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4. 11:51ㆍ美學 이야기
水月觀音圖(수월관음도) 불교 이야기
수월관음도
[ Water-Moon Avalokitśvara Painting, 水月觀音圖 ]
목차
정의
개설
연원 및 변천, 내용
현황
의의와 평가
정의
중국에서 당송(唐宋) 시대 이후 형성된 33변화관음(變化觀音) 중 하나인 수월관음의 모습을 도상화한 불화.
개설
일반적으로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의 연못가 바위 위에 앉아 선재동자의 방문을 받는 관음보살도의 모습을 기본 구성으로 한다. 중국 당말(唐末) 오대(五代) 돈황(敦煌)에서 제작된 수월관음도들이 현존하는 수월관음도 중 가장 이른 작품이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제작된 관세음보살화 대부분이 수월관음도에 속한다.
연원 및 변천, 내용
중국에서 수월관음도의 성립은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 기록에 의거하여 8세기 중후반 활동한 당대(唐代)의 궁정화가 주방(周昉)이 창안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돈황이 티베트의 점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중원에서 활동한 주방의 수월관음도가 돈황에 전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현존하는 돈황 수월관음도는 제작 연대가 가장 이른 작품들이며, ‘수월관음보살(水月觀音菩薩)’명(銘)과 기년명(紀年銘)이 있는 세 작품이 남아있다. 이 세 점의 돈황본 수월관음도는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와 도상에 있어 연관성이 많은데 이러한 도상의 기원에는 9세기 중엽에 중국에서 개창된 관음 성지인 보타산(普陀山) 관음 성지와 관련이 있다. 성지가 개창된 후 보타산에 거하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관음을 찬송하는 게송이 만들어지고 관음경전의 위경(僞經)인 『고왕경(高王經)』이 첨부되는데, 이 『고왕경』 게송과 관련된 ‘보타산관음도(普陀山觀音圖)’ 도상이 불화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특히 대나무가 세 그루가 표현되는 도상은 대표적인 것으로 이후 전개되는 송원대(宋元代) 수월관음도에서도 계속 볼 수가 있다. 돈황의 수월관음도에서 살펴 볼 수 있는 수월관음신앙은 망자 추복, 안산(安産), 해난구제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후 송원대(宋元代) 수월관음도 전개에서는 북송말 백묘화(白描畫)로 유명한 이공린(李公麟)이 그린 관음화의 형상이 수월관음도의 도상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하는 연구가 있다. 또한 『화엄경』과 관련하여 53(55)선지식역참(善知識歷參) 도해 역시 수월관음 도상 확산에 기여하였다. 보타낙산(보타산) 관음 묘사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보타산 관음을 친견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한편 관세음보살은 바닷가 동굴 같은 곳에 윤왕좌(輪王坐)의 자세로 앉아 있고 암좌에는 풀이 깔려 있으며, 버드나무가지는 정병에 꽃혀 있고 관음보살의 건너편 아래쪽으로 선재동자가 배례하고 있다. 이러한 도상들은 고려 수월관음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보타산 관음성지가 개창된 이후 ‘보타산관음도’가 유입되면서 동해안 낙산(洛山)에 관음성지가 정해지고 낙산사(洛山寺) 창건 설화가 만들어진다. 낙산 설화에서는 두 그루의 대나무가 등장하는데, 이는 세 그루의 대나무를 표현한 중국 수월관음도와 고려 수월관음도를 구별하는데 가장 큰 도상적 특징이다.
