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하피첩 이야기

2016. 3. 11. 01:15다산의 향기



       다산의 하피첩 이야기 / 김현준| 안골은빛회원창작수필

김현준 | 2015.10.29. 06:51


 

다산의 하피첩 이야기

    얼마 전 서울옥션에서 특별한 경매가 이루어졌다. 예금보험공사가 파산한 부산저축은행 등으로부터 받은 고서적 18점에 대한 경매였다. 정약용의 필적 하피첩이 최고가인 7억5천만 원으로 국립민속박물관에 낙찰되었다.

보물 1683-2호인 하피첩다산 정약용이 1810년 귀양지인 전남 강진에서 부인이 보내준 치맛감에 학연, 학유 두 아들을 위해 쓴 편지를 모은 것이다. 본래 네 첩이었으나 하나는 사라지고 세 첩만이 전한다. 하피첩은 김민영 전 부산저축은행 개인 컬렉션에 나온 문화재로, 추정 가격은 3억5천만 원에서 5억천만 원이었고, 2억5천만 원에서 경매가 시작되었다.

경기도 양평에 있던 정약용의 아내 홍혜완이 바래고 해진 치맛감 여러 폭을 귀양지에 부쳐오자 다산은 두 아들에게 교훈이 될 구절을 직접 짓고 썼다. 그 치마는 홍 씨가 시집올 때 입고 온 붉은 치마였는데, 오래되고 빛이 바래어 노을빛 치마, 하피가 되었다. 다산은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에 유배된 몸이었다.


병든 아내 치마를 보내 / 천 리 먼 길 애틋한 마음 부쳤네

오랜 세월 붉은빛이 바래니 / 만년에 서글픔 가늘 수 없네

마름질로 작은 서첩을 이루어 / 자식들 일깨우는 글을 적는다

부디 부모 마음을 잘 헤아려 / 종신토록 가슴 깊이 새기려무나


집안의 경제적 운영에 대한 조언과 인간답게 사는 훈계의 내용을 담아 좌우명으로 삼기를 바랐다. 서첩은 정약용의 전형적인 행초行草서풍을 잘 보여주며, 세 번째 첩에 실린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는 다른 서첩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다.

얼마 뒤 남은 치맛자락을 다시 붙여 딸의 결혼을 축하하는 글과 그림을 그려 족자로 만들어 보냈다. 아버지와 헤어질 때 딸은 여덟 살이었다. 마음속으로만 그리던 딸이 21살이 되어 부모의 품을 떠나 시집을 간다고 했다. 그 화조도花鳥圖에는 ‘꽃이 풍성하니 열매도 많이 열릴 거야’라고 썼다.

이 하피첩은 6․25 전쟁 통에 사라져 기록만 전해왔다. 다산의 종손 정향진이 수원역에서 열차에 오르다 분실한 것이다. 뒤늦게 하피첩을 잃어버린 것을 깨달은 정 씨는 실신할 정도로 애통했다고 한다.

2004년 수원 어느 공사장에 파지를 수집하러 온 노인이 있었다. 그가 가져온 수레에 든 고서를 건물주가 파지 대신 넘겨받았는데, 그 속에 하피첩이 들어있었다. 건물주는 2년 뒤 TV 고미술품 감정 프로그램에 그 물건을 내놓았고, 감정 결과 정약용의 하피첩임이 밝혀졌다. 감정가는 1억 원이었다. 당시 감정위원이었던 고미술 전문가 김영복은 책을 보는 순간 충격을 받아 ‘덜덜 떨렸다.’고 말한 적이 있다.

국보와 보물이 개인 소장품인 경우 소유자 변경 신고만 제대로 하면 사고팔 수 있다. 단 국외에 반출해서는 안 된다고 문화재보호법에 명시되어 있다.


   고미술계에서는 영영 사라질 뻔한 문화재가 기적같이 구출된 이야기들이 전한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겸재謙齋 화첩도 그렇다. 1934년 한 골동품 거간꾼이 용인의 부잣집 별장에 갔다. 사랑방 아궁이 앞에 쌓인 종이뭉치 속에서, 비단으로 꾸민 책자를 발견하고 아찔했다. 화가 정선이 금강산을 여행하고 그린 작품을 모은 화첩이었다. 어차피 불쏘시개를 할 것이니 자기에게 팔라고 청하여 골동품상은 쌀 한 가마니 값을 주고 샀다. 그 뒤 거간꾼은 몇십 배의 이문을 남기고 문화재 수장가 전형필에게 팔았다.

다산 선생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한 게 무슨 죄가 될까? 자신을 믿어준 선대왕 정조를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아내 걱정, 자식 걱정으로 무수한 밤을 뜬 눈으로 새웠을 것이다.

다산은 처음 경상도 영일 장기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긴 뒤 동문 밖 주막집 노파의 인정으로 거처할 방 한 칸을 얻었다. 동네 아이들을 모아 서당을 열고 호구를 이었으며, 차츰 문인, 유학자들과 교류했다. 18년의 긴 유배생활을 다산은 헛되이 보내지 않고, 503권 182책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중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는 대표적인 저서다.

