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3. 13:27ㆍ美學 이야기
1.정신과 아름다움을 담은 공예미술의 결정체-사리장엄구
무진당 2009.09.22 21:37
1. 정신과 아름다움을 담은 공예미술의 결정체 사리장엄구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유물-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가정하자. 그 사람이 연인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다.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위대한 스승일 수도 있고, 엇나가고 싶을 때마다 정신을 번쩍 들게 해주던 인생의 멘토일 수도 있다. 그 사람이 있어 오늘의 내가 있고 그가 내미는 손길이 있어 넘어질 때마다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었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평소 그 사람이 쓰던 물건이 그 사람을 대신할 것이다. 그가 자주 쓰던 볼펜과 수첩. 때묻은 손지갑과 자동차 열쇠. 뒷꿈치가 닳은 양말과 소매 끝이 헤어진 와이셔츠. 이제는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여권과 주민등록증. 사소한 물건이지만 그 물건 속에는 추억과 그리움이 담겨 있기에 그 물건을 볼 때마다 떠난 사람을 보듯 뭉클해질 것이다. 더불어 주인을 잃어버린 물건을 볼 때마다 떠난 사람의 부재를 확인해야 하는 남겨진 사람의 비통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비통함은 그가 남긴 사소한 물건을 보며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 물건이 볼펜이나 수첩처럼 사소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몸을 화장한 유골이라면 어떨까. 만약 그 사람이 그저 나와 같은 공간을 섞여 산 사람이 아니라 나의 생사문제를 해결해주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 준 신과 같은 존재라면 어떨까. ‘그 분’의 유골은 곧 그 분의 말씀이고 가르침을 넘어 그 분 자체일 것이다.
B.C 480년경 중인도의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밑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 분의 유체(遺體)를 다비(火葬)한 후, 사리(유골)를 봉안하기 위해 탑을 만들고 사리장엄구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사리가 곧 존경하는 그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리는 범어(Sanskrit)의 'Sarira'를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으로 ‘몸’, ‘신체’를 의미하는데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신골(身骨)’을 뜻한다. 사리는 다시 둘로 나뉘는데, 부처님의 몸에서 나온 뼈나 유골을 ‘진신사리(眞身舍利)’ 라고 한다면, 부처님이 설법한 내용을 기록한 경전이나 부처님의 치아, 손톱, 머리카락, 혹은 옷과 바리때, 지팡이 등을 ‘법신사리(法身舍利)’ 라고 부른다. 나중에 우리나라에서는 승려의 화장유골까지 넓은 의미에서 사리에 포함시켰다.
다비된 불사리가 곧 석가모니를 대신한다는 생각은 보편적이었는 듯, 마투라족이 모시고 있던 불사리는 주변의 여덟 나라에서 나눠주기를 요청하였고 사리를 나눠 받은 왕들은 각국으로 돌아가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했다. 이것을 근본팔탑(根本八塔)이라 한다. 그 후 아육왕(아쇼카왕)은 근본팔탑의 7탑에서 사리를 꺼내어 전국에 8만4천 탑을 세웠는데, 불교가 중국에 전파된 이후 수나라의 문제(文帝)는 ‘중국의 아육왕’을 자처하며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똑같은 모양으로 설계된 5층목탑을 전국 100여 주에 건립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처음에는 중국을 통해 들여온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을 세웠지만, 탑은 늘어나는데 진신사리의 수효는 한계가 있어 깨끗한 모래나, 수정, 보석, 불경 등의 법신사리로 진신사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렇게 탑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500년 동안 불상이 만들어지지 않던 ‘무불상시대(無佛像時代)’에 보리수, 빈대좌, 불족적과 함께 석가모니를 대신하는 예배대상이었다. 무불상 시대가 오래 지속된 이유는 당시 인도에서는 종교적인 지도자를 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관습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교는 석가모니 개인을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고, 석가모니를 진리를 깨달은 위대한 스승으로 존숭했기 때문에 굳이 불상을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불상을 만드는 대신 석가모니의 유골인 사리를 스투파에 봉안하고 예배하였으며 그 분이 쓰던 물건들이 함께 존숭되었다. 그러니까 탑에 봉안된 사리야말로 석가모니의 빈 자리를 대신하는 최고의 예배대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만큼 사리장엄구는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공예기술자가 최고의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만들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불교를 대표하는 사리장엄구가 불교라는 종교의 테두리를 벗어나 각 나라 미술사를 대표하는 명작이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서양에서도 중세 때 ‘성골(relic) 숭배’ 에서 순례여행과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 성골숭배란 성인의 뼈나 이빨 등의 신체 일부나 성인이 물건을 금, 은 보석으로 장식하여 성스럽게 경배하는 의식이다. 성직자나 일반 신도들은 성골이 큰 기적을 행한다고 믿어서 성골에 기도하기 위해 순례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초월적인 존재에 마음을 의탁하고자하는 심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사리장엄구-
2009년1월 14일 미륵사지 석탑 해체조사 중 내부 적심부재와 심주석을 해체조사하는 과정에서 1층 제1단 심주석 상면에 마련된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번 발굴은 금제사리내호와 금제사리외호를 비롯하여 미륵사 창건 배경과 발원자, 석탑 건립연대를 알 수 있는 금제사리봉안기가 출토되었다. 그 밖에도 불사리 12과와 은제관식과 금제소형판, 금제족집게, 은제과대장식, 원형합, 칼, 유리판, 구슬 등이 출토되어 1370년을 뛰어 넘어 백제시대의 찬란한 문화재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왼쪽)1.미륵사지석탑, 높이14.24cm, 백제, 전북 익산, 국보11호
(오른쪽)2.익산미륵사지탑 사리장엄 발견 당시 모습
(왼쪽)3.금동제사리외호, 높이13cm, 어깨 폭7.7cm,
(중앙)4.금동제사리외호 뚜껑
(오른쪽)5.금동제사리외호 몸체
(왼쪽)6.금동제사리내호, 높이5.9cm, 어깨폭2.6cm,
(중앙)7.금동제사리내호 뚜껑
(오른쪽)8. 사리
(9)금동제사리봉안기, 가로15.3cm, 두께1.3mm,639년. 앞면99자, 뒷면94자, 총193자.
