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익의 의학 파노라마](3) “부귀다남 백년해로 하세요”

2016. 3. 11. 00:12건강 이야기


[황상익의 의학 파노라마](3) “부귀다남 백년해로 하세요”

황상익 | 서울대 의대 교수·의사학


ㆍ정약용, 회혼날 우연히 죽었지만 ‘60년해로’는 지금도 드물어




▲ 출산 중 산모 사망도, 아이 적게 낳은 죄인도 이젠 옛이야기…

수명 늘어나도 30세에 동갑이 결혼했을 때 회혼 확률은 6%에 불과


   결혼 시즌이 막바지다. 전에는 어땠는지, 2000년대 들어서는 10월부터 연말까지가 결혼식의 성수기다. 혼인신고도 12월에 전국에서 4만건 가까이 접수되어 다른 달을 압도한다. 결혼예식도 혼인신고도 해가 바뀌기 전에 마치겠다는 심리 때문일 테다.

누구나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똑같이 존중받고 대우받아야 한다. 또 결혼에는 우리가 흔히 대하는 것 말고도 여러 형태가 있으며, 모두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먼저 이렇게 언급해 두지만, 오늘의 이야기는 ‘여느’ 결혼이다.


   죽음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겠지만, “남자(여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남편)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가톨릭 성경> 창세기 2장 24절)라고 했듯이 결혼은 새로운 삶의 출발이다. 그뿐만 아니라 결혼은 새 생명을 낳는 중요한 계기이다.

출산을 이야기할 때면 영화 <무기여 잘 있거라>(1957년 작)가 떠오른다. 여자 주인공(제니퍼 존스 분)이 난산 끝에 죽는 장면이다. 50년이 되어가는 데도 그 모습이 생생한 것은 열세 살 소년이 받은 충격이 컸기 때문일 테다. “아기를 낳다가 죽다니!”

우리나라의 모성사망비는 2011년 현재 17이다. 모성사망비란 신생아 10만명 출생당 임신 중이나 출산 6주 이내에 사망하는 산모의 수를 가리킨다. 모성사망비가 17이라면 임신이나 출산 때문에 사망할 확률이 0.017%로,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영화의 무대인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어땠을까? 미국의 경우 지금보다 몇십배 높은 700~800 수준이었다. 아기 하나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동안 사망할 위험이 0.7% 내지 0.8%라는 뜻이다. 아기를 여럿 낳는다면? 비례해서 사망 가능성도 높아진다. 다섯을 낳으면 3.5~4%, 열을 낳으면 7~8%로 높아진다.

그 무렵 우리나라는? 자료는 없지만 미국보다 나았을 리는 없을 터이다. 모성 사망 문제는 우리와 같은 선진국에서는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세계적으로는 지금도 해마다 60만명의 여성이 축복받아야 할 임신과 출산 때문에 죽어간다.

예전에는 어째서 모성 사망이 그리도 많았을까? 지난번에 보았듯이 100년 전, 아니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모든 연령층에서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영·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것은 물론이고, 청소년이 장년, 장년이 노년에 이르기도 쉽지 않았다. 거기에 가임기 여성에게는 모성 사망의 멍에가 덧붙여졌다.


   현대국가에서는 예외 없이 여성의 평균수명이 남성보다 길다. 하지만 모성 사망이 많았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영·유아기와 소년기에는 남자아이의 사망률이 여자아이보다 높아, 생식능력을 갖게 될 즈음에는 출생시 성비(性比)인 105:100이 100:100으로 바뀌어 남녀의 수가 거의 같아진다. 경이롭지 않은가? 그 뒤 청장년기에는 높은 모성 사망률 때문에 여성의 기대여명이 남성보다 짧은 경우가 많았다.

