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초당 경영과 공간 구성

2016. 3. 10. 19:04다산의 향기



       다산의 초당 경영과 공간 구성 | 실힉 관련 자료. 논문

낙민 |2016.01.01. 09:33


정민

문헌과 해석사, 2007년 여름호, 통권 39호, 13-32면 수록

 

   강진 만덕산 한 자락의 다산초당은 다산이 18년 귀양 생활 중 10년 넘게 생활했던 공간이자, 유배 시절 다산의 그 많은 저작이 생산된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다. 다산은 귤림처사(橘林處士) 윤단(尹慱,1744-1821)의 산정(山亭)이었던 이곳에 거처를 옮긴 후, 비로소 안정을 찾고 저술에 몰두하였다. 이곳에서 다산학단(茶山學團)으로 일컬어지는 18제자를 길러내고, 그들과의 집체작업으로 그 엄청난 성과를 일사불란하게 수행하였다. 초당 생활 첫해부터 다산의 학술작업이 비약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 이 초당은 다산에게 뿐만 아니라 조선학술사에서 기억해야 할 기념비적 공간인 셈이다. 


   다산은 시기별로 이곳의 풍광을 세세하게 묘사한 수십 수의 시를 남겼다. 「다산팔경사(茶山八景詞)」․「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다산십이승첩(茶山十二勝帖)」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면 다산초당의 풍광과 공간 배치, 그리고 변화 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알 수가 있다. 현재 다산초당을 그린 그림이 두 폭 남아 있다. 하나는 다산선생의 분부에 따라 초의가 그린 「다산도(茶山圖)」이고, 다른 하나는 1939년 조선의 차문화 현지조사차 초당에 들렀던 일본인 이에이리 가즈오(家入一雄)가 다산 유적지를 직접 답사한 후 그린 「다산선생거적도(茶山先生居跡圖)」이다. 이글에서는 이 그림과 다산의 시문을 비교 정리해서 한국 차문화의 한 성지라 할 다산초당의 원래 모습을 글로나마 복원해보려 한다.



다산의 초당 정착과 초기 모습


   다산이 초당에 정착한 것은 1808년 봄의 일이다. 인근의 백련사는 혜장과의 인연으로 다산이 이미 여러 차례 찾았던 곳이고, 이곳에서 나는 차를 얻어 마셨던 터였다. 1808년 3월 16일에 다산은 문거(文擧) 윤규노(尹奎魯, 1769-1837)의 다산서옥에 놀러간다. 그의 아들 윤종하(尹鍾河)가 때마침 병 치료차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1) 다산의 외증조부가 윤종하의 고조부였으므로 외가로 먼 친척이었다. 다산은 열흘이 넘게 윤종하와 함께 이곳에 묵었다.


강진 귀양 이후 다산은 동문 밖 주막집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그리고 제자 이청의 집 등을 전전하던 처지였다. 다산(茶山) 또는 다아산(茶兒山)이란 이름처럼 이곳엔 골짝마다 차나무가 가득하고, 멀리 굽어보면 강진만에 수시로 돛단배가 오르내렸다.2) 봄인지라 골짝과 뜰 안까지 온통 꽃이 만발했고, 신선한 새우 무침은 병든 몸에 새로운 미각을 돋워 주었다. 누각과 연못도 그런대로 갖추어져 있어 머물러 살기엔 더 없이 좋은 곳이었다. 다산은 마침내 윤종하에게 이곳에 계속 머물 수 있었으면 하는 뜻을 내비치기에 이른다. 


   이런 인연으로 이곳에 내처 머물게 된 다산은 윤씨 집안 자제들에게 『주역』을 가르치며 한철을 났다. 공부 내용을 적어 「다산문답」 한 권을 지었고, 학생들에게 주는 당부를 적은 「다산제생증언(茶山諸生贈言)」도 이때 지었다. 다산은 이곳의 풍광과 주변 환경이 몹시 흡족했던 듯하다. 하기야 허름한 주막집 뒷방이나 산꼭대기 옹색한 암자, 그리고 제자의 집에서 기숙하며 불편하게 지내다가 외가쪽 한 집안의 아름다운 산정(山亭)에서 지내니 오랜만에 깊은 편안함을 느꼈음직 하다. 이때 지은 「다산팔경사(茶山八景詞)」 8수와 「다산화사(茶山花史)」 20수에는 당시 그가 느꼈던 안도감과 흡족함이 그대로 묻어난다.3)


「다산팔경사(茶山八景詞)」 8수에서 다산은 이곳의 팔경으로 불장소도(拂墻小桃)․박렴비서(撲簾飛絮)․난일문치(暖日聞雉)․세우사어(細雨飼魚)․풍전금석(楓纏錦石)․국조방지(菊照芳池)․일오죽취(一塢竹翠) 등을 꼽았다. 산 허리에 담장이 둘러쳐 있고, 담장에는 복사꽃 가지가 바람에 일렁인다. 산집의 주렴에는 버들 그림자가 어리우고, 맑은 못물엔 봄바람에 버들개지가 흩날렸다. 초여름엔 꿩 울음 소리가 들리고, 보슬비에 고기밥을 던져주는 정경이 한갓졌다. 단풍나무는 바위 위에 뿌리를 얽었고, 국화는 연못에 제 그림자를 비추었다. 언덕엔 대나무가 푸르고, 작은 시냇가에는 용의 비늘을 두른 소나무가 우뚝하게 서 있었다. 「다산팔경사」는 다산 정착 초기에 원래부터 있던 초당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다.  


