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禪雲寺)
선운사는 일반인들에게 가수 송창식이 부른 유행가 가사에서 처음 들어보았을 법한 사찰이다. 관심이 없는 분들이라면 선운사가 전라북도 고창군 도솔산 북쪽 자락에 자리 잡고 있고 어떤 특징을 가진 절집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천년고찰 선운사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 577변 고승 검단선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이후 폐사된 사찰을 고려 공민왕 3년 1354년 효정스님이 중창하였고 조선시대 여러 차례 중창과 재건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선운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보물 제290호 대웅보전은 임진왜란때 전소된 것을 조선 광해군 5년 1613년 다시 지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인지 유난히 유서 깊어 보이는 선운사 대웅보전은 정면5칸 측면3칸의 정방형 평면구조를 가진 전각으로 다포계 맞배지붕방식으로 건축되었고 배흘림 기법을 적용한 두리기둥을 사용한 조선후기의 대표적 목조 건축물중 하나이다. 계절별로 특별히 아름다운 절이 있기 마련인데 선운사는 특히 봄에 더 빛을 바라는 절집으로 유명하다.
일직선으로 배치된 주요 전각 뒤편에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는 천연기념물 동백나무숲에 동백꽃이 피는 계절이 선운사를 둘러보기에 가장 적합한 계절이라는데는 별로 이견이 없다. 봄에 선운사를 찾아 이 동백꽃을 감상해보지 못했으나 선운사 경내에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분위기와 아름다움이 짐작이 간다. 선운사의 가람배치는 김천 직지사, 밀양 표충사와 비슷한 주요전각의 수평배치 구조를 하고 있다. 절의 앞쪽으로는 작은 내가 흐르고 넓은 평지위에 주요 전각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일주문과 통과하면 경내 옆구리를 통해 경내에 들어설 수 있으며 절집 한가운데 덩그러니 만세루가 자리 잡고 있다.
경내가 좀 썰렁한 느낌인데 아마 지금 처럼 어정쩡한 계절인 늦가을이나 초봄에 선운사를 찾았다면 이런 구조 탓에 아주 썰렁하고 황량한 느낌이 들 거 같다. 이런 분위기가 송창식의 유행가 가사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일반적인 고찰에서 찾아보기 힘든 경내 분위기가 아주 생경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선운사는 혼자 찾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절집인 것 같다.
선운사를 둘러보면서 또 하나 받은 느낌은 참당암,도솔암,동운암,석상암등 유난히 부속암자가 많다. 특히 선운사의 부속암자인 참당암은 도솔산 정상부근에 위치한 작은 암자지만 신라시대 의운화상이 창건하여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조선시대에 중수한 대웅전 건물이 지금까지 남아 보물 제803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당암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3칸의 작은 규모지만 전형식인 18세기 다포양식의 건축물로 조선후기의 빼어난 건축미를 가진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선운사를 찾는 분이라면 등반을 준비하여 도솔산 등반을 겸해 참당암을 꼭 한번 찾아 보기 바란다. 그럴러면 좋은 계절을 정해 시간을 내야 할 것이므로 어정쩡한 계절에 느끼는 썰렁함도 피할 수 있을거라 생각된다. 또 큰 규모의 절집보다 이렇게 꼭꼭 숨어 있는 작은 암자가 더 큰 감동과 특별한 여운을 느끼게 해 줄때가 있는데 선운사가 그런 경우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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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당간 systo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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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선운사 동백나무 숲
고창 선운사 동백나무 숲
고창 선운사 동백나무 숲
고창 선운사 동백나무 숲
선운사 동백나무숲
고창삼인리의동백나무숲
고창삼인리의동백나무숲
대웅전과 동백나무
고창 선운사 동백나무 숲종 목 | 천연기념물 제18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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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고창 선운사 동백나무 숲 (高敞 禪雲寺 동백나무 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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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 자연유산 / 천연기념물/ 문화역사기념물/ 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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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면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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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등록)일 | 1967.0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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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산68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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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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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자(소유단체) | 선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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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관리단체) | 고창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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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선운사 동백나무 숲에 대한 설명입니다.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꽃은 이른 봄에 피는데 매우 아름다우며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栢), 추백(秋栢), 동백(冬栢)으로 부른다.
고창 삼인리의 동백나무숲은 백제 위덕왕 24년(577) 선운사가 세워진 후에 만들어 진 것으로 나무의 평균 높이는 약 6m이고, 둘레는 30㎝이다. 절 뒷쪽 비스듬한 산아래에 30m 넓이로 가느다란 띠모양을 하고 있다.
