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위인들의 서재를 보면 ‘삶’이 보인다

2016. 3. 10. 12:04다산의 향기


[문화] 게재 일자 : 2015년 01월 09일(金)
조선 위인들의 서재를 보면 ‘삶’이 보인다



      


서재에 살다 / 박철상 지음 / 문학동네

    여유당 정약용, 연암 박지원, 완당 김정희, 담헌 홍대용. 대한민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이 호와 이름을 함께 외운 위인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호가 곧 서재 이름이었다는 사실은 아는가? 지식인들에게 서재는 삶의 터전이자 안락한 휴식처였다. 서재라는 세상 속으로 들어왔을 때 가장 행복감을 느꼈을 그들이 서재명을 호로 쓴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서재의 이름은 주인의 성품과 삶의 철학을 담기도 한다. 정약용의 서재 여유당의 ‘여(與)’와 ‘유(猶)’는 “여가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하고, 유가 사방에서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하라”는 노자의 말에서 따왔다. 순간의 혈기로 경거망동하지 말고 항상 주변을 살피라는 의미다. 이는 젊은 날 촉망받는 인재였으나 한때 천주학을 접했다는 이유로 긴 세월 유배지에서 살아야 했던 정약용이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평생을 조심스레 살피고 갈고닦는 삶을 살겠다는 의미로 그의 서재에 여유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조선시대 문인인 조희룡은 ‘백두 개의 벼루가 있는 시골집’이라는 뜻을 지닌 서재 ‘백이연전전려’를 품었다. 그곳에서 그는 밭 대신 벼루를 갈며 마음을 정갈히 하고, 여인의 거울과 같이 벼루를 항상 곁에 두고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몸가짐을 다듬었다.

그렇다면 가장 큰 서재를 가진 위인은 누구였을까. 정조다. 그의 서재 이름은 ‘홍재(弘齋)’. 풀이 그대로 넓고 큰 서재라는 뜻이다. 정조는 임금이란 칭호만 떼버리면 조선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학업에 매진했다. 100권이나 되는 그의 문집 ‘홍재전서’가 이를 증명한다. 임금은 통상 호를 쓰지 않지만 홍재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정조는 이를 호로 쓰며 인장에 새겨 자신이 보던 책에 찍곤 했다.


   ‘서재에 살다’의 저자 역시 서재에 이름을 붙였다. ‘수경실(修경室)’. ‘수경’은 ‘긴 두레박 줄’이란 뜻이다. 옛사람의 학문이라는 깊은 우물물을 긷기 위해서는 풍부한 자료와 오랜 노력이라는 의미의 긴 두레박 줄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한학을 공부한 부친 아래서 고서를 접하고, 연필보다는 붓을 들고, 고서의 쾨쾨한 냄새에서 서향을 느꼈다는 저자가 들려주는 조선시대 지식인 24인의 서재 이야기는 서재를 단순한 공간을 넘어 시대의 가르침, 한 인간의 삶의 방식을 알 수 있는 바로미터로 승화시킨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