「다산화사」 20수에서는 초당에 심어진 각종 화훼초목을 하나하나 노래했다. 이글을 통해본 다산초당의 초기 모습은 이렇다. 귤림(橘林) 서편 시냇물이 발원하는 곳 바위 사이에 초당이 있고, 초당 곁에는 작은 못이 있었다. 못 중앙에는 돌을 쌓아 삼신산을 본 뜬 석가산(石假山)을 만들었다. 섬돌 둘레에는 철 따라 온갖 꽃들을 심었다. 우물가에는 복사꽃이 피고, 숲 속에는 차나무가 무성했다. 들창 앞에는 모란꽃을 보호하려고 한 일자로 대바자를 쳐놓았다. 언덕 곁에는 작약이, 다락 옆에는 수구화가 피었다. 이밖에 해석류․치자․백일홍․월계화․접시꽃․국화․자초․포도나무 등이 심어져 있고, 미나리 밭도 있었다. 당시 초당에는 이렇다 할 변변한 책도 없이 고작 『화경(花經)』『수경(水經)』등의 몇 책뿐이었다. 다산은 이곳의 풍광을 하나하나 애정을 담아 노래했다.      


   제비가 들보 위에 집을 짓길래 여러 번 헐어도 자꾸 짓는 것이 안쓰러워 내버려 두며 시를 지었고, 4월 20일엔 헤어진 지 8년 만에 아들 학유(學游)가 찾아와 부자간에 상봉한 것도 이곳이었다. 5월 11일에는 윤문거와 아들 학유 등과 함께 용혈(龍穴)로 뱃놀이도 나가면서 모처럼 만의 편안한 휴식을 취했다. 앞서 다산을 보은산방에서 머물도록 주선하기도 했던 혜장은 이때에도 승려 한 사람을 보내 초당의 부엌일을 뒷바라지 하게 했던 듯하다.4) 가을에는 수정사(水精寺)로 소풍을 나갔다.


   이해에 다산이 아들에게 준 여러 편의 가계(家誡) 끝에 보면 글을 쓴 공간 표현이 조금씩 다르다. 다산정사(茶山精舍)․다산동암(茶山東菴)․다산서각(茶山書閣) 등의 명칭이 보인다.5) 대부분의 글은 동암에서 쓰여졌다. 여기서 말한 정사(精舍)와 서각(書閣)이 동암 외에 다른 공간을 지칭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현재 남아있는 「다산도」에는 동암(東菴)과 서각(西閣) 두 건물 밖에는 없다. 이 그림은 1812년에 다산의 입회 하에 다산초당에서 그려진 것이니만큼 초당의 공간 배치는 이 그림을 기준으로 삼을 수 밖에 없다.

 

「다산화사」 제 2수에 “작은 못은 참으로 초당의 얼굴인데[小池眞作草堂顔]”라고 하고, 바로 뒤에 「지각월야(池閣月夜)」란 작품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당과 지각은 위에서 서각(書閣)이라 적고 있는 곳과 동일한 공간을 달리 말한 것이다. 「다산사경첩」「석병(石屛)」시에서는 “죽각(竹閣) 서편 머리에 바위가 병풍 되니[竹閣西頭石作屛]”이라 하여, 초당을 달리 ‘죽각’으로도 불렀다. 무엇보다 「다산사경첩」「다조(茶竈)」시에서는 “차 끓이는 부뚜막이 초당 앞에 놓였네[烹茶小竈艸堂前]”라 하고, 끝에서 “다조는 지정(池亭) 앞에 있다.[茶竈在池亭之前]”고 하여, 초당과 지정을 동일 공간으로 설명한 것이 그 확증이다. 요컨대 중심 건물인 초당과 서각(書閣)은 동일 공간이며, 연못이 바로 내다뵈는 정자나 누각 형태의 단촐한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이곳은 생활 공간이 아닌 윤단의 산정(山亭)이었음을 새삼 환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연못 반대편 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동암이 따로 있었다.    



다산의 초당 경영과 공간 재배치

 

   다산이 본격적으로 초당의 공간을 경영하기 시작한 것은 이곳에 정착한 이듬해인 1809년 초봄의 일이었다. 문집을 보면 이해 2월 6일 매화가 피자 윤종하 형제를 그리며 시를 써주고 있고, 2월 15일에는 피어난 매화를 보며 세 수의 시를 남겼다. 두 어 차례 백련사로 놀러가서 혜장과 『산경(山經)』『주역』에 대해 토론도 했다.    


   늦봄 매화나무 아래를 산책하던 다산은 잡초와 잡목들이 제 자리를 못 잡고 지저분하게 우거져 있는 것을 보았다. 석류는 화톳불 자리에 섞여 있었고, 매화는 뒷간 뒤에 심어져 있었다. 지대가 외지고 규모가 좁아서 시설을 하려해도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다산은 평소 자신이 품고 있던 선비의 이상적인 거처로 이곳을 완전히 탈바꿈해 볼 생각을 당장 실천에 옮겼다.6)
가장 먼저 조성한 것은 채마밭이었다. 산자락의 경사가 심해 흙이 쓸려 내려가므로, 돌을 쌓아 단을 만들어 비탈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예전에 읽었던 책을 참고해서 아홉 단의 돌계단을 쌓았다. 층마다 각기 달리 채소를 심었다. 무와 부추, 늦파와 올숭채를 심었다. 쑥갓․가지․아욱․겨자․상치․토란 등 갖가지 채소를 갖추 심었다. 남은 빈터에는 잡초를 뽑아 곁채에는 명아주와 비름을, 울 밑에는 구기자를 줄지어 심었다. 고사리와 쑥도 절로 돋아났다. 노루가 뜯어먹지 못하도록 띠로 울을 엮고, 말이 밟을까 염려하여 따로 담장도 둘렀다. 윤규로와 그 아우 윤규은(尹奎殷) 형제가 팔을 걷고 앞장섰다. 채마밭이 완성되자 조촐한 대로 자축연을 열기까지 했다.


