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욱(李明郁)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
17세기 지본담채 173x94.6cm 간송미술관
2016. 4. 18. 05:50ㆍ들꽃다회
목멱 들꽃다회 - 둘
20160412 화요일 , 맑음
자물쇠 트리
팔각정 주차장에 핀 벚꽃
- 저 아래 종묘와 창경궁이 녹색의 섬 처럼 도심빌딩의 바다에 떠 있다.
올해 들어서 주변의 다른 차모임에 잘 나가질 않으나,
작년에 몇번 참석해 본 다양한 차모임들을 살펴보면
행다법 또는 향도(香道)의 표연(表演) 위주이거나 차에 대한 품평 위주로 찻자리가 이루어져
차나 찻자리의 쓰임(用)에 대한 의미를 어디에 두고 차를 대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어느 정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요지음 들어 차의 상업적 활용에 대한 풍습들이 일부 차계에까지 깊숙히 번져있고,
심지어는 평소 찻자리에서 차의 상업적 활용에 대하여 강조하는 것을
애써 외면하는 사람까지 타박하는 행태이고 보면
일부 차계에 팽배하고 있는 이러한 다풍(茶風)에 대하여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과 차(茶) 간의 주객이 전도되어 있는 이러한 찻자리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인가?
이에 더하여 차문화를 주도하고 있다고 자처하고 있는 문화계의 일부 지도자급 인사들이나
종교계의 일부 몰지각한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까지도
그들의 풍부한 시간과 경제력 등을 활용하여 이러한 풍조에 편승하고
이러한 상업주의적인 다풍 형성에 가세하여 ,
이들마저도 과거 일본에서 무사 중심의 막부에서나 볼 수 있었던
화려함의 극을 달리는 다풍의 한축을 형성하고 있음에 더욱 한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 광복 후에 차계가 정형화된 일본풍의 다도 문화의 배제에 힘써 왔었다면
근래의 중국다법의 유행은 중국의 죽의 장막 개방 이후 중국 차산업의 국내진출 확대 기도에
일부의 국내인사들이 편승하고 있는 경향이 없지 않다는 점을 간과하기 어렵다.
조선총독부 시절부터 시작된 일본의 다도 교육은 강제성을 띄고 있었다면,
중국 개방 이후부터 시작된 중국 다풍의 유행은
국내 차계 종사자들의 자발성을 띄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중국 차산업체와 그 종사자들의 차와 도자기에 관하여 역사적으로 뿌리깊은
외국과의 무역경험을 통하여 축척된 상술을 등에 업은 차와 연관산업의 수출확대라는 명목하에
중국 정치경제지도자들의 문화의 전파와 문화지배의 토양 배양과 저변확대라는
고도의 고차원적인 정치경제적인 전략이 숨어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옛부터 중국은 차마무역(茶馬貿易)이라는 경제 행위를 통하여
변방의 이민족들을 통제하여 왔고, 차의 무역을 통하여 얻은 말들이
그 말들을 공급한 이민족이나 다른 변방족들을 공격하는 군사용으로 전용되어 오던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가 한시라도 잊거나 도외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중국은 근대에 와서 차무역 확대로 인한 국가의 재정확보책의 하나로
영국이 식민지에서 확보한 막대한 은괴를 차수출 대금으로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되찾기 위하여 영국이 공격한 아편전쟁으로 여진족이 건국하였던
청나라가 멸망한 쓰라린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차무역에 대한 사고방식 자체가 우리나라 사람들 처럼 단순하지 않고
차산업 자체가 역사적으로나 정치경제적으로 영향력이 큰 산업분야에 속한다.
이러한 계제[階梯]에 이번 목멱 들꽃다회에 대한 글에서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대련 글씨와
소강절의 <어초문대>, 조선조 여러 화가들의 <어초문답도> ,
남송 시대 나대경의 산문시 <산에 사네(산거 山居)>,
이 <산거>의 싯귀절을 화제(畵題)로 삼아 그린 이인문의 <산거독서(山居讀書)>와
<산처치자山妻稚子> 등 여러 자료들을 통하여
우리 선조들의 차를 대하는 정신과 태도 등에 대하여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기회로 삼고져 한다.
靜坐處 茶半香初 - 정좌처 다반향초
妙用時 水流花開 - 묘용시 수류화개
고요히 앉은 자리, 찻잔를 반쯤 비우니 향은 처음 그대로
미묘한 움직임이여, 물 흘러 꽃이 피네
※ 추사(秋史) 고택(古宅)에 추사의 필치로 된 주련(柱聯)이 걸려 있으며,
이 글은 황산곡(黃山谷)의 시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사가 다시 고친 개작시(改作詩)이다.
