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26. 22:00ㆍ美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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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_끝에_쏟아낸_울분. -여항문인화가 조희룡의 삶과 예술- 이선옥(전남대) 한국인물연구 논문
붓 끝에 쏟아낸 울분*
-여항문인화가 조희룡의 삶과 예술-63)
이 선 옥**
Ⅰ. 머리말
Ⅱ. 조희룡의 삶
Ⅲ. 조희룡의 예술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은 매화를 잘 그려 ‘매화화가’로 유명하지만, 글씨도 잘 썼을 뿐 아니라, 방대한 저술을 남긴 문인이기도 하다. 그는 그림과 저술 등 작품을 통해 여항인으로서의 울분을 표출하였다. 시서화에 빼어난 재능을 지녔으며,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웠던 조희룡을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의 슬픔과 괴로움을 조명해 보고자 하는 것은 ‘신분’이라는 제약에 그 또한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 논문은 2008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
을 받아 연구된 것임"(NRF-2008-361-A00006)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HK교수.
대표논저 :사군자-매란국죽으로 피어난 선비의 마음, 돌베개, 2011, 감성담론의 세 층위(공저), 경인문화사, 2010, 오월미술에 표현된 이별의 슬픔 , 호남문화연구, 2012. 6, 조선시대 매화도에 표현된 미감 , 한국민족문화, 2010.7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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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룡이 살았던 19세기는 신분제가 와해되어가는 전환기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신분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유난히 19세기 여항문인들이 불편한 속내를 글과 그림으로 표출하였던 것은 그만큼 신분제가 느슨해졌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엄격한 신분제에는 언제 폭발할지 모를 피지배층의 불만이 잠재해 있었다. 그러다 17세기 초 허균(1569~1618)이 소설<홍길동전>에서 서출인 주인공 길동의 아픔을 그렸고, 한 세기가 지난 18세기 후반 박지원(1737∼1805)은 <양반전>과 <호질> 등에서 양반의 허상을 호되게 꾸짖음으로써 신분제의 문제점을 공론화시키는데 일조하였다. 이와 함께 18세기 들어 중인·여항인들의 詩社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서얼들에 대한 관직의 제한을 철폐할 것을 주장한 通淸運動이 영·정대와 순조연간에 가장 활발하게 벌어지는 등 조선 후기 이후 중서층의 사회적 문화적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어 갔다.1)
신분제하에서 여항인들은 여러 면에서 소외되었고 그럼에 따라 분노의 감정은 그들의 가슴 한 켠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인간이 분노하게 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13세기 이탈리아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원인을 ‘상대에 대한 경시’ 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약점이 있는 경우 상처를 쉽게 받아 분노를 표출하게 되는데, 약점이 있기는 하나 다른 부분에서는 우월한 경우 경시당할 이유가 없는데도 경시를 당하기 때문에 더 크게 분노하게 된다는 것이다.2)
1) 서얼통청운동의 경과 및 그 의미에 대해서는 김경숙, 2005,조선 후기 서얼문학연구, 소명, 32~42쪽 참조. 중서층은 조선시대 서얼, 역관 등 양반 이하의 정치세력 등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주로 중앙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고급기술관원을 지칭하는 ‘중인’에, 조선 후기에는 2품 이상의 고급관원의 서얼은 기술관청에 벼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면서 중인과 서얼이 같은 관청에서 근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중·서’라고 병칭하는 관례가 생겼다. 이 글에서는 사대부 집안의 서출, 직업화가, 여항화가들까지를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하겠다. 조선후기 중서층에 대해서는 정진영, 2003, 향촌사회에서 본 조선후기 신분과 신분변화 , 역사와 현실48, 한국역사연구회, 53~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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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견해는 시공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조희룡을 비롯한 조선시대 여항문인화가들의 울분의 원인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신분이라는 약점과 시서화에 능한 문인으로서의 우월감을 가진 여항인들은 신분 때문에 받은 경시와 그에 따른 분노를 여러 형태로 표출하였다.
여항시인들의 행적을 적은 張之琬(1806~1853)은 그들 소외된 여항인들의 삶을 “玄錡와 鄭壽銅(정지윤)은 미친 듯이 노래하며 날마다 저자거리에서 술 마시고, 李夢觀, 柳山樵(유최진)는 병이 낫다 사양하며 문을 닫아걸고는 머리에 망건을 쓰지 않은 지 벌써 10여년이다. 이들은 혹 비분강개하여 불평을 토로하거나 혹은 세속을 따라 침잠하여 성명을 드러내지 않으니 역시 어찌 그것이 진실이겠는가? 얻지 못함을 많이 보아서 그렇게 행할 뿐이다.”고 적고 있다.3)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에 여항문인들은 세상과 담을 쌓고 살거나 비분강개한 시로써 울분을 토로하였다.
그러한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으로서 조희룡은 자신이 겪고 본 같은 처지에 있는 중인들의 슬픔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문집을 통해남긴 그림과 인물들에 관한 글은 당시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4) 조희룡의 문학과 예술에 대해서는 분야별로 상당한 연구가 이루어져 있다. 연구자에 따라 약간의 편차는 있으나 새로운 미의식으로 19세기 화단을 이끌었던 선구적인 화가이자 중인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으로서 자리매김 되고 있다.5)
2) 서병창, 2010, 토마스 아퀴나스의 분노 개념 , 인간연구 제19호, 카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 58~60쪽.
3) 장지완, 送安上舍序, 裵然箱抄제1책, 권 1, 정옥자, 1990, 조선후기문화운동사, 213쪽. 성혜영, 2000, 19세기의 중인문화와 고람 전기(1825~1854)의 작품세계 , 미술사연구 vol. 14, 미술사연구회, 137~174쪽.
4) 조희룡의 저술 석우망년록, 화구암란묵, 한와헌제화잡존, 우해악암고, 수경재해외적독, 호산외기 등은 각각 1998년 조희룡전집1~
6 으로 한길아트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5) 평전 형식의 저술로는 이성혜, 2005, 조선의 화가 조희룡, 한길아트; 김영회, 2003, 조희룡 평전,동문선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이수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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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19세기라는 근대기로 전화되어 가는 변혁의 시기에 그림과 글로써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 갔던 조희룡의 여항인으로서의 울분이 그의 예술과 삶에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지, 또 그의 예술은 당대문화를 해석하는데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이로써 동시대를 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여항인들의 슬픔과 분노를 드러내 보려고 한다.
Ⅱ. 조희룡의 삶
1. 여항인의 설움
조희룡은 ‘절충장군행룡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이라는 무관벼슬을 지냈으며, 평양 조씨 개국공신 趙浚의 15세손으로, 고조부 謹恒까지는 정3품 僉樞를 지내는 등 관계에 진출한 무반 가문이었다. 그러다 증조부 泰運대 부터는 낮은 벼슬에 머문다. 관품이 낮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양반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신분문제에서 주의해야 할 부분이 숫자상의 양반과 실질적인 지배세력의 문제이다.
17세기 후반 무렵 전체 인구의 4∼5% 정도였던 호적상의 양반은 19세기 후반에는 60~70%에 이르렀다.6)
<< 조희룡 회화의 연구 , 서울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한영규, 2000, 조희룡의 예술정신과 문예성향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동저, 2012, 조희룡과 추사파 중인의 시대, 학자원; 홍성윤, 2003, 조희룡의 회화관과 중국문예에 대한 인식 ,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손명희, 2004, 우봉 조희룡의 회화관 ,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김지선, 2004, 우봉 조희룡의 매화도 연구 ,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이선옥, 2009.9, 조희룡의 감성과 작품에 표현된 미감 , 호남문화연구제45집, 호남학연구원, 205~241쪽; 동저, 2005, 19세기 여항화가들의 매화도 , 전남사학 제25집, 전남사학회, 145~185쪽 외 다수의 논저가 있어 이를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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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변화에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경제적 부를 축적한 상민들이 있었고, 이들은 양반신분을 매입하여 양반이 되기도 하여 명목상 양반의 숫자는 많아졌지만 실제는 극소수의 ‘지배양반’들이 사회 정점에 서서 절대 다수의 상민층을 지배하는 사회였다.7)
신분변동도 극심해서 양반도 득세하지 못하면 몰락하거나 경아전 의관이나 역관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고, 막대한 부를 축적
한 세습중인가문도 출현하였다.조희룡 또한 평양 조씨 명문가의 후손이었고, 경제적으로는 풍족하였으면서도 ‘지배양반’들로부터는 하대를 받는 당시의 전형적인 중서층 문인의 위치에 있었다. 그의 부친 상연은 관직이 없었고, 그의 詩가 여항인들의 시문집인 풍요삼선에 실려 있어 명백한 여항인이었으며, 조희룡 자신 뿐 아니라 아들들도 여항인들이 주로 맡았던 내수사 서리직을 지냈다.
조희룡의 증조부 대부터 낮은 관품에 머문 이유가 분명치는 않다.
