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술 심포지엄
고려시대 蒲柳水禽文 螺鈿香箱 연구
일시: 2013년 11월 29일(금)/30일(토)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
주최: 국립중앙박물관
주관: 아시아뮤지엄연구소(AMI)
후원: ICOM Korea/(재)예올/삼성문화재단/대한항공
淸秋/크로스포인트/그라픽 네트/
목차
1 | 심포지엄 개최 취지 |
2 | 심포지엄 프로그램 |
4 | 발표 요약문 |
| | 동아시아 미술사의 새 지평 : 고려 나전향상을 재조명하며 권영필(상지대, AMI 이사장) |
| | 고려시대 포류수금문 나전묘금향상의 현황, 재질 및 제작기법 이용희(국립중앙박물관) |
|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려 나전향상 연구 : 동시대 한·중·일 칠기와 비교사적 관점에서 岡田 文男(일본, 교토조형예술대) |
| | 고려 나전향상의 공예사적 위치 : 제작기법의 변천 연구 이난희(국립민속박물관) |
|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향상 안의 향과 香具의 재구성 : 10-13세기 한·중·일 향상 및 향과 香具의 고찰을 통하여 이용진(국립중앙박물관) |
| | 일본 헤이안 시대의 나전 : 中尊寺 金色堂을 중심으로 山崎 剛(일본, 가나자와미술공예대) |
| | 전파와 복제, 그리고 변용 : 고려 포류수금문에 관한 시론 鄭岩(중국, 중앙미술학원) |
| | 영국박물관의 한국 및 동아시아 칠기공예품 소장과 연구현황 Jan Stuart(영국, 영국박물관) |
| | 正倉院의 칠기와 백제문화 內藤 榮(일본, 나라국립박물관) |
| | 중국 서화사 : 내가 걸어 온 학문의 길과 전망 傅申(대만, 국립대만대) |
| | 중국의 미술고고사 : 내가 걸어 온 학문의 길과 전망 楊泓(중국, 중국사회과학원) |
25 | 부록 아시아뮤지엄연구소(AMI) 소개 |
심포지엄 개최 취지
고려 나전칠기는 한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이번 심포지엄의 주인공은 국제 학계의 주목을 요하는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高麗 蒲柳水禽文 螺鈿香箱’입니다. 고분 출토품인 이 나전香箱을 과학적, 공예사적, 회화사적 측면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하여 고려 전기 나전칠공예의 실상을 밝히고, 나아가 이를 토대로 동아시아 칠 공예사의 이해를 넓히고자 합니다.
Lacquer art holds an important position in the cultural heritage of East Asia. Korea's contribution to its development and diversity is noteworthy. This symposium begins with a focus on the lacquer incense box excavated from an early Goryeo tomb in the collection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Decorated with flora and waterfowl motifs in mother-of-pearl inlay and gold pigments, it embodies superb technical and artistic excellence and has awaited serious -and overdue- scientific scrutiny and art historical examination. This symposium will help elucidate and consider Goryeo lacquer art from multiple perspectives and further the understanding of the history of the art of East Asian lacquer.
심포지엄 프로그램
11월 29일 금요일 |
09:00 09:30 09:40 09:50 10:00 | 등록 개회 | 사회 박영규(용인대) 환영사 김영나(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축사 배기동(ICOM KOREA 위원장) 기조연설 “동아시아 미술사의 새 지평 : 고려 나전향상을 재조명하며” 권영필(상지대, AMI 이사장) |
세션 I |
10:40 | “고려시대 포류수금문 나전묘금향상의 현황, 재질 및 제작기법” 이용희(국립중앙박물관) |
11:25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려 나전향상 연구 : 동시대 한·중·일 칠기와 비교사적 관점에서” 岡田 文男(일본, 교토조형예술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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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 점심 |
13:30 | “고려 나전향상의 공예사적 위치 : 제작기법의 변천 연구” 이난희(국립민속박물관) |
14:15 15:00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향상 안의 향과 香具의 재구성 : 10-13세기 한·중·일 향상 및 향과 香具의 고찰을 통하여” 이용진(국립중앙박물관) 휴식 |
15:20 16:00 | “일본 헤이안 시대의 나전 : 中尊寺 金色堂을 중심으로” 山崎 剛(일본, 가나자와미술공예대) “전파와 복제, 그리고 변용 : 고려 포류수금문에 관한 시론” 鄭岩(중국, 중앙미술학원) |
16:40 17:10 | “영국박물관의 한국 및 동아시아 칠기공예품 소장과 연구현황” Jan Stuart(영국, 영국박물관) 총평 石守謙(대만,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 Louise Cort(미국, 프리어-새클러 미술관) |
18:00 | 리셉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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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0일(토) 세션 II 제 1강의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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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 | 사회 장남원(이화여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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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0 | “正倉院의 칠기와 백제문화” 內藤 榮(일본, 나라국립박물관)/ 통역 이난희(국립민속박물관) |
10:50 | “중국 서화사 : 내가 걸어 온 학문의 길과 전망” 傅申(대만, 국립대만대)/ 통역 이정은(국립대만대) |
11:40 12:30 | “중국의 미술고고사 : 내가 걸어 온 학문의 길과 전망” 楊泓(중국, 중국사회과학원) /통역 소현숙(원광대) 폐회 김홍남(이화여대, AMI 상임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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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미술사의 새 지평
-<고려나전묘금향상(香箱)>을 재조명하며-
권영필 (상지대학교 초빙교수)
Ⅰ. 미술사학의 미래
근대적 의미의 미술사학이 서양에서 먼저 개발되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ölfflin, 1864~1945)의 양식론을 비롯하여 에르빈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 1892~1968)의 도상해석학 등은 작품 해석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또한 분석대상에 있어서도 회화 치중의 입장을 지양, 양탄자 문양에서 양식 이론을 이끌어 낸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 1858~1905)의 시각은 공예의 중요성을 새삼 부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20세기의 한 세기를 풍미했던 이와 같은 미술사학의 방법론이 매우 유익한 것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동양의 전통을 흔들지는 못한다. 일찍이 5세기 때 사혁(謝赫)의「화육법론(畵六法論)」에서는 동양회화의 분석틀을 제시한 바 있고, 9세기에 이르러 주경현(朱景玄)의『당조명화록(唐朝名畵錄)』에서는 벌써 미술사학의 본질이 고창된다. 즉 후자의 경우 그 서론에서 사실적 비평정신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본 것만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다. 고관대작의 작품이라도 격이 떨어지는 것은 대상에서 제외한다.” 등등. 실증주의적이고, 미학적인 본질을 추구하며, 미술가의 ‘품격(品格, 즉 등급)’을 매기는 이러한 평가 방식은 후대까지 중요한 작용을 하게 된다.