팔각정 주차장과 잠두봉 순환도로를 연결하는 벛꽃의 점선
남산의 옛이름인 목멱(木覓)은 땔나무를 하는 산이라는 뜻으로
동양철학적인 사고로는 땔나무하는 초부(樵夫)를 찾는 산이라는 뜻으로 쓰이며,
어초문답도 할 줄 모르는 저와 같은 평범한 나무꾼들이 찾아 쉬기 좋은 곳이다.
이때에 찻자리에 동행하는 이로 낚시대를 가지고 있었던 고기잡이 어부가
옆에서 함께 소요해 준다면 더 바랄게 없다.
어부와 나무꾼의 대화 - <어초문답도>
이명욱(李明郁)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
17세기 지본담채 173x94.6cm 간송미술관
익지(益之) 이명욱(李明郁)
조선 중기의 화원 화가. 화원 한시각(韓時覺)의 사위. 산수, 인물을 잘 그려
이징(李澄) 이후 최고라는 찬사는 들었으나 요절했다.
유작으로 <어초문답도> 한 점만 전한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5.12.21 04:34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문학작품 속에서 어부와 함께 초부를 등장시켜
자연에서의 은일 염원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부와 초부는 물외한객으로서 세속을 멀리하고
산수자연에 유유자적하며 한거하는 은일자의 표상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宋代에 이르면 철학자와 문인들은 고상한 대화의 주체를
이전부터 隱者의 상징으로 알려진 漁夫와 樵夫라는 인물에 대입시킨다.
邵康節의 「漁樵問對」와 蘇軾의「漁樵閒話」 에서 어부와 초부는 철학적 이론을 토론하거나
세상을 다스리는 일과 같은 고담을 나누는 賢者로 등장 한다.
- 중략 -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부터 詩 속에 漁樵가 등장하는데
어부와 초부는 탈세속의 인간으로 평화를 찾아 은둔한 평범한 인간을 지칭하였다.
조선 초기에 이르러 송대 철학서 소강절의 저서가 유입되었고,
자연스럽게 그 장면을 그린 어초문답도가 조선 선비들 사이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유사한 형식의 어초문답류의 글들이 조선시대 저작되어,
어초문답 전통의 형성과 유행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조선초기에 수용된 어초문답을 繪畵化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화가들은 중국 明代 吳偉派 화가들의 어초문답도인 兩人同行式 유형을 채택하였다.
대표작으로 간송미술관소장 李明郁 〈어초문답도>, 傳 洪得龜 <어초문답도>,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작가미상의 <어초문답도>등이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논문 중에서 발췌 ......
李銀兒, <漁樵問答圖 硏究> 2003년
URL http://www.dcollection.net/handler/ewha/000000028870
서울 N타워 건물 내부
남산 팔각정
소강절 이야기(18)
어초문대
어부와 나무꾼(漁樵).
내륙은 나뭇꾼 바닷가는 어부가 가장 평범하고 보편적 직업이자 일상적 보통 사람을 지칭한다
가끔은 평범을 가장한 비범한 도인으로 때로는 풍진 세상의 험난함을 피해서
은둔자의 삶을 어부와 나무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소강절의 어부와 초부는 세상의 이치에 대한 철학적 대화를 한다
물을 좋아하는 어부가 지자,
산을 좋아하는 초부가 인자가 아닐까
(智者樂水 仁者樂山).
皇極經世書(황극경세서) 7篇
外書篇(외서편)
[漁樵問對(어초문대)]
漁者垂釣于伊水之上。樵者過之,弛擔息肩,坐于磐石之上,而問於漁者
어부가 물위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나무꾼이 그 옆을 지나가다
짊어진 짐을 벗어놓고 너럭바위 위에 앉아 쉬면서
어부에게 물어 가로되...
乃析薪烹魚而食之飫,而論《易》
땔감을 쪼개어 물고기를 구워먹으면서 易에 대해서 의논하였다.
漁者與樵者遊于伊水之上。漁者歎曰
어부와 초부는 같이 伊水가에서 노닐었는데, 어부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
漁者謂樵者曰 “子知觀天地萬物之道乎?”
樵者曰 “未也。願聞其方。”
漁者曰 “夫所以謂之觀物者...
어부가 초부에게 말하기를 너는 천지만물을 보는 道를 아느냐.
초자가 말하기를 아직 모른다하고 그 방도를 듣기 원하자
어부가 말하기를 무릇 소위 말하는 관물이라는 것은.
...
세상을 보는 이치에 대하여 대화를 나눈다
樵者曰(초자왈): 나무꾼이 말하기를
人有禱鬼神而福者
사람이 귀신에게 빌어서 복을 구할려고 하는데
福可禱而求耶
복을 기도하여 구할 수가 있습니까?