증조부 태운의 개인적인 역량의 문제로 볼 수도 있으나 후손들이 시서화에 뛰어난 것을 보면 역량의 문제이기 보다는 증조부대에 신분이 변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조희룡이 젊은 시절 어울린 친구들 대부분이 중인인 화원이거나 양반의 서출이라는 점이다. 유배중에 편지를 주고받으며 어려움을 호소하곤 하였던 규장각 검서관을지낸 姜溍(1807~1858)은 표암 강세황의 서증손이며.8) 조희룡이 스무살 무렵 어울렸던 기록이 있는 李在寬(1783~1837)은 화원화가이며, 金禮願은 여항시인으로 규장각 서리를 지낸 인물이다. 20대 청년시절부터 그의 교유가 주로 여항인들과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의 신분 또한 그들과 같았음을 말해준다.
더구나 김정희의 제자로 알려질 만큼 친분이 있었음에도 김정희는 그를 지칭하여 “趙熙龍輩”라고 했던 것도 신분상의 차이가 아니라면 해석하기 어렵다.
6) 김성우, 2005, 18∼19세기 ‘지배양반’되기의 다양한 조건들 , 대동문화
연구 49, 대동문화연구소, 173∼174쪽.
7) 김성우, 위 논문, 170쪽.
8) 강진에게 쓴 편지는 조희룡, 수경재해외적독, 조희룡전집 5,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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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20대 중반의 젊은 청년이었던 南秉哲(1817~1863)이 “얼마 전 그대의 난 그림 몇 폭을 얻어(近日得君數紙蘭)”라 하
여 50대 서화가를 ‘君’으로 지칭하는 것도 남병철과 조희룡의 신분에 넘지 못할 격차가 있음을 보여준다.9)
조희룡의 자는 而見, 致雲, 雲卿 등이며, 호는 壺山, 又峯, 凡夫, 鐵篴道人, 丹老, 梅叟, 梅花頭陀, 石憨, 滄州 등 여러 가지를 썼다. 조희룡의 자호나 인장에 쓰인 글귀는 그의 유·불·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사상을 반영하듯 다양한 경지를 보인다. 이는 그의 회화세계와도 연결되면서 그의 넓은 사상의 폭을 보여준다.
조희룡의 청·장년시절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스무 살 때 이재관, 이학전 등과 어울려 도봉산 천축사에서 놀며 이재관의 <秋山尋詩圖>에 화제를 쓴 기록으로 보아 일찍이 신진 젊은이들과 교유하며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지으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10) 서른 살 때에는 수여당 장욱의 모임에 서문을 남기고 있어 이미 문장으로도 이름을 얻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11) 이러한 몇몇 기록 외에 30·40대 그의 활동을 전하는 기록은 거의 없다.
중년 이후 조희룡의 삶은 현전하는 그의 저술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50대에는 여항문인들 뿐 아니라 김정희, 권돈인, 신위 등 당대의 유명한 문인들과도 두루 교류하였으며, 궁중을 출입하며 서책을 다루는 일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846년(헌종 12) 58세 때 헌종의 명을 받아 금강산 시를 지어 올렸고, 궁중 聞香室의 편액을 썼으며, 매화시를 지어 올리는 등 시서화에서 두루 인정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회갑 때에는 헌종으로부터 벼루와 책을 하사받기도 하였을 만큼 헌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조희룡 또한 헌종으로부터 아낌을 받았던 기억을 곳곳에 남기고 있다.12)
9) 趙凡夫熙龍贈墨蘭答以長句, 규재유고 권1, 522쪽.
10) 조희룡, 석우망년록, 조희룡전집 1, 111~113쪽.
11) <睡餘堂小集序>, 조희룡, 수경재해외적독 조희룡전집, 5, 160~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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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권이 바뀐 철종 2년 조희룡은 김정희의 심복으로 지목되어 유배에 처해졌고, 이때 양사 사대부들의 상소 중에 조희룡을 “掖屬으로서 김정희의 腹心이 되어 深嚴한 곳을 출입하면서 伺察”하였다고 하였다. ‘액속’은 궁중의 궂은일을 맡아 하던 낮은 벼슬을 일컫는 말이며, 심엄한 곳 또한 궁중을 뜻한다. 조희룡이 임자도에 유배되기 전까지 높은 자리는 아니었지만 궁중에 속해 있었음을 이 기록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13)
그는 골동품에 취미가 있어 “평시에도 늘 고서화와 골동품을 좌우에 벌여놓고 잠시도 떨어져 있질 않았다.”고 했을 정도로 상당량을 소유하고 있었다.14) ‘漢瓦軒’이라는 당호도 자신이 애용하던 골동 벼루의 명칭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는 전 생애를 시서화로 일관하였으며, 골동품을 좋아하였고, 유람과 풍류를 즐기는 삶을 영위하였다.
12) 조희룡이 궁중에서 임금님을 모시며 은혜를 입었던 일은 그가 쓴 시를 통해서 확인된다. “책 벼루를 내려주어 생일에 이바지하니, 동벽의 남은 빛 소신에게 미쳤구나. 성군의 지우 입어 천만년에 빛이 나니, 스스로 봉황지의 사람임을 칭하노라(賜書賜硏供孤辰, 東壁餘光及小臣. 盛際遭逢足天古, 自稱染翰鳳池人.”, 조희룡, 일석산방소고, 조희룡전집, 4, 180쪽; 조희룡, 석우망년록, 조희룡전집 1, 117~118쪽.
13) 그는 헌종 말년부터 철종 2년까지 홍문관 또는 규장각에 소속된 서리로서 임금주변에서 문한의 일을 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정식 서리였던 유재건(劉在建)이 고금영물근체시에 조희룡의 시를 실으면서 조희룡의 직임을 비워둔 것으로 보아 정식 직원이었다기 보다는 액속이면서 임시직을 맡아 부정기적으로 짧게 근무하지 않았을까 추정하기도 한다. 한영규, 앞의 책, 23쪽.
14) “余藏書略千之餘, 癖於古董書畵, 燕居之時列置左右, 如不可須更離者.”, 조희룡,화구암란묵, 조희룡전집 2, 97~98쪽. 이외에도 그의 문집 중에는 골동서화에 관한 내용이 상당하다. 이는 당시 문인들의 심미취미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항문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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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묵장의 영수
여항문인화가로서 조희룡의 행적은 詩社활동과 여항화가들을 이끌었던 화가로서의 활동으로 집약된다. 조희룡은 당대 문인이나 서화가들과 두루 사귐을 가졌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던 사람들은 碧梧社 동인들이었다. 벽오사는 유최진(1791~1869)을 중심으로 1847년에 결성된 시사로, 동인들은 당시 중인이었던 의사나 역관, 화원화가들로, 이들과의 교류 또한 그의 신분이나 사회적 위치를 알려준다.15)
벽오사 동인들과의 교유는 그의 전 시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중 1861년의 모임에는 이기복과 조희룡을 비롯하여 김익용, 이팔원, 유최진, 유학영 등이 모였는데, 이때의 정경을 이기복은 글로, 화원화가인 혜산 유숙은 그림으로 남겼다.16) 이기복의 기문을 보면 이들은 자신들의 모임이 文彦博의 四老會와 王羲之의 蘭亭會와 같은 유서 깊은 아회를 이어받았다는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15) 벽오사의 구성과 활동에 대해서는 손명희, 2003, 19세기 벽오사 동인들의 회화세계 , 미술사연구vol. 17, 미술사연구회, 161~199쪽 참조.