고창 삼인리의 동백나무숲은 아름다운 사찰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사찰림으로서의 문화적 가치 및 오래된 동백나무숲으로서의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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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
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
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
고창삼인리의장사송
도솔암 장사송1
도솔암 장사송2
도솔암 장사송3
도솔암 장사송4
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
종 목 | 천연기념물 제35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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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 (高敞 禪雲寺 兜率庵 長沙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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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 자연유산 / 천연기념물/ 문화역사기념물/ 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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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면적 | 1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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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등록)일 | 1988.0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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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전북 고창군 아산면 도솔길 294 (삼인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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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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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자(소유단체) | 선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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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관리단체) | 고창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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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에 대한 설명입니다.
장사송은 고창 선운사에서 도솔암을 올라가는 길가에 있는 진흥굴 바로 앞에서 자라고 있다. 나무의 나이는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23m, 가슴높이의 둘레는 3.07m이다. 높이 3m 정도에서 줄기가 크게 세 가지로 갈라져 있고, 그 위에서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부챗살처럼 퍼져 있다.
고창 사람들은 이 나무를 ‘장사송’ 또는 ‘진흥송’이라고 하는데, 장사송은 이 지역의 옛 이름이 장사현이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며, 진흥송은 옛날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 앞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창 삼인리 도솔암 장사송은 오랫동안 조상들의 보살핌을 받아 왔으며, 나무의 모양이 아름답고 생육상태가 양호하며 보기 드물게 오래된 소나무로서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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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휴림의 여행지 탐방
선운사 동백꽃
겨울의 끝 자락, 꽁꽁 얼었던 땅이 서서히 해토(解土)를 준비를 할 무렵이면 술자리에서 어김없이 듣는 말이 있다.
- 올 봄엔 꼭 선운사로 동백꽃을 보러 갈 거예요. 정말이에요.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해도, 왠지 가슴 속 응어리를 토해내는 듯한 절절함이 느껴지는 말이 있다. 내겐 저런 말이 그렇게 느껴진다. 올 봄엔 꼭 선운사로 동백꽃을 보러 갈 거예요…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다. 그래서 저 말을 들을 때면 난 말없이 고개만 몇 번 주억거리고 만다.
이렇듯 선운사의 동백꽃은 많은 사람들에게 애절한 그리움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겐 그리움을 넘어 절대적인 로망이 된 것 같기도 하다. 과다한 시적 감수성을 지녔거나 혹은 지극히 상투적인 정서에 만족하거나 혹은 무언가를 닥치는 대로 그리워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행여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선운사의 동백꽃이 그렇듯 아름다운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이렇다. 글쎄…
어쨌거나 선운사의 동백꽃이 초봄 여행의 로망으로 군림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어떤 글이건 선운사를 이야기할 때면 반드시 동백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또 동백꽃을 이야기할 때면 선운사를 빼놓지 않는다. 글들도 대개 이런 식이다. 붉은 피를 토하듯 모가지째 툭툭 떨어진 핏빛 선연한 동백꽃을 보라… 이러니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이라면 선운사 동백꽃을 그리며 몸살을 앓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이렇듯 선운사 동백꽃이 초봄의 로망으로 자리잡은 데는 미당 서정주 선생이 크게 한몫했다고 할 수 있겠다. 미당 선생의 시 ‘선운사 동구’가 뭇사람들의 마음에 붉은 동백의 불을 지핀 것이다. 선운사를 이야기하는 글에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시라서 또 인용하기가 남새스럽지만, 그래도 시 자체는 흠잡을 데 없는 절창이니 다시 한 번 보도록 하자.
선운사 동구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읍디다
미당 선생은 선운사에서 20리 정도 떨어진 질마재에서 나고 자랐다. 훗날 고향에 들렀다가 동백꽃을 보러 선운사를 찾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너무 일러 동백꽃을 보지 못하고 그 아쉬움을 막걸릿집 여자의 목 쉰 육자배기 가락으로 달래고 왔다는 내용이다. 사소한 내용이지만 시의 흐름이 기막히게 절묘해서, 순식간에 읽는 이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시다. 그것도 질박하고 애절한 우리네 정서를 타고 흘러드니 가슴을 여밀 새도 없이 시에 젖어버리게 된다. 그러니 이 시를 읽노라면, 시의 흐름에 젖고 막걸리에 젖고 또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젖어, 마침내는 선운사 동백꽃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시고 동백꽃은 동백꽃이다. 이 시가 쓰여졌을 당시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내 생각에 요즘의 선운사 동백꽃은 결코 미당의 시보다 아름답지 못하다. 대웅보전 뒤쪽 산기슭을 가득 메우고 있긴 하지만, 철망으로 가로막혀 마치 교도소 면회하듯 데면데면하고, 또 동백나무가 너무 빽빽해 애절함이나 선연함 따위의 정서가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다. 모름지기 동백숲은 울창한 동백나무 사이를 거닐며, 나뭇가지에서 햇살 받는 동백꽃도 보고 또 부러진 채 바닥에 흩어진 동백꽃도 보고 그리고 울창한 숲 사이를 관통하는 뽀얀 빛 줄기까지 즐겨야 제격이다. 그런데 선운사 동백숲은 여행자의 그런 즐거움을 몽땅 박탈해 버린 것이다.
