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발, 조선사발, 막사발, 다완, 고려다완 ???

2016. 4. 13. 14:20도자 이야기



요즘도다녀 2010.09.24 17:05

      

   사발, 조선사발, 막사발, 다완, 고려다완... 이 낱말들의 의미는 무엇이고, 그들간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궁금해서 여러 자료를 찾다가 이해에 도움이 될만한 부분들을 발췌해 보았습니다.


아래에서 정호다완과 이도다완은 한자 표기 井戶의 한국식, 일본식 발음입니다.


* 원광 2010.06, "이달의 초대석_막사발에 바친 반세기, 도예가 최차란"에서 발췌


   사실 그는, 반세기 동안 다완을 빚으면서 한 번도 그의 작품에 만족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2008년에 펴낸 <막사발에 목숨을 쏟아 놓고>란 책을 통해서 '수천수만 개의 다완을 잉태했지만 아직도 "아, 이거다"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밝혔을 만큼 스스로에게 깐깐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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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일본에서 국보고려정호다완(조선 막사발)을 만난 게 결정적이었어요. 그 사발을 본 뒤로는 머릿속에 온통 사발 생각뿐이었어요."




* 김해분청 - 다완이야기 - "고려다완과 도자기전쟁" 중에서 발췌


   조선에서 만들어졌으며 일본의 다도(茶の湯)에서 사용되는 다완을 총칭한다. 코우라이모노(高麗物)라고도 하지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대부분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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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비차(侘茶)가 성행하였던 텐쇼우(天正 1573-92)년간이 되면서 고려다완의 사용은 급증하였고 텐쇼우 14년(1586) 이후 고려다완은 다도용 다완의 주류가 되었다. 이때부터 고려다완은 일본에서 숭배 받기 시작하며, 권력자들에 의해 수집되고 향유되기에 이른다. 또한 정치적으로 자신의 목숨이나 권력이 위태로운 영주들은 상대편에게 조선의 다완을 선물하여 위기를 모면하는 등 매우 진귀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 때부터 종류에 대한 명칭이 붙여진 고려다완은 많지 않았다. 텐쇼우 년간 말까지 다회기에 나타난 이름은 미시마(三島), 이도(井戶), 교우겐바카마(狂言袴) 등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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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많은 종류의 다완 중에서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은 이도다완이다.





* 김해분청 - 도자에세이 - "한국에서는 막사발, 일본에서는 국보", 신한균의 글 중에서 발췌


http://www.buncheong.net/community/community.jsp?folder=essay&menu=d&tail=01&tail2=02¤tPage=1&list_idx=5&search_value=&search_name=




   조선사발! 
여기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사발은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사발이야기가 아닙니다. 400-500여년전의 우리의 옛 사발 이야기입니다. 
이 조선사발들은 일본인들이 고려다완이라 부르면서 차사발로 애용하면서 지금도 숭배의 대상인 우리 조선사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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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는 옛 조선 사발들을 우리 조상의 ‘막쓰는 막사발’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한국 사람들 중에서는 옛 조선 사발을 우리 조상이 버린 ‘막사발’이고, 그 막사발을 일본인이 주워 그들의 보물이 되었으니 일본문화라고 주장하면서 연구할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한국 사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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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자기를 왜사기라고 불렀습니다. 
이 왜사기는 일제통치 36년간 위력을 발휘하여 우리백자를 완전히 쓰러뜨려 버립니다.

바로 이때, 오지에서 가마 근방에서 구하는 질(태토), 묵보래(유약) 그리고 나무로 만들어 내는 도자기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상사기라 부르고 상사기를 파는 가게를 처음에는 상사기점이라 불렀습니다.

1930년대 왜사기 사발 한 개에 14-15전일 때, 막사발은 7-8전이고, 뚝배기는 4-5전이었습니다. 
왜사기에 비해 저렴하고 투박한 조선사기의 모습에 조심성없이 막쓰게 되면서, 왜사기는 사기로 조선사기는 막사기로 불리우게 되고, 결국에는 상사기점의 이름마저도 막사기점으로 바뀌게 되고 막사기점에서 파는 사발이 막사발이라 불리게 된것입니다.




* 오마이뉴스 - 400년 만에  '이도차완'  재현한  도예가


   길씨가 먼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는 ‘흙’ 때문이다. ‘이도차완’을 굽는 데는 ‘흙’이 가장 중요한데, 사진으로만 보고 듣기만 하던 ‘태토(몸흙)’의 비파색을 하동에서 찾아낸 것이다. 하동 진교는 옛날 진주목 관아였다. 일본 ‘이도차완’은 진주목 관아에서 생산되었다는 게 정설로 알려져 있다. 길씨가 찾아낸 흙이, 400년 전 일본으로 붙잡혀 간 도공들이 쓰던 바로 그 흙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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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막사발 천년의 비밀>(한길아트)을 펴낸 작가 정동주씨는 ‘이도’의 뿌리를 추적한 끝에 이런 말을 했다. “우선 ‘관요’가 아닌 ‘민요’여야 하고, 진주 동남쪽에 위치하며, 14~16세기에 제작된 것이어야 한다”라고. 그러면서 정씨는 책에서 “‘이도’의 관건은 ‘태토’(몸흙)에 있다”고 했다. 정씨도 길씨가 쓰고 있는 흙이 400년 전 도공들이 쓰던 흙이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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