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11. 01:15ㆍ다산의 향기
다산의 하피첩 이야기 / 김현준 안골은빛회원창작수필
다산의 하피첩 이야기 얼마 전 서울옥션에서 특별한 경매가 이루어졌다. 예금보험공사가 파산한 부산저축은행 등으로부터 받은 고서적 18점에 대한 경매였다. 정약용의 필적 하피첩이 최고가인 7억5천만 원으로 국립민속박물관에 낙찰되었다. 보물 1683-2호인 하피첩霞帔帖은 다산 정약용이 1810년 귀양지인 전남 강진에서 부인이 보내준 치맛감에 학연, 학유 두 아들을 위해 쓴 편지를 모은 것이다. 본래 네 첩이었으나 하나는 사라지고 세 첩만이 전한다. 하피첩은 김민영 전 부산저축은행 개인 컬렉션에 나온 문화재로, 추정 가격은 3억5천만 원에서 5억천만 원이었고, 2억5천만 원에서 경매가 시작되었다. 경기도 양평에 있던 정약용의 아내 홍혜완이 바래고 해진 치맛감 여러 폭을 귀양지에 부쳐오자 다산은 두 아들에게 교훈이 될 구절을 직접 짓고 썼다. 그 치마는 홍 씨가 시집올 때 입고 온 붉은 치마였는데, 오래되고 빛이 바래어 노을빛 치마, 하피가 되었다. 다산은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에 유배된 몸이었다. 병든 아내 치마를 보내 / 천 리 먼 길 애틋한 마음 부쳤네 오랜 세월 붉은빛이 바래니 / 만년에 서글픔 가늘 수 없네 마름질로 작은 서첩을 이루어 / 자식들 일깨우는 글을 적는다 부디 부모 마음을 잘 헤아려 / 종신토록 가슴 깊이 새기려무나 집안의 경제적 운영에 대한 조언과 인간답게 사는 훈계의 내용을 담아 좌우명으로 삼기를 바랐다. 서첩은 정약용의 전형적인 행초行草서풍을 잘 보여주며, 세 번째 첩에 실린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는 다른 서첩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다. 얼마 뒤 남은 치맛자락을 다시 붙여 딸의 결혼을 축하하는 글과 그림을 그려 족자로 만들어 보냈다. 아버지와 헤어질 때 딸은 여덟 살이었다. 마음속으로만 그리던 딸이 21살이 되어 부모의 품을 떠나 시집을 간다고 했다. 그 화조도花鳥圖에는 ‘꽃이 풍성하니 열매도 많이 열릴 거야’라고 썼다. 이 하피첩은 6․25 전쟁 통에 사라져 기록만 전해왔다. 다산의 종손 정향진이 수원역에서 열차에 오르다 분실한 것이다. 뒤늦게 하피첩을 잃어버린 것을 깨달은 정 씨는 실신할 정도로 애통했다고 한다. 2004년 수원 어느 공사장에 파지를 수집하러 온 노인이 있었다. 그가 가져온 수레에 든 고서를 건물주가 파지 대신 넘겨받았는데, 그 속에 하피첩이 들어있었다. 건물주는 2년 뒤 TV 고미술품 감정 프로그램에 그 물건을 내놓았고, 감정 결과 정약용의 하피첩임이 밝혀졌다. 감정가는 1억 원이었다. 당시 감정위원이었던 고미술 전문가 김영복은 책을 보는 순간 충격을 받아 ‘덜덜 떨렸다.’고 말한 적이 있다. 국보와 보물이 개인 소장품인 경우 소유자 변경 신고만 제대로 하면 사고팔 수 있다. 단 국외에 반출해서는 안 된다고 문화재보호법에 명시되어 있다. 고미술계에서는 영영 사라질 뻔한 문화재가 기적같이 구출된 이야기들이 전한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겸재謙齋 화첩도 그렇다. 1934년 한 골동품 거간꾼이 용인의 부잣집 별장에 갔다. 사랑방 아궁이 앞에 쌓인 종이뭉치 속에서, 비단으로 꾸민 책자를 발견하고 아찔했다. 화가 정선이 금강산을 여행하고 그린 작품을 모은 화첩이었다. 어차피 불쏘시개를 할 것이니 자기에게 팔라고 청하여 골동품상은 쌀 한 가마니 값을 주고 샀다. 그 뒤 거간꾼은 몇십 배의 이문을 남기고 문화재 수장가 전형필에게 팔았다. 다산 선생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한 게 무슨 죄가 될까? 자신을 믿어준 선대왕 정조를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아내 걱정, 자식 걱정으로 무수한 밤을 뜬 눈으로 새웠을 것이다. 