고려의 낙산 설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권3 탑상(塔像) 제4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관음(觀音)·정취(正趣), 조신조(調信條)에서 전거한 의상대사(義相大師)와 관련된 내용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낙산’이라고 명명된 시기와 의상대사 활동시기와는 실제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의상과 관련된 낙산 설화는 후대에 가탁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즉, 낙산 설화의 성립은 대략 10세기 초엽 경까지 이루어졌을 것이며, 이것은 현존하는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의 제작 시원을 시사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월관음’ 이라는 명칭은 관음보살이 물에 비친 달을 보며 금강보석 위에 앉아 있으면서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화엄경』「입법계품」 의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견해가 있다. 최근 연구에서는 『화엄경』80권본에 ‘수월중(水月中)’이라는 표현에서 근거하여 맑은 물이 있으면 달은 언제나 나타난다는 평등한 법성(法性)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물에 비친 달의 실체는 없다는 평등한 공(空)사상을 나타낸 것으로 보았다.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의 도상적 특징은 관음이 앉아 있는 암좌의 풀방석, 선재동자의 좌법 등으로 지적되는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도상의 전거는 화엄경의 한역본 가운데 하나인 『40화엄경(華嚴經)』에서 근거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또한 이러한 특징 외에 관음보살이 들고 있는 염주 등은 당시 송대(宋代) 불화가 서하(西夏)와 고려에 파급되면서 서하불화와의 유사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수월관음도는 조선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제작되어 관음신앙은 시대를 넘나들며 지속적으로 유행되었음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고려 수월관음도의 측면향의 반가좌한 형태가 정면향의 윤왕좌(輪王坐)로 바뀌게 되고, 두 그루였던 대나무는 세 그루로 변화하는 등 도상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조선후기에는 수월관음의 특유 착의였던 투명 베일이 흰색인 백의로 바뀌면서, 후불벽 뒤에 벽화로서 조성되게 되었다. 특히 19세기 수월관음도는 종래의 존상화적인 이미지의 관세음보살상은 퇴색되어져 가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배경에는 선행하는 불화 도상의 수용과 더불어 민간에 유통되었던 관음화보가 영향을 주었다.
현황
현재 고려시대 수월관음도는 국내를 비롯한 일본, 미국, 유럽등에 40여점이 현존하고 있다. 특히 다수의 수월관음도가 일본에 전해지고 있는데, 단독 도상으로서는 고려불화 150여점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어, 관음신앙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전기 후기를 막론하고 다수의 수월관음도가 제작되는데 전기의 예는 대다수 일본에 유존되고 후기는 사찰에 관음전, 원통전이 조성되면서 그 후불화로서 봉안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수월관음도 중에 고려시대 제작된 수월관음도는 그 제작기법, 재료 등에 있어 복채법, 금니의 사용으로 화려함을 특징으로 설명할 수 있고, 다수의 고려시대 수월관음도는 융성했던 관음신앙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조선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조성된 수월관음도와 그 도상의 변모를 통해 시대를 넘어선 관음신앙의 성행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찬란한 불교미술의 세계, 불화』(김정희, 돌베개, 2009)
『고려시대의 불화』(시공사, 1996)
『고려불화-한국의 미 7』(문명대, 중앙일보사, 1981)
「낙산설화와 고려수월관음도, 보타산관음도장」(황금순, 『불교학연구』18, 불교학연구회, 2007)
「고려 수월관음도에 보이는 〈40화엄경〉의 영향」(황금순, 『미술사연구』17, 미술사연구회, 2003)
「이학소장 수월관음도의 표현과 기법」(정우택, 『단호문화연구』창간호, 1996)
「고려 수월관음 도상의 연원에 대한 재검토」(강희정, 『미술사연구』8, 미술사연구회, 1994)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blog.daum.net/hoyeong1009/106 마태산
고려의 혼을 담다-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國寶寶物 史蹟地
고려의 혼을 담다-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고려불화의 백미 수월관음도