다산은 아내의 치마폭을 보며 아내의 사랑에 눈물지었다. 그에게도 꽃다운 신혼의 시절이 있었고, 예쁜 분홍치마를 입은 신부가 떠올랐다. 그 치마폭을 오래 간직하고자 서첩을 만들었고, 자손에게 교훈이 될 글을 지었다. 가을밤이 짧게 새었다. 그것이 후손에게 전해지다 혼란한 시대, 이리저리 굴러다녔으리. 아내 홍 씨는 어떤 마음으로 치마를 보냈을까? 영원한 이별을 고한 것이라는 설과 자신을 잊지 말라는 정표로 해석하기도 한다.

최근 국문학자 임형택이 연작시 <남당사南塘詞> 한 편을 발굴했다. 작자는 강진의 문인으로 짐작되는데, 그가 다산의 강진 여인이었던 ‘홍임이 모’가 되어 시를 썼다.


천고에 빛나는 문장 세상에 특출한 재주

만금을 주고도 한번 만나기 어렵거니

갈가마귀 봉황과 어울려 짝이 될 수 있으랴

미천한 몸 복이 넘쳐 재앙이 될 줄 알았지요.


  홍임이 모는 22세에 청상이 된 표 서방의 딸로, 유배 시절 정약용의 소실이었다. 다산초당에 살았던 10여 년 동안 그녀는 다산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18년간의 유배가 풀려 경기도 마현으로 돌아갈 때 홍임이 모는 딸과 함께 낭군을 따라나섰다. 그러나 그녀는 본댁 홍 씨에게 내침을 당한 뒤 강진 다산초당으로 내려가 홀로 딸을 키우며 살았다고 전한다. 매년 새로 돋는 찻잎으로 정성스레 차를 만들어 마현으로 보내곤 했다. 다산은 시를 한 수 지었다.


기러기 끊기고 잉어 잠긴 천 리 밖에

매년 오는 소식 한 봉지 차로구나


내게 교훈이 될 좋은 글이 생각나면 아내의 옛 치마폭에 적어 길이 후손에게 남겨줄 수 있을까? 연구하고 도전해 볼 일이다.

(2015. 10. 29.)


* 신유사옥 : 1801년(순조 2년) 1월 26일에 일어난 천주교도 박해 옥사로 이승훈, 정약종 등 신자 100여 명이 처형되고, 권철신, 이가환 등이 옥사했으며, 정약전, 정약용 등 400여 명이 유배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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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피첩(霞帔帖)과 매조도(梅鳥圖)

  저 남녘땅 강진 백련사는 갈 때마다 늘 좋다. 찻집 만경다설(萬景茶說)에서 바라본 배롱나무, 그 너머로 펼쳐지는 강진의 바다, 다산초당(茶山艸堂)으로 넘어가는 아늑한 산길. 이 길을 두고 소설가 한승원은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했다. 그 길을 걸을 때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그림 한 폭이 생각난다. 다산이 그림을 그렸다고 하면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다산은 몇 편의 그림을 남겼다.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한 지 10년째 되던 1810년, 남양주에 있던 부인 홍씨가 다섯 폭짜리 빛바랜 치마를 다산초당으로 보내왔다. 부인 홍씨가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였다. 그 치마를 보자 깊은 곳에서 그리움이 사무쳤다. 다산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다산은 치마폭을 오려 거기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하피첩』(보물 1683-2호, 국립민속박물관 소장)과 <매조도(梅鳥圖)>(고려대박물관 소장)다.

  『하피첩』은 두고 온 두 아들을 위해 1810년 교훈이 될 만한 글을 적어 책자 형식으로 만든 3권짜리 서첩이다. 하피는 노을빛 치마라는 뜻으로, 부인이 보내준 붉은 치마를 가리킨다. 지난해 9월 한 미술품 경매에서 국립민속박물관이 7억5000만 원에 사들여 화제가 되었던 바로 그 서첩이다. 머리말을 보자.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는데 병든 아내가 다섯 폭짜리 헌 치마를 보내왔다. 그것은 시집올 때 가져온 훈염(纁袡, 시집갈 때 입는 붉은 활옷)이었다. 붉은빛은 이미 바래 담황색이 되어 서본으로 쓰기에 알맞았다. 이를 잘라 마름질하고 작은 첩을 만들어 손 가는 대로 훈계의 말을 지어 두 아들에게 전한다. 훗날 이를 보고 감회를 일으켜 어버이의 자취와 흔적을 생각한다면 뭉클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余在耽津謫中 病妻寄敝裙五幅 蓋其嫁時之纁袡 紅已浣而黃亦淡 政中書本 遂剪裁爲小帖 隨手作成語 以遺二子 庶幾異日覽書興懷 挹二親之芳澤 不能不油然感發也]

  유배 생활을 하면서 다산이 가장 걱정한 것 가운데 하나는 폐족(廢族)이었다. 자신과 자신의 형들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된다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을까. 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두 아들 학연과 학유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 아들에게 늘 근면과 수양, 학문을 독려하는 편지를 보냈고 이렇게 『하피첩』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이 글은 다산의 문집인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도 실려 있다. 문학작품 같은 글이 아니라 짧은 머리말 글이지만 오랜 세월 다산의 마음이 전해지면서 고전 같은 분위기로 다가온다.

