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0세기 미국 도시의 일면을 독특하게 묘사한 에드워드 호퍼 그림을 패러디한 종합쇼핑몰 CF 광고 시리즈가 화제다.
호퍼의 고독과 침묵이 가득한 원작의 분위기와 달리 유명 연예인이 호퍼의 그림 속 남녀처럼 등장하여 위트 있는 대사로 침묵을 깨는 색다른 반전(反轉)이 재미를 준다. 이처럼 원작이 지닌 분위기를 예기치 않은 반전으로 바꾸어 대중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기법을 패러디(parody)라 한다.
호퍼의 |
오늘날 유명 유파들(인상파, 후기인상파, 표현주의, 입체파, 초현실주의, 팝아트 등)의 작품을 모방하거나 패러디한 아트마케팅을 일상에서 마주하는 것은 흔한 일처럼 되었다.
딱딱한 미술관 벽면을 채우는 소장품에서 벗어나 각양각색의 기발한 형식과 기법으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림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양상들이 유행하는 것은 왜일까? 원작만큼 유명한 패러디 작품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미술사를 장식한 유명작품을 모티프로 삼은 패러디모방 작품들은 원작과 다른 풍자와 위트를 지녔다는 점이 매력이다.
실제 <비너스>,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풀밭 위에 식사>, <올랭피아>, <만종>, <시녀들>, <절규> 등 모방과 패러디의 단골 대상을 살펴보면 현대에 가까울수록 원작의 아우라를 위협하는 파격성이 강하다.
예컨대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사후 많은 화가에게 초상화의 교본처럼 인식되며 수많은 아류작을 탄생시킨 작품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대통령, 코미디언, 영화배우의 얼굴과 합성한 패러디 시리즈처럼 조형적 모방이나 차용을 넘어 다양한 패러디로 대체되는 경향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흐름은 다른 명작을 패러디한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나리자>을 대상으로 모방 및 패러디한 그림, 합성사진. |
벨라스케스의 최고의 작품 <시녀들>도 많은 화가에게 창조적 모티프를 제공한 작품으로 빠지지 않는다. 특히 <시녀들>은 무명화가의 익살과 풍자가 돋보이는 패러디나 상업홍보를 위한 패러디보다 <시녀들>의 예술성에 매료된 유명화가들이 즐겨 그린 작품이라는 점이 특별하다.
실제 현대미술의 거장 피카소가 무려 58번을 그렸다고 전해지며, 고야, 달리, 클림트, 마네, 해밀턴, 보테로 등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많은 작가가 <시녀들>의 작품에 감동하며 작품을 재해석했다. 고야는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들>을 통해 벨라스케스에 대한 경의를 표현했다.
벨라스케스<시녀들>을 모방 및 패러디한 작품들 –고야, 피카소, 달리, 보테로, 리처드 해밀턴. |
영국 팝아트의 선구자 리처드 해밀턴은 <피카소의 시녀들>이라는 제목으로 모방한 작품을 다시 패러디하는 형식의 독특한 작품을 제작했다.
보테로는 <시녀들>의 그림 속 주요 인물들(예-벨라스케스 자화상, 마르가리타 공주)을 독립시켜 신체를 비만형으로 그리는 이른바 ‘뚱뚱미학’ 기법으로 원작과 다른 예술성을 선보였다.
인상파의 대부로 불리는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와 <올랭피아>는 미술역사상 초유의 스캔들을 일으킨 작품답게 모방과 패러디에서도 그 명성을 이어간다. 동시대는 물론 인상파이후 많은 화가에게 창작의 영감을 제공하고, 현대 미술가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두 작품은 대중매체에서 특정 상품의 홍보나 광고의 수단으로 차용되거나 패러디된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풀밭위의 식사>와 <올랭피아>도 고전미술에서 차용하거나 혼성 모방한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모방은 화가에게 창작을 위한 보편적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여타의 작품에서 볼 수 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를 모방 및 패러디한 작품과 광고이미지. |
바르비종파 밀레의 작품은 다양하게 모방, 또는 패러디됐다. <씨 뿌리는 사람>은 빈센트 반 고흐, <잠자는 농부>는 빈센트 반 고흐와 피카소, <만종>은 살바도르 달리 등에 창작의 모티프가 되었고, 광고로 패러디된 대표 사례에 속한다.
밀레를 존경했던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또한 그 명성에 어울릴 만큼 다양하게 패러디됐다. <아를의 반 고흐 방>과 <별이 빛나는 밤>이 패러디 단골 작품이다.
시카고 미술관에 소장된 그랜트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작품은 엄숙한 분위기로 서 있는 두 남녀(화가의 동생과 화가의 담당 치과의사)가 인상적인 그림이다.
이 그림은 미국 지역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그림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지만, 정작 그림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림 속 남녀에 관한 궁금증이 증폭되면서이다.
‘부부 사이’에서 ‘부녀 사이’, ‘이웃 사이’, ‘사촌 사이’ 등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면서 유명세를 치렀다. 이와 더불어 <아메리칸 고딕>은 재미있는 각색과 구성의 패러디가 속출하면서 원작만큼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랜트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을 패러디한 작품들. |
언급한 작품들 이외에도 수많은 미술품이 패러디되고 있다. 마치 패러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착각이 들 만큼 현대사회에서 패러디는 유명작품에 필연적으로 따라붙은 부록처럼 되었다. 상상을 초월한 기발한 아이디어로 원작의 아성에 도전하는 시도가 갈수록 많아진다.
하지만, 패러디 기법이 다른 표현기법보다 예술성을 인정받기가 어려운 것은 지나친 왜곡이나 특정 부분(상품화)을 부각해 원작의 예술성을 훼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신공격과 같은 부작용을 낳은 사례도 늘고 있다.
패러디는 종종 키치(Kitsch)라는 현대미술의 장르와 비교되곤 하는데 예기치 못한 새로운 기법과 형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강탈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천박하고, 저속한 모조품 또는 질 낮은 싸구려 상품을 이르는 키치는 유희성을 강조한 패러디보다 목적성에 더 비중을 두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패러디와 키치 역시 뚜렷한 기준으로 판별하지는 쉽지 않다. 패러디, 키치(Kitsch)와 더불어 자주 논쟁의 대상이 되는 또 하나는 표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패러디는 표현의 자유에 어긋나지 않지만, 표절은 엄연한 비도덕적 행위로 예술적 가치와 거리가 멀다. 패러디는 누구나 원작을 알 수 있는 대상이거나 출처(provenance)를 명시한 것이지만, 표절은 타인의 작품을 도용하여 자신의 창작품으로 둔갑시키거나 출처를 명시하지 않는다. 표절을 단지 비도덕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는 이유이다.
살펴보았듯이 현대미술에서 패러디는 원작을 모방하여 화가들이나 일반인이 즐겨 쓰는 보편적 기법의 하나이다.
예술의 역사와 궤를 함께해온 시간이 말해주듯 패러디는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기법으로 친숙하다. 그래서 단순한 볼거리, 흥미 위주에 머물지 않고 원작과 더불어 영원히 기억될만한 예술성 짙은 패러디 작품을 만나는 것은 패러디 기법에서만 맛볼 수 있는 희열이다.
앞으로 ‘누구’의 ‘어떤 작품’이 예측하지 못한 기발한 상상의 세계를 또 만들어낼지 궁금하다.
◆ 변종필 미술평론가
문학박사로 2008년 미술평론가협회 미술평론공모에 당선,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경희대 국제캠퍼스 객원교수, 박물관·미술관국고사업평가위원(2008~2014.2)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 겸 편집위원, ANCI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학출강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