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혹약재연(或躍在淵)

2016. 3. 20. 23:35잡주머니



      

[고전 속 정치이야기] 혹약재연(或躍在淵)
뉴스천지  |  newscj@newscj.com
2014.11.06 17:28:50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사적 227호로 지정된 광성보(廣城堡)는 황해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인 강화해협을 지키던 12개의 보루 가운데 하나이다. 몽고의 침략에 맞서 강화로 천도한 고려시대에 축조된 이후 조선의 광해군, 효종 등 국방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군왕들이 보수했으며, 숙종시대에 용두(龍頭), 오두(鼇頭), 화도(花島), 광성(廣城) 등의 돈대가 설치됐다. 입구의 안해루(按海樓)는 영조시대에 건립됐다. 신미양요 이후 완전히 파괴된 것을 나중에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기 2년 전 전적지정화사업으로 펼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광성보는 사시사철 낮에 찾는 것도 좋지만 특히 초가을 보름달이 뜨는 날 밤이 되면 독특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광성보는 강화해협으로 빠져나가는 한강물이 암초에 부딪치면서 내는 효과음을 들으며 달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즐겁다.

   그러나 낮에 광성보를 찾으면 이러한 정취보다는 울분이 치민다. 청과 일본의 강제 개방에 성공한 미국은 1866년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대동강으로 진입시켜 통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청과 일본의 개방에 충격을 받은 조선의 지배층은 존왕양이를 주장하며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제너럴 셔먼호는 이러한 국가정책에 호응하던 평양사람들의 공격을 받아 격침됐다. 5년 후인 1871년 미국은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 장군에게 조선침략명령을 내렸다. 조선은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인 강화일대와 한강 하구의 경비를 강화했다. 미국함대가 광성보의 손돌목에 이르자 조선 수군이 포격을 퍼부었다. 미군은 피해보상을 요구했고, 조선은 주권침해라고 거절했다. 6월 10일 초지진과 덕진진을 차례로 함락시킨 미군은 광성보로 진격했다. 당시에 광성보에는 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400여 명의 수비군이 있었다.

   전투 결과는 참혹했다. 어재연을 비롯한 조선군 350명이 전멸했으며 미군의 피해는 고작 전사 3명뿐이었다. 광성보의 참극은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광성보는 강화해협에서 강화도와 육지 사이의 거리가 가장 짧았고 곳곳에 암초가 있어서 만조 때가 아니면 배가 통과하지 못한다. 암초를 피하면 양안에 설치된 포대로부터 공격을 받기가 쉽다. 그러나 미군은 어리석지 않았다. 조선수군은 미국의 전함이 포대 가까이로 올 것을 기대했지만, 미리 지형지물을 정찰했던 미군은 멀리서 광성보를 향해 함포를 쏘았다. 조선군의 포는 사정거리가 짧아서 적함까지 닿지 않았다. 미군의 포격으로 광성보의 돈대들이 대파되었다. 미군이 상륙했을 때는 이미 조선군의 대부분이 죽거나 다친 상태였다. 미군의 슐레이 대령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조선군은 돌과 흙을 던지며 끝까지 항전했다고 한다.

   어재연의 이름에는 그의 운명이 들어 있었다. 재연(在淵)이라는 이름은 주역 건괘 구사효의 효사 ‘혹약재연’에서 따왔을 것이다. 뛰어보고 상황이 불리하면 다시 연못으로 들어가야 한다. 어재연은 재빨리 군사들을 퇴각시키고 차라리 게릴라전에 대비했어야 한다. 그러나 어재연에게는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죽어야 한다는 정도의 재량권 밖에 없었다. 부하들과 함께 강화도 깊은 곳으로 퇴각했다면 그는 패장으로 몰려 가문까지 적멸됐을 것이다. 그의 형제를 비롯한 조선의 젊은이들은 일방적인 살육의 대상이 됐다. 장엄하기보다는 비참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장수가 진퇴를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승리를 기약하겠는가? 적을 유인하기 위해서는 후퇴할 필요성도 있으며, 패할 것이 뻔한 싸움에서는 재빨리 물러나 전력을 비축해야 한다. 재량권이 없었던 어재연은 혹약재연을 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는 훗날 이름이나 남겼지만 그를 따라서 죽은 숱한 무명용사들의 원혼은 누가 달랠 것인가? 한강물이 강화해협의 암초에 부딪치는 소리는 그들의 원혼이 외치는 소리이다. 혹시 광성보를 찾으시면 소주 한 잔이라도 올리시기 바란다.
-->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