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와 현대시 4題 /한시미학 / 정민 한양대 교수

2016. 3. 11. 03:35



       한시와 현대시 4題 /한시미학 / 정민 한양대 교수| 옛사람 내면풍경

낙민 |  2016.03.07. 03:40


 

 

 

 

 

 

1

조지훈은 〈또 하나의 시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낮은 소리 가만히 그리웠냐 물어보니, 금비녀 매만지며 고개만 까닥까닥(低聲暗問相思否, 手整金?少點頭).’ 여기에 동양의 수법이 있다. 서양의 시인은 이렇게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도 당신을 사랑했어요, 한 시도 잊을 수 없어요 하고 빨간 입술을 내밀었을 것이다. 어느 것이 낫다는 것은 별문제로 하고라도 표현 방법에서도 동양의 수법은 신비롭다.”


이 동양의 수법이란 곧 한시의 수법이다. 직접 말하지 않는다. 다 보여주지 않는다. 立象盡意, 이미지를 세워 할 말을 대신한다. 현대시도 한가지다. 현대시와 한시는 여러 모로 참 닮았다.


한시와 현대시의 관련을 찾는 가장 쉽고 분명한 방법은 표현의 유사로 논하는 것이다. 이백의 〈山中問答〉에서 “날더러 무슨 일로 산에 사냐 묻길래, 웃고 대답 아니해도 마음 절로 한가롭다.(問余何事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한 것을 흔히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왜 사냐건 웃지요”와 견준다. 이수복의 〈봄비〉,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에서 정지상 〈送人〉의 “비 개인 긴 둑에 풀빛 고운데(雨歇長堤草色多)”를 연상한다. 과연 이백이 14자의 뜻글자로 말한 것을 소리 글자 7자로 압축해낸 김상용의 솜씨는 놀랍다. 하지만 한 구절의 偶同으로 작품 전체를 한시의 영향권 아래 갖다 놓기는 왠지 개운치 않다.


오탁번이 적절히 지적한 대로 정지용의 〈長壽山 1〉과 두보의 〈題張氏隱居〉에 오게 되면 둘 사이의 유사성은 표현의 일치에 머물지 않는다. 정지용은 “伐木丁丁 이랬거니 아람도리 큰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좃지 않고 묏새도 울지 않어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라 했다. “봄산 동무 없이 홀로 그대 찾으니, 쩡쩡 나무 베는 소리 산 더욱 그윽하다.(春山無伴獨相求, 伐木丁丁山更幽)”라 한 것은 두보다. 두 시는 ‘伐木丁丁’의 일치 외에 ‘깊은 산의 고요’가 불러오는 의경의 幽玄美에서도 상호간의 넘나듦이 진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러한 유사성은 정지용이 한시를 많이 읽었고, 이미지 구사에서 이를 적절히 활용했다는 유력한 증거는 될지언정, 그 이상은 아니다. 이 짧은 글에서는 몇 수의 한시와 현대시를 한데 어울러 읽어본다.

2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 섰거니 하야
꼬리 치날리여 세우고,

죵죵 다리 깟칠한
山새 걸음거리.

여울 지여
수척한 흰 물살,

갈갈히
손가락 펴고,

멎은듯
새삼 돋는 비ㅅ낯

붉은 닢 닢
소란히 밟고 간다.

정지용의 시 〈비〉다. 16행 8연이다. 의미 분절로는 두 개 연을 한 단위로 한 기승전결의 구조다. 한시로 치면 7언절구다. 통사 구조를 바꿔 한시 식으로 옮겨본다.

소소리 바람 몰려 돌 그늘 서늘한데
죵죵 다리 꼬리 세운 산새의 걸음걸이.
여울 진 흰 물살은 갈갈히 손을 펴고
붉은 잎 밟고 가는 새삼 돋는 빗낯일세.

그대로 멋드러진 한 수의 한시다. 1,2연을 억탁으로 맞춘다면 ‘蕭蕭凉風石陰寒’쯤 될테고, 7,8연은 ‘亂踏赤葉新雨脚’ 쯤 될 수 있을까? 지용은 해방 직후 해방기념 조선문학가대회 때 자식을 대신 보내 왕유의 한시 한 수를 낭송하게 했다 한다. 선문답 같은 이 장면은 내게 무슨 상징 같이 읽힌다. 그는 〈綠陰愛誦詩〉에서 시경과 범성대, 왕안석, 사마광의 한시를 애송시로 들고, 끝에 가서 다시 한시 한 수를 들었다. 그 시는 이렇다.