  『하피첩』을 만들고 3년 뒤인 1813년 다산은 남은 치마폭을 오려 딸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 <매조도>로 불리는 이 그림은 참 단순해 보인다. 매화꽃 핀 나뭇가지에 참새 두 마리…. 하지만 사연을 들여다보면 그 애잔함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다산은 그림 아래쪽에 시 한 편을 적었다.

     <매조도(梅鳥圖)>(고려대박물관 소장)



저 새들 우리 집 뜰에 날아와
매화나무 가지에서 쉬고 있네
매화향 짙게 풍기니 그 향기
사랑스러워 여기 날아왔구나
이제 여기 머물며
가정 이루고 즐겁게 살거라
꽃도 이미 활짝 피었으니
주렁주렁 매실도 열리겠지

翩翩飛鳥
息我庭梅
有烈其芳
惠然其來
爰止爰棲
樂爾家室
華之旣榮
有蕡其實

  이어 그 옆에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도 함께 써넣었다.

  강진에서 귀양살이한 지 몇 해 지나 부인 홍씨가 해진 치마 6폭을 보내왔다. 너무 오래되어 붉은색이 다 바랬다. 그걸 오려 족자 네 폭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이 작은 그림을 그려 딸아이에게 전하노라.[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敝裙六幅 歲久紅渝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爲小障 以遺女兒]

  이 사연은『하피첩』의 머리말과 흡사하다. 부인이 보내온 해진 치마, 그걸 오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던 다산. 유배 전부터 치마를 오려 표지 장정으로 사용하기를 즐겨했던 다산이었지만, 그럼에도 『하피첩』과 <매조도>엔 유배객의 쓸쓸하고 곤궁한 삶이 그대로 전해온다. 곤궁한 삶 때문인지 그리움은 더욱 진하게 묻어난다. 다산은 아홉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여섯을 어린 나이에 병으로 잃고 두 아들과 딸 하나만 남았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 갈 때, 막내 딸아이는 겨우 여덟 살이었다. 아비로서 다산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여덟 살짜리 딸을 남겨 두고 기약도 없이 이어지는 유배생활. 그런데 때마침 얼마 전 그 딸이 출가를 했다. 아비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도 딸아이는 잘 커서 혼인까지 했다. 미안하고 고맙고, 다산의 가슴은 미어지고 또 미어졌을 것이다. 다산은 그런 마음을 담아 이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보면, 매화와 참새는 참 맑으면서 처연하다. 참새는 얼마 전 출가한 딸의 부부를 상징하는 것 같다. 먼 데를 바라보는 참새의 모습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인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딸의 모습이 그렇지 않았을까. 그 그리움은 곧 딸에 대한 아버지의 그리움이기도 하다. 애틋한 부정(父情)이다. 매화와 새 그림은 다소 처연하지만, 시의 메시지는 희망적이다. 딸 부부가 매화향 가득한 집에서 자식 잘 낳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기 때문이다. ‘너무 오래되어 붉은 색이 다 바랬다[歲久紅渝]’는 표현에선 한없이 처연해지는데, ‘이제 여기 머물며 가정 이루고 즐겁게 살거라[爰止爰棲樂爾家室]’는 표현에선 끝내 가정의 화목을 꿈꾸게 된다. 그 대비 또한 오래오래 머리에 남는다.

  < 매조도>의 글씨체도 인상적이다. 약간 기우뚱한 여성적 분위기의 서체는 이 그림의 또 다른 매력이다. 그림과 글씨 모두 단아하고 깔끔해서 보는 이를 더 슬프게 한다.

  1813년 다산초당의 봄날 풍경은 그러했다. 한 폭의 그림처럼 시정(詩情)이 가득했다. 그 풍경을 바라본 다산의 눈이 해맑고 차분하다. 백련사에서 초당으로 오르는 길, 지금쯤 동백이 선연할 것이다.




 


 


글쓴이 : 이광표  
  • 동아일보 오피니언팀장
  • 주요 저서
    -『한국의 국보』, 컬처북스, 2014
     『한국미를 만나는 법』, 이지북스, 2013
     『명품의 탄생-한국의 컬렉션 한국의 컬렉터』, 산처럼, 2009
     『한국미술의 美』, 효형출판, 2008(공저)


blog.daum.net/namfire/8260466   구름같이 바람같이





 다산 정약용 <하피첩 > | 역사

김원동 2015.10.09 00:03

다산 정약용 <하피첩 >7억5천만원에 낙찰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시절 멀리 떨어져 있던 가족에게 보낸 서첩인 ‘하피첩’이 7억 5천만원에 낙찰됐습니다.

서울 옥션은 14일 오후 4시 서울 평창동 본사에서 경매를 실시한 고서 91점이 모두 판매됐다고 밝혔다. ‘책의 기운 문자의 향기’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이번 경매의 낙찰총액은 약 42억3000만원 입니다.