만일 누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치자.
- 선운사 동백꽃이 예쁘다며? 한 번 가볼까 하는데, 어때?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 좋지. 한 번 가볼 만하지.
그런데 그가 갑자기 시퍼런 칼을 내 목에 들이대며 다시 이렇게 물었다 치자.
- 정말 그렇게 좋아? 내가 보고 와서 후회하게 되면 책임질 수 있어?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 그럼 선운사보다는 다른 동백숲이 낫겠네…
장난기 섞인 비유지만 워낙 다들 좋다고만 하니, 선운사 동백꽃에 대해서 나는 이런 식으로 밖에 달리 이야기할 방법을 찾지 못하겠다. 그렇다고 내가 선운사를 낮게 보는 것은 아니다. 선운사에는 동백꽃보다 더 크고 화사한 그리움이 있다. 더위가 한풀 꺽이는 9월이 되면 선운사 앞 도솔천을 화사하게 수놓는 아름다움, 바로 선운사의 붉은 꽃무릇이다.
선운사 꽃무릇
오래 된 사찰을 돌아볼 때 무심코 지나치거나 놓치기 쉬운 곳이 바로 부도밭이다. 부도밭은 그 사찰 출신 고승들의 부도를 모셔놓은 곳이다. 그 사찰 대선사들의 부도를 모셔놓은 곳이니, 당연히 풍수에 능한 스님이 최고의 자리를 택했을 것이고 또 스님들의 지극한 공경과 보살핌이 보태졌을 자리다. 이런 까닭으로 고찰의 부도밭은 대개 분위기가 아늑하고 부드러우며 또 주변 경관이 빼어나다. 이런 부도밭에 앉으면 절로 마음이 차분해지며 주변의 아늑한 자연이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니 사찰을 찾을 때면 꼭 놓치지 말고 부도밭을 찾아볼 일이다. 우리나라 사찰 중에 부도밭이 특히 빼어난 절은 해남의 대흥사와 미황사, 부안의 내소사, 평창의 월정사 그리고 고창의 선운사를 꼽을 수 있다. 특히 선운사의 부도밭은 울창한 전나무숲과 맑은 도솔천을 거느리고 있어 가히 최고의 부도밭이라 불릴 만하다. 9월이면 이 아름다운 부도밭 주변에 화사한 붉은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해 그 아름다움이 배가 되는데 그 꽃이 바로 꽃무릇이다.
내가 처음 선운사 꽃무릇을 본 것은 4년 전이었다. 그때 도솔천과 부도밭 주변에 지천으로 피어난 붉은 꽃무릇을 보며 나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질 수 있을까… 붉은 꽃무릇으로 뒤덮인 도솔천은 멀리 어린 시절의 꿈결에서 흘러내리는 듯 아득했고 또 새벽 물안개가 피어 오른 듯 신비로웠다. 그뿐이 아니었다. 전나무숲을 붉게 물들인 꽃무릇은 마치 붉은 뭉게구름이 내려앉은 듯 몽환적이었다. 그때 그곳을 거니는 사람들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었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에서는 사람이 그대로 풍경이 되기도 하는구나…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거니는 사람들이 모두 화폭 속을 거니는 듯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한참을 어슬렁거렸다. 신선과 무릉도원이 어디 따로 있으랴. 이렇게 어슬렁거리면 내가 신선이고 이곳이 무릉도원이지… 아마 요런 건방지고 터무니없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아무려나, 그 이후로 9월이면 나는 연례행사처럼 꼭 선운사를 찾는다.
꽃무릇은 가끔 상사화와 혼동되는 식물이다. 아직도 선운사에 상사화가 피는 걸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두 식물의 특징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두 식물의 특징은 이파리와 꽃이 서로 다른 시기에 올라온다는 점이다. 초봄에 잎이 올라왔다가 여름이면 잎이 모두 지고 꽃대 하나만 달랑 남아서 그 꽃대 끝에 꽃이 핀다. 이렇게 잎이 다 떨어진 후에 꽃이 피니, 꽃과 잎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이 꽃과 잎이 서로를 그리워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상사화다. 꽃무릇도 마찬가지다. 이파리 하나 없는 초록색 꽃대만 삐죽 솟아서 그 위에 붉은 꽃이 핀다. 꽃무릇과 상사화는 모두 백합과의 식물로 사촌쯤 되는 것 같은데 꽃 모양은 확연히 다르다. 상사화는 백합처럼 비교적 단정한 모양인데 꽃무릇은 백합과라고 보기에는 그 생김새가 좀 어지럽다. 꽃잎과 꽃술이 모두 가늘고 긴데 이 꽃잎과 꽃술이 마구 흩어져 있어 단정하다기보다는 자유분방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상사화 역시 절 주변에 많이 피지만 상사화는 한여름에 피는 꽃이니, 꽃무릇이 피는 9월에는 상사화를 보기 힘들다.
