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찾은 다산의 〈산거잡영(山居雜詠)〉 24수

2016. 3. 10. 03:10



       새로 찾은 다산의 〈산거잡영(山居雜詠)〉 24수| 실힉 관련 자료. 논문

낙민 |  2016.01.01. 09:23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문헌과해석> 통권 제 42호(2008년 봄호), 185-209면 수록


《다산시문집》에서 가장 의문스러운 점은 다산초당 시절 시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이다. 그의 학문이 활짝 꽃을 피운 10년 가까운 기간의 시가 한 수도 없이 빠져 버렸다. 시문집을 엮으면서 해당 시기의 시집이 권 채 망실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최근 다산의 이 시기 시문들이 강진 지역을 중심으로 잇달아 발굴되고 있어, 시문집의 공백을 메워준다.


논자는 순천 송광사박물관에 소장된 《백열록(柏悅錄)》에 실린 〈산거잡영(山居雜咏)〉 24수가 다산의 일시(逸詩)임을 2007년 가을 현지 답사를 통해 새롭게 확인한 바 있다. 이 시는 초당 생활을 소묘한 것이어서, 초당 시절 주변의 공간 배치와 다산의 생활상을 새롭게 일러주는 귀한 자료다. 게다가 최근 강진에서 개최된 다산선생유물특별전에 공개된 다산의 편지 한 통은 이 시의 창작 시기까지 알려주고 있다. 이에 두 자료를 엮어 정리하던 참에 최근 김민영 선생이 소장한 필사본 육로산거영(六老山居咏)》 1책이 공개되었다. 놀랍게도 《백열록》에 수록된 것과 동일한 내용이었다. 


이제 이 글은 다산의 편지 1통과 《백열록》 및 《육로산거영》에 수록된 다산의 일시 24수를 소개하고, 그 의미를 정리해보려는 것이다. 집필에 앞서 원본 자료를 흔쾌히 제공해해주신 송광사박물관의 고경 스님과 김민영 선생께 깊은 감사를 표한다. 대방가의 잇단 자료 공개로 다산의 18년간 강진 생활도 차츰 윤곽이 또렷해져서 거의 월별 행적까지 정리될 정도가 되었다. 다산학의 재정립을 위해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산거잡영〉시 수록 문헌과 창작 시기

 

   《백열록》은 근세 송광사의 대강백으로 이름 높은 금명(錦溟) 보정(寶鼎, 1861-1930) 스님이 자신이 읽은 여러 글을 초록해서 묶은 책이다. 여기에는 〈김추사선생증백파서(金秋史先生證白坡書)〉를 비롯하여 초의의 〈동다송(東茶頌)〉, 다산의 〈대둔만일암기(大芚挽日菴記)〉와 범해 각안의 〈다약설(茶藥說)〉등 다양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모두 74쪽 분량이다. 이중 60쪽에서 74쪽 사이에 〈산거잡영〉시가 수록되어 있다.


내용을 보면, 원나라 때 중국 승려인 석옥(石屋) 청공(淸珙, 1272-1352)의  7언율시 〈산거잡영〉 12수 원운에 매수마다 다산제경(掣鯨) 스님의 차운시가 나란히 실려 있다. 그리고는 이를 이어 수룡(袖龍, 1777-?)과 침교(枕蛟), 철선(鐵船, 1791-1858), 범해(梵海, 1820-1896)의 차운시 나란히 실었다. 그리고 73쪽에 다시 석옥의 7언절구로 된 〈산거잡영〉 12수가 다산의 차운시와 나란히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수록된 다산의 〈산거잡영〉시 7언율시 12수와 7언절구 12수 등 24수의 시는 앞서도 말했듯 《다산시문집》에는 누락된 일시(逸詩)다. 최근 공개된 김민영 선생 소장의 《육로산거영》은 《백열록》에 수록된 내용과 동일하다. 이는 《육로산거영》이 바로 금명 보정 스님이 《백열록》에다 옮겨 적은 원본 시집이라는 뜻이다.


《육로산거영》에는 특히 제경 스님의 서문이 실려 있어 창작의 전후 사정을 짚어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석옥화상산거잡영장률십이수(石屋和尙山居雜咏長律十二首)〉가 실려 있고, 이어 〈차운(次韻) 다산선생시(茶山先生詩)〉를 필두로 수룡․ 제경․ 침교․ 철선의 차운시가 잇달아 실려 있다. 특히 철선의 경우 12수 외에 따로 20수의 차운시를 더 수록했다. 이어 〈석옥선사절구십이수(石屋禪師絶句十二首)를 싣고, 〈근차다산시(謹次茶山詩)〉 12수와 침교의 차운수 12수, 그리고 〈철선대사산거잡음오수(鐵船大師山居雜吟五首)〉〈금강행류관대가서순(金剛行留觀大駕西巡)〉 1수를 따로 실었다.


《백열록》에 실린 〈산거잡영〉은 《육로산거영》을 보고 베껴 적은 것이다. 다만 차례는 석옥의 원운 아래 다산과 수룡 등의 시를 차례로 실은 《육로산거영》과 달리, 《백열록》은 다산과 제경을 나란히 놓고, 여기에 차등을 두어 수룡과 침교, 철선의 시를 싣고 있는 점이 다르고, 칠언절구의 경우는 석옥과 다산의 차운작만 실은 것이 차이 난다.   


