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도자기와 대정호 다완

2016. 4. 13. 16:05도자 이야기



       [스크랩] 조선의 도자기와 대정호 다완| 다구 및 자사호

물고기나라 | 조회 43 |추천 0 | 2015.12.27. 09:50


 

   정호 다완에 대해서 알아보다 보니 분청과 백자까지 살펴보게 되었다. 우리역사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부분이다보니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접근해 보았다. 정호 다완의 실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아서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역사의 틈바구니 어디쯤에서 분명히 만들어졌고 한 시대를 풀어가는 이야기는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글은 분청의 역사를 살펴보았고(역사적 사실을 자료조사를 통하여 대략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와 연관하여 풀어가는 이야기는 저의 추론이라는 것을 밝혀둔다.

 

 

 

 

   정호 다완(이도다완)에 대해서 생각이 미치다보면 뭔가 답답한 구석이 생긴다.왜 그럴까? 아마도 그 이유는 대정호 다완이 어디서 어떻게 언제 무슨 이유로 어떤 용도로 만들어졌는지 명확하게 알려진게 없고 추측과 추론의 의한 얘기들이 무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답답함을 해소해보고자 나 역시 그 추론에 동참해 보게 된다.

 

 

   우리나라의 도자기사에서 우리의 색을 찾고 우리화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의 고려청자부터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완벽하게 고려의 정신을 담은 고려화한 것이다. 이때 도자기의 전반적인 미학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미학적 안목과 기술적 진보는 그대로 조선시대로 이어지게 된다.

 

고려청자는 고려말기에 청자에 대한 선호도가 식어가면서 쇠락하였지만, 청자로 쌓아올린 안목과 가치는 그대로 전승되게 되어서 조선시대만의 특징인 분청사기와 우리의 색과 우리화한 백자의 출현이다. 고려시대부터 백자는 있었으나 조선만의 색과 정신을 담은 백자의 완성은 조선시대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한 우리것화 한 것이다. 한국의 멋을 담은 도자기는 고려청자와 조선의 분청사기, 조선의 백자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짧은 시간 불꽃처럼 타올라서 불꽃처럼 사그라져 버린 분청사기와 대정호 다완과 조선백자의 형성에 대하여 알아보려 한다. 


   분청과 백자의 각 시대적인 것과 맞물림과 흥망성쇠 과정을 살펴보려 한다. 분청 사기는 2백여년간의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백자에게 그 바톤을 넘겨주고 조선시대에서 사라져 버렸다. 분청사기 제작시기에 정호 다완도 만들어 졌다. 다완의 상징처럼 된 정호 다완에 대해서 알아보려 한 이유는 그 처음의 제작 용도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다완이었다. 막사발로 만들어져 사용된 것이 다완이 된 것이다.라는 의견들이 있고, 조선에서 점차로 말차문화가 사라지면서 다완의 용도도 쓰임이 없어졌기 때문에 현대에 와서 차문화의 연장선에서 우리의 차문화의 맥에서 도자기 - 다완의 연관성을 살펴보고자 함이고, 그 시대적 배경을 알아봄으로 인해서 그때의 상황재현을 통하여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함이다. 즉 시대를 알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현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음차풍속을 이어받아 조선의 분청사기 시대에도 말차는 음용되고 있었다.


   고려청자를 이어 받았지만 고려청자와는 또 다른 독특함을 형성하였던 분청은 전국적으로 다양하게 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왕조의 교체로 안정화된 정국을 반영하듯이 새로운 시대의 물결을 타고 분청은 자유로운 기법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세종대왕때 가장 정점에 있었고, 그런 시대정신과 맞물려 분청사기 역시 가장 한국적이고 조선적인 방식으로 제작되었고 색채를 갖게 되었다.

 

   정호 다완이 만들어진 연도는 15세기부터 16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정호 다완이 만들어진 시기는 조선시대이다. 대정호 다완이 만들어지는 시기는 정확하게 조선시대, 즉 분청의 제작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대정호 다완이 우리의 역사속에서 사라지고 일본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된 원인은 분청의 소멸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분청의 소멸은 성리학과 사림파의 등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때 조선의 일반적인 음차풍속은 거의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분청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면 대정호 다완이 왜 우리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는지 대략 추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완의 역사를 알려면 먼저 도자기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다완은 도자기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부분을 알기 위해서는 전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아울러 다완을 이해하려면 그 시대의 역사와 정치적 상황과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지배층의 선호도가 변함에 따라서 도자기의 역사는 흐름을 타고 바뀌게 된다. 이런 종합적인 이해가 다완의 역사를 잘 설명해 주게 될 것이다.

