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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가 열녀(烈女) 달성서씨 포죽도(抱竹圖)를 그리고, 중모기를 쓴 글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화가이며, 본관은 개성(開城), 호는 화산관(華山館), 아버지는 사과(司果)를 지낸 화원 이종수(李宗秀)이다. 상의원(尙衣院) 별제(別提)와 찰방(察訪)을 지낸 김응환(金應煥)의 사위이다. 도화서(圖畵署) 화원으로 경상도 장수도 찰방(長水道察訪)을 지냈다. 1791년(정조 15) 정조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 도사(圖寫)의 주관화사(主管畵師)로 활약했으며, 1794년(정조 18)에는 정조의 명으로 허목(許穆)의 초상을 이모(移模)했다. 1796년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서직수초상(徐直修肖像)을 그렸다. 그의 산수화들은 초상화에 비해 격이 떨어지는 편이고, 화중인물과 필법 등에서 김홍도(金弘道)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외에 채접(彩蝶)을 잘 그렸다고 하나 전하는 작품은 없다. 작품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서직수초상 · 관폭도(觀瀑圖) ·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호암미술관 소장의 송하독서도(松下讀書圖),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의 장범선유도(張帆船遊圖)등이 있다. 이 모사한 포죽도와 중모기는 영천군 신령부근의 장수도 찰방(長水道察訪)시절에 그리고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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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기의 열녀서씨포죽도(烈女徐氏抱竹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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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기가 열녀서씨포죽도에 중모기(烈女徐氏抱竹圖重摹記)를 씀-
영남(嶺南)은 본래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고장으로 일컬어져 예로부터 정승(政丞)과 판서(判書)등의 이름난 높은 벼슬아치와 도학(道學), 충의(忠義), 절효(節孝)의 선비가 전후로 계속 배출하여 빛나는 전적(典籍)과 현자(賢者)가 많은 최고의 고장이 되었다. 나는 지난 1793년(정조 17) 여름에 역참을 관리할 것을 명받았지만 역(驛)의 공무가 쌓이어 단 한걸음도 문밖에 나가서 아름다운 명승지를 구경할 겨를이 없었으나, 때때로 시골 선비들에게 새로운 것을 많이 듣게 되었는데, 감동할 때가 많았다. 이번에 석사 도필구(都必九)가 두루마리 한 폭을 갖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며 다시 모사(模寫)하는 일을 부탁하므로 삼가 받들어 펼쳐보았더니, 곧 그의 선조비(先祖妣) 정부인 달성서씨의 포죽도(抱竹圖)였다. 세종대왕의 시(詩)도 여기에 게재되어 있어 두 손으로 받들어 읽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었다. 나라에서 절의를 장려하고 교훈과 가르침을 붙들어 심어 백세에 없어지지 않는 덕을 드리운 것을 볼 수 있으니, 그것이 어찌 도(都)씨 한 집안 만의 영광이겠는가? 아마도 세상의 도리를 위해 다행한 일이니 아 훌륭하여라! 그 흰 대나무와 눈 속의 붕어가 정성스런 효도의 감동으로 인한 것이니, 이 사실이 모두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려 있으므로 지금 감히 글을 덧붙일 수 없도다. 훌륭하도다. 도씨의 집안에는 어쩌면 그렇게 절의가 많았던가? 이 일에 나도 참여하는 영광을 얻은 것이니 어찌 감히 거절하겠는가? 즉시 일어나서 손을 씻고 삼가 모사하여 돌려주며 드디어 이를 위해 중모기(重摹記)를 쓴다.
1795년(정조 19) 8월 통훈대부 행 장수도 찰방(長水道察訪)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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