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견 남자(子見南子)

2016. 4. 6. 13:25잡주머니



      

성호사설 제22권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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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사문(經史門)


자견 남자(子見南子)



   윤유장(尹幼章)이, “공자(孔子)가 남자(南子)를 보고 나서 맹세하기를, ‘내가 그렇게 않는다면 하늘도 싫어할 것이다.’ 하였는데 그 ‘그렇게 않는다면’ 이란 것은 그렇게 해야 한다의 반대말이니 그 당시에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부자(夫子)가 위(衛) 나라에서 벼슬하여 녹을 받지 않아서, 진실로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면 반드시 남자와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위 나라 세자(世子) 괴외(蒯聵)는 쫓겨나 송(宋) 나라로 도망쳤으나 괴외는 분명 죄가 없었던 까닭에 그가 위 나라로 되돌아왔을 때 《춘추(春秋)에도 ‘세자(世子)’라고 썼다. 세자가 죄를 얻게 된 것은 송자 조(宋子朝) 때문이었으니, 그가 도망쳐 송 나라에 가서 있었다는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별도로 지어 놓은 것이 있기에 더 이야기하지 않는다. 부자께서 정공(定公) 14년에 위 나라로 가셨는데, 그 해는 바로 세자가 쫓겨나 도망치던 해다. 그러니 남자를 만난 뜻은 혹 그에게 잘 타일러서 해혹시킬 방법이 있었던 것일까? 성인(聖人)은 도가 크고 덕이 넓어서 지나는 곳에는 풍속이 변해지고 무엇을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신화(神化)처럼 되는 것이니, 그때에 혹 위 나라의 혼란을 막을 희망이 있었다면 성인으로서는 반드시 달갑게 여겼을 것이다. 영공(靈公)이 아무리 무도했다 할지라도 모든 열국(列國) 중에는 오직 위 나라에 어진 이가 많았고, 남자가 아무리 음탕했다 할지라도 어진 인재를 뽑아 등용시켰으니, 거백옥(蘧伯玉)이 궁문(宮門)을 지난 일에서도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영공 같은 어둡고 미약한 임금으로서 어떻게 그 오래 전해온 세업(世業)을 스스로의 힘으로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공자께서 이로부터 네 차례나 위 나라로 돌아오셨는데 사씨(史氏)도 반드시 ‘돌아왔다.’라고 쓰기를 노(魯) 나라의 예와 같이 하였으니, 성인이 위 나라에 머뭇거리면서 못잊어 하신 것은 아마 어진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가의 존망은 군자(君子)에게 달려 있는 것이고, 군자의 진퇴는 그 나라의 임금에게 매인 것이므로 부자께서 위 나라를 차마 잊지 못했던 것이다.
몇 해 후에 도망친 사람의 아들[亡人之子]이 왕위(王位)를 잇게 되고, 남자도 그를 허락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부자께서 남자를 한 번 만나 본 힘이 도움이 되어 그러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자는 반드시 나라를 뒤흔들었을 것이니, 다만 괴외의 머리만 떨어졌을 뿐 아니라 첩(輒)도 마찬가지로 목숨을 보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첩이 그의 아비를 막을 때에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다. 이보다 앞서 자로(子路)가 ‘정사를 하신다면, 무엇부터 먼저 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부자께서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지 않고 ‘명분부터 바로잡겠다.’고 하셨다.
만약 첩이 부자를 등용하여 그 말씀을 드렸다면 그는 아버지를 맞아들여서 높이 섬기고 정사에는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였을 것이니, 《예기(禮記)》에 이른 폐질(廢疾)과 같은 예가 되었을 것이다. 첩은 남자에게서 나라를 받았으니, 모든 말은 순조롭고 이에 들어맞는다.” 하였다.
소손(小孫) 구환(九煥)이 “일찍이 나대경(羅大經)의 《학림옥로(鶴林玉露)》에 이런 말이 있는 것을 보았다.” 하니, 나중에 다시 상고해 봐야겠다.