16) “함풍 11년(1861, 철종 12) 신유 상원일에 文潞公의 四老會고사를 본떠 비오는 중에도 모여 시 읊음을 증명하느라 벽오사에 모여 종일 놀았다. 역시 시 한 수를 읊조리지 않을 수 없다. 난정회를 본떠 각기 스스로의 운자로 스스로의 시를 지었다. 혜산 유숙을 맞이하여 작은 족자에 그렸다. 紫閣에 기대어 수염을 꼬며 기뻐하는 자는 김미촌(김익용)이요, 선선하게 흥이 나서 한 폭을 펼쳐 난을 그리고 시를 쓰는 자는 조우봉(조희룡)이요, 눈썹을 치키고 담소하며 흔연히 자리에 다가앉아 옷깃을 헤치고 굽어보는 자는 이만취(이팔원)요, 뜰에 나가지 않고 손에 책 한권을 들고 도서를 감상하는 사람은 벽오사 주인 유산초(유최진)요, 烏巾에 素裝을 담박하게 하고 시원하게 안석에 기대어 진솔한 이 모임을 기뻐하는 사람은 이석경(이기복)이요, 방관(方冠)에 무늬 옷을 입고 손을 맞잡고 서 있는 사람은 젊은 주인 열경(유학영)이다. 위 벗들 노년의 즐거움이 이보다 더할 바가 다시 있겠는가? 후에 보면 지금이 곧 옛날이 듯이, 이 또한 하나의 고사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모임의 얼굴들을 거두어 잊기 어려움을 표하노라 석경 79세에 기문을 짓고 시를 쓰다.” 이기복, 석경학인신유초 , 여항문학총서7, 1991, 여강출판사, 86~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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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화 콘텐츠 벽오사소집도
<그림 1> 유숙, <벽오사소집도>, 지본담채, 14.9x21.3cm,
서울대학교박물관
더구나 “비 오는 중에도 모여 시 읊음을 증명”하려고 했다고 함으로써 동인들의 우정이 돈독하고 시사에 대한 열정이 깊음을 보여준다. 그날을 기념하여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 유숙의 <벽오사소집도>는 이기복의 기록과 거의 흡사하다(그림 1). 이기복이 조희룡은 “선선하게 흥이 나서 한 폭을 펼쳐 난을 그리고 시를 쓰고 있다”고 했듯이 중앙에 지필묵을 벌려놓고 앉은 마른 노인이 바로 그일 것이다. 모난 얼굴 훤칠한 수염에 키가 칠척이나 되었다는 그의 모습을 羅歧는 “마치 들 학이 가을 구름을 타고 펄펄 나는 듯하다”고 묘사하기도 하였다.17) 그는 어려서도 키는 크고 몸은 여위어서 열네살 되던 해(1802) 어떤 집안과 혼담이 있었는데 허약해 요절할 것이라 하여 퇴짜를 맞은 일도 있었다. 그는 스스로도오래 못살 줄 알았다고 하였는데, 그래서인지 장수에 대한 관심과 염원이 저술 곳곳에 남아있다.18)
17) 동양고전학회 역, 1998, 국역 근역서화징하, 시공사, 오세창, 槿域書畵徵, 913쪽. 188 韓國人物史硏究 제19호
벽오사 동인들은 조희룡이 가장 두터운 우정을 나눈 이들이다. 조희룡이 유배지에서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이 수시로 보내준 위로의 편지였다. 유배지에서의 편지글을 엮은 壽鏡齋海外赤牘에 실린 편지 중 상당수는 이들과 주고받은 것이며, 懷人絶句 22수 가운데도 이들은 8명이나 포함되어 있다.19)
벽오사와 함께 조희룡의 활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 여항화가들과의 교유이다. 그는 여항화가들 사이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이는 기유년에 있었던 藝林甲乙錄을 통해 확인된다. 예림갑을록은 1849년 6월 24일부터 여섯 차례에 걸쳐 서화가 각 8명이 당대 최고의 안목이었던 김정희에게 서화평을 받고 이에 조희룡이 낱낱이 화제를 쓴 것을 고람 전기가 화첩으로 만든 것이다.20) 여기에 참여한 화가 8인은 김수철, 이한철, 허련, 전기, 박인석, 유숙, 조중묵, 유재소 등으로 당대 활발히 활동하였던 중인출신 화가들이다.
예림갑을록이 만들어진 1849년은 추사 김정희가 8년 동안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다가 돌아온 다음해이다. 이 모임에 조희룡은 김정희를 찾아가 감평을 받는 일을 주관했을 뿐 자신이 그림을 그려 평을 받지는 않았다. 조희룡이 초기에는 김정희의 영향하에서 성장하였을지라도 김정희의 유배기간 동안 여항화가들의 좌장으로서 성장하였을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정황을 간파했었는지 훗날 오세창은 유재소 그림 상단에 쓴 조희룡에 대한 소개 글에 그를 “墨場의 領袖”라 칭하였다(그림 2).21) 대부분이 화원이거나 직업화가인 이들의 중심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창적인 회화관과 새로운 화풍으로 화단을 이끌었던 조희룡에 대한 적절한 칭호로 여겨진다.
18) 조희룡, 석우망년록, 조희룡전집 1, 105쪽. 그럼에도 퇴짜를 놓았던 규수는 다른 집안과 혼인하여 일찍 과부가 되었고, 자신은 아들 손자를 보고 70여 세까지 살고 있어 스스로를 ‘壽老人이라 號'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19) 조희룡의 회인절구 22수는 조희룡, 우해악암고조희룡전집 4, 118~131쪽에 수록되어 있다.
20) 예림갑을록에 대해서는 안휘준, 1995, 조선말기 화단과 근대회화로의 이행 , 한국근대회화명품, 국립광주박물관, 132~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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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예림갑을록>, 1849년, (좌)
유재소,<추수계정도>견본담채, 72.5x34.0cm, (우)
김수철<매우행인도>, 견본담채, 72.5x34.0cm,
호암미술관.
여항화가들을 이끄는 위치에 있었던 조희룡의 면모는 <예림갑을록>에 쓴 각 화가들에 대한 제시에서 읽혀진다. 그는 각 화가들의 작품에 친근하면서도 애정어린 평으로 격려하였다. 반면 김정희는 핵심을 찌르는 날카로운 평을 하여 김정희와 조희룡 두 사람의 성격과 역할을 보여준다.22)
21) “能文章善書畵, 爲一代墨場領袖故八君子各爲山水求其品題之詩者也”
22) 조희룡의 제시는 조희룡, 우해악암고 조희룡전집 4, 216쪽, 김정희의 평은 안휘준, 위 논문, 133쪽; 오세창, 앞의 책, 10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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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림으로 그린 예언
조희룡과 김정희는 세 살 차이 밖에 나지 않지만 한때 제자로 분류되기도 할 만큼 조희룡의 글씨는 김정희의 서체와 방불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사회적 위치나 신분에 있어서 차이가 있고 타고난 기질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차이가 있었다.23)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문제에서 비롯되어 양사에서 김정희와 그의 형제들의 죄를 물을 때 그에게도 낙도유배의 명이 내려졌다.24) 조희룡의 나이 63세 때이다.
헌종의 묘를 옮기는 중대한 문제로 당대 최고 권력자들이 유배되는데, “미천한 蟣虱의 類”라 천시당하였던 조희룡이 연루되어 원 죄인인 김정희의 1년 유배보다 훨씬 긴 19개월간 유배생활을 했으니 억울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사건을 다룬 실록에 그럼에도 “빚어낼 근심이 거의 수풀에 숨은 도둑과 같아 장래의 禍가 반드시 燎原을 이룰 것이니” “미세한 때에 방지하여 조짐을 막는 도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한 대신들의 상소는 그의 위치를 간접적으로 설명해준다. 그가 신분이 낮고 어떤 일을 직접 도모하지는 않았음에도, 문인과 다름없는 식견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김정희와 엮어 유배를 보낸 것은 당시 날로 성장해가는 여항인의 세를 제거하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25)
23) 추사가 끝없는 완성을 추구하는 유가적 면모를 보여준다면, 조희룡은 자족 지향적인 노장 쪽에 가깝다고 보기도 한다. 한영규, 앞의 책, 159쪽.
24) 철종 2년 辛亥(1851, 함풍 1) 7월 21일(乙巳). 한국고전번역원, 조선왕조실록 번역 검색.
25) 이처럼 무리와는 ‘차이’를 보이는 ‘타인’이 갖고 있는 잠재적 징후를 문제 삼아 추방하거나 제거하려했던 것은 지라르가 박해의 상투적 전형으로 보았던 것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김진식 옮김, 1998,희생양, 민음사, Rene Girard, Le bouc émissaire, paris:Grasset. 25~42쪽.
붓 끝에 쏟아낸 울분 191
조희룡의 유배에 대한 의문은 林令이라는 이의 편지에 답하는 글에서 좀 더 확연해진다. “우리들 같은 벌레의 팔과 쥐의 간 따위가 어찌 여기에 참여된단 말입니까? 만약 문필을 조금 안다고 하여 문득 이러한 재액에 걸린다면 이로부터 이 세상에는 독서종자가 끊어질 것입니다.”라 한 것이다.26) 조희룡의 유배가 문필로 인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조희룡은 자신이 미천한 존재임을 환기시키며 문필로 인해 재액을 불러올 만큼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아님을 극구 강조하고 있다. 그리곤 유배지의 그의 거처를 날마다 서울을 바라보는 집이라는 ‘日望五雲庵’이라 하고 해배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해배의 소식은 해를 두 번이나 넘긴 1853년 3월 14일에야 건너왔다.
조희룡은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지금 바다 밖에 온 일은 年運과 月建속에 진실로 정해져 있었던가?” 되뇌어 보았다.27) 유배를 올 수 밖에 없는 운명인가? 혹여 자신이 평소에 번화한 서울에 살면서도 엉성한 울타리와 초가 사이에 사람은 없는 쓸쓸한 모습을 즐겨 그린 것이 畵懺이 되어 그 쓸쓸한 그림속의 주인공이 된 것은 아닌가도 자책해 보았다.28)
이렇게 간 유배지에서의 고독과 고통을 조희룡은 친구 이기복에게 보낸 편지에 파도소리도 ‘우는 것’으로 들리고, 자신의 처지도 ‘울지 않고 견딜 수 없다’고 쓰고 있다.29) 벽오사 동인인 이기복은 헌종대의 어의로서 헌종에게 올린 약이 효험이 없었다는 이유로 그보다 먼저 강진 고금도에 유배된 적이 있었다. 유배를 경험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였기에 아픔을 전하는 내용은 더 절절하였다.
26) 조희룡, 수경재해외적독, 조희룡전집 5, 5, 67쪽.