   다음은 초당 동편의 못을 정비했다. 방아확처럼 좁아 볼 품 없던 못을 산 밑까지 닿도록 크게 넓혔다. 잡목들을 찍어내고 덤불을 걷어냈다. 그 자리에는 단풍나무와 느릅나무를 심었다. 떡갈나무와 싸리나무를 베어버리고, 큰 바위를 굴려서 산자락에 축대를 쌓아 경계를 두었다. 초당 위쪽의 샘물을 파서 홈통으로 이어 못에 물을 댔다. 담장이 터진 곳은 대나무를 심어 보충하고, 언덕 쪽은 버드나무를 심어 가렸다. 혜장은 확 바뀐 초당 풍경을 보고 감탄하고 돌아가 연뿌리를 보내 못에 심게 했다. 못 둘레에는 당귀․작약․부양(膚癢)․수구(繡毬)․모란․동청(冬靑)․유초(乳蕉) 등을 차례로 심고, 담장 밑에는 포도 시렁을 얹었다.     

 
   연못 정비를 마치고 나서는 못 위 쪽 산허리에 바닷가에서 주워온 기암괴석들을 쌓아 석가산(石假山) 구역을 조성했다. 여러 기록과 「다산도」를 참고할 때 석가산은 현재 다산초당의 모습처럼 못 가운데 삼신산처럼 쌓은 것이 아니다. 물론 정착 초기에 지은 「다산화사」 제 2수에 작은 못 중앙에 삼봉(三峰)의 석가산을 둔 기록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다산이 초당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며 지은 시와 「다산사경첩」에 보이는 석가산의 규모는 작은 연못 가운데 세우는 정도의 규모가 아니었다. 초의가 그린 「다산도」에도 이 석가산 구역은 명확히 별도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맨 처음 석가산의 아이디어를 낸 것은 문거(文擧) 윤규로(尹奎魯)였다. 「다산사경첩」의 기록을 보면 그는 6, 7명의 종자들을 데리고서 초당에서 바닷가 신부태(新婦埭)로 나가 노어기(鱸魚磯)까지 훑어, 조수가 침식하여 만들어낸 갖은 기괴한 모양의 괴석들을 수 십 개나 주워 배로 싣고 왔다. 이 돌로 석가산을 조성했다. 다산은 시 속에서 주워 온 수십 개 괴석의 모양을 일일이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윤규로는 석가산 구역에 구불구불 물길을 돌려 샘물이 돌 사이로 뚫고 흘러가게끔 솜씨를 부렸다.7)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 가운데 「석가산」시를 보면, 괴석을 재주를 부려 쌓아 삼층탑으로 만들고, 가운데 우묵 패인 구멍에는 한 그루 소나무를 심었다.8) 바위 곁에는 봉미(鳳尾) 파초를 심었다. 둘레에는 복사꽃과 살구꽃이 피었다. 채마밭에서는 철 따라 채소가 나고, 이웃에서는 때 맞춰 술과 단술을 보내왔다. 참외도 심어 과일도 따서 먹었다.


   다산의 기거 공간은 동암이었던 듯하다. 1809년 11월 6일에 지은 시에는 동암에서 재계하고 혼자 자는데 꿈에 아리따운 여인이 유혹하여 마음이 동했지만 마침내 돌려보내고 꿈을 깬 내용이 실려 있다. 이후 다산은 동암에 4부의 서적을 가득 쌓아 두고 본격적인 저술에 돌입했다. 경사자집의 4부서 외에 『산경(山經)』『수지(水志)』, 그리고 흥미로운 내용을 담은 고서들도 두루 갖추어져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비로소 강진의 다산초당은 완전히 다산의 공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듬해인 1810년에는 새로 두 칸 짜리 작은 띠집을 지어 송풍루(松風樓), 또는 송풍암(松風菴)이라 이름 짓고, 2천권 서적을 갖춰두었다. 송풍루는 책을 갈무리할 서재 공간의 확장 필요에 따라 새로 세운 것이었다. 송풍루 또한 동암 외에 따로 지은 별도의 건물이 아니라 동암(東菴)의 다른 이름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원래 있던 동암을 헐고 그 자리에 새로 세운 듯하다. 다산은 동암에 들어설 때면 가득 쌓인 2천권의 서책 때문에 얼굴이 절로 환해진다고 적고 있다. 그러니까 초당 정착 초기에는 동암 아닌 서각(西閣)을 서각(書閣)이라고도 하여 이곳에 책을 두고 강학을 하였는데, 공간이 너무 옹색한데다 해남에서 2천권의 책을 실어 오면서, 동암을 크게 넓혀 서재와 생활공간을 겸하고, 서각 즉 초당은 전처럼 강학 공간으로 활용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지은 「송풍루잡시(松風樓雜詩)」16수에는 당시 초당에서의 생활상이 여실하게 그려져 있다. 다산은 굽은 둑을 새로 늘려 대나무를 옮겨 심을 계획도 세우고, 계단식 밭에다가는 부지런히 채소를 심었다. 귤피차(橘皮茶)와 송엽주(松葉酒)를 마시며 경전 공부와 시작(詩作), 산책과 음다(飮茶)로 계절이 바뀌고 한 해가 지나갔다. 이러한 안정적 분위기 속에 다산은 이해에만 무려 아홉 가지 이상의 저작을 동시 진행하는 괴력을 발휘했다.9)


당시 초당의 전경은 2년 뒤인 1812년 9월 22일, 다산이 초의(草衣)와 제자 윤동(尹峒)을 데리고 월출산 아래 백운동(白雲洞)에 놀러 갔다가 돌아와 초의를 시켜 그리게 한 「다산도(茶山圖)」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10) 이상하게도 『다산시문집』에는 1811년부터 1818년 사이의 시가 한 수도 남아 있지 않다. 1810년 송풍루를 노래한 시 이후 다산초당의 풍광은 계속 조금씩 변모해 갔을 터인데, 「다산도」가 다행히도 그런 변화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림을 보면 우선 연못이 상하 방지(方池) 두 개로 늘어난 것이 눈에 띤다. 뒤에 볼 일본인 이에이리 가즈오의 답사기에 연못은 징검다리 형태로 연못 서쪽 아래로 물길을 뺐다고 했는데, 그림에도 아래 위 연못 사이로 물길을 뺀 자취가 보인다. 집은 앞서 살핀대로 두 칸 짜리 초당(서각)과 역시 두 칸 짜리 동암, 즉 송풍루 뿐이다. 지금처럼 초당을 중앙에 두고 동암과 서각이 벌려선 모양이 아니라, 처음부터 동암과 서각 두 채 뿐이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때 동암은 서재를 겸하여 책을 쌓아놓고 공부하며 잠을 잔 공간이고, 서각은 학생들과 강학한 공간으로 볼 수 있겠다. 화면상으로는 아홉 단으로 쌓았다는 채마밭의 모습이 분명치 않다. 화면 오른쪽에 보이는 축대와 그 위쪽의 화초와 채소 밭을 가리킨 것인가 싶다.