이번 미륵사지석탑 사리장엄구의 발굴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학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사리가 전래된 때는 진흥왕 10년(549)년에 중국 양나라의 무제(武帝)가 신라에 불사리를 보내와 왕이 백관들로 하여금 흥륜사 앞길에 나가 맞아들이게 했다는 내용이 가장 이른 기록이다. 또한『일본서기』를 보면, 위덕왕35년(588)에 백제에서 승려와 불사리를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적어도 6세기 후반쯤에는 삼국에서 사리를 봉안하고 사리장엄구가 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익산미륵사지에서 년도가 확실한 백제시대의 사리장엄구가 완전한 형태로 발굴되어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사리장엄구의 실물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리봉안기에 적힌 내용에 의하면,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 왕후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639년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탑을 조성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로써 미륵사지가 무왕과 결혼한 선화공주에 의해 지어졌다는『삼국유사』의 서동설화와 차이가 있어 학계에 과제를 안겨주었다.
익산은 백제 제30대 무왕(600-641년)이 무기력해진 왕권을 안정시키고 약화된 국력을 가다듬기 위해 수도 천도를 꿈꾸던 도시다. 무왕 때 추진된 것으로 보이는 왕궁리의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그 정교함과 아름다움이 우리나라에서 단연 최고라 할 수 있다. 특히 연꽃 대좌를 갖춘 녹색 유리사리병은 당시에 가장 귀한 소재로 여겨지던 유리로 만들었는데 유연한 몸체에 연꽃봉우리 형태의 금마개를 덮고 있어 세련된 기법의 공예기술을 느낄 수 있다.
(10)왕궁리오층석탑사리장엄구, 높이9.5cm,국보123호, 국립전주박물관
(왼쪽)11. 녹유사리병과 사리내함,높이10.5cm
(오른쪽)12. 녹유리사리병 높이7.7cm
미륵사지탑과 왕궁리탑 출토 사리장엄구가 백제의 공예수준을 보여준다면,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통일 대업을 달성한 신라의 저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사리기는 상자형으로 된 청동제 사리외함에 화려한 장식의 전각형사리내함을 넣었으며 내사리기 안에 다시 수정제사리병을 안치하여 본격적인 사리장엄법식을 갖추었다. 사리외함의 네 면에는 사자장식 손잡이와 구름무늬를 배경으로 사천왕상이 장식되어 있다. 또 전각형사리내함에는 방형기단의 상하에 복련과 당초문대가 장식되어 있고, 각 면에 두 개의 안 상이 조각된 기단 모서리에는 네 마리의 사자가 지키고 서 있다. 4명의 승상과 사천왕상이 놓여진 상대에는 중앙에 사리병이 안치되어 있고 그 위를 영락장식을 한 천개를 드리웠다.
신문왕2년(682년)에 창건된 감은사는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만큼 사리장엄구 또한 당시의 건
축, 조각, 공예 기술이 집약된 금속공예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왼쪽)13.감은사지삼층석탑 사리장엄구, 통일신라 682년경,국립중앙박물관, 보물366호
(중앙)14.금동전각형사리기, 높이16.5cm,
(오른쪽)15.금동전각형사리기 세부1
(왼쪽)16.금동전각형사리기 세부
(오른쪽)17.금동사리외함, 높이 27.0cm,
감은사지사리장엄구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가장 신라적인 느낌을 간직한 작품은 송림사전탑사리장엄구일 것이다. 금판을 오려 만든 전각형 사리장엄구의 내부에는 녹색유리잔 속에 사리병을 안치하였고, 금판 꽃잎장식을 단 천개에서는 신라금관에서 볼 수 있는 드림장식이 드리워져있다.
(왼쪽)18.송림사오층전탑사리기, 통신, 국립대구박물관, 높이 22.3cm,보물325호
(중앙)19.돈황 148굴의 벽화. 상단에 부처열반 후 유해를 화장하는 모습이 보인다.
(오른쪽)20.사리장엄구 일괄, 당694년경, 대운사탑
그런데 필자는, 학자들이 전각형이라 부르는 송림사사리장엄구를 볼 때마다 그 모습이 마치 꽃상여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부처님의 유골을 담은 사리기를 무덤인 탑에 봉안한다고 가정한다면 사리장엄구를 만든 장인이 꽃상여를 보고 영감을 받아 지금과 같은 형태를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의 사리내함이 중국의 관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본다. 이렇게 문화는 똑같은 종교가 서로 다른 지역에 뿌리를 내릴 때도 그 지역의 정서에 맞는 옷을 갈아 입는다. 그래서 각 나라의 예술작품을 비교분석하고 시대적인 특징을 살펴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고 가슴 설레는 일이다. 게다가 그 예술품을 만들기 위해 작품의 쓰임새와 목적을 생각하며 두드리고 쪼고 다듬었을 장인의 노고를 생각하면 장인의 솜씨 안에 담겨질 사리를 친견하는 일 만큼이나 숙연해진다. (조정육)
*이 글은, 『붓다의 나들이』 창간 준비호(2009년 9/10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blog.daum.net/sixgardn/15770137 조정육의 행복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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