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寒岡) 정 구(鄭 逑)

2016. 4. 6. 13:45잡주머니


         정   구(鄭 逑)

성명(姓名)

 정구(鄭逑)

본관(本貫)

 청주(淸州)

시대(時代)

1543(중종38)~1620(광해군12)

자(字)

도가(道可)

호(號)

한강(寒岡)

이력(履歷)

정구(鄭逑)  1543(중종38)~1620(광해군12)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시호는 문목(文穆), 사중(思中)의 아들, 김굉필(金宏弼)의 외종손, 오건(吳健)에게 수학, 조식(曺植), 이황(李滉)에게 성리학(性理學)을 배웠다. 1573년(선조 6)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예빈시 참봉(禮賓寺 奉)에 이어 1578년 사포서 주부(司圃署主簿), 그 후 삼가(三嘉)·의흥(義興)·지례(知禮)등지의 현감(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1580년(선조13) 비로소 창녕 현감(昌寧縣監)에 부임, 선정(善政)을 베풀어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이듬해 지평(持平)이 되고 동복 현감(同福縣監)에 이어 1585년 교정청(校正廳)의 교정랑(校正郞)이 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를 교정(校正)했다. 그 후 통천 군수(通川郡守)·우승지(右承旨)·강원도 관찰사·성천 부사(成川府使)·충주 목사(忠州牧使)·공조 참의(工曹參議) 등을 역임, 1608년(광해군 즉위)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사람을 모두 용서하라고 상소한 뒤 고향에 돌아갔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상소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했고, 향리에 백매원(百梅園)을 세워 유생들을 가르쳤다. 경학(經學)을 비롯하여 산수(算數)·병진(兵陣)·의약(醫藥)·풍수(風水)에 이르기까지 정통했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뛰어나 예학에 관한 저술이 대부분이다. 많은 제자를 배출했으며 당대의 명문장가로써 글씨도 잘 썼다. 인조반정(仁祖反正:1623) 후 이조판서에 추증(追贈). 성주(星州)의 회연서원(檜淵書院), 천곡서원(川谷書院), 충주(忠州)의 운곡서원(雲谷書院), 창녕(昌寧)의 관산서원(冠山書院), 성천(成川)의 학령서원(鶴翎書院), 통천(通川)의 경덕사(景德祠) 등에 제향(祭享).

 

 

정구(鄭逑)  시대 : 조선전기

   국적 : 한국

   생몰년 : 1543(중종 38)~1620(광해군 12)

   정의 : 조선 광해군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생 애

  자는 도가(道可)이고, 호는 한강(寒岡)이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본관은 청주(淸州)로 오건(吳健)에게 수학하고, 조식(曺植)·이황(李滉)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9세 때에 부친을 여의고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13세 때 오건에게 나가 배움을 청했다. 10세 전에 이미 사서를 독파한 그는 오건에게서 『주역(周易)』을 배웠다. 21세에는 중형(仲兄)과함께 이황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24세에는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1580년(선조 13) 38세에 비로소 창녕현감에 부임, 선정(善政을 베풀어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50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원도 관찰사 등으로 분골쇄신하였다. 1608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관련자를 용서하라는 상소를 올린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상소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했다.

향리에서 백매원(百梅園)을 세워 유생들을 가르쳐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경학(經學)을 비롯하여 산수(算數)·병진(兵陣)·의약(醫藥)·풍수(風水) 등에 능통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명문장가로서 글씨에도 뛰어났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사 상

  그의 학문적 특징은 성리학적인 것과 예학적인 것, 경세론적(經世論的)인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의 학문은 관념론보다는 실제론, 리기론(理氣論)보다는 심성론(心性論)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성리학과 예학은 전통적인 영남학풍(嶺南學風)을 계승하였는데, 이황과 조식의 학풍 가운데 조식의 학맥으로부터 영향을 더 받은 듯하다. 그는 주희(朱熹)나 이황과 같이 성즉리(性卽理)의 입장에서 인간 본성을 천리(天理)와 보편 이성으로 보았으며, 리존기비(理尊氣卑)를 인정함으로써 윤리적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학문적 관심이 예학으로 쏠린 것은 이에 연유한다.『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예기상례분류(禮記喪禮分類)』·『가례집람보주(家禮集覽補註)』·『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심의제도(深衣制度)』 등은 예학에 관한 그의 해박한 지식과 깊은 연구가 나타나 있는 저술들이다.

그의 예설(禮說)은 육례(冠·婚·喪·祭·鄕·相見) 가운데 사례(四禮)를 더 중시하였다. 경세론적인 연구에 대한 저술에 『고금충모(古今忠謀)』·『고금치란제요(古今治亂提要)』 등과 같이 정치의 규범과 득실을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파악하려 한 것이 있고, 『고금인물지(古今人物志)』·『고금명환록(古今名宦錄)』 등과 같이 인물의 전기(傳記)를 통하여 역사의 교훈을 보이려 한 것이 있다.

경세(經世)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창산지(昌山志)』를 비롯한 각 지방의 지지류(地志類)와 의학 관계의 『의안집점(醫眼集占)』·『광사속집(廣嗣續集)』 등에는 구체적인 경세의 방법들이 제시되어 있다. 그의 경세론은 허목(許穆) 등 근기학파(近畿學派)에 속한 학자에게 계승되어, 이익(李瀷)·안정복(安鼎福)·정약용(丁若鏞) 등에 의해서 더욱 심화·발전되었다.

 영 향

  그는 동서와 남북의 분당 쟁론에 가담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제자는 영남과 비영남을 막론하고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

 저 서

  저서에 『한강집(寒岡集)』이 있으며, 편서로 『성현풍범(聖賢風範)』·『곡산동암지(谷山洞庵誌)』·『태극문변(太極問辨)』·『와룡지(臥龍誌)』·『역대기년(歷代紀年)』·『관의(冠儀)』·『혼의(婚儀)』·『장의(葬儀)』·『계의(?儀)』·『갱장록(羹墻錄)』 등이 있다.

 기 타

  성주(星州)의 동강서원(東岡書院)·회연서원(檜淵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 충주(忠州)의 운곡서원(雲谷書院), 창녕(昌寧)의 관산서원(冠山書院), 통천(通川)의 경덕사(景德祠)에 제향(祭享)되었다.

 

 

鄭逑 1543년 (중종 38)~1620년 (광해군 12)

대학자, 자는 도가, 호는 한강, 본관은 청주, 사중의 아들이며, 충익공 곤수의 아우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이질이 있어 영특하고 수발하여 보는 이 마다 신동이라 일컬었다. 7,8세에 대학, 논어를 배워 이미 대의를 알고 9세에 신공의 상사를 당하여 집상하고 곡읍하기를 성인과 같이했다 오건에게 수학하였고, 이퇴계, 조남명을 찾아가 심경을 묻고, 혹은 출처와 대절을 의논하고 성리학을 배웟다. 1573년(선조 6) 학행으로 천거되어, 예빈시참봉에 이어 사포서주부에 제수되고 그후 삼가, 의흥, 지례 등의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1580년(선조 13)에 비로소 창녕현감에 배하자, 불음을 받고 나가서, 선조가 인견하고 대학의 공정을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삼강팔조가 수기, 치인의 방도 아닌 것이 없아오니 천덕과 왕도는 다만 홀로 삼가는데 있습니다」하니 임금이 즐겁게 받아드렸다.

  현에 이르자 가숙의 제도를 모방하여 사경에 서재를 짓고 훈장을 두어 날마다 가르치고 글 읽는 것으로과업을 삼고, 향음, 향사, 양노의 예를 행하니 읍민들이 생사당을 세워 공이 돌아간 뒤를 생각하려 하였다. 임진왜란에 공이 통천군수가되어 의병을 일으켜 토적할 제, 격문을 열읍에 전하여 진정으로 개유하여 정예한 군사를 소집해 가지고 적굴속에 출입하면서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

  그후 승지, 감사, 참판 등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다. 1609년(광해군즉위)에 임해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사람을 모두 용서하라고 상소한 뒤 귀향했다. 광해 4년(1612)성주에서 칠곡의 노곡으로 이거 한후 광해 6년에 다시 칠곡의 사수동으로 옮겨 그곳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공은 당대에 대문장가로 가장 이름이 높았다. 효종 8년(1657)에 영의정에 증직되고 성주의 회연서원에 향사했다. 시호는 문목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칠곡부읍지(漆谷府邑誌)

 

 

<원주의 인물>

정 구(鄭 逑)

1543년(중종 38)∼1620년(광해군 12)

조선 중기 문신·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판서 사중(思中)의 아들. 신동이라 칭송. 1563년(명종 18) 이황(李滉)·조식(曹湜)에게 성리학 배움. 1573년(선조 6) 예빈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1580년 창녕현감. 1584년 동복현감, 1591년 통천군수. 1592년 임진왜란 때 격문을 각군에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도록 선도. 1596년(선조 29) 강원도관찰사. 원충갑(元沖甲) 사단(祀壇)을 설치하고 원천석(元天錫) 묘에 제사. 성천부사·충주부사·공조참판·대사헌 역임. 인조반정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 성주 외연서원(檜淵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 충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 창녕의 관산서원(冠山書院), 성천의 학령서원(學翎書院), 통천의 경덕사(景德祠) 등에 제향. 저서는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設分類)』·『고금충모(古今忠謨)』·『심경발휘(心經發揮)』·시호는 문목(文穆)

 

 

澗松堂文集(문고 보관)

心經發揮 (古枕 151.56 정17걁) (古 151.56 정17걁A)

鄭逑 著.

木板本. -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哲宗9(1858?)].

4卷.附錄.合2冊 ; 31.4x21.7cm.

四周雙邊. 半匡 ; 20.3x16.7cm.有界.11行20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序 ; 鄭逑(1603).

卷末 ; 戊午(1858?)...?.

진덕수(眞德秀)의 《심경》에다가 제가(諸家)의 설을 첨가해서 진의(眞義)를 적은 책이다. 1603(만력 31)년에 정구(鄭逑)가 편성한 것이다. 원래 《심경》은 송대에 진덕수가 편찬한 것인데 그의 주해에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또한 부록으로서 주자의 태극도설(太極圖說), 정백자(程伯子)의 정성서(定性書), 정숙자(程叔子)의 호학론(好學論), 장자(張子)의 서명(西銘), 주자(朱子)의 인설(仁說), 또 정백자(程伯子)의 행장략(行狀略), 주자(朱子)의 행장략(行狀略) 등을 수록한 것이다. 정구(鄭逑)는 서문에서 "서산(西山)의 이 책은 전후경전의 교훈을 선발해서 심학(心學)의 대본(大本)을 세운 것이라 하여 한번 개권(開卷)하면 성역(聖域)으로 들어가 천지에 참찬(參贊)하게 되는 소이(所以)가 정연하게 나타나서 선성선사(先聖先師)가 바로 이 마음을 지시하는 듯할 것이다"고 극찬하였다. 그러므로 평소 정씨(程氏)의 주(註)가 명료하지 못한 것이 많아서 정주(程朱)가 발명해서 개시하신 대훈(大訓)이 편입되지 못한 것이 파다(頗多)함을 이상하게 여기던 중 이 책을 위해 분류하여 집록(輯錄)하고 경(敬)의 일자(一字)에는 조금 서산(西山)의 예에 방(倣)해서 더욱 상세히 한 것이다. 또한 부록으로 각 책을 뽑아 심경발휘라고 제목한 것을 어찌 감히 외인에게야 보일까마는 모두 이 책이 반포되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자신의 여년(餘年)에 완독(玩讀)하는 자료로 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음을 보여준다.

 

 

太極問辨 (古枕 152.52 정17졁3) (古 152.52 정17졁2)

鄭逑 著.

木板本. - [發行地不明] : 檜淵書院, 顯宗8(1667).

1冊(73張) : 揷圖 ; 29.5x19.4cm.

四周雙邊. 半匡 ; 20.4x15.1cm.有界.10行18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序 ; 李廷龜(1622).

跋 ; 金止男(1623).

刊記 ; 丁未(1667)檜淵書院開刊.

조선 중기의 학자인 정구가 이언적과 주돈이, 주희 등의 태극에 대한 학설을 모아 그 이론을 정리한 책이다. 처음 이언적이 손숙돈(孫叔敦)과 조한보(曺漢輔)에게 태극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일이 있는데 그 손자 준(浚)이 이것을 이황에게 질정을 구하여 이황의 찬탄을 받은 일이 있고 그 뒤 이황 문인인 정구에게 비평을 청하였다.

정구(鄭逑)는 이 글이 태극에 대한 학설로는 진수가 된다고 확신하고 여기에 주돈이의 《태극도설》과 주희가 육구소(陸九韶)·구연(九淵) 형제에게 보낸 왕복서찰을 첨가하여 이 책을 간행한 것이다. 초간본은 화산부(花山府)에서, 중간본은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 나왔으나 약간의 미진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 책은 회연서원(檜淵書院)에서 그것을 보충하고 체재를 바꾸면서 개간한 것이다. 첫머리에 이정구(李廷龜)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초간자인 김지남(金止男)의 발문과 고정십일칙(考訂十一則)이 있다. 권수는 태극문변목록·주자태극도, 권상(卷上)은 답육자미구소서(答陸子美九韶書) 2편, 여주회주서(與朱晦疇書)·답육자정구연서(答陸子靜九淵書) 각 1편. 권하(卷下)는 서망재망기당무극태극설후(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서망재망기당제일서(書忘齋忘機堂第一書)·답망기당제이서·답망기당제삼서·답망기당제사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수(卷首)는 주돈이의 학설을 수록한 것이고, 권상(卷上)은 주희와 육구소 형제간의 왕복서한, 권하(卷下)는 이언적과 손숙돈과 조한보 사이에 있었던 왕복서간을 수록하여 태극설에 대한 맥락을 분명히 하였다.

이 책의 간행으로 태극설의 체제가 주돈이 - 주희 - 이언적으로 이어져 이 학설이 정통임이 밝혀지고, 반면에 육구소·구연 형제와 손숙돈, 조한보의 학설은 이단(異端)으로 폄억(貶抑)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 논변에 주요한 부분을 지적하면 주돈이가 《태극도설》에서 말한 "무극이태극"은 육구소·구연 형제가 유가의 정통이 아니고 노자(老子)의 학설에서 따온 것이라고 반박한 데서부터 비롯된다. 육구소·구연 형제는 이 글이 《태극도설》과는 부합되지 않음을 지적하여 이것이 주돈이의 설이 아닌 타인의 설임을 강조하면서 주희가 주석한 내용을 포함시켜 공격하였다. 그리고 조한보와 손숙돈도 육구소·구연 형제와 견해가 비슷한데 대한 이언적의 해명이 돋보인다.

 

 

※ 寒岡先生文集 (古西 810.819 정17큁)

鄭逑 (1543∼1620) ; 字 道可, 號 寒岡, 本貫 淸州.

木板本. - [發行事項不明].

零本2冊 ; 30.1x20.9cm.

四周雙邊. 半匡 ; 20.1x15.7cm.有界.10行20字.註雙行. 上下向二葉花紋魚尾.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인 정구의 시문집이다. 정구는 성주(星州) 출신이다. 현감·군수 등을 거쳐 우승지·강원감사·공조참판 등을 지낸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문신이지만, 그의 진면목은 그보다도 학문과 덕행에 특히 높은 비중을 둘 만한 인물이었다. 즉 그는 일찍이 향시를 거친 뒤 과업(科業)을 버리고 오직 학문에만 온 정력을 기울였는데 그의 스승이 이이(李珥)·조식(曺植)·박경신(朴慶新) 등 당대의 거유(巨儒)들이며, 또 뒤에 그가 정(程)·주(朱)를 모신 천곡서원(川谷書院)에 종사된 것이라든지, 기타 동강(東岡)·학영(鶴翎) 등 양 서원에 또한 향사 되었던 사실 등을 통해서도 짐작이 된다. 이 밖에 그의 학문에 관해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 실린 것을 미루어서도 대강은 짐작을 할 수가 있다.

본집에 수록된 글들을 중심으로 본다면 그의 본령은 아무래도 예론(禮論) 또는 고대 복식제도(服飾制度)의 연구에 있는 듯 하다. 그런데 《해동명신록》에 열기(列記)돼 있는 그의 저술 목록과 본집에 수록된 내용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즉 명신록에 따르면 그의 저서로 《심경발휘(心經發揮)》·《관의(冠儀)》·《혼의(婚儀)》·《설의(설儀)》·《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선장록(羨墻錄)》·《성현풍범(聖賢風範)》·《고금충모(古今忠謀)》·《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심의제도(深衣制度)》·《무이지(武夷志)》·《곡산동암지(谷山洞庵志)》·《와룡지(臥龍志)》·《역대기년(歷代紀年)》·《고금회수(古今會粹)》·《경현속록(景賢續錄)》 등이 가장(家藏)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실상 본집에는 이와 같은 글들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지 않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위 저술 목록 중 본집에 그 전문(全文)이 실려 있는 것은 《설의(설儀)》(契會立儀로 돼 있음)와 《심의제도(深衣制度)》(深衣製造法) 2편뿐 나머지는 모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 가운데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심경발휘(心經發揮)》·《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경현속록(景賢續錄)》·《무이지(武夷志)》등은 서문 또는 발문만이 수록돼 있을 뿐이다.

이 문집은 서문과 발문이 없어 개인(開印) 경위 및 그 연대를 알 수 없다. 【西坡東山文庫】에는 零本 2책이 수장되어 있다. 「답예조판서(答禮曹判書)」등 문답 25편은 예조·서원 기타 개인의 물음에 대답한 것으로 모두 예설(禮說)에 관한 문제가 다루어져 있다. 이를테면 혹자가 「상인(喪人)」이 별무출입처(別無出入處)로되 이성묘지행도(而省墓之行道)에 도혹원칙노상소착하이위지야아(途或遠則路上所着何以爲之耶아)」 운운하는 문제를 물어 왔을 때 이에 대답한 글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卷之 5. 序 ; 答沈方伯(惇), 與鄭輝遠(蘊), 答崔監司(瓘), 答李汝懋(厚慶), 答張德優(顯道), 答李以直(서), 別紙, 與李士厚(堉), 答裵子章(尙龍), 答權章仲(好文), 答金活源(潗), 答權愼初(終允), 答張行原(興孝), 答裵益哉(尙益), 答李泰叔(道昌), 與朴震昌, 答陶山書院諸生, 答任卓爾(屹), 與金士源(?), 答崔大容(有海), 與崔大中, 答申高靈(景翼), 答許毅甫, 答文順甫(緯), 答吳翼承(長), 與李季獻(瑀), 與朴君秀(文?), 答崔士行(은), 答鄭俊敏.

卷之 6. 答問 ; 答禮曹判書(國喪節目), 答張德晦, 答李景發川谷奉安, 答李叔發川谷鄕校移安, 答李叔發, 答李以直川谷忠賢祠奉安, 答李以直, 答金施普, 答金烏院生, 答權方伯盼, 答韓應南, 答宋光宅, 答或人, 答蔡靜應, 答李君顯, 答西溪書院儒生, 答知禮儒生, 答靈山鄕校儒生, 答裴子章季章, 答權府尹泰一, 答崔季昇, 答朴廷老.

卷之 11. 祝文 ; 川谷書院重新, 烏川書院重新, 紫川書院三賢祠, 紫川書院三賢享祠, 川谷書院新廟移安後, 川谷忠賢祠奉安時告二先生, 川谷忠賢祠, 川谷慰安文, 外先祖上將軍金公墓慰安文, 寒暄堂金先生祠堂奉安, 寒暄堂金先生祠堂慰安, 川谷二先生廟前墻修築時先告事, 道東書院奉安寒暄堂金先生, 道東書院秋享祀, 硏經書院奉安退溪李先生, 硏經書院春秋享祀, 硏經書院告由文, 社稷慰安文, 告社稷文, 告楊津溟所文, 告先祖文, 家廟移安文, 家廟慰安文, 重建尊道祠奉安時先告事由文, 尊道祠奉安, 同福辭文廟, 同福辭社稷, 景賢祠祭寒暄堂金先生, 竹樹祠祭靜菴趙先生, 太白山祈雨, 社稷祈雨, 阿見淵祈雨, 餘航山祈雨, 餘航山謝雨, 社稷祈雨, 無祀鬼神, 泗水主山, 壬辰戰亡將士, 告楊津溟所.

祭文 ; 祭南冥曹先生, 祭代郭○祭南冥先生, 祭成大谷(運), 祭仲氏西川君.

卷之 12. 祭文 ; 祭金東岡(宇毋), 祭金監察(宇容), 祭代朴廷?祭金東岡, 祭柳西厓(成龍), 祭金士華(潤衷), 祭朴大菴(惺), 祭貞敬夫人河東鄭氏, 祭徐行甫(思遠), 祭宋學懋(遠器), 祭尹判書(國馨), 祭尹慶州(孝全), 祭李景發(天培), 祭呂士吉(添慶), 祭朴君美(明彦), 祭鄭平甫(錘), 祭郭德修(永禧), 祭盧世一, 祭李原善(逢慶), 祭權太師, 祭外先祖金忠烈公, 祭告先, 祭告六代祖?貞順宅主樂安金氏, 祭外先祖判羅州牧使, 祭告寒暄堂金先生, 祭退溪李先生, 祭一履鄭先生, 祭南冥曹先生, 祭德溪吳先生, 祭金鶴峯(誠一), 祭宋新淵(師顧), 祭黃錦溪(俊良), 祭朴迂拙齋(漢柱), 祭郭禮谷, 祭星州牧使金公(克一), 祭趙月川(穆), 祭李鎭川(弘宇), 祭表從叔李公(忠俊), 祭金松菴(沔), 祭郭存齋(?), 祭權忠定公(撥), 祭元先生(天錫), 祭李玉山(起春), 祭李晴暉(承), 祭吳磬叔(俔), 祭從兄(遠), 祭告李嵩, 祭李公甫(仁恢), 祭告李郭, 祭李元盛, 祭從姨母淑人李氏, 祭李仲綏(福長), 祭告多勿.

 

 

五先生禮說分類 (古枕, 정17둁)

鄭逑 編.

木板本. -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仁祖7(1629)跋].

零本6冊 ; 32x22.7cm.

四周雙邊. 半匡 ; 23.1x18.7cm.有界.13行22字.註雙行. 上下內向有紋魚尾.

수장본 중 後集 卷之 11∼12의 1책 缺本임(全20卷7冊).