다산은 언제 이 작품을 지었을까? 《백열록》에는 창작연도를 확인할만한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2006년 강진의 다산기념관에서 개최된 제 2회 다산정약용선생유물특별전에 전시된 한통의 친필 편지가 이 작품의 창작과 관련된 내용을 증언한다. 〈호암회납(葫菴回納)〉이 그것이다. 편지의 수신인인 호암(葫菴)는 누구인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편지를 읽어 본다.

 

   이번에 하문하심을 받자오니 외롭던 마음에 큰 위로가 됩니다. 새해에는 송궁축빈(送窮逐貧) 하시고 온갖 복이 이르시기를 깊이 하례 드립니다. 보내온 시는 청경준결(淸警峻潔) 하면서도 음절이 잘 맞아 읽어보고 마음이 기뻤습니다. 끝의 두 편은 서사가 속됨에 가까우니 빼버리시는 것이 나을 듯 싶습니다. 저는 근래 석옥(石屋) 청공(淸珙)의 시 한 권을 얻어 수십 여편의 시를 찬찬히 화운하며 홀로 소견하고 지냅니다. 천수(天水)의 일은 아직 염려를 놓을 수가 없습니다. 보름 이전에 두세 번 송정(松亭)으로 가셔서 간곡히 빌어 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석옥의 시운은 그대 형님께서 적어 갔으니 틈나시면 화운해 보심이 어떠 하실런지요. 다 갖추지 못하고 답장합니다.
무정월(戊正月) 5일 척제(戚弟) 복인(服人)은 올립니다.1)


(承此下問, 深慰孤懷. 新年 送窮逐貧, 百祿川至, 深賀深賀. 來詩淸警峻潔, 音節諧鬯, 讀之欣然. 末二篇則敍事近俗, 刪之恐好耶. 弟近得石屋淸珙詩一卷, 細和數十餘篇, 以自消遣耳. 天水事未可釋慮, 望前再三往松亭, 懇乞之爲宜耳. 石屋詩韻, 令伯肖錄去, 有暇和之如何. 不備謝. 戊正月五日, 戚弟服人頓.)

 

   편지 내용 중에 석옥 청공의 시집을 얻어 수십 여 편을 화운하며 소견하고 있다는 내용이 보인다. 또 석옥의 시운을 적어 보내니 여가에 함께 화운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척제(戚弟)’라 한 것으로 보아 호암은 다산과 먼 인척 관계였던 듯 하고, 복인(服人)이라 말한 것은 다산이 당시 상중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편지의 발신일은 ‘무정월오일(戊正月五日)’이다. 무(戊)자 간지가 들어가는 해의 1월 5일에 썼다는 이야기다. 시의 내용이 다산초당에서의 생활을 노래한 것인데, 다산이 초당에 정착한 것이 1808년 무진년이다. 그리고 다산은 1818년(무인년) 8월까지 강진에 머물렀다. 시의 내용이나 전후 정황으로 보아 위 편지의 ‘무정월(戊正月)’은 1818년이 분명하다. 당시 다산기념관의 유물설명에는 이 편지가 1828년에 쓴 것으로 추정했으나, 이는 잘못이다.


그렇다면 다산은 어떤 연유로 원나라 때 승려인 석옥 화상의 〈산거잡영〉시를 차운하게 되었을까? 그 전후 사정은 《육로산거영》의 앞쪽에 실린 제경 스님의 〈석옥선사율시봉화서(石屋禪師律詩奉和序)〉가 있어 상세히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 선종의 계통은 여러 번 이어졌다 끊어지곤 했다. 고려 말에 태고(太古) 보우(普愚)화상이 직접 중국에 들어가 청공에게서 법을 얻었다. 이를 이어 이후 7세 동안 이어져서 부용(芙蓉)에 이르러 두 가지가 나란히 나와 마침내 이처럼 번성하게 되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내가 외전(外典)을 보니 근본에 보답하는 제사는 그 조상이 나온 곳으로 하였다. 태고 스님이 이미 승가의 큰 조상이시라면 석옥도 제사를 올림이 마땅치 않겠는가? 예법이 같다고 말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다. 장주(長洲) 고사립(顧嗣立)이 석옥의 시 30여수를 가려 뽑아 해외에까지 흘러 전하였다. 그 〈산거잡시〉에 율시와 절구가 각 12수인데, 마음의 운치가 맑고도 아득하고 음조가 해맑고 밝았다. 하루는 다산을 뵙고 함께 이 시에 화답할 것을 의논하였다. 다산께서 말씀하셨다. “나와 자네는 모두 산에서 사는 사람일세. 산에 사는 즐거움은 사는 사람이 아는 법이지.” 인하여 차운하여 한 질을 이루었다. 학인으로 암자에 있던 자가 따라서 이를 화답하고, 그 중 좋은 것을 가려서 또 약간 편을 기록한다.
무인년(1818) 가을 7월 16일, 아암문인 제경이 적는다.  


(吾東禪系, 屢續屢斷. 高麗之末, 太古普愚和尙, 身入中國, 得法於淸珙. 嗣玆以降, 七葉蟬聯, 以至於芙蓉, 雙枝騈出, 遂如是蕃茂. 豈不休哉. 余見外典, 報本之禘, 其祖之所自出. 太古旣僧家之大祖, 則石屋非所宜褅乎? 非曰禮同, 理則然耳. 長洲顧嗣立, 選石屋詩三十餘首, 流傳海外. 其山居雜詩長短各十二首, 心趣淸夐, 音調瀏亮. 一日謁茶山, 議共和之. 茶山曰: “吾與若皆山居者也. 山居之樂, 居者知之.” 因次韻成帙. 學人在菴者, 從而和之, 選其佳者, 又錄若干. 戊寅秋七月旣望, 兒菴門人掣䲔題.) 