여기까지가 선운사 꽃무릇에 대한 이야기다. 선운사는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봄이면 동백과 벚꽃이 피어나고 여름이면 맑은 계곡과 꽃무릇이 화려하고 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답고 겨울이면 설경이 빼어난 곳이니, 사계절 모두 아름다운 곳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울 때를 꼽으라면 단연 꽃무릇 피는 9월의 선운사다.
만일 스스로 생각하기를, 우리땅의 아름다운 속살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꽃무릇 피어나는 9월의 선운사를 절대 놓치지 않기 바란다. 아득하고 신비롭고 몽환적인 선운사의 도솔천과 부도밭을 꼭 거닐어 보고, 그리하여 스스로 아름다운 화폭 속을 드나드는 큰 즐거움을 느껴 보기를… 나는 글재주가 궁핍해 더 이상의 글을 쓰기 힘들지만 그래도 이렇게 9월의 선운사를 권하는 까닭은 그곳에 글로 표현하기 힘든 큰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운사의 꽃무릇에 흠뻑 젖어 보면 그 아름다움을 오래도록 가슴에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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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기왕에 선운사 이야기를 꺼냈으니 선운사에 대해서도 좀 알아보기로 하자. 선운사는 신라의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년)에 검단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창건설이 전해진다. 그러나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은 사실일 가능성이 희박하다. 진흥왕 당시 이곳은 백제의 영토였고 백제와 신라의 관계도 극도로 악화되어 있던 시기다. 그러니 진흥왕이 선운사를 창건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런데 선운사 뒤 선운산에 진흥굴이 있는 걸 보면 선운사와 진흥왕이 혹 무슨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진흥왕 창건설보다는 검단선사 창건설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데 여기에도 오류는 있다. 검단스님이 살았던 삼국시대에는 선종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이다. 선종은 통일신라 말기에 들어온 종파로, 이 선종 계열의 큰스님을 선사라 부른다. 그러니 선종이 들어오기도 전에 살았던 검단스님을 선사라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검단스님이나 검단대사로 부르는 것이 옳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의문은 선운사(禪雲寺)라는 절 이름이다. 검단스님이 절을 세우고 선운사라 이름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여기에도 ‘선(禪)’ 자가 들어가는 것이다. 삼국시대에도 ‘선(禪)’의 개념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선종이 들어온 통일신라 말기 이후에 선운사가 세워진 것인지… 선운사는 사적기가 전해오는 절임에도 창건에 관한 명백한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막연하게 백제 위덕왕 때 검단스님이 창건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이 검단스님에 대해서는 별로 전해지는 바가 없다. 다만 한강 남쪽의 검단산이 검단스님이 머물던 곳이라 하여 검단산이란 이름을 얻었다는 말이 전해질 뿐이다.
검단스님의 선운사 창건과 관련된 몇몇 설화가 있는데, 관심을 끄는 것은 소금과 숯에 관련된 설화이다. 소금에 관련된 설화는 이렇다. 선운사 창건 당시 도솔산(지금의 선운산) 인근에 도둑들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이 도둑들에게 소금 굽는 법을 가르쳐 양민으로 교화시켰다는 내용이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선운사에 소금을 바쳤는데 이 소금을 보은염(報恩鹽)이라 했고 이들이 살던 마을을 검단리라 했다고 전해진다.
숯에 관련된 이야기는 이렇다. 검단스님이 선운사를 창건할 당시 그 자리는 용이 살던 큰 연못이었다. 검단스님이 이 용을 쫓아내고 돌로 연못을 메웠는데, 그때 인근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고 한다. 그런데 연못에 숯을 가져다 부으면 씻은 듯이 눈병이 나아, 사람들이 너도나도 숯으로 연못을 메웠다는 이야기다.