다산은 처음 경상도 영일 장기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긴 뒤 동문 밖 주막집 노파의 인정으로 거처할 방 한 칸을 얻었다. 동네 아이들을 모아 서당을 열고 호구를 이었으며, 차츰 문인, 유학자들과 교류했다. 18년의 긴 유배생활을 다산은 헛되이 보내지 않고, 503권 182책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중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는 대표적인 저서다. 다산은 아내의 치마폭을 보며 아내의 사랑에 눈물지었다. 그에게도 꽃다운 신혼의 시절이 있었고, 예쁜 분홍치마를 입은 신부가 떠올랐다. 그 치마폭을 오래 간직하고자 서첩을 만들었고, 자손에게 교훈이 될 글을 지었다. 가을밤이 짧게 새었다. 그것이 후손에게 전해지다 혼란한 시대, 이리저리 굴러다녔으리. 아내 홍 씨는 어떤 마음으로 치마를 보냈을까? 영원한 이별을 고한 것이라는 설과 자신을 잊지 말라는 정표로 해석하기도 한다. 최근 국문학자 임형택이 연작시 <남당사南塘詞> 한 편을 발굴했다. 작자는 강진의 문인으로 짐작되는데, 그가 다산의 강진 여인이었던 ‘홍임이 모’가 되어 시를 썼다. 천고에 빛나는 문장 세상에 특출한 재주 만금을 주고도 한번 만나기 어렵거니 갈가마귀 봉황과 어울려 짝이 될 수 있으랴 미천한 몸 복이 넘쳐 재앙이 될 줄 알았지요. 홍임이 모는 22세에 청상이 된 표 서방의 딸로, 유배 시절 정약용의 소실이었다. 다산초당에 살았던 10여 년 동안 그녀는 다산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18년간의 유배가 풀려 경기도 마현으로 돌아갈 때 홍임이 모는 딸과 함께 낭군을 따라나섰다. 그러나 그녀는 본댁 홍 씨에게 내침을 당한 뒤 강진 다산초당으로 내려가 홀로 딸을 키우며 살았다고 전한다. 매년 새로 돋는 찻잎으로 정성스레 차를 만들어 마현으로 보내곤 했다. 다산은 시를 한 수 지었다. 기러기 끊기고 잉어 잠긴 천 리 밖에 매년 오는 소식 한 봉지 차로구나 내게 교훈이 될 좋은 글이 생각나면 아내의 옛 치마폭에 적어 길이 후손에게 남겨줄 수 있을까? 연구하고 도전해 볼 일이다. (2015. 10. 29.) * 신유사옥 : 1801년(순조 2년) 1월 26일에 일어난 천주교도 박해 옥사로 이승훈, 정약종 등 신자 100여 명이 처형되고, 권철신, 이가환 등이 옥사했으며, 정약전, 정약용 등 400여 명이 유배당했다. |
cafe.daum.net/angoleunbitessay/axzY/405 안골은빛수필문학회
하피첩(霞帔帖)과 매조도(梅鳥圖) | |||
저 남녘땅 강진 백련사는 갈 때마다 늘 좋다. 찻집 만경다설(萬景茶說)에서 바라본 배롱나무, 그 너머로 펼쳐지는 강진의 바다, 다산초당(茶山艸堂)으로 넘어가는 아늑한 산길. 이 길을 두고 소설가 한승원은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했다. 그 길을 걸을 때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그림 한 폭이 생각난다. 다산이 그림을 그렸다고 하면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다산은 몇 편의 그림을 남겼다. ▶ <매조도(梅鳥圖)>(고려대박물관 소장)
이어 그 옆에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도 함께 써넣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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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daum.net/namfire/8260466 구름같이 바람같이
다산 정약용 <하피첩 > 역사
다산 정약용 <하피첩 >7억5천만원에 낙찰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시절 멀리 떨어져 있던 가족에게 보낸 서첩인 ‘하피첩’이 7억 5천만원에 낙찰됐습니다.
