천추수지상영
옷깃에 품은 바를 모두 씻어 내리는 光風과 霽月의 無邊함이여,
생각과 마음이 모두 맑고 밝으니 長天과 秋水가 서로 비춤이로다.

 ④李承薰 聖賢 受難詩  <1785년 蔓川 李承薰 作>
天彛地紀限西東暮壑虹橋唵靄中   천이지기한서동모확홍교암애중
一炷心香書共火遙瞻潮廟祭文公   일주심향서공화요첨조묘제문공
天上法道와 地上紀綱이 西洋의 天主敎와 東洋의 儒敎를 限界지으니,
해저문 天地間의 구렁에 놓인 무지개 다리 삼키는 안개 속에서
一片丹心 내 信仰은 책과 함께 불 속에서 애를 태웠으니,
이제는 저멀리 潮廟를 바라보며, 文公께 後裔로서 祭祀 올리노라.
                  
 ⑤ 李承薰 聖賢 殉敎詩 <1801년  殉敎 直前, 蔓川 李承薰 作>
月落在天水上池盡   월락재천수상지진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달려있고, 물은 솟아도 못이 마르면 다하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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