석류꽃 잎에 어울려 봉오리 지고 보니 榴花映葉未全開
느티나무 그늘 침침하니 비올듯도 하이. 槐影沈沈雨勢來
집 적고 휘진 곳이라 오는 이도 없고야 小院地偏人不到
삿삿히 밟은 새 발자욱 이끼마다 놓였고녀. 滿庭鳥跡印蒼苔

번역도 그의 솜씨다. 위 〈비〉의 의경과 어지간히 닮아 있다. 비가 오려는지 느티나무 그늘이 차다. 사실 1구는 “잎에 비친 석류꽃 아직 벌지 않았는데”의 뜻이다. ‘봉오리 지고 보니’는 오역이다. 석류꽃은 저 비를 맞고야 봉우리를 활짝 피어낼 태세다. 뜨락 이끼에 도장 찍는 새 발자욱은 깟칠한 산새의 종종 걸음을 연상시킨다. 금새라도 느티나무 그늘의 석류잎을 소란스레 밟고 지나는 빗방울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정지용의 시에는 한시의 구문과 어법이 또렷히 살아 있다. 9연으로 된 〈毘盧峯〉도 끝 연 ‘바람에 아시우다’를 위에 붙이고 보면 7언절구의 구문을 벗어나지 않는다. 〈玉流洞〉은 7언율시의 호흡으로 읽어도 큰 차이가 없다. 〈忍冬茶〉도 비록 5연이되, 시상이 놓인 자리는 의연 7언절구의 호흡이다. 모던한 그의 시가 가장 한시와 닮았다. 재미있는 역설이다.

3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조지훈의 〈玩花衫〉이다. ‘완화삼’은 글자 그대로 풀면 ‘꽃을 구경하는 적삼`이다. 꽃구경하는 나그네란 뜻이다. 시 속에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에서 따왔다. 〈완화삼〉의 첫 연,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는 杜牧의 〈山行〉 1구, ‘비탈진 바위 길에 찬 산 멀리 오르는데(遠上寒山石徑斜)’를 단번에 떠올린다. 다만 시의 감정이 다소 과잉되어 한시의 말하기 방식과 멀어졌다. ‘차운’, ‘구슬피’, ‘울음 운다’, ‘다정하고 한 많음’, ‘병인 양하여’, ‘고요히’, ‘흔들리고’ 등이 그것이다. ‘저녁 노을이여’, ‘꽃은 지리라’, ‘흔들리며 가노니’의 개방형, 영탄형의 발화로 시상은 응축되고 수렴되는 대신 확산되어 흩어진다. 이 시를 받고 박목월은 〈나그네〉로 화답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대상에 접근하는 두 시인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목월의 시가 완연한 한시풍이다. 똑 떨어지는 명사로 맺은 매 연의 종결과, 7.5조의 규칙적인 가락이 살려내는 리듬은 농축된 시상을 맺어준다. ‘외줄기’로 ‘외로움’을 ‘저녁 놀’로 ‘그리움’을 말할 뿐,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양 하여’라고 직접 설명하지 않았다. ‘타는’ 것은 시인의 마음이 아니라 ‘저녁 놀’이다. 외로운 것은 나그네가 아니라 ‘남도 삼백리’ 길이다.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로 젖어들지 않는다. 길이 ‘칠백 리’에서 ‘삼백 리’로 줄었는데도, 끌리는 여운의 길이는 몇 배 더 길다.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은 배경으로만 깔리는데,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는 그 영탄적 발성으로 ‘나그네의 젖은 소매’를 물들인다.


한시도 지을 줄 알았고 옛스런 표현을 즐겨 쓴 조지훈의 시보다, 박목월의 시가 한시의 기맥에 더 닿아 있다. 사실 청록파 세 사람 중에 한시의 정서에 가장 밀착되어 있는 시인은 단연 박목월이다. 〈윤사월〉이나 〈산도화〉는 조촐한 王維 풍의 5언절구에 가깝다. 명사로만 토막토막 이어지는 〈불국사〉는 원나라 때 시인 馬致遠의 詞 〈秋思〉에서, “앙상한 등나무, 늙은 나무, 저물녘 까마귀/ 작은 다리, 흐르는 물, 사람 사는 집./ 옛 길, 가을 바람, 비쩍 마른 말./ 석양은 지고/ 애끊는 사람은 하늘 가에.(枯藤老樹昏鴉, 小橋流水人家. 古道西風瘦馬. 夕陽西下, 斷腸人在天涯)의 말하기 방식과 같다. 서술어 하나 없이 명사들끼리 만나 자기들 끼리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이다. 박목월 시가 갖는 한시와의 친연성은 좀더 깊이 있게 다뤄볼 필요가 있다.