   기록에 보이는 울타리 터진 곳을 채웠다는 대숲이 연못과 동암 사이에 또렷이 보인다. 연못 위쪽에 바다에서 주워온 기암괴석으로 만든 삼층의 석가산, 그리고 그 곁에 심었다는 파초도 분명하다. 특히 이 석가산 부분은 향후 복원이 이루어질 경우 특히 신경을 써야 할 대목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담장 가의 매화나 못가의 수양버들, 그리고 동암 아래 쪽의 쌍송과 그 곁 화단에서 자라는 이런저런 채소와 화초의 모습도 눈에 띈다.    


   한편 「다산사경첩」에서는 다산초당 4경으로 다조(茶竈)․약천(藥泉)․석병(石屛)․석가산(石假山)을 꼽았다. 다조, 즉 차 달이는 부뚜막은 초당 앞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다조는 현재 다산초당에 있는 다조로 알려진 바위와는 그 모습이 판이하다. 다산의 묘사를 보면 청석(靑石)을 반반하게 갈아, 그 위에 붉은 글씨로 ‘다조’란 두 글자를 새겨 넣었다고 했다. 불이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도록 설계되어 있고, 쫑긋 솟은 짐승의 두 귀처럼 생긴 구멍이 있어 연기가 그곳을 통해 빠져 나오게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11) 오늘날 초당 앞에 놓인 다조는 복원 당시 전혀 다른 돌을 가져다 놓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따로 논의하겠다.


석병(石屛), 즉 돌병풍은 초당 서편에 ‘정석(丁石)’ 이라 새겨진 글씨가 있는 바위이다. 소동파와 정령위(丁令威)의 고사를 끌어와 의미를 부여한 것이나, 고사가 복잡하므로 여기서는 잠시 말하지 않는다. 석가산은 앞서 살폈고, 나머지 하나가 약천(藥泉)이다. 다산은 약천을 옥정(玉井)이라고도 했는데, 지정(池亭)의 서북쪽 모서리에 물웅덩이 같은 것이 있었는데, 이를 파자 돌 사이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났다고 적고 있다.12) 약천은 현재 다산초당 뒤편의 돌우물의 위치와 일치한다. 



문산과의 교유와 다산십이경

 

   이후 다산초당은 제자들과 강학하며 생활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아갔다. 1814년 3월 4일 영암군수로 있던 아들 이종영(李鍾英)에게 와서 머물던 문산(文山) 이재의(李載毅, 1772-1839)가 다산 초당으로 다산을 찾아온다. 다산초당의 아름다운 풍광이 이미 인근에 널리 소문이 났던 모양이다. 이때 처음으로 만난 두 사람은 당색(黨色)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의기가 투합해서 『이산창수첩(二山唱酬帖)』에 각자 12수씩의 시를 주고 받았다. 내용은 앞쪽 6수는 서로를 그리는 정회와 초당의 풍경을 노래했고, 뒤쪽 6수는 육경과 관련된 내용으로 되어 있다.13)


   이재의는 상당히 오래 동안 초당에 머물렀던 듯, 3월 25일에는 또 다산이 지은 「다산십이승(茶山十二勝)」에 화운하여 두 번째의 창수첩을 만든다. 이것이 현재 한중연에 소장되어 있는 『상심락사첩(賞心樂事帖)』으로 알려진 서첩이다.14) 다만 현재 『상심락사첩』에는 총 24수에서 2수 씩 빠진 20수만 남아있다. 다산의 시 10수와 나머지 두 수는 『여유당전서보유』 1책에 실린 『다암시첩(茶盦詩帖)』이란 제목의 다른 서첩에 문산의 화운시가 빠진 상태로 실려 있다. 『다암시첩』에는 다산의 원작과 아들 학연(學淵)의 화운시(和韻詩)가 합첩된 상태로 남아 있다. 즉 『상심락사첩』과 『다암시첩』은 모두 다산십이승(茶山十二勝)을 노래한 다산의 같은 시로 된 시첩이다. 어찌된 셈인지 문산과 주고 받은 시를 포함해 백운동에서 지은 다산의 연작시 12수 등은 모두 문집에 누락되어 있다. 아마 문집을 편찬할 때 이 부분이 통째로 결락된 것인가 한다.  


   다산이 노래한 다산십이승은 초당 경영이 안정기로 접어든 이후의 풍경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다산이 꼽은 초당의 12승을 차례로 꼽으면 이렇다. 1경은 당미묵도(當楣墨圖), 즉 처마 밑에 담묵으로 그린 춘산도(春山圖)요, 2경은 강진만의 연범구파(烟帆鷗波)다. 3경은 지당어락(池塘魚樂), 4경은 장근석천(墻根石泉), 즉 담장 아래 돌샘물이다. 5경은 차부뚜막에 감도는 다연인 다조뇨연(茶竈裊烟)이요, 6경은 여앙석구(如盎石臼) 곧 물동이처럼 생긴 약 찧는 돌절구다. 7경은 거문고를 타는 송단석상(松壇石床), 8경은 꽃밭 가의 대나무인 화체종죽(花砌種竹)이다. 9경은 연지홍련(蓮池紅蓮), 10경은 대변석경(臺邊石徑) 즉 서대(西臺) 곁 정석(丁石) 쪽으로 가늘게 난 돌길이다. 11경은 매화나무에 걸린 술병인 노매괘병(老梅掛甁)이요, 12경은 작약조홍(芍藥照紅)이다.15) 이들 12경을 노래한 시와 「이산창수첩」의 구체적인 내용은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다.16)