 

 

먼저 분청의 기원이 되는 고려청자에 대해서 알아보자.


   고려청자부터 백자까지의 역사적인 사실은 자료 수집을 하여 하나의 글로 재구성한 것이다.


   도자기사의 한 획을 그은 고려청자는 초기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고려만의 청자의 색을 갖게 되었다. 중국청자를 빚는데 사용하는 탁하고 불투명한 유약에서 맑고 투명한 고려의 비취색 유약으로 발전되면서 환원염 번조법에 의한 비취색청자를 빚어낼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고려청자의 가장 큰 특징이 되었다. 고려만의 색을 갖게 되어 고려청자에 문양을 넣는 묘사에 있어서도 고려의 모습을 넣음으로서  고려화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전기인 순청자시대, 후기인 상감 청자시대를 열었다.

 

상감청자는 발생순으로

 

발생기(09세기 중~10세기 후): 순청자와 흑자.백자 발생/비색으로 발전/음각 세련/철화 발생
세련기(11세기 전~11세기 중): 순청자 비색 세련/음.양각 성행/철화 성행/퇴화 상감 발생
절정기(11세기 후~12세기 중): 순청자 비색 절정/음.양각 정체/철화 쇠퇴/퇴화 상감 세련
성행기(12세기 후~13세기 중): 순청자, 음.양각 정체 및 쇠퇴/철화.퇴화 쇠퇴/상감 성행
쇠퇴기(13세기 후~15세기 중): 순청자, 음.양각 쇠퇴/상감 쇠퇴 및 다량 생산

 

   고려상감기법은 12세기에 그 정점에 도달했고, 그 정점에 도달하면서 상감기법이 성행하였으나, 13세기 중엽부터 퇴화되기 시작하고 체계적인 통제를 벗어나면서 부터 14세기에 접어들어 다량 생산되고  절제미를 벗어나 화려해지므로 인해서 그 품질이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그 이후로 그러한 현상은 가속화되어 15세기에 쇠퇴가 가속화되었다.

 

   소량이면서 고품질을 추구하던 방향에서 대량생산으로 방향이 바뀜으로 인해서 품질이 떨어지면서 유태색은 짙은 암갈색으로 변해 갔으며 문양은 간략해지거나 밀도가 낮아졌다. 세련된 귀족적 취향을 추구하던 고려청자가 점차 대중화 경향을 띄면서 그 질이 급속도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말기의 정치.사회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엄격한 양식에 의해 통제되어 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던 고려청자가 그러한 통제에서 느슨하게 되어 자유롭게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어 갔기 때문이다.

 

 

상감청자의 쇠퇴와 맞물려 새롭게 나타난 것이 분청사기이다.

   분청은 상감청자가 절정을 이루고 쇠퇴하는 시기에 맞물려서 고려말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분청은 고려청자의 태토와 유약, 장식기법 등의 제작과정이 대체로 유사하다. 그러나 형태와 문양 등은 청자와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분청의 문양은 좀 더 추상화되어 갔다. 기능적이고 실용적이며  일상적인 생활용기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인화분청, 박지,조화분청 등이 성행하였고, 15세기 초에 나타나 15세기 중후기를 지나면서 분청사기는 조질화되고 16세기 후기에 소멸되었다.

 

   분청이 나타나게 된 배경은 입체적 조형미와 장식미를 추구하던 비취청자, 상감청자시대를 거치면서 청자에 대한 이해도가 한층 심화되고 확대되어 가는 와중에 도자기의 실생활의 기능을 추구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고려시대 후기는 몽고의 침입으로 내정 간섭을 받아야 하는 시기였고, 고려의 그 어느시대보다 현실을 직시해야 시대적 상황에 노출되어 그전과는 다른 시대적 인식이 요구되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고려사회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했던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실패로 돌아갔지만, 실질적으로는 신진사대부를 양성하는 역할을 하였고, 문신과 무신의 균형을 회복하는 역할도 하였다.성리학을 받아들인 신진사대부 세력은 현실 문제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기존의 귀족세력에 대항하여 성장하였다.