이번 경매에는 보물 제745-3호 '월인석보', 보물 제1683-2호 '하피첩', 보물 제1521호 '경국대전'을 포함한 보물 18점이 모두 거래됐다. 총 낙찰총액만 38억1500만원에 달했다. 이 보물들은 예금보험공사가 파산 저축은행으로부터 확보한 작품들이다. 문화재에 해당되므로 해외 반출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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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하피첩'은 시작가 3억5000만원에서 출발해, 7억5000만원에 낙찰됐다. '월인석보 2권 2책 권9, 권10' 역시 낮은 추정가의 2배 이상이 되는 금액인 7억3000만원에 새 주인을 찾았다. '경국대전 권3'는 1억2500만원부터 시작해 2억8000만원에 판매됐습니다.

그 외에 '주역주자본의'는 5500만원,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 외 19점은 1800만원, '한산시 3종'은 170만원에 낙찰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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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업적

  • 본관 나주. 자 미용·송보. 초자 귀농. 호 다산·삼미·여유당·사암·자하도인 탁옹·태수 문암일인·철마산초. 가톨릭 세례명 안드레아. 시호 문도. 광주(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출생이다.

    1776년(정조 즉위) 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 및 이승훈()을 통해 이익()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에게서 서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를 거쳐 검열()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의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와 기중가설()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사건에 둘째 형 약전()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 부사직()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교난() 때 장기(鬐)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 기슭에 있는 윤박()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 묘전()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마과회통()》 《모시강의()》 《매씨서평()》 《상서고훈()》 《상서지원록()》 《상례사전()》 《사례가식()》 《악서고존()》 《주역심전()》 《역학제언()》 《춘추고징()》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등이 실려 있다.

    목민심서 :

    《목민심서》는 지방관의 윤리적 각성과 농민 경제의 발전을 다룬 것으로,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귀양 가 있는 동안 저술한 책이다. 주요 내용은 지방의 관리로서 수령이 백성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조선과 중국의 역사서를 비롯한 여러 책에서 뽑은 것들이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지방에까지 고루 미치기 어려웠기 때문에 수령들이 행정 뿐만 아니라 사법권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권한이 막강하였다. 이런 수령이 백성을 잘 다스리는 법을 목민심서는 담고 있다. 부임하는 일에서 시작해서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는 법,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하는 법, 공적인 일을 수행하는 법, 백성을 사랑하는 것, 아전들을 단속하는 법, 세금, 예절, 군사, 재판, 그리고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는 법, 그리고 퇴임하는 일을 기술하였다.

    이 책 역시 국가 재정의 기반이 되는 농민의 생산과 경제에 초점을 두었다. 수령 직무 54개조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전정(田政)으로 보고 양전에서의 각종 폐해를 지적하면서 그 개혁 방안을 전론(田論)에서 결론지었다. 정약용은 조세 관리에서 농민과 국가의 중간에서 이루어지는 협잡을 제거하자는 방향에서 개혁을 논한다. 그와 함께 그 시정책의 하나로 공물(貢物) 제한을 들고대동법의 모순 확대를 지적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 모순을 제거하는 데 제도적 개혁과 법으로의 구속을 기본으로 하지만, 국가 재정의 정비, 관료들의 절약과 청백(淸白) 사상에 따른 윤리적 제약과 함께 관리의 합리화에서도 그것을 찾고자 하였다.

    경세유표:

    원래 제목은 《방례초본(邦禮草本)》으로, 기존 정치 제도의 모순에 대한 실증적인 사례를 담았으며, 이를 개혁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吏) · 호(戶) · 예(禮) · 병(兵) · 형(刑) · 공(工)의 육전체제(六典體制)로 기술된 《주례(周禮)》와 《경국대전》의 체제를 본받아, 각 전(典)을 천관이조(天官吏曹) ·지관호조(地官戶曹) ·춘관예조(春官禮曹) ·하관병조(夏官兵曹) ·추관형조(秋官刑曹) ·동관공조(冬官工曹) ·천관수제(天官修制) ·지관수제(地官修制) ·춘관수제(春官修制) ·하관수제(夏官修制) 등으로 서술하였는데, 각각에 정치 ·경제 및 사회 사상을 혼합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육전체제의 형(刑)과 공(工)에 해당하는 추관수제와 동관수제는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있다.

    경세유표는 서경(書經)과 주례의 이념을 표본으로 하되 당시 조선의 현실에 맞도록 조정하여 정치 ·사회 ·경제 제도를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에 목표를 두고 저술하였다.

    여기에서 정약용 선생은 남인 실학자의 공통적 관심사인 토지제도의 개혁과 민생안정뿐만 아니라, 주로 북학파 실학자가 관심을 가져온 기술 발달과 상공업 진흥을 통한 부국강병의 실현 문제도 논의하였다.