사찰의 창건 설화에 도둑 이야기는 많이 나온다. 영주의 부석사도 그렇고 안성의 칠장사도 도둑을 교화하고 절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산중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가 절터가 되는 법이니 그 자리에 산도적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다만 선운사 창건 설화에는 백성들이 숯과 소금을 바쳤다는 이야기가 특이하다. 고대사회에서 사찰 창건은 보통 큰 일이 아니었다. 웬만한 재력과 권력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큰 사찰을 세우기 어려운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세워진 선운사의 설화들을 보면, 선운사는 검단스님을 존경했던 마을 사람들의 손으로 세워진 작은 사찰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볼 수 있다. 선운사 사적기에 따르면, 조선 중기에 행호스님이 선운사를 중창할 때 왕실 종친의 후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 행호스님의 중창 때 지금의 거찰이 된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선운사 창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선운사 창건에 백성들의 소금과 숯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전설은 다시 새겨볼 만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이제 선운사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부도밭을 지나면 바로 선운사의 정문 격인 천왕문이 나온다. 이 천왕문은 이층 누각 형태의 건물로, 1층에는 사천왕상이 있고 2층에는 범종과 법고를 놓았다. 천왕문과 범종각이 합쳐진 특이한 형태로 사찰이 아직 제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선운사의 강당 역할을 하는 만세루가 있다. 정면 9칸짜리 큰 누각인데 그 형태가 재미있다. 우선 누각치고는 너무 낮아서 시원한 맛이 없다. 누각이 낮은 건 다른 절에서도 가끔 볼 수 있는 형태이니 그렇다 쳐도, 건물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생김새가 가관이다. 주춧돌은 자연석 그대로를 쓴 막돌초석(덤벙주초)인데다, 기둥은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제멋대로이다. 기둥의 형태가 제각각이어서 어떤 건 배흘림기둥이고 또 어떤 건 민흘림기둥이다. 심지어 두 목재를 포개서 세운 기둥도 있는데 그 목재의 두께가 확연히 차이가 나서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덤벙주초야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우리 전통 방식이라지만, 그 엉망진창인 기둥이라니… 요즘 말을 빌리자면, 완전 어이 상실이다. 이런 생김새 때문에 만세루는 다른 건물을 세우고 남은 목재를 써서 지은 건물이라고도 하고 또 본래는 번듯한 건물이었는데 불에 탄 뒤 성한 목재만을 골라 다시 짜맞춰 세운 건물이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절집에 다니다 보면 이런 건물에 정이 간다. 반듯하고 화려한 건물은 멀리서 보기에는 좋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마음 편히 기대거나 털썩 걸터앉기에는 왠지 부담스럽다. 이런 내 성격을 두고 누구는 천성이 궁색해서 그렇다는데 그래도 나는 수수하고 털털한 것이 마냥 좋기만 하다. 그래서인지 선운사 경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물이 바로 만세루이다. 처음 봤을 때는 뭐 이런 건물이 다 있나 싶었는데, 두번 세번 보면서 만세루가 시골 외갓집처럼 살갑고 친숙해져 버렸다. 그 후로 선운사를 찾을 때면 나는 만세루에 걸터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곤 한다.
이 만세루 마루에 걸터앉으면 선운사의 중심 공간인 선운사 석탑과 대웅보전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선운사 석탑과 대웅보전은 그리 인상적이지는 못하다. 선운사 석탑은 6층석탑인 점이 특이하다. 석탑의 탑신은 3층, 5층, 7층 등으로 홀수층으로 만든다. 이는 홀수를 길하게 여기는 풍습에 따른 것이라 한다. 그런데 선운사 석탑이 짝수층인 6층인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조선시대 선운사를 중창한 행호스님의 기록을 보면 정유재란 때 당우가 모두 불타 없어지고 9층석탑만 남은 쓸쓸한 폐사지를 보고 중창을 결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즉 이 탑은 본래 9층이었는데 3층은 어디론가 유실되고 6층만 남은 것이다.
대웅보전은 맞배지붕 건물임에도 다포계 양식이라는 점이 특이한데, 이는 수덕사 대웅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규모가 큰 맞배지붕 건물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대웅보전 안의 불상도 그리 눈길을 끌 만한 형태는 아니다.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오히려 대웅보전 옆 작은 관음전 안에 있다.
선운사 관음전 안에는 희안하게도 관음보살 대신 말쑥한 지장보살상이 앉아 있다. 지장보살을 보시는 극락전이 따로 있음에도 관음전에 이 지장보살상을 모신 까닭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말쑥한 지장보살상이 선운사를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이다.
