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했습니다

2016. 4. 5. 20:34들꽃다회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했습니다

김광우 (misulm****)

주소복사 조회 308 15.01.15 11:21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했습니다

 

   목멱산木覓山은 서울 남산南山의 다른 명칭이며, 남산을 인경산引慶山이라고도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태조太祖 4(1395) 1229일에 이조吏曹에 명해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경대부卿大夫 및 선비와 서민들은 제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목멱신사木覓神祀는 목멱산木覓山 꼭대기에 있었고, 해마다 봄과 가을로 초제醮祭를 행했습니다.

 

이조吏曹는 육조六曹의 하나로 문관文官의 선임과 공훈功勳, 봉작封爵, 관인官人의 성적成績, 고사考査, 포폄褒貶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정이품 아문衙門입니다.

초제醮祭는 도교의 제사로 별을 향해 지냅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따르면 서울의 목멱산 잠두봉蠶頭峰의 국사당國師堂 음사淫祀는 다음과 같습니다.

 

목멱산신木覓山神을 제사할 때 전사청典祀廳에서는 이를 국사당國師堂이라 사칭詐稱하고, 고려 공민왕恭愍王, 본조本朝의 승려 무학無學, 고려 승려 나옹懶翁, 서역西域 승려 지공指空의 상및 기타의 여러 신상을 걸어놓았습니다.

조선 정조正祖 때 편찬된한경식략漢京識略 사묘조에 따르면 춘추春秋로 목멱신사를 치제할 때는 무학無學의 화상畵像을 지각池閣에 옮겨놓는다했습니다.

또 맹인의 상과 여자아이의 상도 있는데, 여자아이를 천연두의 신이라 하면서 신 앞에 화장품 종류를 놓아두었으며, 대단히 추악했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자못 성행盛行하여 나라에서도 금하지 못했습니다.

전사청典祀廳1472(성종成宗 3) 각종 국가제사의 제물 주관 등을 위해 설치한 관청입니다.

나옹懶翁은 고려 제31대 공민왕恭愍王 때의 왕사王師였습니다.

지공指空은 인도 출신의 승려僧侶1326(충숙왕忠肅王 13) 고려에 와서 대단한 각광을 받았고 나옹화상懶翁和尙 혜근惠勤에게 법을 전했습니다.

 

   목멱신사, 일명 국사당은 현재 정상 팔각정이 있는 곳에 한강을 향해 서남향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창건創建에 대해서는 조선 태조太祖가 잠저 시에 왕위王位에 오를 것을 예언했던 함경도 영흥의 노파 모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전합니다.

잠저潛邸란 왕세자王世子와 같이 정상법통이 아닌 다른 방법이나 사정으로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또는 그 살던 기간을 말합니다.

목멱신사는 1925년 일제가 그 아래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이건移建을 강요해 지금의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산1번지 옮겼으며, 서울의 대표적인 굿당인 국사당國師堂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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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당


이용재 2008.02.18 14:46:08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목멱산을 찾았다.

“야, 이 산 이름이 뭐냐.”

“목멱木覓이옵니다. 나무를 구하는 산.”

“뭐라. 그럼 백성들 보고 만날 나무 베가라는 거 아냐. 이름 바꿔라.”

그래 목멱산은 남산이 된다. 산 정상에 국사당 건립. 무속신앙의 총 본부를 나라에서 세운 거다. 한양의 즐거움과 부를 수호하는 신당神堂.

나라가 망하자 일본은 1920년 남산 중턱 13만평에 조선신궁 건립 시작. 전국에 깔린 1,400개 신사의 총본부. 죄 없는 우리 백성들은 강제로 이 신사에 가서 절을 해야 되고.

“아빠, 신사神社가 뭐야?”

“일본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을 신으로 모신 사당.”

“그럼 우리 문묘와 비슷한 거야.”

“전혀 달라. 우리 문묘는 공자님을 비롯한 선비들을 모셨지만 일본의 신사는 전쟁영웅들을 모신 거야. 칼잡이들의 사당인 거지.”

1925년 조선신궁 준공식에 조선총독이 참석했다.

“야, 저 언덕위에 보이는 한옥 뭐냐?”

“국사당이옵니다.”

“뭐라. 위대한 우리 신사보다 높은 곳에 있네. 때려 부숴라.”

전국의 무당들이 대책회의를 열었다.

“야, 큰일 났다. 어디로 이사 갈까.”

“인왕산 선바위 아래로 가죠. 한양에서 유일한 불교의 성지.”

“아빠, 왜 산 이름이 인왕仁王이야.”

“어진 왕이 사는 동네라서.”


   1959년 이승만대통령은 이 국사당 터에 우남정이란 정자를 짓는다.

“아빠, 왜 정자 이름이 우남雩南이야?”

“이승만대통령의 호가 우남이걸랑.”

“뭔 뜻인데.”

“이대통령이 어렸을 때 우수현 남쪽의 오막살이집에서 살았걸랑. 그래 고향집을 그리워해서 지은 거야.”

“우수현雩守峴은 뭐 하는 데야?”

“비가 오지 않을 때 기우제를 지내던 고개.”

1960년 4.19 혁명. 독재자 이승만을 기리는 우남정 철거. 1968년 우남정 복원. 팔각정으로 개명.

독립문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가니 바로 국사당 올라가는 골목길.

“아빠, 이 동네 이름이 뭐야?

“현저동.”

“현저峴底가 뭔 뜻인데.”

“독립문에서 홍제동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인 무악재 아래 있는 마을.”

“그럼 왜 고개 이름은 무악인 거야?”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운 무학대사를 기리는 고개라서.”