북송(北宋), 남송(南宋) 양대(兩代)의 학자인 정호(程顥), 정이(程滯), 사마 온공(司馬 溫公 ; 司馬 光), 장재(張載), 주자 등 다섯 선생의 예설을 모은 책이다. 편자는 《상제예록(喪祭禮錄)》·《주문문례(朱門問禮)》등이 주자의 책에만 의존하여 불충분하므로 보다 광범위하게 다섯 선생의 설을 문집, 어록, 제경전(諸經傳)의 주해(注解)에서 뽑아서 엮었다. 편자의 서문에는 그 경위가 다음과 같이 밝혀져 있다. "……禮는 3천3백이나 되지만 모두 일신일심(一身一心)에 관계되는 것이라 하였다. ……변례(變禮)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 서로 시비가 현란(眩亂)해진다. ……이런 속에서 양정자(兩程子), 속수(涑水 ; 司馬 光), 횡거(橫渠 ; 張載), 회암(晦庵 ; 朱熹) 등이 나와, 예경(禮經)을 근본으로 하여 사실에 따라 부석(剖析)하여 아무리 큰 이론도 요약하여, 편언단사(片言單辭)가 천칙(天則)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이로써 후학의 이목(耳目)을 열어 주었다. 다섯 선생의 설은 문집과 어록 및 여러 경전의 주해에서 뽑았다. 다만 사마 온공의 서의(書儀)와 본집은 득견(得見)치 못하였으므로 넣지 못하였다. 이것을 그대로 난고(亂稿) 중에 방치해 두었더니 10년이 지난 후에 사우(士友)들이 정사(淨寫)코자 하므로 대략 본서의 본말을 적노라" 이 서문은 1611(광해군 3)년에 쓴 것이다. 이에 이어 한자 내려서 "그 후 다섯 선생 예설이 완성된 후 이 속에 주자의 가례가 없으니 어찌된 셈이냐고들 하였다. 그러나 가례는 각 부문에 들어가 있어 따로 한 것이 없고 또 가례는 당세(當世)에 성행하는데 중복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답하였다. 이상이 본서를 편저하게된 유래인데, 이에 우리나라의 예학자들이 이것을 참고로 하여 송대예설(宋代禮說)의 대략을 짐작하게 되었다. 다시 1618(광해군 10)년에 쓴 발문을 보면 "저자가 1603(선조 36)년에 호서(湖西) 목주(木州)에 있을 때 망우(亡友) 이복장(李福長)이 제선생(諸先生)의 예론을 유집하여 관람(觀覽)에 편(便)케 하라 하여 근처의 사자(士子) 15명을 초청하여 조역(助役)케 하였다. 이로써 반달만에 초본이 되었다. 이복장(李福長)이 출판코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얼마 후 이복장은 죽고 1611(광해군 3)년에 성주(星州)의 사우(士友)들이 다시 정사(淨寫)를 청하였다. 그 동안 1614(광해군 6)년에 화재로 원고가 회신(灰燼)된 것을 서사원(徐思遠), 송원기(宋遠器) 등이 다시 편집하는 데 힘써 주었다. 벌써 16년이 지났다"라고 하여 본서 출판의 경위를 적기하고 있다. 다시 장현광(張顯光)의 발문을 보면 "한강선생(寒岡先生)은 우리나라의 예학에 마음을 두어 여러 해 두고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을 만들었다. 그 후 선생의 제자 이윤우(李潤雨)가 담양부사(潭陽府使)로 내려가 각 방백(方伯)에게 편집할 뜻을 말하고 동지를 모아 이 책을 출간하였다"하여 담양에서 출간한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때는 1623(인조 1)년으로서 그 동안 17년이 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전후집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집(前集) 권1은 예총론(禮總論)으로 천자(天子), 제후(諸侯)의 관례(冠禮), 혼례(婚禮), 혼변례(婚變禮) 등이 있고, 권2에는 천자(天子), 제후(諸侯)의 상례(喪禮)로서 상제총론(喪祭摠論), 상례총론(喪禮摠論)이 있다. 이 속에는 천자, 제후의 질병에서부터 거상(居喪), 수외국적익법(受外國吊謚法), 휘법(諱法), 송(宋)의 복왕예론(?王禮論)까지 있다. 이것을 복의(?議)라 한다. 송(宋)의 인종(仁宗)이 죽은 후 아들이 없어 양자로 영종(英宗)을 세웠다. 이 때 영종(英宗)은 자기의 생부(生父) 복왕(?王)을 추존하고자 하였으나 사마 광(司馬 光) 등 원로(元老)들의 반대로 성립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추숭 문제는 예(禮)에서 중요한 일로 여기었다. 권3은 천자제후상례(天子諸侯喪禮)의 계속으로 산릉(山陵)에서 비(碑)까지 기록하였고, 권4는 천자제후의 제례(祭禮)로서 제(祭)의 총론에서부터 천지지제(天地之祭), 방명(方明), 명당(明堂), 사직(社稷), 풍사(風師), 성황(城隍), 산천(山川), 여제(旅祭), 기우(祈雨), 오례(五禮), 여나(勵儺), 신사(神祠), 음사(淫祠)까지 망라하고 있다. 권5는 권4의 계속으로 성현(聖賢)과 제기(祭器), 권6도 계속으로 종묘(宗廟), 동당이설(同堂異說), 소목(昭穆)에 관한 사항이고, 권7도 계속으로 도(桃), 체, 협, 추옥(追玉), 상사선공(上祀先公), 삼후병배(三后竝配), 제인국지주(祭因國之主), 선대제왕릉침(先代帝王陵寢), 추폐선후(追廢先后), 환부폐후(還復廢后), 종법(宗法) 등이다. 권8은 천자제후의 잡례(雜禮)로서 그 내용은 천자지례(天子之禮), 존호(尊號), 성절국기(聖節國忌), 천자차복(天子車服), 조정지의(朝廷之儀), 책명(冊命), 순수(巡守), 근례(覲禮), 빈상지례(빈相之禮), 빙형지례(聘亨之禮), 민신례(民臣禮), 종실(宗室) 등이다. 후집(後集) 권1은 관혼총론(冠婚摠論)으로 관례(冠禮), 혼례(婚禮), 혼변례(婚變禮)를 들고 있다. 이 중 혼변례는 예기의 증자문편(曾子問篇)을 인용하고 있다. 권2∼권6은 모두 상례(喪禮)에 관한 것으로 상복(喪服), 치장(治葬), 발인(發引), 분묘(墳墓), 행상(行狀), 지우(誌右), 우제(虞祭) 등 장의(葬儀)에 관한 것을 논하고, 권7∼권9는 제례(祭禮)로서 묘제(廟制), 영당(影堂), 주제(主祭), 동지제시조(冬至祭始祖), 입춘제선조(立春祭先祖), 미제(彌祭), 기제(忌祭) 등 각면의 제례(祭禮)를 기록하고 있다. 권10은 제례 부록으로 생일(生日), 음식(飮食), 성씨(姓氏), 향음주(鄕飮酒), 향약(鄕約), 향사(鄕射) 등이다.

이와 같이 송대(宋代) 예학자 5명의 저서에서 예(禮)에 관한 부분을 뽑아 송대 예학자들의 예설을 밝히고 있다. 책의 앞에는 본서에서 인용한 서목으로 《정씨유서(程氏遺書)》·《가례(家禮)》 등 48종을 밝히고있는데 이러한 서적은 송대 예론을 살피는데 빼놓을 수 없는 서적이다. 그 중에도 주자의 저서가 가장 많아 주자학에 의한 해석이 대부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중에 송(宋)의 나대경(羅大經)의 학림옥로(鶴林玉露)는 시화(詩話)와 어록(語錄)이 있는 책기류(策記類)인데 다방면에 걸쳐 인용하여 기록한 것을 이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판본은 조선 중기의 것으로 조잡한 곳이 있으나 대체로 좋은 편이다. 이 책은 당시 학자들에 의해 많이 인용되었으며 이로 인해 송대 예학자들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져갔다.

묘(墓)

 

부(父)

 

모(母)

 

배(配)

 

자(子)

 

녀(女)

 

형제(兄弟)

 

문헌(文獻)

1.정구(鄭逑) 호(號) 한강(寒岡) 寒岡鄭先生(逑);海東名臣錄

기락편방(沂洛編芳) (奎12657), 박상절(朴尙節) (朝鮮)編.

         1冊(78張) 圖版 木板本 31.5×20.7cm.

         四周雙邊 半郭:22×16cm.

         有界 10行 21字.

         版心:花紋魚尾.

         序:李象靖.

         跋:李翼·李用休·李如迪·金裕壽.

    1607년(宣祖 40) 寒岡 鄭逑, 旅軒 張顯光, 忘憂堂 郭再祐가 咸安의 龍華山  아래에서 뱃놀이를 할 때 匡西 朴震英이 從遊하였고, 그후 28년이 지난 1634년(仁祖 12)에  東溟 金世濂이 玄風의 風詠臺에서 遊會할 때 浣石堂 朴亨龍이 從遊하였는데, 匡西와  浣石堂의 玄孫인 朴尙節이 이에「龍華山下同泛錄」과  「風詠臺題名石刻圖」를  묶어「沂洛編芳」이라 題하여 1758년(英祖 34)경에 刊印한 것이다. 수록된 순으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沂洛編芳序」:1757년 李象靖이 쓴 것이다.  (2)「龍華山下同泛錄」:鄭逑를 비롯한 同泛 35人의 명단인데, 鄭逑, 郭再祐, 朴忠後, 張顯光 등 4명은  諱·字·號·諡의 순으로 爵序에 따라 첫머리에 적고, 이하는  諱·字·生年·本·號의  순으로 齒序에 따라 적고 있다. 끝에 會集의 시기가 1607년(宣祖 40) 3월 28일임을 밝였다.  (3) 「龍華諸賢行蹟」:34人의 行蹟을 行狀이나 碣名 또는 海東名臣錄 등 諸書에서  인용하여 기록하고 인용서목이 없는 것도 일부 있다. 同泛錄은 모두 35人인데 錄尾의  2人(李忠民·崔門柱)은 다만 姓과 諱만이 있고, 그 表德이나 年住는 모두 갖추어  지지  않았던 것을 第34人 處士 李公(忠民)의 경우만 ?州의 李光埈에 의해  字年居址를  備記할주 있었다라는 사실을 끝에 적고 있다. 行蹟이 드러난 34人의  명단과  그  인용서목은 다음과 같다. {1}寒岡鄭先生(逑);海東名臣錄, {2}忘憂堂郭先生(再祐);上同,  {3}副摠管 朴公(忠後);徐思遠撰碣, {4}旅軒張先生(顯光);李元禎撰狀, {5}獨村李公;全羅傳言錄,  {6}鵲溪成公(景琛);上同, {7}聞巖辛公(礎);鄭蔡陽撰狀, 8}立巖趙公(埴);趙任道撰碣,  {9}葛村李公(潚);家乘, {10}沃村盧公(克弘);家乘, {11}永慕堂辛公(邦楫);쇄聞,  {12}斗巖 趙公(방);金羅傳信錄·家乘,  {13}畏齋李公(厚慶);李玄逸撰狀,  {14}敎授羅公(翼南);쇄聞, {15}復齋李公(道孜);李玄逸撰狀,  {16}生員兪公(諧);兪亨吉撰狀·鄕誌,  {17}梅竹軒李公(明克), {18}滄浪與李公(道由);家乘,  {19}匡西朴公(震英);許穆撰碣·牌文左于家, {20}菊菴李公(明懲), {21}永慕齋李公(明念);쇄聞, {22}奉事辛公(膺);家乘,  {23}處士 李公(明慤);쇄聞, {24}處士李公(明悉), {25}五道谷安公(挺), {26}處士李公(時?),  {27} 處士郭公(瀅), {28}消憂軒李公(道一), {29}瑟谷李公(난貴);曹挺融撰碣,  {30}處士柳公 (武龍);쇄聞, {31}澗松堂趙公(任道) ;李光庭撰碣, {32}益庵李公(道輔);權萬撰狀,  {33} 處士李公(瀣), {34}處士李公(忠民);쇄聞.(4)「龍華山下同泛錄追序」:趙任道의  追序로 1621년(光海君 13)에 쓰여지며 내용의 대개는 「會集時 李明?가  坐客을  列錄하였는데 그것을 鄭逑가 龍華山下同泛錄이라 칭하였다. 그후 安挺偶에게서 그 草蒿를 얻어  이에 重修한다」는 것이다. (5)「謹書龍華山下同泛錄」:1728년(英祖 4)에  朴尙節이  趙任道의 玄孫인 趙弘燁에게서 同泛錄을 얻어 追先景賢의 誠을 다하고자 펴낸다는  내용이다. (6)「龍華山下同泛之圖」:{1}龍華嶽, {2}靑松寺, {3}道興步, {4}柰內村, {5}景釀臺,  {6}是藕浦, {7}平沙面, {8}滄巖舍 등의 圖가 있고, 이어서  1744년에  쓰여진  朴尙節의  圖說이 있다. (7)「風詠臺題名石刻圖」:崖面에 刻名된 모습을 圖로 옮긴  것이다.  (9)「風詠臺述古詩」幷序:風詠臺는 金世濂이 一代의 同志를 모아 逍遙한 곳으로  그  吟風弄月의 뜻이 古人과 一般이며, 風詠臺의 좌측 崖面에 四層으로 刻하여  上一層에는  風詠臺 3字가 次二層에는 金先生(世濂)의 字·諱·軒號가, 第三·四層에는  12人의  姓名을 齒順으로 列序하고 있는데 浣石堂(朴亨龍)이 그 끝에 있다는 내용으로 朴尙節이  1728년에 쓴 것이다. (10)「風詠諸賢行略」:「龍華諸賢行蹟」과 같은  식으로  구성된다. 金世濂을 포함한 13人의 명단과 인용서목은 다음과 같다.  {1}東溟金先生(世濂);許穆撰狀, {2}梅陰羅公(以後);家乘, {3}處士金公(大鎔), {4}東湖金公(善英),  {5}處士郭公(弘挻), {6}灌松亭郭公(弘章);家乘, {7}五宜亭趙公(咸世);趙氏言行錄,  {8}處士金公(時後), {9}大布子郭公(泰元);家乘, {10}松湖朴公(東衡改昌徵);家乘, {11}別檢郭公(宜昌),  {12}進士許公(엽), {18}浣石堂朴公(亨龍);趙顯命撰碣, (11)「沂洛編芳跋」:1739년  李瀷(星湖)이 題한 것으로 本書를 朴尙節이 刊印하는 의의를 略記하였다. 李用休의  跋文이 附記되어 있다. (12)「題沂洛編芳錄後」:1746년(英祖 22) 李如迪이  題.(13)「敬書沂洛編芳後」:1758년(英祖 34) 金裕壽가 書한 것으로 앞의 「題沂洛編芳錄後」와  함께  刊印의 의의에 대한 글이다. 禮學派의 諸人 중 첫머리에 꼽아지는 寒岡系列에 속하는  유헝의 책이며, 諸賢의 行蹟이 있어 각 개인의 연구에 도움이 된다.  인용서목을  밝히고 있는 점등은 당시 서적간행의 일반적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원서명 沂洛編芳

현대어서명 기락편방

청구기호 古 4650-109

편저자(한자)  朴趾赫(朝鮮) 編  판본사항 木版本 간행지 [刊地未詳] 책권수 1冊(78張), 圖

편저자(한글) 박지혁(조선) 편 간행연도 英祖34年(1758) 간행자 [刊者未詳] 책크기 31.520.5cm

匡郭 四周雙邊, 半葉匡郭:22.515.8cm, 有界, 10行 21字 版心 上花紋魚尾 표기문자  

表紙,版心,卷頭書名   

序,跋,卷首,卷末 序:歲丁丑(1757)…李象靖, 跋:己未(1739)…李瀷, 己未(1739)…李用休, 丙寅(1746)…李如迪, 歲戊寅(1758)…金裕壽

表題紙,內題紙  附  

藏書記,內賜記  

刊記  

자료소개 鄭逑(1554-1637), 張顯光(1554-1637), 郭再祐(1552-1617), 朴震英(1569-1641), 金世濂(1593-1646), 朴亨龍(生沒年 未詳) 등 유학자들이 낙동강과 風詠臺에서 놀던 故事와 行錄을 엮은 책

목차 沂洛編芳序(李象靖), 龍華山下同泛錄, 龍華諸賢行蹟:寒岡 鄭先生(逑), 忌憂堂 郭先生(再祐), 副摠管 朴公(忠後), 旅軒 張先生(顯光), 獨村 李公, 鵲溪 成公(景琛), 聞巖 辛公(礎), 立巖 趙公(埴), 葛村 李公(潚), 沃村 盧公(克弘), 永慕堂 辛公(邦楫), 斗巖 趙公(?), 畏齋 李公(厚慶), 敎授 羅公(翼南), 復齋 李公(道孜), 生員 兪公(諧), 梅竹軒 李公(明克), 滄浪與 李公(道由), 匡西 朴公(震英), 菊菴李公(明懲), 永慕齋 李公(明念), 奉事 辛公(膺), 處士 李公(明慤), 處士 李公(明悉), 五道谷 安公(挺), 處士 李公(時?), 處士 郭公(瀅), 消憂軒 李公(道一), 瑟谷 李公(蘭貴), 處士 柳公(武龍), 澗松堂 趙公(任道), 益庵 李公(道輔), 處士 李公(瀣), 處士 李公(忠民), 龍華山下同泛錄追序(趙任道), 謹書龍華山下同泛錄, 龍華山下同泛之圖:龍華嶽, 靑松寺, 道興步, 柰內村, 景釀臺, 是藕浦, 平沙面, 滄巖舍, 風詠臺題名石刻圖, 風詠臺述古詩, 風詠諸賢行略, 龍華諸賢行蹟:東溟金先生(世濂), 梅陰 羅公(以後), 處士 金公(大鎔), 東湖 金公(善英), 處士 郭公(弘 挻), 灌松亭 郭公(弘章), 五宜亭 趙公(咸世), 處士 金公(時後), 大布子 郭公(泰元), 松湖 朴公(東衡改昌徵), 別檢 郭公(宜昌), 進士 許公(?), 浣石堂 朴公(亨龍), 沂洛編芳跋(李瀷), 題沂洛編芳錄後(李如迪), 敬書沂洛編芳後(金裕壽)

 

2. 남명학파(南冥學派) 관련(關聯) 인명록(人名錄)

이상필(문학박사,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편찬, 제공(2005년 4월)

정구 1543-1620 도가 한강 서원 성주 덕계 퇴계문인 한강집

鄭逑 1543-1620 道可 寒岡 西原 星州 德溪 退溪門人 寒岡集

 

3. 조선환여승람(창원) ?校宮

 ○檜原院: 군의 서쪽 20리에 있음. 인조 갑술에 세우고 賜額함. 문목공 鄭逑를 모시고, 배향은 문정공 許穆.

조선환여승람(창원) ■樓亭

○觀海亭: 檜原院에 있고, 寒岡 鄭逑가 놀던 곳.

조선환여승람(창원) ■儒賢

○鄭逑: 자는 道可, 호는 寒岡이니 청주인이다. 柏谷, 崑壽의 아우요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율곡 이이가 英才로 추천하여 官이 大憲에 이르고, 篤學博文하여 世儒의 宗이 되었다. 영상에 증직되고 시호는 文穆이니 檜原院에 배향되었

 

4. 한강(寒岡)의 회연급문제현록(檜淵及門諸賢錄)

宋遠器[003], 朴廷번[006], 郭   [007], 鄭  湛[012], 文  緯[017], 辛邦楫[029], 文景虎[030], 黃汝一[031], 曺應仁[032], 成辨奎[034], 李厚慶[037], 李道孜[044], 吳  長[071], 朴  敏[085], 李道由[087], 金應成[088], 李道純[089], 姜   [102], 鄭  蘊[105], 朴文영[118], 李安訥[119], 鄭弘緖[122], 成好正[246],

 

5. 퇴계문인

정구(鄭逑, 寒岡, 星州 柳村, 1543~1620) 계남 양문하 ▼ 본관(本貫) 청주(淸州)

      → 박성(朴惺, 大菴, 玄風 求智, 1549~1606) 본관(本貫) 밀양(密陽)

      → 서사원(徐思遠, 樂齋, 大邱, 1550~1614) 본관(本貫) 달성(達城)

      → 손처눌(孫處訥, 慕堂, 大邱, 1553~1634) 본관(本貫) 일직(一直)

      → 장현광(張顯光, 旅軒, 仁洞, 1554~1637) 본관(本貫) 인동(仁同)

      → 조정(趙靖, 黔澗, 尙州 升谷, 1555~1636) 본관(本貫) 풍양(豊壤)

      → 조익(趙翊, 可畦, 尙州 升谷, 1556~1613) 본관(本貫) 풍양(豊壤)

      → 신방집(辛邦楫, 永慕堂 靈山 丈麻 1556 ~ ?) 본관(本貫) 영산(靈山)

      → 황중윤(黃中允, 東溟, 平海, 1557~1648) 본관(本貫) 평해(平海)

      → 이천배(李天培, 三益齋, 星州 巖浦, 1558~1604) 본관(本貫) 경산(京山)

      → 최항경(崔恒慶, 竹軒, 星州 法山, 1560~1638) 본관(本貫) 영천(永川)

      → 성안의(成安義, 芙蓉堂, 榮州, 1561~1629) 본관(本貫) 창녕(昌寧)

      → 김수인(金守認, 九峯, 密陽, 1563~1626) 본관(本貫) 경주(慶州)

      → 김주(金輳, 雲巖, 善山 海平, 1564~1636) 본관(本貫) 해평(海平)

      → 이명호(李明호, 梅竹軒, 咸安, 1565~1624) 본관(本貫) 성주(星州)

      → 이윤우(李潤雨, 石潭, 漆谷 上枝, 1569~1634) 본관(本貫) 광주(廣州)

      → 이민성(李民宬, 敬亭, 義城 山雲, 1570~1629) 본관(本貫) 영천(永川)

      → 강재산(康在山, 一竹, 善山, 1573~1636) 본관(本貫) 신천(信川)

      → 신적도(申適道, 虎溪, 義城, 1574~1663) 본관(本貫) 아주(鵝州)

      → 배상룡(裵尙龍, 藤菴, 星州, 1574~1655) 본관(本貫) 성산(星山)

      → 박회무(朴檜茂, 六友堂, 榮州 寒亭, 1575~1666) 본관(本貫) 반남(潘南)

      → 오여벌(吳汝벌, 敬庵, 榮州 草谷, 1579~1635) 본관(本貫) 고창(高敞)

      → 김광계(金光繼, 梅園, 禮安 烏川, 1580~1646) 본관(本貫) 광산(光山)

      → 배상익(裵尙益, 癡巖, 榮州, 1581~1631) 본관(本貫) 대구(大邱)

      → 박종무(朴종茂, 三樂堂, 榮州 寒亭, 1582~1664) 본관(本貫) 반남(潘南)

      → 권수경(權守經, 自樂堂, 義城 沙村, 1584~1659) 본관(本貫) 안동(安東)

      → 최동집(崔東集, 臺巖, 大邱 漆溪, 1586~1661) 본관(本貫) 경주(慶州)

      → 박종우(朴宗祐, 陶谷, 達成 竗洞, 1587~1654) 본관(本貫) 순천(順天)

      → 김광악(金光岳, 野逸齋, 禮安 烏川, 1591~1648) 본관(本貫) 광산(光山)

      → 허목(許穆, 眉수, 京畿 連川, 1595~1687) 본관(本貫) 양천(陽川)

      → 도신수(都信修, 止巖, 大邱 鋤齋, 1598~1650) 본관(本貫) 성주(星州)

      → 최동직(崔東直, 香巖, 大邱 枝洞, 1602~1665) 본관(本貫) 경주(慶州)

      → 정윤해(조목 문하) 본관(本貫) 청주(淸州)

      → 문위(오건 문인) 본관(本貫) 남평(南平)

      → 정온(정인홍 문인) 본관(本貫) 진주(晋州)

      → 정윤목(유성룡 문인) 본관(本貫) 청주(淸州)

      →이도장(장현광 문인) 본관(本貫) 광주(廣州)

      →전이성(정경세 문인) 본관(本貫) 용궁(龍宮)  

 

6. 남명 門人資料의 性格과 硏究動向

鄭逑(1543~1620)의 字는 道可, 號는 寒岡, 本貫은 淸州, 星州에 거주하였다. 그에 관한 자료는 寒岡集 27권 11책이 남아 있으며, 師友에 關한 資料는 南冥, 吳健, 金宇옹, 李承, 趙瑗, 李天慶, 곽율, 宋師?, 金沔, 吳俔, 金聃壽, 鄭琢, 許筬, 朴齊仁 등이 있고, 先行硏究는 26편이 있다.