한편 1123년 송(宋)의 사절로서 고려를 방문한 서긍(徐兢)은 도자기에 관심을 가지고 고려청자를 극찬한 바 있다. 문인화(文人畵)가 풍미했던 송 시대의 문인으로서 공예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 또한 이웃나라의 작품을 직접 실견하고, 그것을 평가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 등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서긍은 고려 나전(螺鈿) 작품에 대해서도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고려의 세밀하고 정교한 나전이 그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또한 일본에는 중요한 고대 중국 작품을 소장한 예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그 중에서도 당(唐) 시대의 나전 기법과 ‘평탈(平脫, 일본에서는 平文ひようもん이라 함)기법’을 구사한 작품들이 여러 점 소장되어 있어 칠기 기법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 <나전단화금수문경(螺鈿團花禽獸紋鏡)> 같은 작품은 당대(唐代)의 것으로서 중국보다 오히려 일본에 가작(佳作)을 남기고 있을 뿐 아니라, 유사한 작품이 한국에도 소장되어 있어 한․중․일 삼국이 작품 해석에서 상호 연결고리 체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사례는 유물의 연결뿐만 아니라 방법론적으로 연구자의 네트워크가 또한 필요한 요건인 점을 일깨워 준다.
궁극적으로 미술양식과 기법이 원류지로부터 분리되어 새로운 재창조를 형성하는 ‘원심력’ 현상, 다시 말하면 ‘중심의 이동’은 미술사에서 주시해야할 과제임이 분명하다.
Ⅱ. 박물관과 박물관 유물의 의미
박물관이 물건을 소장한다는 것은 그 물건에 대한 의미 부여이다. 따라서 이것이 전문 큐레이터에 의한 첫 번째 조명이 된다. 그리고 후대에 그 물건에 대한 학술적 평가를 한다든가, 그것을 꺼내서 전시를 하게 되면 그 때에는 ‘재조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박물관의 기능이 적극적으로 살아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고려나전묘금향상(高麗螺鈿描金香箱)>을 본주제로 삼는 것은 재조명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고대 고분 부장품의 경우도 동일한 맥락에서 관찰할 수 있다. 부장품으로 선정된 것이 일차적 조명에 해당된다. 그 부장품이 훗날 발굴되어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는다면, 비로소 재조명의 기회를 갖는 것이다. 만일 누가 고분을 ‘지하박물관’이라고 부른다면, 거기에는 소장의 기능은 -그것도 불완전한 상태로서- 있을지언정, 전시기능이 없기 때문에 매우 ‘약화된 의미의’ 박물관일 뿐이다.
또한 일본 쇼소인(正倉院)은 이른 시기에(8세기) 벌써 어느 정도의 박물관 개념이 도입된 사례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 박물관의 순수 기능을 유물의 수집, 보존, 전시(연구, 교육, 홍보)라고 본다면 그곳에서 앞의 두 가지는 적극적으로 유지되었던 것을 알게 된다. 동아시아 미술 연구에서 쇼소인의 존재 가치는 매우 크다.
박물관은 유물보존의 막중한 책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불가항력적인 사태, 즉 지진, 전쟁과 같은 일을 미리 대비하지 못했을 때, 유물에 결정적인 위해가 가해진다. 2차대전 당시 독일 박물관의 피폭으로 귀중한 실크로드 유물의 일부가 손실되었고, 가까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수도가 전쟁의 혼란에 휩싸여 카불 국립박물관의 유물들이 산일되었다. 한국의 경우도 유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때에 손실된 유물과 유사한 것이 이웃나라에 있다면 그것이 어느 정도의 ‘대체 작품’의 역할을 하며, 따라서 그 대체물을 통해 테크닉에 대한 검토뿐만 아니라, 거기에 쌓여진 학적 성과물을 이어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박물관은 시대가 요구하는 역할과 임무를 적절히 수행하고 있는가하는 물음에 직면하고 있다. 이미 본 아시아뮤지엄연구소(AMI)는 ‘오늘의 뮤지엄 어디로 가고 있나’를 주제로 국제 심포지엄을 가진바 있다[2011년 10월 1일]. 그러한 과제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방법론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Ⅲ. <고려나전묘금향상>의 문제
고려가 불교를 국시로 하기도 했지만, 불교미술의 위상은 남다른 바 있다. 팔만대장경을 비롯, 불교회화의 수월관음도, 향완(香垸)과 은입사정병(銀入絲淨甁)과 같은 금속 공예 등에 나타나는 미적 완성도는 매우 뛰어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카테고리 속으로 불교의 의식구(儀式具)로서의 <고려나전묘금향상>이 진입하게 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 향상은 그 만큼 제작 수준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대로 나전 기법은 중국의 당대(唐代)에 유행하여 그 후 한국과 일본에 전파되었다. 앞에 예로 든 <나전단화금수문경(螺鈿團花禽獸紋鏡)>은 한국에서도 출토 사례(8~10세기 고분)가 있어서, 이 시기에는 기술적인 면에서 나전기법에 대한 이해가 한국의 장인사회에 숙성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11세기 고려에 이르면, 나전칠기의 명품들이 본격적으로 생산되어 오늘날까지 유존될 뿐 아니라, 문헌에서도 국가에서 나전을 관리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 보인다. 즉 중상서(中尙署)에서 나전장(螺鈿匠)을 관리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처럼 고려의 나전이 발전상을 보이면서 기술적으로도 진일보하는 면모를 과시하게 된다. 대주제인 <고려나전묘금향상>을 자세히 관찰하면, 거기에 ‘묘금(描金)’기법이 활용되어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 특수기법이 중국 문헌에 명시된 것이 명대(明代)이니 그 시기보다 앞선 작품의 실례로서 이 <고려나전묘금향상>이 거론되는 것은 의미가 깊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 고려 작품의 현 존재상황이 매우 취약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복원, 또는 복제의 수순을 밟아야 하는 게 아닌지 전망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복원에 앞서 이 작품에 대한 학술적 평가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미시적인 것에 의해 거시적인 것을 통찰하는 관점은 문화일반에서 언제나 유효하다 할 것이다. 또한 앞에 살핀 대로 어느 나라의 한 작품(originality)과 또 그와 유사한 작품이 이웃나라에 존재할 때, 그 이웃 작품에 대한 연구와 해석에는 원작품과 함께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바로 오늘의 주제인 <고려나전묘금향상>의 해명을 위해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된 이유이다.
고려시대 포류수금문 나전묘금향상의
현황, 재질 및 제작기법
이용희(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고려시대 포류수금문 나전향상은 뚜껑을 깊이 덮어씌우는 장방형 상자(箱子)로 1910년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 시기에 일본인 아오키(靑木文七)로부터 구입한 것인데, 꽃모양의 연향(練香)이 내부에 들어있어 향상(香箱)으로 불리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나전향상은 뚜껑[겉짝]과 속상자[안짝], 속상자 위에 걸쳐지는 현자(懸子)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구성물의 표면에 나전(螺鈿), 배채(背彩)한 대모(玳瑁), 금속선(金屬線) 등을 이용한 평탈(平脫) 기법으로 냇가의 능수버들, 냇돌, 각종 꽃나무, 오리, 국화꽃과 당초(唐草)넝쿨, 모란(牧丹) 등의 문양을 표현하였고 또 검은 바탕의 옻 칠면 곳곳에 묘금(描金) 문양을 더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나전향상의 이런 의장과 형태는 고려시대는 물론 전·후 시기를 통틀어 유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나전향상은 고려시대 무덤에서 출토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발견 당시부터 목심(木心)은 대부분 섞어 없어지고 뚜껑의 천판(天板)을 포함한 많은 부분이 파손 결실된 상태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더욱이 한국전쟁 중에 전화(戰火)를 입어 대파(大破)되었고 현재는 『조선고적도보』의 사진을 통해서만 그 본래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06년부터 700여개의 크고 작은 파편으로 나뉘어 보관되고 있는 포류수금문 나전향상의 항구적인 보존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나전향상의 크기와 형태, 재질 및 제작기법 등에 관한 조사에 착수하였다. 또한 2007년 1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한국과 일본의 관계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고려 나전향상의 보존과 복원을 주제로 한·일 공동연구를 추진하였다.