다산이 떠난 뒤의 초당 모습

 

다산은 1818년 10년간 정들었던 초당을 떠나 한강 가의 마재로 돌아간다. 1823년 4월, 여유당으로 스승을 찾아온 제자들에게 준 글에는 초당을 그리는 다산의 마음이 켜켜이 묻어 있다. 다산은 자신을 찾은 제자들에게 동암의 띠를 새로 얹었는지, 홍도화가 시들지는 않았으며, 우물가에 쌓은 돌이 무너지지는 않았는지 시시콜콜히 묻고 있다. 연못 잉어의 안부와 백련사 가는 길가의 동백의 안부까지 묻고 있다. 그리고 끝에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초당을 잘 보존해 줄 것을 간곡히 당부하였다.17)


하지만 다산의 제자인 이시헌와 황상, 그리고 외손인 윤정기가 남긴 시를 보면 이후 주인을 잃은 다산초당은 급격히 영락을 거듭하여 몇 십 년이 못 되어 이미 폐허로 변해버렸던 듯 하다.


먼저 제자 이시헌(李時憲, 1803-1860)이 다산초당 터를 찾았다가 지은 「다산에서 옛날을 그리며(茶山感舊)」란 작품 2수를 읽어 보자.18)

 

滄桑卅載我重來  상전벽해 30년에 내 여기 다시 오니
苕上仙翁去不廻  초상(苕上)의 선옹(仙翁)께선 한번 가곤 오질 않네.
泥爪尙留丁石在  잠깐 머문 자취가 정석(丁石)으로 남았나니
海雲山月爲徘徊  바다 구름 산 달도 그를 위해 서성이네.
 
騷壇曾向橘園開  일찍이 소단(騷壇)이 귤원 향해 열렸더니
花謝水流歲幾回  꽃은 지고 물은 흘러 몇 해나 돌았던고.
負笈小生今白髮  책 상자 졌던 소생 지금은 백발 되니
東風獨上紫霞臺  봄바람에 호올로 자하대(紫霞臺)에 올랐네.

 

   이시헌은 다산이 아꼈던 막내 제자였다. 그는 서울로 간 다산을 위해 떡차를 만들어 올렸던 사람이다.19) 그런 그가 30년만에 초당을 찾았다고 했으니, 대략 1848년 언저리에 지은 시다. 초당 자리에는 정석(丁石) 두 글자만 남아 옛날을 증언하고 있었다. 자하대(紫霞臺)란 지명이 흥미롭다. 초당이 있던 계곡은 자하동(紫霞洞)으로도 불렸다. 초의가 비로 길이 막혀 다산초당을 오지 못하게 되자 지은 시에서 “내 언제나 자하동을 그리워 하니, 꽃나무들 지금 한창 무성하겠네.[我思紫霞洞, 花木正紛繽]”이라 한데서도 알 수 있다.20) 그러니 자하대는 바로 다산초당의 다른 이름이다. 


다산이 가장 아꼈던 제자 황상(黃裳, 1788-1863?)도 1850년대 중반에 이곳을 찾았다가  「다산의 옛터를 슬퍼하며(悲茶山古墟)」란 작품을 남겼다.21)

 

茶山佳號始夫子  다산이란 좋은 이름 선생에서 비롯되니
丁石纔存認舊時  정석(丁石)만 겨우 남아 그 옛날을 알려주네.
潁水淸風餘竹塢  영수(潁水)의 맑은 풍도 대숲에 남아있고
黃州溼酒悵蓮池  황주(黃州)의 습주(溼酒)는 연지에 서글프다.
門徒白髮獨吾在  문도라곤 흰 머리의 나만 홀로 남았으니
哲似衰郞歸弟隨  쇠랑(衰郞)이 아우 따라 돌아감과 비슷하다.
咄咄嗟嗟南北阮  남북으로 갈린 길을 혀를 차며 탄식하니 
未能百歲使遺基  남은 터전 백년조차 능히 보전 못하였네.

 

제자들도 죽고 자신만 홀로 남아 옛 스승의 자취를 찾아왔다가 옛터에서 슬픔에 젖어 지은 시다. 당시에 이미 초당을 증언하는 물건은 정석(丁石)이란 각자 뿐이었던 듯하다.


다산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외손 윤정기(尹廷琦, 1814-1879)도 1860년에 이곳을 찾았다가, 「귤동초당 옛터를 찾아(訪橘洞草堂舊址)」란 작품을 남겼다.

 

荒凉橘林下  황량한 귤림은 아래 있는데
丁石夕暉明  정석(丁石)만 저녁볕에 환히 밝구나.


초당 서쪽 석벽에 ‘정석’이란 두 글자가 있는데 다산공께서 새긴 것이다.
堂西石壁有丁石二字, 卽茶山公所鐫.


硯墨池留冷  연묵(硯墨)은 연못에 차게 남았고
琴絃松帶聲  거문고 줄 솔바람에 소리 나는 듯.


다산공이 일찍이 초당에서 시를 지었다. “소나무 단 흰 바위 평상 있으니, 여긴 내가 거문고를 타는 곳일세. 산 나그네 거문고 걸고 떠나면, 바람 불어 거문고 줄 절로 울린다.”    
茶山公曾於草堂有詩曰: “松壇白石牀, 是我彈琴處. 山客挂琴歸, 風來絃自語."


邨閭猶講誦  시골 마을 지금도 강송하나니
臺砌若生平  누대 섬돌 살았을 적 다름없구나.
警欬今無處  그 가르침 지금은 찾을 길 없어
臨風一愴情  바람 맞아 구슬픈 정 한결 같아라.22)

 

역시 초당 옛터에서 선생의 숨결을 느끼며, 강송하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오는 마을을 보며 구슬픈 심회에 잠기고 있다. 4구 끝에 인용한 다산의 시는 바로 「다산십이경첩」 가운데 실린 한 수이다.  
 