 

7. 정구(鄭逑) 본(本) 청주(淸州) 자(字) 도가(道可) 호(號) 한강(寒岡) 시호(諡號) 문목(文穆)

농암선생문집(聾巖先生文集) 광주(廣州) 이상석(李相奭)의 문집(文集)

권지(卷之) 4, 기(記) ; 사양서원강학(泗陽書院講學)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리에 있는 사양서원(泗陽書院)

제향(祭享) 정구(鄭逑)(號寒岡 贈吏判 諡文穆 本淸州). 이윤우(李潤雨)(號石潭 參議 贈吏參 本廣州).

권지(卷之) 4, 발(跋) ; 서(書) 심경발휘혹문후(心經發揮或問後)

활자본. 4권 2책. 선조 때의 학자 정구(鄭逑)가 중국 송(宋)나라 진덕수(眞德秀)의 《심경(心經)》을 모방, 1570년(선조 3)에 편찬하였다.

 

8. 정구(鄭逑) 본관 청주(淸州) 자(字) 도가(道可) 호(號) 한강(寒岡) 시호(諡號) 문목(文穆)

默軒集 묵헌집 1736 (영조 12) - 1820 (순조 20)

     李萬運  字: 元春  父: 東英  本: 廣州  居: 漆谷

    (이만운  자: 원춘  부: 동영  본: 광주  거: 칠곡)

정구(鄭逑) 문목공(文穆公)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1591년에 모옥사숙(茅屋私塾)을 지어 주자지도(朱子之道)를 강학하던 곳이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1796년(정조 20)에 그의 후학들이 모곡(募穀)하여 집을 짓고 〈사창서당(社倉書堂)〉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서당 입구의 왼쪽에는 정구의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묵헌집(默軒集) 이만운(李萬運)은 12권 6책으로, 권7은 서(序)(12), 기(記)(14), 발(跋)(7)이다. 서(序)는 송서(送序), 족보서(族譜序) 외에, 「눌당유고訥堂遺稿」, 「매헌송공유고梅軒宋公遺稿」, 「?옹집?翁集」 등 문집(文集)의 서문(序文), 유도원(柳道源)의 「퇴계선생문집고증退溪先生文集攷證」에 대한 서(序) 등이 있고, 기(記)는 사창서당(社倉書堂), 양한정(養閒亭), 동락당(同樂堂), 기국헌(杞菊軒) 등 건축물에 대한 기문(記文)과 천생산(天生山), 촉석루(矗石樓), 가야산(伽倻山), 금산(錦山) 등의 유람기가 대부분이다. 발(跋)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무흘구곡(武屹九曲)을 회?첩(繪?帖)으로 만든 무흘구곡도(武屹九曲圖)에 대한 발문(跋文) 외에 〈양계집발暘溪集跋〉, 〈서채송담행적후書蔡松潭行蹟後〉, 〈서가보첩후書家寶帖後〉 등이 있다.

 

9. 정구(鄭逑) 본(本) 청주(淸州) 저(著)

태극문변(太極問辨) (古枕 152.52 정17졁3) (古 152.52 정17졁2)

鄭逑 著.

木板本. - [發行地不明] : 檜淵書院, 顯宗8(1667).

1冊(73張) : 揷圖 ; 29.5x19.4cm.

四周雙邊. 半匡 ; 20.4x15.1cm.有界.10行18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序 ; 李廷龜(1622).

跋 ; 金止男(1623).

刊記 ; 丁未(1667)檜淵書院開刊.

조선 중기의 학자 정구(鄭逑)가 이언적(李彦迪)과 주돈이, 주희 등의 태극에 대한 학설을 모아 그 이론을 정리한 책이다. 처음 이언적이 손숙돈(孫叔敦)과 조한보(曺漢輔)에게 태극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일이 있는데 그 손자 준(浚)이 이것을 이황에게 질정을 구하여 이황의 찬탄을 받은 일이 있고 그 뒤 이황 문인인 정구에게 비평을 청하였다. 정구(鄭逑)는 이 글이 태극에 대한 학설로는 진수가 된다고 확신하고 여기에 주돈이의 《태극도설》과 주희가 육구소(陸九韶)·구연(九淵) 형제에게 보낸 왕복서찰을 첨가하여 이 책을 간행한 것이다. 초간본은 화산부(花山府)에서, 중간본은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 나왔으나 약간의 미진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 책은 회연서원(檜淵書院)에서 그것을 보충하고 체재를 바꾸면서 개간한 것이다. 첫머리에 이정구(李廷龜)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초간자인 김지남(金止男)의 발문과 고정십일칙(考訂十一則)이 있다. 권수는 태극문변목록·주자태극도, 권상(卷上)은 답육자미구소서(答陸子美九韶書) 2편, 여주회주서(與朱晦疇書)·답육자정구연서(答陸子靜九淵書) 각 1편. 권하(卷下)는 서망재망기당무극태극설후(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서망재망기당제일서(書忘齋忘機堂第一書)·답망기당제이서·답망기당제삼서·답망기당제사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수(卷首)는 주돈이의 학설을 수록한 것이고, 권상(卷上)은 주희와 육구소 형제간의 왕복서한, 권하(卷下)는 이언적과 손숙돈과 조한보 사이에 있었던 왕복서간을 수록하여 태극설에 대한 맥락을 분명히 하였다. 이 책의 간행으로 태극설의 체제가 주돈이 - 주희 - 이언적으로 이어져 이 학설이 정통임이 밝혀지고, 반면에 육구소·구연 형제와 손숙돈, 조한보의 학설은 이단(異端)으로 폄억(貶抑)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 논변에 주요한 부분을 지적하면 주돈이가 《태극도설》에서 말한 "무극이태극"은 육구소·구연 형제가 유가의 정통이 아니고 노자(老子)의 학설에서 따온 것이라고 반박한 데서부터 비롯된다. 육구소·구연 형제는 이 글이 《태극도설》과는 부합되지 않음을 지적하여 이것이 주돈이의 설이 아닌 타인의 설임을 강조하면서 주희가 주석한 내용을 포함시켜 공격하였다. 그리고 조한보와 손숙돈도 육구소·구연 형제와 견해가 비슷한데 대한 이언적의 해명이 돋보인다.

문헌(文獻)

1. 횡성군 인물

정구(鄭逑) 조선시대(朝鮮時代) 본관은 청주(淸州)

정구는 1543년 경상도 성주(星州) 유촌(柳村)에서 태어났으며 1620년(광해군 12)에 팔거현(八縣) 사양정사(泗陽精舍 : 지금의 칠곡군 칠곡면 사수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이고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이다. 한강은 유년시절부터 영민하고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 불리었으며, 9세 때 부친상을 당하였고, 그후 그의 백씨(伯氏)의 충고가 한강에게 교육적 힘을 발휘하여 학문에 뜻을 두고 발분독서(發憤讀書)하여『대학 大學』·『논어 論語』를 읽고 그 대의(大義)를 통달하였다. 12세 때에는 공자의 화상(畵像)을 벽에 붙여 놓고 매일 보며 절을 하였으며, 어릴때부터 과거보다는 성현의 도를 후대에 전하는 것이 더욱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3세에 성주 향교에 교수로 와 있던 덕계(德溪) 오건(吳健)에게 주역을 배우면서 건곤이괘(乾坤二卦)를 읽고는 나머지는 모두 유추하여 통달했다고 한다. 1563년 21세에 이황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22세에 과거응시를 위해 상경했으나 느낀 바 있어, 과장(科場)에 들지 않은 채 귀향하여 그 길로 과거를 포기하고 오직 구도(求道)의 일념으로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1566년 24세 때 두류산(頭流山)에서 일생을 야인(野人)으로 보낸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찾아가 그 학문의 깊이를 본받고자 하였다. 31세때 조정에서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으로 부름이 있었고 이로부터 7년 동안에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과 의흥(義興)삼가(三嘉)지례(知禮) 등의 현감으로 발령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으며, 창평산(蒼坪山) 선영(先塋) 곁에 집을 지어 한강정사(寒岡精舍)라 이름하고 거기에서 거처하면서 학도를 모아 글을 가르쳤다. 38세에 다시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발령이 났을 때 비로소 부임하여 1년 반 동안 지방 행정에 종사하였는데 선정(善政)을 베풀어 그곳에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그는 내직(內職)인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발령된 것을 기회로, 다시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왔다. 그 뒤에 외직(外職)으로 동복(同福)함안(咸安)통천(通川) 등 고을을 거쳐 임진왜란 중에 강릉부사(江陵府使)강원감사(江原監司)성천부사(成川府司), 그리고 왜란 후에 충주목사(忠州牧使)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를 역임하였고 내직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좌승지(左承旨)형조참판(形曹參判)을 거쳐 광해군 초에 대사헌(大司憲)으로 특진되었으나 임해군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사람을 모두 용서하라고 상소한 뒤 고향인 횡성으로 돌아갔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상소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했으며 1618년에는 무오폐모(戊午廢母)의 일이 결정되자 누차 상소하였다. 1618년에는 향리에 백매원(百梅園)을 세워 유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횡성읍 묵계리에 자신의 호를 따 한강대라는 정자를 짓고 유생들과 더불어 시를 읊으며 여생을 보내다가 78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 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한강은 내직은 항상 사퇴를 일삼았으나 외직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임하였다. 이는 중앙 정부에서보다 지방에서 전성(專城)의 장(長)으로 책임있는 행정을 해 보려는 의지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임진왜란 중에 외직을 통하여 국사와 민정(民政)에 진력하는 한편 각 지방의 전몰장병을 매장추도하고 나아가 역사상 외적을 격퇴한 최춘명(崔椿命)원충갑(元甲) 등 민족 영웅들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기도 하여 당시 군민(軍民)의 사기를 높여 주었던 것은 참으로 훌륭한 공적으로 꼽힌다. 그는 경학(經學)을 비롯하여 산수(算數), 병진(兵陣), 의약(醫藥), 풍수(風水)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에 정통했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뛰어나 이 방면에 관한 저술을 많이 내었다. 또한 후진 양성에도 힘을 써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글씨도 잘 썼었다.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우천리에 있었던 관산서원(冠山書院), 경상북도 달성군 도동리와 충청남도 천원군 목천면 서리에 있었던 도동서원(道東書院),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에 있었던 도림서원(道林書院),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서동리에 있었던 도연서원(道淵書院), 전라남도 화순군 동북면 연월리에 있는 도원서원(道源書院), 경상남도 울산군에 있었던 반고서원(槃皐書院),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리에 있는 사양서원(泗陽書院),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연경리에 있었던 연경서원(硏經書院),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해평리에 있었던 천곡서원(川谷書院), 평안남도 성천군 성천면 하부리 용천동에 있었던 학령서원(鶴翎書院), 경상남도 마산시 교방동에 있었던 회원서원(檜原書院)에서 한강의 위패를 모셨거나 모시고 있다. 이 서원들 이외에 한강이 충주목사(忠州牧使)로 부임했을 당시 지방유림들의 건의로 기존의 백운서당을 개편한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에 있는 운곡서원(雲谷書院)과 자신이 직접 중심이 되어 창건한 경상북도 달성군 하빈면 사동에 있는 낙빈서원(洛濱書院)도 있다. 시호는 문목공(文穆公)이며 그의 저서로는 총 21권 9책으로 되어 있는 『한강집 寒岡集』,『무이지 武夷志』,『와룡지 臥龍誌』,『오선생예설 吳先生禮說』,『성현풍범 聖賢風範』,『태극문변 太極問辨』,『고금충모 古今忠謨』,『수사언인록 洙泗言仁錄』,『오복연혁도 五服沿革圖』 등의 많은 저서가 있다.  

 

2. 鄭逑 청주인

화순군 동복지(同福誌) 권1  

□ 서원(書院) - 부(附) 영당(影堂)

○ 도원서원(道源書院) : 현묘(顯廟) 경술(庚戌 : 1670)년에 현의 서쪽 3리 되는 곳에 세웠다. 숙묘(肅廟) 무진(戊辰 : 1688)년에 도원(道源)이라 사액(賜額)되었다.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16) 한강(寒岡) 정구(鄭逑),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을 함께 제향(祭享)하였다. 원생(院生) 20인, 보직(保直) 20명, 복호(復戶) 3결(結). 태상(太上) 무진(戊辰 : 1748)년에 무너져 사라졌다.

 

3. 화순군 동복지(同福誌) 권1

□ 관안(官案)

○ 정구(鄭逑) : 갑신(甲申 : 1584)년 7월에 부임하여 을유(乙酉 : 1585)년 정월에 승진(陞進)하여 찬집랑(纂集郞)에 제수되었다.

 

4. 동복지(同福誌) 권1

□ 누정(樓亭) - 부(附) 제영(題詠)

○ 창랑정(滄浪亭) : 현 북쪽 창랑리 동쪽에 진사 정암수(丁巖壽)가 건립하였다. 선조 22년(1589) 을축옥사 후에 세상을 등지고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 스스로 이름을 창랑이라 하였다. 모두 청탁을 취하고 스스로 희생하고 스스로 놀라워 하였다.

  시를 보면,

창랑을 스스로 취하고 청탁을 임의로 하는데

홀로 즐김은 성군을 힘입었도다

꽃이 피고 꽃이 떨어짐을 묻지 마라

산앞에 풍우(風雨)가 문에 침노할까 두려워라.

라고 하였다.

 

  송강 정철의 시를 보면,

갓을 씻고 발을 씻은이는 이에 누구일까

물이 탁하고 물이 맑음은 임금이 이에 임금이로다

주인의 형상하기 어려운 곳을 알진데

한바퀴 밝은 달에 싸리문을 가렸어라.

라고 하였다.

 

  한강 정구의 시를 보면,

제일 가는 명구(名區)가 천고에 전하고

삼계(三溪)의 흐른 물은 거울을 길이 걸었도다.

서리를 능멸하는 송국의 선태위에서

푸른 얼굴 서로 대하여 성현 배우기를 권하였노라.

라고 하였다.

 

  제봉 고경명의 시를 보면,

강남에 집이 있는 스님이

홀로 수운의 권(權)을 천단했도다

다생한 말은 비단과 같은데

시를 지으면 모두가 현가(絃歌)로다

암혈(巖穴)의 가운데 처하였음에

반드시 연하(煙霞)를 거두지 못했다.

깊이 생각하여 창랑에 낚시하고

머리를 흩트러 어선을 잡았도다

정으로 식하고 또 정으로 팽하니

이 즐거움 어찌 가히 잊으랴.

라고 하였다.

  우암 송시열이 정자의 이름을 청정제(淸淨齋)로 바꾸었다. 모두 역적을 토벌하고 춘추의정을 문의하고 토론하며 나는 의를 알지어다. 지금 정자는 전에 조석대에 청정제 3개의 큰 글자를 판각하였다. 즉 우암 선생 필적으로 새로 장식하였다.

 

5. 화순군의+지지류집성Ⅲ

동복지(同福誌) 권1

□ 누정(樓亭) - 부(附) 제영(題詠)

○ 태수대(太守臺) : 현 부쪽 20리에 있으며 창랑강 동안에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거처 등이 있다. 선묘 경인년(1590)에 창랑에 현감으로 일을 하였다. 주인 정암수(丁巖壽) 등 동료와 청랑정에 응대하여 이 대를 일으키고 시문의 증답을 하면서 즐겼다. 서로 취옹(醉翁)의 낙으로 인하여 손님과 주인의 예(禮)가 되었다.

  시를 보면,

기특한 봉우리가 열두곳 또한 적벽이 있으니

이 한 마을 명승지 호남에 알려졌어

암자에 머물면서 돌아갈 기약 늦어간 것도 깨닫지 못했으니

단풍잎에 바람도 없어 꼭 9월 절서로세.

라고 하였다.

 

  삼산(三山) 이태중(李台重)이 옛날을 감상하며 음미하기를,

태수대 가운데 옛 소나무가 있는데

소나무가 우뚝 솟아 부공(夫公)과 같구나

그 소나무 백설 속에 푸르름을 띄었구나.

라고 하였다.

 

6. 정구(鄭逑)

화순군의+지지류집성Ⅲ

동복지(同福誌) 권1

□ 누정(樓亭) - 부(附) 제영(題詠)

○ (補)영롱대(玲瓏臺) : 내남면 석교촌 앞에 있다. 선묘 무진년(1568)에 농재(瓏齋) 김곤변(金?變)이 이곳에 건립하였다. 정한강, 김설월, 안우산, 박죽천 등 여러 현인들이 항상 이곳에 따라왔다. 종자(從子) 김덕령(金德齡)이 광주에서 백리의 거리에 있는 이곳에 조석(朝夕)으로 강 중앙에 와서 부친의 공양을 위하여 조어(釣魚)를 하고 갔다고 한다. 그 돌의 이름을 성암(星巖)이라 하였다. 암석위에는 장대를 심고 나막신을 신고 머물렀던 흔적이 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제액(題額)을 썼으며,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이 중건하였고 상량문을 제작하였다.

 

7. 정구(鄭逑)

※ 鋤歸子先生遺稿 (古上 810.819 정67걁)

鄭允諧 (1553∼1618) ; 字 伯兪, 號 鋤歸,子 本貫 淸州.

木活字本. -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1923跋.

2卷1冊 ; 32.5x22cm.

四周雙邊. 半匡 ; 22.2x16.2cm.有界.10行20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조선 중기의 학자인 정윤해의 시문집이다. 정윤해는 연(璉)의 아들이고 예천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문사(文詞)에 능하고 예법(禮法)을 지켜서 숙부 정탁(鄭琢)을 경저(京邸)에서 모실 때 명사들의 경중(敬重)한 바가 되었으며, 조목(趙穆)과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추천되어 재랑(齋郞)이 되었으나 나중에 사임하였고 임진왜란에 창의하고 태조(太祖)의 영정을 수호한 공으로 원종훈삼등(原從勳三等)이 되었다.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보고 출세의 뜻을 끊고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냈다. 도연명(陶淵明)과 소강절(邵康節 ; 邵雍)의 시(詩)를 애송하고 문천상(文天祥)과 사첩산(謝疊山)의 시문(詩文)을 읽기를 좋아했다. 문장이 창건(蒼健)하고 풍부하며 조탁(彫琢)을 일삼지 않고 한꺼번에 수 천언을 써내었다. 함창(咸昌)의 청암서원(淸巖書院)에 봉향되었다.

이 문집은 1925년 9세손 준낙(浚洛)과 10세손 주익(注翼)이 편집, 간행하였다. 시(詩)는 순박하고 고전미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書)중에서 「오리이상공(원익)(梧里李相公)(元翼)」은 치민(治民)에 대한 의견을 적은 것으로 득민심(得民心)할 것과 어구(禦寇)의 계책을 진언하였고 「답조선백(答曺善伯)」에서는 비록 도(道)가 쇠퇴한 세상이지만 선비는 마땅히 효(孝)와 경(敬)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타일렀다.

문헌(文獻)

1. <마산의 인물> 조선조 인물 II

정 구(鄭逑 : 1543 ∼ 1620)

    조선중기의 문신이요, 학자이다.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이다.

    일찍이 조식(曺植)과 영남학파의 태두인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선조 6년(1573년) 유일(遣逸)로 천거, 예보사참사(禮寶寺參事)에 이어 1578년 사포서 주부(司圃署主簿) 그 후 삼가(三嘉), 義興, 知禮 등지의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580년 비로소 창녕현감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백성들이 이에 감격하여 살아 있는 동안 모시는 사당 즉 生祠堂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듬해 지평(持平)이 되고 동복현감(同福縣監)에 이어 校正廳의 校正部가 되어『경서훈선 (經書訓鮮)을 교정했다.

    그 다음 통천군수 우승지 강원도관찰사, 성천부사, 충주부사, 공조참판 등을 두루 거쳤다. 광해군이 즉위하는 1608년에 대사헌이 되었으나 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용서하라고 상소한 뒤 고향에 돌아갔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을 때도 상소하여 永昌大君을 구하려 했다. 1623년 仁祖反正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는 경학을 비롯하여 算數, 兵陣, 의약, 풍수에 이르기까지 정통했으며  특히 禮學에 뛰어나 그가 지은 저술 대부분이 이에 속한다. 많은 제자를 배출했으며 당대의 명문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글씨 또한 명필이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마산에 침거하면서 두척산을 소요처로 삼고 자연을 벗하며 안빈낙도 생활을 해왔다. 두척산의 경치에 매혹되어 오늘의 서원곡(書院谷)에 한칸의 초옥을 지어 취백당(聚白堂)이라 이름하고 그 둘레에 치귤매죽(梔橘梅竹)을 심었다.