 

   고려말에 그 세력이 커진 신진사대부들의 성장은 새로운  문화 배경을 낳게 한 요인이기도 하면서 결정적으로 왕조를 교체하게 되는 배경이었던 것이다. 즉 새로운 이념을 새로운 사회, 새로운 왕조 건설을 통하여 기존의 모순을 풀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문화적 격변기의 상황속에서 다량생산 체제에서 오는 도자기의 쇠락은 왕조가 교체되면서 다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14세기 말기에 질이 현저하게 떨어졌던 고려상감청자는 15세기 초 조선시대 에서는 고려방식과는 다른 재질과 조형, 장식기법으로 독특한 발전을 하는데, 바로 이것을 고려방식의 상감청자와 구분짓기 위하여  분청사기(粉靑沙器)라 불리는 도자기이다.

분청사기는  14세기 중엽에 발생하여 16세기 중엽 무렵까지 약 200여 년간 생산되었다. 우리나라 도자기사에서  가장  자연을 닮았으며 그 제작의 폭이 넓고 민예적인 성격이 강하다.

 

 

분청은 양식상으로는 12세기 중엽에 발생한 고려 상감청자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고려상감청자는 정형성을 잃었지만 고려상감청자는 분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한 상감청자를 계승한 분청사기는 초기에는 조잡하게 나타났지만 왕조의 교체로 안정된 기반위에서 그 형태와 기법에서 상감청자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조잡함을 단시간에 극복하고 빠르고 자유롭게 성장하였다. 분청사기는 15세기 후반이 되면서 상감기법의 자취를 감추고, 귀얄기법이 유행하게 된다.

 

분청사기에 있어서 중기는 그 시기적 구분을 제1기(1420~ 1450)와 제2기(1450~1480)로 나눈다.

 

   제1기는 세종대왕의 치세기간의 해당되며 이때의 조선전기는 독립성과 자주성으로 문화적 융성시기이다.  도자기사에서도 다양한 무늬와 기법이 세련되게 발전했으며, 고려의 것에서 벗어나 조선시대에 맞는 새로운 방향을 이끌어 내게 되었다.

 

   제2기는 세조와 성종의 치세기간에 해당된다. 이 시기의 분청은 모든 기법들이 완숙함을 나타내지만, 반면에 귀얄기법이 증가하였고, 해이화 되어 유태에 잡물이 섞이고 마무리가 소홀하여 질이 떨어지게 되었다.

 

   후기는 1480~ 1540년으로 대략 60여 년간이며 이 시기는 분청이 쇠퇴하는 시기이다.

그리고 1540년 이후부터는 귀얄기법이 사라지고 담금분장기법으로 빠르게 백자화되었다.

 

 

 

분청사기의 편년자료의 근거하여 정리해보면...

 

초기(발생기):약 1360년경∼약 1420년경

- 제1기- 태동기, 약 1360년∼약 1390년경. 고려 상감청자의 쇠퇴기, S자형병 출현, 암록색

- 제2기- 발생기, 약 1390년경∼약 1430년경 고려상감무늬의 퇴화무늬 여운과 그 변모, 분청인화 기법의 발생기.

중기(발전기):약 1420년경∼약 1450년경

-제1기- 발전기, 약 1420년경∼약 1450년경 기법의 다양한 발전(선상감·면상감·인화·박지·음각), 분청사기의 특질 뚜렷해짐, 태토 밝아짐, 유약 투명.

-제2기- 성숙기, 약 1450년경∼약 1480년경 인화기법의 대접 무늬 구도 완성 절정 귀얄기법.

후기(쇠퇴기):약 1480년경∼약 1540년경

상감 인화 기법 쇠퇴, 철화 기법발생 발전(지역 특색 뚜렸해짐). 귀얄 담금분장 기법 성행

말기(소멸기):약 1540년경∼약 1600년경

귀얄 담금분장 기법 서서히 백자와 백자에 흡수 소멸

 

 

분청사기는 지역토산공물의 하나로 인정되어 중앙에 상납되었다.