서울 옥션은 14일 오후 4시 서울 평창동 본사에서 경매를 실시한 고서 91점이 모두 판매됐다고 밝혔다. ‘책의 기운 문자의 향기’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이번 경매의 낙찰총액은 약 42억3000만원 입니다.
이번 경매에는 보물 제745-3호 '월인석보', 보물 제1683-2호 '하피첩', 보물 제1521호 '경국대전'을 포함한 보물 18점이 모두 거래됐다. 총 낙찰총액만 38억1500만원에 달했다. 이 보물들은 예금보험공사가 파산 저축은행으로부터 확보한 작품들이다. 문화재에 해당되므로 해외 반출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경매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하피첩'은 시작가 3억5000만원에서 출발해, 7억5000만원에 낙찰됐다. '월인석보 2권 2책 권9, 권10' 역시 낮은 추정가의 2배 이상이 되는 금액인 7억3000만원에 새 주인을 찾았다. '경국대전 권3'는 1억2500만원부터 시작해 2억8000만원에 판매됐습니다.
그 외에 '주역주자본의'는 5500만원,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 외 19점은 1800만원, '한산시 3종'은 170만원에 낙찰됐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업적
본관 나주. 자 미용·송보. 초자 귀농. 호 다산·삼미·여유당·사암·자하도인 탁옹·태수 문암일인·철마산초. 가톨릭 세례명 안드레아. 시호 문도. 광주(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출생이다.
1776년(정조 즉위) 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 및 이승훈()을 통해 이익()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에게서 서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를 거쳐 검열()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의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와 기중가설()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사건에 둘째 형 약전()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교난() 때 장기(鬐)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 기슭에 있는 윤박()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 묘전()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마과회통()》 《모시강의()》 《매씨서평()》 《상서고훈()》 《상서지원록()》 《상례사전()》 《사례가식()》 《악서고존()》 《주역심전()》 《역학제언()》 《춘추고징()》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등이 실려 있다.
목민심서 :
《목민심서》는 지방관의 윤리적 각성과 농민 경제의 발전을 다룬 것으로,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귀양 가 있는 동안 저술한 책이다. 주요 내용은 지방의 관리로서 수령이 백성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조선과 중국의 역사서를 비롯한 여러 책에서 뽑은 것들이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지방에까지 고루 미치기 어려웠기 때문에 수령들이 행정 뿐만 아니라 사법권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권한이 막강하였다. 이런 수령이 백성을 잘 다스리는 법을 목민심서는 담고 있다. 부임하는 일에서 시작해서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는 법,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하는 법, 공적인 일을 수행하는 법, 백성을 사랑하는 것, 아전들을 단속하는 법, 세금, 예절, 군사, 재판, 그리고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는 법, 그리고 퇴임하는 일을 기술하였다.
이 책 역시 국가 재정의 기반이 되는 농민의 생산과 경제에 초점을 두었다. 수령 직무 54개조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전정(田政)으로 보고 양전에서의 각종 폐해를 지적하면서 그 개혁 방안을 전론(田論)에서 결론지었다. 정약용은 조세 관리에서 농민과 국가의 중간에서 이루어지는 협잡을 제거하자는 방향에서 개혁을 논한다. 그와 함께 그 시정책의 하나로 공물(貢物) 제한을 들고대동법의 모순 확대를 지적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 모순을 제거하는 데 제도적 개혁과 법으로의 구속을 기본으로 하지만, 국가 재정의 정비, 관료들의 절약과 청백(淸白) 사상에 따른 윤리적 제약과 함께 관리의 합리화에서도 그것을 찾고자 하였다.