 

제경의 이 서문은 1818(무인년) 7월 16일에 작성되었다. 다산은 이미 1818년 1월 5일의 편지에서 근래 석옥의 시에 수십 편 차운하였노라는 내용을 적고 있다. 그러니까 다산이 〈산거잡영〉시를 지은 것은 1817년 가을에서 1818년 정초 사이의 일이 된다.



   굳이 원나라 때 승려인 석옥 화상의 시를 차운한 연유도 이 글에서 시원하게 밝혔다. 석옥 청공은 원나라의 승려다. 고려 말에 태고(太古) 보우(普愚, 1301-1382) 스님이 중국으로 건너가 그의 법을 전해 받았다. 이후 7대를 이어 내려와 부용(芙蓉) 영관(靈觀, 1485-1571) 스님에 이르러 청허(淸虛) 휴정(休靜, 1520-1604) 스님과 부휴(浮休) 선수(善修, 1543-1615) 스님으로 선맥이 둘로 나뉘어 크게 번성하였다. 서문을 쓴 제경 스님은 휴정과 소요(逍遙) 태능(太能)을 거쳐 혜장으로 이어진 법계에 속한다. 따라서 석옥은 그 선조가 말미암아 나온 바 보본(報本)인 셈이다. 


제경은 석옥 청공의 시를 중국 사람 장주(長洲) 고사립(顧嗣立)이 엮은 30여 수의 석옥시를 통해 접했다고 적고 있다. 그 시의 심취(心趣)가 맑고 아득하고, 음조(音調)가 해맑고도 밝은 것을 보고, 당시 자주 왕래하던 다산에게 함께 차운시를 지을 것을 청했다. 이에 다산은 “나와 너는 산에서 사는 사람이니, 산에 사는 즐거움은 사는 사람만 안다”고 하며 흔쾌히 24수의 차운시를 지었다. 그러자 이에 고무된 여러 승려들이 다투어 차운시를 지어 《육로산거영》이라는 차운시집으로 엮게 되었던 것이다.


고사립이 엮었다는 석옥의 시 30여 수는 사고전서에 수록된 《원시선(元詩選)》 초집 권 68에 수록된 ‘석옥선사청공(石屋禪師淸珙)’ 항목을 따로 베낀 것을 말한다. 이 시집에는 석옥 청공의 시가 6제 34수 수록되어 있다. 다산이 차운한 〈산거잡영〉시 7언율시 12수는 원래 제목은 〈한영(閒詠)〉 12수이고, 7언절구 12수는 〈산거음(山居吟)〉 12수로 되어 있다.


시집을 편집한 고사립의 서언에 따르면 석옥 청공은 상숙(常熟) 온씨(溫氏)로 원나라 때 승려다. 급암(及菴) 신선사(信禪師)의 법맥을 이어 호주(湖州)의 복원사(福源寺)에서 주석하였다. 급암선사가 대중에게 “이 사람은 법해(法海) 가운데서 그물로 걷어 올린 금린(金鱗)이다”라고 말했을 만큼 법기(法器)임을 인정받았다.2) 그는 원래 《석옥시》란 시집이 있었는데, 이 중 34수만을 간추린 것이 이 시집이다. 석옥은 자신의 시집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내가 산림에서 한가할 때가 많아 잠자는 여가에 우연히 게어(偈語)를 이루었다. 종이와 먹이 적은지라 문득 다시 기록하지는 않는다. 운납(雲納)과 선인(禪人)들이 이를 옮겨 적기를 청함은 내 산중의 취향을 알게 하려 함이다. 이에 뜻가는 대로 붓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한 질이 가득 차게 되었다. 이를 덮고 돌아오니, 삼가 이것을 노래하며 읊조리는 거리로 여기지 말고, 마땅히 그 뜻을 참구한다면 격동됨이 있으리라.


(余山林多暇, 瞌睡之餘, 偶成偈語. 紙墨少, 便不復記錄. 雲衲禪人請書之, 蓋欲知我山中趣向耳. 于是隨意走筆, 不覺盈帙. 掩而歸之, 愼勿以此爲歌詠之助, 當須參究其意, 則有激焉.)3) 

 

   석옥 청공의 산거 시집은 이밖에도 여러 원대의 시선집 속에 실려 있고, 그의 시는 한산(寒山)의 유풍(遺風)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원나라 지정(至正) 연간에 황제는 향폐(香幣)와 함께 금란가사(金襴袈裟)를 하사하였다. 또 그가 세상을 뜨자 고려 국왕이 중국 황제에게 표를 올려 시호를 청하였으므로 황제는 조서를 내려 불자혜조선사(佛慈慧照禪師)란 시호를 하사했다.4)


석옥 청공을 위해 고려 국왕이 표를 올린 것은 위에서 적은 태고(太古) 보우(普愚) 스님과 관련이 있다. 관련 내용이 《동사열전(東師列傳)》〈태고왕사전(太古王師傳)〉에 보이므로 잠깐 인용한다.