  이러한 공물로 상납된 분청은 왕실과 관청에서 사용하였고, 지배계층들이 주로 애용하였다.분청은 명나라의 백자를 닮으려고 하는 흔적이 없는 고유한 우리만의 방식을 갖는 도자기였다. 그래서 분청은 서민들에게도 빠르게 전파되었다. 그러한 결과로 분청은 전국에서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고려말과 조선 건국 초에는 정치의 불안정, 중앙집권의 약화, 신분층의 새로운 재구성등으로 관요의 기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도공들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통제에서 어느정도 벗어나 자유롭게 상감청자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변화는 분청사기로 이어져 그 특징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분청사기의 특징은 경쾌하고 매임없이 자유로운 멋을 풍기는 것이다. 분청사기는 구속과 예속이 약한 상태에서 나타난 도자기라고 볼 수 있다.

 


그와 더불어 세종은 분청의 발전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그 이유는 중국의 청화백자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백자는 이미 원나라때부터 아라비아, 아프리카, 유럽에 걸쳐 알려지게 되었다.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청화백자는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해 유럽에 전파되었으며 왕실과 귀족층에서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조선에는 청화백자가 출현하지 않았다.반면에 훈구파들은 청화백자를 몰래 밀수하여 사용하였다. 세종이 청화백자 수입을 금지하고, 청화백자 제작을 장려하지 않은 까닭은, 청화백자가 너무나 사치스럽고 백성들이 쓰기에는 지나치게 고급스럽고, 또한 청화백자의 안료인 '코발트'를 중국에서 전부 수입해 들어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청화백자를 개발할 어떠한 이유도 명분도 찾지 않은 것이다.

 

   세종은 코발트를 수입하기 보다는 우리나라에 맞는 흙으로 우리의 그릇을 빗는 것에 중점을 두었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은 분청이다. 그러나 조선의 상류사회는 세종의 생각과 달랐기에 중국과 무역을 하기 이전부터 벡자를 만들어 썼는데 그것이 '상감백자'이다. 상감백자는 중국풍을 모방한 것이다. 이 시대의 조선에 분청이 나타나고 번성했던 이유는 그 시대의 정책적 지원과 제작의 자유로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청은 왕과 백성의 가까움과 왕의 백성에 대한 애민의 마음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고, 분청의 민예적인 성격은 백성의 자유분방한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분청이 사라지게 된 주 요인도 제제와 통제가 강해지고, 자유로움 보다는 정형화하고 절제미를 추구하는 사회의 변화가 큰 요인이 된다고 생각하며, 또한 주 고객층들의 이탈이 분청제작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게 한 요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분청이 사라지게 된 요인은 백자를 왕실에서 사용하면서 도자기소를 관요화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고, 중앙의 통제가 전국적으로 지방에 미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청은 전국적으로 제작된 것에 비해서 백자는 나라에서 직접 관리하는 관요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분청보다는 백자가 조선 사대부들의 이상에 맞았고, 실용적이고, 합리성을 추구하는 시대부들의 이상과 잘 맞았다.

 

조선전기의 사회는 비교적 사대부가 지배하는 나라라 할지라도 유학이 아직 뿌리깊게 지배하는 사회는 아니었고 고려시대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어서 자유로운 사회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자유로움이 분청의 민예적인 것으로 나타났고, 전국적으로 자유롭게 제작하는 현상으로 흐르게 되었다. 반면에 훈구파 귀족들은 명나라의 청화백자에 목을 메는 이중적 상황이 발생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 전기 사회는 세종의 치세로 나라가 빠르게 안정화 되었고, 자주성이 드러나는 시기였기 때문에 경제와 문화의 전반적인 분야에서 창조성을 표현할 수 있었고, 어떤 틀과 형식에 비교적 덜 지배를 받는 사회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특성이 분청이 나타나는 요인이고 분청의 다양함을 살릴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러한 사회.정치적 배경이 조선에서 청화백자의 출현이 늦어진 이유이고, 이는 세종의 방침 때문(도자기 철학)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15세기 후반 이후에는 세조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관요를 설치하였다.