국내외에 160여점 남아있는 고려불화 중 40여점이나 되는 수월관음도는 압도적인 숫자라고 하겠다. 대부분 일본에 있는 고려불화들은 질質, 양量면에서 매우 뛰어난 것으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고려불화는 벽화를 포함하여 20여점에 불과하다. 근래 일본에 산재한 고려불화가 특별전을 통해 대대적으로 공개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종교화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바뀌어진 결과 오늘날까지 불화가 국보 9점, 보물 87점. 총 96점이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는 불화가 종교화의 차원을 넘어 예술품으로 인정을 받은 것으로써, 감상자가 감동을 받는 경지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대표작을 꼽으라면 불교회화와 청자 등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의 일반회화가 희귀하게 남아있는 상황에서 160여 점이나 되는 고려불화는 그 자체가 모두 국보급 예술품으로서 당시 중국불화보다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만큼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독보적인 미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고려불화의 백미는 수월관음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예가 지난 달 경남 통도사 성보박물관의 특별전(4.30~6.7)에 출품된 수월관음도(도판9 일본 경신사鏡神社 소장)이다. 1310년(충선왕2)에 궁중의 여러 화원들이 이 수월관음도를 공동 제작하기 위해 거대한 한 폭(세로419cm 가로254.2cm)의 비단을 사용하였다. 고려불화 중 가장 큰 대작大作인 동시에 왕실발원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이 수월관음도는 숙비叔妃인 김씨의 발원에 의해 내반종사內班從事의 직책을 가진 궁중화가 김우문 등이 그렸으며, 서구방이 단독으로 조성한 1323년 작作 수월관음도(일본 경도京都 천옥박고관泉屋博古館 소장)에도 내반종사란 직급이 보인다. 따라서 이 두 수월관음도는 섬세한 필치의 명확한 형태묘사, 풍부한 금니의 사용, 아름다운 색채, 치밀한 문양 등에서 궁중화원의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충선왕의 총비寵妃였던 숙비는 언양군彦陽君 김문연金文衍의 여동생으로 과부였으나 1297년 충렬왕비인 원성왕후가 죽자 그해 8월 세자(충선왕)가 왕을 위로하기 위하여 왕에게 바쳤으며 1308년 충렬왕이 죽은 후 충선왕이 숙비로 삼았다. 이 수월관음도를 제작한 목적은 알 수 없으나 충렬왕 사후 1310년 특별주문에 의해 직조된 비단 크기라든가 여러 궁중화원이 동원된 점으로 미루어 충렬왕의 극락왕생을 빌며 충선왕과 숙비 자신의 복福을 기원 했던 그녀의 권세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14세기는 고려불화의 수준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로 여러 차례 원나라에도 불화를 보냈고 고려의 관음상 그림들이 매우 공교롭다고 칭찬까지 받을 정도였다. 이러한 조성배경에서 제작된 우학문화재단 소장 14세기 수월관음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14세기 수월관음도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란 글자의 뜻 그대로 달이 비친 바다 가운데 금강보석金剛寶石에 앉아있는 관음보살을 그린 그림이다. 수월관음은 살아서는 재난과 질병을 막아주고 죽어서는 극락정토로 인도해주는 관음보살의 하나로, 《화엄경》 입법계품에 의하면 관음보살은 남쪽 바닷가에 위치한 보타락가산에 거주하면서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공상적인 분위기로 묘사되는 보타락가산은 온갖 보배로 꾸며졌고 지극히 청정하며 맑은 물이 솟아나는 연못이 있다. 고려시대 유행한 수월관음도는 이 보타락가산을 배경으로 선재동자의 방문을 받은 관음보살이 설법하는 장면을 도상화한 것이다. 선재동자는 구도자로서 53선지식을 두루 찾아 뵙고 진리를 터득했다는 인물로, 53선지식 가운데 28번째가 관음보살이고 그 장면을 도상화 한 것이 바로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이다.
일반적인 수월관음도는 오른쪽을 향한 측면관의 관음보살이 푸른 물로 둘러싸인 암굴 속에 오른발을 왼쪽 무릎에 올린 반가좌의 자세로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으며, 문수보살의 지시에 따른 선재동자의 방문을 받는 수월관음도가 대부분이다. 이외에도 버드나무가지를 꽂은 정병과 한 쌍의 청죽靑竹 등의 표현은 호화스럽고 정교한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의 한 특징이다.
이와같은 일반형식의 수월관음도 외, 다양하게 변형된 수월관음도가 다수 전한다. 앞서와 같은 일반형식에 첨가된 장면은 용왕과 그 권속, 또는 제난구제상諸難救濟像과 같은 《법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변상 외 둥근 달, 혹은 상단에 둥근 달과 하단에 용왕 및 그 권속이 등장한 예이다.
이 수월관음도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실(7월 개관)에 특별전시 중이다. 이 그림은 우학문화재단에서 구입할 당시 액자상태로, 1994년에서 1996년까지 보수작업(박지선, “이학李鶴 소장 고려불화 - 수월관음도의 보존수복에 관하여”, 『단호문화연구丹毫文化硏究』 창간호, 용인대학교 전통문화연구소, 1996, pp. 49-75 참조)을 통해, 처음에는 족자였던 것이 서양식 액자틀에 넣으면서 사방이 조금씩 잘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두광, 신광, 보관, 오른손 외에도 대나무, 왼손 팔목, 정병, 입술, 목선, 오른발, 가슴선 등을 부분적으로 덧칠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리 및 복원을 거쳐 원래의 모습을 거의 되찾은 바, 배채背彩기법을 사용한 색채가 매우 양호하다. 이 그림은 관음보살이 오른발을 왼쪽무릎에 올린 반가좌의 자세로 바위에 앉아 선재동자를 굽어보고 있는 전형적인 수월관음도의 일반형식을 따르고 있다.