 

   37세에 크게 깨닫고, 46세에 연도(燕都)로 유학 가서 호주(湖州) 하무산(霞霧山)으로 석옥 청공선사를 찾아뵈니, 선사가 그를 큰 그릇으로 여겨 마침내 가사(袈裟)를 주어 신표로 삼으며 말했다. “노승이 오늘에야 발을 뻗고 자겠구나.” 연도에 이르자 천자께서 이를 들으시고 영명사(永明寺)에서 법회를 열기를 청하고 금란가사와 침향불자(沈香拂子)를 하사하셨다. 무자년(1348) 봄에 우리나라로 돌아와 미원(迷源)의 소설산(小雪山)으로 들어갔다.


(三十七大悟, 四十六游燕都, 至湖州霞霧山石屋淸珙禪師, 禪師深器之, 遂以袈裟表信曰: “老僧今日展脚而睡矣.” 回至燕都, 天子聞之, 請開堂於永明寺, 賜金襴袈裟沈香拂子. 戊子春東歸, 入迷源小雪山.)5)

 

   이것이 《육로산거영》의 서문에서 제경 스님이 말한 석옥 청공의 법이 태고 보우에게로 전해진 내용이다. 그런데 태고 보우 화상이 고려로 돌아와 은거한 곳이 바로 미원의 소설산이었다. 미원의 소설산은 다산의 집이 있던 양수리 바로 근처에 있었고, 다산은 진작부터 소설산 자락에 주추만 남은 보우 스님이 머물던 절터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다산이 초의에게 준 글에서 “소설봉은 태고 보우화상이 일찍이 숨어살던 곳이다. 옛날에는 절집이 있었지만, 지금은 퇴락하였다. 초의 거사는 마땅히 수리하여 이엉을 얹고 정갈한 가람 한 구역을 만들어 길이 마칠진저.”6)라고 한 바 있고, 최근 《육로산거영》과 함께 공개된 김민영 선생 소장의 《다산유산양세보묵(茶山酉山兩世寶墨)》에도 자굉(慈宏) 화상에게 준 글 가운데, “양근(楊根)의 소설산에는 태고 보우 화상의 옛 터가 있다. 주춧돌의 자취가 지금도 완연하다. 이제 만약 한 작은 암자를 얽어 새로 도금한 작은 보살상 한 구를 안치하고, 옹방강이 보내준 《담계시집(覃溪詩集)》을 옮겨 보관한다면 경기도에서 이름난 중이 될 수 있을 터인데 한번 도모해 보겠는가?”7)라고 한 내용도 보인다.


이렇듯 다산은 집 근처 소설봉에 있던 태고 보우 스님의 절터를 익히 알아 그리던 중에 제경으로부터 보우 스님의 스승 되는 석옥 청공의 산거시집에 함께 화운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고, 그 시의 깊고 맑은 운치에 감복하고, 여기에 개인적 인연까지 얹어 흔쾌히 〈산거잡영〉 시 24수를 짓게 되었던 것이다.  



〈산거잡영〉시 24수 번역

 

   이제 자료 제시를 겸하여 새로 발견된 다산의 〈산거잡영〉 24수를 옮겨 보이면 다음과 같다. 뒤쪽 작품 해설의 편의를 위해 율시와 절구에 따로 일련 번호를 매겼다.  

 

1-1
竹閣蕭蕭蓮寺西  백련사 서편으로 죽각(竹閣)이 호젓한데
書香墨色枕寒溪  책 향기 먹 빛깔이 찬 시내에 잠긴다. 
山坡地急開庭窄  산 언덕 땅 가팔라 뜨락을 바투 여니   
瀛海風多結屋低  집 아래 쪽으로는 바다 바람 늘 많다네.
園設石槽通暗水  돌 구유를 설치해서 땅 속 물을 끌어오고
階留木屐待春泥  섬돌의 나막신은 봄 진창을 기다리네. 
一年榮悴隨時物  한해의 영고성쇠 계절 사물 따라 가니
行且花濃百鳥啼  이렇게 또 꽃은 피고 온갖 새들 우지지리.

 

1-2
去住悠悠夢覺關  가고 머묾 유유해라 꿈인가 생시인가
故鄕雖在不求還  고향이야 있다 해도 돌아감 구치 않네.
閱世旣多雙眼大  세상 일 탈도 많아 두 눈이 휘둥그레
著書今癈一身閑  저서를 그만 두니 한 몸이 한가롭다.
谷深愛有摩雲木  골이 깊어 구름 나무 어루만짐 사랑하니
地瘴欣看頂雪山  장기(瘴氣)에도 눈 덮인 산 기쁘게 바라본다.
已道春聲承臘味  봄 소리가 섣달 술로 이어졌다 말을 하니
白鷗飛下綠波間  흰 갈매기 푸른 물결 사이로 내려앉네.

 

1-3
一自庵居與世分  초암에 살고부터 세상과 떨어지니
本然淸淨絶新薰  본래부터 청정하여 새 향기를 끊었네.
書中大訟欣初決  책 속의 큰 논란을 첫 결단함 흔쾌하고
塵裏交爭利不聞  티끌 속에 서로 다툼 이로움 상관 않네.
澗起竹聲收夜雨  시내 이는 댓잎 소리 밤비를 거둬가고
山噓花氣作春雲  꽃 기운을 산이 불어 봄 구름 피어난다.
蒲團美睡朝慵起  부들자리 잠 달콤해 아침 늦게 일어나니
何苦泥靴盡日奔  어이 진흙 신발 신고 종일 애써 달리리오.