   사옹원의 관리가 직접 관요에 내려가 감독하며 왕실 도자기를 굽게 되었다. 그러한 가마를 사옹원의 '분원'이라 한다. 분원이 출현하면서 지방의 가마들은 점차로 문을 닫게 되었다. 조선에서 청화백자는 성종때에 출현하게 된다. 경기도 광주 일대에 백자 생산의 관요가 국가에 의해 운영됨으로써 중앙의 통제를 받는 관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사림파가 등장하면서 성리학적 이상을 담고, 조선의 선비정신을 담은 백자는 맑고 투명한 백자였다. 불투명한 분청사기가 사라진 것은 이때이다.


   이후로 분청사기는 더이상 만들어지지 않게 되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이후로 백성들 사이에서 막사발을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하지만, 막사발 역시 분청의 한 기법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보이나 현재 남아있는 다완들이 그때 백성들이 사용하던 막사발이라는 근거는 별로 없다고 보인다. 사림파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음차문화는 음주가무문화로 바뀌게 된다. 차를 마시던 민족이 술을 마시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다완이나 찻잔 대신 술잔이 만들어졌고, 숭늉을 마시게 되었으며 다양한 대용차들이 생겨났고 막걸리가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 사회가 전기에서 중기로 진입하면서 빠르게 양반사회가 되어 갔고, 나라에서 관장하는 관요에서 백자의 제작이 늘어 갔는데, 이것은 왕실에서 백자를 사용하게 되자, 양반 사회에서도 백자의 수요가 급증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분청을 선호하던 고객들이 빠르게 백자로 이탈하게 됨에 더이상 높은 질을 추구하여 분청사기를 만들 필요가 없어졌고, 분청은 현저하게 쇠퇴하게 되어 급기야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 번성하다가 갑자기 소멸해 버리게 된 것이다. 주된 수요층이 사라지자 자본이 분청제작에서 급속도로 빠져나갔다고 생각된다. 유교문화가 정착하면서 조선시대의 이념을 표현하는 것에 가장 걸맞다고 생각하는 백자로 조선의 시대적 관심이 옮겨가 버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의 중기에 일본은 서구의 탐험가들과 무역선에 의해 발견되는데 일본은 서구와 무역을 할만한 마땅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서구인들이 무역 품목중에 하나로 도자기를 찾는다는 것을 알았고,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물론 완전히 도자기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일본에서는 도자기 전쟁이라고 한다. 이 전쟁으로 일본은 자신들의 도자기사에 혁명을 일으키게 되고, 서구와 무역하여 도자기 강국이 되었다. 조선의 도공들이 끌려간 아리타 현은 세계의 도자기를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의 이러한 도자기 수출은 일본 판화를 찍어낸 종이로 도자기를 포장하였는데, 그러한 판화 그림은 서구의 인상파에 영향을 주어 인상주의를 출현시키는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직후 인조때는 철화백자가 출현하는데 이는 청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명나라가 망하자 조선은 조선중화주의에 빠졌고, 북벌론을 주장했으나 실효성을 거두지는 못했다. 철화백자의 탄생 배경은  청화백자를 만들기 위한 코발트를 수입하기도 어려웠지만, 수입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게 됨으로 인해서 철화백자는 나타났다.

 

 철화백자의 탄생은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적인 태도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 선비들의꼿꼿한 기상을 담았으나, 한편으론 양난을 거치면서 백성의 대한 수탈도 심했다. 백성의 분노와 반란을 왜군과 오랑캐군보다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사림파들은 청렴하고 결백한 것을 최고로 쳤는데, 성리학적 이상에도 맞았지만 무엇보다 그 시대의 낮은 경제력으로 사림파들이 해야할 것은 농촌사회의 재건이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기존의 훈구파와 차별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낮은 경제력의 시대, 조선시대에서 가장 가난한 시대를 사는 양반들은 생산력이 낮기 때문에 나눔, 즉 분배를 생각하였고, 이는 선비 자신들의 희생정신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성리학적 정신과도 맞지만 선비들 자신들 이상에도 맞았으며 이러한 정신은 눈처럼 하얀 백자를 갈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8세기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고 문화적인 부흥이 찾아왔는데 이때 다시 훨씬 세련되고 질이 좋은 청화백자가 다시 나타나게 된다.