화려한 문양의 옷과 장신구를 착용한 관음보살이 걸터앉은 바위는 가장자리에서 금빛을 발하고 있어 몽상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이 바위아래 물가, 관음보살의 왼발을 받치고있는 작은 연화좌 옆으로, 봉오리진 연꽃, 산호와 진귀한 보석들이 가득 차 있다. 금선의 원형頭光과 신광身光에 둘러싸인 관음보살의 등 뒤로 대나무가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있다. 관음보살의 시선이 머무는 오른쪽 구석, 대각선의 위치에 상반신을 굽히고 두 손 모아 공손하게 관음보살을 올려다보는 선재 동자 위, 화면의 중간쯤에 청자인 듯한 녹색 정병이 희미하게 보인다.
관음보살은 보름달 같은 얼굴의 이마 중앙에는 백호가 선명하고 눈초리가 올라간 긴 눈은 반쯤 뜨고 있으며, 작고 도톰한 붉은 입술, 초생달 같은 눈썹 등은 고려시대 보살상의 얼굴 모습과 유사하다. 불상이 장식된 높은 보관 밑으로 머리카락이 양쪽 귀를 감싸고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오른손은 수정염주를 들었고, 왼쪽 팔은 돌출한 바위 위에 기대고 있다. 두 손과 팔뚝에는 팔찌를 끼고 화려한 목걸이를 했다. 가슴만 가린 상체는 투명한 베일로 드러나 보이며, 치마는 거북등껍질문양(귀갑문) 바탕에 타원형 연꽃무늬가 반복된 붉은 치마를 입었다. 치맛단에는 연꽃과 덩굴문양이 연속되었는데 팔목에 걸쳐 양쪽으로 길게 늘어진 옷자락도 덩굴 당초문양이 화사하다.
붉은색, 녹색, 청색을 중심으로 흰색, 황색의 귀한 광물질 안료는 절제된 우아한 색으로 요즈음의 울긋불긋한 합성안료인 단청 색과는 구별된다. 석채는 선명도 높은 원색임에도 불구하고 화사하고 차분한 색조는 배채법背彩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화면 뒤에서 칠을 하여 안료가 앞면으로 배어나오게 하는 기법으로 신체나 복식 등에 주로 사용하고 있다. 즉, 뒤에서 백색안료를 칠한 후, 앞면에서 다시 붉은색이나 황토계 안료를 엷게 칠하여 부드러운 살색을 연출하거나 불의佛衣의 경우 뒤에서 붉은색을 칠한 후 앞면에 색을 칠하지 않고 그 효과를 그대로 살려 은은한 파스텔 톤의 색감을 연출하기도 한다.
밑그림은 먹선으로 신체의 윤곽을 잡은 후, 그 위로 가는 붉은 선을 사용하였으며 이 주변을 붉은색으로 엷게 선염처리하여 입체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옷주름선 역시 보다 짙은 색의 굵은 선으로 처리하여 효과적이다.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의 큰 특징은 투명한 표현 기법이라고 하겠다. 그 첫째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길게 늘어진 베일인데, 신체가 드러나는 투명한 흰색에 금으로 보상화원문이 새겨져있다. 둘째, 수월水月의 의미처럼 달빛을 받아 환하게 나타난 관음보살은 어두운 바탕색과 달리 두·신광은 점차 엷은 갈색으로 구분하고, 신체는 더욱 밝게 묘사하여 달이 존재함을 상징하고 있다. 셋째, 오른손에 든 수정구슬 염주 안의 붉은 실이 투명하게 비쳐 보인다.
이 수월관음도는 투명한 베일을 걸친 관음보살의 고귀한 자태가 어둠 속에서 마치 달처럼 아름답게 빛나며 현신하는 것 같은 신비한 효과를 주고 있는 데에서 표현기법상의 우수한 경지를 엿볼 수 있는 국보급 문화재라고 하겠다.
글·유마리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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