 

1-4
雨歇山庭露白沙  비 개인 산 뜨락에 흰 모래가 드러나고
矮簷一半裊垂蘿  낮은 처마 절반쯤 송라(松蘿)가 드리웠네.
採黃心急看蜂沸  꽃가루 딸 마음 급해 꿀벌은 잉잉대고
籍碧痕留覺麝過  풀밭 밟은 남은 자국 노루가 지난 게지.
屋後巡園新筍密  집 뒤란 동산 둘러 새 죽순 빽빽하고
溪邊移席落花多  시냇가 자리 옮겨 지는 꽃잎 많구나. 
岩扉客去渾無事  바위 사립 손님 가자 아무런 할 일 없어
茶碾旋旋手自磨  차맷돌을 빙글빙글 손수 직접 갈아보네.

 

1-5
半生胸裏小池臺  반평생 가슴 속에 작은 지대(池臺) 품었더니
畢竟天敎此地開  마침내 하늘께서 이 땅 열어 주시었네.
一枕睡中花雨積  베갯머리 낮잠 속에 꽃비가 쌓여가고
三盃酒後竹風來  석 잔의 술 마시니 대바람 불어온다.
屯軍總入江淹恨  둔군(屯軍)은 모두다 강엄(江淹)의 한이 되고
寡鶴空令杜甫哀  짝 잃은 학 공연히 두보 슬픔 자아냈지.
萬物自生還自滅  만물은 절로 나서 절로 스러지나니
上穹於此有分裁  하늘이 이에 있어 분별함이 있구나.

 

1-6
本來身在卽吾家  본래의 몸 있는 곳이 바로 우리 집이거니
草草園池備物華  볼 것 없는 원지(園池)지만 물화(物華)를 갖추었네.
旣有碧山非旅泊  푸른 산을 소유하여 떠돌이 삶 아니니
須知白髮是生涯  백발이 생애임을 모름지기 아노매라.
一林同處休防虎  한 숲에 함께 살아 호환(虎患) 막음 그만두고
萬物無猜不擊蛇  만물에 원망 없어 뱀도 치지 않는도다.
沈李浮瓜送殘暑  담근 오얏 띄운 참외 남은 더위 전송하고
涼颸拂拂已昏鴉  찬 바람 건듯 불어 어느새 저녁일세.

 

1-7
數畦荏菽綠層層  몇 두둑의 들깨와 콩 층층이 푸르니
園趣全同范至能  동산 운치 범지능(范至能)과 온전히 똑 같구나.
雨霽屋頭生紫菌  비 개인 집 머리엔 버섯이 피어나고
林深樹頂掛紅藤  깊은 숲 나무 위로 붉은 등꽃 걸려 있네.
前村曉賃耕田婦  앞 마을서 새벽이면 아낙네 밭 품 팔고
憐寺時來問字僧  이웃 절서 이따금 글 묻는 중 찾아온다.
老去醫方專養胃  늙어 가매 약처방은 위장 기름 주로 하니
小池叮囑護荷菱  작은 못의 연밥 열매 잘 지키라 부탁하네.

 

1-8
新秋玉宇曉來澄  초가을 사는 집이 새벽 오자 해맑아서
筇杖消搖逸氣騰  지팡이로 소요하니 빼난 기운 솟는다.
菜圃瓜園經雨大  채마밭과 참외밭은 비 지나 웃자라고
花園林藪逐年增  꽃밭과 나무 숲은 해마다 늘어나네. 
吟時蓬勃如狂客  시 읊을 땐 쑥대머리 미친 사람 한 가지고
病後淸癯似老僧  병 앓고선 비쩍 말라 늙은 중과 비슷하다.
向晩呼兒曬書卷  저물 녘 아이 불러 책을 꺼내 포쇄하니
先生於此未忘情  선생은 공부 일에 마음 잊지 않았구나. 

 

1-9
妻子團圝爾莫誇  처자가 단란함을 그대여 자랑 마소
淸閒不似旅人家  청한함은 나그네의 집만 같지 못하리.
經霜澗路鮮鮮葉  서리 지난 시내 길에 잎새는 이들이들
衰草山坡熠熠花  풀 시든 산 언덕에 꽃이 환히 피었네.
谷響曉聽風落石  골 메아리 새벽녘에 돌 떨구는 바람 소리
樵歌夕唱浪淘沙  목동 노래 저물녘에 〈낭도사(浪淘沙)〉를 부른다.
朱泥點易工纔了  진흙 판에 점괘 찍는 일을 겨우 마치고 
獨倚枯松看落霞  홀로 고송 기대어 지는 노을 보노라.

 

1-10
僧房無事偶相尋  승방에 일이 없어 문득 서로 찾아가니
不是禪機問少林  선기(禪機)로 소림(少林) 소식 묻고자함 아니로다.
晩景收功唯繕性  늦은 경물 공 거두어 다만 성품 다스리고
初年學道悔鉤深  초년에 도를 배워 심히 얽맴 뉘우치네.
芳池日頫疑濠上  방지(芳池)에 해를 보니 호상(濠上)인가 의심되고
破甕時隨作沃陰  깨진 옹기 때에 따라 좋은 그늘 짓는구나.
怊悵孔門仁恕字  슬프다 공문(孔門)의 인(仁)과 서(恕)란 글자만이
恭唯千載月如心  삼가 다만 천재토록 달빛만 마음 같네.

