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대교구 다산 초당 성지 순례

2016. 3. 10. 11:52다산의 향기

광주대교구 다산 초당 | 가톨릭성지(국내)

안토니오 2015.12.07 14:59
http://blog.daum.net/oyt12/41               


      

전국 천주교 111개 성지 순례

 

 광주대교구 ① 다산 초당
 ◎간략설명 : 유배지에서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의 한숨이 들리네
 ◎주  소 :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368(다산 유물전시관)
 ◎연락처 : T(061)432-8884, F(061)432-5444(강진성당)
 ◎관련기관 : 강진 성당
 ◎관련주소 :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평동리 221(강진성당)
 ◎문화정보 : 사적 제107호(정다산 유적)
 ◎소재지 :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
 ◎다산 기념관 : 061-430-3911(순례지 확인가능)
 ◎미사시간 : [강진 성당]
          평일 : (화, 목, 금) 오후 7:30, (수) 오전 10:00,
                   (토) 오후 2:30, 4:00,
          주일 : 오전 7:00, 10:30
 ◎교통편 :
 [승용차①] 전남 강진읍에서 해남 방면 18번 국도를 따라 2km 가면 삼거

                리가 나온다. 푯말을 따라 7km쯤 가면 만덕리 다산 초당 입구가

                된다. 약 300m 산길을 따라 10여분 정도 올라간다. 입구에서 조

                금 더 가면 다산 유물 전시관이 있고 다산 초당은 이곳에서 약

                800m 거리이다.

 [승용차②]강진읍에서 해남 방면으로 18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계라 교차

               로에서 도암면 방면으로 55번 국도로 좌회전합니다.
               약 2km 앞에 있는 삼거리에서 만덕리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직진

               하면 다산 초당 입구가 나옵니다. 여기서 가파른 길을 10여분 정

               도 올라가면 다산 초당에 도착합니다.

 [대중교통①]군내버스 : 강진읍 정류장에서 출발하는 군내버스가 시간별로

                  있습니다(안내전화 : 061-430-3344).

 [대중교통②] 강진읍 정류장에서 정다산 유적지를 경유하여 도암면을 왕복

                   하는 군내 버스 이용.

 



 강진은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이 무려 18년간 유배됐던 곳이다.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다산 형제는 약현, 약전, 약종이 있는데 이들 4형제는 천주교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첫째 약현의 부인이 이벽의 누이이며,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고 또한 이들 4형제의 누이가 이승훈의 부인이다. 순교한 셋째 약종은 ‘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 시성 대상자 중 한 명으로 이미 성인이 된 정하상과 정정혜가 약종의 자식이다. 다산은 성호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1784년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용은 체포되었고 강진으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된다.

 

 18년간의 강진 유배에서 풀려난 후 자신의 배교를 크게 반성한 다산은 대재를 지키며 고신극기(苦身克己)의 생활을 하면서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묵상과 기도로 살아갔다. 그의 이런 참회와 기도 생활 가운데 『조선복음 전래사』를 저술했고 박해로 순교한 동지들의 유고를 『만천유고(蔓川遺稿)』라는 제목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특히 『만천유고』에는 이벽의 「천주공경가」와 「성교요지」와 같은 주옥같은 글들이 담겨 있다.◀

 

   [굿 뉴우스 홈페이지에서]
 국토의 끝, 전라남도 강진은 남도 문화의 일번지이다. 월출산 아래 멀리 다도해를 바라보며 남단으로 자리 잡은 강진은 예로부터 많은 선비들이 서러운 유배 생활을 하곤 했던 곳으로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이 무려 18년간이나 유배됐던 곳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수많은 명저(名著)를 저술했기에 강진

은 정약전 · 약종 · 양용 형제의 고향이자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인 마재 못지않은 중요한 사적지로 손꼽힌다.