 

   숙종 때부터 성장한 상인들의 자본력은 영.정조 때에 들어서 더욱더 부유한 자본가들로 성장했다. 이로 인하여 왕실의 재정이 튼튼하여졌고, 인구증가와 더불어 농촌에서 소작을 구하기 어려운 백성들이 한양으로 몰려들어 도시문화가 번성하게 되었다. 또한 도시에서 빈부의 차가 심해지는 때 이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분원리 시대'가 찾아오게 된다. 이때 조선의 청화백자가 완성된다. 그러나 정조는 사치스러운 도자기를 갖는 것을 금하기도 하였다.

 

 

정조 사후 세도가들이 권력을 잡게 되고나서 시대의 흐름과 문화의 흘러가는 방향을 방해하게 되어버렸다.



외척 세도가들은 중국 골동품을 사들였고, 중국 사치품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도자기는 점점 외면당하게 되었다.


   분원에서 일하던 도공들은 남은 시간에 도자기를 만들어 팔 수 있었는데, 도공들은 자본력이 없어서 좋은 그릇을 만들 수가 없었고, 벌이는 신통치 않았다. 그 후에 영.정조시대에 부유한 사람들이 많아지고 수요가 발생하자, 상인들이 도공들에게 돈을 대어주고 도자기를 만들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외척 세도기 때 더욱 심해졌고 ,품질이 관청이나 왕실로 가는 것보다 더욱  좋아져 버렸다. 고종은 결국 관요를 포기해 버리게 되었다.

 


분원은 이제 거의 개인 사유화되어 개인이 운영하는 공장이 되었고, 도공들은 고용인의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상인들이 돈을 대주지 않으면 도공들은 도자기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도자기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대중상품이 되었으나 그 도자기에는 도공들의 반복된 고된 노동력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조선의 정신도 가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왕실은 분원을 포기하고(이미 세도가들에 의해서 그 시대는 상.공업의 발달과 문화적 발달을 할 수 있는 시기를 놓쳐버린 상황이었다)


   중국의 도자기를 사용하였고, 왕실 행사에서도 사용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으로 도자기에서도 역시 예속되게 되었고, 이 시기에 외국의 문물이 걸러짐 없이 들어왔으며, 일본의 도자기들이 밀려 들면서 우리나라 도자기는 더이상 경쟁이 안 되었다. 이때 우리나라 도자기 산업은 거의 뿌리가 뽑혀버렸다.

 

 

조선백자의 편년의 구분은 명확하게 아직 잘 정리가 안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여기서 백자의 편년자료는 넣지 않았다.


   조선의 백자는 분청을 만드는 흙과는 원료가 다르다. 그리고 중국의 백자와도 다르다. 백자는 중국의 상감청자에 자극을 받아서 조선에서 독자적인 기술개발에 의해서 만들어진 도자기이다. 질이 높다고 할 수 없는 우리나라 흙으로 그 원료에서 불순불을 제거하여 백토를 만드는데 많은 노력과 시간을 쏟아 부어야 했다. 철분이 조금만 들어가도 금방 표시가 났기 때문이다. 질좋은 백토 만들기, 유약의 개발, 온도, 소성방법 등등 그 모든 것에서 주어진 열악한 조건을 뛰어넘는 과학적인 방법이 사용되었다. 전승해온 도자기 기술을 한층 발전시켜 얻은 결과가 백자라고 할 수 있고, 조선의 백자는 중국과 일본의 것보다 맑고 단단했다. 

 

   조선의 백자는 도자기사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순전히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개발된 기술력 때문이다. 우리의 흙이 그 자체로 백자를 만드는데 용이한 것도 아니었고, 사림파들의 취향에 맞는 흰색과 유약을 개발해 내고, 잔금이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적당한 온도를 알아내고 안료를 개발하였다. 푸른빛이 도는 백자와 우유빛이 도는 백자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의 백자를 완성할 수 있었고, 그 기술력은 당연히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분청이 사림파에 의해 사라져 버린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백자를 개발해낸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백자는 도자기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자는 현대 도자기의 모태이기도 하다.