모성 사망이 감소한 데에는 식주의(食住衣) 생활의 개선과 더불어 직업적 산파와 시설 분만의 공이 컸다. 예전에는 출산이 의료와 관련이 없었다. 왕족 같은 특수한 신분을 제외하고는, 출산은 아기를 받아본 경험 있는 할머니나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집에서 이루어지는 가정사였고 여성들만의 일이었다. 서유럽에서는 18세기 무렵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직업적 산파가, 처음에는 여성산파가 뒤에는 남성산파까지 등장하고 전문적 분만 시설이 세워지면서 산전 산후 관리가 가능해졌고 그 덕분에 모성 사망이 점차 떨어지게 되었다.


   출산이 여성들만의 포근한 집안일에서 차갑고 사무적이고 남성이 관여하는 의료행위로 변모(‘의료화’)하는 데 대한 저항이 처음부터 만만치 않았지만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고는 상황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선진국이라도 20세기 초까지 모성 사망비는 지금의 몇십배나 되었다.

우리는 언제부터 그런 변화가 생겼을까? 1990년대 초부터 거의 모든 아기가 병원과 같은 전문 시설에서 의사나 조산사의 도움을 받으며 태어난다. 1970년대에는 절반쯤이 그렇게 세상 빛을 보았다. 일제로부터 해방될 무렵만 해도 대부분 집에서 아주머니나 할머니의 손으로 받아졌다. 요컨대 우리나라에서 출산의 의료화는 최근 몇십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 가문·공동체 유지를 위해 다산을 ‘수행’한 옛 여성


   여성이 평생 출산하는 아기의 수를 ‘합계출산율’이라고 한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1.3가량으로 매우 낮지만 1960년대 초까지도 무려 6.0을 넘었다. 모성 사망이 많았던 시절에 왜 출산율이 높았던 것일까? 그때도 아기를 낳을수록 산모의 건강과 생명이 위협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 여자는 나이가 차면, 즉 생식능력이 생기는 14, 15세가 되면 시집가서 아기를, 그것도 사내아기를 가능한 한 많이 낳아야만 했다. 다른 재주가 아무리 뛰어나도 아기를 (많이) 낳지 못하면 죄인 취급을 받았다.

농업사회, 더욱이 영농법이 보급되지 않고 농사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생산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노동력, 그것도 남성노동력이었다.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여성에게 다산, 다남이 강요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사실은 이제부터 말하는 것이 다산의 더 근본적인 요인일지 모른다. 인구 유지를 위한 출산율을 ‘대체출산율’이라고 한다. 오늘날은 여성이 아기 둘을 낳아야 인구가 유지된다. 그 아기들이 다시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나이까지 자라는 동안 사망하는 비율을 감안하면 대체출산율은 2.1이다.

대체출산율은 고정값이 아니라 사망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생식능력을 가질 때까지 절반이 죽는다면 평균 네명을 출산해야 인구가 유지된다. 두명만 낳으면 한 세대 만에 인구는 절반으로 줄어들고, 그것이 지속되면 그 집단은 사멸한다.

이러한 사실을 정확히 알았던 건 아니지만 인구 유지의 압력이 집단무의식적으로 출산 행태뿐만 아니라 의식과 도덕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에 따라 여성은 생식능력을 갖는 나이부터 그것이 다할 때까지 목숨을 걸고서라도 아기를 낳아야 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평균 초혼 연령은 남성 32.1세, 여성 29.4세이다. 1930년대에 남성은 44%가 15~19세에, 35%가 20~24세에, 13%가 25~29세에 장가를 갔다. 그리고 여성은 71%가 15~19세에, 15%가 20~24세에 시집을 갔다. 열다섯도 되기 전에 결혼하는 비율도 9%나 되었다. 요컨대 80년 전만 해도 여성은 대부분 생식능력을 갖게 되는 나이 즈음에 결혼을 해서 출산을 시작했다.