경세유표:
원래 제목은 《방례초본(邦禮草本)》으로, 기존 정치 제도의 모순에 대한 실증적인 사례를 담았으며, 이를 개혁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吏) · 호(戶) · 예(禮) · 병(兵) · 형(刑) · 공(工)의 육전체제(六典體制)로 기술된 《주례(周禮)》와 《경국대전》의 체제를 본받아, 각 전(典)을 천관이조(天官吏曹) ·지관호조(地官戶曹) ·춘관예조(春官禮曹) ·하관병조(夏官兵曹) ·추관형조(秋官刑曹) ·동관공조(冬官工曹) ·천관수제(天官修制) ·지관수제(地官修制) ·춘관수제(春官修制) ·하관수제(夏官修制) 등으로 서술하였는데, 각각에 정치 ·경제 및 사회 사상을 혼합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육전체제의 형(刑)과 공(工)에 해당하는 추관수제와 동관수제는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있다.
경세유표는 서경(書經)과 주례의 이념을 표본으로 하되 당시 조선의 현실에 맞도록 조정하여 정치 ·사회 ·경제 제도를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에 목표를 두고 저술하였다.
여기에서 정약용 선생은 남인 실학자의 공통적 관심사인 토지제도의 개혁과 민생안정뿐만 아니라, 주로 북학파 실학자가 관심을 가져온 기술 발달과 상공업 진흥을 통한 부국강병의 실현 문제도 논의하였다.
특히, 당시 사회의 모순이 집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토지문제 및 농업문제에 대해서도, <지관수제>에서 개혁의 궁극적인 목표를 자영농(自營農)의 경영을 기본으로 하는 정전제(井田制)에 두면서도 당장에 실시하는 것은 어렵다고 보아, 우선 첫 단계로 부분적인 개혁론이라 할 수 있는 정전의(井田議)를 제시하였다. 즉, 정전제는 토지를 정자(井字)로 구획하여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면적을 계산하여 사전(私田)과 공전(公田)의 비율을 9 : 1로 하거나 수확량의 9분의 1만 세금으로 납부하게 하는 제도임을 설명하고, 한국에서 정전제를 실시할 수 있는 가능성과 실현방법을 제시하였다. 또한 <지관수제>에서는 부세제도의 개혁안을 제시하여 농민과 토지에만 국가의 부세가 편중되는 현실을 비판하고, 모든 산업에 과세할 것을 주장하였다.
정약용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같혀 죽었을 때에 태어난 조선의 실학자이다.
정약용은 아버지 정재원에서 학문을 배우고 성균관(지금의 대학)에 들어가6년후 과거에서 장원을 한 뒤 정조와의 만남을 가지게됨.
중요한 내용은 화성을 건축한 것인대, 원래는 공사기간을 10년으로 잡았지만 정약용은 녹로, 유형거, 등의 수레와 잘 아는 거중기를 발명하여 2년8개월로 줄인 것도 정약용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과학적인 설계를 거친 화성은 유네스코로 지정되었다.
정약용은 그 후 암행어사로 활동하면서 여러 탐관오리들을 잡아내었다. 그러나 정순왕후가 권력을 잡을때 천주교 신자도로 귀양을 갔지만 학문을 갈고 닦으면서 목민심서, 흠흠신서,삼미자집등의 책을 지은 조선의 대학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
어릴 때부터 시재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 묘전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마과회통》 《모시강의》 《매씨서평》 《상서고훈》 《상서지원록》 《상례사전》 《사례가식》 《악서고존》 《주역심전》 《역학제언》 《춘추고징》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등이 실려 있다
관리로서의 업적
일단 대표적으로 수원화성을 쌓을때 거중기를 발명하여 성을 훌륭히 지어낸 것...
학자로서의 업적
18년간 전라도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에서 위에서 나오는 책 목민심서... 등 500여권을 지었고 이것이 후세에 전해져 큰 학문적업적을 이루었다는 것.
2.본받을점
다산 정약용 선생은 남인계열의 중농주의 실학자로 뛰어난 학문과 인품으로 정조의 각별한 총애와 신임을 받았고 수원화성을 쌓을 때, 인원과 비용을 절감한 거중기를 고안하였고 정조가 모후인 혜경궁 홍씨와 함께 수원화성으로 행차를 할 때! 쓰인 배다리를 설계하기도 하였고 지방에서는 훌륭한 목민관으로 활동하였고 암행어사의 신분으로는 어려운 백성들의 삶을 살피고 부패한 탐관오리를 적발하기도 하였습니다.