 

1-11
勢道寒暑本相推  세도와 추위 더위 본시 서로 변하나니
日月無多一局碁  한판의 바둑놀음 일월은 많지 않다.
萬物皆忙閑者笑  만물 모두 바빠서 한가한 이 비웃고
六經奇味老來知  육경의 기이한 맛 늙어가며 알겠네.
松罤皓月侵琴嶽  솔은 흰 달 얽어서 금악(琴嶽)을 침범하고
竹送輕風漾硯池  대는 미풍 보내와 연지(硯池)가 일렁이네.
總爲逢飄無俗累  모두 다 떠돌이라 속된 자취 없나니
異恩天賜讀書時  하늘이 독서하라 큰 은혜 내리셨네.

 

1-12
杞籬芋坎盡規模  울타리와 구덩이가 규모에 꼭 맞으니   
誰作寒岩小隱圖  한암(寒岩)의 소은도(小隱圖)를 누가 그려 놓았나.
磽土舊治成沃壤  메마른 흙 오래 만져 비옥한 땅 되어 있고
石泉新鑿近香廚  돌 샘물 새로 파니 부엌에 가깝구나.
山中地凍松猶摘  산중에 땅 얼어도 솔방울을 외려 따고
冬至霜深菊始枯  동지라 무서리에 국화가 시드누나.
淸掃兩庭無一物  두 뜨락을 다 치워서 물건 하나 없는데
牆根安揷煮茶鑪  담장 밑에 차 화로만 꽂아서 앉혔다네.

 

2-1
落盡油茶展茶  유차(油茶)가 다 지고서 찻잎이 기(旗)를 펴니
雨前因繼雪中花  곡우 전에 눈 속 꽃을 인하여 이었도다. 
春來海上饒魚膾  봄 오자 바다 위엔 생선 회가 풍족하여
淸飮翻同肉食家  술자리가 육식(肉食)하는 집과 진배 없고녀.

 

2-2
數卷殘書七尺身  몇 권의 남은 책에 일곱 자의 몸뚱이라
山家無所作柴門  산집은 사립문 달 장소조차 없는 것을.
行過一曲雲溪外  한 굽이 구름 시내 저편을 지나려니
犬吠鷄鳴處處聞  닭울음에 개짖는 소리 곳곳에서 들린다.

 

2-3
山庭焚雜起黃烟  산 뜨락서 잡목 태워 누런 연기 피어나니
目送煙飛到半天  반공으로 솟는 연기 눈길로 전송한다.
菜圃今年灰糞足  올해엔 채마밭에 재 거름이 넉넉해서
經綸只在數畦間  경륜일랑 몇 이랑 밭두둑에 남았다네.

 

2-4
自從流落學無爲  귀양살이 하고부터 무위(無爲)를 배웠나니
吏橫民愁我不知  아전 횡포 백성 근심 내 알 바 아니로다.
書子鶴銘還洗硯  자학명 쓰고나서 다시 벼루 씻는데
綠陰初漲日遲遲  녹음이 막 짙어서 햇살도 느릿느릿. 

 

2-5
書樓淸絶百雲間  글 다락 해맑아라 흰 구름 사이 있고
粉壁橫施淡墨山  흰 벽엔 가로로 담묵 산수 그렸구나.
試看彼中山下屋  그 속에서 산 아래 집 시험 삼아 바라보니
數株風流隱松關  몇 그루 풍류로운 솔 숲에 가려있네.

 

2-6
分根復裂前年菊  작년 국화 뿌리 나눠 다시금 갈라내고
砌石新封太古松  섬돌엔 새롭게 태고송을 심었도다.
已識浮生都是客  뜬 인생이 모두다 나그넨 줄 알건만은
治圃何與在家同  채마밭은 어이하여 집과 같이 일구는고.

 

2-7
數家籬落水村低  물가 마을 아래편엔 몇 집의 울타리요
山裏樵蔬只一磎  산 속 땔감 푸성귀는 다만 시내 하나일세.  
暴雨今年多破缺  올해는 폭우로 없어진 곳이 많아
石梯新補杏園西  행원(杏園)의 서편에다 돌길 새로 고쳤다네.

 

2-8
一鉤新月始生西  갈고리 초승달이 서편에 막 걸리자
竹影䙰褷蔭小溪  대 그림자 살랑살랑 작은 시내 그늘진다.
閒坐曲欄誰與語  굽은 난간 편히 앉아 뉘 더불어 얘기할꼬
秋蠱無數草根啼  가을 벌레 무수히 풀 뿌리서 우는구나.

 

2-9
油茶葉葉露流光  유차에 잎새마다 달빛이 반짝이니 
氈褥今霄代竹床  오늘 밤은 담요 깔고 대나무 상 대신하리.
柹似牛心留不食  홍시감이 쇠간 같아 남겨 두고 안 먹으니
上頭紅熟待經霜  서리 철 기다려야 꼭지 붉게 익으리. 

 

2-10
橡林黃葉雨霏霏  상수리 숲 누런 잎에 부슬부슬 비 내릴 제
竹戶深扃讀馬蹄  대사립 깊게 닫고 〈마제편(馬蹄篇)〉을 읽는다.
戶外紅梅曾手種  문 밖에 홍매(紅梅)를 진작 손수 심었더니 
如今高與屋頭齊  지금은 그 높이가 집 꼭대기 나란하다.