[주C-001]자견 남자(子見南子) : 공자가 위 영공(衛靈公)의 부인 남자(南子)를 만나봄. 이 말은 《논어》옹야(雍也) 편에, “子見南子 子路不說 夫子矢之 曰予所否者 天厭之”라고 보임. 남자(南子)는 춘추 때 위 영공의 부인으로 미색이었음. 송(宋) 나라 공자(公子) 조(朝)와 간통하므로 태자(太子) 괴외(蒯聵)가 미워하여 죽이려 하자 남자는 령공에게 태자를 참소하여 추방시켰음. 그 뒤 괴외가 임금이 되어 남자를 죽였음. 《春秋左傳 定公14年》
[주D-001]윤유장(尹幼章) : 실학자(實學者) 윤동규(尹東奎)의 자. 호는 소남(邵南). 이익(李瀷)의 문인. 벼슬의 뜻을 버리고, 상위(象緯)ㆍ역법(曆法)ㆍ천문ㆍ지리ㆍ의약 등 실생활에 필요한 실용적 학문의 수립을 주장하여 실학파의 대가가 되었음. 《사수변(四水辨)》을 지었음.
[주D-002]내가 그렇게 않는다면 하늘도 싫어할 것이다 : 이 말의 해석은 양설이 있다. 고주(古註)에는 ‘否 不也 厭 棄也 言我見南子 所不爲求行治道者 願天厭棄我”라 하였고, 주자 집주에는 ‘否 謂不合於禮 不由其道也’라 했는데 여기서는 앞의 것을 따랐음.
[주D-003]세자 : 《춘추좌전》애공(哀公) 16년 조에 “衛世子蒯聵 自戚入于衛 衛侯輒來奔”이라 보임.
[주D-004]영공(靈公)이 …… 볼 수 있다 : 어느 날 밤 위 영공이 부인 남자와 함께 앉아 있을 때 수레 소리가 들려왔다. 궁궐 앞에서는 그 수레 소리가 멈추었다가 궁궐을 지나서 다시 계속되었다. 그것을 이상히 여긴 위 영공은 부인에게, “저 수레를 타고 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가?” 하자 남자는, “그 사람은 필시 거백옥(蘧伯玉)일 것입니다.” 했다. 영공이, “무엇으로 거백옥인 줄을 아는가?” 하자, 남자는 “예에 ‘공문(公門)에서는 수레를 내리고, 노마(路馬)를 보고는 허리를 굽힌다.’ 하였는데, 거백옥은 위 나라의 현대부이니 어두운 밤이라 해서 예를 폐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했다. 《列女傳 仁智傳》
[주D-005]도망친 사람의 아들[亡人之子] : 도망친 사람은 괴외. 아들은 출공첩(出公輒)을 이름. 괴외가 추방된 뒤 영공이 죽자, 위 나라에서는 괴외의 아들 첩을 임금으로 세웠다. 그 진(晉) 나라 조씨(趙氏)에게 망명해 있던 괴외는 조씨의 도움을 얻어 환국(還國)하려 하였으나 위 출공은 군사를 동원하여 부자간에 공방전을 벌였다. 그 4년 뒤 괴외는 위 나라의 권신 공회(孔悝)의 도움으로 출공첩을 몰아내고 드디어 임금이 되었다. 이가 바로 위 장공(衛壯公)이다. 출공은 노(魯) 나라로 망명하였다가 3년 뒤에 다시 환국하여 임금이 되었음. 《史記 衛康叔世家》
[주D-006]명분부터 바로잡겠다 : 이 대문은 《논어》자로(子路) 편에, “子路曰 衛君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必也正名乎”라고 보임.
[주D-007]폐질(廢疾) : 《예기》왕제(王制) 하에, “廢疾 非人不養者 一人不從政”이라고 보임.
[주D-008]《학림옥로(鶴林玉露)》 : 송(宋) 나라 나대경(羅大經)이 찬한 것으로 16권. 대경의 자는 경륜(景綸). 그 사적은 고증할 길이 없다. 시화어록(詩話語錄)과 같은 것으로 인용한 것은 주자ㆍ장식(張栻)ㆍ진덕수(眞德秀)ㆍ위요옹(魏了翁)ㆍ양만리(楊萬里) 등의 말이 많고, 육 구연(陸九淵)의 말도 있음. 그 종지(宗旨)도 역시 문장ㆍ도학의 이자(二者)에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철희 (역) ┃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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