노론계열에서 진보적이고 상공업 진흥을 중요시하고 청과의 교역을 통해서 청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북학파라고 불리는 박제가 등의 중상주의 실학자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고 정조가 승하 한 후에는 노론세력들이 세력을 잡고 안동김씨 등의 외척세력들이 권력을 잡고 세도정치를 행할 때는 유배지에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의 책을 저술하였고 아버지로써 자녀 교육에도 신경을 썻습니다.
조선후기에 중농주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은 기예론을 통해서 기술을 발전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해서 청의 기술을 수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고 유배지에서의 저술활동을 통해서 실학을 집대성 하였고 토지제도로는 여전제를 주장하였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한 평가는 나라의 관리로써 훌륭했고 학자로써 뛰어난 학문을 가져고 자녀의 훌륭한 아버지 였다고 생각 합니다.
정약용은 실학의 대가로서 당시 실학을 정리하고 집대성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나라 실학의 대표주자로 떠오르게 된다. 정약용이 한 업적은 정말 많다.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라고 불리는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보면 모두 공통점이 있다. 다 실학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전통적으로 중농학파였다. 즉 농사를 중시하는 학자였는데, 이러한 그는 북학파라고 불리는 중상학파 또한 포용하였다. 결과적으로 당시 실학을 모두 아우름으로서 그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한다. 그리고 서학 연구 및 한국사에도 관심을 가지고 과학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대표적인 업적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학사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중기의 발명과 수원성의 건립을 든다. 이러한 것은 당시 실용적인 학문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밖에도 목민심서 같은 훌륭한 책을 펴내어서 목민관, 즉 지방수령 등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 지에 대해서도 잘 기술해 놓았다.
젊을 때 정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아 중앙 요직을 두루거치고
전도 양양한 젊은 관료였지만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전라도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그의 아내가 천주교신자였다는
죄목이고.관료생활을 할 때 정조가 화성(=수원성)을 짓습니다. 아시는대로 정조는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아들로 왕이 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할아버지 영조에게 죽음을 당한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지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장헌세자의 묘가 현륭원인데
수원에 있었지요. 정조는 자주 아버지의 묘를 참배했다.
수원성 축조에는 약 88만 냥의 국고 예산이 소요되어
요즘가치로 약 500억원 정도의 돈이 들었는데 이는 순수 경비만이고
무상으로 조달한 인건비, 자재비 등은 포함되지 않은 수치이다.
정약용은 도르레 원리를 이용한 거중기를 발명하여
바로 수원성 축조에 투입합니다. 그 덕분에 약 4만 냥의
경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약용의 업적은 그러나 그가 귀양살이를 하던 중에
수많은 저서를 집필하면서 학자로서의 성취를 이룹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무척 빈한하고 불행한 귀양생활을 했지만.
그의 저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이 있다.