   골목길 들어서니 바글바글. 재개발로 대형 아파트들 인왕산 훼손 중. 20분 쯤 올라가니 인왕사 일주문이 나온다. 안내지도 보니 20여개의 절과 암자들이 옹기종기 들어 서 있다. 서울의 센 무당들 집 수백채도 들어 서 있고. 거의 쓰러져 가는 수준.

가파른 골목길 계단으로 10분 쯤 더 올라가니 드디어 국사당. 가난이 흐르고. 남산에서 이사 온지 80년이 흘렀지만 손 본 적이 없는 거다. 기와지붕은 비둘기가 점령 중. 계단 조금 더 오르니 선바위다.






“아빠, 왜 이 바위 이름이 선禪이야?”

“바위 모양이 장삼을 두른 스님을 닮아서.”

“과천가는 4호선에 선바위역이라고 있던데. 그 선바위와 다른 거야?”

“과천에 있는 선바위는 서 있는 바위로 가짜야.”

“근데 왜 역 이름에 선바위를 쓴 거야? 헷갈리게.”

“그 동네에 유명한 문화재가 없어서 좋은 이름을 붙인 거야.”

   1392년 한양의 수석 건축가 정도전과 국사國師(왕의 스승)인 무학대사가 붙었다. 이미 조선이 불교를 배척하고 공자님을 모시기로 한 이상 불교의 성지인 선바위를 한양 밖으로 내 몰려는 정도전과 한양 안으로 넣으려는 무학대사의 기 싸움은 치열했다. 이를 중재해야 되는 이성계는 진퇴양난.

꿈에 한양에 밤새 눈이 왔다. 어라, 아침에 해가 뜨니 한양 6백만 평의 눈이 다 녹았다. 선바위 앞 눈은 그대로 남아 있고. 눈 녹은 경계에 18.2킬로미터의 한양성곽을 쌓는다. 무학대사는 땅을 친다. 우째 이런 일이. 이젠 중의 시대는 갔군.

1973년 중요민속자료 제 28호로 지정.

“아빠, 문화재도 등급이 있나보지.”

“응. 1등급은 국보, 2등급은 보물, 3등급은 사적, 4등급은 중요민속자료로 구분.”

“얼마 전 불탄 숭례문이 국보 제 1호지?”

“응.”

“보물 1호는 뭐야?”

“흥인지문.”

“사적 1호는?”

“경주 포석정지.”

“그럼 중요민속자료 1호는?”

“덕원공주의 당의”

“덕원공주가 누군데?”

“조선의 제 23대 왕 순조의 셋째딸.”

“당의唐衣는 뭐야?”

“조선시대 여인들이 입던 예복.”

“국보는 전부 몇 개야?”

“407개.”

“그중에 목조 건축물은 몇 개야?”

“23개.”

“그럼 23개 중에 1개를 잃은 거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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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설과 관련된 것이 3경제도라는데

3경제도가 뭔가요?


개경,서경,,..을 중요시한 건가요?

조병민 | 2016.01.06 16:55 | 조회 97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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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내용

  • 고려의 행정 구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고려의 행정 구역은 성종 초부터 정비되었으며, 전국을 5도 양계와 경기로 크게 나뉘었다. 그 안에 3경·4도호부·8목을 비롯하여 군·현·진 등을 설치하였다. 995년(성종 14ko.wikipedia.org

    3경[편집]

    고려의 삼경(高麗三京)은 ① 중경·서경·남경 ② 중경·서경·동경 ③ 서경·남경·동경를 일컫는다.

    고려삼경은 도참사상(圖讖思想)[4] 에 따라 창건된 것으로, 시대에 따라 일정치 않았으나 대개 위의 세 가지를 말한다. 역대 왕이 이를 중요시하였다.

    고려 땅에 삼경이 있는데 송악(宋岳)이 중경이 되고 목멱양(木覓壤)은 남경이 되며, 평양이 서경이 되어 왕이 11·12·1·2월에는 중경에 거하고, 3·4·5·6월에는 남경에 머물고, 7·8·9·10월에는 서경에 머물면 36국(國)이 조공(朝貢)하리라.
     
    — 《도선기》, 풍수설(風水說)

       고려의 경(京)은 왕경(王京)으로서의 개경(開京), 태조 때 설치한 서경(西京), 987년(성종 6)에 경주를 고쳐 동경(東京)이라 하여 중경·서경과 함께 삼경의 체제를 갖추었고, 현종 때는 동경의 격(格)을 낮추어 경주라 하고 동경유수(東京留守)를 폐하였다가 후에 다시 설치하였다. 1067년(문종 21) 때 양주(楊州)[5] 에 남경을 설치하여 실지로는 사경(四京)이었으나, 동경은 그 존폐가 잦았으므로 풍수설에 들지 못하게 되고 그 중요성을 잃게 되어 사경이라 하지 않고 보통 삼경이라 하였다.

    따라서 남경이 설치되기 이전의 삼경은 중경(中京)[6]·서경(西京)·동경(東京)이다. 남경이 설치된 후에는 왕이 순행하던 삼경은 중경·서경·남경이며, 왕경으로서의 개경을 제외한 삼경은 서경·동경·남경을 말한다.[7]

    1254년에 충주목을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시키기도 했으나 곧 다시 충주목으로 격하되었다. 1269년에 서경을 원나라에 빼앗겨 동녕부가 되었다가, 1290년에 돌려받아 서경이 다시 설치되었다. 1308년에 동경을 계림부(鷄林府)로, 남경을 한양부(漢陽府)로 개편하고, 1369년에 서경에 만호부를 설치했다가 후에 평양부(平壤府)로 고치면서 경(京) 제도는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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