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책벌레와 메모광> - '메모광' 정민 교수가 '천천히 가는 공부'를 강조하는 까닭

2016. 3. 10. 13:10다산의 향기



      

작가인터뷰

북&인터뷰등록일 | 2015.12.15 

'메모광' 정민 교수가 '천천히 가는 공부'를 강조하는 까닭




  

    연암 박지원을 비롯한 18세기 지식인에 관한 연구자이자, 대중들에게는 한시 선생님으로 잘 알려진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이번에는 <책벌레와 메모광>이라는 책으로, 옛사람들의 학문 사랑과 공부법을 들려주고 있다.

이 책은 2012년 7월부터 1년간 미국 보스턴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에서 방문학자로 머물면서, 선본실(善本實) 서고에 파묻혀 지내던 그가 옛사람들의 흔적과 조우한 이야기들이다. 그가 옌칭도서관의 고서적들 사이에서 발견한 장서인(藏書印)의 이야기, 책장 사이에 꽂힌 100년 넘은 은행잎과 운초(雲草)나 모기, 또 책을 빽빽하게 메운 메모들의 이야기는 옛사람들의 열정과 치열함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마치 옛 사람들의 몸부림이 우리 앞에서 되살아나 오늘날 학문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고민을 다시금 가다듬게 만드는 듯하다.

   지하철에서 혹은 잠들기 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면서, 묵직한 감동도 함께 전달한다. 무엇보다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에 대한 피상적인 생각들이 한 꺼풀 벗겨나간다. 학교에서 맡은 공무로, 또 연구로 바쁜 와중에도, 여전히 붓글씨로 한 장 한 장 고서를 베껴 쓰고 있는 정민 교수를 만났다.



Q 이 책은 하버드 옌칭연구소에서 1년 동안 계실 때, 그곳 고서들을 접하신 경험에서 나온 소소한 단상을 쓰셨다고 되어 있어요. 그렇지만 그저 일상적인 단상이라기보다 옛 학자들의 학문에 대한 애정을 진하게 전달하고 있는데요. 이런 책을 내시게 된 동기에 대해 여쭙고 싶어요.

   안식년을 맞아 하버드 옌칭연구소에서 머물면서 선본실의 서고에서 발견한 옛사람들의 메모나 흔적들을 가지고 써본 거예요.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연구한 내용은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교류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 내용은 문학동네 출판사의 네이버카페에 연재했고, 2014년 5월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이란 718쪽짜리 책으로 출간되었어요.

이 내용을 인터넷에 연재할 때 간간이 질문이 올라오더라고요. 제가 일일이 거기 댓글을 달 수는 없고, 곁가지로 재미있는 단상을 하나씩 올리곤 했어요. 그러다보니 본문에서는 다루지 않은 이야기들이 꽤 여럿 되었는데, 그게 오히려 반응이 더 좋은 거예요. 이 책의 절반 정도는 그렇게 쓴 글이고, 이덕무에 관한 이야기라든가 몇 가지는 그때 못 쓴 이야기를 좀 더 정리해 쓴 것이지요. 연구과정에서 미끄러져 나온 이야기들이지만 내용이 제 스스로도 재미있어서 연구서로 나온 책만큼 애정을 가지고 쓴 글들이지요.



Q 이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옛 사람들의 공부법, 학문에 대한 애정과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 공부법, 메모에 관한 이야기는 공부하는 학생들에겐 공부 잘하는 비법처럼 다가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책을 읽을 때 메모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제가 평소 수업시간에도 많이 하는 이야기예요. 그렇지만 요즘 젊은이들 대부분은 그게 얼마나 큰 경쟁력을 주는지, 공부하는 사람한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잘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메모의 습관을 들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실제로 박지원이나 정약용, 이덕무의 저서들을 제가 오랫동안 들여다보면서 이들의 공부하는 과정이나 태도를 많이 알게 되었는데, 제 스스로 그 방법을 실제로 적용해보면 정말 위력적이에요. 이렇게 한자로 쓰인 옛 글을 그냥 보면 내용이 금방 들어오지 않지요. 이걸 붓글씨로 원고지에 옮겨 쓰고, 구절마다 띄어 쓰는 과정에서야 내용이 눈에 들어오고, 이를 다시 번역해 정리하는 과정에서 온전히 이해되고 여러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거지요. 느리고 비효율적일 것 같은 옛 사람들의 필사와 정리방법이 정말 위력적이라는 것을 같이 나누고 싶었어요.