27) 조희룡, 화구암란묵, 조희룡전집 2, 70~72쪽.
28) 조희룡, 위의 책, 47쪽.
29) “저는 날마다 바닷가에 가서 물 구경을 합니다. 맑고 넓은 것은 그 본성이요, 용솟음치고 급하게 흐르며 파도치는 것은 우는 것으로 그 지형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인가 봅니다. 저의 사정은 이 막다른 지점에 이르러서 어찌 울지 않고 견딜 수 있겠습니까(第日臨海岸, 得水觀焉, 澄澹汪洸其性也. 湧湍灂激其鳴也, 其地使然. 吾事到此地頭, 豈能不鳴已乎?)”, 조희룡, 위의 책, 64쪽.
192 韓國人物史硏究 제19호
유배지에 막 도착했을 때 쓴 편지에서는 그 괴로움이 극심하여 景集에게 보낸 편지 중에 “여러 가지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온갖 상황은 사람의 情理로써 견디지 못할 지경입니다. 어떤 악업으로 이런 억울한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 알지 못할 뿐입니다.”며 하소연하였다.30) 그때의 사정은 원통과 고달픔뿐이며, “망연자실 붓을 던지고 한숨만 짓는다”고도 하였다.31)
그러다 차차 섬 생활에 적응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으면서는 “집 옆에는 크고 작은 대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서 서로 부딪치며 소리를 내고, 좌우에서 비쳐 주며 훤칠한 키로 옥처럼 우뚝 서서 천연스레 웃고 있었다. 벗을 떠나 외로이 사는 처지지만 대나무에 둘러싸여 있으니 군자 육천 명을 얻은 것처럼 든든하였다.”고 하며 향설관 앞에 烏竹 수십 그루를 일부러 심기도 하였다. 모래 위의 한 점 갈매기도 그의 이웃이 되어 자신이 사는 집을 만 마리 갈매기 소리가 들린다는 뜻으로 ‘萬鷗唫館’이라고 했고, 또 갈매기로부터 그림 그리는 뜻[畵意]를 얻는 집이라 하여 ‘畵鷗盦’이라고도 하였다.
임자도에서 그는 차차 도회에서는 보지 못한 수많은 새로운 것을 보고 감탄하곤 하였다. 이것들이 곧 시가 되고 그림이 되었다. 그곳에 귀양 온 友石先生을 만나 서로의 회포를 풀기도 하였고, 돌을 좋아하는 그를 따라 수석을 채집하였으며 이 돌들이 다시 돌 그림이 되었다. 운명처럼 만난 바다에서 돌을 수집하고 그림 그리는 일상을 살게 된 그곳의 거처에 ‘壽梅壽石廬’라는 편액을 써서 걸었다.32)
짧은 기간이지만 임자도에서 조희룡을 따라 글을 배운 이들도 있었다. 섬에서 새우를 잡던 洪在郁과 朱俊錫이 그들이다. 조희룡은 유최진에게 쓴 편지에 이들을 “시와 글씨가 맑고 정묘하며 楷書의 필법 또한 精하고 아름답다”고 칭찬하기도 하였다.33)
30) 조희룡, 수경재해외적독, 조희룡전집, 5, 43쪽.
31) 조희룡, 위의 책, 66쪽.
32) 조희룡, 화구암란묵, 조희룡전집 2, 62쪽.
붓 끝에 쏟아낸 울분 193
이 두 소년은 조희룡의 詩稿를 정리하는 일을 도왔다. 현재 전하는 조희룡의 대부분 저술이 유배시기에 모아졌고, 이를 필사한 필치 또한 여러 사람의 것이다.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하였던 다산 정약용이 그토록 방대한 저술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다산학단’이라 불리는 수많은 제자들의 노고가 있었기 때문임은 익히 잘 알려진 일이다.34) 그와 같이 두 소년이 정리하는 일을 도맡아 주었기에 조희룡의 저술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유배 중에 조희룡은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을 뿐만 아니라 무단히도 붓을 들어 살고 있는 거처도 그렸다.35) 오직 그림 그리는 일 이 한 가지 일이 일체의 苦厄을 극복해가는 법이었다.36) 조희룡은 그림 청에도 응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大幅의 매화도를 수없이 완성하였다. 金公이 청한 매화그림은 방안에 들일 수 없을 정도로 커서 눈 내린 땅에 펼쳐놓고 붓을 휘둘러 겨우 장을 이룰 정도였다.37) 그의 장기인 매화그림 뿐 아니라 그전에 비해 묵죽도 많이 그렸고, 돌을 수집하면서 새롭게 괴석도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가슴속의 불평한 기운이 먹 기운으로 생동하면서 60여년 쌓아왔던 그의 작품세계에 일대 변혁이 이루어졌다. 작품에서의 변화는 다음 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33) 조희룡, 수경재해외적독, 조희룡전집 5, 74쪽.
34) 임형택, 2008, 다산학단 문헌집성 총서 , 다산학단 문헌집성 1권, 대동문화연구원, 1~6쪽.
35) 조희룡, 화구암란묵, 조희룡전집 2, 70~72쪽.
36) 조희룡, 위의 책, 43쪽
37) 유배지에서 청에 응하여 그림을 그린 내용은 조희룡, 수경재해외적독, 조희룡전집, 5, ‘김군에게’, 34쪽, ‘손암에게 답함’, 52쪽 등 다수가 있다.
194 韓國人物史硏究 제19호
Ⅲ. 조희룡의 예술
1. 독자적인 예술관
조희룡은 중인으로서의 신분적 자각이 철저하였으며, 예술에 대한 견해도 김정희를 비롯한 당시 문인들과 변별되는 독자성을 지녔다. 그의 저술 곳곳에 보이는 독특한 예술관은 그의 그림의 특징만큼이나 독특하다.
조희룡 예술관의 가장 독창적인 면모는 ‘手藝論’에서 볼 수 있다.
조희룡은 소동파의 ‘胸中成竹論’을 언급하면서도 “흉중에 비록 대가 있더라도 손이 따라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논리를 폈다.38) 그것은 “글씨와 그림은 모두 ‘손재주’에 속하여 그 재주가 없으면 비록 총명한 사람이 몸이 다하도록 그것을 배워도 할 수 없으니, 그 까닭은 손끝에 있는 것이지 가슴 속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9)
조희룡이 주장한 ‘수예론’은 단순히 기술적 측면의 재능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수예’를 강조하는 것은 당나라 시인 白居易의 “마음에서 얻어 손이 이를 전한다(得於心傳於手)”는 ‘心手相應論’에서 비롯된 것이다. 명말 동기창은 가슴 속에 자연의 기운을 형성시키는 ‘隨手寫出’, 즉 손을 따라 모든 산수의 傳神을 이룰 수 있다고 했고, 청대의 정섭은 ‘眼中之竹’과 ‘胸中之竹’을 거쳐 ‘手中之竹’에 이른다고 했듯이 창작자의 창작의도를 전달하는 최후 기관으로서의 손을 강조한 것에 바탕을 둔 것이다.40)
38) “坡公論畵竹, ‘胸中成竹’. 是說余嘗疑之. 胸雖有成, 手或不應, 奈何.” 조희룡, 화구암란묵, 조희룡전집 2, 36~37쪽.
39) “書與畵, 俱屬手藝, 無其藝, 雖聰明之人, 終身學之, 不能, 故曰: ‘在於手頭, 不在胸中.’” 조희룡, 석우망년록, 조희룡전집 1, 208쪽.
40) 홍선표, 1995, 19세기 여항문인들의 회화활동과 창작성향 , 미술사논단 창간호, 한국미술연구소, 208쪽.
붓 끝에 쏟아낸 울분 195
손재주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는 재주를 아끼는 화가들을 평할 때도 손을 강조하여, 고람 전기의 죽음에 “비록 흙이란 게 정 없다고들 하나 과연 이 사람 열손가락을 썩혀 없앤단 말인가?”하며 애통해 하였다.41)
조희룡은 시서화가 하나라는 ‘시서화일체론’을 긍정하였다.42) 그러나 載道論적 관점에서 서화의 효용론이나 감계론은 부정하였으며, “시 중의 일을 알고자 하면 모름지기 먼저 그림을 배워야”한다고 하여 시와 그림은 한 이치이지만 이는 그림으로 말미암는다는 생각이었다.43)
그러므로 회화와 같은 예술세계는 산림처사나 고관대작의 일상과는 별개의 것으로서 그것을 담당하는 인물도 따로 있다고 생각하였다.44) 그림이 사대부문화의 한가한 취미로 취급되고 독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반발하여 회화예술의 독자적 의의를 강조한 것이다. 이는 마음속에 품은 뜻이 자연스럽게 손끝에 전해진다는 기존의 생각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전문화가로서의 특별한 재능을 중시하는 견해로, 추사라는 거장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였던 노력의 소산으로 추측된다.