 

 정재원(丁載遠)의 넷째 아들로 이승훈의 처남이기도 한 다산은 경기도 양근 마재에서 태어나 성호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가 천주교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이미 177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주교 서적을 접하면서 그 오묘한 진리에 매료되기 시작한 그는 1783년에는 형 약전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는 배 안에서 이벽(李壁)과 천주교에 관해 토론을 벌이고 1784년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그 이듬해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나자 그는 척사(斥邪)의 태도를 취한다. 1791년 진산 사건이 발생하여 윤지충과 권상연이 죽음을 당하고 박해가 거세지자 그는 배교의 뜻을 명백히 한다. 더군다나 1797년 그는 다시금 자신이 서학도(西學徒)로 지목받자 자명소(自明疎)까지 올려가며 신앙을 부인했고 1799년에는 “척사 방략”(斥邪方略)을 저술해 천주교에 대한 배격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용은 체포되었고 이 과


정에서 그는 천주교를 철저히 부인하고 권철신, 황사영 등 자신이 알고 있던 교회 지도자들을 고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강진으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된다.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의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칭한다. 이는 아마도 자신의 형 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의 길을 택한 데 비해 자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뜻의 ‘여유당’이라는 자호(自號)로써 그 부끄러움을 표현한 것이리라.

 

 스스로를 부끄러워했던 다산. 그러나 어쩌면 그런 머뭇거림 자체가 하느님의 섭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도해를 바라보며 적적하게 선 강진의 외딴 초당에서 다산은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心書) 등을 저술한다.

 

 산천이 두 번 변하는 세월을 쓸쓸하게 지내고 난 뒤 유배가 풀려 서울로 돌아온 다산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굳건한 신앙을 보여 준다. 유배 중이던 1811년 그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완전히 교회로 돌아온 것은 유배에서 풀려난 후 2, 3년 뒤로 보인다.

 

 자신의 배교를 크게 반성한 다산은 대재를 지키며 고신극기(苦身克己)의 생활을 하면서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묵상과 기도로 살아갔다. 그는 이런 참회와 기도의 생활 가운데 “조선 복음 전래사”(朝鮮福音傳來史)를 저술했고 박해로 순교한 동지들의 유고를 “만천유고”(蔓川遺稿)라는 제목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특히 만천유고에는 이벽의 “천주 공경가”(天主恭敬歌)와 “성교요지”(聖敎要旨)와 같은 주옥같은 글들이 담겨 있다.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배교한 뒤 말년을 회개와 참회로 참된 진리에 자신을 바친 다산은 죽기 직전 중국인 파치피코 유방제(劉方濟) 신부로부터 병자성사를 받고 숨을 거두었다.

 

 다산의 체취가 고스란히 서려 있는 다산초당은 유배의 쓸쓸함을 느끼게 하는 조그만 오솔길을 따라 올라간다. 초당 입구에는 그의 유적비가 외롭게 서 있고 초당 앞에는 차를 갈았던 돌이 놓여 있기도 하다. 또한 18년 동안 정으로 쪼아 정석(正石)이라는 글을 새겨 놓은 초당 옆의 바위는 그의 뉘우침이 얼마나 절절했는지를 말해 준다. 자신에 대한 회환과 뉘우침, 순교한 동료들에 대한 애달픈 심정을 우리는 “만천유고” 발문에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한평생을 살다 보니 어쩌다가 죄수가 되어 감옥살이까지 하게 되었을까. 그래도 죽음은 모면하여 급기야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었구나. 30여 년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강산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떠도는 그림자도 변함없건만 그 옛날 어질던 스승과 선배들 그리고 절친했던 친구들 다 어디로 가 버렸기에 하나도 볼 수 없던 말인가!”