    특히, 당시 사회의 모순이 집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토지문제 및 농업문제에 대해서도, <지관수제>에서 개혁의 궁극적인 목표를 자영농(自營農)의 경영을 기본으로 하는 정전제(井田制)에 두면서도 당장에 실시하는 것은 어렵다고 보아, 우선 첫 단계로 부분적인 개혁론이라 할 수 있는 정전의(井田議)를 제시하였다. 즉, 정전제는 토지를 정자(井字)로 구획하여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면적을 계산하여 사전(私田)과 공전(公田)의 비율을 9 : 1로 하거나 수확량의 9분의 1만 세금으로 납부하게 하는 제도임을 설명하고, 한국에서 정전제를 실시할 수 있는 가능성과 실현방법을 제시하였다. 또한 <지관수제>에서는 부세제도의 개혁안을 제시하여 농민과 토지에만 국가의 부세가 편중되는 현실을 비판하고, 모든 산업에 과세할 것을 주장하였다.

  • 정약용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같혀 죽었을 때에 태어난 조선의 실학자이다.

    정약용은 아버지 정재원에서 학문을 배우고 성균관(지금의 대학)에 들어가6년후 과거에서 장원을 한 뒤 정조와의 만남을 가지게됨.

    중요한 내용은 화성을 건축한 것인대, 원래는 공사기간을 10년으로 잡았지만 정약용은 녹로, 유형거, 등의 수레와 잘 아는 거중기를 발명하여 2년8개월로 줄인 것도 정약용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과학적인 설계를 거친 화성은 유네스코로 지정되었다.

    정약용은 그 후 암행어사로 활동하면서 여러 탐관오리들을 잡아내었다. 그러나 정순왕후가 권력을 잡을때 천주교 신자도로 귀양을 갔지만 학문을 갈고 닦으면서 목민심서, 흠흠신서,삼미자집등의 책을 지은 조선의 대학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

    어릴 때부터 시재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 묘전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마과회통》 《모시강의》 《매씨서평》 《상서고훈》 《상서지원록》 《상례사전》 《사례가식》 《악서고존》 《주역심전》 《역학제언》 《춘추고징》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등이 실려 있다

    관리로서의 업적

    일단 대표적으로 수원화성을 쌓을때 거중기를 발명하여 성을 훌륭히 지어낸 것...

    학자로서의 업적

    18년간 전라도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에서 위에서 나오는 책 목민심서... 등 500여권을 지었고 이것이 후세에 전해져 큰 학문적업적을 이루었다는 것.

    2.본받을점

    다산 정약용 선생은 남인계열의 중농주의 실학자로 뛰어난 학문과 인품으로 정조의 각별한 총애와 신임을 받았고 수원화성을 쌓을 때, 인원과 비용을 절감한 거중기를 고안하였고 정조가 모후인 혜경궁 홍씨와 함께 수원화성으로 행차를 할 때! 쓰인 배다리를 설계하기도 하였고 지방에서는 훌륭한 목민관으로 활동하였고 암행어사의 신분으로는 어려운 백성들의 삶을 살피고 부패한 탐관오리를 적발하기도 하였습니다.

    노론계열에서 진보적이고 상공업 진흥을 중요시하고 청과의 교역을 통해서 청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북학파라고 불리는 박제가 등의 중상주의 실학자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고 정조가 승하 한 후에는 노론세력들이 세력을 잡고 안동김씨 등의 외척세력들이 권력을 잡고 세도정치를 행할 때는 유배지에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의 책을 저술하였고 아버지로써 자녀 교육에도 신경을 썻습니다.

    조선후기에 중농주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은 기예론을 통해서 기술을 발전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해서 청의 기술을 수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고 유배지에서의 저술활동을 통해서 실학을 집대성 하였고 토지제도로는 여전제를 주장하였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한 평가는 나라의 관리로써 훌륭했고 학자로써 뛰어난 학문을 가져고 자녀의 훌륭한 아버지 였다고 생각 합니다.

    정약용은 실학의 대가로서 당시 실학을 정리하고 집대성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나라 실학의 대표주자로 떠오르게 된다. 정약용이 한 업적은 정말 많다.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라고 불리는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보면 모두 공통점이 있다. 다 실학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전통적으로 중농학파였다. 즉 농사를 중시하는 학자였는데, 이러한 그는 북학파라고 불리는 중상학파 또한 포용하였다. 결과적으로 당시 실학을 모두 아우름으로서 그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한다. 그리고 서학 연구 및 한국사에도 관심을 가지고 과학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대표적인 업적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학사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중기의 발명과 수원성의 건립을 든다. 이러한 것은 당시 실용적인 학문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밖에도 목민심서 같은 훌륭한 책을 펴내어서 목민관, 즉 지방수령 등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 지에 대해서도 잘 기술해 놓았다.

    젊을 때 정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아 중앙 요직을 두루거치고

    전도 양양한 젊은 관료였지만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전라도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그의 아내가 천주교신자였다는

    죄목이고.관료생활을 할 때 정조가 화성(=수원성)을 짓습니다. 아시는대로 정조는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아들로 왕이 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할아버지 영조에게 죽음을 당한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지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장헌세자의 묘가 현륭원인데

    수원에 있었지요. 정조는 자주 아버지의 묘를 참배했다.