求之而可得耶
그리고 구하고 얻을 수가 있습니까 ?
敢問其所以
외람되게 그 연유를 물어 보고자 합니다.
曰 語善惡者 人也
고기잡이가 대답하기를
선과 악을 말하는 것은 사람이고
禍福者 天也
화와 복은 하늘에 달려 있습니다.
天道福善而禍淫
하늘의 도는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나쁜 사람에게는 재앙을 내리는데 ,
鬼神其能違天乎
귀신이 하늘을 거스를 수가 있겠습니까?
自作之咎固難逃已
자신이 스스로 지은 허물은 참으로 피하기 어려운 데,
天降之災 禳之奚益
하늘이 내리는 재앙을 어찌 없애달라고 빌어서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
脩德積善 君子常分安有餘事於其間哉
덕을 닦고 선을 쌓는 것은 군자가 늘 하는 직분인데
어찌 그 여가의 일과 그 사이에 별다른 일이 있겠습니까?
樵者曰
나무꾼이 말하기를
有爲善而遇禍
착한 일을 했는데 재앙을 만나고
有爲惡而獲福者 何也
나쁜 일을 했는데 복을 받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漁者曰
고기잡이가 말하기를
有幸與不幸也
여기에는 행복과 불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
幸不幸 命也
행복과 불행은 운명이고
當不當 分也
당하고 안 당하는 것은 인연이며 즉 자기가 하는 직분인 연분입니다.
一命一分 人其逃乎
운명과 연분을 사람으로서 어떻게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曰 何謂分何謂命
나무꾼이 묻기를 무엇을 연분이라 하고 무엇을 운명이라고 합니까?
曰 小人之遇福
고기잡이가 말하기를 소인이 복을 받는 것은
非分也 有命也
연분이 아니고 운명이고
當禍 分也 非命也
소인이 재앙을 당하는 것은 당연히 연분이지 운명이 아니다 .
君子之遇禍
군자가 재앙을 당하는 것은
非分也 有命也
연분이 아니며 운명이고
當福 分也 非命也
군자가 마땅히 복을 받는 것은 당연히 덕을 베푸고 적선을 한 연분이지 운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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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의 포토존
잠두봉과 한남대교, 하이야트 호텔
남산도서관 방향 순환도로 Q -Curve구간의 벚꽃 터널
아홉마리의 비둘기 - 구구(九鳩)의 비행
- 항공기를 만들 때 처럼 공기저항을 가장 적게 받는 대형으로 날고 있다.
남산봉수대 봉화의식과 전통문화공연을 기다리는 외국인 관광객들
남산봉수대
귀룽나무
- 벚나무 종류 중에서 잎이 먼저 나고 나중에 꽃이 피는 국내 유일한 낙엽교목성 식물이다,
봉수대 앞에 있는 귀룽나무에는 꽃이 반개하다.
남산 케이블 카 상부 정류장 건물
- 배경으로 인왕산, 북악산, 삼각산 보현봉.
남산 봉수대
봉수대 연기 배기용 연통 내부
[券 七]漁樵問對 [3]
■ 고기잡이가 나무꾼에게 말하였다.
漁 : 천하가 앞으로 다스려지려 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행위를 숭상하고 천하가 앞으로 어지러워지려 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말을 숭상하게 됩니다. 행위를 숭상하면 독실한 풍속이 행해지고 말을 숭상하면 괴상한 풍속이 유행하게 됩니다. 천하가 장차 다스려지려 하면 사람들은 의義를 떠받들게 되고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지려 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이利를 떠받들게 됩니다. 의義를 숭상하게 되면 겸양의 풍속이 행해지게 되고 이利를 숭상하게 되면 빼앗는 풍속이 유행하게 됩니다. 삼왕三王은 행위를 숭상하였고 오패五覇는 말을 숭상하였습니다. 행위를 숭상하는 자는 반드시 의義로 들어가고 말을 숭상하는 자는 반드시 이利로 들어갑니다. 의義와 이利가 서로 떨어진 거리가 어찌 이처럼 멉니까! 이로써 입으로 말하는 것이 몸으로 행하는 것보다 못하고 몸으로 행하는 것이 마음으로 다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입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이 얻어서 듣고 몸으로 행하는 것은 사람이 얻어서 보며 마음으로 다하는 것은 신神이 얻어서 알게 됩니다. 사람의 슬기로움을 오히려 속이지 못하는데, 하물며 귀신의 슬기로움이야! 이로써 입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은 몸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보다 못하고 몸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은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입으로 짓는 허물에 쉬움이 없다면 마음으로 짓는 허물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이미 마음속에 허물이 없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아, 마음속에 허물이 없는 사람을 만나서 함께 마음을 이야기하리오!
漁 : 당신은 천지만물을 살피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까?