 

2-11
一端賞雪靑筇矗  한 바탕 눈 보려고 지팡이 짚고 서자 
池角臨風白髮斜  못 모퉁이 바람 맞아 백발이 빗기누나.
不識來年去留事  내년의 가고 머물 일이야 모른대도
又從隣寺丐移花  이웃 절에 다시 가서 꽃을 얻어 옮겨야지.

 

2-12
天際浮雲接杳冥  하늘 가 뜬 구름이 아득히 맞닿으니 
觚稜瑞雪悵流情  궁궐의 상서론 눈 마음만 구슬프다. 
宜雷去住渾閑事  가고 머묾 모두다 나와는 상관 없어
只是端居念聖明  다만 늘 거처에서 성명(聖明)만을 생각는다. 


〈산거잡영〉 시에 보이는 다산초당의 사계와 다산의 일상

 

   이상 제시한 다산의 일시 〈산거잡영〉 24수는 1817년 가을 이후 1818년 정초 사이에 지은 작품으로, 다산이 해배되어 서울로 올라가기 직전의 초당 생활을 소묘하고 있는 뜻 깊은 작품이다. 필자는 다른 글에서 다산의 초당경영 과정과 다산초당의 구체적 경관을 시기별로 정리해 본 바 있다.8) 이 자료를 추가하면 초당 생활의 구체적 내용과 공간 배치에 대한 더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산거잡영〉 시에 묘사된 다산초당의 모습과 그 속에서 이루어진 다산의 일상을 간략히 정리해 본다. 백련사 서쪽에 자리 잡은 죽각(竹閣)은 가파른 산 언덕에 위치하여 마당이 좁았고, 집 아래 쪽에서 늘 짠 기운을 머금은 바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었다. 동산에는 돌 구유를 설치해서 땅 속 물을 끌어오고, 섬돌 위에는 나막신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1-1). 당시 다산은 계속된 강행군으로 건강을 많이 상해 저서를 물려두고 섭생에 신경 쓰고 있을 때였다. 깊은 골짜기라 구름은 자옥하게 나무를 어루만지고, 눈 덮인 산 건너편의 멀리 강진만 푸른 물결 사이로 내려앉는 흰 갈매기의 모습도 아름다웠다(1-2). 초당에 살면서 다산은 비로소 티끌 세상과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다. 경전의 쟁점을 촌촌이 분석하여 일찍이 선유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난제들을 차례차례 공략해 나갔다. 냇가의 댓닢 위로 밤 빗소리가 후득이며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고, 꽃기운에 봄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봄날의 풍광이 아름다웠다(1-3). 산 뜨락엔 바닷가에서 가져온 흰 모래를 깔고, 낮은 처마에는 지붕을 타고 내려온 송라(松蘿) 덩굴이 드리워 호젓한 운치를 자아냈다. 꽃밭엔 꿀벌이 잉잉대고, 풀밭엔 노루가 지나간 발자욱이 이따금 남아 있었다. 집 뒤란에는 대숲에 죽순이 여기저기서 돋아나고, 냇가 화단에선 갖은 꽃이 절로 피었다 지곤 했다. 바위를 기둥 삼아 엮은 사립이 있었고, 이따금 차맷돌을 돌려 떡차를 갈아 차를 끓여 마셨다(1-4).


   평생 마음에 품었던 지대(池臺)를 직접 가꾸며, 낮잠을 혼곤히 자고 일어나면 마당엔 꽃비가 쌓이고, 석 잔의 술을 마시면 대바람이 불콰해진 얼굴 위로 건듯 불어왔다(1-5). 여름에는 오얏과 참외를 길러 더위를 잊고(1-6), 들깨와 콩을 몇 이랑 따비밭에 심어 층층이 푸른 빛이 운치로왔다. 비 개인 뒤 지붕에는 버섯이 피어나고, 숲속 나무에는 붉은 등꽃이 걸려 있었다. 새벽엔 이웃 아낙이 밭 갈러 오고, 백련사에서는 글 공부하는 스님들이 이따금씩 찾아오곤 했다. 작은 연못엔 연꽃을 길러, 그 열매를 거둬 위장을 기르는 약재로 삼았다(1-7). 초가을 새벽, 지팡이 짚고서 산보를 하노라면, 채마밭과 참외밭은 유난히 웃자랐고, 꽃밭과 숲은 해마다 면적이 늘어갔다. 미친 사람처럼 쑥대머리를 주억이며 시를 짓다가, 늙은 중처럼 야윈 몸으로 앉아 있기도 한다. 볕 좋은 저물녘엔 아이를 시켜 책을 마당에 늘어놓고 포쇄한다(1-8). 서리 내린 뒤에도 냇가의 잎새는 이들이들하고, 풀도 시든 언덕에서 국화꽃이 피어난다. 진흙 판에 주역의 괘상을 찍어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피곤해지면 고송에 기대어 지는 노을을 바라본다(1-9). 일없는 스님들과 서로의 경계를 인정하며 왕래하며 노닌다(1-10). 그렇게 또 겨울이 왔다. 되돌아보면 1년 네 계절의 변화는 조물주가 펼쳐 보이는 한 판의 바둑판 같다. 그 가운데 인간의 삶은 늘 분주하다. 하지만 한가한 늙은이는 육경의 기이한 맛에 깊이 빠져 그 기쁨이 끝없다. 바야흐로 독서에 몰두할 수 있는 계절이 온 것이다(1-11). 조촐한 규모의 초당은 마치 한암소은도(寒岩小隱圖) 속의 풍경만 같다. 부엌 가까이에 돌 샘물을 새로 파서, 멀리 물 길러 갈 필요도 없어졌다. 동지 무렵에서야 국화가 시든다. 마당엔 아무 물건이 없는데, 담장 밑에 차 화로만 덩그러니 꽂혀 있다. 땅이 꽁꽁 얼어도 이따금씩 솔방울을 따서 찻물을 끓인다(1-12).