나전향상을 대상으로 한 재질 및 제작기법 연구는 광학현미경과 주사전자현미경[SEM]을 이용한 세부관찰을 포함하여, X선 투과조사, SEM-EDS분석[주사전자현미경-에너지 분산형 분석], m-XRF분석[微小部 형광X분석] 등이 주된 내용이었고 이를 통해 목심[木心: 목재바탕]의 재질[樹種]과 구조, 옻칠 기법, 나전, 대모, 금속선, 묘금으로 표현된 문양 등 재질과 제작기법 상의 중요한 특징들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진행된 고려나전향상의 재질 및 제작기법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목심[木心: 木製白骨]의 구조와 옻칠 기법
나전향상은 뚜껑[겉짝]과 속상자[안짝] 그리고 속상자 위에 걸쳐지는 현자로 구성되어 있다. 뚜껑은 높이 11.2cm, 폭 29.1×20.4cm이며, 속상자는 높이 10.3cm, 폭 27.0×17.6cm, 현자는 높이 2.67cm, 폭 27.0×17.6cm 정도의 크기이다. 나전향상의 목심은 4mm 두께의 침엽수(잣나무 추정) 정목판(柾目板: 곧은 나뭇결의 목재를 세로로 자른 것)으로 제작되었는데 먼저 측면의 판재들을 모서리 부분에서 연접(連接)시켜 그 내측(內側)에 삼각형의 각재(角材)를 덧대어 연결한 후 그 위쪽[뚜껑] 또는 아래쪽[속상자]을 판재로 막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나전향상의 옻칠은 기법상 전형적인 목심저피칠기(木心苧皮漆器)의 양식을 보여주는데 목심 표면에 비단 천을 입혀 직물심(織物心)으로 하고 골분(骨粉)을 혼합한 골회(骨灰) 옻칠을 두껍게 발라 올리고 그 위에 다시 투명한 옻칠을 2-3회 얇게 도장(塗裝)하여 마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 나전과 대모, 금속선을 이용한 문양표현 기법
나전문양은 뚜껑의 냇가의 능수버들과 냇돌, 꽃나무, 오리, 뚜껑 하단(下段)에 덧붙여진 띠[帶]부분의 모란꽃과 넝쿨문[唐草文], 속상자는 이들 문양 외에 모서리 쪽 테두리의 ‘X’자형 꽃문양 그리고 현자의 국화꽃 문양 표현에 이용되었다. 이들 나전문양은 0.3~0.4mm 정도의 두께로 얇게 가공한 전복 껍질을 송곳이나 바늘, 작은 칼 등으로 대략적인 형태와 크기로 끊어 낸 후 절단면을 줄로 다듬어 문양의 형태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채색 옻칠로 배채한 대모 문양은 뚜껑과 속상자의 나전으로 표현된 나무 끝의 꽃[별모양], 뚜껑의 테두리와 하단에 덧붙여진 띠 부분의 국화꽃 등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나무의 꽃과 국화꽃의 중심[꽃술]에는 진사(辰砂: HgS)를 혼합한 주칠(朱漆), 국화의 꽃잎에는 석황(石黃: As2S3)을 섞은 황색칠을 얇은 대모에 배채하여 사용하였다.
금속선은 뚜껑과 속상자 모서리 부분의 테두리 경계, 뚜껑 하단에 덧대어진 띠 부분에서 보이는 넝쿨문, 모란꽃의 줄기와 안상(眼象) 문양 등의 표현에 이용되었다. 문양표현에 사용된 금속선은 단선(單線)과 두 가닥 선을 하나로 꼬아 만든 두 종류로 구분되며 단선은 주석(Sn)과 납(Pb)을 합금한 금속선을 0.5~0.6mm 정도 두께로 단조(鍛造)하여 만들었고, 두 선을 꼬아 만든 금속선은 구리(Cu)와 아연(Zn)을 합금한 황동(黃銅)을 0.25mm 정도 두께로 뽑아낸 둥근 선이 사용되었다.
- 묘금 기법
묘금 문양은 능수버들과 꽃나무의 곁가지, 시냇물, 오리 등의 표현에 이용되었는데 나전문양 주변에 더하여져 외관을 화려하게 치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현재는 묘금 문양이 대부분 결실되고 부분적으로만 남아있다. 고려 나전향상에서 보이는 묘금 문양은 금박(金箔)을 분쇄하여 만든 금분(金粉)을 아교(阿膠) 또는 건성유(乾性油)에 혼합하여 마감된 칠면에 채색한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금분을 옻칠과 섞어 바르거나 옻칠로 그려진 문양위에 금분을 뿌리는 방식은 이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연구 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시대 나전향상의 제작에는 칠공예기술은 물론 당시 활용 가능했던 기술과 재료가 모두 동원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이 나전향상은 고려시대의 수준 높은 공예기술의 증거들이 남아있는 유물로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려 나전향상 연구
: 동시대 한·중·일 칠기와 비교사적 관점에서
오카다 후미오(岡田 文男, 일본 쿄토조형예술대)
본 발표는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고려 나전향상을 중국과 일본에 전하는 동시대 나전 제품과 비교하여 그 위상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 고려 나전향상에 대한 조사
○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나전향상은 원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600점 이상의 파편 상태로 보관되고 있다. 나전향상은 나전과 묘금을 복합적으로 표현한 기법으로 장식되었는데, 이런 기법은 현존하는 다른 고려 나전에서는 볼 수 없다. 때문에 문화재로서 그 가치가 대단히 높다.
나전향상에 대한 자연과학적 조사는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이뤄졌으며, 필자도 이 조사에 일부 참여했다. 개요는 다음과 같다.
• 몸체: 상자는 나무이며, 국립중앙박물관 조사에 의해 침엽수로 밝혀졌다.
• 천 입히기: 나무 몸체 위에 천이 입혀져 있다. 옷감은 명주이며, 천 단면의 두께는 0.2~0.4mm이다.
• 밑바탕: 밑바탕에는 100미크론 이하로 잘게 분쇄된 골분(骨粉)이 빽빽하게 섞여 있다.
• 칠층(漆層): 칠층의 표면은 흑색으로 보이는데, 얇은 조각 아래는 황갈색으로 투명하며, 흑색 안료는 섞여 있지 않다. 칠은 약 3개 층으로 칠해져 있다.
• 나전: 조개껍질의 두께는 현재 상태로는 0.2~0.3mm의 것이 많다.
• 묘금: 얇은 금박(두께는 약 1.5미크론 이하)이 겹쳐져 있다. 금가루의 단면에는 접착제가 확실하게 관찰되지 않으며, 아교로 접착했을 가능성이 있다.