1930년대 초당의 모습

 

1936년 4월에 에 간행된 『카톨릭 청년』 제 4권 4호에는 김재석(金在石)이란 이가 쓴 「다산의 유적을 강진에 찾아」란 기행문 한편이 실려 있다. 이 한편의 글 가운데, 다산초당을 묘사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만덕동은 구명(舊名)으로 「귤동」이라 하는데 이 동리 깊숙한 골짜기 다산(茶山)이란 산 밑에 정선생이 17년간 유배생활 하셨다는 자리가 있습니다. 현존유적이라고는 기암(奇巖) 전면에 「정석(丁石)」이라 양자(兩字)를 뚜렷하게 새겼는데 이것은 요안씨(氏)가 친히 쓰고 자수(自手)로 새긴 것이라 합니다.
바로 이 바위 앞에는 15,6평의 평지가 있습니다. 여기가 정요안씨가 초당을 지었던 자리라는데 지금은 잡목이 빽빽하여 옛적 자취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 바로 조금 내려오면 정선생의 제자 윤진사의 비석이 있는데 이 양반은 그 제자로서 선생의 총애를 많이 받았고 진사까지 하였답니다. 그 근방에는 선생님의 친수(親手)로 심은 동백나무와 친수로 개간한 전포(田圃)가 있는데, 지금은 평탄하다는 것뿐이지 나무가 자리를 잡았습니다.23)

 

1936년 당시 다산초당은 이미 폐허로 변해있었고, 오직 ‘정석’ 두 글자만이 그곳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었다. 다산을 세례명인 ‘요안’으로 불러 정요안 씨라 호칭한 것이 흥미롭다. 초당 자리 15,6평의 평지는 잡목이 무성하여 예전 자취를 아예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잡지에는 초당 터의 우거진 잡초 덤불 사이에서 찍은 사진이 실려 있다.


   이로부터 3년 뒤인 1939년 2월 25일 일본인 이에이리 가즈오(家入一雄)가 전남 해안지방의 차문화 현지답사를 위해 만덕리를 찾았다가 초당을 방문하고 다시 기록을 남겼다. 이때 이에이리는 특별히 「정다산선생거적도(丁茶山先生居跡圖)」까지 남겼다. 이 그림은 당시 윤씨가의 후손들의 설명과 자신이 직접 살펴본 초당의 풍경을 섬세하게 묘사하여 큰 참고가 된다.


이에이리의 답사기와 그림은 『조선의 차와 선』이란 책에 실려 있다.24) 책에서 이에이리가 설명하고 있는 다산초당의 주변 정황을 간추려 적으면 이렇다.


   오솔길을 따라 시내를 끼고 오르면 100미터쯤 지나 험한 비탈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약간의 평지가 있다. 이곳에 두 군데 돌담이 있다. 이곳이 다산초당이다. 돌담을 조금 지나면 높이가 3-4미터, 가로가 5,6미터 쯤 되는 이끼 낀 바위가 있고, 정석(丁石)이란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근처에 차나무가 있다. 돌담에서 보면 집이 두 채가 있다. 돌담을 지나 개울 밑에 5,60평 되는 평지가 있다. 중앙에 가로 5.4미터 세로 7.2m 쯤 되는 가장자리를 돌로 쌓은 못이 있다. 못 서쪽 아래 배수구가 있고, 징검돌로 흐르는 물을 건넌다. 못 위에는 시누대와 참대숲이 있다. 숲 서쪽으로 자연 암석을 이용한 4,50도의 경사면을 달려 여울이 못으로 쏟아진다. 못물은 25미터 쯤 위 산 중턱 우묵한 곳에 지름 90센티 쯤 되는 샘물에서 나온다. 바위 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닥의 모래 땅에서 솟아난다. 못에서 서쪽으로 급히 내려가면 그 언저리가 동암이 있던 자리다. 동암은 학생들을 가르치던 서당이고, 서암은 다산선생의 서옥이었다.25)


   동암과 서암의 기능 설명이 뒤바뀐 것을 빼면 비교적 당시의 풍광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3년 전 김재석의 기행문에 초당 자리에 잡목만 빽빽하다고 있는데, 3년 뒤의 이 기록에는 초당 즉 서암 쪽에 두 채의 집이 있었다고 엇갈린 증언을 하고 있다. 3년 사이에 윤씨들이 새로 세운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기록에 비추어 이에이리의 그림을 살펴보면, 지금 다산초당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보정산방(寶丁山房)으로 더 알려진 귤송당(橘頌堂)을 윤씨저택으로 그려 놓았고,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다산의 제자 윤종진의 무덤도 보인다. 그리고 서암(다산초당) 옆 대숲 아래 연못이 있다. 앞서 본 초의가 그린 다산도의 아래쪽 연못자리다. 위쪽 연못은 지금 대숲의 위쪽에 있었을 터인데, 이 그림에서는 없는 것처럼 그려지고, 대신 그 위로 수원지와 연못으로 이어지는 물길을 강조해 그린 점이 다르다. 동암 쪽은 터만 남았다고 해놓고, 초가집 두 채를 그려 놓았다. 이것은 이에이리가 상상으로 채워 넣은 것인 듯하다. 돌로 쌓은 축대와 울타리, 채포(菜圃)의 흔적은 이미 찾아볼 수가 없다. 



오늘날의 다산초당과 재복원 문제

 

   현재의 다산초당은 1956년 결성된 다산초당복원위원회에서 정씨 문중과 윤씨 문중의 성금에다 지역 주민의 성금을 보태 해마다 이엉을 해 얹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기와집으로 복원한 것이다. 다산 당시에는 초가집이었음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이때 옥천(玉泉)과 연못도 복원했다. 그리고 1974년 정씨 문중의 정채균(丁埰均)씨가 강진 군수로 부임해 오면서 동암 서암과 천일각, 그리고 유적비 등을 복원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26)


최근 초의가 그린 「다산도」가 새롭게 발굴되면서 다산초당의 재복원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줄로 안다. 이에 있어 이 글을 통해 새롭게 확인한 몇 가지 사실을 점검하여 재복원에 참고의 자료로 제시할까 한다.