樵 : 모릅니다. 바라건대 그 방법을 듣고 싶습니다.
漁 : 무릇 사물을 살핀다는 것은 눈으로 살펴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이理로 보는 것입니다. 천하의 사물에 이理가 없는 것이 없고 성性이 없는 것이 없으며 명命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이理라는 것은 깊이 파고든 뒤에야 알 수 있고 성性이라는 것은 다한 뒤에야 알 수 있으며 명命이라는 것은 이른 뒤에야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앎이 바로 천하의 참 앎입니다. 모름지기 성인만이 허물이 없으며, 허물이 있으면 성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릇 거울은 밝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만물의 형체를 숨지 못하게 합니다. 비록 거울이 만물의 형체를 숨지 못하게 한다 하더라도 물이 만물의 형체를 한결같이 비추는 것만 못합니다. 비록 물이 만물의 형체를 한결같이 비춘다 하더라도 또 성인이 만물의 마음을 하나로 볼 수 있는 것만 못합니다. 성인이 만물의 마음을 하나로 볼 수 있는 것은 성인이 반관反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관反觀이라는 것은 나로써 물체를 살피는 것이 아닙니다. 나로써 물체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물체로써 물체를 살피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물체로써 물체를 살필 수 있다면 어찌 또 내가 그 사이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로써 나 또한 남이고 남 또한 나이며 나와 남은 모두 물체임을 알수 있습니다.
천하의 눈을 자기의 눈으로 삼으니 그 눈이 보지 않는 것이 없고 천하의 귀를 자기의 귀로 삼으니 그 귀가 듣지 않는 것이 없으며, 천하의 입을 자기의 입으로 삼으니 그 입이 말하지 않는 것이 없고 천하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으니 그 마음이 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무릇 천하의 관觀이 봄에 있어서 어찌 넓지 않겠습니까. 천하의 청聽이 들음에 있어서 어찌 멀지 않겠습니까. 천하의 언言이 말함에 있어서 어찌 높지 않겠습니까. 천하의 모謀가 안락함에 있어서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무릇 보는 것이 더없이 넓고 듣는 것이 더없이 멀며 말하는 것이 더없이 높고 안락함이 더없이 큰 것은 더없이 넓고 멀며 더없이 높고 큰 일입니다. 이 가운데에서 하나라도 그러하지 않으면 어찌 지신至神 · 지성至聖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나만 말하는 지신至神 · 지성至聖이 아니고 천하가 말하는 지신至神 · 지성至聖이라야 합니다. 오로지 한 시대의 천하가 말하는 지신至神 · 지성至聖이 아니고 천만세千萬世의 천하가 말하는 지신至神 · 지성至聖이라야 합니다. 이것을 거쳐가야만 모르거나 혹 알 수 있습니다.
ㅡ 소강절邵康節의 <황극경세서 皇極經世書>
소나무, 벚나무, 귀룽나무
무스카리
가지가 쳐진 반능수성 벚나무
팔각정
튜우립
소옹[邵雍] 列傳 第186
출생 - 사망 1011 ~ 1077
송나라 범양(范陽) 사람. 나중에 하남(河南)으로 옮겼다. 자는 요부(堯夫)고, 호는 안락선생(安樂先生) 또는 이천옹(伊川翁)이며, 시호가 강절(康節)이라 소강절(邵康節)로 주로 불린다. 젊어서부터 뜻을 품어 소문산(蘇門山) 백원(百源)에서 독서했다. 북해(北海) 이지재(李之才)가 공성령(共城令)으로 있을 때 하도낙서(河圖洛書)와 천문, 역수(易數)를 배웠다. 스스로 깨우쳐 자득한 것이 많았고,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자급했다. 인종(仁宗) 가우(嘉祐)와 신종(神宗) 희녕(熙寧) 중에 장작감주부(將作監主簿) 등에 임명받았지만 사양하고, 일생을 낙양(洛陽)에 숨어살았다.
부필(富弼)과 여공저(呂公著), 사마광(司馬光) 등 구법당(舊法黨)과 사귀면서 시정의 학자로 평생을 마쳤다. 선천학(先天學)을 창시하고 만물은 모두 태극(太極)에서 말미암아 변화 생성된다고 주장했다.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62편을 지어 천지간 모든 현상의 전개를 수리로 해석하고 그 장래를 예시했으며, 또 『관물내외편(觀物內外編)』 2편에서 허심(虛心)과 내성(內省)의 도덕수양법을 설명했다. 시집으로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 20권이 있고, 『어초문답(漁樵問答)』 1권 등이 있어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밖의 저서에 『박물편(觀物篇)』과 『선천도(先天圖)』가 있다.
앵초
잠두봉의 산벚
조팝나무 꽃
- 향기가 청아하다.