    수원성 축조에는 약 88만 냥의 국고 예산이 소요되어

    요즘가치로 약 500억원 정도의 돈이 들었는데 이는 순수 경비만이고

    무상으로 조달한 인건비, 자재비 등은 포함되지 않은 수치이다.

    정약용은 도르레 원리를 이용한 거중기를 발명하여

    바로 수원성 축조에 투입합니다. 그 덕분에 약 4만 냥의

    경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약용의 업적은 그러나 그가 귀양살이를 하던 중에

    수많은 저서를 집필하면서 학자로서의 성취를 이룹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무척 빈한하고 불행한 귀양생활을 했지만.

    그의 저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이 있다.





 












blog.daum.net/wondong7125/230   풍악서당 남해






애잔함을 느끼게 하는 다산의 200여년 전의 사랑 이야기~ | ♡자유*게시판°♡━

김영란 |                 2015.03.25. 07:55


 

 

 

 

 

 

 

 

 

강진다원

금릉경포대계곡

다산초당

무위사(국보 제 13호)

 

 

백련사(월출산 국립공원내에있다)

 

마량항

 




시인 영랑 김윤식 선생의 생가

 

애잔함을 느끼게 하는 200여년 전의 사랑 이야기~

 

15세에 한 살 연상인 풍산 홍씨(1761-1838)와 결혼한 다산은 공교롭게도 결혼 60주년이 되는 회혼일에 먼저 눈을 감고 홍씨는 이년 후인 1838년에 남편 다산을 뒤따른다.

10대 중반의 철없던 나이에 결혼하여 힘든 과거공부와 분주한 벼슬살이로 인해 부부간의 애틋한 정을 제대로 나누지도 못한 다산은 정치적 반대파의 모함으로 인해 한창 나이인 사십에 유배를 떠나며 사랑하는 아내와 눈물의 생이별을 하게 된다. 죄인의 신분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며 기약없는 머나먼 귀양길을 떠나는 남편을 아내는 세 살짜리 막내아들을 품에 안고 눈물로 전송한다.

한참 말을 배우며 재롱을 피우던 이 귀여운 막내가 네 살에 요절하였다는 소식에 자신의 애절한 슬픔은 뒤로하고 제 뱃속에서 낳은 애를 흙구덩이 속에 집어넣는 애미의 애통한 심정을 헤아려 정성껏 보살피기를 머리카락 하나의 틈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두 아들과 며느리에게 부탁한다.

홍씨 부인은 시어머니(다산의 의붓어머니로 다산의 부친 정재원의 4번째 부인)를 모시며 지아비없는 허전한 집을 지키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다산이 장모의 죽음을 슬퍼하며 생전의 공덕을 칭송하기를 "찾아오는 손님 머리 잘라 술상 차렸고 늙으신 시부모님께 방아를 찧어 즐겁게 해드렸다지"했는데 친정 어머니의 그 고운 심성을 홍씨 부인이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유배지에서 여섯폭 다홍치마의 위안

 

사랑하는 지아비를 강진으로 유배보내고 자식들을 키우며 그리운 정을 삭이던 홍씨는 누에치기를 좋아하는 자신에게 시( 珍詞七首贈內)를 지어줄 정도로 다정하였던 남편에게 시집올 때 입고 왔던 여섯 폭 다홍치마를 보낸다. 10여 년의 유배생활에 몸과 마음이 지쳤을 지아비가 장롱 속 깊이 간직했던 빛바랜, 하지만 신혼시절의 추억이 스며있는 다홍치마를 보고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을까?

이에 다산은 그 비단치마를 재단하여 두 아들에게 교훈의 글을 써주고 외동딸에게는 매화에 새를 그린 매조도(梅鳥圖)를 선물한다.

지금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매조도는 그림 아래쪽으로 다음과 같은 4언율시와 그리게 된 사연이 적혀있다.



파르르 새가 날아 뜰앞 매화에 앉네(翩翩飛鳥 息我庭梅)

매화 향기 진하여 홀연히 찾아왔네(有列其芳 惠然其來)

여기에 둥지틀어 너의 집을 삼으렴(亥止亥樓 樂爾家室)

만발한 꽃인지라 먹을 것도 많단다(華之旣榮 有--其實)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지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부인 홍씨가 헌 치마 여섯 폭을 보내왔다.
이제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바랬기에 가위로 잘라 네 첩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준다.
(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敞裙六幅 歲久紅 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 爲小障 以遺女兒)


은은한 매화향기에 취해 쓸쓸한 유배생활의 위안을 삼고 있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한 마리 새가 정원의 매화나무에 앉는 것을 보고 다산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은 부인이 혹 새가되어 날아온 것은 아닐까? 바다 건너 흑산도에 계시는 약전 형님이 보고싶은 마음을 새에게 대신 보내지는 않았을까? 찾아오는 이 없는 쓸쓸한 유배객을 위로하려 먼저 가신 아버님이 하늘에서 보낸 귀한 친구인가? 지필묵을 꺼낸 다산은 몇 해전 부인이 인편에 보내온 시집올 적 입었던 색바랜 다홍치마를 꺼내 그 위에 애절한 마음을 그리고 안타까운 심정을 시로 적어 외동딸에게 선물한다.