4

새로 바른 窓을 닫고 수수들을 까는 저녁
요 빗소리를 鐵窓에서 또 듣나니
언제나 등잔불 돋우면서 이런 이약 할까요.

조운의 시조 〈안해에게〉다. 일제 때 감옥에 갇혀 지은 작품이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겨울 준비를 한다. 국화 꽃잎과 단풍잎을 넣고 새로 방문을 바르고 창을 바른다. 풀이 마르면서 짱짱하게 펴진 헤살먹은 창을 닫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수수를 깐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려도, 그 저녁은 그리도 따스하고 온화했다. 그때 그 빗소리를 이제 가족을 떠난 감옥의 철창 안에서 듣고 있다.


못 견디게 울컥한 그리움이 ‘또’라는 한 글자에 농축되어 있다. 그러면서, 언제나 이 철창을 벗어나 등잔불을 돋우면서, 지금의 이 심정을 이야기 나눌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 작품은 실은 당나라 시인 李商隱의 〈夜雨寄內〉시의 換骨이다.

올 기약 그댄 묻고, 돌아갈 기약 없어 君問歸期未有期
파산에 밤비는 가을 못에 넘치누나. 巴山夜雨漲秋池
언제나 서창 등불 함께 심지 자르며 何當共剪西窗燭
파산 밤비 내리던 때 그때 얘길 해보나. 却話巴山夜雨時

파산 땅 객창에서 한밤 중에 가을 빗소리를 들으며 아내에게 부친 시다. 낯선 파산 땅에서 멀리 아내의 편지를 받았다. 그녀는 내게 언제 고향으로 돌아오시겠느냐고 묻는다. 나는 대답할 말이 없다. 가을 빗소리는 천지를 덮을 듯 밤새 그칠 줄 모른다. 못물은 불어 넘쳐흐를 기세다. 이 밤 나는 머리가 셀 듯한 그리움에 철철철 넘쳐흐르는 못물처럼 가눌 길 없는 마음을 부여잡고 지붕을 때리는 밤 빗소리를 듣고 있다.


3,4구는 아내에게 하는 말이다. 여보! 훗날 내가 당신 곁으로 돌아가게 되면, 서창 아래 다정히 앉아 등불 심지를 함께 자르며, 오늘 밤 이 밤 빗소리 듣던 서글픈 심정을 이야기 할 날이 있지 않겠소. 보고 싶구려! 가지 못해 정말 미안하오. 조운은 이 시를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평소 간절하게 느껴 애송하던 한시 한 수가 철창에서 듣는 빗소리를 타고 흘러 들어와 또 한편의 아름다운 시 한 수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여서(女書)를 받고〉에서 “너도 밤마다/ 꿈에/ 나를 본다 하니// 오고/ 가는 길에/ 만날 법도 하건마는// 둘이 다 바쁜 마음에/ 서로 몰라 보는가”는 양주동의 번역으로 더 유명한 황진이의 한시, “꿈길 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그 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 떠나 路中에서 만나를지고.(相思相見只憑夢, 儂訪歡時歡訪儂. 願使遙遙他夜夢, 一時同作路中逢.)”의 奪胎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님 그려 애타는 정을 담은 원시를 먼 데서 온 딸의 편지를 받고 느끼는 안타까운 父情으로 의연 환치시키고 있는 데서 그의 빼어난 솜씨가 돋보인다.


황진이의 시가 나온 김에 덧붙인다. 윤석중의 동시 〈낮에 나온 반달〉 3연은 이렇다.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빗다버린 면빗인가요/ 우리 누나 방아찧고 아픈 팔 쉴 때/ 흩은 머리 곱게 곱게 빗겨줬으면.” 밤하늘에 뜬 달이 아니고 낮달이다. 누나가 저녁밥을 지어 주려고 힘들게 방아를 찧고 있다. 땀에 젖어 흩어진 머리결을 저 빗을 가져다가 예쁘게 빗겨주고 싶다. 그 마음이 참 곱고 예쁘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황진이의 〈詠半月〉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 누가 곤륜산 옥을 캐어다/ 직녀의 얼레빗을 만들었을꼬./ 견우님 한번 떠나 가신 뒤로는/ 속상해 허공에다 던진거라네.(誰斲崑山玉, 裁成織女梳. 牽牛一去後, 謾擲碧空虛.)” 곤륜산 황옥을 깎아 만든 얼레빗으로 직녀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님 앞에 서곤 했다. 그 님이 떠나자 다시 거울 앞에 설 일이 없다. 오늘은 오실까 싶어 빗을 들고 거울 앞에 앉는다. 아득한 마음에 빗을 들어올리던 손에 맥이 탁 풀리면서 아차차 그 빗을 그만 허공에 놓치고 말았다. 직녀가 맥이 풀려 허공에 놓친 그 얼레빗이 지금도 반달로 걸려 있다는 말씀이다. 이렇듯 직접 한시의 의경을 살려 작품 속에 녹여낸 작품들도 뜻밖에 적지 않다.