 

 2001년 한국교회사연구소 사료조사단은 강진을 답사한 후 강진에서 발굴된 다수의 정약용 인장에서 십자가 모양이 새겨져 있는 사실과 다산이 강진에서 가르친 다신계(茶信契) 18명의 제자들 중 이승훈(베드로)의 아들 이택규(다산이 그의 외삼촌이 됨. 다산의 누이가 이승훈의 처)와 순교자 윤지충(바오로)의 양자 윤종영이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료 조사단은 이런 사실을 근거로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 생활 중에도 천주교와 관계했고, 또 십자가를 새긴 인장은 다산이 자신의 믿음을 상징적으로 고백한 것으로 천주교 신자로 살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의 다산 초당은 옛 초당이 무너져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가 주선하여 건물이 있던 자리에 다시 지은 것으로, '정다산유적'(丁茶山遺蹟)이란 명칭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1999년 8월 7일에는 다산 초당에서 남쪽으로 800m 떨어진 곳에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업적 등을 기리기 위한 다산 유물전시관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강진 다산 수련원에서 구림마을까지 이어지는 남도 유배길 61.5km는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정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 탐방로로 지정되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3년 10월 23일)]

 

   [한국의 성지 홈페이지에서 :   다산 정약용이 10여 년간 유배생활하며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 하였던 곳]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요한)이 10여 년간 유배 생활을 하며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하였던 곳이다. 강진만이 한눈으로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 초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18년 중 10여 년 동안을 유배 생활하면서 500여권에 달하는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하였던 곳이다.

 

 

 정약용은 정재원(丁載遠, 1730~1792)의 넷째 아들로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의 처남이기도 하다. 다산은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속칭 마재)에서 태어나 성호 이익(李瀷, 1681~1763, 호 星湖)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박해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이배(移配, 유배지가 옮겨짐)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 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 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 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유배 생활이 끝나던 1818년 9월까지 10여 년 동안을 다산 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그가 천주교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770년대 후반에서 1780년대 초반으로, 천주교 서적을 접하면서였다. 1783년에는 형 약전과 함께 광주 마재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배 안에서 이벽으로부터 천주교에 관한 설교를 듣고 1784년 서울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약전은 세례를 받지 않았다. 그 이듬해 을사추조적발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부친의 강요로 척사의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1787년 정미반회(丁未泮會)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천주교 신앙을 쉽게 포기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1791년 진산 사건이 발생하여 윤지충(尹持忠, 1759~1791, 바오로)과 권상연(權尙然, 1751~1791, 야고보)이 죽음을 당하고 박해가 거세지자 그는 배교의 뜻을 명백히 하였다.

 

 더구나 1795년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 실포 사건(失捕事件)을 계기로 정조가 당시 남인 관료 중 천주교 신자로 지목되던 이가환(李家煥, 1742~1801, 호 錦帶, 貞軒)을 충주 목사로 좌천시키고 이승훈을 예산으로 유배시킬 때 그도 충청도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되었는데, 당시 천주교 신자들을 강제로 배교시키는 등 천주교 신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적극 부인하기도 했다.

 

 또한 1797년 그는 다시금 자신이 서학도로 지목받자 자명소(自明疏, 스스로의 입장 을 해명하는 상소문)까지 올려가며 신앙을 부인했고 1799년에는 《척사 방략》을 저술해 천주교를 배척(박멸)하는 방법을 상세히 논함으로써 천주교에 대한 배격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용은 체포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는 천주교를 철저히 부인하고 권철신, 황사영 등 자신이 알고 있던 교회 지도자들을 고발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강진으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 조선의 실학(實學)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하였던 조선은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그 지도 이념의 한계성이 노출되고 자기 전통에 대한 반성과 극복의 길이 모색되었다. 이에 일부 학자들은 성리학만을 고집하는 문화의 한계성을 깨닫고, 정신 문화와 물질 문화를 균형 있게 발전시켜 부국 강병과 민생 안정을 달성함으로써, 안으로 분열된 사회를 다시 통합하고, 밖으로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처할 수 있도록 국가 역량을 강화하려는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화 운동은 학술과 종교·문학·예술 등의 모든 영역에서 발생하였지만, 특히 학술 분야에 나타난 새로운 기풍을 실학(實學)이라 한다. 실학 운동에는 크게 두 갈래의 흐름이 있다. 하나는 유형원·이익·정약용등이 주도한 중농적(重農的) 실학파로서 농촌 사회의 안정과 농민의 이익을 강력하게 대변하고자 하였고, 다른 하나는 유수원·박지원·박제가에 의해 주도된 중상적(重商的) 실학파로서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개발을 역설하였다.

