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29. 18:46ㆍ들꽃다회
2015년 03월 통권 047호 | 사람과 글 人ㆍ文
김수이
문학평론가. 평론집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 『서정은 진화한다』, 『풍경 속의 빈곳』,『환각의 칼날』 등과 공저 『글쓰기의 최소원칙』, 『<오감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 등이 있음.
어느해 봄이던가, 머언 옛날입니다.
나는 어느 親戚의 부인을 모시고 城안 冬柏나무그늘에 와 있었습니다.
부인은 그 호화로운 꽃들을 피운 하늘의 部分이 어딘가를
아시기나 하는듯이 앉어계시고, 나는 풀밭위에 흥근한 洛花가 안씨러워 줏어모아서는 부인의 펼쳐든 치마폭에 갖다놓았습니다.
쉬임없이 그짓을 되풀이 하였습니다.
그뒤 나는 年年히 抒情詩를 썼습니다만 그것은 모두가 그때 그 꽃들을 주서다가 디리던 ― 그 마음과 별로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제 웬일인지 나는 이것을 받어줄이가 땅위엔 아무도 없음을 봅니다.
내가 줏어모은 꽃들은 제절로 내손에서 땅우에 떨어져 구을르고 또 그런 마음으로 밖에는 나는 내 詩를 쓸 수가 없습니다.
- 서정주, 「나의 詩」(『미당 서정주 시전집 1』, 민음사, 1983)
현대문명은 ‘자연’을 개조하면서 이름도 바꾸었다. ‘정원(庭園)’과 ‘공원(公園)’으로 개명한 것이다.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인공정원으로 화했고, 시골의 땅과 바다는 유료이거나 무료인 국공립 공원으로 리모델링되었다. 인공정원 건설과 자연보호를 표방한 자연 리모델링 사업에 늘 따라붙는 수식어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친화적’이다. 현대문명이 ‘자연’을 본래 의미 그대로 부르는 예는 어쩌면 ‘자연친화적’이라는 단어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현대에 와서 ‘자연’은 ‘자연친화적’이라는 말 속에만 존재하는, 실제로는 부재하는 유토피아로 화하고 있는 것이다. 유토피아utopia가 ‘선한 곳’을 뜻하는 에우토피아eutopia와 ‘부재하는 곳’을 뜻하는 우토피아outopia의 합성어라는 사실은 이 점에서 미묘한 암시로 다가온다.
현대사회의 유동하는 삶의 양식과 그 폐해를 파헤친 저서 『모두스 비벤디』(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는 견해가 서로 다른 이들 사이의 협약, 일시적인 합의, 삶의 양식을 뜻한다.)에서 바우만Zygmunt Bauman은, 자본주의적 근대 혹은 근대적 자본주의가 자신이 만들어낸 쓰레기들 때문에 질식할 위험에 처했다고 경고한다. 현대사회는 무한 증식을 목표로, 다시 흡수할 수도 소멸시킬 수도 정화할 수도 없는 산업 쓰레기와 생활 쓰레기, 심지어 인간쓰레기(잉여인간, 실직자, 범죄자, 난민 등)를 끊임없이 배출한다. 오염도는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있다. ‘쓸모’와 ‘쓸모없음’으로 모든 것을 양분하는 근대의 합리적(?) 질서체제는 쓸모없는 일과 사물, 인간 들을 경시한 나머지, 마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 양 취급한다. 이런 세계에서는 쓸모없는 것이 가장 비참하고 비극적인 운명을 살게 된다.
그렇다면, 시는? 자본주의적 근대의 눈으로 본다면, 시야말로 쓸모없는 것의 모범적인 예다. 전근대사회가 시를 도(道)의 믿음직한 방편이나 충효의 진작을 위한 계몽적인 도구로 중시한 반면, 근대사회는 시를 활용할 방법도, 활용해야 할 이유도 알지 못한다. 활용할 의사가 아예 없는 쪽에 가까운데, 인간의 내면과 사회에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키는 시들이 계속 쓰이는 것 자체가 불편하고 탐탁지 않기 때문이다. 효용제일주의의 근대의 시각으로 보면, 쓸모없는 일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것만큼 용인할 수 없는, 이해 불가의 행위는 달리 없다.
서정주의 「나의 시」는 근대의 지향성과 정확히 반대되는 지점에 있다. 이 시가 공들여 묘사하는 바는, 시 쓰기가 더없이 무용한 행위라는 문학적 신념이다. 더불어, 무용한 행위에 온 마음을 바쳐 헌신하는 것이 서정주가 어릴 적부터 살의 감각으로 체득해 지녀온 미의식이며, 그가 평생 시를 쓰는 데 사용해온 유일한 창작방법론이라는 고백이다. 시의 제목이 ‘시’가 아니라 ‘나의 시’인 것은 고백이자 선언으로서의 이 시의 특징을 확인시켜 준다.
