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익의 의학 파노라마](2) ‘자식농사 반타작이면 다행’이던 시대

2016. 3. 10. 22:25건강 이야기



  [황상익의 의학 파노라마](2) ‘자식농사 반타작이면 다행’이던 시대
황상익 | 서울대 의대 교수·의사학


ㆍ허난설헌, 연이은 핏덩이의 죽음에 피눈물… 조선시대엔 흔한 일


경기 광주시 초월읍에 있는 허난설헌과 두 아기의 무덤. 왜 아기 무덤을 가까이서 품을 수 있는 바로 뒤에 엄마 무덤을 마련하지 않았을까, 객쩍은 생각을 해보았다. 난설헌도 뛰어넘을 수 없는 묘제 때문이었을까? 민경화 사진작가 제공

경기 광주시 초월읍에 있는 허난설헌과 두 아기의 무덤.

왜 아기 무덤을 가까이서 품을 수 있는 바로 뒤에 엄마 무덤을 마련하지 않았을까,

객쩍은 생각을 해보았다.

난설헌도 뛰어넘을 수 없는 묘제 때문이었을까?

민경화 사진작가 제공



지난해 사랑스런 딸아이 잃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디 슬픈 광릉 땅에
무덤 둘이 마주 보며 서 있다네
백양나무 바람에 소슬하고
혼백의 불 소나무를 비추니
지전으로 너희 혼을 부르고
찻물 붓고 너희 무덤 지키노니
응당 너희 남매의 혼들은
밤마다 서로 따르며 노니느냐
비록 뱃속에 아기가 선다한들
어찌 잘 자라기를 기약하겠나
눈물로 황대사를 읊조리며
피눈물로 슬픔 소리 삼키노라

작은 풀, 서리와 눈에 시들어도
봄이 오면 다시 살아나거늘
하늘의 마음 어찌 이리도 박하여
내 아이는 살아나지 않는가
이웃집 젖먹이 울음소리
몇 번이나 너인가 착각했더니
지난해 같은 때 태어난 아이
어느덧 말을 배운다더라
참았던 눈물이 눈에 차올라
잊고자 해도 또다시 생각나네
소리를 삼키며 어두운 벽 향하니
행여 네 어미 알아챌까 두려웁구나”


   앞부분은 허난설헌, 뒷부분은 김수항의 한문시를 민족의학연구원의 안은수 박사가 한글로 옮긴 것이다.

조선시대의 3대 여성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허난설헌(1563~1589)은 스물도 채 안된 나이에 어린 딸과 아들을 연이어 잃었다. 두 아이 모두 돌이나 되었을까 말까 했을 때다.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아 얼마 뒤에는 시구에서 예견했듯이 유산도 경험한다. 그리고 몇 해 뒤에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아기들이 먼저 간 길을 따라갔다. 우리 문화에서는 아기 무덤을 쓰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허난설헌은 차마 무덤도 없이 아기들을 보낼 수는 없었는지 모른다. 경기 광주(허난설헌 시대에는 광릉이라고 불렀다) 땅에는 엄마 무덤과 두 아기의 무덤이 400년 넘게 서로를 위로하며 서 있다.


   김수항(1629~1689)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 문신이자 문장가로 벼슬은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비록 1689년 기사환국 때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지만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이었다. 가정적으로도 유복해서 장남 김창집은 영의정, 차남 김창협은 대제학을 지내는 등 6남1녀가 모두 부귀영화를 누리고 문학, 예술 분야에서도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김수항에게도 뼈저린 아픔과 슬픔이 있었다. 태어난 지 겨우 21일 만에 떠나보낸 자식이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그의 시에는 갓나서 죽은 자식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리고 그 자식 때문에 괴로워하는 부인을 걱정하는 심정이 잘 드러난다.

허난설헌과 김수항, 어느 쪽의 아픔이 더 컸을까를 이야기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백가지 기쁨과 천가지 영광도 어린 자식을 잃은 고통을 씻어주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 조선, 로마, 프랑스 모두 5세 이상 생존율 50% 밑돌아…
영조부터 순조까지 임금인 아버지보다 오래 산 자녀 한 명도 없어


■ 70년대 한국 농가에서도 “10명 낳아 5명 살렸소”


   “자식농사는 반타작이면 다행”이라는 옛말이 있다. 이제는 사용할 일이 없어 말 자체를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그리 오래된 옛말은 아니다.

“작년 여름 강원도 춘성군 산촌으로 농촌 순회진료를 나갔을 때의 일이다. 아기를 몇이나 낳고 그 중 몇을 잃었느냐고 물어보았다. 대개는 4~6남매를 낳아 반을 잃었는데 10~12명 혹은 그 이상을 낳은 예가 소수이긴 하지만 나이 많은 부인네 중에 심심찮게 있었다. 그 중 몇이나 길렀소 하고 물었더니 3~4명, 많아서 5명이란다.”(동아일보 1974년 6월12일자)


   육당 최남선의 아들로 당시 서울대 의대 소아과 교수로 재직하던 최한웅의 연재물 ‘의학 에세이’ 에 나오는 구절이다. ‘반타작’ 시절이 가공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음을, 그것도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술회다. 지난번에 언급했던 최희영이 작성한 생명표에 따르면 1926~1930년에 15세까지 생존한 조선인은 남자 55%, 여자 58%이고 20세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남녀 각각 53%, 56%였다. 최한웅의 묘사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수치다.