이에 더 나아가 그는 그림 그리는 일의 필요성을 강조하기까지 하였다. 그림에 대해 ‘小技’라는 표현을 가끔 사용하였는데, 그가 말한 소기는 가치의 측면에서 작다는 뜻이 아니며, ‘소기’인 그림을 통해 붓, 벼루와 가까워져서 글을 읽고 쓰며 독서의 묘미를 얻을 수 있다는 그림 그리는 것에 대단히 긍정적이고 호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림에 대한 효용성과 이를 그리는 화가로서의 자부심은 화가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강한 확신이 바탕이 되었다. 바로 性靈과 타고난 솜씨[才]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특별한 능력을 ‘才力’이라 하였으며,45) 재력이 있어야만 성령을 제대로 표출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당시 만연하였던 性靈論에 바탕을 둔 것으로 성령을 중시하는 경향은 김정희를 비롯한 당시 문인들의 문예경향이었다.
41) 전기전 , 조희룡, 호산외기 조희룡전집, 6, 150쪽.
42) “시로써 그림에 들어가고 그림으로써 시에 들어가는 것은 한 가지 이치이다.”, 조희룡, 석우망년록, 조희룡전집 1, 195쪽.
43) 조희룡, 우해악암고 조희룡전집 4, 109쪽.
44) 조희룡, 석우망년록, 조희룡전집 1, 84쪽; 조희룡, 한와헌제화잡존 조희룡전집 3, 140쪽.
196 韓國人物史硏究 제19호
그러나 같은 ‘성령론’이지만 이를 해석하는 방식은 김정희와 조희룡이 조금 달랐다. 김정희는 ‘畵品’과 ‘人品’을 같은 것으로 보아, 화품은 인품의 고하에 의해 평가된다는 것이다. 김정희의 논리에서 보자면 인품은 문자향과 서권기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학문이 깊은 사대부 문인들만이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가 즐겨 그리던 난에서 더욱 강조하였다.46) 반면 조희룡은 노력으로 성령을 기를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 특히 난을 그리는 작은 일로도 길러질 수 있으며, 이는 정신적 위안만이 아니라 병을 치료할 수도 있고 그로 인해 장수할 수도 있다고 까지 하였다. 같은 성령론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것을 얻는 방법은 차이가 있었다.47)
화가로서 조희룡은 자신의 독창적인 길을 가려는 의지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45) “판교에게는 판교의 재력이 있는데, 나에게는 판교의 재력이 없으니 비록 그것을 배우려 하더라도 잘 되지 못할 것이다.”, 조희룡, 한와헌제화잡존 조희룡전집, 3, 129쪽.
46) “鄭所南(정사초)·趙彛齋(조맹부) 두 사람은 인품이 고고하고 특절하므로 화풍도 역시 그와 같아서 범인으로는 쫒아가 밟을 수도 없는 것이다. (중략) 아무리 구천 구백 구십 구분까지 갔다고 하더라도 그 나머지 一分이 가장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려우며, 구천 구백 구십 구분은 거의 다 가능하겠지만 이 일분은 인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 역시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리는 것은 이 뜻을 알지 못하니 모두 妄作인 것이다.” 題石坡蘭卷, 민족문화추진회편, 1995,국역 완당전집 2, 김정희,阮堂全集,솔, 245~246쪽.
47) “난을 그리는 것이 비록 작은 재주지만 성령을 즐겁게 기를 수 있다. 밝은 창 깨끗한 책상에 옛 벼루와 옛 먹을 사용하여 눈빛같이 흰 종이 위에 손가는 대로 짙은 잎과 엷은 꽃을 끄집어내어 인천안목을 이룬다. 육기가 그로 인해 맑아진다. 어찌 병만을 물리칠 뿐이겠는가? 수명도 연장할 수 있다.” 조희룡, 한와헌제화잡존 조희룡전집 3, 36쪽.
붓 끝에 쏟아낸 울분 197
“나는 누구에게도 속한 바가 없지만 그 속하지 않는 것이 또한 속함이다”고 하였고, “鄭板橋(정섭, 1693~1765)가 말하기를 ‘내
가 대를 그리지만 스승에게 배운 바가 없고, 붉은 창과 분바른 벽[紅窓粉壁]의 햇빛, 달그림자 속에서 얻었다.’고 했으니 나 또한 그렇게 말한다.”48)라고도 하였다. 오직 자신의 재능과 역량에 따라 자신만의 개성있는 그림을 그린다는 강한 자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에서 뿐 아니라 조희룡은 한 장의 편지를 쓸 때조차 단 한 줄이라도 중복되는 글이 없도록 반드시 확인하고 썼다고 할 만큼 독창적인 글쓰기도 중시하였다.49) 이렇게 독창적인 글쓰기의 구체적인 창작방법으로는 ‘減字換字’ 할 것을 제시했는데, ‘글자를 줄이고 바꾼다’는 이 말은 고금의 화법을 변형시켜 재창조한다는 화법의 독창성에도 적용된다.50)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은 예술세계에 몰입하는 전문가의 견해로 이어졌다. 그는 예술세계에 몰입할 때의 충동과 격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검속이 한 번 변하여 환락에 이르고, 환락이 변하여 醉情에 이르고, 취정이 변하여 글씨에 이르고, 글씨가 변하여 그림에 이르고, 그림이 변하여 돌에 이르고, 난에 이르고, 狂塗亂抹에 이르고, 권태에 이르고, 잠에이르고, 꿈에 이르고, 나비의 훨훨 날음에 이른다.”51)
예술가가 점차 감정의 격렬함에 빠져들다가 절정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의식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이와 같은 조희룡의 예술관은 그의 화풍의 변화과정과도 유사한 흐름을 보인다.
48) 조희룡, 화구암란묵, 조희룡전집 2, 38쪽.
49) 조희룡, 수경재해외적독, 전집 5, 101쪽.
50) 손명희, 앞 논문, 51~55쪽.
51) “檢一變, 至于歡, 歡一變, 至于醉, 醉一變, 至于書, 書一變, 至于畵, 畵一變, 至于石, 至于蘭, 至于狂塗亂沫, 至于倦, 至于眠, 至于夢, 至于蝴蝶栩栩.” 조희룡, 한와헌제화잡존 조희룡전집, 3, p. 113; 같은 내용이 조희룡, 석우망년록, 조희룡전집 1, 29쪽.
198 韓國人物史硏究 제19호
즉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간략한 구도와 단순한 필치를 보
이다가 점차 거칠고 분방한 필치의 복잡한 구도를 보이며, 그의 60대
이후의 작품에서는 거의 “미친 듯이 칠하고 어지럽게 긋는” 듯한 필획
이 나타난다. 이처럼 독특한 견해가 그의 작품을 독창적인 세계로 이
끌어 가는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예술관은 문장관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그는 문장의 심미성을
중시하여 기존의 격식을 무시하고 새로운 글쓰기를 실험하였다. 小品
文이라 불리는 그러한 글쓰기는 19세기 추사파 문인들 사이에서 유행
하던 것으로 이는 조희룡의 회화에 나타나는 감각적 표현미와 일치한
다.52)
조희룡은 화가는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내면적 역
량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이에 더하여 끊임없는 수련과정을 거쳐야
하는 엄격한 조건이 요구된다고도 하였다. 타고난 재능은 성령론에 입
각하여 창작자의 眞情과 개성을 표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가 남종문
인화풍의 세계를 견지하면서도 격조보다는 예술가의 감정표출을 더
중시하며 자유로운 회화세계를 지향했던 것은 이러한 예술관을 바탕
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2. 그림으로 펼친 울분
이십대에 화가들과 어울리며 그림을 그렸던 일화에서 보았듯이 조
52) 公安派의 小品文은 17세기 김창협, 김창흡 형제를 위시한 백악사단에서
받아들여 18세기 북학파를 중심으로 확대되었고, 다시 박제가를 통해 추
사파에게로 계승된 것으로 파악한다. 공안파의 문예이론에 대해서는 남덕
현, 1996, 공안파 문인과 그 문론 , 중국어문학, 영남중국어문학회, 2
1~40쪽; 공안파 이론의 조선 수용에 대해서는 안나미, 2009, 17세기 초
공안파 문인과 조선 문인의 교유 , 한문학보, 우리한문학회, 419~453쪽
참조.