■ 비교 자료
(1)일본 뵤도인 호오도(平等院 鳳凰堂)의 나전(1053년)
뵤도인 호오도는 1053년에 창건되었으며, 호오도 내부의 수미단(須弥壇)은 칠을 바른 후 나전이나 마키에(蒔繪)로 장식했다.
• 천 입히기: 수미단의 칠 바탕에는 천을 입힌 부분이 있지만, 상세하지 않다.
• 밑바탕: 숯가루가 조밀하게 섞인 칠 바탕.
• 칠층: 초벌칠에 흑색 안료(그을음類)가 섞여 있다. 중간 칠과 가장 위의 칠은 투명 칠.
• 금가루: 두터운 금가루(두께 50미크론 이상).
• 금박: 본존, 대좌, 천개(天蓋)에 사용된 당시(1053년)의 금박은 금박을 5~7장 겹친 것으로, 두께를 약 2미크론으로 하여 사용하고 있다.
• 나전: 수미단에 사용한 조개껍질은 모두 박락되었지만, 천개에 남아 있는 조개껍질의 두께는 약 1.8mm로 두꺼운 편이다.
(2)중국 송대의 칠기
• 밑바탕: 골분이 사용되었다.
• 천 입히기: 미상.
• 칠층: 육안으로 표면을 보면 칠층이 흑색으로 보이지만, 얇은 조각 아래에는 흑색 안료 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 금가루: 원대(元代)로 내려갈 지도 모르는 사례지만, 금가루는 얇은 금박을 중첩한 경우가 있다. 그 이후 시대의 금분도 금박을 중첩한 것이다.
• 나전: 송대 나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당대(唐代)에 제작된, 뒷면을 나전으로 장식한 거울의 경우 여기에 사용된 조개껍질의 두께는 0.2mm 정도였다. 송대에도 마찬 가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 결론
고려 나전향상의 제작 기법에 대해 한국 국립중앙박물관과 공동으로 시료를 관찰한 결과, 밑바탕에 뼛가루를 섞은 점, 칠에 흑색 안료를 섞지 않은 점, 금가루가 금박을 중첩한 점, 나전의 조개껍질 두께가 0.2~0.3mm인 점 등은 동시기 중국 칠기 제작 기법과 같으나, 동시기 일본의 나전 기법이나 마키에(蒔繪) 기법과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판명하였다.
고려 나전향상의 공예사적 위치 : 제작기법의 변천 연구
이난희(국립민속박물관)
고려 나전은 현재 전세품(傳世品)과 출토품을 합해서 약 20점 정도에 불과하며, 유물 대부분은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 미국의 보스톤미술관과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영국 런던의 영국박물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박물관 등에 소수가 산일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1점의 전세품과 3점 정도의 파손품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려 나전 파손품 가운데 한 점의 귀중한 사례가 이번 심포지엄의 주인공인 포류수금문(蒲柳水禽文) 고려나전 묘금향상(描金香箱)이다(이하, ‘고려 나전향상’으로 표기함). 이 향상은 고도로 발달한 고려 나전 기술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본 발표에서는 기존의 고려 나전에 대한 과학적 조사 연구를 기초로, ‘고려 나전향상’을 다른 고려시대 다른 나전 작품과의 비교를 통해 구체적인 기법적 특징과 변천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고려 나전의 기법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본인이 도쿄국립박물관(東京國立博物館)과 도쿄국립문화재연구소(東京國立文化財硏究所)의 도움을 받아 행한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모리가(毛利家) 전래 고려 나전경함(螺鈿經函)의 재질 분석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X선투시(X線透視, X-Radiograph) 사진과 형광X선분석(螢光X線分析, X-ray fluorescence spectroscopy) 조사 등에 의해 목심[木製白骨]의 구조, 천(布)을 바른 상태, 파손된 문양 부분의 나전과 금속선(金屬線) 등의 기법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는 고려나전의 과학적 조사에 의한 학문적 성과를 거두는 토대가 되었다.
‘고려 나전향상’은 현존하는 고려 나전경함 가운데 최고(最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모리가 전래 고려시대 ‘국화문 나전경함(일본 중요문화재)’과 문양과 기법에서 공통점이 많다.
본 발표에서는 먼저 과학적 조사가 이뤄진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모리가 전래 고려 나전경함의 기법과 문양 등을 ‘고려 나전향상’과 비교 고찰하고자 한다. 향상은 향과 귀중품을 넣어 두던 상자이다. 그런데 제작과정에서 주문자의 신분과 취향이 반영되었거나 또는 용도의 차이 등으로 인해 당시 유행하던 초목수금문(草木水禽文)을 정교하게 묘사하여 정성을 다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주요 문양인 초목수금문은 11~12세기의 청동은상감 포류수금문 정병(浄瓶), 상감청자 등의 문양과 유사하나, 향상의 문양이 더욱 섬세하고 회화적으로 표현되어 시대적으로 고식(古式)일 가능성이 있다. 이에 비해 모리가 전래 고려 나전경함은 경전을 넣어놓기 위한 용도로 대량 제작되었기 때문에 양식화된 문양을 보이고 있다.
그밖에 기법 비교가 가능한 고려시대 나전경함으로는 a.도쿄국립박물관 소장 <국당초문(菊唐草文) 나전경함>, b.나라국립박물관 보관(保管) <국당초문 나전경함>, c.런던 영국박물관(The British Museum) 소장 <국당초문 나전경함>, d.아이치현(愛知県) 도쿠카와미술관(德川美術館) 소장 <국당초문 나전경함>, e.네덜란드 국립박물관 소장 <국당초문 나전경함>, f.미국 보스톤미술관 소장 <국당초문 나전경함>, g.교토(京都) 기타무라미술관(北村美術館) 소장 <모란당초문 나전경함> 등이 있다. 고려 나전 의장의 간략화와 도안화, 그리고 재료와 기술의 변화 등이 a~g의 경함들에서 관찰된다.