   더 오래된 통계자료는 우리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다른 나라 자료를 원용해야만 한다. 여기에서는 프랑스 인구역사학자 블라요(Yves Blayo)의 연구를 보도록 하자. 1740~1749년, 그러니까 프랑스가 루이15세 치하에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년)에 뛰어들었을 무렵, 프랑스 사람들의 수명은 어떠했을까? 당시 여성의 경우 만 9세까지 생존하는 비율이 50%에도 미치지 못했다. 15세까지는 46%, 20세까지는 44%만 살아남았다. 남성은 그보다 사정이 더 나빠서 6세가 되기 전에 생존자가 절반으로 줄어들고 15, 20세까지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은 43.41%에 불과했다. 말 그대로 반타작도 못하는 시대였다.


   프랑스는 이후 빠른 속도로 상황이 개선되었다. 생식능력을 갖게 되는 15세까지의 생존율을 보면 1780년대에 남자 48%·여자 51%, 1820년대에 남자 63%·여자 65%, 1880년대에 남자 75%·여자 79%로 훨씬 나아졌다. 요컨대 프랑스는 19세기에 들어 반타작 시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대시대 인구를 연구하는 프라이어(Bruce W Frier)의 조사에 따르면 로마제국 시대의 5세 생존율은 49%, 15세 생존율은 44%였다. 그 뒤 1500년 동안 별로 개선되지 않던 것이 19세기에 비로소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 것이다.





                   

   루이15세의 재위 기간(1715~1774년)은 영조의 통치 시기(1724~1776년)와 거의 겹친다. 그럼 그 무렵 조선 사람들의 수명과 건강 수준은 어땠을까? 앞으로 관련 자료들을 발굴하고 정리해 프랑스 등 유럽 나라들과 같은 통계치를 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말할 것이 거의 없다. 대신 우리가 사정을 그나마 아는 국왕과 자녀들의 수명을 살펴보자.

잘 알려져 있듯이 영조는 조선시대에 가장 장수한 임금으로 81년 5개월 22일을 살았다. 오늘날 한국 남성의 평균수명보다 4년 가까이 오래 산 셈이다. 그 시절 프랑스 남성으로 80세를 넘긴 사람은 4%가량 된다.


   아버지가 장수했다고 자식도 오래 사는 것은 아니다. 영조의 자녀 열넷 가운데 화완옹주(70세), 화령옹주(67세)처럼 비교적 명이 긴 사람도 있지만 나머지 12명은 40세를 넘기지 못했다. 3분의 1이 넘는 5명은 ‘조졸(早卒)’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어서 사망 나이를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갓 태어나서나 기껏 돌 전후에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조졸을 만 1세로 계산하면 14명 자녀의 평균 사망연령은 22.4세다(설령 10세로 계산하더라도 25.6세에 지나지 않는다).


   47세에 세상을 떠난 정조의 자녀 5명 중 3명은 4세 미만에 죽었고, 5명의 평균 사망연령은 18.6세다. 44년 4개월을 산 순조의 자녀 7명 중 조졸자는 1명뿐이지만 모두 23세 미만에 사망해 평균 사망연령은 16.1세에 불과하다.

영조부터 순조에 이르기까지 아버지보다 오래 산 자녀는 단 한 명도 없다. 영조는 14명 자녀 중 11명, 정조는 5명 중 3명, 순조는 7명 중 5명의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거듭 언급하지만 이것은 통계적 의미가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는 될 것이다.



■ ‘부모보다 먼저 떠나면 불효’에 담긴 가슴아픈 속뜻


   부모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는 것만큼 불효는 없다고 한다. 언제쯤부터의 이야기일까? 반타작 시절에는 부모에 앞서 사망하는 일이 비일비재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 시절부터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면 죽음 앞에 무력함을 한탄하면서 자식이 자신보다 늦게 세상 떠나기를 간절히 희구하는 뜻이 많았을 것이다.

반타작 시절에 통용되던 얘기로 “세 살 넘기지 못한 자식은 자식이 아니다”라는 것도 있었다. 비정한 말로 들릴 수 있지만 나름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50대 이상에서는 실제 나이와 호적상의 나이가 두세 살, 너댓 살 차이 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출생신고를 몇 년 늦게 해서 생긴 일이다. 해방 이후 수명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건강 수준도 꽤 개선되었지만 과거의 반타작 기억이 상당 기간 작용했기 때문이다.

과거 반타작 시절에는 어린아이의 죽음이 너무나 흔한 일이었다. 허난설헌, 김수항, 영조의 경우가 특별나거나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다. 최한웅의 표현대로 대부분 평생 두세 차례, 많게는 일고여덟 번 체험하는 일이었다. 다른 집 아이들의 죽음까지 포함하면 거의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죽음이 그렇게 흔한 것이라면 무덤덤하게 대했을까? 허난설헌과 김수항의 시를 보면 결코 그런 것 같지 않다.


   누구도 반타작 시절에서 벗어났다고 늘 감사하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100년 전, 200년 전 사람들이 자신들의 세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았듯이 우리도 그렇게 지금의 세상을 살고 있다. 과거는 과거대로, 오늘은 오늘대로 여러 문제가 산적해 있다. 건강과 의료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예전의 모습을 사실대로 아는 것이 현재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작지 않은 도움을 줄 것이다.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