 

▲다산 부부의 시공을 초월한 사랑

 

고향 마재 마을을 지키며 남편을 손꼽아 기다리던 홍씨에게 지아비의 해배소식은 맨 살을 꼬집어보아야만 믿길 정도로 거짓말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립문에 들어서는 남편의 모습에 부인은 고개 돌려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떠날 때 나이 사십의 건장한 청년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깊이 패인 주름살에 백발이 성성한 초로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자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남편만은 덜 늙었기를 바랐을 것이다.

유배지에서 못다 한 저술작업을 마무리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던 다산은 60년 전, 15살의 나이로 불그레한 볼에 꽃가마 타고 온 새색시를 맞던 그 날 숨을 거둔다. 죽기 전 다산은 얼마 남지 않은 회혼일에 맞춰 미리 시(回 禮)를 하나 짓는다.

육십 평생 바람개비 세월이 눈앞을 스쳐 지나는데
무르익은 복숭아 봄빛이 마치 신혼 때 같아라.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 60년 동안 고락을 같이 한 이팔청춘 곱던 얼굴의 여인을 주름살만 가득한 할머니로 만든 무심한 세월에 대한 투정이 가볍게 묻어 있다.

 



아름다운 여행   다산초당

  10년 남짓한 세월 동안 초당에 오르는 길은 많이도 변했다. 초당을 찾은 것은 지난 95년 여름 이후 두 번째다. 정류장에서 마을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농가에서 키우는 닭들이 보이고, 대나무도 보이는 시골마을의 풍경이 있었으나 이제는 관광지라는 느낌이 강하다.

마을의 끝자락에는 찻집과 식당이 들어서고 새로 건물을 짓는 공사도 한창이다. 하긴 정약용 선생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고, 남도 여행을 하는 사람치고 다산초당을 빼놓는 사람이 없을테니 당연한 이치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세월에 대한 나그네의 섭섭함이 담긴 심술은 어쩌지 못하겠다.

나는 산의 초입에 있던 찻집을 찾았으나 폐가가 되었다. 그 집 안방에 앉아 차를 마시고 방명록에 글을 남기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하긴 "지아비와 자식새끼 데리고 잠시 쉬었다 갑니다"와 같은 문구가 있던 그 방명록을 읽어가며 차를 마시던 친구들도 세월의 그림자만큼 참 많이도 멀어졌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찻집을 운영하던 이는 해남윤씨 문중 사람으로 집에다는 공부를 한다고 거처를 마련해 놓고는 어느날부터 찻집을 열어 집안에서 혼이 난 이후 빈집이 되었다고 한다. 초당을 찾는 나그네에게 따뜻한 차 한잔을 대접하며 말벗이라도 되었던 그 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폐가가 된 찻집을 둘러본 나는 초당으로 향하는 산길을 올랐다. 돌계단 주위로 대나무, 삼나무, 소나무, 동백나무가 조화롭게 울창하다. 이 길은 세월을 거슬러 오르는 길이다. 조금 더 오르면 10년 전 나를 만날 수 있는 길이며 조금 더 오르면 200년 전 정약용을 만날 수 있는 세월의 길이다. 어느새 나의 발걸음은 10년 전 내 발걸음을 좇아가고 있다. 앞으로 가고 있는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고 호흡을 느낀다.



▲ 초당 오름길에 있던 찻집은 이제 폐가가 되어 있다


   강진으로 유배되어 주막집 노파의 뒷방, 대흥사 말사인 고성사, 제자 이청의 집에서 기숙하던 정약용은 유배 8년째가 되던 해에 다산초당으로 이주하여 거기서 유배가 풀린 1818년까지 10년 동안 기거한다.

정약용의 어머니는 공재 윤두서의 손녀로 정약용은 해남윤씨의 먼 일가가 된다. 초당은 원래 귤동마을 해남윤씨인 윤단의 초당으로 그의 아들들이 정약용을 초빙한다. 귀양살이가 여러 해 지나면서 삼엄했던 관의 눈길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자 주위에 자연히 제자들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숲이 울창한 가파른 산길이 좀 지루하다 싶으면 다산초당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다산(茶山)은 차나무가 많던 만덕산의 별명으로 정약용의 호가 여기에서 유래한다. 정약용은 초당의 좌우에 동암과 서암을 짓고 주로 동암에 기거하였으며 서암에는 제자들이, 초당은 서당으로 사용하였다.


▲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가 복원한 초당


   초당 앞으로는 넓은 바위가 있다. 어릴 적 소꿉장난이나 딱지치기를 하던 앞마당 바위처럼 자리하고 있다. 가끔 방문객들이 걸터앉기도 하는 그 바위는 정약용이 솔방울을 태워 차를 달이던 부뚜막이다.