첫째, 다산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초당 공간은 지금처럼 중앙에 초당이 있고, 양편에 동암과 서암이 따로 놓인 형태가 아니었다. 초당과 서각(西閣) 또는 죽각․지당․서암․자하대 등으로 불린 건물은 별개가 아닌 동일한 공간이다. 이밖에 동암․송풍루․송풍각으로 불린 서재 공간이 따로 있었다. 기록을 통해 볼 때, 동암은 다산이 서재 겸 기거처로 사용했고, 서각은 강학 공간으로 활용한 듯하다. 


둘째, 초당은 지금처럼 번듯한 기와집이 아니라 말 그대로 초가집이었다. 그것도 두칸 짜리 단촐한 집이었다.


셋째, 연못은 기록에는 하나로 나오는데, 「다산도」에는 아래 위로 두 개가 보인다. 뒤에 하나를 더 판 것이다.


넷째, 「다산사경첩」에 나오는 석가산은 지금처럼 연못 가운데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다산도」와 관련 시문을 통해 볼 때 석가산은 연못 위 산 기슭에 따로 한 구역을 마련해 괴석 수십 개를 배치하고 중앙에 삼단으로 된 석가산이 있었다. 그리고 샘물이 돌 사이로  구불구불 지나 아래쪽 연못으로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그 옆에는 파초를 심었다.


다섯째, 초당 주변에는 돌로 쌓은 울타리가 있었고, 아홉 단으로 층을 지어 쌓은 채마밭이 있었다.


여섯째, 약천은 초당의 뒤편에 있던 샘물로, 다산은 이 물로 차를 끓여 마셨다. 연못으로 끌어온 물은 언덕 위에 있는 수원지에서 흘러내린 다른 샘물이다.   


일곱째, 현재 초당 앞에 있는 다조(茶鼂) 즉 차부뚜막은 다산 당시의 것이 아니라 나중에 가져다 놓은 다른 것이다. 다산은 청석(靑石) 위에 붉은 글씨로 ‘다조’라고 새겨 놓았다고 했고, 크기나 생김새의 묘사도 지금 것과는 전혀 다르다.


여덟째, 현재 작은 비석으로 서 있는 송풍루는 동암의 다른 이름이다. 다산은 이곳을 두칸 짜리 집으로 늘려 짓고, 새로 송풍루란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이곳이 다산의 생활공간이자 서재 공간이었다.


아홉째, 강진만이 바라다 뵈는 위치에 세워진 천일각(天一閣)은 명칭 뿐 아니라 건물 자체도 다산 당시에는 없었던 것이다. 후대에 복원하면서 새롭게 만들어 세운 것이다.  