    그는 월삭강회(月朔講會)를 열어 근향의 유생들을 모아 가르쳐 마산과 주변의 文運과 敎化에 크게 이바지했다. 인조 12년(1634년) 그의 문하생들에 의해 청와를 덮은 정자를 세워 檜原書院이라 했으나 뒤에 대원군에 의해 폐쇄되고 정자만 남았다. 이것이 바로 합포바다를 굽어본다고 하여 이름붙인 오늘의觀海亭이다. 서원곡의 이름은 이 서원에서 유래된 것으로 되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2. 정구(鄭逑)

성주선비<한강 정구1>남명 퇴계학문 진수 이어

남명과 퇴계는 같은 시대를 살면서 퇴계는 영남좌도의 중심지인 안동에서, 남명은 영남우도의 중심지인 진주에서 각각 전국의 인재를 대상으로 강학(講學)을 하였다. 당시 남명의 문하에 있던 사람이 퇴계의 문하를 찾기도 하며 퇴계의 문하에 있던 사람이 남명의 문하도 찾아 일찍이 보기드문 학문의 성세를 이루었다.

이처럼 남명과 퇴계가 살았던 시대에 태어나 두 사람의 학문을 이어받아 이를 다시 수많은 제자들에게 전수한 이가 있으니 바로 한강(寒岡) 정구(鄭逑)이다. 한강은 1543년 星州郡 大家面 七峯洞 柳村에서 판서공 思中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본관은 淸州이며 자는 道可이다. 선대에는 서울서 살았는데 조부 승지공 응상(應祥)이 환원당 김굉필의 사위가 되자 판서공이 현풍 외가에 와 있으면서 성주 이씨와 혼인을 한 관계로 서울로부터 성주 유촌으로 옮겨와 살게되었다. 그러니까 동방 5현중 한사람이며 소학동자라 불리는 한원당이 한강의 외증조부가 된다.

한강의 할머니 즉 한원당의 딸은 효성이 지극하여 친정아버지가 몸이 불편할 때 국을 맛있게 끓여 성주 대가에서 현풍까지 1백여리길을 와서 대접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오기도 한다. 한강이 태어나자 판서공이 "이 아이는 장차 명현(名賢)될 것"이라며 기뻐하였다 한다.   5세때 이미 신동이라 불렸으며, 7세때는 논어와 대학을 배워 그 뜻을 알았다. 9세 되던해 부친상을 당하자 상에 임하는 범절이 예사롭지 않았다.  13세때 당시 성주 교수로 와 있던 남명의 제자 덕계 오건에게서 주역을 배웠는데, 이때 덕계가 한강의 자질 뛰어남을 보고 여러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의 스승이 될 사람은 마땅이 鄭生이다"라고 하였다. '덕계선생연보'에 의하면 덕계가 성주향교 교수로 부임한 해는 39세때(1559년)로 되어있다. 한강의 나이는 17세때이다. 덕계는 한강의 종이모부로 한강이 13세때 덕계를 만났다면 성주향교 교수로 오기 이전의 일일 것이다.   

21세때 퇴계선생을 찾아 배움을 청했다. 이때 한강은 퇴계선생과 하룻밤을 지내면서 성리학에 대해 질정하고 돌아왔다. 한강이 돌아가고 난 후 퇴계는 유희범에게 보낸 편지에 "정구가 하루를 머물고 갔는데 매우 영민하더라"고 하면서 그 재능을 칭찬하였다. 이해 가을 향시에 합격하고 12월 광주 이씨와 결혼을 하였다. 이듬해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으나 마음에 느낀 바가 있어 바로 귀향을 하였다. 이후 과거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24세 되던해 남명 선생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다. 남명선생편년에 의하면 "선생께서 산해정에 계셨는데 한강이 와서 달포를 모시면서 의심나는 것을 질문하였는데 선생께서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금인물의 어짐과 어리석음, 세상이 다스려짐과 어지러움, 세상 도덕, 시대의 변화, 옳고 그름, 바름과 삐뚤어짐, 벼슬에 나가는일과 물러나는 일, 말을 할때와 묵묵히 있을 때 등등 광범위하게 문답을 주고받았다.

남명은 명리에 초연한 한강을 대견하게 여겨 말하기를 "자네는 벼슬에 나갈 때와 물러날 때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으니 내가 마음으로 인정하노라. 군자의 큰 절개는 벼슬에 나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부터 한강은 남명의 가르침을 받들어 벼슬에 나갈때와 물러날 때를 신중히하여 처신을 하였다. 31세때 조정에서 재능과 학식이 있는 선비를 추천하라는 명이 있자, 고향 사람인 동강 김우옹이 수찬으로 있으면서 한강을 추천하여 예빈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창평산(蒼坪山)에 정자를 지어 이름을 주자의 '한천(寒泉)'의 뜻을 따서 한강정사라(寒岡精舍)라 하였다.   이듬해에는 환원당 선생 연보 및 사우록을 편찬하였으며, 이어 조정에서 건원릉참봉, 의흥, 삼가,지례현감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여러번 벼슬을 사양한 뒤, 38세때 창녕현감에 제수되어 첫 벼슬길에 나갔다. 임지로 떠나기전 임금이 한강을 보고 "목민관이 되어 무엇을 먼저 해야 되는가"라고 물었다. 한강은 곧 "옛사람들이 백성 보살피기를 갓난아기 보살피듯 하라고 하였으니 신은 어리석으나 이 말을 실천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임지로 떠났다. 창녕현에 부임하여서는 고을 선비들과 함께 呂氏鄕約을 본떠서 講會契를 만들고 현내 여러곳에 서재를 세우고 훈장을 선정하여 학문을 가르치게 하였다. 부임 1년만에 감사가 치적을 보고하는데, 최고의 성적을 얻어 사헌부 지평 등의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임하였다. 41세때 강원도사, 충청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창평에 檜淵草堂을 지어 제자들과 더불어 月朔講會契라는 모임을 만들어 규약을 정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44세때 함안군수로 부임하여 옛날 좋은 풍속을 되살리고 낡은 행정의 폐단을 고치며, 각종 저울들을 통일하여 백성들의 세금을 감해주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이 없도록 시정했다. 또한 고을 어진 선비들과 군지인 함주지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한강은 창녕에 처음 부임해서부터 부임지역마다 군지를 편찬하여 그 지역의 역사와 문물을 자세히 기록으로 남겨 후임자들의 참고자료가 되게 하였는데, 이는 임란 중에도 중지하지 않았다. 1592년 통천군수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 한강은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들로 하여금 적을 공격하게 하여 왜적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영남에서 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물리치고 있을 때 조정에서 곽장군에 대한 비방과 모함이 많았다. 선조가 곽장군에 대해 한강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곽재우의 인물됨은 작은 진주만을 맡아 싸우기에는 보다 큰 그릇입니다" 라고 하여 곽재우 장군을 도와 주기도 하였다.이후 강원도 관찰사, 형조참의, 충주목사, 안동대도호부사 등의 벼슬을 지내고 60세때 고향으로 돌아와 62세되던 해에 무흘정사(武屹精舍)를 지어 학문에 힘썼다.

66세때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사헌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임해군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상소를 하고 뜻대로 되지 않자 곧 사직하고 말았다. 이어 영창대군 사사, 인목대비 폐비 등에 불가 상소를 누차 하였으나 광해군은 듣지 않았다. 이런 일로 다시는 조정에 발을 들이지 않고 고향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며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게 생을 보내게 된다. 77세때 金海 新山書院을 배알하고 동래온천, 창원 觀海亭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이어 이듬해 泗陽精舍 持敬齋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8세였다. 그후 1623년 인조 1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2년후 文穆이란 시호를 내렸다. 효종 8년(1657년)에 다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1997.6.27.경남일보)  

 

3. 성주선비<한강 정구2>남명 퇴계학문 집대성

한강은 남명의 문하에서 사사(事師)하여 영남우도의 남명학을 이어받고, 퇴계에게 배워 영남좌도의 퇴계학을 전수받았다. 즉 퇴계에게서 성현들의 학문하는 방법과 도리를 배웠고, 남명에게서 경의를 실천덕목으로 하는 선비의 탁월한 기상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학문에 대한 조예가 남달랐던 한강은 이들의 학문을 단순히 이어 받는데 그치지 않고 두 학맥을 통합․ 계승하여 새로운 학통을 세우게 된다. 번암(樊庵) 채제공(蔡濟恭)이 지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묘갈명을 살펴보자.

"우리의 학문은 원래 학통․학맥이 있으니, 퇴계는 우리나라의 공자로 그 도를 한강에게 전수해 주었고, 한강은 그 도를 미수 허목(許穆)에게 전해주었는데, 성호는 미수를 사숙(私淑)한 분으로서 미수를 배워서 위로 퇴계의 학문을 접하였다" 우리들이 잘 아는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이 한강의 제자인 미수 허목을 사숙하였다는 내용이다. 사숙이란 직접 수업받지는 못했지만, 그 사람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여 이를 평생 따라 배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성호는 미수에게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미수의 학덕을 존경하여 이를 평생 배웠다는 말이다.

성호는 다시 이를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에게 전하고, 순암은 다시 하려(下廬) 황덕길(黃德吉)에게 전하고, 하려는 다시 성재(性齋) 허전(許傳)에게 전했다. 이른바 근기학파(近畿學派)의 맥이다. 남명과 퇴계의 학문을 이은 한강이 이를 집대성하여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에게 전해 그 학통이 면면히 이어오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강은 12세때 성현의 가르침을 본받고자 공자의 화상을 벽에 붙여두고 절을 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가학(家學)으로 공부에 열중하던 한강은 성주향교 교수로 부임한 남명의 제자 덕계 오건에게서 주역을 배우는 것을 시작으로 사사를 하게 된다. 이후 21세때 퇴계선생을 찾아 하룻밤을 지내면서 성리학에 대해 질정하고 돌아왔으며, 24때(1566년) 남명 선생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다. 이로부터 4년후(1570년) 퇴계가 세상을 떠나고, 다시 2년후(1572년) 남명이 세상을 떠나고, 또 2년후(1574년) 덕계가 세상을 떠나 한강이 32세때 이미가르침을 받던 스승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사실 한강이 퇴계를 배알한 것은 '하룻동안'이 전부였으며, 남명선생과도 길지 않은 만남이었다.

 그런데 31세때 동강 김우옹의 천거로 예빈시참봉으로 제수되는 데, 이때 동강이 선조에게 주청하기를 "정구라는 자가 있는데 이황․조식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여 경술에 밝으니 포의(布衣)로서 불러다 나라 다스리는 방법을 물어볼만합니다"라고 하였다. 한강은 퇴계와 남명에게 직접 책을 펴고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지만 양 선생의 학문을 흠모하여 이를 집대성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남명과 퇴계의 학문을 집대성하여 후대에 전한 한강은 어진 목민관으로서도 명성이 자자했다. 임지마다 선정을 베풀어 공직자의 사표가 되었고, 또한 교육사업에 심혈을 기울여 현지 선비들과 강회계(講會契)를 만들어 풍속을 바로잡는데 앞장섰다.

 한강은 성리학 외에 지리, 의약, 병서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예학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특히 영남 예학의 대가로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더불어 조선 중기 예학의 쌍벽을 이룰만큼 대단하였다. 그가 지은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은 예학에 대한 관심을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글이라 할 수 있으며, 이 책의 서문에 이르기를 "사람들은 개인, 가정 나아가 국가생활에 이르기까지 정성스럽고 공경스런 생활태도가 필요한데 이에 참고할만한 책이 없어 내 감히 붓을 들어 생활의 본보기로 삼고자 이 책을 엮는다"라고 정성스럽고 공경스런 생활태도를 예의의 기본으로 삼기도 하였다. 한편, 당시 중요한 국가 의식이 있을 때는 한강의 예설을 참고로 할 정도였다.

한강은 학문하는 방법을 5가지로 나누어 이를 실천하였다.

첫째, 학문하는 사람은 마땅히 배우는 것에 대해 절실한 뜻을 세우고, 얻어진 학식은 체득화하여 실천에 힘써야 한다.

둘째, 학문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깊이 자신의 지식을 감추고 남이 알까 두려워하고 선비의 기상을 잃지 않아야 한다.

셋째, 학문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그 몸가짐을 규중의 처녀와 같이하여 한 점 티끌을 묻혀서도 안된다.

넷째, 학문하는 사람은 차라리 백이(伯夷)와 같이 편성을 지닐지언정 유하혜(柳下惠)와 같은 불공은 지녀서는 안된다.

다섯째, 학문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몸을 살피기를 사소한 데까지 하여야 한다.

또, 독서의 방법으로 4가지 체법이 있다고 하면서, 체인(體認), 체찰(體察), 체험(體驗), 체행(體行)의 4가지를 갖추지 않는다면 이는 몸과 마음에 아무런 유익함이 없어서 이른바 '앵무새의 조롱'을 면치 못한다고 하였다.

한강은 평생 한강(寒岡) 회연(檜淵) 무흘(武屹) 노곡(蘆谷) 사빈(泗濱) 정사(精舍) 등에서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하였다. 주로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대학(大學) 등을 중심으로 하여 문인들을  가르쳤으며, 그가 지은 '심경발휘(心經發揮)'는 성리학에 대한 깊이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저서이다. 문인록인 회연급문록(檜淵及門錄)에는 342명의 제자들 명단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어려서 한강에게 수업하였으며, 그 일부는 자신이 20대에 스승을 배알했듯이 20대에 집지를 하였고, 극히 소수는 한강이 고을의 수령으로 있는 동안에 한강을 향리로 찾아 뵙거나 여행도중 한강에게 배운 제자도 있다. 그 대표적인 제자로는 여헌 장현광,미수 허목, 동계 정온등이며 이외 당대 기라성 같은 선비들이 많았다.

현재 마산시 교방동 무학산 계곡에 있는 서원골은 회원서원(會原書院)이 있었다 하여 서원골로 부른다. 이 서원은 곧 한강을 위해 문인들이 세운 것이다. 한강이 생전에 이곳에 초당을 짓고 제자들과 시서(詩書)를 강론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지금 서원은 철폐되어 없어지고 정자인 관해정(觀海亭)만 남아있다. 해마다 한강과 그의 제자인 미수 허목의 향사를 모시고 있으며 건물앞에 있는 수령 440년된 은행나무는 한강이 손수 심은 것이라 전해온다.(1997.7.4.경남일보)  

 

4. 정구(鄭逑) 청주인

오선생예설분류 [五先生禮說分類]

중국 송대(宋代)의 정호(程顥) ․정이(程이) ․사마속수(司馬涑水) ․장횡거(張橫渠) ․주회암(朱晦庵) 등 5대유(大儒)의 예설(禮說)을 분류하여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편저로 1611년(광해군 3) 완성되었다. 1629년(인조 7) 편자의 제자 이윤우(李潤雨:1569~1634)가 담양부사(潭陽府使)로 있을 때 간행하였다. 이 책을 통해 한국 유학자(儒學者)들이 주장한 학설의 근거를 알 수 있다.

 

5. 심경발휘 [心經發揮]

조선시대의 수심서(修心書)로 선조 때의 학자 정구(鄭逑)가 중국 송(宋)나라 진덕수(眞德秀)의 《심경(心經)》을 모방하여 1570년(선조 3)에 편찬한 책이다. 정자(程子) ․주자(朱子) 등 선유(先儒)의 말로 해석을 가하고, 주돈이(周敦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 정호(程顥)의 《정성서(定性書)》, 정이(程이)의 <호학론(好學論)>,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주자의 인(仁) ․성(誠)에 관한 설 등과 정주(程朱)의 행략(行略)을 부록으로 실었다.

 

6. 창녕누정록(昌寧樓亭錄)

1995년 12월 30일 발행(發行)

관산서원(冠山書院)

고암면(高岩面) 우천리(牛川里) 월미(月未)

제향(祭享) 정구(鄭逑) 호(號) 한강(寒岡) 본(本) 청주(淸州)

제향(祭享) 강소(姜訴) 본(本) 진주(晉州)

제향(祭享) 안여경(安餘慶) 호(號) 옥천(玉川) 본(本) 광주(廣州)

 

7. 창녕누정록(昌寧樓亭錄)

1995년 12월 30일 발행(發行)

관산서당(冠山書堂)

고암면(高岩面) 우천리(牛川里) 월미(月未)

제향(祭享) 정구(鄭逑) 호(號) 한강(寒岡) 본(本) 청주(淸州)

제향(祭享) 강소(姜訴) 본(本) 진주(晉州)

제향(祭享) 안여경(安餘慶) 호(號) 옥천(玉川) 본(本) 광주(廣州)

 

8. 창녕누정록(昌寧樓亭錄)

1995년 12월 30일 발행(發行)

팔낙정(八樂亭)

유어면(遊漁面) 미구리(尾九里) 팔락정(八樂亭)

1580년 창건(創建) 정구(鄭逑) 문목공(文穆公)

건립(建立) 김성동(金性東) 하일병(河一秉) 양종팔(楊鍾八) 성환영(成煥永)

후학(後學) 광주(光州) 노학용(盧鶴容) 근기(謹記)

 

9. 창녕누정록(昌寧樓亭錄)

1995년 12월 30일 발행(發行)

현존(現存)치 않은 누정록(樓亭錄)

술정(述亭)

창녕읍(昌寧邑) 술정(述亭)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 설재(設齋)

 

10.창녕누정록(昌寧樓亭錄)

1995년 12월 30일 발행(發行)

현존(現存)치 않은 누정록(樓亭錄)

옥천정(玉泉亭)

창녕읍(昌寧邑) 옥천(玉泉)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 작정(作亭)

 

11.창녕누정록(昌寧樓亭錄)

1995년 12월 30일 발행(發行)

현존(現存)치 않은 누정록(樓亭錄)

만진정(蔓津亭)

유어면(遊漁面) 세진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 설재(設齋)

 

12.창녕누정록(昌寧樓亭錄)

1995년 12월 30일 발행(發行)

현존(現存)치 않은 누정록(樓亭錄)

물계정(勿溪亭)

대지면(大池面) 왕산(旺山)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 설재(設齋)

문헌(文獻)

1. 寒岡先生文集(奎1378), 鄭逑(朝鮮)著.

          12卷 5冊 木坂本 33×22cm.

          四周雙邊 半郭:20.7×17.3cm.

          有界 12行 22字.

          版心:上下花紋魚尾.

     寒岡 鄭逑(1543∼1620)의 詩文集. 序·跋이 없어 開印 경위 및 그 연대를 알  수  없다. 鄭逑의 자는 道可, 호는 寒岡, 星州出身이다. 縣監·郡守 등을 거쳐  右承旨·江原監司·工曹參判 등을 지낸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文臣이지만, 그의  진면목은  그보다도 학문과 덕행에 특히 높은 비중을 둘 만한 인물이었다. 즉 그는 일찌기 鄕解를 거친  뒤 科業을 버리고 오직 학문에만 온 정력을 기울였는데 그의 스승이 退溪·南冥·三谷  등 당대의 巨儒들이며, 또 뒤에 그가 程·朱를 모신 川谷書院에 從祀된 것이라든지,  기타 東岡·鶴翎 등 兩書院에 또한 享祀되었던 사실 등을 통해서도 짐작이  된다.  이  밖에 그의 학문에 관해 ≪海東名臣錄≫에  「淹貫殆遍하여  算數·兵陣·醫藥·風水에  모두 통달하고 또 작문은 朱晦庵을 바탕으로하여 蘊蓄이 자못 宏博하였다」운운한  것을  미루어서도 대강은 짐작을 할 수가 있다. 本集에 수록된 글들을  중심으로  본다면  그의 本領은 아무래도 禮論 내지는 古代 服飾制度의 연구에 있있던 듯하다.  그런데  ≪海東名臣錄≫에 列記돼 있는 그의 저술 목록과 본집에 수록된 내용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즉 名臣錄에 따르면 그의  저서로  心經發揮·冠儀·婚儀·설儀·五先生禮說·羨墻錄· 聖賢風範·古今忠謀·洙泗言仁錄·五服沿革圖·深衣制度·武夷志·谷山洞庵志 ·臥龍志·歷代紀年·古今會粹·景賢續錄 등이 家藏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실상  본집 안에는 이와 같은 글들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지 않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위  저술 목록 중 본집에 그 全文이 실려 있는 것은 「설儀」(契會立儀로 돼 있음)와  「深衣制度」(深衣製造法) 2편뿐 나머지는 모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  가운데  五先生禮說·心經發揮·洙泗言仁錄·景賢續錄·武夷志 등은 序文 또는  跋文만이  수록돼  있을 뿐이다. 卷{1}:詩 41수(夙夜齋望倻山 등), 挽 26수(挽南冥曺先生, 挽柳西厓 등).  卷{2}:疏 8편(請勿改 卜山陵疏·辭通政疏 등), 箚 10편(辭大司憲箚 등). 이 가운데  「癸丑箚子」는 仁穆大妃 유폐 또는 永昌大君 문제에 관련된 箚子로 전후 3차에 걸쳐  起草된 것이다. 啓辭 9편(大司憲肅拜後避嫌啓辭 등). 이것은 모두 大司憲으로 있을 때의  것으로 ≪海東名臣錄≫에 따르면 이때 그는 臨海君을 구하려다 護逆의 지목을 받고  마침내 사직을 한 것으로 돼 있는데, 이 疏들은 바로 이때의 것인  듯하다.  卷  {3}:與趙士敬등 書 71편. 이 가운데에는 服制 및 禮說에 관한 答書가 많이  있어  그의  학자로서의 면목을 보여 주는 바가 있다. 卷{4}:答沈政丞 등 書 33편.역시 예론에 관한 答書가  대부분으로 돼 있고, 특히 이 가운데 「商議禮曹啓目」은 禮說에 관한 해박한 고증을  보이고 있다. 卷 {5}:答禮曹判書등 問答 25편. 禮曹·書院 기타  개인의  물음에  대답한 것으로 모두 禮說에 관한 문제가 다루어져 있다. 이를테면 或者가  「喪人이  別無出入處로되 而省墓之行道에 途或遠則路上所着何以爲之耶아」 운운하는  문제를  물어  왔을때 이에 대답한 글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卷{6}:答卓爾 등 問答 20편. 卷 {5}와  마찬 가지로 「或이 問 人死而家有一子한데 年재一歲라도 神主左旁에  以兒名으로  書否아」 운운하는 물음에 대답한 것들이다. 卷 {7}:雜著로 書洙泗言仁錄後,  書景賢續錄後,  書武夷志九曲圖後 등 後書 14편과 契會立儀.  拙齋說·李君洙字說·天孫河鼓七夕會辯·與城山長貳·客位謝帖 · 月朝約會議·野服· 遊伽倻錄 등이 있다.  卷{8}:序  10편(五先生禮說分類·心經發揮序·治亂提要小敍 등), 記 5편(咸安社稷壇記·降山樓記  등),  跋 2편(武夷志跋 등). 卷{9}:祝文 41편(川谷書院新奉安文·紫川書院三賢祠奉安文 등),  祭文 60편(祭西厓文·祭南冥曺先生文·告多勿墓文 등). 卷 {10}:墓表·墓誌銘  13편(金鶴峯墓表 등). 卷{11}:西川府院君鄭公行狀. 이것은 宣祖 때의  文臣  鄭??壽(1538∼1602)의 行狀으로 모두 20장에 달하는 長文이다. 卷{12}:成宗 때의 학자며 文臣이던  寒暄堂 金宏弼(1454∼1504)의 年譜와 「寒暄堂師友錄」이라 하여 그의 師友로  金宗直·南孝溫·趙光祖 등 30여인의 行狀이 간략히 수록돼 있다.