그리고 일본 타이마테라(當麻寺) ‘나전대모화장합(螺鈿玳瑁化粧盒)’, 영국박물관 소장 고려 나전화장합 등의 합(盒)류에 대한 X선 사진 등 과학적 조사를 참고하여 고려시대 나전 제작 기법의 구체적인 특징과 변천을 고찰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향상 안의 향과 향구(香具)의 재구성
- 10~13세기 한· 중· 일 향상 및 향과 향구의 고찰을 통하여
이용진(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포류수금문 나전향상은 고려시대의 향상으로는 유일한 작품이다. 현재 이 향상은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된 상태이지만, 과거의 사진자료를 통해 포류수금문이 나전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향상은 방형(方形)이며, 뚜껑과 몸체로 구성되고 뚜껑을 열면 몸체 안쪽에 선반이 있다. 이 향상을 경전을 보관하는 경상(經箱)이 아닌 향상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현재 남아있는 고려시대 경상의 경우, 몸체는 방형이지만 뚜껑은 녹정형(盝頂形)으로 되어 있으며, 뚜껑 위에 경전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어 경상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반면 이 향상은 몸체와 뚜껑이 모두 방형으로 경상과는 기형상(器形上) 차이를 보일뿐 아니라 향상의 내부에서 향이 발견되어 향상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향상 안에는 어떤 향과 향구들이 있었을지 이를 추정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향상은 향을 피우는데 필요한 도구를 보관하는 상자이다. 향을 피우기 위해서는 향과 향을 피울 수 있는 향로 및 향을 보관하는 향합 등과 함께 부수적인 향구들이 필요하다. 현재 고려시대 향구 중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향로와 향합이며, 다른 도구들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동시기 중국과 일본의 향구들을 참고하면, 고려시대의 향구에 대해서도 보다 많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안船에서 나온 14세기 전반 원대 유물 중에는 청자 향로와 금속 향로 및 다양한 향로들이 발견되었다. 신안해저유물선에서 나온 유물 중에는 또한 향을 보관하는 향합과 함께 향을 집을 때 사용하는 젓가락인 향저(香箸), 향로의 재를 모으거나 쌓을 때 사용하는 향시(香匙), 향저와 향시를 보관하는 향병(香甁) 등이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향구들은 향을 피우기 위해 사용하는 세트화 된 도구로 볼 수 있으며, 향저와 향시의 형태는 대체로 동일하다. 이처럼 세트화 된 향구들의 모습은 일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고려에서는 세트화 된 향구들이 함께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물 중에 향저와 향시로 보이는 유물을 비롯해 향병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있어 동시기 중국, 일본과 유사한 향구들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향구들과 함께 가장 중요한 것은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향이다. 다행히 이 향상 안에서는 향이 발견되어 고려시대에 어떤 형태의 향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다. 향상에서 발견된 향은 틀에 눌러 찍어낸 꽃 모양의 향으로 두께는 매우 얇고, 향의 표면에는 고(古)와 심(心)자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향과 향구 이외에 중요한 것은 향로와 향합이다. 향상 안에는 어떤 향로와 향합이 들어 있었을까? 이 향상에는 포류수금문이 나전으로 장식되어 있다. 포류수금문을 어떤 성격으로 보는지에 따라 이 향상 안의 향로와 향합은 달라질 수 있으며,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 번째는 불교 관련 향로와 향합이다. 고려시대의 청자와 금속공예품에는 포류수금문이 장식된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은 불교 관련 기명(器皿)들로 정병(淨甁)과 향완(香垸) 등이다. 포류수금문이 불교 관련 기명들에 나타나는 이유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포류수금문이 장식된 나전 향상도 불교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 불교의례용 향로는 바닥에 놓는 향로인 향완을 비롯해 손잡이가 달린 병향로(柄香爐), 거는 懸香爐 등이 있다. 그런데 향상의 추정 높이를 고려하면, 이 향상 안에는 10cm 내외의 작은 향로가 들어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남아있는 고려시대 불교 향로들의 높이를 고려하면 병향로 또는 작은 금속제 향로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더불어 이 향로와 세트로 사용되었을 향합은 금속제 향합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두 번째는 왕실 관련 향로와 향합이다. 이 향상이 왕실에서 사용했던 것이라면 고려시대 왕실에서 사용했던 향로와 향합이 들어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역시 향상의 크기를 고려하면 왕실 관련 향로도 10cm 내외의 향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남아있는 고려시대 향로 중에서 왕실 관련 향로로 추정되는 것들은 대부분 청자향로들이지만, 청자향로들 가운데 10cm 내외의 청자향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청자향로가 아닌 다른 재질의 향로였을 가능성, 아마도 금속제의 향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금속제 향로도 높이 10cm 내외의 향로는 찾기 어렵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청동 은입사(銀入絲)향로의 뚜껑이 남아있는데, 이 향로 뚜껑의 지름을 고려하면, 아마도 이와 같은 종류의 향로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향합도 향로의 크기에 비례하는 크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나전향상 안에 들어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 향과 향구에 대해 다루었다. 남아있는 유물을 바탕으로 추정한 것이기에 다소 무리한 면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포류수금문과 기존 유물들의 성격, 나전향상의 크기, 주변국의 향구들을 고려하면, 고려시대 나전향상 속에는 향로와 향합, 틀에 찍은 얇은 꽃모양의 향과 향시, 향저, 향병 등이 보관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 향상 및 향구들이 남아있는 예가 거의 없어 이 향상을 제작하였을 당시 어떤 향로와 향구들이 사용되었지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향과 향로, 향합 및 향구들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 헤이안시대의 나전: 中尊寺 金色堂를 중심으로
야마자키 츠요시 (山崎 剛, 일본 가나자와미술공예대)
일본 헤이안시대(794~1192) 나전 가운데 이 시대 전반기에 해당하는 10세기경까지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은 없다. 그러나 나라시대 이후 이 기법의 맥이 끊긴 것은 아니다. 헤이안시대는 중국 당(唐)의 영향으로 ‘목지(木地) 나전’의 유행이 계속되는 한편, 쇼소인(正倉院)의 ‘옥대상(玉帶箱)’에서 볼 수 있는 ‘흑칠지(黑漆地) 나전’이 점차 융성해가는 시기였다.
문헌자료의 경우, 950년(天歷4年) 기록인『닌나지오무로교부츠지츠로쿠(仁和寺御室御物實錄)』에 자단(紫檀) 향로의 용기인 ‘흑칠지(黑漆地) 나전 광주리(筥)’에 대한 기재가 있는데, 이것이 ‘흑칠지 나전’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11세기에 들어서면 문헌에 ‘마키에(蒔繪) 나전’의 기록이 보인다. 1017년(寬仁元年) 태정대신(太政大臣)이 된 후지와라 미치자네(藤原道眞)의 일기『미도칸파쿠키(御堂關白記)』에는 1015년(長和4年) 4월 7일 테이시나이신노우(禎子內親王)가 하카마를 처음 입는 의식 때 마련한 주자(厨子), 즐거(櫛筥), 벼루 상자(硯箱), 화로 등이 모두 ‘마키에 나전’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018년(寬仁2年) 10월 16일에 기록되어 있는 화로는 ‘지마키(地蒔) 나전’으로 볼 수 있다. ‘마키에 나전’은 마키에와 나전 기법을 함께 사용해 무늬를 나타내는 기법이고, ‘지마키 나전’은 나전 주변의 검은 칠 바탕에 금가루를 성기게 뿌리는 기법이다.『루이쥬조요쇼(類聚雜要抄)』에 따르면 1029년(長元2年) 4월 2일 관백좌대신(關白左大臣)인 요리미치(賴通)가 시라카와인(白河院)으로 이동할 때의 살림살이가 ‘반에(蠻繪)’와 ‘나전 이카케지치(沃懸地)’로 꾸며져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지마키’에도 금가루를 성기게 뿌린 ‘히라치리지(平塵地)’와 금가루를 조밀하게 뿌린 ‘이카케지치(沃懸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헤이안시대 후반에 ‘흑칠지 나전’이 융성하고, 마키에와 나전이 함께 사용된 ‘지마키 나전’이나 ‘마키에 나전’이 있었음을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번 발표에서는 일본 국보로 지정된 주손지(中尊寺) 곤지키도(金色堂) 나전을 중심으로 헤이안시대 나전을 살펴보고자 한다. 주손지는 1124년(平治元年)에 후지와라노키요히라(藤原淸衡)가 세운 절로, 곤지키도는 불전 장엄의 최고봉으로 불린다. 장식이 매우 화려한데, 주요 문양은 ‘지마키 나전’으로 장식한 보상화 넝쿨무늬이다. 곤지키도의 내진(內陣)에는 두공(斗栱)・마고(蟇股)・두관(頭貫)・무목(無目), 사천주(四天柱)와 좌우의 수미단 측면 및 높은 난간 등에 보상화 넝쿨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나전 일부에 모조(毛彫) 기법이 있고, 꽃 중심에는 유리구슬이 감입되어 있다. 지마키는 ‘히라치리지’이지만, 뿌린 금가루의 밀도가 높아서 ‘이카케지치’에 가깝다. 중앙 수미단의 높은 난간에는 자단(紫檀)을 바탕으로 한 ‘목지(木地) 나전’도 보인다.