   이상 다산의 강진 초당 경영과 공간 구성에 대해 다산이 남긴 시문과 두 점의 기록화를 통해 살펴보았다. 초당의 재복원은 이곳이 우리 학술사의 위대한 성과를 낳은 성지라는 점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전후 문헌의 면밀한 검토 없이 졸속으로 복원이 이루어진다면 차라리 복원된 지 이미 50년 가까이 지나 이미 고졸한 품격을 보이고 있고, 선명한 국민적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현재 상태로 남겨 두는 것만 못한 결과가 되기 쉽다.  다산초당의 재복원 사업이 해괴한 초가집 몇 채 다시 지어 놓고, 요란스럽게 연못의 석축을 다시 하고 초당에 걸맞지 않은 돌담을 다시 쌓는데 그쳐 오히려 이 공간이 지녔던 유현(幽玄)한 기품마저 훼손하는 일이 되지 않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1) 정약용, 『국역다산시문집』(민족문화추진회 편, 솔출판사, 1996), 2책, 401면에 「삼월 십육일 윤문거 규로의 다산 서옥에서 놀았는데, 공윤도 병을 치료하며 거기에 있었다...」에 전후 사정이 나와 있다.
2) 다산의 친필서첩인 「서증청산노인(書贈靑山老人)」의 말미에는 “열수정용서우다아산지송풍암중(洌水丁鏞書于茶兒山之松風菴中)”이라고 적혀 있다. 다산을 달리 다아산(茶兒山)으로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3) 정약용, 『국역다산시문선』 2책 402면에서 408면까지 두 작품이 실려 있다. 이하 내용은 이를 간추렸다.
4) 「다산화사」 제 3수에 “대숲 속 부엌일을 중 하나가 돕는데, 수염 터럭 갈수록 꺼칠해짐 민망하다. 이제와 불가의 계율일랑 다 버리고, 생선을 잡아다가 손수 찜을 하누나. 竹裏行廚仗一僧, 憐渠鬚髮日鬅鬅. 如今盡破頭陀律, 管取鮮魚手自蒸.”이라 한 것이 있다.
5) 정약용, 『국역다산시문선』 8책 8면에서 27면까지 실려 있다.
6) 정약용, 『국역다산시문선』 2책, 425에 수록된 「어느 날 매화 나무 아래를 산책하다가 잡초와 잡목들이 우거져 있는 것이 보기에 안 됐어서...」라는 긴 제목의 80운으로 읊은 장시에서 이해 봄에 이루어진 초당 경영의 구체적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다. 이하의 내용은 이 시를 참고했다.
7) 정약용, 「어느 날 매화나무 아래를....」이란 시의 제목을 보면, “그 암석을 인하여 가산(假山) 한 구역을 만들었는데, 구불구불 굽이를 만들어 샘물이 그 사이로 뚫고 흘러가게 했다[因其巖石, 爲假山一區, 逶邐彎曲, 水泉穿瀉]”라고 설명했다. 산자락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석가산 구역을 만들고, 위에서 흘러내리는 샘물이 이곳에 여러 굽이로 회돌아서 석가산의 돌틈으로 빠져나와 아래쪽 연못으로 흘러들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석가산이 만약 연못 가운데 서 있었다면 샘물이 그 사이로 빠져 나간다는 식의 표현이 의미 없게 되고, 무엇보다 「다산도」가 당시의 모습을 그려 보이고 있다.
8) 정약용, 「다산사경첩」 중 석가산을 언급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만(沙灣)의 괴석 모아 봉우리를 만드니, 참된 면모 거짓 모습 꾸밈보다 외려 낫네. 가파른 돌 교묘하게 삼층탑을 앉히니, 움푹한 곳 한 가지 소나무를 꽂았네. 서려 돈 묘한 자태 지봉(芝鳳)이 웅크린듯, 뾰족한 곳 얼룩 무늬 탁룡(籜龍)이 솟구친 양. 다시금 산 샘 끌어 둘러 못을 만드니, 고요히 물밑 보면 푸른빛이 겹겹일세. 沙灣怪石聚爲峰, 眞面還輸飾假容. 巀㠔巧安三級塔, 谽谺因揷一枝松. 蟠廻譎態蹲芝鳳, 尖處斑文聳籜龍. 復引山泉環作沼, 靜看水底翠重重.”
9) 강진에서 이루어진 연도별 작업 현황표는 정민, 『다산선생지식경영법』(김영사, 2006), 464쪽을 참조할 것. 이해에 다산은 『가례작의』․『시경강의보』․『상서고운수략』․『매씨서평』․『소학주천』등을 마무리했고, 동시에 『상례사전』․『아방강역고』․『춘추고징』․『역학서언』 등도 마무리 단계에 와 있었다.
10) 「다산도」는 『백운첩(白雲帖)』 속에 첨부되어 있는 그림이다. 서첩은 다산이 백운동 12승을 노래한 친필 시와 초의가 그린 「백운동도」로 구성되어 있다. 다산은 백운동을 다녀온 뒤 그곳의 풍광을 잊지 못해 초의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는 한편, 그곳의 풍광을 12수의 시로 짓고 끝에 「다산도」를 그려 백운동과 자웅을 겨뤄보자는 뜻을 비춰 백운동에 이 서첩을 선물했던 것으로 보인다.
11) 「다산사경첩」의 「다조」 시의 앞부분은 다음과 같다. “반반하게 청석 갈아 붉은 글자 새기니, 차 달이는 부뚜막이 초당 앞에 놓였네. 고기 입 뻐끔대듯 불길 깊이 감싸고, 짐승 귀 두 개 뚫려 가늘게 연기 나네. 靑石磨平赤字鐫, 烹茶小竈艸堂前. 魚喉半翕深包火, 獸耳雙穿細出煙.”
12) 정약용, 「다산사경첩」 중 「약천」조에 “약천은 지정(池亭)의 서북쪽 모서리에 있다. 처음에는 그저 웅덩이였는데, 내가 이를 파자 맑은 샘물이 돌 가운데로부터 솟아났다. 藥泉在池亭西北隅, 始唯沮洳. 余鑿之, 淸泉自石中迸出.”고 하였다. 이 샘물과 석가산을 돌아 홈통으로 이어져 연못으로 떨어진 샘물은 다른 것이다.
13) 이날의 만남 이후 두 사람은 여러 해 동안 사단칠정의 해석을 둘러싼 치열한 인성(人性) 논쟁을 펼치는데, 그 자세한 경과는 정민의 『다산선생지식경영법』과 실시학사 경학연구회에서 펴낸 『다산과 문산의 인성논쟁』(한길사, 1997)에 자세하게 보인다. 
14) 『상심락사첩』은 소장자가 붙인 이름인 듯 하고, 『다산십이경창수첩(茶山十二景唱酬帖)』쯤이 바른 이름일 듯 하다.  
15) 다산 12경의 명칭은 따로 표제화 된 것이 없는데, 시의 내용에서 따와 필자 임의로 붙여 본 것이다.
16) 『이산창수첩』은 『다산과 문산의 인성논쟁』의 233-244면에 『이산창화집(二山唱和集)』이란 제목 아래 전문이 번역되어 있다. 시 가운데는 다산의 알려지지 않은 차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차시(茶詩)도 포함되어 있어 귀중하다.
17) 정민, 『미쳐야 미친다』(푸른역사, 2004), 188쪽에 원문이 실려 있다.
18) 이시헌, 『자이선생집(自怡先生集)』 권 상 수록.
19) 관련 편지는 정민, 「차를 청하는 글-다산의 걸명(乞茗) 시문」, 『문헌과해석』 2006년 겨울호(통권 37호, 문헌과해석사), 11-27면과, 정민, 「다산의 떡차론」, 월간『차의 세계』 2007년 5월호, 58-61면에서 검토한 바 있다.
20) 초의, 「조우미왕다산초당(阻雨未往茶山艸堂)」(『초의시집』 권 1)의 1,2구.
21) 황상, 『치원유고(巵園遺稿)』 수록.
22) 윤정기, 『방산유고(舫山遺稿)』 권 3 수록.
23) 『카톨릭청년』 제 4권 4호, 1936년 4월, 81-83면 수록. 표기법은 필자가 현대어로 고침.
24) 이 책은 모로오까 다모쓰(諸岡存, 1879-1946)과 이에이리 가즈오의 공저로 1940년 10월에 일본 동경의 日本茶道社에서 간행되었다. 가즈오의 그림이 이 책의 앞쪽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1991년 보림사에서 김명배의 번역으로 국내 출간되었는데, 원본에 흑백으로 되어 있던 그림이 여기에는 칼라로 실려 있다.
25) 이상의 설명은 김명배 역, 『조선의 차와 선』 가운데 246면에서 265면까지 실려 있는 「만덕리와 정다산 선생」 대목을 공간 묘사 중심으로 필자가 요약한 것이다. 이밖에도 이 책에는 당시 초당 주변 모습을 찍은 사진이 몇 장 실려 있다.
26) 관련 내용은 김대성, 『차문화 유적답사기』 권 중(불교영상, 1994), 191-210면의 「다산의 한과 얼이 서린 강진」에 자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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