   

2. 寒岡先生別集(奎11442), 鄭逑(朝鮮)著.

          3卷 1冊 木板本 32.2×20.7cm.

          四周雙邊 半郭:29.5×16cm.

          有界 10行 20字.

          版心:上下花紋魚尾.

     寒岡 鄭逑(1543∼1620)의 詩文集의 別集으로 原集 12卷 5冊<奎1378>과 續集 9卷  3冊<奎11441>에 실려 있지 아니한 것이 실려 있다. 刊記는 미상이다. 鄭逑의 호는  寒岡이다. [저자에 대해서는 앞의 ≪寒岡先生文集≫<奎1378> 해제 참조] 卷  {1}:書  25편(與徐行甫思遠, 答李馨遠笠 등). 대개 학문을 격려하는 書簡이다. 卷 {2}:答問  12편(答徐行甫問, 答黃宗海問, 答河淵尙問 등). 이것은 대개 喪祭 등의  禮에서  變禮에  관하여 질문해온 데 대한 답서로 經傳과 先儒들의 說을 이끌어다 답한 것이다. 이어서 雜著  7편(書古鏡重磨方後, 五先生禮說分類跋, 書道東書院額板下,  宋潛溪九賢遺像記,  檜淵新遷二十宜, 武屹題壁, 書西原世藁譜圖下), 詩 11수(謝賓, 挽權松溪應仁 등)가 있다.  卷{3}:答問 3편(答金希元問, 答張行原問, 答任卓爾問). 張行原(興孝)에 답한 것은  "無極而太極"이란 太極圖說의 문구를 해석하는 문제이고 任卓爾에 답한 글은 禮制와  經傳上의 懸吐와 해석문제에 대한 물음에 답한 것으로 모두 口訣·한글로 기록되어 있다.  卷尾에는 1624년(仁祖 2)에 張顯光이 지은 寒岡의 行狀, 許穆이  撰한  寒岡의  墓誌銘이 있다. 이들은 모두≪寒岡先生文集≫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뒤에  追補한 것으로 보인다.

 

3. 寒岡先生續集(奎11441), 鄭逑(朝鮮)著.

          9卷 3冊 木板本 32.2×20cm.

          周周雙邊 半郭:20×15.9cm.

          有界 10行 20字.

          版心:上下花紋魚尾.

     寒岡 鄭逑(1543∼1620)의 詩文集의 續集으로 原集<奎1378>과 別集에 실려 있지  않은 저술을 모아 후에 간행한 것으로 보이나 序文 跋文이 없으며 간기도 미상이다. 原集  <奎1378>, 別集 <奎11442>과 板本이 다르다. [저자에 대해서는  앞의  ≪寒岡先生文集≫ 해제 참조]. 卷 {1}:詩 16수(贈李謨思, 贈別金東岡 등), 賦 1수(立雪), 論  1편(問牛喘), 疏 1편(庚戌疏)등. 卷 {2}:書 23편(與趙士敬, 答成浩原, 與李廷秀 등).  대개  문후 또는 격려의 서간이다. 卷{3}:答問 22편(答任卓爾屹, 答黃宗海  등).  經傳上의  문제, 특히 喪·祭의 禮에서 變禮問題의 답서가 대부분이다. 卷 {4}:雜著  6편(道東書院院規,養浩帖, 讀書帖, 壁上帖, 通讀會議, 講法). 모두 書院에서 학문하던 형식과 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 중 「養浩帖」은 浩然之氣를 기르는 방법을 논하 글이다. 卷  {5}:文  3편(呈監司文, 諭鄕會諸員文, 播諭安東諸生文), 序  3편(氷江觀雪圖序,  成川鎭武學祠祭會圖序 등)과 祝文 2편(成川武學祠高麗上將軍鄭府君奉安文 등),  祭文  6편(祭朴君信文등). 卷 {6}:行狀 1편(金鶴峯行狀). 卷 {7}:詩 3수(挽金台수 등),  銘  1편(玉川亭銘), 書 48편(與鄭菜圃 등). 卷 {8}:書 34편(答金大丘允安 등). 여기 書도 학문적인  격려의 글이 대부분이다. 卷{9}:答問 4편(答張德晦 등)이 있는데 대개 성리학적인  질문에  답한 글이다. 이어서 祭文 3편(祭洪汝誠文 등), 墓碣 4편이 있다.  卷尾에  「辛丑冬重刊」이란 기록이 있다.

   

4. 寒岡先生言行錄(奎3659), 編者未詳.

          4卷 2冊 木版本 30.2×20.2cm.

          四周雙邊 半郭:19.4×15.6cm.

          有界 10行 17字.

          版心:上花紋魚尾.

     寒岡 鄭逑(1543∼1620)의 言行을 收錄한 책이다. 門人들과 子孫들이  衷集하여  純祖朝에 刊印한것으로보인다. 鄭逑는思中의 아들로寒暄堂金宏弼의 外曾孫으로 태 어  났다. 字는 道可, 號는寒岡, 本貫은 淸州다. 吳健에게 修學하였으나후에 南冥  曺植,  退溪 李滉에게 性理學을 배왔다. 1573년(宣祖 6) 遺逸로 薦擧되어 1578년 司圃署  主簿,  그후 三嘉·義興·知禮 등의 縣監에임명되 었으나 就任하지 않고, 1580닥ㄴ宣祖  13)에비로소 昌寧縣監에 부임하여 善政을 배풀어 生祠堂이 세워졌다. 1608년(光海君 극위)  大司憲이되었으나 臨海君의 獄事가일어나자이에 관련된사람들을 모두 용서하라고  上疏한 뒤 고향에 돌아갔다. 1613년(光海君 5) 癸丑獄事가 일어나자上疏하여 永昌大君을  구하려 했고 鄕里에 百梅園을 세워 儒生들을 가르쳤다. 經學을 비롯하여算數, 兵陣,  醫藥,風水에 이르기까지 精通했으며 특히 禮學에 뛰어나 禮學에 관한 저술이  많다.  당때의 名文章家로서 글씨도 잘썼으며 많은제자도 배출했다. 내용과 序次를  살펴보면  卷頭에는 目錄과 箚記諸子目錄이 실려있는데 여기에는 張顯光, 徐思遠, 許穆 등 19명의  名單과 本貫 등이 밝혀져 있다. 卷別 내용을 보면(팔호안숫자는 항목의 수),  卷{1}  類編. 學問(29), 價書(12), 持敬(14), 律身(6), 成德 (15), 禮學(19),  講辨(13),  敎人(32), 起居語默之節(4).내용은 모두·寒岡의 言行을 기술한 것이고 條目별로 기술한 것은  李舒, 朴明胤, 李厚慶, 裴尙龍, 崔恒慶, 李天封, 李潤雨, 郭坵, 孫處訥, 李墨, 李堉,  黃宗海, 文緯, 張顯光, 許穆 등이 寒岡에 관하여 쓴 글을 節錄하여 類別로 실은  것이다(이하 모두 같음). 卷{2} 類編. 尊賢(8), 事親(7), 友愛(2), 居喪(6), 奉先(10),  居家(4), 飮食衣艮之節 (3), 交際(3), 威儀(3), 處鄕 (6), 辭受(5). 卷{3}  類編.  出處(5), 忠義(9), 居官(12), 著述(11), 論時事(3), 處小人(5), 雜記(28), 考終記(4). 卷{4}  附錄. 門人 李厚慶의 敍述, 門人 李天封의 實記, 門人 李箏의 遺事가실려있고 이어서  筵臣請贈啓辭, 政府請額啓辭, 政院請額啓辭, 賜額時祭文, 請從祀文廟疏批答,  請從祀文廟時禮曹啓辭, 議大臣後禮曹復啓가 차례로 실려있다.

 

5. 寒岡先生言行錄誕條辨破錄(奎3748), 張氏門中.

         1冊(豺張) 木板本 33.9×22.2cm.

         四周雙邊 半郭:19.5×16.3cm.

         有界 10行 1行 18字.

         版心:上下花紋魚尾.

         表紙書名:張氏辨破錄.

     張顯光의 후손들이 ≪寒岡言行錄≫의 잘못을 辨破한 책이다. 鄭逑(1543∼1620)의  언행록을 간행할 때 정씨 집안에서 旅軒 張顯光을 「箚記諸子目錄」 중에 첫째로  기록하여 張顯光이 鄭逑의 문인인 것 같이 기록하였으므로 장씨 집안에서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여 장현광이 정구의 제자가 아니라고 변박한 내용이다. 단권 1책의 목판본으로  12조항을 들어 ≪한강언행록≫의 잘못된 점을 변박하고 끝에 通文을 부록하고  있다.  원래 張顯光은 鄭逑의 姪女嬪로서 친하게 지냈으며 정구보다 연하로 그를 존경하였던  것은 사실이나 학문을 배운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구가 죽은  후에  장현광이 그의 행장을 지었었는데 그 행장에서 9조목을 떼어다 여기 언행록에 節錄하여  싣고 장현광이 箚記한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장씨의 집안 후손들이  이책에  이런  문제의 잘못을 조목별로 기술하였다. 張顯光(1554∼1637)은 학자로 이름이 매우 높았다.  첫머리에는 먼저 이책을 엮게된 내역과 다음 「箚記諸子目錄」에서 旅軒을  맨  앞에  실은것의 부당함과 箚錄한 여려 조목아래 旅軒의 이름을 바로 쓴 것의 부당함,  다음  旅軒이 지은 寒岡先生行狀을 9조 節錄한 것과 또 그 節錄上의 字句를 刪하고 改한 것에  각각 그 부당성을 논하였다. 그리고 寒岡言行錄 부록의 부당성을 8조항으로 기술한  다음 총론을 하였다. 부록으로 東落通檜淵文, 東洛再通檜淵文, 張氏與鄭氏書,  鄭氏答張氏書, 東洛三通檜淵文, 張氏再與鄭氏書, 東洛四通檜淵文, 蘇湖李氏答張氏書,  榮川士林通檜淵文, 藏待士林答東洛文, 懷德崇賢士林通檜淵文, 崇賢士林答東洛文 등이  차례로  실려있다.

 

6. 寒岡先生年譜(奎12639), 編者未詳.

          4卷 1冊(97張) 木板本 31.1×22cm.

          四周單邊 半郭:20.5×15.7cm.

          有界 10行 22字 注雙行.

          版心:上下花紋魚尾, 上下黑魚尾.

     宣祖·光海朝의 文臣 鄭逑(1543∼1620)의 年譜에 神道碑銘등의 附錄을  더하여  간행한 책이다. 편자나 편찬시기 간행년대는 미상이다. 다만 年譜 말미에 「肅宗  16年」이라는 기록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景宗朝 이후 시기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鄭逑는 字가 道可, 號가 寒岡, 本貫은 淸州이고 思中의 아들, 金宏弼의  外曾孫이다.  그는 科擧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遺逸로 천거되어 禮賓寺 參奉에 임명된 후  여러  고을의 守令과, 內職으로는 承旨·工曹參判, 大司憲에까지 임명되었다. 그러나 外職에는  대체로 부임하면서도 內職은 항상 辭退하여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吳健에게서  수학하기 시작하여 李滉과 曹植의 學問, 특히 退溪學을 계승하였으며 당시  嶺南人士의  대부분이 그의 學問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그에게서 近畿出身의 許穆에게로 이어지는  學統은 후일 南人 實學派의 大宗을 이루었다. 諡號은 文穆이다. 본서는 첫머리에  世系를 실었는데 이것은 그의 先代뿐 아니라 12代 後孫까지 수록한 것으로 1841년(辛丑)에  追刊했다는 기록이 붙어 있다. 年譜는 탄생에서 1690년(肅宗 16)에 王의  致祭까지  수록하고 있으며, 자세한 상황설명을 더하였고 疏답등 그의 저술도  다수  수록하였다.  그뒤는 附錄으로서, {권2}에는 申欽이 撰한 神道碑銘, 宣祖와 光海君이 내린  敎書와  諭書를, {권3}에는 官과 여러 門人이 올린 祭文등을 실었다. {권4}에는 輓章을  싣고  말미에는 光海君 2년과 7년에 鄭逑에 대한 비방이 일어났을 때 嶺南儒生들이  그를  옹호하여 올린 疏를 세 편 수록하였다. 鄭逑의 文集과 함께 이용한다면 鄭逑의  생애는  물론 당시의 학문적·정치적 동향을 유기적으로 파악하는 데 참고될 자료이다.

 

7. 咸州志(奎10985,奎 12249), 鄭逑(朝鮮)編.

          1冊(95張) 筆寫本 33.9×21.1cm.

     1587년(宣祖 20) 鄭逑가 편찬한 경상도 咸安의 읍지를 후에 필사한  것이다.  본서는 현전하는 私撰邑誌 가운데 가장 오래된 내용의 것이다. 卷末에는  鄭逑가  1587년(宣祖 20)과 1589년(宣祖 22)에 쓴 序가 있고 壬亂 직후인 1600년(宣祖 33) 吳澐이  쓴  跋이 있다. 내용목차는 京師相距, 四隣疆界, 建置沿革, 郡名, 形勝, 風俗, 各里,  戶口,  田結, 山川, 土産, 館宇, 城郭, 壇廟, 學校, 書院, 驛院, 軍器, 烽燧, 堤堰, 灌漑,  亭사, 橋梁, 佛宇, 古蹟, 名宦, 任官, 姓氏, 人物, 流配, 善行, 閨行, 見行,  文科,  武科, 司馬, 塚墓, 旌表, 冊板, 題詠, 叢談의 순이다. 寒岡 鄭逑(1543∼1620)는 金宏弼의  外增孫으로 吳健의 제자이고 退溪와 南冥의 문하에서 수업했다. 그는 邑誌  편찬에  많은 관심을 보여 자신이 守宰로 부임하는 지역마다 읍지를  찬하였다[≪寒岡別集≫<奎11442> 참조]. ≪咸州志≫외에도 安東의 ≪永嘉誌≫ 편찬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江陵·昌寧·同福 등의 읍지를 편찬했다고 하나[≪嶺南邑誌≫ <奎12174>  제19책「京山誌序」  참조] 전하지 않는다. 寒岡의 序에 의하면 본서가 吳澐 李稱 朴齊仁 李瀞 등  郡內  儒士들의 협력을 받아 편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항목의 설정이유도 밝혀져 있다.  ≪咸州志≫는 임란 직전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守令의 安民善俗의 요체를 제공하려는  목적에서 편찬된 것으로 이는 그 편목을 ≪新增東國輿地勝覽≫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즉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없던 京師相距, 各里, 戶口, 田結,  軍器, 堤堰, 灌漑, 任官, 流配, 文科, 武科, 司馬, 旌表, 冊板, 叢談 등  항목이  첨가되고 있다. 이 항목들은 모두 安民과 善俗에 관계되는 것이다. 본서는 壬亂을 당해  寒岡의 친구의 도움으로 海印寺에 보관되었던 것을 亂後 咸安 출신인 吳澐이  서울에서  寒岡을 만나 얻어보게 되었다고, 吳澐의 跋에서 전하고 있다. 내용의 특징은  「任官」조에 姜伯珍이 1494년(成宗 25)에 쓴 任官題名記序와 鄭逑가  쓴  任官題名記跋이  있다. 任官題名記序는 당시 수령이던 姜伯珍이 전임의 정치를 참고하기 위해  고려말부터  戶長이 기록하여 사사로 전해오던 先生案을 정리했음을 밝힌 것이고, 이를  寒岡이  읍지의 항목으로 채택하였다. 「各里」「戶口」「田結」조는 특히 상세하다.  各里의  사방 경계를 기록하고, 동서 남북의 거리 및 里의 크기, 屬坊의 수와  명칭,  토지의  비척, 水旱의 정도, 居民의 신분, 풍속 등이 기재되어 각 里의 상황이 확연히  드러난다.  戶口와 田結도 각 里를 단위로 居民의 男女수와 田結수가  기록되어  이후  읍지들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상세함이 있다. 「叢談」조는 이諺俗談 등 사소한 것까지도 敎化에  관계되는 것은 모두 기록하여, 당시의 사회 풍속이나 민간의 실정을 살피는데  중요하다.≪咸州志≫는 ≪東國輿地勝覽≫의 소략함과 변동사항을 보충할 목적으로  작성되었으며 이후의 各郡邑誌의 기본이 되었다. 즉 ≪永嘉誌≫가 ≪咸州志≫를  모방하여  편찬되었으며, 晋州의 ≪晋陽誌≫도 거의 동일한 체제와 편목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이책은 邑誌와 地方史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奎12249>本은 크기가 조금 크고  筆寫本으로 되어있다.

 

8. 海東各賢筆蹟(奎12015), 編者未詳.

         1帖(5折 12面) 32.8×18.8cm.

     金宗直(1431∼1492), 徐居正(1420∼1488),  鄭逑(1543∼1620),  申光漢(1484∼1555), 李珥(1536∼1584), 李敬輿(1585∼1657), 吳竣(1587∼1666)등 7인의 墨蹟을 모은  筆帖. 모두 小字의 七言 또는 五言詩의 草稿이다. 金宗直은 書화를 잘하였고  처음  松雪體에서 출발하여 만년에 個性的인 遲澁한 筆致가 생겨 그것을 배우는 書家가  많았다고  하는데 여기의 七言絶句 「慇懃來訪過宣城 爲惜良朋眼失明 竟日淡懷乘暮去  一眉新月半天生」은 楷書인데 글씨가 拙澁하다. 한쪽 끝에 후에  或者가  「膺書」라고  墨書했는데 혹 少時의 글씨일지도 모른다. 徐居正은 筆法이 絶妙하였으며 安平大君의 一派로서  松雪體의 妙를 얻었으며 晩年에 東坡筆法도 연구하여 松雪體에 새로운 맛을 더했다고  한다. 成宗이 그의 筆法을 사랑했으며 昌慶新宮이 完成했을 때에 殿堂 亭閣 諸門의  額號를 모두 그가 命名하여 썼다. 明使 祁順이 「落筆皆成珠玉 況筆法  大有吳興遺妙乎  如公者 可橫行天下」라고 칭송했다. 여기의 次金學士 五言 「主人勸一杯  靑山白月頹  前村雲己暝 新月照高臺 四佳稿」는 草書로서 그의 書風이 그대로 나타난 逸品이다.  鄭逑도 善書했는데 여기는 稿壯紙에 쓴 「詩禮傳家訓 云云」의 草書이다. 申光漢도  筆力이 雄渾하고 淸勁 老健하여 남이 미치지 못하는 妙가 있다는 評을 받았는데  여기의  草書인「庭前梅種後 嫌遠臥床移 只見花如雪 樽邊把盞遲 企齋草」는 전형적인  晋體草書이며 或者가 「膺本」이라고 墨書하였는데 확실하지 않다. 李珥도 松雪體를 잘 쓰고  餘技로 그림도 즐겼는데 여기의 「送읍淸尊丈之南鄕詩」二首도 端雅한 行書이다. 詩는  「人事天時俱一夢 每年今日却悲傷 這邊又別同門丈 歲暮芹官獨斷腸」  「浮生半歲長爲客  殘膜窮愁빈欲衰 태遞鄕關人又去嶺雲江樹有餘悲」이다. 李敬輿도 글씨를 잘  썼으며  吳竣은 寫字官을 지내고 朝家의 吉凶冊文과 많은 公私의 碑銘을 썼다. 仁祖朝에  王命으로  三田渡碑文을 쓰고 그 抱恨으로 終身하였다. 여기의 李敬輿와 吳竣의 글씨는  같은  종이에 長光 香의 韻으로 七言詩를 지어 쓴 行草書이다.

 

9. 정건호(鄭建鎬) 본(本) 청주(淸州) 자(字) 한중(漢仲) 호(號) 지암(芝庵)

내구(內舅) 지암공(芝庵公) 묘갈명(墓碣銘)

임술(壬戌) 1982년 계춘(季春) 지월(之月)

여주(驪州)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 찬(撰)

문헌(文獻)

1. 영산(靈山) 문암(聞巖) 신초(辛礎)

임진왜란(壬辰倭亂) 후(後) 덕망(德望)과 학문(學文)이 높은 선비와 같이 놀며 의리(義理)를 토론하고 세상(世上) 영욕에는 뜻이 없고 담담했다. 정한강 구(鄭寒岡 逑), 장여헌 현광(張旅軒 顯光) 양(兩)선생(先生)이 높이 평가하여 매양 산수간에 유람(遊覽)할때는 반드시 서로 맞이하여 즐겼다. 선조 40년 정미(丁未 1607) 1월 27일에 정한강 구(鄭寒岡 逑), 장여헌 현광(張旅軒 顯光),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 함안군수 박충후(咸安郡守 朴忠後), 합천군수 이숙(陜川郡守 李潚), 영모당 신방집(永慕堂 辛邦楫), 외재 이후경(畏齋 李厚慶), 복재 이도자(復齋 李道孜), 군수 박진영(郡守 朴震英), 백희 신응(伯禧 辛膺), 간송 조임도(澗松 趙任道)등 35인 현인(賢人)들과 용호(龍湖)에 선유할 때 정한강 구(鄭寒岡 逑) 이 자리를 같이한 선비를 돌아보고 신군(辛君)은 무중군자(武中君子)라 하시고, 여헌공(旅軒公)은 가슴에 촌철을 지니고 있다 하였으니, 그의 절조(節操)는 범인으로서는 따라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문암(聞巖)의 경치를 사랑하여 수칸 집을 얽어 여생을 보냈다.