"이덕무·박제가·박지원의 하모니, 우리 지성사의 가장 빛나는 지점"



Q 선생님이 고서들에서 발견한 중국, 한국, 일본의 장서인 방식의 비교가 재미있습니다. 어디에서도 들어볼 수 없는 신선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하버드 옌칭도서관에는 한중일 고서가 많이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일본의 패전 이후부터 1950년대까지 들어온 책들이에요. 특히 진귀한 책들, 연구자들에게 ‘레어템’이라 할 만한 책들이 많아요. 미국에서 이 책들을 들여올 때 그냥 판본보다는 장서인이 있거나 메모가 있는 책을 더 비싸게 사들였어요. 장서인은 책의 주인이 자신의 소유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찍은 도장인데, 이걸 보면 이 책의 주인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책이 유통된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어요.

책에서도 다루었듯이,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가 장서인을 처리하는 법이 사뭇 달라요. 한국은 주인이 바뀌면 장서인도 함께 말소되죠. 책을 파는 쪽에서 선대의 장서인이 찍힌 책을 지키지 못하고 남에게 팔아먹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책을 훼손하면서까지 장서인을 도려내요. 가세가 기울어 책을 팔망정 집안의 체면을 지키고 싶은 거지요. 지금도 인사동에 가면 그런 책을 많이 발견할 수 있어요. 일본은 전 주인이 찍은 장서인 위에 붉고 굴은 글씨고 ‘소(消)’라고 쓴 인장을 덧찍었어요. 예전 소유주와의 인연을 말소한다는 거죠. 일본인들의 깔끔한 세법이 엿보여요.

   또 중국에서는 이전 주인의 장서인에 손을 대지 않아요. 장서인이 많을수록 책의 값이 올라가고, 유명인의 장서인이 찍혀 있으면 책값이 몇 배로 뛰니까요. 하버드에 있으면서 보니 장서인의 방식뿐 아니라 오늘날 한중일 학자들의 공부 태도, 책상 모습도 다 다르더라고요. 그런 것들을 발견하는 것은 꽤 재미있는 경험이었지요. 



Q 이 책에 자주 언급되는 후지쓰카라는 일본인에 대해서 소개해주시겠어요? 후지쓰카가 소장했던 책들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시던데요.

   후지쓰카는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에 부임한 철학과 교수였어요. 청나라 고증학을 연구했던 학자인데, 1921년 북경에 가서 2만 권에 가까운 엄청난 양의 청나라 책을 구입했어요. 그런데 그가 중국에서 자기가 연구하는 책들을 찾아보다 보니, 자꾸 거기에 조선 사람이 이름이, 특히 박제가 같은 사람이 나오는 거예요. 당시 박제가는 청나라에서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대단했어요. 중요한 청나라 학자들의 문집에서 자꾸 박제가, 추사 김정희 등의 이름을 발견되니까 ‘내가 모르는 어떤 거대한 세계가 있다’는 생각을 했겠지요.

그러고는 1923년 경성제국대학에 부임해 오면서, 한남서림이라는 인사동 고서점을 갔다가 박제가 문집을 발견한 거예요. 아무리 경성제대 교수들에게 물어봐도 모르는 박제가를 여기서 발견하니 마치 감전된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지요. 그 이후로 그는 박제가, 추사의 글들을 엄청 수집했어요. 지금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세한도’도 이 사람의 소유였고, 당시 문인들이 주고받은 편지만 해도 1천 통 넘게 모았다고 해요. 

   정년퇴임하고 일본으로 돌아갈 때 이 책들을 기차 화차 3칸에 꽉꽉 싣고 갔다고 해요. 대부분 자기 연구실 도서관에 두었는데 다 미군 폭격으로 불탔지요. 다행히 그중 최고의 자료들, 필사본, 편지 이런 것들은 집에 보관했다고 해요. 일본의 패전 이후 후지쓰카 가족들이 생활이 어려워지니 이것들을 다 내다팔았고, 미국은 중국의 공산화로 한적(漢籍)을 중국에서 구할 수 없어 일본에서 쏟아져 나온 고서들을 구입했지요. 하버드에 있는 도서들이 대부분 그때 들여온 것들이라고 해요. 여기에 후지쓰카의 책이 수십 종 섞여 있어요. 하지만 후지쓰카가 이름을 써놓은 것도 아니고 수많은 책 더미 속에 묶여 팔려왔으니 찾을 길이 막막하지요.

제가 옌칭연구소 선본실 서고에서 고서들을 뒤지다가 후지쓰카의 소장본을 하나하나 찾아낸 거예요. 후지쓰카가 해놓은 메모들을 보고, 거기 적힌 책들을 하나하나 역추적해서 찾으니 과연 나오더라고요. 이 사람의 연구 주제가 18세기 한중지식인의 문화교류에 관한 것이어서, 제가 그 자취를 따라 연구해서 써낸 것이<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입니다. 