 

   조선에서 백자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 또한 조선이 두 양난으로 피폐해졌을 때, 중국과 서구세계에서 변화가 감지되었고, 서구사회에서 도자기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중국과 일본은 개항을 하여 문화를 개방하여 서구사회에 도자기를 수출하게 될 때 그때 조선도 그에 동행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일본은 한중일 삼국에서 가장 늦게 도자기 번조기법을 완성(일본은 1616년인 17세기에 도자기의 번조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세계화에는 가장 먼저 뛰어들게 되었고, 이로서 일본의 도자기는 서구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그러한 흐름과는 무관하게 가고 있었고, 우수한 도자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조선사회는 그 시대의 세계화의 흐름에 편승하지 못하였다. 또한 전쟁으로 인하여 피해가 너무나 컸고, 후유증도 심했고 너무나 가난한 시절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자니 못내 가슴 아프다. 

 

 

이렇게 청자로부터 이어진 분청과 다시 백자로 넘어가게 되는 조선의 도자기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 시대적인 상황에서 대정호 다완은 분청이 만들어진 시기에 만들어 졌으나, 백자가 관요에서 만들어지면서부터 분청은 거의 만들어 지지 않게 되고, 그 이후로 서민들이 쓰는 막사발이 만들어졌다고는 하나, 이는 실제로 막사발이 만들어졌다 하여도 그 품질에서 혹은 그 쓰임새에서는 명확하지 않다. 또한 서민들에게는 옹기가 있기도 하였고 그 쓰임은 다양하였다고 생각된다. 대정호 다완은 처음부터 찻사발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아직은 불교문화와 음다풍속이 있었기에 충분히 가능한 추론이라고 생각된다. 이 생각이 그저 추론에 불과하다 하여도  대정호 다완이 막사발이었다라는 설명들 역시 추론에 불과하다. 분청이 만들어진 시기와 대정호 다완이 만들어진 시기는 거의 같고, 그때는 음차문화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으며, 불교에 대해서도 관대하던 시절이었다. 불교의 대한 탄압은 사림파가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즉 유교의 이념이 완전하게 정치.사회에 정착하고 나서부터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볼 때 찻사발을 찻사발 용도로 만드는 것은 당연하였다고 본다.


   더구나 조선의 맞는 그릇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이미 고려청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찻사발도 우리의 실정에 맞는 그 시대에서 원하는 찻사발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세종시대에는 우리 흙을 연구하고 다양한 흙으로 도자기를 굽는 실험을 했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로 전국적으로 분청이 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우수한 분청이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는 도중에 정호다완도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좋은 찻사발에 대한 열망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호다완은 그런 열망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정호다완은 세종의 도자기 철학과도 잘 맞는 것 같다.

 

   1592~1598년의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이미 분청은 거의 생산이 되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청을 만드는 도공들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만들지 않는 다완을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조선에서는 이미 소멸해가는 분청을 찾아 헤메다, 역으로 도공들을 끌고간 일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기가막힐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숭상해 마지 않는 분청이 조선에서는 거의 소멸해버렸다니, 그리고 그 도공들에 의하여 일본이 도자기 강국이 될 수 있었던 원인이 되었으니, 이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이지만, 가장 늦게 도자기 역사에 합류한 일본으로서는 조선을 비난하고 싶었을 것이다. 쫒아가고자 하면 다시 조선은 다른 방향으로 가버리고, 일본은 그 한계를 뛰어넘고 싶었을 것이다. 일본은 도공들을 끌고감으로 인해서 두 가지 이익을 취하였다. 하나는 자신들의 다도를 지속적으로 받쳐줄 다완을 어떤식으로던 확보하였고, 일본화하였으며, 두번째는 백자를 만들어 냄으로 인해서 세계시장에 뛰어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본의 그 시대를 전체적으로 본다면, 다완을 통한 다도로 내부 권력과 결속을 강화하고 밖으로는 백자무역을 통해서 부를 축척하게 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분청의 역사를 조선의 역사와 함께 살펴보니 그 시대들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분청은 세종의 치세기간에 안정된 정치와 자주적인 문화의식을 기반을 바탕으로 도자기 기술력과 도공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수요층의 증대로 자본이 몰리면서 전국적으로 제작하였고 유행하게 되었다. 대정호 다완은 이런 자유로운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고, 그 시대의 문화적인 특색을 잘 반영하고 있다. 분청은 그 시대에도 일본과 도자기 무역을 하였고, 주문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분청은 조선에서 급속히 쇠퇴하며 빠른 속도로 소멸되어 갔다. 그리하여 극소수의 지방을 제외하고는 분청은 더 이상 조선시대의 주류 도자기가 아니게 되었다. 이런 200여년간의 짧은 기간 속에서 가장 한국적이고 민예적인 성격을 가진 분청은 가장 단시간에  활짝 만개하였다가 소멸도 가장 단시간에 이루어졌다.