 

2. 문암(聞巖) 충의록(忠義錄)

聞巖 忠義錄 문암 충의록 1549 (명종4) - 1618 (광해10)

     辛礎  字: 支수  本: 靈山  生父: 希壽  系父: 琬  居: 靈山

    (신초  자: 지수  본: 영산  생부: 희수  계부: 완  거: 영산)

충의록(忠義錄) 부록(附錄)

용호(龍湖) 동범록(同泛錄) 1607년(宣祖 40) 3월 28일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

정한강(鄭寒岡) 선생(先生)

 

3. 문암정 중건기(聞巖亭 重建記)

한강(寒岡) 정구

여헌(旅軒) 장현광

망우(忘憂) 곽재우

신용상(辛容相)씨를 회장

신용구(辛容球) 신갑준(辛甲俊) 신용진(辛容晋) 신병식(辛炳植) 신용제(辛容濟) 신주덕(辛周德) 신회식(辛澮植)씨를 고문

신조식(辛朝植) 신재기(辛再基) 신종무(辛鍾楙)로 부위원장

주손(胄孫) 신종학(辛鍾學)씨

13세손 신진교(辛鎭敎) 14세손 신종학(辛鍾學) 근기(謹記).

 

4. 정구(鄭逑)

西原鄭氏世譜 (古 999.81 정53걁)

鄭弼鎬 編.

石印本. - 大邱 : 津津堂, 昭和14(1939).

零本18冊 ; 33.2x21.7cm.

수장본 중 권지 9책 결본임(全19卷19冊).

서원(西原 ; 청주) 정씨의 시조 정극경(鄭極卿)은 고려 의종(毅宗)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그의 6세손 책(桰責)이 충숙왕 때 충주목사를 역임하였고, 통헌대부(通憲大夫)·판선공사(判繕工事)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러 청하군(淸河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청주(淸州)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각 파는 북지파(北枝派)·녹사공파(錄事公派)·모산파(茅山派)·원천파(元川派)·옹진파(瓮津派)·장단파(長湍派)·춘곡파(春谷派)·숙천파(肅川派)가 있다.

책머리에 서원정씨가전(西原鄭氏家傳 ; 李穡 撰)과 청주정씨보도서(淸州鄭氏譜圖序 ; 鄭崑壽), 가승서(家乘序 ; 鄭崑壽), 족회도서(族會圖序 ; 鄭逑), 족보서(族譜序 ; 鄭昴, 鄭必奎, 鄭奎錫), 세보후지(世譜後識 ; 鄭來成), 범례(凡例), 행열도(行列圖), 그리고 시조에서부터 31세까지 세보가 수록되어 있다.

 

5. 벽사관문존(碧史館文存)

이우성(李佑成) 저(著)

 본관(本貫) 여주(驪州) 호(號) 벽사(碧史)

 거(居) 밀양(密陽) 부북면(府北面) 퇴로(退老)

實是學舍 古典文學硏究會 編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편

정구(鄭逑) 본(本) 청주(淸州)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시호는 문목(文穆), 사중(思中)의 아들

제(第) 2부 산문(散文)  451

 

6. 오봉서당기(五峰書堂記) 거(居) 밀양(密陽) 초동면 오방동

조광익(曺光益) 본(本) 창녕(昌寧) 1537(중종32)~1578(선조11) 조선(朝鮮)의 학자(學者). 자(字)는 가회(司晦). 호(號)는 죽와(竹窩)·취원당(聚遠堂), 군수(郡守) 효연(孝淵)의 손자(孫子), 윤신(允愼)의 아들. 이황(李滉)의 문인(門人). 1561년(명종16) 생원(生員)이 되고, 156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及第), 감찰(監察)을 지내고 1576년(선조 9)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壯元),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이르렀다.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硏究)했으며, 효성(孝誠)이 지극(地極)했다.

신유(辛酉) 1981년 맹동(孟冬) 지월(之月)

여주(驪州)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 찬(撰)

 

7. 후산정사기(后山精舍記) 재령이씨(載寧李氏) 재각(齋閣)

이재(李栽) 본(本) 재령(載寧) 조선 후기의 학자. 자(字)는 유재(幼材), 호(號)는 밀암(密庵).

안동(安東) 임하면(臨河面) 금수리(錦水里)

경진(庚辰) 2000년 소서절(小暑節)  

여주(驪州)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 찬(撰)

 

8. 효자(孝子) 충주석공(忠州石公) 사적비(事蹟碑)

석수도(石守道) 본(本) 충주(忠州) 초휘(初諱) 석천윤(石天尹) 자(字) 수연(粹然) 호(號) 소암(素菴)

부(父) 석만원(石萬元)

모(母) 경주김씨(慶州金氏) 김예중(金禮中)의 여(女)

배(配) 월성최씨(月城崔氏) 최시태(崔時泰)의 여(女)

계자(系子) 석중명(石重明) *종질(從姪)

 무진(戊辰) 1988년 계춘(季春) 지월(之月)

여주(驪州)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 찬(撰)

 

9. 근파안공(槿坡安公) 묘갈명(墓碣銘)

안종희(安鍾禧) 본(本) 광주(廣州) 1896~1985 자(字) 길부(吉夫) 호(號) 근파(槿坡) 정통 퇴계학파의 마지막 거유로서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 문장덕행이 세상에서 유종으로 추앙받았으며, 사림들이 회동(會同)하여 선생(先生)으로 추존하다. 재궁 근파재(槿坡齋)와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부(父) 안용원(安龍遠)

모(母) 의령남씨(宜寧南氏) 남헌규(南獻圭)의 여(女)

모(母) 분성배씨(盆城裵氏) 배영복(裵永福)의 여(女)

생모(生母) 창원황씨(昌原黃氏) 황치을(黃致乙)의 여(女)

배(配) 밀성손씨(密城孫氏) 지재(止齋) 손호영(孫浩榮)의 여(女)

자(子) 안형수(安亨洙) 안명수(安明洙)

여(女) 이호범(李浩範) 본(本) 성산(星山)

 정묘(丁卯) 1987년 윤(閏) 6월 상한(上澣)

여주(驪州)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 찬(撰)

 

10. 근당이공(謹堂李公) 묘갈명(墓碣銘)

이필규(李弼奎) 자(字) 응문(應文) 호(號) 근당(謹堂) 고종(高宗) 신축(辛丑)생 임자(壬子) 맹춘(孟春)에 졸

부(父) 이윤구(李允九) 호(號) 퇴봉(退峰)

모(母) 재령이씨(載寧李氏) 이영호(李榮浩)의 여(女)

  부제학(副提學) 이중현(李仲賢)의 후(后)

배(配) 해주정씨(海州鄭氏) 정난석(鄭蘭錫)의 여(女)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의 후(后)

자(子) 이길녕(李吉寧) 이국녕(李國寧) 이희녕(李熹寧) 이준녕(李俊寧) 이무녕(李茂寧)

여(女) 허남정(許南丁)

 경진(庚辰) 2000년 9월  

여주(驪州)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 찬(撰)

문헌(文獻)

1. 정구(鄭逑) 한강(寒岡) 제(弟)  

정곤수(鄭崑壽) 字는 汝仁, 호는 柏谷·慶陰·朝隱, 본관은 淸州

  柏谷先生集(奎200), 鄭崑壽(朝鮮)著, 沈??(朝鮮)編.

         4卷 4冊 木板本 33.5×22cm.

         四周雙邊 半郭:23×16.

         有界 10行 20字 注雙行.

         版心:上下花紋魚尾.

    柏谷 鄭崑壽(1538∼1602)의 詩文集 및 附錄을 모은 것이다.  저자의  외증손  沈력이 蒐輯 編纂하여 1676년(肅宗 2) 平昌郡守로 있을 때에 간행을 시도하다가  중도에  그만 두었다. 그 뒤 저자의 玄孫 鍵이 沈력의 아들 廷熙와 더불어 舊本을 참작,  오류를  바로잡고 책머리에 世譜와 年譜를 붙여서 1710년 간행하였는데 본책이 바로 그때  간행한 것이다. 刊行費用은 趾齋 閔鎭厚의 援助를 받았다. 卷首에는 趾齋 閔鎭厚의 序文이  있고, 卷末에는 著者의 玄孫 鍵의 跋文이 있다. 鄭崑壽의 초명은 達이고, 곤수는  宣祖가 下賜한 이름. 字는 汝仁, 호는 柏谷·慶陰·朝隱, 본관은 淸州, 大護軍  承門의  아들. 退溪 李滉의 門人이다. 1568년(宣祖 1)에 진사가 되고, 천거로 義禁府都事·經歷을  거쳐 別試文科에 壯元, 尙州牧使·公州牧使 등을 지냈다. 1583년에 江原道觀察使가  되어 1586년에 魯陵(端宗의 陵)에다 祠廟를 세우고 位版을 봉안하였다. 1587년에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대기근을 구제하고, 내직으로 돌아와 兵曹, 吏曹의 參判과 大司諫을  거쳐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右承旨에 올라 宣祖를 義州로  扈從했다.  知敦寧府事로 陳奏使가 되어 明나라에 가서 兵部尙書 石星을 움직여 구원병을 파견케 하였고  明나라 經略 宋應昌이 오자 慰迎使로 그를 영접하는 한편 평양에 있는 提督  李如松에게  서울의 수복을 재촉하였다. 禮曹判書를 거쳐 1596년 左贊成이 되고,  이듬해  領中樞府事로서 謝恩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對明外交의 第一人者였다.  1601년  李恒福과 함께 扈從의 元勳으로 錄勳되었다. 글씨를 잘 썼고, 典故에 밝았다.   {卷1}:五言絶句, 七言絶句, 七言律詩, 七言古詩, 表, 贊, 辭, 序, 記, 跋, 說, 祭文  등.  {卷2}: 疏箚, 啓, 狀啓, 呈文, 揭帖 등. {卷3}:赴京日錄, 書, 碑誌 등.  「赴京日錄」은  著者가 壬辰倭亂 때 진주사로 明나라에 가서 원병을 청하고 義州로 돌아오기까지의  사건의 전말을 적은 것이다. {卷4}:附錄으로, 策勳敎書, 賜祭文, 祭文, 輓詞, 行狀 등. 두  번이나 받은 賜祭文과 祭文 輓詞 등은 當代에 名望이 높은 月汀  尹根壽,  漢陰  李德馨, 白沙 李恒福, 月沙 李廷龜, 象村 申欽 등이 지었으며, 行狀은 그의 아우  寒岡  鄭逑가 지었다.

 

2. 정구(鄭逑) 청주(淸州)

「언양읍지」(1916. 1919)

제3절. 삼현제(三賢祭)

언양읍 대곡리 반구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 : 중순에 드는 丁日)에 포은(정몽주), 회재(이언적), 한강(정구) 선생 등 3현을 봉사(奉祀)하는 추모제가 열린다. 언양지역의 유일한 서원으로 향내 유림과 기관장 유지들이 참석하여 이들 선현의 학덕을 추모한다.

 

3. 정구(鄭逑) 문목공(文穆公) 한강(寒岡)

「언양읍지」(1916. 1919)

제5절. 재실(齋室)

삼현재(三賢齋)

언양읍 대곡리 반구대 아래 반고서원 경내에 문충공(文忠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문목공(文穆公)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3선생의 위패를 모신 재실. <반고서원> 참조.

 

4. 정구(鄭逑)

「언양읍지」(1916. 1919)

제2절. 원사(院祠)

반고서원(盤皐書院)

반고서원(盤皐書院)은 일명 반계서원(磻溪書院)으로도 표기되었는데 지금의 반구서원(盤龜書院)의 원래 이름이다.

이 서원은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반구대(盤龜臺) 아래(884-3번지)에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복원된 것인데, 원래 조선조 숙종 38년(1712 : 임진) 언양고을의 사림(士林) 이위(李위)·김영하(金英夏)·김지(金志)·정태구(鄭台耉)·정석구(鄭錫球)·박문상(朴文祥) 등이 의논하여 여말의 충신이요 학자인 문충공(文忠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 1337∼1392), 조선 초의 문신·성리학자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 1491∼1553) 및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인 문목공(文穆公) 한강(寒岡) 정구(鄭逑 : 1543∼1620) 등 3현을 모시기 위해 서원을 창건하고 이듬해 위패를 봉안하였다.

문헌(文獻)

1. 文獻公實紀(奎1714), 鄭逑(朝鮮)編.

          1冊(64張) 木板本 32.2×21.8cm.

          四周單邊 半郭:22.8×17.2cm.

          有界 9行 18字 注雙行.

          版心:上下花紋魚尾.

          跋:張顯光.

     鄭逑(1543∼1620) 가 편한 鄭汝昌(1450∼1504)의 사실 등이 실려 있는 책이다.  1635년(仁祖13)에 鄭汝昌을 奉享하는 咸陽 람溪書院에서 鄭逑(人物 등은  《寒岡先生文集》<奎1378> 해제참조, 集部 2, p.425)가 光海君年間에  編한  것에,  張顯光(1554∼1637, 인물 등은 《旅軒先生文集》<奎1257> 해제참조, 集部2, p.32)의  跋文을  붙여  간행한 本에다, 1689년(肅宗 15)에 鄭汝昌의 6世孫 世楨 등이 神道碑를  세우는  것을  계기로 그 神道碑銘 등을 부록하여 간행한 것이다. 체제는 目錄·卷上·卷下·附로 되어  있다. 卷上의 첫머리에 凡例는 대략 景賢錄을 따랐고 여러 책의 기록이 다소 다를 때는  굳이 맞추려 하지 않았다는 편집범례가 밝혀져 있다. 내용의 대강을 보면  다음과  같다. 卷上;「世系」:本貫은 河東인데 언제 咸陽으로 옮겼는지 등은 잘 알수 없다고 하고  鄭汝昌의 5世祖이하 13世의 계보를 수록했다. 「事實」:1450년(世宗 32)에  태어난  것부터 1610년(光海君 2) 文廟에 종향되기까지의 사실 수록.「行狀」:李公勣·鄭希參  등이 撰한 3편. 1450년 六乙의 아들로 태어나 1483년(成宗 14) 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유생이 되었고, 1486년 母喪을 당하였고, 1490년 經行으로 천거되어  昭格署參奉이  되었다가 그해 겨울 丙科 급제하여 藝文館檢閱, 侍講院 說書를  역임했는데,  東宮(燕山君)이 꺼리는 기색이 있자 外職을 구해 安陰縣監으로 나가 治積을 쌓았다. 1498년  甲子史禍 때 鏡城에 유배되었다가 1504년(燕山君 10)에 謫所에서 죽은 鄭汝昌의  行狀들.「遺事」:至孝·禁酒·禁肉·謫所생활·著書 등에 관한  일화.「敍述」:南孝溫의  師友名行錄·心論, 輿地勝覽, 曹植의 遊頭流山錄, 盧縝의  遊長水山錄,  任輔臣의  丙辰丁巳錄, 許符의 海東野言 등에서 鄭汝昌 관계 기록을 모은  것.「遊頭流錄話」:金馹孫撰.「名說」:1460년(世祖 10) 明 勅使 張寧이 義州府尹 鄭六乙의 아들의 영특함을  기이하게  여겨 汝昌·汝裕로 이름지어 주면서 지은 글.「薦學行疏」:1490년 7월  內贍寺正  趙孝乞이 鄭汝昌을 천거한 疏.「先生著述」:岳陽(七言詩), 辭職上疏(昭格署參奉 사직),  祭뢰溪先生文(安陰縣監으로 있을 때 죽은 陜川郡守 前好仁을 祭한글).  卷下;「史禍首末」: 甲子七禍때의 被禍전말.「褒贈祀典」:1507년(中宗 2) 贈都承旨, 1517년 贈右議政  子孫錄用, 1610년 文廟從享.「從祀頒敎文」:1610년 9월 4일에 鄭汝昌을 文廟  西무에  종사토록 하면서 그 사실을 頒布한  敎文.「祭文」:賜從祀文廟先告事由文,  람溪書院春秋祝文(盧진撰靜), 門書院春秋祝文,  廟庭五賢奉安後告文,  道南書院奉安祭文(鄭經世).「碑」:安陰縣祀堂碑(林薰,  1583년).「詩章」:簡鄭及第伯??岳陽亭(兪好仁)·題咸陽鄕校(金安國)·람溪書院.(李滉) ·和陶詩  ·花開洞憶一蠢先生因次其韻(盧진).「跋文」:1635년 張顯光이 람溪書院儒生들이 鄭逑가 成編한 文獻公實紀를 간행한다는 것을  밝힌  跋文. 附:送鄭伯??之任安陰(曹伸 등 5首) 題安陰鄕校(金安國撰), 祭文(1606년 鄭逑撰),  神道碑銘(鄭蘊<1569∼1641>撰, 李正英 書·篆), 識(1689년 6世孫 世楨과 7世孫  熙章이  附를 붙이고, 빠진 系譜를 보충한다는 뜻을 밝힌 글).鄭汝昌의 人物 등을 볼 수 있는  기본자료이다.

 

2. 心經發揮 (奎801), 鄭逑(朝鮮)撰.

          4卷 附錄 合2冊 古活字本(改鑄甲寅字) 35×22.8cm.

          四周雙邊 半郭 24.7× 17cm.

          10行 1行 17字 注雙行.

          版心:上下花紋魚尾.

     眞西山의 ≪心經≫에다가 諸家의 說을 첨가해서 眞義를 적은 책이다.  전2책으로  된 銅주자본 內閣版인데 1603년(萬曆 31)에 鄭逑가 편성한 것이다. 원래 ≪心經≫은  송대에 眞西山이 편찬한 것인데 그의 주해에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또한  부록으로서  周子의 太極圖說, 程伯子의 定性書, 程叔子의 好學論, 張子의 西銘, 朱子의 仁說, 또  程伯子의 行狀略, 朱子의 行狀略 등을 수록한 것이다. 鄭逑는 서문에서 西山의  이책은  전후경전의 교훈을 선발해서 心學의 大本을 세운 것이라 하여  한번  開卷하면  聖域으로 들어가 천지에 參贊하게 되는 所以가 정연하게 나타나서 先聖先師가  바로  이  마음을 지시하는 듯할 것이다"고 극찬하였다. 그러므로 평소 程氏의 註가 명료하지 못한  것이 많아서 程朱가 發明해서 개시하신 大訓이 편입되지 못한 것이 頗多함을 괴異히  여기던중 이책을 위해 분류하여 輯錄하고 敬의 一字에는 조금 西山의 예에 倣해서 더욱  詳細히 한 것이다. 또한 부록으로 각 책을 뽑아  心經發揮라고 제목한 것을 어찌  감히  외인에게야 보일까마는 다 이책이 반포되기 위한 것이기 보다는 자신의 餘年에  玩讀하는 자료로나 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음을 보여준다.  鄭逑(1543∼1620)의 字는 道可,  號는 寒岡이며 本은 淸州다. 되계의 제자로서 천거를 받고 말년에 大司憲이 되었다.  임해군 옥사와 癸丑獄事가 일어났을 때는 모두 寬赦하라는 상소를 하고는  은퇴하여  百梅園에서 학도를 교육하였다. 經學 算數 兵陣 醫藥 禮學 등에 모두 다 통하여 數多한  저술이 있다.

 

3. 永嘉誌

          古 915.154-G989y

          權紀著, 鄭逑 편, 1608년(선조 41) 완성. 1899년 간행.

          8권 4책. 목판본. 31.4 x 21.3 Cm.

     17세기초에 편찬된 경상도 안동부의 읍지. 영가는 안동의 옛 이름이다.  1602년(선조 35)에 柳成龍(1542∼1607)의 문인 權紀가 유성룡의 명을 받아  權行可와  함께  편찬에 착수하였으나 유성룡이 죽자 작업이 일시 중단되었다. 이후에  鄭逑(1543∼1620)가  안동부사로 부임하자 權紀·柳友潛·權克明·李義遵 등 10인을 소집하여 1608년(선조  41)에 편찬을 완성하였으나 간행을 보지 못하다가, 1899년 權相鶴·權相宅  등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권두에는 1608년에 쓴 권기의 서문이 있다. 이어  本部圖·臨河縣圖·吉安縣圖·甘泉縣圖·柰城縣圖·一直縣圖·豊山縣圖·皆丹部曲圖·春陽縣圖·小川部曲圖 · 才山縣圖 등 部內 各縣과 部曲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各縣의  지도에는  村·里·山川·寺刹·書堂·史庫 등이 표시되어 있다. 각 권의 목차를 보면 당시 안동과 인근  지역의 행정체계와 사회경제상황·문화·풍속 등에 관한 내용들을 망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권1}에  沿革·邑號·各縣沿革·疆域·鎭管·界首官所屬·官員·形勝·風俗·各里·戶口, {권2}에 山川·土品·土産, {권3}에 館宇·樓亭·城郭, {권4}에  鄕校·壇廟, {권5}에  鄕射堂·軍器·驛院·匠店·烽燧·道路·堤堰·灌漑·津渡·橋梁·池塘·林藪·場市, {권6}에 古跡·佛宇·古塔·明宦·任官, {권7}에  姓氏·人物·流寓·寓居· 善行·閨行·見行·孝子·烈婦, {권8}에 塚墓·叢談 등이 수록되었다. 이 중  [叢談]은 謄寫하지 못했음을 밝히고 있다. 주요한 내용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沿革]에는  안동이 ≪삼국사기≫에 古陀耶로 기록된 이래 여러 사건에 따라 읍호가 바뀐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邑號]에는 古陀耶·古昌·昌寧·安東·永嘉·吉州·福州 등  안동을  지칭 하던 읍호 14개가 수록되어 있다. [疆域]에는 안동 지역이 東西 150里,  남북  250里임을 기록하고 있으며, [풍속]에는 '勤儉을 숭상하고 農桑에 힘쓰며, 忠臣烈女가  南方에서 최고로 배출되는 고장'임을 자랑하였다. [戶口]에는 田結과 軍額·奴婢가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안동의 호수는 5,587戶였으며, 밭 8,906結, 논 3,496結이었다.  [場市]에는 府內場이 客舍앞에서 2일과 7일에 開市한다고 되어 있는데, 안동에서는  1970년대까지 2일과 7일에 五日場이 열려 이 전통을 계승하였다. [古跡]에는  映湖金額·恭愍王手筆敎旨와 石佛·寺刹·山城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으며, [古塔]에는 현재  국보로 지정된 法興寺 塔에 대한 설명이 주목된다. [任官]에는 역대 牧使와 判官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으며, [人物]에는 權幸에서 柳成龍까지 안동 출신  인물의  행적을  수록하고 있다. 권말에는 1899년에 찬한 金道和와 柳道獻의 발문이 있는데, 안동이 학문과  문화의 고장으로서 鄒魯之鄕으로 칭해지고 선비들은 程朱之學을 숭상한다는 자부심이  나타나 있다. <奎 15562>본은 이 책과 동일한 판본이다. 이외에  ≪永嘉誌≫는  국립중앙도서관과 국사편찬위원회 등에도 소장되어 있다. 조선중기에 편찬된 읍지 중에서  비교적 풍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사회사연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신병주)

 

4. 五服沿革圖(奎11634), 鄭逑(朝鮮)著.