 

 ◆ 다산유물전시관

 다산 유물전시관은 전시관 122평, 주차장 600평 규모로 다산 초당 남쪽 700m 지점에 위치하며,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애와 업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영정, 다산 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 등이 판넬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 있으며, 좀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을때는 컴퓨터를 활용한 터치 스크린에서 검색해 볼 수 있다.

 

 

 영상실은 다산의 일생과 강진을 소개하는 영상물이 약 7분 동안 상영되는데 관광객이 영상실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상영되므로 누구나 불편없이 관람할 수 있다. 전시관 앞 광장에 대형버스 15대 이상이 주차할 수 있어 학생들의 수학여행 등 단체관광에도 아무 불편이 없다. 관람 시간은 09:00 ∼18:00이며 동절기(11∼2월)에는 09:00 ∼17:00 이다. 연중 휴무일은 없다.

 


 ◆ 답사 코스
 ○ 다산 유물전시관 → 다산 초당 → 다산 유물전시관
 다산 유물전시관에서 하차하여 유물전시관을 관람하고 오솔길로 걸어가 다산 초당을 관람한 후 다시 되돌아 오는 코스이다. 가족단위의 승용차 이용 관광에 적합하다.

 

 ○ 다산 유물전시관 → 다산 초당 → 백련사
 다산 유물전시관에서 하차하여 차량은 백련사로 가서 대기하고 관광객은 전시관 및 다산초당을 관람한 후 초당에서 산중턱으로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백련사로 넘어가는 코스이다.

 

 이 오솔길은 지난 날 초당에 거처하시던 다산 선생과 백련사에 거처하던 해장 선사가 서로 교우를 위해 오가던 길이며, 산길을 가는 동안 강진만이 시원스럽게 내려다 보여 경치가 좋다. 대형버스를 이용한 단체 관광에 좋은 코스이다(약 1시간 소요). 백련사로 먼저 갈 경우에는 코스를 반대로 관광해도 좋다.

 







 ■ 찾아가는 길

 

 



 



사진으로 떠나는 성지순례 까페에서

다산초당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

   관할 : 강진군청 T : 061)0430-3906  (성지순례 스템프는 다산 유물전시관에서)

 

   강진은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이 무려 18년간 유배됐던 곳이다.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다산의 형제는 약현(이복형), 약전, 약종이 있는데 이들 4형제는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첫째 약현의 부인이 이벽의 누이이며,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고 또한 이들 4형제의 누이가 이승훈의 부인이다.  순교한 셋째 약종은 '하느님의 종' 125위 시복 시성 대상자 중 한 명으로 이미 성인이 된 정하상과 정정혜가 약종의 자식이다.  다산은 성호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1784년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용은 체포되었고 강진으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된다.

   18년간의 강진 유배에서 풀려난 후 자신의 배교를 크게 반성한 다산은 대재를 지키며 고신극기(苦身克己)의 생활을 하면서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묵상과 기도로 살아갔다.  그는 이런 참회와 기도의 생활 가운데 『조선복음전래사』를 저술했고 박해로 순교한 동지들의 유고를 『만천유고(蔓川遺稿)라는 제목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특히『만천유고』에는 이벽「천주공경가」「성교요지」와 같은 주옥같은 글들이 담겨 있다.



- 출처 :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한국천주교주교회의著)

 


 

 



 




다산초당 안내도... 서암,다산초당,동암,천일각의 사진이 보안다.