중요한 유물은 주손지의 곤지키도와 경장(經藏)에 전해지는 당(堂) 안의 물건이다. 국보인 당 안의 물건 가운데 나전으로 장식된 것은 곤지키도의 의례용 목조 반(盤), 나전 헤이진(平塵) 안(案), 케이카(磬架)와 경장의 목조 반(盤), 나전 헤이진안, 케이카, 나전 헤이진 등(燈) 받침이다. 이들은 모두 보상화 넝쿨무늬와 나비 문양을 ‘대강 새김(大体彫り)’ 방식에 따라 나전으로 표현한 ‘지마키 나전’이다. ‘대강 새김’은 조개껍데기를 붙이는 나무 부분을 미리 얇게 파내고, 여기에 조개껍질을 붙인 후 옻칠하고 금가루를 뿌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위를 연마한 것으로서 두꺼운 조개껍질을 사용해도 조개와 칠 바탕의 표면이 한 면처럼 되도록 한 수법이다. 그러므로 상술한 유물들은 제법 두꺼운 야광 조개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장(經藏)에는 문수보살상을 안치했던 나전 팔각수미단(국보)이 있는데, ‘지마키 나전’으로 금강령과 금강저의 문양을 주로 표현했다.
이번 발표에서는 상술한 주손지의 나전 유물과 역시 헤이안시대 후반기에 제작된 ‘마키에 나전’의 다양한 작품들을 함께 소개할 예정이다.
전파와 복제, 그리고 변용: 고려 포류수금문 시론
정옌(鄭岩, 중국 중앙미술학원)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고려 묘금나전향상(‘이하 고려향상’으로 약칭함) 위에 장식된 포류수금문은 고려시대의 동기(銅器)와 청자에도 흔히 나타난다. 이와 유사한 회화와 문양 역시 중국의 동시기, 혹은 그보다 약간 이른 시기 예술품에도 출현한다. 때문에 우리는 재질, 기술, 기물 등의 물질문화의 측면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시공간적으로도 이런 도상의 전파와 복제, 그리고 변용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Ⅰ
포류수금문에 나타나는 공통적 특징은 세로 방향의 중심선을 핵심으로 하여 양쪽에 유사한 내용과 크기의 문양이 기본적으로 대칭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세부적인 면에서는 변화가 풍부하다. 전체 구도가 대칭을 이루는 것은 선명한 장식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세부의 변화는 회화적 특징을 더 잘 드러내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기본 형식은 ‘중복평렬(重複平列)’과 ‘분급연속(分級連續)’의 방식을 통해 좀 더 복잡한 화면을 구성한다. 장식적 엄격함과 회화적 자유로움 사이에서 특유의 평형을 이루며, 여기에 일부 외적 요소가 덧붙여짐으로써 도상에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류수금문의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본문은 포류수금문의 변화를 일부 사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분석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면, ‘고려 향상’과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자기판(磁器板)에 표현된 포류수금문은 모두 평면적 전개를 보이고 있어 회화의 2차원적 특징에 잘 부합한다. 그 속에서 색채와 선조(線條) 모두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다.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동 은입사정병에 시문된 포류수금문은 ‘선(線)’의 작용을 중시하고 있는데, 구도상으로는 ‘중복평렬’과 ‘분급연속’의 두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로써 포류수금문은 화조화에서 산수화로 변화한다. 정병 위의 화면은 연속하는 곡면(曲面) 위에서 전개되고 있어, 도상을 보여줌과 동시에 기물의 형태 또한 드러내주고 있다.
포류수금문 도상은 재질이 다른 기물들 사이에서 다양하게 출현한다. 이와 동시에 이를 표현하는 각종 기술도 함께 개발되었다. 몇 건의 청자 정병은 확실히 청동 정병의 형태를 본떠 제작한 것이다. 상감기술 역시 입사(入絲)나 나전 기술과 내재적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자 정병의 포류수금문이 청동 정병의 그것과 다른 점은 ‘하나를 나누어 둘로 만들고’, 혹은 ‘둘을 합해 하나를 형성하는’ 방식을 통해 포류수금문과 기물의 특정한 형태를 밀접하게 결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몇 건의 청자 매병 위에 나타난 도상은 ‘중복평렬’의 전형적인 사례로서, 각각 다른 조합을 보이는 문양들 사이에서 미묘한 변화를 볼 수 있어 도공(陶工)의 ‘유법(有法)’과 ‘무법(無法)’의 평형을 느낄 수 있다.
청자 완(碗) 위에 장식된 포류수금문은 방사선 형태의 ‘중복평렬’을 보여주는데, 3개의 단위를 한 각도에서 모두 볼 수 있어 화면의 연속성이 더욱 강조된다. 완 속에 담긴 찻물을 통해 도상의 제재와 형식은 더한층 기물의 기능과 일체를 이룬다.
상술한 사례에서 우리는 이미 포류수금문 도상이 가지는 특유의 ‘회화-장식’의 이중성을 볼 수 있으며, 또한 재질, 기형, 기술 등의 요소와 도상이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여기에서 보이는 공예와 회화의 모순이다. 한편으로는 제작 과정에서 장인이 더욱 정밀함을 추구하여 하나도 허투룬 데가 없지만, 한편 최후에 완성된 화면은 오히려 일필초초(逸筆草草)하여 너무도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상의 ‘의식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은 실은 매우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다. 만약 자기(磁器)를 만드는 복잡한 제조기술이 장인들이 가지는 전문적인 생업 수단이라면, 문인적 취미를 가진 회화는 사회 상층계층에게만 있는 정신적 향유이다. 그러므로 상술한 ‘고려 향상’과 마찬가지로 이런 기물 위에는 실제 서로 다른 사회계층의 여러 역량들이 포함되었다고 할 수 있다.
포류수금문이 장식된 기물은 불교적 법기(法器)일 수도 있으며, 상층사회의 생활용구일 수도 있고, 또 무덤의 부장품일 수도 있다. 이처럼 광범위한 사회 영역에서 출현하는 이 도상은 우리로 하여금 당시의 종교, 세속생활, 그리고 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심미관념, 사회의식 등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해준다.