초당의 서편으로는 샘이 있으며 샘 뒤편 바위에는 '정석(丁石)' 두 글자를 새긴 바위가 있다. 동편으로는 물을 끌어와 작은 폭포를 만들고 네모진 연못에 둥근 섬을 만들었다. 연못 뒤에는 꽃나무를 심었고 초당과 서암 사이에도 단을 쌓고 채소를 길러 먹었다. 단아하고 곧은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초당, 동암, 서암은 모두 초가지붕이었으나 폐허가 된 옛 터에 초가대신 기와를 얹어 복원한 것이다. 초당에 걸린 '茶山草堂', 동암의 '寶丁山房' 현판은 김정희의 글씨를 새긴 것으로 '다산초당' 현판은 집자를 한 것이고, '보정산방'은 김정희가 직접 쓴 것이다. 동암에는 '보정산방'외에도 '다산동암'이라는 현판도 함께 걸려있다.

▲ 정약용이 기거하던 동암을 복원한 모습


   동암 앞을 지나치면 봉우리를 넘어 백련사로 이어지는 숲길이 펼쳐진다. 백련사로 가는 숲길은 혜장선사와 정약용이 유불(儒佛)의 선을 넘어 학문과 사상, 정을 나누던 길이다. 백련사에 기거하던 혜장선사를 만난 것은 읍내 주막집에서 기거했을 때로 대화할 만한 상대도 학문을 나눌 상대도 없던 시절이다.

혜장을 통해 학문적 자극과 공허함을 메우고 차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초의(草衣)선사와도 교류하게 되었다. 혜장선사는 정약용보다 열 살 연하로 불교는 물론, 다도와 유학, 시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혜장 선사에게 다도를 배운 후 유배지 생활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으리라.

혜장선사와의 인연이 있는 백련사 가는 숲길 입구 산마루에는 정약용이 구강포 앞바다와 흑산도로 귀양 가 있던 둘째 형 정약전을 그리며 바다를 내다보던 곳에 천일각이 서 있다. 천일각은 정약용이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외로움을 달래던 터에 근래 새롭게 세운 누각이다.

신발을 벗고 천일각에 오르니 넓게 펼쳐진 바다의 시원함처럼 답답하던 마음 또한 탁트임이 느껴진다. 잠시 시선과 마음을 고정한 채 그 자리에 있자니 "어화둥둥 내 사위야~"로 시작하는 노래 가락이 흘러든다.

내일이면 사위가 오는데 얼른 보고 싶다고 하는 광주서 온 아주머니의 노랫가락이다. 오랜만에 보는 사위도 저토록 반가울 것인데 귀양길에 헤어져 평생 만나지 못했던 정약용, 정약전 형제간의 애틋함은 어땠을까?

▲ 정약용이 그리움으로 서 있던 산마루에는 천일각이 자리한다


   전에 가보았던 찻집에 대한 추억이 너무 깊어 초당 내려오는 길에 새롭게 생긴 찻집을 찾아 차 한잔을 마셨다. 마셔도 마셔도 목마름이 생기는 것은 지난 날 차와 인정을 팔던 찻집이 그리워서 이며, 친구들과 함께한 그 여행길이 추억되어서 그러하며, 또한 옛사람이 그리워서일게다.

▲ 새롭게 들어선 찻집, 나는 아린 추억의 상처를 가셔내고 다시금 추억을 만든다



감성여행은 강진으로...


 강진군이 지역의 구석구석을 알리는‘내나라 여행 박람회’에서 홍보관을 운영해 감성여행 1번지로 주목을 끌었다.

지난 12일부터 15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최된 내나라여행 박람회는 300여 단체가 500여개 부스를 운영하며

약 10만명이 다녀가는 대한민국 최대 여행 박람회로 강진군은 홍보관을 열어 감성여행 1번지와 청자축제를 알렸다.

강진군 홍보관에서는 다산초당과 백련사, 사의재, 무위사, 전라병영성, 영랑생가, 향기의 섬 가우도 등 등 유서 깊은 문화유산과 관광명소를 안내했으며 특히 천년의 비색을 자랑하는 강진청자의 우수성을 알리고 체험의 기회를 주기 위해 청자 물레체험 행사를 진행해 관람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군은 매년 5월, 10월 지정된 기간에 초·중·고교 임시방학과 기업, 공공기관 임직원이 휴가를 쓸 수 있도록 하는 관광주간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관광객들의 유입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며 그에 맞춘 천혜의 자연환경과 관광명소를 가지고 있는 강진군 감성여행 1번지의 매력을 선보이는 것에 중점을 둔 홍보를 펼쳤다.

또한 (재)강진군문화관광재단 임석 대표이사는 관광 실무 노하우를 살려 한국대표여행사연합 및 국내여행사연합회를 방문 2개 여행사연합회가 현장에서 강진군 감성여행 할인이벤트 상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권장해 3월 7일자 강진군 방문 상품이 현장에서 매진되는 성과를 올렸다.  

강진원 강진군수는 “강진군은 남도답사 1번지라 불릴만큼 수려한 문화유산과 남도의 먹거리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곳이자 다산과 영랑, 농어촌 체험을 통해 감성을 채울 수 있는 여행지이다.”며, "앞으로도 대한민국 어느 지역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풍부한 관광자원을 갖고 있는 강진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겠다" 고 밝혔다.


cafe.daum.net/moohoomo/Jwiz/1887  자운회[자원봉사를 실천하는 고운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