남산순환도로의 벚꽃터널
두꺼운 껍질이 새순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소강절(邵康節)
우주(宇宙)에 대한 수리(數理) 철리(哲理) 강론 천지 생성 . 역사(歷史) 전개 숫자로 설명 「앎은 강절(康節)의 지식이 있다.」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 관물내외편(觀物內外篇) . 강절관매(康節觀梅)」등의 역저(力著) 남겨......
지혜와 생각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중국 송대(宋代)의 유학자이고 시인인 소강절(邵康節 1011-1077)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이름은 옹(雍), 자는 요부(堯夫), 호는 안락선생(安樂先生), 시호는 강절(康節) 이다. 관료로서 사색에 힘썼던 주렴계에 비하여 그는 시정(市井, 인가가 모인 곳, 시가, 거리)의 은둔 철학자였다. 북해의 이지재(李之才)가 공성(共城)을 다스릴 때 소강절이 학문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찾아가 『그대는 물리성명지학(物理性命之學)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라고 묻자,
강절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그는 이 선생을 모시고 하도(河圖), 낙서(洛書), 복회(伏會)의 8괘(八卦)
64괘(六十四卦) 도상(圖像)을 전수 받았다. 지재가 전하는 것은 개괄적인 것이었으나, 소옹은 핵심을 찾고 숨긴 뜻을 찾아내어,
그것의 신기하고 묘한 것을 깨달았고, 철저하고 함축성이 있으며, 광활한 것을 스스로 터득하였다.
소강절은 처음 낙양에 왔을 때, 쑥대나 싸리로 담장을 두고 몸소 나무하고 불을 때서 부모를 공양하였다. 평소에 비록 매우
가난하게 살아도 흔쾌히 즐거움으로 받아들여 그의 즐거움을 다른 사람이 따라 갈 수 없었다. 54세 때에 부친상을 당해서는
몸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여 예(禮)를 다했으므로 부필(富弼), 사마광(司馬光), 여공저(呂公著)등이 낙양에 살 때 소옹을 공경하여
항상 함께 지냈으며, 그를 위해 정원과 집을 사 주었다. 그는 해마다 농사지음에 겨우 먹고 입을 정도였다. 그 거처를 「안락와」
라고 이름하고 스스로 그의 호를 안락 선생이라고 하였다.
또 향을 피워 놓고 편안히 앉아서 오후 3∼4시 사이에 술을 서너 동이씩 마셨는데, 조금이라도 취하면 곧 그쳐서 항상 취하게
까지는 마시지 않았고, 흥이 오르면 문득 시를 짓고 스스로 노래했다. 봄.가을이 되면 성중을 유람하였는데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항상 나가지 않았고, 출타할 때면 한 사람이 말을 몰아 마음먹은 데는 어디든지 갔다고 한다.
사대부가(士大夫家)에서는 그의 마차 소리만 들리면 다투어 맞이했고, 어린 아이들이나 하인들이 모두 『우리 집 선생님이
오셨다.』고 말하여 그의 성명을 부르지 않았다. 호사가들은 따로 소옹이 거처하는 집처럼 만들어 놓고 그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그것을 「행와」라고 불렀다.
사마광이 그를 형으로 섬겼는데 두 사람의 덕성은 향리에서 더욱 흠모 받아 부자 형제들이 서로 조심하도록 하여 『나쁜 짓을
하지 마라. 사마선생이나 소선생님이 알까 무섭다.』라고 하였다. 또 소송거리가 있는 사람들은 관부로 가지 않고 꼭 소옹에게
갔다. 그의 덕과 기품이 순정하여 바라보면 그의 어질고 현명함을 알겠으나,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과 자리를 두지 않고 여럿이 있을 때도 항상 웃으며 편안하게 하여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그의
착한 점을 즐겨 말하고, 나쁜 점은 숨겼다. 학문에 대해서 묻는 사람이 있으면 답해 주고, 억지로 말한 적이 없었다. 사람이
귀하거나 천하거나 어리거나 아이들이거나 한번을 대해도 정성을 다했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들은 그 덕을 기쁘게 여기고
현명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덕화에 감복되었다. 낙양에 인재들이 특히 많았으나 충후(忠厚)한 명성이 천하에 떨쳤다.
그의 인품은 고명(高明)하고 영민 하고 비범하여 천고에 뛰어났으나, 평범하고 심후하여 모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맑으면서도
격하지 않고, 조화로우면서도 시류에 휩쓸리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오래 사귈수록 더욱 그를 존경하고 믿었다. 하남(河南)의
정호(程顥)는 처음 부친을 모시고 소옹을 찾아 종일 예의에 대해 논의하고 물러 나와 『요부(소강절)는 안으로는 성인이요
밖으로는 임금의 학문이다.(堯夫 內聖外王之學也)』라고 감탄했다.