 

   대정호 다완의 기법 역시 분청과 그 운명을 같이 하였다. 또한 음다문화가 말차에서 잎차로 변모하면서 다관의 형태가 변모하게 되었다. 또한 음차문화가 음주가무문화로 바뀌면서 분청의 생명력도 다하게 되었다. 분청과 대정호 다완의 운명을 같은 연장선상에서 바라보고 있으니, 분청이란 그 시대의 가장 자유로움을 반영하는 열린체계가 아니였나 싶기도 하다. 정형성으로 통제를 받고 극도의 절제를 추구하는 것과는 달리 자유스러움 그 자체를 표현하는 또 하나의 미학.....

그런데 일본에 가서는 다도라는 형식을 완성하고 극도의 절제성과 탐미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자유의 문화에서 태어난 아이를 너무나 그동안 옥죄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상념이 스치고 지나간다.

 

   또한 고려시대의 정치 문화를 빠르게 벗어나서 조선이 유교사회로 완전하게 접어든 것에 비해서 일본은 그러하지 못했고, 막부, 즉 무사들의 의한 통치가 계속 이어졌다. 무사들은 여전히 선종의 영향아래 있었으나 선종불교 역시 무사 집단의 예속되어 있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이들은 유교적 정치 이념보다는 힘의 논리를 우선시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통제하고 제어할 수단이 필요하였고, 그 결과로 무사들의 권력체계와 차와 다기를 결합한 다도를 만들게 되었다.

다도는 무사들이 권력을 유지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다도였다고 볼 수 있다. 즉 힘의 서열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의 다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다도에서 다완을 사용하는 의미는 다도가 시작된 시기가 말차가 음용되는 시기였고, 또한 말차를 나누어 마시면서 힘의 균형을 증명했고, 복종을 의미했으며 조직의 결속을 강화하는 도구로서의 상징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막부시대의 선종불교와 다도는 철저하게 막부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다도가 문화로서 전파되고 접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 다도가 추구했던 정신이 무엇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다도의 본질은 무사들이 힘을 유지하고 지키고 통제하는 것이었다. 즉 권력으로서의 다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상기시켜 볼 때 다도라는 말 역시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중국의 교연이 맨 처음 썼던 말이고, 그것이 일본으로 들어가 일본화된 것이고, 다완 역시 조선에서 건너가서 일본화된 것이다. 선종불교 역시 건너간 것이고, 말차 역시 그렇다. 

어찌보면 일본의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단지 받아들인 문물을 한데 모아서 일본색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화를 교류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교류된 문화의 정신은 분명히 다르다. 같은 것이 건너가도 전혀 다르게 된다. 우리도 다른나라 것을 받아 들이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자기화된다. 즉 우리화 된다는 것이다. 이런점을 살펴볼 때 우리화되어서 좋았던 것, 그리고 우리화된 정신은 무엇을 만들어 내었고 어떤 정신을 반영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하고, 우리 것이 다른 곳으로 갔을 때 다른 곳에서 자기화될 때 어떤식으로 변모하고 달라지게 되는가를 살핀다면...그 변모의 차이점들과 그 정신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고 생각된다. 거기서 우리의 창의성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도자기 역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위에서 사진 차례로 -  대정호 다완(조선시대 15세기), 조선전기 분청사기, 귀얄분청 다완(15세기), 덤벙다완(15~16세기), 청화백자(조선시대15세기), 철화백자 두 점(조선시대16세기 후반), 청화백자 두 점 (왼쪽 조선시대 18세기 후반, 오른쪽 조선시대 18세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