붓 끝에 쏟아낸 울분 199
희룡은 일찍부터 서화를 즐겼다. 그는 역대의 중국화론서와 나빙을 비
롯한 청대 양주팔괴 화가들의 그림을 접하며 회화세계를 넓혀갔다.53)
조희룡은 사군자 전반을 두루 그렸으나, 매화그림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과를 보였다. 그가 이룬 매화그림에서의 자유분방하고 감각적인 경
향은 난이나 대나무에서도 볼 수 있다. 조희룡 화풍의 강한 개성은 유
배를 다녀온 60대 이후에 확립된 것이다. 이는 추사 김정희가 8년에
걸친 제주도 유배의 고통 속에서 추사체를 완성한 것에 비견된다. 유
배지에서의 심경을 담아 그린 작품들을 중심으로 그의 가슴속 울분이
작품에 어떻게 표출되었으며, 이는 그의 화풍변화와 어떤 관련이 있는
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성난 기운으로 그린 대나무
3년에 걸친 유배는 조희룡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으며, 자신의 처
지를 절감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날마다 해안에서 고래가 입
을 벌리고 자라가 뛰노는 모습을 보면서 詩想을 발하여 시 수백편을
얻었다. 그런데 그 시 모두가 슬프고 괴롭고, 막힌 듯 고르지 못하여
시를 덮어두고 그림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54) 이에 그 시가 열 손가
락 사이로 터져 나와 매화가 되고, 난초가 되고, 돌이 되고, 대가 되었
는데 연이어 끝낼 수가 없었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화폭에 옮겨져
그림으로 승화된 것이다. 가끔은 높은 언덕에 올라 푸른 바다를 바라
보면 가슴 가득 막히고 울적한 기분이 말끔해졌다. 그러면 돌아와 붓
을 휘둘러 대를 그렸는데, 그림에 자못 일격이 더해짐을 깨닫는다고
하였다.55)
그는 임자도 그의 거처 주변에 무성한 대나무를 보고 이를 화폭에
53) 조희룡이 참고한 중국화론서와 화보에 대해서는 홍성윤, 앞 논문, 66~94
쪽.
54) 조희룡, 화구암란묵, 조희룡전집 2, 43쪽.
55) 조희룡, 위의 책, 59쪽.
200 韓國人物史硏究 제19호
출처:http://pbbs.naver.com/action/h_read.php?id=kssin57_5&nid=1298&work=list&st=&sw=&cp=1
<그림 3> 조희룡,
<묵죽병풍> 중 한 폭,
종이에 수묵,
53.0x133.0cm,
간송미술관
담았다. 큰 잎사귀 작은 잎사귀가 어지러이
나부끼고 빽빽이 우거져 있는 이 그림들을
촌 늙은이들에게 나누어 주어 이로부터 그
림이라고는 모르던 그곳 온 마을에 묵죽이
퍼져나갔다.56)
간송미술관 소장 <묵죽병풍>은 대나무
의 여러 모습을 팔폭 병풍에 담은 것으로,
“벗을 그리는 감회를 금치 못하면 ‘먹을 쏟
아 붓듯’ 하여 큼직한 대나무를 그렸다.”고
했던 것처럼 힘찬 묵죽의 특징을 잘 보여준
다(그림 3) 각 폭마다 구성과 배치가 다양하
고, 초서를 쓰듯 어디에도 구애됨이 없는
자유로운 구도와 붓놀림의 기세를 볼 수 있
다. 그런데 끝이 부러진 통죽의 기세는 “대
나무는 구름 위로 치솟는 기상이 있어서,
구름 위로 치솟는 필치로써 그려야한다”고
했던 바로 그러한 기세이다.57)
그는 평소에도 “성난 기운으로 묵죽을 그
린다”는 화제를 묵죽에 쓰곤 하였다. 이 말
은 원나라 승려 覺隱이 했던 것으로, “喜氣
寫蘭, 怒氣寫竹”에서 온 것이다.58) 실제 화난 마음을 담는 다기 보다
그러한 기세로 그려야 대나무의 힘과 동세가 살아난다는 뜻이다. 그럼
에도 그는 임자도에 와서 묵죽을 다른 어느 때 보다 많이 그렸다. “내
평소에 대를 그린 것이 매화나 난초 그림의 열에 하나를 차지할 뿐이
56) 조희룡, 위의 책, 47쪽.
57) 조희룡, 한와헌제화잡존 조희룡전집, 3, 177쪽.
58) 이 말은 芥子園畵傳의 蘭譜에 실려 있다. 用筆墨法, 人民美術出版
社編, 1982,芥子園畵傳 第二集蘭竹梅菊, 人民美術出版社, 27쪽.
붓 끝에 쏟아낸 울분 201
<그림 4> 조희룡,
<황산냉운도> ,
종이에 수묵,
124x26cm, 개인
었다. 그런데 바다 밖에 살면서부터 대 그림이 매우 많아져 매화나 난
초 그림이 도리어 열에 하나가 되었다. 거의 하루도 빼먹지 않고 그렸
다.”고 하였다.59) 시로 쓸 수 없는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붓 끝에 실어
날마다 묵죽을 그린 것이다.
2) 울적한 마음을 담은 산수화
조희룡은 임자도에서 그곳에 살아야만 하는 불
편한 감정을 산수도에도 쏟아내었다. <荒山冷雲
圖>는 물가 작은 집에 키가 큰 나무가 서있고 집
주변에 대나무가 둘러쳐진 전형적인 남종문인화
풍의 산수도이다(그림 4). 그런데 장축의 좁은 화
면에 산은 급하게 솟아 있고, 언덕과 나무를 그린
필치는 거칠고 자유분방하여 어딘지 암울한 분위
기가 감돈다. 이러한 분위기의 답을 그림의 상단
에 적힌 화제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 외로운 섬에 떨어져 살며 눈에 보이는 것
이란 거친 산, 기분 나쁜 안개, 차가운 공기뿐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필묵에 담아 종횡으로 휘
둘러 울적한 마음을 쏟아 놓으니 화가의 육법이라
는 것이 어찌 이를 위해 생긴 것이랴. 해수
외로운 섬에 떨어져 산다고 하여 이 그림을 그
린 때가 유배시기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유배
지에서의 외롭고 울적한 마음을 필묵에 담아 규범
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껏 붓을 휘둘러 그렸다고
하였다. 그의 마음 때문에 산도 거칠고 안개도 기
59) 조희룡, 위의 책, 34쪽.
202 韓國人物史硏究 제19호
<그림 5> 조희룡, <방운림산수도>, 종이에 수묵,
22x27.6cm, 서울대학교박물관
분 나쁘게 느껴지며 공기 또한 차갑다. 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어딘지
암울한 기운은 이러한 그의 감정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는 유배지의 정경을 “집 뒤로는 거친 산이요, 문 앞에는 바다 물
결이 일렁이는데 크고 작은 대나무가 좌우로 울창하게 감싸면서 훤칠
한 키로 우뚝 솟아있다”고 하였다. 남종화풍의 구성을 취하였음에도
실경을 바탕으로 그려서인지 이 그림의 구도와 글 속의 정경이 크게
다르지 않게 보인다. 작은 집 마루에 홀로 앉아 있는 인물은 자신을
그린 것이다. 화제의 끝에 ‘바닷가에 사는 늙은이’라는 뜻으로 ‘海叟’
라 적었는데, 바로 임자도 작은 거처의 주인 조희룡이다.
<황산냉운도>는 화제에 유배지에서 그린 것임을 밝혀 63세 혹은
64세에 그린 것임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의 산수화풍의 변모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조희룡은 산수유람의 벽이 있어 우리나
라 명승은 다 찾아보았고, 천하의 명산대천에 이르러서는 옛 사람들의
유람한 기록을 늘 곁에 두고 볼 정도였다.60) 그럼에도 여러 화목 중에
서 산수화에는 타고난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여 즐겨 그리지 않는다고
붓 끝에 쏟아낸 울분 203
<그림 6> 나빙,
<삼색매도>, 지본설색
118.4x51.2cm,
길림성박물관
도 하였는데61) 실제 현전하는 그의 산수화 작품도 많지 않고 남아 있
는 작품 대부분은 예찬이나 황공망의 필의를 따라 갈필로 간략하게
그린 남종문인화풍의 산수화이다(그림 5). 남종문인화풍의 정형을 따
르면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그려낸 <황산냉운도>는 유배지에서의 울
적한 심사를 담은 특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3) 용을 움켜잡고 범을 잡아매는 기세의 매화도
조희룡은 다른 어떤 화목보다 매화도에
서 가장 개성을 발휘하였고, 또 많은 작품
을 남기고 있다. 그의 매화도는 줄기는 굵
고 각이 져 기굴하며, 꽃이 탐스럽고 화려
하여 이전 시기의 매화도와는 완전히 다른
특징을 보인다. 뿐만 아니라 연지를 사용
하여 화려한 홍매를 적극적으로 그렸으며,
우람한 백매와 홍매가 한 병풍에 가지를
펼치고 서있는 奇崛한 형태의 ‘전수식 매
화도병풍’을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그려
크게 유행시켰다. 이러한 매화도 화풍은
당시의 화가들뿐만 아니라 이후 매화도 화
풍의 변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 19세기
화단을 일신시켰다.62)
이러한 조희룡의 기굴하면서도 화려한
매화도 화풍은 그가 자신의 화풍의 연원을
童鈺과 羅聘(1733~1799) 등 청대 揚州八
60) 조희룡, 석우망년록, 조희룡전집 1, 59쪽.
61) 조희룡, 한와헌제화잡존 조희룡전집, 3, 245쪽.
62) 조희룡의 매화도에 대해서는, 이선옥, 2004, 조선시대 매화도 연구 , 한국
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참조.