또한 소옹은 지혜와 생각이 뛰어나 어떤 일을 만날지 미리 알았다. 정이는 『그의 마음은 허허롭고 밝아 스스로 그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학자들은 소옹의 뛰어난 앎 때문에 그의 행위를 높이기에 힘썼고 심지어는 소옹에게는 세상을
희롱하는 뜻이 있다고도 말했으며, 또 그가 앞일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소옹은 모든 사물의 소리와 기를 감촉 하여 곧 그
움직임을 보고 그 변화를 안다고도 말했다. 「전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세 기운이 밝혔으니 앎은 강절의 지식이
있고 …』 (교법 2장 42절)
소옹이 병들자 사마광, 장재, 정호, 정이 등이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물었고 그가 죽으러 하자 정원에게 그의 상사(喪事)를
함께 의논했는데, 소옹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모두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 백을 불러 『여러 사람들이 나를 성
가까이에 장사지내려 하나, 마땅히 선영에 장사하라.』고 말했다. 그의 나이 67세 때(1077년) 세상을 떠나자, 정호가 비명을
썼는데, 소옹의 도는 순일무잡(純一無雜)하고, 그 이른바는 편안한 가운데 이루었다. 그의 저서로는 「황극경세(皇極經世)」,
「관물내외편(觀物內外篇)」,「어초문대(漁樵問對)」,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 「매화역수법(梅花易數法)」 흔히
「강절관매법(康節觀梅法)」이라고 하는 등이 있다.
그는 30여 년 간 낙양에서 은둔하면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술수(術數)에서는 사마광의 잠허(潛虛)와 일맥상통하는 면도 있었고, 낙양의 여러 선비는 소강절로부터 그 자연과 인간에 대해 심오한 수리(數理)와 철리(哲理)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남송(南宋)의 주자(朱子), 주염계, 정명도(程命道), 정이천과 함께 강절을 도학(道學)의 중심인물로 간주하였으며, 또한 그는
도가 사상의 영향을 받고 유교의 역철학(易哲學)을 발전시켜 특이한 수리 철학을 만들었다.
소강절은 천지가 생성된 역사의 전개를 숫자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하여, 「일원(一元)」 이라는 역사의 생성과정을 고찰하였다.
그는 매일 원은 모두 구체적 세계의 한차례의 생멸(生滅)이고, 시간은 무한한 것이며, 따라서 일원으로 끊임없이 순환하며, 세계도 부단히 출현하고 소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순환론적 안목은 한대(漢代)의 오덕삼통설(五德三統說)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일원(一元)은 12回 360運 (12×30), 4320世 (360×12)이며 1世는 30년이므로, 일원은 129,600이 되고 역사는 129,600년을 1주기로 하여 생성, 회전한다. 이것은 실제의 년월일시(年月日時)의 확대였다. 그는 또한 천지인은 모두 물(物)이라고 말하였지만, 그러나 이는 모든 구체적인 사물을 신비적인 최고범주(도,道 혹은 태극, 太極)에 융합해 버리는 수단으로 파악하였다.
도(道) 혹은 太極의 본질은 「정(靜)」, 「무(無)」이며, 또한 신(神)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하였다. 일체의 물질적인 것은 모든
신(神)에서 나와서 또 다시 신(神)으로 돌아간다는 말 이였다. 이러한 신(神)은 상제(上帝)란 의미로서 신(神)이며, 또한 인간의 정신이란 의미로서의 신(神)이다.
예컨대 그는 「사람의 신(神)은 곧 천지의 신(神)이다. 」 「도(道)와 일(一)은 신(神)의 강명(强名)이다. 그리고 일심(一心)으로
써 만심을 본다고 하면서도 내 마음으로써 외물을 보고 물(物)로써 물(物)을 보는 것」이라 하여 무심(無心)으로 있는 그대로를 볼 것을 강조하였다. 천지의 감응에 제삼자로써 함께 참여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제거한 허명(虛明)한 경지가 필요하며 우리는 자기를 없앰으로써 천지 감응의 생명에 뚫고 들어갈 수 있음을 밝혔다. 또한 천지를 단순히 대상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일기(日氣)의 생성이나 일기생성, 천지감응의 생명은 내 마음을 버리고 물(物)로써 물(物)을 볼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는 「자여음(自餘吟) 격양집」에서 『신생천지후 심재천지전 천지자아생 자여하족신 (身生天地後 心在天地前 天地自我生
自餘何足信)』 (몸은 천지의 뒤에 생기고 마음은 천지에 앞서 있다. 천지는 나로부터 생기고 스스로 저절로 남으니 무엇을 족히
말하리요.) 라고 읊고 있다. 이 시는 인간생성과 의식에 관한 것이며 우리의 마음이 천지에 앞서 있음을 깨달을 때 천지가 나로부터 생겨난다는 시 구절이다. 천지의 조화와 음양의 소장(消長)을 보아 무심의 경지를 깨달았다는 점 즉, 주체의 자유가 존재를 매개로 하고 있다.