          1帖(22面) 粘本 木板本 38.5×23.5cm.

          四周單邊 匡郭:31.8×41.7cm.

          無界 版心:無

     五服에 관한 여러가지 儀式을 圖表式으로 편한 책으로 寒岡 鄭逑의 著. 먼저  「臣爲郡服圖」로서 天子, 王后 諸侯, 公卿大夫, 士등에 대한 成服을 밝혔고  다음  「臣從君服圖」가 있고 「公子服之圖」에서는 郡縣吏가 守令을 위하여 服을 입는 법 등을  밝혔다. 이어서 또 爲人後者爲其本宗服圖,  本宗爲人後者服圖,  爲人後者之妻爲夫本宗服圖, 女子子適人者爲其本宗服圖, 己爲姑姉妹旅子子女孫適人者服圖, 己爲母黨服圖,  妻爲夫外黨服圖, 己爲妻黨服, 妻黨爲己服, 妾服圖, 爲妾服圖 등을 싣고 이를 해설하였다.  이밖에도 많은 圖가 있는데, 한마디로 喪禮에서 있을 수 있는 모든 경우를 해설한  것이다. 저자 鄭逑(1543∼1620)의 자는 道可, 호는 寒岡 김굉필의 외증손이다.  吳健의  제자로 후에 다시 이 황의 문하에 있으면서 經學을 연구하다가  빈逸로  천거되어  大司憲까지 지냈다. 禮學에 뛰어나 이에 관한 저술이 많고 또 문하에서 많은 제자가 나왔다.  이책은 그의 門人 李潤雨가 1629년(인조 7)에 潭陽府使로 있을  때  간행하였다.  李潤雨의 跋文에는 그 경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丁巳年(1617, 光海君  9)에  門人  李潤雨가 寒岡 鄭先生을 따라 蓬山의 溫井에 갔다. 이 때 선생은 風患으로 벌써  3년이  되었다. 선생은 틈틈이 儀禮五服圖를 참고하며 더 많이 編入하고 다시 역대 연혁의  제도를  참조하며 潤雨에게 書寫케 하였다. 이것이 ≪五服沿革圖≫이다. 일종의 筆帖같이  만들어 12目으로 나누고 35개의 表를 만들어 後生들이 참고하는데 편리케 하기 위하여  만들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0년이 되어도 국가가 다난한 중에  그대로  책상속에 있었다. 그러던 중 작년(1628년) 봄에 내가 담양부사로 내려가 각지의 有志와 같이  出刊하게 되었다. 그중에 먼저 寒岡 先生의 ≪五先生禮說≫을 出刊하고 餘財가  있으므로 다시 이 책을 출간하였다" 李潤雨(1569∼1634)의 본관은 廣州고 號는  石潭이다.  1606년(宣祖 39)에 文科에 급제한 후, 翰林學士를 거쳐 벼슬은 參議까지 지냈다.  靖社功臣으로 文學과 行義가 그 시대의 모범적이라 하였다. 이 책은  五服에  대한  禮說로서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嶺南地方에서 특히 존중되어 왔다.

 

5. 五先生禮說分類 前後集(奎1483), 鄭逑(朝鮮)編.

          20卷 7冊 木板本 34.6×23.6cm.

          四周雙邊 半郭:23:7×18.6cm.

          有界 13行 1行 22字.

           版心:上下花紋魚尾.

     北宋, 南宋 兩代의 學都인 程明道(1032∼1085, 名은 顥),  程伊川(1033∼1107,  名은 이) 司馬溫公(1019∼1086, 名은 光), 張橫渠(1020∼1077, 名은 載),  朱子(1130∼1200, 名은 熹, 號는 晦庵)등 五先生의 禮說을 모은 책이다. 편자는  ≪喪祭禮錄≫  ≪朱門問禮≫등이 朱子의 책에만 의존하여 불충분하므로 보다 廣範圍하게 五先生의 說을  文集, 語錄, 諸經傳의 注解에서 뽑아서 엮었다. 편자의 서문에는 그 경위가 다음과  같이  밝혀져 있다. "……禮는 3천3백이나 되지만 모두 一身一心에  관계되는  것이라  하였다.……變禮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 서로 시비가 眩亂해진다. ……이런 속에서  兩程子  涑水(司馬光), 橫渠, 晦庵 등이 나와, 禮經을 근본으로 하여 사실에 따라 剖析하여  아무리 큰 이론도 要略하여, 片言單辭가 天則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이로써 後學의  耳目을 열어 주었다. 五先生의 설은 문집과 語錄 및 여러 經傳의  注解에서  뽑았다.  다만 司馬溫公의 書儀와 本集은 得見치 못하였으므로 넣지 못하였다.  이것을  그대로  亂稿中에 방치해 두었더니 10년이 지난 후에 士友들이 淨寫코자 하므로 대략  본서의  본말을 적노라" 이 序文은 1611년(光海君 3)에 쓴 것이다. 이에 이어 한자 내려서  "그  후 五先生 禮說이 완성된 후 이 속에 朱子의 家禮가 없으니  어찌된  셈이냐고들  하였다. 그러나 家禮는 각 부문에 들어가 있어 따로 한 것이 없고 또 家禮는  當世에  성행하는데 중복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답하였다.  이상이 본서를 편저하게된 유래인데,  이에 우리나라의 禮學者들이 이것을 참고로 하여 宋代禮說의  대략을  짐작하게  되었다. 다시 1618년(光海 10)에 쓴 跋文을 보면 "저자가 1603년(宣祖 36)에 湖西 木州에  있을때 亡友 李福長이 諸先生의 禮論을 類輯하여 觀覽에 便케 하라 하여 근처의 士子  15명을 초청하여 助役케 하였다. 이로써 반달만에 草本이 되었다. 李福長이 출판코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얼마 후 李福長은 죽고 1611년(光海 3)에  星州의  士友들이 다시 淨寫를 청하였다. 그동안 1614년(光海 6)에 화재로 원고가 灰燼된  것을  徐思遠, 宋遠器 등이 다시 편집하는 데 힘써 주었다. 벌써 16년이 지났다"라고 하여 본서  출판의 경위를 적기하고 있다. 다시 旅軒 張顯光의 跋文을  보면  "寒岡先生은  우리나라의 禮學에 마음을 두어 여러해 두고 ≪五先生禮說≫을 만들었다. 그 후 선생의 제자  李潤雨가 潭陽府使로 내려가 각 方伯에게 편집할 뜻을 말하고 동지를 모아 이 책을  출간하였다"하여 潭陽에서 出刊한 것을 맡하고 있다. 이 때는 1623년(仁祖 1)으로서 그  동안 17년이 건린 것임을 알 수 있다. [≪五服沿革圖≫참조, 109p] 前後集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前集:卷1은 禮總論으로 天子, 諸侯의 冠禮,  昏禮,  昏變禮 등이 있고, 卷2에는 天子, 諸侯의 喪禮로서 喪祭摠論, 喪禮摠論이 있다. 이  속에는 天子, 諸侯의 疾病에서부터 居喪, 受外國吊謚法, 諱法, 宋의 복王禮論까지 있다.  이것을 복議라 한다. 宋의 仁宗이 죽은 후 아들이 없어 양자로 英宗을 세웠다. 이 때  英宗은 자기의 生父 복王을 追尊코자 하였으나 司馬光 등 元老들의 반대로  成立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追崇 문제는 禮에서 중요한 일로 여기었다. 卷3은  天子諸侯喪禮의  계속으로 山陵에서 碑까지 기록하였고 卷4는 天子諸侯의 祭禮로서 祭의 총론에서부터  天地之祭, 方明, 明堂, 社稷, 風師, 城隍, 山川, 旅祭, 祈雨, 雩, ??, 五禮,  勵儺,  神祠, 淫祠까지 망라하고 있다. 卷5는 卷4의 계속으로 聖賢과 祭器,  卷6도  계속으로  宗廟, 同堂異說, 昭穆에 관한 사항이고, 卷7도 계속으로 桃, 체, 협, 追玉,  上祀先公,  三后竝配, 祭因國之主, 先代帝王陵寢, 追廢先后, 還復廢后, 宗法 등이다.  卷8은  天子諸侯의 雜禮로서 그 내용은 天子之禮, 尊號, 聖節國忌, 天子車服, 朝廷之儀,  冊命,  巡守,  覲禮, 빈相之禮, 聘亨之禮, 民臣禮, 宗室 등이다. 後集:卷1은 冠婚摠論으로  冠禮,  昏禮, 昏變禮를 들고 있다. 이 중 昏變禮는 禮記의 曾子問篇을 인용하고 있다.  卷2∼卷6은 모두 喪禮에 관한 것으로 喪服, 治葬, 發引, 墳墓, 行狀, 誌右, 虞祭 등 葬儀에  관한 것을 논하고, 卷7∼卷9는 祭禮로서 廟制, 影堂, 主祭, 冬至祭始祖, 立春祭先祖,  彌祭, 忌祭 등 各面의 祭禮를 기록하고 있다. 卷10은 祭禮 부록으로 生日,  飮食,  姓氏,鄕飮酒, 鄕約, 鄕射 등이다. 卷11은 雜禮이고, 卷12는 編禮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宋代 禮學者 5명의 저서에서 禮에 관한 부분을 뽑아 宋代禮學者들의 禮說을 밝히고  있다. 책의 앞에는 본서에서 인용한 書目으로 ≪程氏遺書≫≪家禮≫  등  48종을  밝히고 있는데 이러한 서적은 宋代 禮論을 살피는데 빼놓을 수 없는 서적이다. 그  중에도  朱子의 저서가 가장 많아 朱子學에 의한 해석이 대부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중에  宋의 羅大經의 鶴林玉露는 詩話와 語錄이 있는 策記類인데 다방면에 걸쳐 인용하여  기록한 것을 이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板本은 조선 중기의 것으로  조잡한  곳이  있으나 대체로 좋은 편이다. 이 책은 당시 학자들에 의해 많이 引用되었으며 이로  인해  宋代禮學者들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져갔다.

문헌(文獻)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정구(鄭逑)

도동서원(道東書院)  김굉필(金宏弼) 정구(鄭逑)

# 位置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

大邱廣域市 達成郡 求智面 道洞里 35

# 文化財指定

寶物 第350號로 1962年 祠堂과 講堂인 中正堂 및 토담이 指定되었다. 토담이 國寶로 指定된 것은 全國에서 唯一하다.

# 創建經緯

寒喧堂 金宏弼先生의 學問과 德行을 追慕하기 爲하여 宣祖 1年(1569) 儒林에서 玄風縣 琵瑟山 기슭에 세우고 雙溪書院이라 했으나 壬亂때 燒失되었다. 宣祖 38年(1605) 지금의 자리에 祠宇를 세우고 當時 洞名을 따서 甫老洞書院이라 하다가 宣祖 40年(1607) 賜額과 書籍이 內賜되면서 性理學의 道가 東來하였다(道果東矣)는 義로 道東書院이라 하고 洞名을 道洞里라 改稱하였다. 肅宗 4年(1678) 寒岡 鄭逑先生을 追配하였고 高宗初에 全國書院의 大整備 毁撤때도 未毁撤된 47院祠 중 하나이다.

# 建築物

書院의 境內에는 祠堂. 中正堂. 居仁齋. 居義齋. 喚主門. 內三門. 藏板閣. 水月樓 등이 있다.

# 建築物의 用途

1. 中正堂 : 書院의 中央에 있는 講學堂의 堂號로서 東西夾室 사이를 마루로 連結한 正面 5칸 側面 2칸 半의 주심포의 맞배집이다. 中正이라 함은 宋나라 周濂溪가 지은 太極圖說에 나오는 聖人定以中正仁義. 而主靜. 主人極焉에서 取하였으며 講堂 中央에 걸린 中正堂의 扁額은 芹谷 李觀徵 筆이다.

2. 道東書院 (懸額) : 中正堂 懸額 위에 있는 道東書院이라는 懸板은 宣祖 40年 賜額된 扁額으로서 慕亭 裵大維 筆이고 中正堂 正面에 元來부터 걸려있었다는 道東書院이라는 또 다른 扁額은 退溪 李滉 筆이라 傳하나 道東書院이라  改名한 年代와 退溪先生이 돌아가신 年代로 봐서 疑問이 간다.

3. 祠堂 : 祠堂의 堂號는 없으나 文敬公 寒喧堂 金宏弼先生의 位牌를 主壁에 모시고 文穆公 寒岡 鄭逑先生을 東向으로 從享하였는데 創建當時 그린 것으로 보이는 壁畵가 東西壁에 그려져 있다. 오른쪽은 雪路長松畵이고 왼쪽은 江心月一舟畵이다.

4. 居仁齋와 居義齋 : 左右에 낮고 작은 書院의 東 西齋로 儒生들의 居處이다. 居仁과 居義는 孟子의 吾身. 不能居仁由義. 之謂自棄也.(自身이 仁에 머물러 義를 行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의 義에서 取한 齋號이다.

5. 水月樓 : 中正堂 뜰아래 前面 3칸 側面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二層 樓閣이다.

7. 中正堂 基壇 : 가파른 산비탈에 講堂을 세우기 위하여 쌓아올린 基壇으로 크기와 모양과 색깔이 各各 다른 돌을 하나하나 다듬어서 精誠껏 끼워서 쌓은 基壇이다. 크기와 모양과 색깔을 달리하는 돌들이 서로 섞여 틈 없이 잇고 짝을 지어 맞물려 一體가 되어 造化를 이루고 있다.

이 基壇에는 如意珠를 문 네 마리의 龍과 東西의 해(日)와 달(月)과 함께 오르내리는 細虎, 거북모양의 北玄武, 봉황모양의 南朱雀을 彫刻하여 深奧한 理致를 象徵하였다.

8. 토담 : 돌과 흙과 기와를 골고루 利用하여 튼튼하게 쌓아 올리고 암기와를 지붕으로 덮어 마무리 지었다. 수키와를 드문드문 엇갈리게 끼워 넣어 陰陽의 造化와 무늬 效果를 最大한 살린 國內 唯一의 國寶이다.

9. 神道碑 : 書院 水月樓 앞 廣場에 세워진 先生의 神道碑로서 旅軒 張顯光 撰이다.

10. 喚主門 : 書院의 出入門으로 지붕위에 꽃병기와는 선비의 冠을 연상케 한다. 門을 작고 낮게 지어 선비가 배움의 門을 들어설 때는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도록 선비의 마음가짐을 낮추고 謹愼케 하기 爲함이다.

# 祭享

주향 : 증우의정 문경공 한훤당 김선생

主享 : 贈右議政 文敬公 寒喧堂 金先生

종향 : 증영의정 문목공 한강 정선생

從享 : 贈領議政 文穆公 寒岡 鄭先生

# 祭禮 笏記

 齋戒 (湛然純一之謂齋 肅然警?之謂戒)

前祭三日祭員俱會散 齋二日不縱酒不茹?不如穢惡事 前祭二日沐浴更衣 致祭一日

 陳設

前一日有司掃除祠之內外 洗滌祭器 牽牲詣祠門外 祭官俱以常服 省牲詣廚視滌漑 各還齋所 習儀有司 設三獻官位於庭中北面西上 諸生次之重行 設獻官以下門外位於東門外 道南每等異位 重行北面西上 設洗於東階之東(?洗在東 爵洗在西) 疊在洗東加勺 ?在洗西實以巾爵(巾爵異?) 設香爐香盒竝燭於神位前 設祭器 左四?(栗棗在前 鹿魚次之) 右四豆(菁?在前 鹿魚次之) ??各一 在?豆間 ?在左 ?在右(?實以稻 ?實以黍) 俎一在??前(實以豕腥) ?一在俎前(實以幣) 爵三在俎(有?) 尊二(一實淸酒 一實玄酒) 皆加勺冪在堂上東南隅 設飮福位於東序西向 設祝板於神位之右(有?)

 行禮

贊者引初獻升自東階(凡行事執事官 升降皆自東階) 點視陳設 祝開? 啓會 訖降詣門外位 亞獻以下俱就門外位 立定 贊者引祝諸執事入就階間位北向西上再拜 俱詣?洗位??各就位 贊者立於其南 司尊立於尊南北向 贊者引獻官以下入就位 贊者進初獻官之左白請行事 退復位 獻官以下皆再拜

 初獻禮

贊者引初獻詣?洗位北向立?手?手 引詣文敬公神位前北向?焚香 祝以幣?授初獻 初獻執幣獻幣以幣授祝奠于紳位前 ?伏興 次詣文穆公紳位前北向?焚香 祝以幣?授初獻 初獻執幣獻幣以幣授祝奠于紳位前 ?伏興 引詣爵洗位北向立 洗爵拭爵以授贊 引詣文敬公尊所西向立 贊以爵授初獻 司尊擧冪酌酒初獻以爵授贊 引詣文敬公神位前北向? 贊者? 以爵授初獻 初獻執爵三祭酒獻爵 執事者受爵奠于神位前 初獻?伏興少退北向立 祝進詣初獻之左東向? 讀祝 訖 興復位 引詣爵洗位洗爵拭爵以授贊 引詣文穆公尊所西向立 贊以爵搜初獻 司尊擧冪酌酒 初獻以爵授贊 引詣文穆公神位前北向? 贊者? 以爵授初獻 初獻執爵三祭酒獻爵 執事者受爵奠于神位前 初獻?伏興 引降復位

 亞獻禮

贊者引亞獻詣?洗位北向立?手?手 引詣爵洗位北向立 洗爵拭爵以授贊 引詣文敬公尊所西向立 贊以爵授亞獻 司尊擧冪酌酒 亞獻以爵授贊 引詣文敬公神位前北向? 贊者? 以爵授亞獻 亞獻執爵三祭酒獻爵 執事者受爵奠于神位前 ?伏興 引詣爵洗位北向立 洗爵拭爵以授贊 引詣文穆公尊所西向立 贊以爵授亞獻 司尊擧冪酌酒 亞獻以爵授贊 引詣文穆公神位前北向? 贊者? 以爵授亞獻 亞獻執爵三祭酒獻爵 執事者受爵奠于神位前 ?伏興 引降復位

 終獻禮

贊者引終獻詣?洗位北向立?手?手 引詣爵洗位北向立 洗爵拭爵以授贊 引詣文敬公尊所西向立 贊以爵授終獻 司尊擧冪酌酒 終獻以爵授贊 引詣文敬公神位前北向? 贊者? 以爵授終獻 終獻執爵三祭酒獻爵 執事者受爵奠于神位前 ?伏興 引詣爵洗位北向立 洗爵拭爵以授贊 引詣文穆公尊所西向立 贊以爵授終獻 司尊擧冪酌酒 終獻以爵授贊 引詣文穆公神位前北向? 贊者? 以爵授終獻 終獻執爵三祭酒獻爵 執事者受爵奠于神位前 ?伏興 引降復位 獻官以下再拜

 飮福受?禮

贊者引初獻升詣飮福位西向立 執事者一人以爵終獻酒 詣初獻之左北向立 初獻? 受爵祭酒?酒 奠爵 執饌者以俎進減神位前俎肉 詣初獻之左北向以俎授初獻 初獻受俎授執饌者 初獻取爵飮卒爵 執事者受虛爵復於? 執饌者以俎降自東階出 初獻?伏興再拜 引降復位 在位者皆再拜(初獻不拜)

 撤?豆

祝升詣神位前奉?豆各一少移故處 降復位 初獻以下皆再拜 贊者引初獻詣望?位北向立 贊者詣望?西向立望? 祝以?取祝板及幣降自西階置於坎焚祝 還本位 贊者進初獻之左 白禮畢 遂引初獻以下出 贊者還入與祝及諸執事俱復階間拜位再拜出 祝闔? 掌饌者帥其屬撤饌 闔門降退

 ?禮笏

先注酒于盞 奉盞盤 置座間之上 使隸告大祝上任進盞 滿座向大祝再拜 退盞盤更注酒于盞 奉盞 先置于初獻前盤 大祝興初獻相向再拜 因退盞 流置于亞獻前盤 大祝興亞獻相向再拜 又退盞 流置于終獻前盤 大祝興終獻相向再拜 以至諸執事次次如上例(但此盞不置于大祝前盤雖大祝雙出大祝則同拜于獻官與諸執事)

又注酒于盞 奉盤 置座間之上 使隸告執禮上任進盞 滿座向執禮再拜 退盞盤 更注酒于盞 奉盞 先置于初獻盞盤 執禮與初獻相向再拜 因退盞 流置于亞獻終獻諸執事一如上例(但此盞不置于執禮前盤雖執禮雙出執禮也則同一拜于獻官及諸執事)

又注酒于盞 奉盤 置座間之上 使隸告初獻官上任進盞 滿座向初獻再拜 退盞盤 更注酒于盞 奉盞 先置于亞獻盞盤 初獻與亞獻相向再拜 因退盞 流置于終獻及諸執事一如上例畢 使隸告三盞

#  祝式

 維歲次干支月日 後學 某等敬奉 昭告于

贈右議政文敬公寒喧堂金先生惟

 公夾持敬義兩進明誠精積力久德立道成闡揚絶學百代儒宗密邇

   松楸?陪

   儀容玆値仲(春秋)陳

   薦馨香用格

   時歆

   惠祐無疆以

贈領議政文穆公寒岡鄭先生

 配  尙

#  省牲儀

壇上鋪席置牲牽牲少前日請省牲 贊者引獻官立於牲南北向 祝自西右巡牲三?進獻官之左曰充 獻官答曰? 掌牲領牲詣?所     (乙未謄川谷規)

      <資料提供 :  道東書院 管理事務所>

 

#평안도(平安道)  성천(成川)

*학령서원(鶴翎書院)

선조정미건 현종경자액(宣祖丁未建 顯宗庚子額).

제향. 정 구(호한강 대사헌 증영의정 시문목). 조호익(호지산 목사 증이판 시문간). 박대덕(호합강 동중추).

祭享. 鄭 逑(號寒岡 大司憲 贈領議政 諡文穆). 曺好翼(號芝山 牧使 贈吏判 諡文簡). 朴大德(號合江 同中樞).