blog.daum.net/wondong7125/230 풍악서당 남해
애잔함을 느끼게 하는 다산의 200여년 전의 사랑 이야기~ ♡자유*게시판°♡━
강진다원 금릉경포대계곡 다산초당 무위사(국보 제 13호)
백련사(월출산 국립공원내에있다)
마량항
시인 영랑 김윤식 선생의 생가
애잔함을 느끼게 하는 200여년 전의 사랑 이야기~
15세에 한 살 연상인 풍산 홍씨(1761-1838)와 결혼한 다산은 공교롭게도 결혼 60주년이 되는 회혼일에 먼저 눈을 감고 홍씨는 이년 후인 1838년에 남편 다산을 뒤따른다. 10대 중반의 철없던 나이에 결혼하여 힘든 과거공부와 분주한 벼슬살이로 인해 부부간의 애틋한 정을 제대로 나누지도 못한 다산은 정치적 반대파의 모함으로 인해 한창 나이인 사십에 유배를 떠나며 사랑하는 아내와 눈물의 생이별을 하게 된다. 죄인의 신분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며 기약없는 머나먼 귀양길을 떠나는 남편을 아내는 세 살짜리 막내아들을 품에 안고 눈물로 전송한다. 한참 말을 배우며 재롱을 피우던 이 귀여운 막내가 네 살에 요절하였다는 소식에 자신의 애절한 슬픔은 뒤로하고 제 뱃속에서 낳은 애를 흙구덩이 속에 집어넣는 애미의 애통한 심정을 헤아려 정성껏 보살피기를 머리카락 하나의 틈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두 아들과 며느리에게 부탁한다. 홍씨 부인은 시어머니(다산의 의붓어머니로 다산의 부친 정재원의 4번째 부인)를 모시며 지아비없는 허전한 집을 지키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다산이 장모의 죽음을 슬퍼하며 생전의 공덕을 칭송하기를 "찾아오는 손님 머리 잘라 술상 차렸고 늙으신 시부모님께 방아를 찧어 즐겁게 해드렸다지"했는데 친정 어머니의 그 고운 심성을 홍씨 부인이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유배지에서 여섯폭 다홍치마의 위안
사랑하는 지아비를 강진으로 유배보내고 자식들을 키우며 그리운 정을 삭이던 홍씨는 누에치기를 좋아하는 자신에게 시( 珍詞七首贈內)를 지어줄 정도로 다정하였던 남편에게 시집올 때 입고 왔던 여섯 폭 다홍치마를 보낸다. 10여 년의 유배생활에 몸과 마음이 지쳤을 지아비가 장롱 속 깊이 간직했던 빛바랜, 하지만 신혼시절의 추억이 스며있는 다홍치마를 보고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을까? 이에 다산은 그 비단치마를 재단하여 두 아들에게 교훈의 글을 써주고 외동딸에게는 매화에 새를 그린 매조도(梅鳥圖)를 선물한다. 지금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매조도는 그림 아래쪽으로 다음과 같은 4언율시와 그리게 된 사연이 적혀있다. 파르르 새가 날아 뜰앞 매화에 앉네(翩翩飛鳥 息我庭梅) 매화 향기 진하여 홀연히 찾아왔네(有列其芳 惠然其來) 여기에 둥지틀어 너의 집을 삼으렴(亥止亥樓 樂爾家室) 만발한 꽃인지라 먹을 것도 많단다(華之旣榮 有--其實)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지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부인 홍씨가 헌 치마 여섯 폭을 보내왔다. 은은한 매화향기에 취해 쓸쓸한 유배생활의 위안을 삼고 있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한 마리 새가 정원의 매화나무에 앉는 것을 보고 다산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은 부인이 혹 새가되어 날아온 것은 아닐까? 바다 건너 흑산도에 계시는 약전 형님이 보고싶은 마음을 새에게 대신 보내지는 않았을까? 찾아오는 이 없는 쓸쓸한 유배객을 위로하려 먼저 가신 아버님이 하늘에서 보낸 귀한 친구인가? 지필묵을 꺼낸 다산은 몇 해전 부인이 인편에 보내온 시집올 적 입었던 색바랜 다홍치마를 꺼내 그 위에 애절한 마음을 그리고 안타까운 심정을 시로 적어 외동딸에게 선물한다.
▲다산 부부의 시공을 초월한 사랑 고향 마재 마을을 지키며 남편을 손꼽아 기다리던 홍씨에게 지아비의 해배소식은 맨 살을 꼬집어보아야만 믿길 정도로 거짓말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립문에 들어서는 남편의 모습에 부인은 고개 돌려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떠날 때 나이 사십의 건장한 청년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깊이 패인 주름살에 백발이 성성한 초로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자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남편만은 덜 늙었기를 바랐을 것이다. 유배지에서 못다 한 저술작업을 마무리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던 다산은 60년 전, 15살의 나이로 불그레한 볼에 꽃가마 타고 온 새색시를 맞던 그 날 숨을 거둔다. 죽기 전 다산은 얼마 남지 않은 회혼일에 맞춰 미리 시(回 禮)를 하나 짓는다. 육십 평생 바람개비 세월이 눈앞을 스쳐 지나는데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 60년 동안 고락을 같이 한 이팔청춘 곱던 얼굴의 여인을 주름살만 가득한 할머니로 만든 무심한 세월에 대한 투정이 가볍게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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