204 韓國人物史硏究 제19호
怪화가들의 화풍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했던 것처럼 중국매화도와 밀
접한 관련이 있다.(그림 6)63) 조희룡은 동옥과 나빙의 매화도를 직접
소장하기도 하였을 뿐 아니라, 유배 가는 길에 나빙의 매화도를 챙겨
가기도 하였고, 집에 간직한 동옥의 매화도를 보면서 자신의 의지를
불태우기도 하였다.64) 조희룡이 중국 매화도를 많이 접하고 영향을 받
을 수 있었던 것이나, 매화도 뿐 아니라 조희룡과 여항문인들 사이에
‘梅花書屋圖’가 유행하였던 것도 김정희를 통해 전해진 중국문인들의
매화 애호와 향유문화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65)
조희룡의 작품 중 홍백매화를 함께 그려 기굴하고 화려한 특징이
잘 드러난 대작이 일민미술관 소장 <梅花八曲屛>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에는 그런데 유배지에서의 참담한 심경
이 빼곡히 적혀있다(그림 7).
지금 내가 바닷 돌 움푹 패인 곳에 먹을 갈아 시골 늙은이가 쓰는 서
푼짜리 큰 개털 붓으로 바다와 산이 푸르고 하늘에는 바람이 차갑게 부
는 곳에서 한 발 여섯 자 크기의 붉고 흰 매화[紅白丈六梅花]를 그렸다.
옛사람에게 있어서는 일대 고사가 되겠지만, 좀 벌레처럼 늙어지고 개똥
벌레처럼 말라 가는 우리들에게야 무얼 말할 만하겠는가?66)
63) “천개 만개의 꽃을 그리는 법은 王會稽로부터 시작하여, 근래의 錢籜石,
童二樹, 羅兩峯에 이르러 극성하였다. 나의 매화는 童二樹와 羅兩峰사이
에 있는데, 결국 그것이 나의 법이다.”, 조희룡, 한와헌제화잡존 조희룡
전집, 3, 82쪽.
64) 實是學舍古典文學硏究會譯, 1998, 조희룡, 한와헌제화잡존 조희룡전집
3, 한길사, 89쪽.
65) 매화서옥도의 유행과 청대 문인들과의 관계는 金庠基, 2000, 金秋史의 一
門과 吳蘭雪과의 文學的交驩에 대해 ―梅龕을 중심으로― , 이병도박
사화갑기념논총 韓國思想史論文選集147, 불암문화사, 419~429쪽 참조.
66) “今余磨墨於海石窪處, 運村叟三錢狗毛椽筆, 掃得紅白丈六大梅, 於海山蒼
蒼天風浪浪之中. 在古人可爲一大故事, 而余我輩蠹老螢乾何足道哉.” 이글
은 그의 화구암란묵, 31쪽에도 실려 있다.
붓 끝에 쏟아낸 울분 205
<그림 7> 조희룡, <매화팔곡병>, 종이에 수묵담채, 124.0x375.5cm,
일민미술관
조선 후기 서화가인 조희룡(1797-1859)이 그린 사군자팔곡병 중 묵매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처 © 이중식 이미지 사이즈 466x800 한국학중앙연구원
수폭의 병풍에 매화를 펼쳐 그린 것은 ‘옛사람에게는 고사가 될’ 만
큼 혁신적인 구성이다. 홍백매를 한 폭에 어우러지게 한 것이나 유난
히 큰 바위와 함께 그린 것도 조희룡 매화도의 주요한 특징이다. 그럼
에도 좀 벌레처럼 말라가는 자신들에게는 이야기 거리가 되겠느냐며
자조적인 넋두리를 하고 있다.
그는 이어지는 화제에 “줄기 하나를 치더라도 용을 움켜잡고 범을
잡아매듯이 해야 하며, 꽃 한 송이를 그려 넣더라도 구천에서 현녀가
노닐듯이 해야 하며, 한 줌의 벼룻물을 곧 푸른 바다로 보아야 할 것
이다”라 했던 것을 떠올리며 “‘벼루 물을 푸른 바다로 보아야 한다(硏
池滄溟)’는 말이 오늘 내 신세의 씨앗이 되지 않았을까? 나도 모르게
붓을 던지고 크게 한숨을 지었다”고 적고 있다.67) 앞서 그림으로 오두
막을 그리던 것이 畵懺이 아니었을까 되돌아보았던 것처럼 장육매화
의 장쾌함을 표현하고자 썼던 ‘연지창명’ 화제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
을 적을 만큼 유배는 그에게 충격이었다.
개인소장 <홍매도대련>은 ‘小香雪館’이라는 관지가 있어서 유배기
인 60대 초반에 제작한 것으로 생각되는 그의 대표작이다(그림 8).68)
67) “發一幹, 如捉龍縶虎: 著一花, 如九天玄女, 一泓硏池, 仍作滄溟看矣.” 조
희룡, 한와헌제화잡존 조희룡전집 3, 47쪽. “此義得之於南華老叟, 大言
方庸炎炎, 此盖戱語也. 第意硏池滄溟, 安知爲此日之識也. 不覺擲筆一欷”
206 韓國人物史硏究 제19호
<그림 8> 조희룡,
<홍매대련>, 종이에 담채.
각 127x30.2cm, 개인
<그림 9> 조희룡,
<매화도>, 종이에
담채, 113.1x41.8cm,
고려대학교박물관
매화 줄기가 굵고 거칠면서도 힘이 극대화되어 있다. 한 마리 용이 꿈
틀거리며 승천하는 것 같은 줄기의 기세는 유배지에서의 답답한 심정
이 극적으로 표출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처럼 힘 있고 거친 필치를 그는 ‘미친 듯 칠하고 어지럽게 긋는
다’는 ‘狂塗亂沫’이라는 용어로 표현한 바 있다.69) 광도난말의 격동하
는 듯한 구성과 필치는 이후 그의 매화도에 적극 활용된 것을 볼 수
68) 화풍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소향설관’이라는 관지에 따라 이를 유배기의
작품으로 본 것은 손명희, 위 논문, 94쪽.
69) “檢一變, 至于歡, 歡一變, 至于醉, 醉一變, 至于書, 書一變, 至于畵, 畵一變,
至于石, 至于蘭, 至于狂塗亂沫, 至于倦, 至于眠, 至于夢, 至于蝴蝶栩栩.”
조희룡, 한와헌제화잡존, 113, 조희룡전집 1, 29쪽.
붓 끝에 쏟아낸 울분 207
있다.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매화도>는 매화의 형상을 묘사하였다
기보다는 농묵의 거침없는 붓질이 더해져 형태를 이룬 듯 분방한 작
품이다(그림 9).
이처럼 격동의 회오리가 불어 닥치는 듯 강렬한 필치의 매화 그리
는 일을 그는 “太史公(사마천)의 史記를 읽는 것과 같다.”는 비유적
인 표현을 썼다.70) 수 천 년 전개된 격동의 역사를 사마천의 큰 붓으
로 생동감 있게 엮은 사기의 감동을 매화그림에서 찾고자 한 것이
다. 이는 그가 호산외기를 지은 뜻을 사기 열전 을 쓴 역사적 소
임에 비유한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조희룡 회화의 격동적인 아름다움은 그의 회화사상 60대 이후에 주
로 발현된 것이다. 여항인으로서의 아픔과 ‘유배’라는 고난을 겪음으
로써 더욱 강렬하게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71)
4) 천하의 수고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린 난
조희룡과 난과는 깊은 인연이 있다. 그는 꿈에 붉은 난초가 뜰에 가
득한 것을 보고 아들을 낳았고, 이 기쁨을 간직하고자 서재에 “紅蘭吟
房”이라는 편액을 걸고 돌로 도장을 새겨 사용하기도 하였다.72)
조희룡의 난그림은 묵매와 더불어 활발하게 창작되었는데, 김정희
의 묵란화풍이 반영된 것과 자유로운 필법을 보이는 것이 있다. 조희
룡의 초기 묵란화는 가는 난엽, 붓을 눌러 점찍듯 표현한 단순한 난화
등 김정희 묵란과 유사하다(그림 10). 이러한 화법은 조희룡의 <尉勞
人蘭>을 비롯한 몇몇 작품에서 볼 수 있다(도 11). 조희룡의 <위로인
란>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난에 담은 그의 ‘인간미’이다. 그는
<위로인란>에 “무릇 난초를 그리고 돌을 그리는 것은 천하의 수고하
70) “寫梅, 如讀太史公史記”, 조희룡, 한와헌제화잡존 조희룡전집, 3, 68쪽.
71) 유배기에 형성된 조희룡 매화도의 분방하고 강렬한 필묵의 미를 ‘격동미’
로 본 것은 이선옥, 앞 논문, 2009, 222~229쪽.
72) 조희룡, 한와헌제화잡존 조희룡전집, 3, p.34.
208 韓國人物史硏究 제19호
<그림 10> 김정희, <지란합덕>
蘭盟帖 중, 27.6×23.4cm,
간송미술관
<그림 11> 조희룡, <위로인란>,
종이에 수묵, 23x27cm, 개인
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다.”는 화제를 적었다. 이 글은 그가 필
법이나 화제에 있어서도 많은 영향을 받은 청대 화가 정섭의 시와 비
슷한 내용으로, 그림에 대한 생각까지도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
다.73) 이는 예술의 효용을 인격수양과 학문도야에 두었던 유교적인 예
술관과는 차이를 보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 또한 각 분야에서 빼어난
활동을 하였으면서도 역사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전
기인 호산외기를 쓴 여항문인으로서의 시각과 연결된다.