   그런데 최근 재미있는 일이 하나 생겼어요. 후지쓰카의 손녀가 제게 메일을 보냈어요. 2월 교토대학에서 그 책을 가지고 강연을 했는데, 손녀가 왔길래 책을 한 권 선물했지요. 그런데 다른 손녀가 한글을 배우고 있어서 내 책을 읽어보고는 편지를 보내온 거예요. 할머니가 된 손녀와 여러 번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어느 날 집에 있는 할아버지의 저서를 제게 보내온 겁니다. 동봉된 편지에 이렇게 써 있더군요 “손녀들은 할아버지의 글을 한 줄도 읽지 않았네요. 하지만 정민 선생님이 이 책을 읽어주실 거라 믿어요. 할아버지도 기뻐해주실 거예요.” 한 질가량 되는 책들을 보내줘서 제겐 또 연구과제가 생겼지만 정말 감동적이고 기뻤지요.  



Q 저는 옛 선비들의 공부라고 하면, 노동은 안 하고 한가롭게 책만 읽는 태평한 모습을 떠올렸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소개해주시는 선조들의 공부 모습을 보니 오늘날 공부와 비교도 안 되는 것 같아요. 이덕무가 꽁꽁 언 방에서 책을 읽고, 책을 베껴 써주는 용서(傭書)를 해서 생계를 유지했다는 이야기도 놀랍더군요.

   정말 치열하고 처절했어요. 특히 이덕무 같은 사람을 보면 누구나 그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지요. 공부를 그렇게 치열하게 하고, 생각은 열려 있었지요. 당시의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은 개성이 제각각 달라요. 저는 이 개성들이 만나 이루는 하모니가 우리 지성사에서 가장 빛나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학문의 과제는 이것을 어떻게 복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기존 실학 연구자들이 이들을 유용성의 담론으로만, 지식인의 책무 쪽으로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이덕무 같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다 놓쳐버렸어요.

이 사람들에게서 현실비판, 사회개혁만 들여다보려고 하면 맞지 않는 게 많아요. 박지원을 풍자와 해학에만 맞추고 그를 개그맨으로만, 혹은 현실개혁 운동가로만 보려고 하는데, 박지원도 의외로 보수적이에요. 이들의 유학적 삶의 자세,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나오는 깊이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보다보면, 당시 이들의 몸부림이 느껴져요. 가난 속에서도 처절하게 학문을 하고 사유하는 거 보면 눈물이 날 정도에요. 어떻게 이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는 제 느낌을 이 책을 통해 같이 공유하고 싶었어요.





"공부법은 동서고금 다를 바 없어... 직접 해보면 막강한 위력 느낄 것"



Q 사실 ’실학’ 하면 현실개혁이나 실용성을 따지는 학문이 아닌가요?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학문을 실학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실학이라는 명칭은 1970년대에 생긴 거지요. ‘독재, 폭압의 시대에 어디서 학문의 롤모델을 찾을까’ 하는 1970년대 지식인들의 맥락이, 도탄에 빠진 민생을 고민한 이 사람들의 사유와 마주치면서 생겨난 게 실학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전에도 실학이라는 말은 있었지만, 그때 본격적으로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어떤 실용성의 잣대만 가지고는 이 사람들을 설명할 수가 없어요.

이덕무는 자기 세계 속에 갇혀서 벌레 하나 가지고 관찰하고, 그걸로 책을 쓴 사람인데 이걸 사회개혁이라는 코드로만 맞춰 보려고 하면 잘 안 된단 말이에요. 유득공<발해고>는 실학의 저서가 맞지만, 그는 <발합경>이라고 집비둘기 사육에 관한 책도 같은 방식으로 썼어요. 또 이옥<연경>이라고 담배에 관한 책을 썼고, 유만주<저경>이라고 김치에 관한 책을 썼어요(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이덕무<윤회매십전>이라고 해서 조매(종이로 접어 만든 인조 매화) 만드는 법을 책으로 썼어요. 오늘날로 치자면 학자란 사람이 ‘고스톱 잘 치는 법’, 이런 거 쓰는 셈이지요. 당시 지식인의 입장에서도 욕먹을 짓을 한 거예요.

   이런 작업들을 사회개혁이나 현실적인 실용성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어요. 오늘날 말하는 학문의 실용성은 애들 취업률 높이는 취지에서 나오는 이야기지만, 18세기 지식인들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지식의 우선가치가 바뀌었다는 것이에요. 이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지요. 단지 이걸 사회개혁이나 어떤 실용적 목적의 도구로서 실학을 이해하고 그 점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18세기 학문의 절반은 설명할 수가 없는 부분이 생기는 거죠.