지난 주에 왔을 때에 반개하지도 못한 꽃봉오리였었는데
어느새 활짝 피었다.
다른 말로 하면 꽃가루받이만 끝나면 꽃잎은 재빨리 떨어진다.
그래서 옛부터 권력의 무상함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하여
권력의 남용을 경계하는 말로 삼아 왔다.
백성들이나 민초(民草)들의 기대를 과도하게 충족시키거나 혹은 기대에 못 미치면
둘다 잊혀지거나 또는 배척당하여 떨어지는 꽃잎과 같은 처지가 된다.
<어초문답도(魚樵問答圖)>은 깊은 산속 시냇가에서 어부(漁)와 나무꾼(樵)이 대화를 주고받는 그림이다. 1715년에 그려진 것으로 작자미상이다. 그러나 심장(붉은 도장)이 찍힌 것으로 봐서 임금의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열성어제>라는 조선왕실 책을 보면, 숙종 때에 <어초문답>이라는 시가 나온다. 그리고 그 당시 활동했던 관속 문인화가 이명욱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그림은 송대 소옹(邵雍, 1011~1077)의 <어초문대(魚樵問對)>과 소식(蘇軾1039~1101)의 <어초한화록(魚樵閒話錄)>에 근거한 것으로 조선시대 문인에게 인기가 높았다. 특히 15세기경에는 은일사락(隱逸四樂)이라 하여 낚시(魚), 땔나무하기(樵), 책읽기(讀), 농사짓기(耕)가 선풍적인 인기였다. 문인은 실제로 밭을 갈거나 낚시를 하지 않아도 자신을 초부(樵夫)로 자처했다. 속세에서 벗어나 은일자중 한다는 의미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림 상단의 제발에는, 장(張) 씨와 이(李) 씨가 서로 노획물인 물고기와 땔나무를 교환하자는 대화를 하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술에 취해 홍안이 된 얼굴로 서 있으나 매우 평화롭고 유유자적한 모습이다. 이들은 남인(인현왕후)과 서인(장희빈)의 대립으로 당쟁이 심했던 정치적 상황 속에 자유로운 세계로 떠나고픈 숙종의 마음을 반영한 듯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문동수 학예사의 ‘조선회화 깊이보기’
심현희 · 자유기고가 기자
순환도로 큐커브 중간 지점의 쉼터
사방을 둘러 보아도 쉼터 근처에는 철갑을 두른 듯한 남산의 소나무....
빙둘러 만들어진 도로변에는 벚나무 터널이 형성되어 있어 봄날의 명당이라 할 수 있다.
이 좋은 곳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한차례 더 찻자리를 가져보다.
어느새 김포들에 걸린 석양이 자그마한 나무표주박에 놀러와서 쉬어가다.
이러한 봄날 찻자리에서......
산책할 때에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이제와 낚시대 마저 던져버린 전직 어부와 빙그레 웃으며
찻자리를 갖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능호관 이인상 <어초문답도>
지본담채 26.5x60.5cm 국립중앙박물관
*** 어초문답도 ***
17세기 말~18세기 초에 그려진 어초문답도는 당시의 시대상과 밀접한 관련성을 띠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북송대의 성리학자 소옹(邵雍, 1011-1077)의 『어초문대(漁樵問對)』가 특히 주목된다. 이 책은 어부와 나무꾼이 강가에서 우연히 만나 우주와 세계의 질서에 대해 문답하는 형식으로 저자의 사상을 전개하고 있는데, 17세기 서울 경기지역 서인(西人)들의 사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연구되어 있다. 숙종대에는 1714년(숙종 40)에 소옹을 비롯한 비롯 송조(宋朝) 육현(六賢)을 문묘 대성전에 배향한 사실도 당시 이 책이 주목되었던 것과 유관하다고 생각된다. 이밖에도 소식의 『어초한화록(漁樵閒話錄)』이나 다른 문헌, 그리고 도가사상, 은일사상 등과도 관련성이 있음이 지적된 바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어초문답도 [漁樵問答圖]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대련글씨
‘대팽두부과갱채 고회부처아녀손’(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아래 작품(각 31.9×129.5㎝)은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며
윗쪽(각 56.5×36.5㎝)은 개인 소장품으로 8폭병풍 가운데 일부이다.
내용은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라는 뜻이다.