선운사 지장보살상의 정식 명칭은 금동지장보살좌상이며 보물 제279호이다. 조선시대의 불상이라는데 생김새가 너무 깔끔해서 방금 인사동에서 새로 사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불상의 얼굴은 대체로 넉넉한 편이고 또 턱을 이중턱으로 처리해 후덕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말쑥하고 넉넉한 얼굴에 비해 눈, 코, 입은 작은 편이다. 이런 생김새를 보고 누군가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처럼 생겼다고 했다는데, 예전에 나는 문득 부잣집 깍쟁이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심히 불경스러운 생각이지만 그때는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원래 불상이야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를 수 있으니, 그걸 죄랄 것까지야 없겠지만 사실 아직도 죄송스럽긴 하다. 그래서 다시 선운사를 찾게 되면 이 지장보살상을 독대하고 그 인상을 다시 꼼꼼히 살펴보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다시 선운사를 찾았을 때 지장보살상은 관음전을 떠나 성보박물관으로 이사를 한 상태였고, 성보박물관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넘길 수밖에…
이 지장보살상에는 영험한 힘이 있다고 전해진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이 불상을 훔쳐 일본으로 가져갔는데, 지장보살상이 소장자의 꿈에 나타났다고 한다. 꿈에 나타난 지장보살상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전라도 고창 도솔산에 있었으니, 그곳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소장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갔는데, 그 이후로 가세가 기울자 불길한 마음이 들어 지장보살상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고 한다. 그러자 새 소장자의 꿈에 또 지장보살상이 나타나고 그 집에도 우환이 들어 그 소장자도 지장보살상을 다른 이에게 넘겼다. 이런 식으로 계속 지장보살상을 소장하는 사람마다 우환이 끊이지 않자 마지막 소장자였던 사람이 이 지장보살상을 선운사에 기증하여 다시 제 자리를 찾아왔다는 이야기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지장보살상이 선운사로 돌아온 해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1938년이고 또 당시 기증자의 증언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고 하니,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세상에는 인간의 지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의 귀환 역시 그런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생각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백파율사비
선운사에서 마지막으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백파율사비다. 백파율사는 선운사에서 불가에 입문해 후에 선문의 종주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겐 백파선사와 초의선사가 주고 받은 선문논쟁으로 유명하다. 이 논쟁은 조선 후기에 사위어가던 불교의 선풍을 크게 진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논쟁은 삼종선 즉, 조사선과 여래선 그리고 의리선에 관한 것이었는데, 백파와 초의의 제자들에게까지 이어져 무려 100년간이나 계속되었다고 한다. 불교의 ‘선(禪)’이란 깊고도 오묘한 경지이니 한낱 여행자에 지나지 않는 내가, 과거 대선사들의 선문논쟁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할 순 없다. 그런데도 백파선사비를 눈여겨보라고 한 것은 이 비석에 새겨진 비문 때문이다. 이 비문은 그 유명한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추사 말년 최고의 수작으로 평가되는 글씨다. 과연 글씨라면 까막눈이나 다름없는 내게도 예사 글씨가 아님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글씨였다. 나는 벽파율사비 앞에서 한참 동안 추사의 글씨를 본 적이 있다.
비석 앞면의 큰 글씨는 힘과 기교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힘이 넘치는 첫 획과 마지막 획이 서로 힘의 균형을 이루고 그 사이의 기교는 자유롭되 분방하지 않았다. 힘은 기교를 누르지 않고 기교는 힘을 앞서지 않으니, 이것이 추사의 절제 미학이 아닌가 싶다. 전체적으로, 물 흐르듯 부드러운 글씨라기보다는 얼음을 깨부수듯 강인한 글씨다. 비석 뒷면의 작은 글씨는 획이 가늘어 앞면의 글씨보다는 한결 부드럽지만, 대쪽 같은 기개는 그대로다. 나이 칠십에도 강파른 성품을 그대로 글씨에 담아내다니… 백파율사비에는 타협을 모르던 고집불통 천재의 완고함이 팽팽하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추사는 이 글씨를 남긴 다음 해에 그 팽팽한 긴장의 끈을 놓고 세상을 떠났다.
이 비문이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추사와 백파의 관계 때문이다. 백파가 초의와 선문논쟁을 벌일 당시 초의의 절친한 벗이었던 추사가 이 논쟁에 끼어들게 된다. 추사는 유불선에 모두 능한 통유(通儒)로 알려진 인물이지만 당대의 대선사인 백파와 선문 논쟁을 벌이기는 아무래도 무리였던 모양이다. 추사는 마지막으로 ‘백파망증 15조(白坡妄證 15條)’라는 서한을 백파에게 보내게 되는데, 이 서한에 인신공격성 글들이 마구 들어가 결국 자신의 방자함과 부족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 한 구절인 망증 제12조를 보자.
“스님은 매양 80여년 공을 쌓은 나인데 그 누가 나를 넘어설 자 있느냐고 장담하더니 그 공 쌓은 것이 겨우 이것이요? 내 묻노니 심안상속(心眼相屬)이란 무슨 뜻이요? … 아무런 심증도 없이 이것저것 주워 보태서 입으로만 지껄이는 그 꼴이 점점 볼 만하도다. 이것이 스님의 망증 제12조요.”
논쟁이라기보다는 인격 모독에 가까운 글인 것이다.