오히려 지식환경의 변화, 지식의 우선가치의 변화라는 점에서 우리 시기와 맞아떨어지는 게 있어요. 바로 정보 폭발의 시대라는 점이지요. 18세기 이전까지 조선의 학자들이 사서삼경의 독점적인 정보만 을 가지고 계속 주해하는 방식으로 학문을 하고 서로 싸워왔는데, 청나라 유리창거리에 가니까 서점 하나에 2만~3만 권의 책이 꽂혀 있었던 겁니다. 그런 서점이 30~40개가 몰려 있으니까,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어요. ‘우리가 그동안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건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어요? 여기서 북벌의 논리가 북학의 논리로 바뀐 것이고, 이것이 그 당시 사회의 금기를 깨뜨리게 된 것이지요.



Q 책에서 나온 말 중에 ‘천재는 없고 부지런한 기록자만 있을 뿐이다’라는 말이 참 와닿았습니다. 정말 부지런했던 이덕무의 아홉 가지 책 활동을 소개하셨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시는 독서법은 무엇일까요?

   굉장히 위력적인 독서법 가운데 하나가 초서(鈔書), 책을 베껴 쓰는 것이지요. 초서는 다산이 제자들에게 가장 역점을 두어 강조했던 공부법이에요. 옛날에 다산은 제자들에게 무조건 통째로 책을 베껴 쓰게 했어요. 초서는 인내심을 길러주고 베껴 쓰는 과정에서 안목이 생기지요. 저도 틈 날 때마다 책을 한 쪽씩 붓으로 하나하나 베껴 쓰고 정리해두고 있어요. 판독이 안 되는 글자는 비워뒀다 추론되면 적어두고, 나중에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기도 해요. 이렇게 해놓고 나서 그 다음 단계 번역으로 넘어가고, 컴퓨터로 정리하지요.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아요. 저는 자투리 시간을 가지고 틈틈이 해요.

또 저는 ‘옹기’, ‘독기’ 이야기에도 썼듯이, 그때그때 중요한 것을 메모해두고 그 메모를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주제별로 여러 권의 노트를 만들어 틈나는 대로 메모를 해둡니다. 요즘은 다들 이걸 컴퓨터 디렉토리에다 저장하지만, 컴퓨터에 저장하면 어디다 뒀는지 기억도 못하지요. 메모는 쓰는 것보다 관리가 더 중요하다고 봐요. 손으로 쓰는 것은 컴퓨터 작업보다 시간이 더 걸리지만, 내가 써놓은 글씨를 보면 그때 상황들 느낌들이 고스란히 떠오릅니다.

   저는 책을 볼 때도, (모니터로 보면 된다고 하지만) 원본을 스캔한 이미지를 하나하나 컬러로 프린트해서 꼭 풀칠 제본을 하지요. 기억을 붙들어두는 방식은 다 다르다고 생각해요. 젊은 사람들은 손수 쓰고 만들고 하는 작업이 낭비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천천히 가는 공부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Q 마지막으로 이 책의 독자들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세요.

   옛사람의 방법이라고 해서 구닥다리라고 치부하지 말아줬으면 해요.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들을 직접 해보면 막강한 위력을 느낄 겁니다. 공부법은 동서나 고금이 다를 바 없어요. 사유를 조직화해서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가는 과정이기에 반복이 중요합니다. 학문에 대한 옛사람들의 열정과 공부법이 분명 자신의 공부에 힘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사진 : 기준서(스튜디오춘)





이진실(북DB 객원기자)

에디터, 자유기고가, 웹 기획자로 10여년 간 일하다가 현재는 미학과 예술이론을 공부하고 있는 늦깎이 학생. 지식을 통한 윤리적 실천을 꿈꾸고 비판적 글쓰기와 일상이 괴리되지 않는 삶을 터무니없는 목표로 삼고 있는 이상주의자입니다. thankumom@gmail.com

작가소개

정민

   충북 영동 출생. 현재 한양대 국문과 교수.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꼼꼼히 읽어 [비슷한 것은 가짜다]와 [고전문장론과 연암 박지원]을 펴냈다. 18세기 지식인에 관한 연구로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다산선생 지식경영법][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미쳐야 미친다][삶을 바꾼 만남][책벌레와 메모광] 등이 있다. 청언소품에 관심을 가져 [조심][일침][마음을 비우는 지혜][내가 사랑하는 삶][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돌 위에 새긴 생각][다산어록청상][성대중 처세어록][죽비 소리] 등을 펴냈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쓴 한시를 정리한 [한밤중에 잠깨어], 강진 백운동의 역사를 모두 담은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이 밖에 옛글 속 선인들의 내면을 그린 [오직 독서뿐][책 읽는 소리][스승의 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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