쉼터에서 쳐다본 서울N타워와 방송용 중계탑
이인문,<산거독서>, 종이에 연한 색, 39.2×109.9cm, 간송미술관
-남송 시대의 나대경(羅大經)의 산문시에서 인용.....
산에 사네(山居)
- 나대경(羅大經)
산은 태고처럼 고요하고 해는 소년처럼 길기도 하네(山靜似太古 日長如小年)
내 집은 깊은 산 속에 있어 매년 봄이 가고 여름이 올 때면(余家深山之中 每春夏之交)
푸른 이끼 섬돌에 차오르고 떨어진 꽃이 길바닥에 가득하네(蒼蘚盈堦 落花滿徑)
문에는 두드리는 사람 없고 솔 그림자 들쑥날쑥한데(門無剝啄 松影參差)
새 소리 위 아래로 오르내릴 제 낮잠이 막 깊이 드네(禽聲上下 午睡初足)
돌아가 산골 샘물 긷고 솔가지 주어와 쓴 차를 끓여 마시네(旋汲山泉 拾松枝 煮苦茗啜之)
마음 가는대로『주역(周易)』『국풍(國風)』『좌씨전(左氏傳)』『이소(離騷)』『사기(史記)』
그리고 도연명(陶淵明)과 두보(杜甫)의 시, 한유(韓愈)와 소동파(蘇東坡)의 문장 몇 편을 읽네
(隨意讀周易 國風 左氏傳 離騷 太史公書 及陶杜詩 韓蘇文數篇)
한가로이 산길을 거닐며 소나무 대나무를 쓰다듬고(從容步山徑 撫松竹)
새끼사슴과 송아지와 더불어 긴 숲, 우거진 풀 사이에 함께 누워 쉬기도 하고(與麛犢 共偃息於長林豊草間)
흐르는 시냇가에 앉아 찰랑이며 양치질도 하고 발도 씻네(坐弄流泉 漱齒濯足)
대나무 그늘진 창 아래로 돌아오면 촌티 나는 아내와 자식들이(旣歸竹窗下 則山妻稚子)
죽순과 고사리 반찬에 보리밥 지어내니 기쁜 마음으로 배불리 먹는다네(作筍蕨 供麥飯 欣然一飽)
- 하략 -
(왼쪽)이인문, <산처치자山妻稚子>, 모시에 연한 색, 117×44cm. 선문대박물관
(오른쪽) 이인문, <산처치자> 세부
이인문이 그린 <산처치자>는 <산거독서>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로가 긴 축화(軸畵)로 산수배경이 강조된 작품이다. 사람살이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 담긴 희노애락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지만 멀리 떨어져 관찰해보면 그저 한 그루 나무에 무수히 많이 달린 나뭇잎처럼 보일 뿐이다. 이인문의 <산처치자>는 개별적이고 소중한 선비의 삶을 읊은 나대경의 시를 형상화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무궁무진하게 펼쳐진 산수 속에 기대어 자연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그린 이인문의 대표작 <강산무진(江山無盡)>의 세부를 보는 것 같다. 그만큼 이인문의 작품에서는 산수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blog.daum.net/sixgardn/15770521 조정육의 행복한 그림.. 에서 발췌
산들바람에도 하늘하늘 꽃비가 내린다.
- 만 그루의 매화나무에서 쏟아져 내리는 향기로운 눈꽃을
‘향설해(香雪海)’ 즉, ‘향기로운 눈꽃의 바다’라 했다.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대련 " 정좌처 다반향초 묘용시 수류화개(靜坐處 茶半香初 妙用時 水流花開) : 고요히 앉은 자리, 찻잔를 반쯤 비우니 향은 처음 그대로 ... 미묘한 움직임이여, 물 흘러 꽃이 피네." 라는 차의 정신과 "대팽두부과갱채 고회부처아녀손(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 라는 선비들의 검박한 생활태도, 소강절 邵康節의 「어초문대 漁樵問對」, 조선조 화가들이 그린 여러 <어초문답도>, 남송시대의 나대경의 산문시(散文詩) <산에 사네(山居)>, 나대경의 시를 화제(畵題) 삼아 그린 이인상의 그림 <산거독서 山居讀書>와 <산처치자 山妻稚子>에서 독서하는 산가(山家) 앞뜰에서 차를 달이는 다동(茶童) 등을 통하여 우리 선조들의 차와 찻자리를 대하는 마음과 태도, 차의 용처 등 대하여 글과 그림으로 여실히 보여주고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차제에 저를 포함하여 차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겉으로만 화려한 찻자리를 추구하신 분들이 혹시라도 계신다면, 차의 정행검덕(精行儉德)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혹여 "소비가 미덕"이라는 선전과 장려구호에 탐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부터 차 한잔 마실 동안 다시 되짚어 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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