그러나 추사는 역시 당대의 거인이었다. 제주도 유배를 끝내고 한양으로 돌아온 뒤 백파의 넓고 깊은 경지를 헤아리고 백파에게 ‘석전(石顚)’과 ‘만암(曼庵)’이라는 시호를 써서 보내주었다.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시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제자에게 주시라는 겸손까지 곁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백파가 입적하자 스스로 자청해 백파의 비문을 썼는데 그 비문이 바로 백파율사비문이다. 이 백파율사비문의 첫 문장을 보면 추사가 백파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근래에 우리나라에는 율사로 일가를 이룬 이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만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한때는 목불인견 취급을 하며 거칠게 다그쳤던 백파를 해동의 오직 유일한 율사로 칭송하고 있다. 어쩌면 이 큰 차이가 추사 김정희의 지난했던 삶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낸다 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추사는 행복한 사람이다. 당대의 대선사 백파의 비석 앞에서 후세 사람들이 백파보다 추사를 더 흠모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이 백파율사비는 얼마 전까지 부도밭에 있었는데 지금은 보호를 위해 경내의 성보박물관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이 비는 선운사 최고의 문화유산이므로 선운사를 찾을 때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본래 자리인 양지 바른 부도밭에서 보는 것이 제격이겠지만, 보호를 위한 일이니 아쉽더라도 성보박물관을 찾아 꼭 찬찬히 살펴보았으면 싶다.
나의 선운사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다. 앞에서 선운사 동백꽃에 대한 아쉬움을 비쳤지만 선운사 동백이 꼭 다른 동백보다 못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선운사 동백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크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선운사 동백도 아름답다. 그리고 선운사에 가면 어디 동백만 있는가? 그러니 선운사 동백을 그리는 사람들은 동백꽃 피는 3월말에 선운사를 찾아볼 일이다. 나 역시 그랬었다. 말로만 듣던 선운사 동백꽃이 보고 싶어 얼마나 조바심을 내며 봄을 기다렸던지.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선운사는 참으로 묘한 절이다. 대개 절이란 한두 번 가보면 그 절에 대한 감성적인 생각은 모두 지워진다. 그리고 감성과 느낌이 사라진 그 자리에 절의 실체가 자리하게 된다. 그런데 선운사는 그렇지 않다. 몇 번을 가고 또 가도 선운사를 생각할 때면 늘 아련하고 그리운 감성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왜 그런지 굳이 그 이유를 파고 들지는 않으련다. 내게도 늘 아련하고 그리운 절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느날 문득 가파른 삶이 힘겹게 느껴질 때면, 조용히 찾아가 마음의 안식을 구할 수 있는 그런 땅 한 조각쯤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혹 선운사에 가시거든 자신만의 이미지를 하나쯤 건져 오시기를. 선운사는 언제나 편안하고 아름다운 절이어서 누구든 자신만의 이미지를 훔쳐 올 수 있는 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틀림없이 자신의 마음 한 구석에 숨어 있는 깊은 상처를 곱게 어루만져 줄 것이기 때문이다.
www.hyulimbook.co.kr/story_03/834
선운사 ‘지장기도성지’ 옛 명성 되찾는다 | | | ‘금동 지장보살좌상’ 지장보궁 봉안…지장보살 선양운동 박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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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7월7일 선운사 지장보궁 불사 회향법회에서 스님들과 불자들이 삼귀의를 하고 있다. |
일제 강점기때 일본으로 밀반출돼 환수된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79호)이 선운사 지장보궁에 여법하게 봉안됐다. 제24교구본사 선운사(주지 법만스님)는 최근 지장보궁 불사를 마무리하고 7월7일 회향법회를 봉행했다. 이로써 선운사는 명실공히 지장기도 도량으로의 사격을 되찾게 됐다. 선운사는 예로부터 도솔산 자락의 본찰과 산내 암자에 삼지장 보살(선운사 지지 지장보살, 도솔천 내원궁 천장 지장보살, 참당암 인장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어 ‘삼 지장기도 도량’으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삼 지장보살좌상 가운데 고려후기에 조성된 금동지지 지장보살좌상이 1936년 일본인들에 의해 밀반출 되면서 한때 시련을 겪었다. 1936년 조선의 지장보살상을 불법으로 취득한 일본인은 지장보살의 현몽을 꾸었다. 꿈을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병까지 들고 가세가 기울자 보살상을 다른 이에게 넘겼다. 보살상을 받은 또 다른 일본인 역시 집안에 우환이 끊이자 않자 이 소장자는 1938년 조선으로 연락해 보살상을 반환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밀반출 된지 2년만에 선운사로 돌아왔다. 이후 금동지지 지장보살좌상은 도난과 훼손 등의 우려로 지금까지 박물관 유리관 속에 보관돼 있었다.
| | | 지장보궁 현판식 |
주지 법만스님은 “성보 보존의 필요성도 있지만 신앙의 대상으로 많은 중생과 불자들의 의지처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며 “국내 유일의 삼지장 기도도량을 일구신 역대 조사스님들의 불상 봉안정신과 지장보살님의 구제원력을 구현해 기도와 수행, 복지와 문화공동체를 아우르는 도량으로 거듭나겠다”고 금동지장보살좌상의 봉안 배경을 설명했다. 지장보궁은 연면적 731.25㎡(221평)의 2층 한옥구조로 정면 7칸, 측면 3칸이며 기존에는 선운사 성보박물관으로 이용됐었다. 이날 회향법회에는 전 선운사 주지 재곤스님, 조계종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범여스님을 비롯해 원로 대덕스님들과 본말사 스님들, 정만수 선운사 신도회장, 신도 등 3000여명이 참석했다. 법회에 이어 오후에는 지장보궁 앞마당에서 영산대재가 진행됐다. 한편 선운사는 향후 지장기도 성지의 사격에 맞는 지장보살 선양운동을 펼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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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 지장보살 반환 당시 찍은 사진과 반환 설명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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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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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禪雲寺)는 대한민국의 전라북도 고창군에 위치한 명승고찰이다.