   이렇게 7언율시 〈산거잡영〉 12수는 대체로 3수씩 나눠 다산초당의 사계절을 노래하고 있다. 다시 7언절구 〈산거잡영〉 12수를 간략히 살펴보자.


  동백꽃이 지고 나면 찻잎이 비로소 기(旗)를 편다. 찻잎을 딸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봄 들어 바다엔 생선 회가 풍부해서 술자리 안주가 넉넉하다(2-1). 산집은 워낙 좁아 사립문을 달아낼 공간도 없다. 시내 저편으로 산보하노라면 아래 마을 닭울음 소리와 개짖는 소리가 멀리 들린다(2-2). 잡목을 뽑아 밭을 일군다. 뽑은 잡목을 태우면 연기가 솟고, 눈길은 그 연기를 따라 허공을 맴돈다. 그 재를 모아 채마밭에 줄 재거름으로 쓴다(2-3). 무위(無爲)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생긴 버릇이다. 아전의 횡포도 백성의 근심도 굳이 모른 체 하며 먹을 갈아 글씨를 쓴다(2-4). 흰 구름 사이에 서있는 서루(書樓)의 문설주 위 흰 벽에 담묵산수 한 폭을 그려 놓았다(2-5). 묵은 국화 뿌리를 나눠 가을에 대비하고, 섬돌 곁에는 새로 태고송을 구해 와서 심었다. 비록 나그네 삶이나 채마밭은 집에 있을 때와 한가지로 정성을 쏟아 일군다(2-6). 산 속이라 땔감과 푸성귀는 시내 하나만 건너면 지천이다. 올 여름 폭우로 따비밭이 쓸려간 곳이 많아 무너진 돌을 쌓아 원포(園圃)를 정돈한다(2-7).


   가을이다. 초승달에 대 그림자가 일렁인다. 굽은 난간에 앉아 가을 풀벌레 소리를 듣는다(2-8). 동백나무 잎새에 달빛이 반짝인다. 이런 밤은 쉬 잠들지 못한다. 담요를 깔고 앉아 서리철을 기다려 나뭇가지에 남겨둔 홍시감을 올려다 본다(2-9). 상수리 숲에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대사립을 닫아걸고 《장자》를 꺼내 〈마제(馬蹄)〉편을 읽는다. 문밖에 지난 봄에 심은 홍매가 어느새 지붕 높이로 자랐다. 내년 봄 꽃 시절을 기대해 본다(2-10). 눈 구경을 하자고 지팡이 짚고 나선다. 못 모퉁이에 서니 칼바람이 백발을 빗질한다. 내년에 이곳을 떠날지 몰라도, 백련사로 건너가 꽃 모종을 구해 옮겨 심을 궁리를 한다(2-11). 문득 고개를 들어 북녘을 바라 보면 임금 계신 대궐이 떠오른다. 서설은 펑펑 내려 쌓이고, 내 마음엔 슬픔이 쌓인다. 가고 머무는 정이야 초연한 지 오래다. 하지만 먼 곳에서도 성명(聖明)하신 임금 생각만큼은 놓은 적이 없다(2-12). 


   이상 보듯 다산의 〈산거잡영〉 24수는 다산의 초당 생활에 대한 생생한 보고서다. 4계절의 변화에 얹어, 그곳에서의 일상을 섬세하게 소묘해냈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따뜻하다. 다산은 이 시를 짓고 나서 채 1년도 못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말하자면 이 시는 다산초당 생활을 총결산하는 의미를 지니는 작품인 셈이다. 다산이 남긴 한통의 편지와 《백열록》, 그리고 《육가산거영》 같은 자료들이 우연히 한 자리에서 만나 다산의 잃어버린 한 시절의 삶을 이렇듯 오롯하게 복원해 내었다.   

       

1) 제 2회 다산정약용선생유물특별전 도록 11면 상단에 편지의 원본이 수록되었다.
2) 《흠정사고전서》 집부(集部), 《원시선(元詩選)》 초집 권 68 서언 참조.
3) 위 같은 곳.
4) 관련 기록은 《흠정사고전서》 집부에 수록된 《취리시집(檇李詩集)》 권 30에 수록된 〈석옥화상청공〉조에 실려 있다.
5) 각안(覺岸) 편, 《동사열전(東師列傳)》(정문사 영인본, 1994) 권 2-67면, 〈태고왕사전(太古王師傳)〉 참조.
6) 정민, 〈초의에게 준 다산의 당부〉, 《문헌과해석》 통권 41호(2007년 겨울호, 문헌과해석사), 65쪽 참조.
7) 김민영, 《스님의 일상》(동국대학교 출판부, 2008),   면 : “楊根之小雪山, 有太古普愚和尙舊基. 敧礎猶宛然. 今若搆一小菴, 安新鍍小菩薩一軀, 移藏翁覃溪詩集, 足可爲畿甸名釋, 其圖之哉.”
8) 정민, 〈다산의 초당 경영과 공간 구성〉, 《문헌과해석》 통권 39호(문헌과해석사, 2007년 여름호), 13-32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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