5

앞산에 가을비
뒷산에 가을비
낯이 설은 마을에
가을 빗소리
이렇다 할 일 없고
기인 긴 밤
모과차(木瓜茶) 마시면
가을 빗소리

박용래 시인의 〈모과차〉다. 일이 없어 긴 밤의 시간이 짓누르면 모과차를 마신다. 잠 안 오는 밤 보글보글 화로에 주전자를 얹어 놓고, 모과차를 끓인다. 훈내 속에 코를 박고 있자니 마음이 따뜻하다. 한 김 식혀 한 모금 머금어 내릴 때, 내 귀에는 문득 가을 빗소리가 들려온다. 앞산과 뒷산에서 갈잎을 툭툭치는 가을 빗소리. 처음 가본 낯선 마을, 외딴 여관방에서 혼자 누워 밤새 듣던 그 가을 빗소리가 자꾸만 들려온다. 오늘도 그 빗소리 듣자고 모과차를 끓인다.

여관, 가물대는 등불, 새벽 旅館殘燈曉
외론 성, 부슬비, 가을. 孤城細雨秋
그대 생각 가이 없고 思君意不盡
천리에 큰 강물 흐른다. 千里大江流

월산대군의 〈寄君實〉이란 작품이다. 벗에게 부친 시다. 1,2구는 토막토막 명사로만 이어 놓았다. 서술어 없이도 의미는 행간에 고여 넘친다. 아무도 없는 외로운 성이다. 부슬부슬 가을비는 청승스리 내린다. 외론 여관 가물대는 등불 아래 혼자 앉아 있다. 새벽이다. 벗을 향한 그리움에 밤을 꼬박 새웠다. 가눌 길 없는 그리움의 깊이를 천리를 흘러가는 큰 강물의 흐름에 견주었다.


박용래 시인이 이 한시를 읽었느냐 아니냐는 이 경우 그리 중요한 문제가 못된다. ‘낯이 설은 마을’이 ‘孤城’으로, ‘가을비’는 ‘細雨秋’로 대응한다. 3구의 ‘思君意不盡’은 ‘기인 긴 밤’으로 호응한다. 그러나 ‘千里大江流’에 ‘모과차 마시면’이 맞놓임으로써 두 작품은 같지만 다르고, 다르면서 같게 되었다. 그리움의 媒材가 다를 뿐 주제와 분위기, 의경면에서 두 작품은 같다.

6

현대시 몇 수와 한시 몇 수를 나란히 읽었다. 둘이 만나는 방식은 경우마다 다르다. 한시와 현대시의 만남을 한 두 구절의 표현상 유사함으로는 말할 수 없다. 윤곤강이 그의 작품 속에서 숱하게 고려가요를 인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갖다 붙인 것일뿐 정서적 울림이 없다. 신석초의 〈바라춤〉과 다른 점이다. 한시와 현대시도 그렇다. 겉모습의 유사함만 가지고 한시와의 유사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껍데기의 비슷함일 뿐이다.


모방에도 차원이 있다. 貌同心異의 모방이 있고, 心同貌異의 모방이 있다. 겉모습만 비슷하고 알맹이는 딴판인 것은 모동심이다. 하급의 모방이다. 겉보기엔 전혀 다른데 알맹이는 같은 것은 심동모이다. 우리가 말하는 모방, 우리에게 의미있는 모방은 심동모이의 모방이다. 심동모이라야 비로소 영향을 운운할 수 있다. 껍데기만으로는 안된다. 尙同求異, 같음을 숭상하되, 다름을 추구한다. 같지만 다르고, 다르기에 같다는 말이다. 과거와 현재는 이렇게 만난다. 한시와 현대시도 그렇다.


 

 
  cafe.daum.net/jangdalsoo/bmTK/108   장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