1925년부터 최근까지 우리나라 여성의 출산율 변천을 나타내는 연령별 출산율 및 합계출산율 그래프는 1960년대 초까지는 전통시대의 출산 양상을 유지하다 그 이후 급격히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20세 미만 출산은 1930년대부터 떨어졌다.) 합계출산율은 1960년대 초까지 대체로 6.0을 상회하다 지금은 1.3 수준으로 급락했다. 가임기 모든 연령의 출산율이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요즈음 많이 거론되는 노산(老産)도 사실은 과거에 훨씬 많았다. 모녀와 고부가 함께 임신하고 출산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결혼 연령의 증가로 30대 출산율이 최근 20년 사이에 높아졌지만 우려할 일은 아니다. 산전 산후 관리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요즈음에 노산이라고 지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김홍도의 여덟 폭 병풍 ‘모당 홍이상공 평생도’ 중 회혼식.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의 여덟 폭 병풍 ‘모당 홍이상공 평생도’ 중 회혼식.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동서고금을 봐도 백년해로는 사실상 불가능


   결혼식 주례사에 많이 등장하는 말이 ‘백년해로’다. “부부가 한평생 사이좋게 지내고 즐겁게 함께 늙어가라”는 덕담이다. 말 그대로 100년을 함께 산 부부가 있을까? 중국 설화에 800살을 넘겨 살았다는 팽조(彭祖)도 결혼을 마흔아홉 번인가 했다 하니 백년해로했던 것 같지는 않다.


   이번에는 성경책을 보자. 구약 맨 앞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류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살 동안에는 아기를 갖지 않다가 그곳에서 추방된 뒤부터 자식을 보게 된다. 맏아들 카인과 둘째 아벨을 낳은 나이는 성경에 없지만 3남 셋을 출산했을 때 아담의 나이는 130세였다. 그리고 아담은 800년을 더 살면서 자녀를 더 낳았다 하니 아담과 하와는 몇백년을 해로했던가 보다.


   현실 세계로 돌아와 보자.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회혼(回婚) 잔치 그림 다섯 점이 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김홍도(1745~1806)의 여덟 폭 병풍 ‘모당 홍이상공 평생도’(慕堂洪履祥公平生圖)에 나오는 것이다. 홍이상(1549~1615)은 선조와 광해군 때의 문신으로 예순여섯에 세상을 떠났다. 여섯 살에 혼례를 올렸으면 회혼례도 가능은 하지만 과연 그랬을지 의문이라고 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회혼을 맞은 인물로 다산 정약용(1762~1836)과 부인 홍씨(1761~1838)가 있다. 정약용은 공교롭게도 회혼일 아침에 돌아갔는데 며칠 전 마지막으로 회혼 시를 남겼다. 다산의 사람됨과 생애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절창이다. 필자의 무딘 솜씨가 원작을 훼손했을까 저어된다.


예순 해 모진 세월 깜짝할 새 흘렀건만
복사꽃 화사한 봄빛 신혼 때와 같구려
살며 죽어 헤어짐이 나이 들기 재촉해도
슬픔은 짧고 기쁨은 길어 은혜에 감사할 뿐
이 밤 따라 목란의 노래 더욱 곱게 울리고
그 옛날 다홍치마 먹 자국도 남아 있소
헤어져도 다시 합침이 우리 참 모습일지니
합환주 두 잔 모아 자손에게 남깁시다


   요즈음 결혼하는 부부가 회혼을 맞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신랑, 신부의 나이가 모두 30세라면 그때부터 90세까지 살 남녀 각각의 확률을 곱해주면 될 것이니 6%이다. 그보다 조금 늦게 35세에 결혼하면 1%가 채 안 된다. 수명이 길어졌어도 회혼을 맞는 것은 증손을 보는 것보다도 힘든 일이다.


오늘도 1000여 쌍의 새로운 부부가 탄생한다. 영롱하고 아리따운 12월의 신부들, 하나의 꿈과 하나의 마음을 찾아 새 길을 떠나는 선남선녀들에게 온고지신의 마음으로 건넬 덕담은 여전히 이것이다. “부귀다남, 백년해로 하세요.”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