시 쓰기는 쓸모없는 행위이기에 어떤 것에도 봉사하지 않으며, 어떤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시는 다만 무용하며, 무용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유용하다. 무용한 것의 유용함을 인정하지 않으며 무용한 것을 축출하는 데 열심인 세계에서 시의 무용함은 극대화된다. 대량생산과 개발, 생계활동의 눈으로 보면 시는 거의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굳이 필요치 않은 잉여를 양산할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서정주는 시가 처한 이 곤경을 자신의 시 쓰기의 운명이자 동력으로 삼는다. 그에게 시는 ‘떨어진 꽃들’에게 다시 생명을 부여하고자 하는 불가능한 시도이며, 생명의 상실에 따른 아름다움의 상실을 철회하고자 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다. 이 불가능한 시도와 소망은 대가를 바라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 무상(無償)의 행위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갸륵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보상 없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현실에서 써먹을 수도 없는 무용함=아름다움에 헌신하는 일의 되풀이는 서정주가 “年年히 써온 서정시”의 비밀이다.
“머언 옛날”의 어느 봄날, “그 호화로운 꽃들을 피운 하늘의 部分이 어딘가를/아시기나 하는듯이 앉어계시”는 부인과 “풀밭위에 흥근한 洛花가 안씨러워 줏어모아서는 부인의 펼쳐든 치마폭에 갖다놓”는 일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나’는 흡사 시의 정령(뮤즈)과 시인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인은 지상에 속해 있지만, 동시에 “호화로운 꽃들을 피운 하늘”과도 은밀히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다. ‘나’는 꽃들을 주워 부인의 치마폭에 쉼 없이 갖다 놓는 일로써 부인에게 사랑과 찬사를 바치며, 부인이 지닌 어떤 신비로운 능력에 의탁한다. 그러니까 ‘나’의 헌화 행위에 보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부인에게 꽃을 드리는 일 자체가 ‘나’의 보상이 된다. 꽃을 드리는 마음과 행위가 바로 ‘나의 시’이기 때문이다. 부인은, 서정주가 자신에게 세상을 이치로서가 아니라 정의(情意)로서, 살의 감각으로서 가르쳐 준 스승이라고 칭한 ‘서운니’와 같은 혈통을 지닌 인물이다. 이들은, 근본은 하늘에 있되 땅위에 잠시 피었다가 떨어지는, 천상과 지상을 오가는 ‘꽃의 혈통’에 속한다.
떨어진 꽃들을 주워 부인의 치마폭에 쉼 없이 갖다놓는 일은, 하늘과 내통하는 부인에 의탁해 꽃의 생명과 아름다움의 소멸을 돌이키고 싶은 마음을 반영한다. 생명의 유한성에 대한 거절, 육체의 재생에 대한 간절한 열망, 아름다움의 덧없음에 대한 부정. 불가능한 소망인 줄 잘 알지만 포기할 수 없는 마음은 무용한 행위의 한없는 반복으로 가시화된다. 무위에 가까운 꽃 줍기=시 쓰기. “그때 그 꽃들을 주서다가 디리던 ― 그 마음과 별로 다름이 없”는 마음으로 써온 서정시들은 세상의 가치에 부응하는 일과는 관련이 없다. 이 꽃=시는 인공의 정원이나 공원에서 자라난 것이 아니며, 거기 이식되기도 어려운 종류의 것이다.
유용함의 세계에서는 서식하기 힘든, 무용함으로써 유용한 꽃=시의 위상은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맞는다. 3연에서 서정주는 ‘하늘’과 분리됨으로써 ‘땅’으로부터도 소외된 꽃=시의 운명을 노래한다. “줏어모은 꽃들”을 받아줄 이가 없는 ‘땅 위’는 하늘=부인(시의 정령)=꽃에 무한히 다가가는 마음으로서 ‘서정시’가 쓰일 수 없는 세계다. 이제 시는 정처(定處)가 없는 고독한 운명에 처한다. “내가 줏어모은 꽃들은 제절로 내손에서 땅우에 떨어져 구을르고 또 그런마음으로밖에는 나는 내 詩를 쓸수가없습니다”. 그런데 이 지점이야말로 시가 온전히 무용함에 노출되는 자리가 아닐까. 시의 정령이 떠나버린 세계,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어버린 세계, 자연과 점점 더 멀어지는 정원과 공원의 세계에서 시는, 시인은 오직 자신에게만 의지해 길을 가야 한다. 아름다움에 관한 상상 혹은 상상된 아름다움이라는 보상마저도 바라지 않은 채. 서정주가 이룩한 시세계 전체에 대한 평가는 이 시에 관해서는 일단 유보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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