아울러 다산 4경(정석,약천,다조,연지석가산) 설명도 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




 

다산초당 올라가는 길




 

시인 정호승의 '뿌리의 길'




 

 




정말 가는 길에 나무 뿌리가 무수히 돋아 있다.




 

제자들이 기거했던 다성각(茶星閣) 건물




 

 




 




다산초당과 서암


   초당은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썼던 곳이다. 

 원래는 윤단(尹慱)의 산정(山亭)이었으나 서로 교분을 나누면서 그에게 거처로 제공되었다.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다시 지으면서 기와로 복원했다. 

 조만간 짚을 덮은 본래의 초당(草堂)으로 복원될 예정이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서암은 윤종기 등 18인의 제자가 기거하던 곳이다.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茶星閣)이라고도 하며,

 1808년에 지어져 잡초 속에 흔적만 남이 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



 

 




 




다산초당




 

 




다산 4경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다산은 원래 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조그마한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였다.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히 여겼다. 

다산은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연지석가산과 다산초당




 

동암(東庵)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茶山東庵)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寶丁山房(보정산방)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茶山東庵(다산동암)

 




 




백련사 가는 길에 있는 천일각




 

 




 




 




 




 




 




 




산에서 흐르는 물이 나무 대롱을 타고 연지석가산으로 흐르고 있다.

 




 




 




관어제(觀魚齊)..여기서 물고기를 살펴봤나?

 




다산 2경 약천(藥泉)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 않는 이 샘은 다산초당의 제2경이다. 

처음에는 물이 촉촉이 젖어있던 것을 다산이 직접 파니 돌 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고 한다. 

다산은 약천의 물을 마시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기록하였다.




 

 




 




 




다산초당 제1경 정석(丁石)바위 올라가는 길

 




다산초당 제1경 정석(丁石)

 




정석(丁石)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丁石)은 다산초당의 제 1경이다.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인 정(丁)자만 따서 새겨 넣은 것으로,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다.

  




 




다조( 茶竈,차다,부엌조)


   다산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이 돌은 차 달이는 부뚜막으로 쓰던 것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약천의 물을 떠다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찻물을 만들었다. 다산초당의 제 3경이다.


**** 전재자 註  :   강릉 비행장 옆 바닷가에 한송정에 남아 있었다는 차 부뚜막인 다조(茶竈)는

이를 직접 보았던 고려시대에 쓴 옛 여행기에 의하면 차솥을 걸 아궁이와 차도구를 씻는 개숫물통이

나란히 파여진 돌로 만든 직육면체의 다조였다고 한다. 위의 사진의 다조는 차부뚜막이라기 보다는

찻상(茶床)의 역활을 한 것으로 보이나, 신라시대의 화려한 차문화와 조선 시대의 절제미와 검약을 강조하던

선비 정신과 비교하여 볼 때, 유배 중인 산거(山居) 선비의 다조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의 다조는 다산 선생님 유배시에 쓰던 차부뚜막이 아니라

나중에 다산초당 복원 후 가져다 놓은 것이라 한다.

당시에 쓰던 다조에는 다산은 청석(靑石) 위에 붉은 글씨로 ‘다조’라고 새겨 놓았다고 했고,

 크기나 생김새의 묘사도 지금 것과는 전혀 다르다.


비록 나중에 가져다 놓은 것이기는 하나 이 돌은 생김새로 볼 때, 다조라기 보다는

다산12승에서 노래한 7경 거문고를 타는 곳인 송단석상(松壇石床)

형태에 가깝다는 설명을 함께 안내하고 있다면 더 좋겠다.

 돌 위에 앉아서 거문고를 탈 수 있는  석상은 사진에 있는 석상  보다

그 크기가 더 넓어야 한다.

 

 




다산유물전시관에 있는 다산의 편지

 




다산 정약용의 초상

 




정약용 연보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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