Ⅱ
형식면에서 볼 때, 포류수금문과 같은 대칭식 구도는 중국 북경시(北京) 하이띠엔구(海淀區)의 당대 왕공숙(王公淑, 846-848)묘, 허베이성(河北省) 취양현(曲陽縣) 에 위치한 五代 왕처직묘(王處直墓, 924) 벽화에서 볼 수 있다. 두 무덤 모두 정벽에 큰 폭의 모란화 및 수금(水禽)을 대칭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대칭식 화조화는 아마도 오대 남당(南唐, 937~975) 화가인 서희(徐熙)가 그린 ‘구도가 단정하고 장중하고, 엄숙하게 늘어선’ ‘장당화(裝堂花)’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만약 시야를 좀 더 확대하면 이런 대칭식 구도가 실크의 문양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실크로드가 개통된 후에 페르시아의 직물이 유입되었고, 이는 중국의 실크 예술 전통에 매우 강렬한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중국에선 각종 연주(聯珠)동물문 비단을 생산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연주문대(帶)의 안에 짝을 이룬 사자, 양, 낙타, 말, 공작 등이 표현되었다. 특히 나무를 중심에 두고 그 좌우에 새들을 대칭으로 병렬하는 문양도 있는데, 화조화 작품에 매우 접근해 있다.
실크의 대칭식 문양은 동시기의 회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둔황(敦煌) 장경동(藏經洞)에서 발견된 마포(麻布) 회화는 실크도안의 대칭식 구도를 가지고 있다. 일본 쇼소인 소장 몇몇 병풍 위에 그려진 회화는 모두 크고 높은 나무를 중심에 두고 나무 하단 좌우에 동물을 대칭으로 분포시키거나, 혹은 나무 아래 한 가운데 하나의 동물을 묘사하고 있다. 투르판(吐魯番) 아스타나(阿斯塔那)의 당대 217호 무덤의 화조병풍 벽화, 하라허줘(哈拉和卓)의 당대 50호 무덤에서 출토한 지본(紙本) 화조병풍화 역시 유사한 구도를 가지고 있다. 이 작품들의 구도는 모두 고려청자의 포류수금문과 매우 유사하다.
서희가 잘 그린 ‘장당화’는 비록 후대 궁정과 사대부 회화의 전통 속에서 계승자가 적었지만, 벽화나 공예미술 계통에서는 연속되었다. 즉 요녕성 파쿠예마오타이(法庫葉茂台)의 7호 요대 무덤에서 출토된 <죽작쌍토도(竹雀雙兎圖)>, 하북성 쉔화(宣化)의 요대 장공유묘(張恭誘墓, 1117)와 장세고묘(張世古墓, 1117)에서 발견한 화조호석(花鳥湖石)병풍 벽화, 그리고 산시성(山西省) 싱현(興縣)의 원대 무경묘(武慶墓, 1309) 벽화가 모두 이런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대칭식의 화조 도안은 후대에 실크예술에도 계승되어 내몽고 아루크얼신치(阿魯科爾沁旗) 요대 야율우지묘(耶律羽之墓, 941)의 실크, 내몽고의 古(고) 바린여우치(巴林右旗) 칭저우(慶州) 백탑(白塔)의 천궁(天宮, 1050)에서 나온 비단 자수제품의 문양이 모두 당대의 이런 형식을 계승했다. 요대 자수 가운데는 또한 연지(蓮池)를 묘사한 소경(小景)이 많은데, 대칭 구도로 연지에서 노는 커다란 기러기들을 표현했다. 이런 제재는 고려청자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중국의 공예품과 회화 예술은 아마도 여러 경로를 통해 한반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문헌에는 고려와 송대 궁정에서 주고받은 물건 가운데 적지 않은 실크제품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서긍의『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권19에 “거란의 포로 수만 명 가운데 재주가 있는 자가 1/10인데, 그 가운데서 기예가 뛰어난 자를 골라 왕부(王府)에 머물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 요대 예술이 고려에 미친 영향을 알 수 있다. 서긍은 고려 실크에 대해서도 역시 기록을 남겼는데, 내용으로 미루어 그 가운데 중국의 ‘장당화식’ 대칭 구도를 가진 작품과 유사한 것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고려인들이 당시 중국에서 날로 발전하던 궁정과 문인의 회화예술을 매우 중시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버드나무, 물풀, 연꽃, 수금 등의 제재는 모두 남송과 북송 회화에서 흔히 보는 것들이다.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양각(陽刻) 청자 정병 한쪽에 묘사된 물풀과 오리 등은 북송의 선승화가 혜숭(惠崇)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추포쌍원도(秋蒲雙鴛圖)>와 매우 유사하다. 때문에 이런 도상의 전파는 결코 한 번에 끝난 것이 아니라 부단히 이뤄지는 연속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포류수금문의 원류를 살펴본 결과, 이런 도상이 중국 내지는 중앙아시아 예술과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동아시아 예술사의 통합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도록 해준다. 이런 통합성 내부의 교류에는 확실히 시간적으로 선후가 있지만, 그렇다고 이 때문에 각 시기의 역사적 공간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독특한 공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곽약허(郭若虛)는『도화견문지(圖畵見聞志)』권6에서 고려 사신들이 중국 회화를 구하고자 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송나라 사람들이 고려의 예술품을 좋아하고 소장했다는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바로 문화교류의 쌍방향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영국박물관의 한국 및 동아시아 칠기공예품 소장과 연구현황
잰 스튜어트 (Jan Stuart, 영국박물관)
쇼소인(正倉院)의 칠기와 백제문화
나이토 사카에(內藤 榮, 일본 나라국립박물관)
시작하며
쇼소인에는 756년 도다이지(東大寺) 대불(大佛) 내부에 있던 쇼무천황(聖武天皇)이 애용하던 보물을 비롯해 당시의 귀족들이 도다이지 부처에게 봉헌한 것들과 도다이지에서 사용하던 불구(佛具), 악기, 다양한 도구류(道具類)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 보물의 수는 9000여 점에 달한다. 대부분 8세기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7세기 이전 혹은 9세기 이후의 것도 소량 있다. 보물의 95%는 일본에서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약 5%의 보물은 신라와 당나라 등에서 수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쇼소인 사무소 나루세 마사카즈의 의견). 일본에서 제작된 것들 중에서도 당나라나 신라의 디자인을 차용한 것과 국외의 재료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도 있다. 일본 쇼소인 보물은 8세기 아시아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므로 한국과 중국의 연구자도 함께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한국과 쇼소인 보물
쇼소인 보물에 통일신라의 유물이 포함된 것은 잘 알려져 있으며, 제54회 쇼소인전(展)에서 그 중 몇 가지가 소개되었다. 쇼소인의 식기류[佐波理製品] 중 다수가 통일신라에서 수입된 것이다. 식기류를 포장한 종이에 종종 신라의 문서가 사용되었다. 또 신라 제작의 먹과 경질(経帙, 불경의 포장)이 있으며,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촛불의 심지를 자르는 가위와 굉장히 유사한 금동 유물도 있다. 그리고 신라의 상인에게서 물건을 구입한 것을 나타내는 문서도 남아 있다. 최근에는 쇼무천황의 보물인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碁局)>의 소나무를 보고 이것이 한반도에서 유입된 것[請来品]이라는 이론도 발표되었다.