 

#강원도(江原道)  통천(通川)

*경덕사우(景德祠宇)

숙종신해건(肅宗辛亥建).

제향. 정 구(호한강 대사헌 증영의정 시문목).

祭享. 鄭 逑(號寒岡 大司憲 贈領議政 諡文穆).

 

#경상도(慶尙道)  안동(安東)

*도연서원(道淵書院)

숙종계유건(肅宗癸酉建).

제향. 정 구(호한강 대사헌 증영의정 시문목).

祭享. 鄭 逑(號寒岡 大司憲 贈領議政 諡文穆).

 

#경상도(慶尙道)  성주(星州)

*천곡서원(川谷書院)

중종무자건 선조계유액 정미중액(中宗戊子建 宣祖癸酉額 丁未重額).

제향. 정숙자(호이천 시정이천백). 주 자(호회암 시문휘국공). 김굉필(호한훤당 좌랑 증우의정 시문경 문묘배향). 이언적(호회재 좌찬성 증영의정 시문원 명종묘 문묘배향). 장현광(호여헌 좌참찬 증영의정 시문강). 정 구(호한강 대사헌 증영의정 시문목).

祭享. 程叔子(號伊川 諡正伊川伯). 朱 子(號晦菴 諡文徽國公). 金宏弼(號寒暄堂 佐郞 贈右議政 諡文敬 文廟配享). 李彦迪(號晦齋 左贊成 贈領議政 諡文元 明宗廟 文廟配享). 張顯光(號旅軒 左參贊 贈領議政 諡文康). 鄭 逑(號寒岡 大司憲 贈領議政 諡文穆).

 

#경상도(慶尙道)  성주(星州)

*회연서원(檜淵書院)

인조정묘건 숙종경오액(仁祖丁卯建 肅宗庚午額).

제향. 정 구(호한강 대사헌 증영의정 시문목 본청주). 김우옹(호동강 이참 시문정 本義城). 이윤우(공의 증이참 본광주).

祭享. 鄭 逑(號寒岡 大司憲 贈領議政 諡文穆 本淸州). 金宇옹(號東岡 吏參 諡文貞 本義城). 李潤雨(工議 贈吏參 本廣州).

 

#경상도(慶尙道)  창원(昌原)

*회원서원(檜原書院).

인조갑술건(仁祖甲戌建).

제향. 정 구(호한강 대사헌 증영의정 시문목).. 허 목(호미수 일천우의정 시문정).

祭享. 鄭 逑(號寒岡 大司憲 贈領議政 諡文穆).. 許 穆(號眉수 逸薦右議政 諡文正).

 

#경상도(慶尙道)  대구(大邱)

*연경서원(硏經書院)

명종갑자건 현종경자액(明宗甲子建 顯宗庚子額).

제향. 이 황(호퇴계 좌찬성 문형 증영의정 시문순 선조묘 문묘배향). 정 구(호한강 대사헌 증영의정 시문목). 정경세(호우복 이판겸대제학 증찬성 시문장). 전경창(호계동 정언 본경산). 이숙량(호매암 사부 본영천).

祭享. 李 滉(號退溪 左贊成 文衡 贈領議政 諡文純 宣祖廟 文廟配享). 鄭 逑(號寒岡 大司憲 贈領議政 諡文穆). 鄭經世(號愚伏 吏判兼大提學 贈贊成 諡文莊). 全慶昌(號溪東 正言 本慶山). 李叔樑(號梅巖 師傅 本永川).

 

#경상도(慶尙道)  현풍(玄風)

*도동서원(道東書院)

선조을사건 정미액(宣祖乙巳建 丁未額).

제향. 김굉필(호한훤당 좌랑 증우의정 시문경 문묘배향 본서흥). 정 구(호한강 대사헌 증영의정 시문목 본청주).

祭享. 金宏弼(號寒暄堂 佐郞 贈右議政 諡文敬 文廟配享 本瑞興). 鄭 逑(號寒岡 大司憲 贈領議政 諡文穆 本淸州).

*별사(別祠)

숙종을해건(肅宗乙亥建).

제향. 곽승화(호규헌 진사 본현풍). 원 ?(참봉). 배 신(호락천 교관 본성산). 곽 율(호례곡 예빈정 창의 본현풍)

祭享. 郭承華(號揆軒 進士 本玄風). 元 ?(參奉). 裵 紳(號洛川 敎官 本星山). 郭 율(號禮谷 禮賓正 倡義 本玄風)

 

#경상도(慶尙道)  칠곡(漆谷)

*사양서원(泗陽書院)

효종신묘건(孝宗辛卯建).

제향. 정 구(호한강 증이판 시문목 본청주). 이윤우(호석담 참의 증이참 본광주).

祭享. 鄭 逑(號寒岡 贈吏判 諡文穆 本淸州). 李潤雨(號石潭 參議 贈吏參 本廣州).

 

#경상도(慶尙道)  함안(咸安)

*도림서원(道林書院)  

현종임자건(顯宗壬子建).

제향. 정 구(호한강 참판 대사헌 증이판 시문목 본청주).

祭享. 鄭 逑(號寒岡 參判 大司憲 贈吏判 諡文穆 本淸州).

 

#경상도(慶尙道)  창녕(昌寧)

*관산서원(冠山書院)

광해경신건 숙종신묘액(光海庚申建 肅宗辛卯額). 고암면(高岩面) 우천리(月未)

제향. 정 구(호한강 참판 대사헌 증이판 시문목 본청주).

祭享. 鄭 逑(號寒岡 參判 大司憲 贈吏判 諡文穆 本淸州).

*별사(別祠)

제향. 강 소(진사 본진주). 안여경(호옥천 생원 본광주).

祭享. 姜 訴(進士 本晉州). 安餘慶(號玉川 生員 本廣州).

 

#경상도(慶尙道)  언양(彦陽)

*반구서원(槃龜書院)

숙종임진건(肅宗壬辰建).

제향. 정몽주(호포은 우문관대제학 시문충 문묘배향 본영일). 이언적(호회재 좌찬성 증영의정 시문원 명종묘 문묘배향 본여강). 정 구(호한강 대사헌 증영의정 시문목 본청주).

祭享. 鄭夢周(號圃隱 右文館大提學 諡文忠 文廟配享 本迎日). 李彦迪(號晦齋 左贊成 贈領議政 諡文元 明宗廟 文廟配享 本驪江). 鄭 逑(號寒岡 大司憲 贈領議政 諡文穆 本淸州).

 

# 전라도(全羅道)  동복(同福)

*도원서원(道源書院)

현종경술건 숙종정묘액(顯宗庚戌建 肅宗丁卯額).

제향. 최산두(호신재 사인 본초계). 임억령(호석천 감사 본선산). 정 구(호한강 대사헌 증영의정 시문목 본청주). 안방준(호은봉 공의 증이참 본죽산).

祭享. 崔山斗(號新齋 舍人 本草溪). 林億齡(號石川 監司 本善山). 鄭 逑(號寒岡 大司憲 贈領議政 諡文穆 本淸州). 安邦俊(號隱峰 工議 贈吏參 本竹山).

 

# 충청도(忠淸道)  충주(忠州)

*운곡서원(雲谷書院)

현종신축건 숙종병진액(顯宗辛丑建 肅宗丙辰額).

제향. 주 자(호회암 시문휘국공 문묘배향). 정 구(호한강 증이판 시문목 본청주).

祭享. 朱 子(號晦庵 諡文徽國公 文廟配享). 鄭 逑(號寒岡 贈吏判 諡文穆 本淸州).

 

# 충청도(忠淸道)  목천(木川)

*도동서원(道東書院)

인조기축건 숙종병진액(仁祖己丑建 肅宗丙辰額).

제향. 주 자(호회암 시문휘국공 문묘배향). 정 구(호한강 대사헌 증영의정 시문목 본청주). 김일손(호탁영 증도승지 시문민 본김해). 황종해(호후천 장원별제 본회덕).

祭享. 朱 子(號晦庵 諡文徽國公 文廟配享). 鄭 逑(號寒岡 大司憲 贈領議政 諡文穆 本淸州). 金馹孫(號濯纓 贈都承旨 諡文愍 本金海). 黃宗海(號朽淺 掌苑別提 本懷德).

문헌(文獻)

1.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육(六)

누대승람(樓臺勝覽) 부(附) 제영(題詠)

성주(星州)

● 어시헌(於是軒)

청주(淸州) 정구(鄭逑) 자(字) 도가(道可) 호(號) 한강(寒岡) 소축(所築)

 

2.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육(六)

누대승람(樓臺勝覽) 부(附) 제영(題詠)

성주(星州)

● 누운암(樓雲庵) 재(在) 서(西) 80리

청주(淸州) 정구(鄭逑) 자(字) 도가(道可) 호(號) 한강(寒岡) 소축(所築)

일곡(一曲) 봉비암(鳳飛巖) 재(在) 양정(陽亭)

이곡(二曲) 한강대(寒岡臺)

삼곡(三曲) 무학대(舞鶴臺) 재(在) 서(西) 30리

사곡(四曲) 입암(立巖) 재(在) 서(西) 40리

오곡(五曲) 사인암(捨印巖) 재(在) 서(西) 50리

육곡(六曲) 옥류동(玉流洞) 재(在) 서(西) 60리   

칠곡(七曲) 만월담(滿月潭) 재(在) 서(西) 70리

팔곡(八曲) 와용암(臥龍巖) 재(在) 서(西) 80리   

구곡(九曲) 구폭(臼瀑) 재(在) 서(西) 90리   

 

3.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육(六)

누대승람(樓臺勝覽) 부(附) 제영(題詠)

성주(星州)

● 망운암(望雲庵) 재(在) 남(南)

청주(淸州) 정구(鄭逑) 자(字) 도가(道可) 호(號) 한강(寒岡) 소축(所築)

 

4.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육(六)

누대승람(樓臺勝覽) 부(附) 제영(題詠)

성주(星州)

● 백매원(百梅園) 재(在) 남(南)

청주(淸州) 정구(鄭逑) 자(字) 도가(道可) 호(號) 한강(寒岡) 유상지(遊賞地)

 

5.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육(六)

누대승람(樓臺勝覽) 부(附) 제영(題詠)

창녕(昌寧)

● 팔낙정(八樂亭) 재(在) 유어면(遊漁面) 미구리(尾九里)

1580년 창건(創建) 청주(淸州) 정구(鄭逑) 문목공(文穆公). 소축(所築)

광주(光州) 노학용(盧鶴容) 근기(謹記)

 

6.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육(六)

누대승람(樓臺勝覽) 부(附) 제영(題詠)

창녕(昌寧)

● 관산재(冠山齋) 재(在) 고암면(高岩面) 우천리(牛川里) 월미(月未)

청주(淸州) 정구(鄭逑) 문목공(文穆公). 소축(所築)하여 생질(甥姪) 노극홍(盧克弘)에 물려줌

광주(光州) 노극홍(盧克弘) 자(字) 의보(毅甫) 호(號) 옥촌(沃村)

 

7.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육(六)

누대승람(樓臺勝覽) 부(附) 제영(題詠)

창녕(昌寧)

● 부용정(芙蓉亭) 재(在) 성산면(城山面) 후천리(後川里)

청주(淸州) 정구(鄭逑) 문목공(文穆公). 소축(所築)하여 성안의(成安義)에 물려줌

창녕(昌寧) 성안의(成安義) 자(字) 정보(精甫) 호(號) 부용(芙蓉)

평강(平康) 채제공(蔡濟恭) 기병서(記幷書)

 

8.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육(六)

누대승람(樓臺勝覽) 부(附) 제영(題詠)

창녕(昌寧)

● 와용재(臥龍齋) 재(在) 지포(池浦)

청주(淸州) 정구(鄭逑) 문목공(文穆公). 시(詩)

 

9.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육(六)

누대승람(樓臺勝覽) 부(附) 제영(題詠)

창원(昌原)

● 관해정(觀海亭) 재(再) 회원(檜原)

청주(淸州) 정구(鄭逑) 자(字) 도가(道可) 호(號) 한강(寒岡) 유적지(遊蹟地)

양천(陽川) 허목(許穆) 자(字) 문보(文父) 호(號) 미수(眉수) 유적지(遊蹟地)

이첨(李詹) 시(詩), 본관 신평(新平) 자(字) 중숙(中叔) 호(號) 쌍매당(雙梅堂).

 

10.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육(六)

누대승람(樓臺勝覽) 부(附) 제영(題詠)

합천(陜川)

● 영귀정(詠歸亭)

하동(河東) 정여창(鄭汝昌) 자(字) 백욱(伯욱) 호(號) 일두(一두), 유상지(遊賞地)

청주(淸州) 정구(鄭逑) 자(字) 도가(道可) 호(號) 한강(寒岡), 유상지(遊賞地)

문헌(文獻)

1.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육(六)

누대승람(樓臺勝覽) 부(附) 제영(題詠)

함안(咸安)

● 이수정(二水亭) 재(在) 북(北)

청주(淸州) 정구(鄭逑) 자(字) 도가(道可) 호(號) 한강(寒岡) 휴식지(休息地)

 

2.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구(九)

사원일람(祠院一覽)

안동(安東)

● 도연서원(道淵書院)

 

3.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구(九)

사원일람(祠院一覽)

성주(星州)

● 천곡서원(川谷書院)

 

4.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구(九)

사원일람(祠院一覽)

성주(星州)

● 회연서원(檜淵書院)

 

5.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구(九)

사원일람(祠院一覽)

창원(昌原)

● 회원서원(檜原書院).

 

6.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구(九)

사원일람(祠院一覽)

대구(大邱)

● 연경서원(硏經書院)

 

7.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구(九)

사원일람(祠院一覽)

현풍(玄風)

● 도동서원(道東書院)

 

8.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구(九)

사원일람(祠院一覽)

칠곡(漆谷)

● 사양서원(泗陽書院)

 

9.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구(九)

사원일람(祠院一覽)

창녕(昌寧)

● 관산서원(冠山書院)

 

10.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구(九)

사원일람(祠院一覽)

언양(彦陽)

● 반구서원(槃龜書院)

문헌(文獻)

1.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이십이(二十二)

● 유현열전(儒賢列傳) 액원제현(額院諸賢)

정구(鄭逑) 청주(淸州)

 

2. 古鏡重磨方 (古明 199 이96衁) (古 199 이96衁A)

李滉 著 ; 鄭逑 編.

筆寫本. - [發行事項不明].

1冊(42張) ; 31.5x26cm.

四周單邊. 半匡 ; 21.1x16.4cm.無界.10行18字.註雙行.

卷首 ; 鄭逑.

 

3. 정구(鄭逑 청주인)

화수사(花樹史) 재령이씨(載寧李氏)

◎ 원사우<院祠宇> ◎

◎ 도림서원(道林書院)

함안(咸安) 대사리(大寺里)에 있고 한강(寒岡) 정구(鄭逑 청주인) 선생(先生)이 주벽(主壁)이고 모촌(茅邨) 이정(李瀞 재령인), 황곡(篁谷) 이칭(李칭 성산인), 황암(篁巖) 박제인(朴齊仁 경주인) 사(四)선생(先生)을 배향(配享)함.

 

4. 정구(鄭逑)

大學諺解 (古 148.1 선75鑁)

宣祖 命 編.

活字本(戊申字). - [發行事項不明].

1冊(32張) ; 33.9x21.7cm.

四周單邊. 半匡 ; 24x16.8cm.有界.10行17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의 원문에 한글로 토를 달고 언해한 책이다. 선조의 명에 따라 교정청에서 간행한 책으로 원간본은 "만력십팔연칠월일(萬曆十八年七月日)"의 내사기(內賜記)가 있어서 1590(선조 23)년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 원간본은 앞의 2장이 낙장(落張)인데 도산서원에 수장되어 있다. 원문인 한문을 앞에 싣고 이어서 언해를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원문과 언해문의 한자에는 한자음(漢字音)이 달려있는데, 이 한자음은 동국정운식(東國正韻式) 한자음에 따르지 않고 현실한자음에 따라 표기 된 것이다.

이 책은 이본(異本)이 많다. 1611(광해군 3)년, 1631(인조 9)년, 1810(순조 10)년, 1720년, 1828년, 1852(철종 13)년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고, 이들은 10행 19자본, 10행 17자본, 10행 23자본으로 대별된다. 이 책은 선조 때의 대표적 유신(儒臣)들 대부분이 참여해 만든 경서언해의 결정이다. 이에 비하여 이이(李珥)가 언해하여 1749(영조 27)년에 간행된 《대학율곡언해(大學栗谷諺解)》는 개인이 언해한 점에서 문체상의 차이를 보인다. 전자가 순수국어를 많이 쓴 데 비해 후자는 한자어를 많이 쓰고 있다. 사서(四書)가 언해된 경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건국이래 이들 경서에 대한 구결(口訣)의 문제와 언해(諺解)의 문제는 경서의 연구와 교육에서 중대한 과제였다. 세종 30년 3월 癸丑條(세종실록 卷 119)의 기록인 "時集賢殿奉敎以諺文譯四書 直提學金汶主之汶死集賢殿薦鉤" 을 통하여 사서언해(四書諺解)에 대한 사업이 세종 때 집현전(集賢殿)에서 착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종실록에 사서언해가 이루어졌다는 기사가 없는 이상 세종대에 사서가 언해되어 간행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후 구결석의(口訣釋義)가 학자에 따라 차이가 많아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체계 있는 구결 또는 언해가 요구되었다. 성종 대의 유숭조(柳崇祖)가 경서언해(經書諺解)의 시조로 일컬어 지고있으나 구결만을 상정(詳定)해 놓은 것이지 언해에까지 이르지는 못한 것 같다.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를 통하여 선조 초에 교서관에서 현토작업(懸吐作業), 즉 구결을 다는 작업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교서관의 현토작업에 참여했던 인물은 퇴계와 미암(眉巖) 외에도 강사상(姜士尙), 기대승(奇大升), 조정기(趙廷機), 김명원(金命元), 정철(鄭澈), 송응개(宋應漑) 등이다. 선조 7년 갑술년에서도 퇴계가 고증한 사서오경구결언해(四書五經口訣諺解)가 있다는 사실과 율곡(栗谷)이 이미 구결언해(口訣諺解)를 상정(詳定)한 것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즉 "副提學柳希春所啓李滉考證四書五經口訣諺釋反其校正朱子大全語類等冊 訪問其家 收取上送事" 및 "朝坡州成持平揮 專仟送李叔獻詳定吐釋大學來云云"(眉巖日記), 또한 경연일기(經筵日記)의 갑술년(甲戌年)의 기사(記事)인 "又上曰人言經書吐不可改 此言何爲 臣對曰 柳崇祖等所定吐誠善 然今講尙書 亦往往有誤處 未審當改否" 는 유숭조(柳崇祖) 등이 현토(懸吐)한 사실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으며, 그 토(吐)가 참으로 훌륭하나 잘못된 곳이 있다고 유희춘은 말하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선조 이전에 경서에 대한 언해란 구결을 다는 것에 그쳤음을 알 수 있다.

유희춘은 퇴계의 설도 정밀하나 만족할만한 것이 못된다고 하였고 율곡(栗谷)의 구결과 언해를 가져다가 참고하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국가적인 사업으로 사서나 삼경의 언해가 이루어진 것은 선조 때 이후로 조선 초에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이 이루어진 것과 대조를 보여준다. 선조는 동 18년에 교정청을 설립하고 경서의 구결과 언해를 하도록 명하고 정구(鄭逑)·최영경(崔永慶)·홍만(洪晩)·한백겸(韓百謙)·정개청(鄭介淸)을 특별히 불러 교정랑(校正郞)으로 명했다. 이때 교정청에서 간행된 언해본을 관본언해(官本諺解)라 하여 다른 언해본(諺解本)과 구별한다. 관본(官本)의 언해란 몇몇 개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대표적 유신(儒臣)들 대부분이 참여한 경서언해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1586(선조 19)년에는 소학과 사서의 언해가 끝나고 21년에는 칠서(七書), 즉 사서삼경의 언해가 모두 끝나 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도산서원에 전하는 사서의 언해본은 모두 교정청에서 간행된 것이라고 한다.

안동대학교 수장본 《대학언해》는 관본의 성격을 띠며 율곡본(栗谷本) 두드러진 용어선택의 차이를 보인다. 규장각(奎章閣)에 수장되어 있는 관본들은 가능한 한 순수국어를 사용하여 언해 한 것들로 율곡본(栗谷本)과 차이가 있다. "人:사(람), 言:말, 事:일, 國:나라, 明:(발)근, 善:어딘, 學:배호와, 敎:(가라)치다, 事:셤기다, 得:얻다"등과 같이 율곡본에서는 원문의 한자를 그대로 언해에 써서 원의(原意)를 손상시키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관본의 경우는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순수국어를 사용하였다. 관본 《대학언해(大學諺解)》들은 간행연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차이를 갖지 않고 초간본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도산서원본은 중세국어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 주는 자료로서 낙장(落張)되어 있는 1장, 2장은 방점표기를 제외하면 광해군 3연본에 의해 추정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1631(인조 9)년에 간행된 대학언해도 광해군 3년에 간행된 책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결국 대학언해 중에는 도산서원 수장본이 중세국어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며 규장각 수장본들은 중세국어에서 근대국어로 변하는 과정의 국어사 연구를 위한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5. 정구(鄭逑)

▣ 금석문(金石文) 및 현판총람(懸板總攬)

  경북(慶北) 봉화군(奉化郡) 1994년 발행

현판【懸板】봉화읍(奉化邑)

사무사재(思無邪齋)

소유자(所有者) 삼계서원(三溪書院)

위치(位置): 봉화군 봉화읍 삼계리 삼계서원

규격(規格): 가로 135cm, 세로 35cm,

*사무사(思無邪)는 마음에 조금도 나쁜 일을 생각함이 없음을 뜻한다.

봉화 삼계서원 [奉化三溪書院]

2002년 2월 14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417호로 지정되었다. 이 서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충정공 권벌의 충절과 학덕을 경모하기 위해 유림에서 1588년(선조 21)에 건립하였다. 1660년(현종 1)에 삼계서원으로 사액되었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사당과 정문, 문루 등이 훼철되었다가 1951년 무렵 다시 세워졌다.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인 정구(鄭逑)가 선조 때 삼계서원의 사당을 충정공사(忠定公祠), 당호(堂號)를 정일당(精一堂), 동재(東齋)를 사무사(思無邪), 서재(西齋)를 모불경(毋不敬), 정문을 환성문(喚惺門), 문루를 관물루(觀物樓)라고 이름지었다.

기타(其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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