백제 위덕왕 24년(577) 검단선사와 신라의 국사인 의운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정조 18년(1794) 임우상이 기술한 선운사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의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이곳에 와서 선운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법명을 법운자로 한 진흥왕은 중애공주와 도솔왕비의 영생을 위해 진흥굴 윗산에 중애암을, 만월대 아래에 도솔암을 각각 세웠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5년(1318)에 효정선사가 중수하였고 공민왕 3년(1354)에 재중수하였으며 조선 성종 5년(1474)에 행조선사가 중창하였다.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무장태수 송석조가 원준대사를 통해 1619년까지 5년간에 걸쳐 재건하였다.
선운사는 한때 89암자 24굴 189요를 갖춘 대찰로 억불숭유정책을 내세운 조선 시대에도 성종의 어실이 있을 정도로 번성했으며, 태종 때의 사찰폐쇄령에도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보존된 대찰이었다. 금동보살좌상·지장보살좌상·선운사 대웅전·참당암 대웅전·도솔암 마애불 등의 보물, 동백나무숲·장사송·송악 등의 천연기념물이 있으며, 석씨원류 경판·영산전목조삼존불상·6층석탑·범종·약사여래불상·만세루 백파율사비·참당암 동종·선운사 사적기 등 보물 5점, 천연기념물 3점, 기타 지방문화재 등 총 19점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문화재[편집]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간직한 산, 절
선운사에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79호),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 대웅전(보물 제290호), 참당암 대웅전(보물 제803호), 도솔암 마애불(보물 제1200호), 소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1752호) 등의 보물 6점과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제184호), 장사송(천연기념물 제354호), 송악(천연기념물 제367호) 등 천연기념물 3점이 있으며, 추사가 쓴 백파율사비(전북 유형문화재 제122호)를 비롯한 19점의 유형문화재가 있다.
이 가운데 도솔암 내원궁(전북 문화재자료 제125호)은 기암절벽 위에 조성된 우리나라 3대 지장기도처 가운데 하나로 연중 기도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다. 동학혁명 때 배꼽에서 비결을 꺼내갔다는 도솔암 마애불이 바로 발아래 있고, 위로는 검단선사에게 쫓겨 달아나던 용이 뚫었다는 용문굴이 크게 입을 벌리고 있다.
백파율사비는 생전에 추사와 선 논쟁을 벌인 조선후기 화엄학의 대종주 백파긍선 스님의 비다. 백파스님이 입적하자 추사가 애통해 하며 직접 짓고 쓰기를, “옛날에 내가 백파와 더불어 여러 번 왕복서한을 주고받으며 나눴던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이 헛되이 입에 올리는 내용과 크게 다른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알고 있을 따름이다. 비록 만 가지 방법으로 입이 쓰도록 설득하려 해도 모두 깨닫지 못하니 어찌 백파를 다시 일으켜 서로 마주보고 한번 웃어볼 수 있을까?”하며 당시 벌였던 선 논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선운사 대웅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고창 선운사 대웅전입니다. 선운사 대웅전(禪雲寺大雄殿)은 대한민국 보물 제290호다. 선운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단층 목조건물이다.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3년(광해군 5년) 재건하였다. 전면 5칸, 측면 3칸으로 긴 평면을 이루며, 단청 벽화가 뛰어나다. 단층 맞배지붕으로 전면 5칸에는 모두 빗살분합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되어 있다.
마애여래좌상[편집]
천연기념물[편집]
전라북도 유형문화재[편집]
- 선운사석씨원류(禪雲寺 釋氏源流) :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4호
- 선운사영산전목조삼존불상(禪雲寺靈山殿木造三尊佛像) :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8호
- 선운사육층석탑(禪雲寺六層石塔) :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9호
- 선운사범종(禪雲寺梵鐘) :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31호
- 선운사약사여래불상(禪雲寺藥師如來佛像) :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33호
- 선운사만세루(禪雲寺萬歲樓) :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53호
- 선운사백파율사비(禪雲寺 白坡律師碑) :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22호
- 선운사사적기(禪雲寺 事蹟記) :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55호
전라북도 문화재자료[편집]
체험 및 시설[편집]
템플스테이[편집]
선운사에서는 내·외국인을 위한 다양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