백제 문화와 쇼소인 보물
지금까지 별로 주목받지 못했으나 쇼소인 소장품 가운데 백제에서 만들어진 유물이 있다. 쇼무천황의 보물 목록인『국가진보장(國家珍寶帳)』에 따르면 보물인 <적칠규목주자(赤漆槻木厨子)>는 백제 의자왕이 쇼무천황의 의부(義父)인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에게 보낸 것이라고 한다. 불행히도 이 주자는 오늘날 전하지 않지만, 앞의 『국가진보장』에 기재된 것 중 매우 비슷한 명칭인 <적칠문규목주자(赤漆文槻木厨子)>가 남아 있어 과거의 형태를 추측할 수 있다. <적칠문규목주자>는 나뭇결이 좋은 느티나무를 붉게 염색한 뒤 투명한 옻칠을 한 것으로, 정면의 문을 열면 아래쪽에 眼象이 있는 다리, 위에는 비스듬히 열린 板이 있다. 안상이나 상부 판의 형태는 백제의 양식과 매우 유사하여 아마도 의자왕이 보낸 <적칠규목주자>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쇼무천황의 보물은 아니지만 ‘유리배(瑠璃杯)’의 은제(銀製) 다리에 새겨진 문양이 익산 미륵사지 서쪽 석탑에서 발견된 금동 舍利壺(사리호)와 유사하여, 다리 부분은 백제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백제의 장인이 제작에 관여했다고 추정되는 나라의 호류지 옥충주자(玉虫厨子)와 문양이 매우 비슷한 것으로 <밀타채회상(密陀彩繪箱)>이 있다. 이 상자에 그려진 문양은 동물이나 새가 식물문과 결합한 듯한 기이한 스타일로, 이는 백제의 벽돌[塼]이나 앞에서 예로 든 ‘유리배’의 다리에서도 볼 수 있다. <밀타채회상>도 백제와 깊은 관련이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쇼소인에는 아스카 시대의 유물도 있다. 때문에 이를 통해 아스카 시대의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던 백제 문화의 발자취를 찾아낼 수 있다.
중국 서화사 : 내가 걸어 온 학문의 길과 전망
푸션(傅申, 대만 국립대만대)
중국의 미술고고사 : 내가 걸어 온 학문의 길과 전망
양홍(楊泓,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나는 1956년부터 중국 미술고고를 연구했다. 당시 베이징(北京) 대학 역사학과 3학년이었던 나는 수바이(宿白) 선생의 교시(敎示)로 ‘고구려 묘실벽화’에 관한 논문을 썼는데, 이것이 바로 나의 중국 미술고고 연구의 시작이었다. 그 때부터 오늘까지 57년이 흘렀다.
1958년 대학 졸업 후, 중국과학원(現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중국 성립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신중국의 고고 수확(新中國的考古收獲)』편찬 작업에서 내가 ‘위진남북조시대’를 맡았는데, 이를 계기로 위진남북조시대 고고학은 나의 주요 연구 분야가 되었다. 당시 위진남북조시대 불교 석굴사원과 묘실벽화에 주목한 몇 편의 글을 발표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중국의 정치상황이 급변함에 따라 고고연구소 업무도 중단되고 말았다. 비록 1973년 고고연구소가 정상화되었지만,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했다. 당시 나는 허베이(河北) 만청(滿城)의 서한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묘(劉勝墓) 출토 철제 갑옷을 보게 되었는데, 이때 비로소 중국 고대 갑옷과 갑주에 관한 연구가 없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관련 문헌과 발굴 자료를 토대로「중국 고대의 갑주(中國古代的甲胄)」를 완성하였고, 이를 계기로 중국 고대 병기고고(兵器考古) 연구를 병행하게 되었다. 나의 병기 연구를 주목한 일본 학자의 초청으로 1982년 나라 등을 방문해 강연을 했으며 이후 일본학자들과 긴밀하게 교류했다.
중국의 미술고고학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점차적으로 형성된 학문이다. 1950년대부터 ‘미술고고’란 용어가 자주 언급되었으나 이에 대한 통일된 견해는 없었다. ‘미술고고’에 대해 학문적 정의를 처음 시도한 것은『중국대백과전서ㆍ고고학』에서였다. 나는 이 책을 총괄한 샤나이(夏鼐) 선생에게 이 책 안에 ‘미술고고’ 항목을 포함시킬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책에서는 정식으로 소개되지 못하고, 샤나이 선생이 집필한 ‘고고학’조항에서 고고학의 하위 학문으로 간략하게 설명되었다. ‘미술고고학’은 이후 편찬된 『중국대백과전서ㆍ미술』편에서 비로소 정식으로 소개되었다. 나는 이 책에서 미술고고학의 연구목적과 방법 그리고 연구 대상 등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예술사 연구와의 차이를 논의했으며, 이후『미술고고반세기(美術考古半世紀)』를 출간하였다. 1990년대부터는 대학에서 ‘미술고고학’을 강의했고, 중국사회과학원에서 박사생을 지도했다. 그리고 2008년,『중국미술고고학개론』을 저술함으로써 반세기에 걸친 중국 미술고고학 연구를 총결산할 수 있었다.
미술고고학과 예술사는 연구방법과 연구목적이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학문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나는 열린 태도를 가지고 예술사학자들과 학문적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했다. 또한 학생들에게는 스승을 모방하지 말고 창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가야 할 것을 강조했다.
올해 나는 78세가 되었지만 여전히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중국고고학·위진남북조(中國考古學·魏晋南北朝)』의 편집과 저술을 맡고 있는데, 이것이 끝나면 『중국미술고고학개론』을 수정 보완하여 ‘개론’이 아닌『중국미술고고학』을 완성하고 싶다.
부록
아시아뮤지엄연구소(AMI) 소개
21세기 문화는 국제교통망의 발달, 실시간대 디지털정보의 유통, 국경 없는 경제의 발전에 따른 문화의 세계화와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역사학계와 미술사학계도 새로운 고고학적 발굴과 고문서의 발견, 과학의 진보, 역사관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연구 방법론의 도입으로 변혁을 거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박물관·미술관 분야도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고 새로운 뮤지엄 유형과 전시개념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발전을 거친 동아시아권에도 구미문화의 세력에서 벗어나 문화의 주체성을 재정립하고 있으며, 뮤지엄의 수도 급격히 증가하면서 이른바 ‘뮤지엄 시대’로 진입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동아시아 문화사가 보여 온 지역적 편향성과 국가주의를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보다 폭넓은 시각에서 동아시아 문화예술의 역사와 근현대의 발전을 조명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목적을 위해 설립된 아시아뮤지엄연구소(Asia Museum Institute. 약칭 AMI)는 한국과 동아시아 뮤지엄의 발전을 위해 새로운 미술사와 박물관학적 방법론을 개발하고 실천해나가고자 합니다.
AMI는 (재)한국내셔널트러스트문화유산기금 부설연구소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1년 10월1일 ‘오늘의 뮤지엄 어디로 가고 있나’를 주제로 주 후원기관인 삼성리움미술관에서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한 바 있습니다. 2013년 11월 29-30일에는 고려나전칠기공예를 주제로 2차 국제심포지엄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공동으로 주최합니다. 한편 AMI는 내셔널트러스트문화유산기금과 함께 2년 전부터 역사적 문화인물 들의 옛집을 발굴․보존하고 콘텐츠를 개발하여 ‘기념박물관․미술관’으로 발전시키는데 노력해 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