<위로인란>을 비롯한 조희룡의 초기 묵란은 난법 뿐 아니라 화제
를 쓴 서체 또한 김정희의 서체와 유사하다. 이처럼 자신의 난법을 배
워 그리는 조희룡에 대해 김정희는 “조희룡 같은 무리[趙熙龍輩]는
내 난초 그림을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슴속에 문자기가 없는 까닭이다”며 불쾌한 심정을 비
쳤다.74) 이는 역으로 조희룡 난화의 특징을 설명해준다.
호암미술관 소장 <묵란>은 난 그림의 정법이라는 법칙이 자유롭
게 변형되어 있다(그림 12). 난 잎을 마치 들에 난 풀처럼 흐드러지게
73) 靳秋田索畵, 鄭燮, 1982,鄭板橋集 四部刊要/集部·別集類, 漢京文化事
業有限公司, 172쪽.
74) 민족문화추진회 편, 김정희, 앞의 책, 154쪽.
붓 끝에 쏟아낸 울분 209
<그림 12> 조희룡, <묵란>, 종이에
수묵, 22.7x27.2cm, 호암미술관
그려 현란함과 화려함을 보여준
다. 지금까지의 묵란과는 전혀 다
른 색다른 난의 세계를 펼쳐나간
것으로 조희룡의 묵매나 묵죽에
서 볼 수 있는 화려하고 자유로운
화풍과 일치하는 면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조희
룡은 그의 가슴속 울분을 쏟아내
기 위해 ‘마음껏’. ‘미친 듯’ 붓을
휘둘러 ‘먹을 쏟아 붓는’ 화법으로 그렸다. 그림이 ‘손가락 사이에서
터져 나오듯’ 가슴속 울분도 터져 나와 매화가 되고 난이 되고, 대나
무가 되었다. 조희룡의 작품은 남종문인화풍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의 회화관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격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파격적
이다. 이러한 화풍은 60대 초반에 형성된 것으로 그가 겪었던 유배의
고통이 내재된 감성을 격발시켰던 것으로 볼 수 있다.
3. 外記로 알린 여항인의 슬픔
조희룡은 서화가로 유명할 뿐 아니라 저술도 여러 권을 남겼다. 조
희룡의 저술로는 중인층을 중심으로 서민이나 방외인들에 대한 전기
인 壺山外記를 비롯하여, 산문집인 石友忘年錄, 유배 길에 오르던
때부터 해배되어 돌아오는 길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쓴 시집 又海岳
庵稿, 題畵集인 漢瓦軒題畵雜存, 유배지의 생활과 자신의 심경을
쓴 산문집 畵鷗盦讕墨, 유배기간 중 쓴 편지를 모은 壽鏡齋海外赤
牘, 조희룡의 편지글인 又峰尺牘 등 다수가 전한다. 저술 대부분이
임자도 유배지에서 완성된 것이어서 더욱 그러하겠지만 시, 산문, 편
210 韓國人物史硏究 제19호
지글 등 형식은 다르지만 그의 글 곳곳에는 궁벽한 처지에 있는 중인
지식인의 고뇌가 서려있다. 이외에도 유재건의 異鄕見聞錄, 古今
詠物近體詩, 안진석의 又玄齋詩鈔, 정수혁의 小隱稿 등 여항문
인들의 저술에도 유사한 감성을 담아 서문을 썼으며, 이는 여항인들
사이에서 그의 위치를 확인시켜 준다.
조희룡의 저술 하나하나가 중인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삶과 예술을
말하고 있지만, 그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맺혀있던 그 무언가를 후련하
게 쏟아낸 것이 호산외기이다. 호산외기는 최초의 중인층 전기집
이다. 그는 이를 1842년 그의 나이 54세 무렵 집필을 시작하여 2년 후
인 1844년에 서문을 썼고, 1854년 이후에 완성하였다. 호산외기에는
영조 때 사람 효자 박태성을 시작으로, 1854년에 사망한 고람 전기
(1825~1854)까지 18·19세기에 중서층으로 살면서 ‘기록할 만한 언행’
과 ‘전할 만한 시문’을 남긴 42명의 전기 39편이 실려 있다.75)
입전된 인물들은 조희룡의 관심영역과 계층의식이 반영된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다.76) 호산외기 서술에서 독특한 점은 그가 전해 듣
고 본 인물들의 이야기 뿐 아니라 작품 말미에 ‘贊曰’, 혹은 ‘壺山居士
曰’ 이라 하여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다. 이 평결부분에서 조희룡
은 이들의 처지에 공감하여 대신 분노를 표하기도 하고, 이들과의 특
별한 관계에 ‘나와의 교분’ ‘내가 보고 들은 사실’ 이라는 표현을 써
입전된 인물들의 특별한 일에 대한 ‘사실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77)
‘호산외기’라는 제목은 ‘호산’이라는 조희룡의 호에 ‘외기’라는 이름
75) 호산외기의 체제와 특징 및 의미에 대해서는 한영규, 市井史家의 시
선, 여항 藝人의 역사화 , 한영규, 앞의 책, 208~238쪽 참조.
76) 시서화부문의 문학·예술가의 비중이 높고, 양반층에 못지않은 인품과 덕
행을 지닌 일련의 학자적 인물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유협·신선·승려 등
불교와 도교에 까지 영역을 넓혀 그들의 재주와 지조에 일정한 의의를 부
여해주고 있다. 권진호, 호산외기 해설 , 조희룡, 호산외기 조희룡전
집, 6, 23쪽.
77) 한영규, 앞의 책, 208~238쪽.
붓 끝에 쏟아낸 울분 211
을 붙여 그가 이를 지은 의도를 명확히 하였다. ‘外記’ 혹은 外史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正史’와 구별되는 것으로, 정사에 포함되지 못한
주변인들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정사의 엄정함과 달리
사적이고 개별적인 입장을 담은 것이라는 뜻도 ‘외기’에 담겨있다.
여항인이었던 조희룡이 이를 지은 것은 표면상으로도 그 의도가 짐
작된다. 그는 서문에서 “비록 여항 약간인의 전할 만한 것이 있을지라
도 어디로 좆아 자료를 얻을 수 있겠는가? 세상의 大人巨筆이 있어 혹
좇아서 그 자료를 찾을 경우 행여 이 책에서 얻음이 있을 것이다. 이
를 위해 우선 이것을 보존해둔다.”고 하였다. ‘기록할만한 언행’과 ‘전
할 만한 시문’이 있는 여항인들의 존재를 기록해 둠으로써 미래에 ‘정
당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는 뚜렷한 역사의식의 소산이었다.78)
그는 옛사람의 언어와 행동이 후세에 전해진 것은 “다 큰 인물들의
큰 붓을 빌린 뒤에야 전하게 된 것”이라며 인물묘사의 전범을 사마천
의 사기 열전 에 두고 있다. “사기 열전 에 등장하는 극맹, 곽
해, 과부인 淸과 白圭의 무리들은 뒷골목의 유협생활을 하는 사람이거
나 돈벌이하는 부류들이다. 이들은 언어와 행실이 가히 전할 만한 것
이 없지만, 사기의 글을 읽고 그 사람됨을 상상해 보면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고 밝히고 있다. 어쩌면 전하지 않을 수도 있는 협
객이나 과부의 일이 지금 살아있는 사람처럼 생생하게 읽히는 것은
사마천의 큰 붓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비록 사마천처럼 큰 인물은 아니어도 그러한 소임을 맡게
된 것은 나름대로 느끼는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79) 호산외기를 쓴
작가로서의 현실적 입지와 창작의도를 그는 1862년에 쓴 유재건의
이향견문록 서문에서 더 명확히 밝히고 있다.
“구룡연, 만물상, 수미봉, 옥경대 등의 여러 경치는 금강산 중에서도
78) 권진호, 앞의 글, 22쪽.
79) 호산외기서 , 조희룡, 호산외기 조희룡전집 6, 30쪽.
212 韓國人物史硏究 제19호
뛰어난 것이지만, 한 언덕 한 구렁이 혹은 기이한 경치 혹은 경치로 특징
이 있는 것들에 이르러서도 만약 이름을 붙여 널리 전파한다면 위의 구
룡연·만물상 등의 대열에 낄 수 있을 터인데, 모두 덮여지고 가리어져서
거친 수풀과 우거진 넝쿨 사이에 파묻혀진 것이 많다. 이를 보고 생각하
건대 사람 또한 이와 같다. 館閣에서 날개를 펼쳐 文明을 빛내고, 廊廟에
서 위의를 갖춰 玉燭을 조화함으로써 六經에서 우러나온 것이 모든 민생
에 파급되는 것이니, 이러한 분들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저 여항의 사람
에 이르러서는 칭찬할 만한 經術도 勳業도 없는 것이고 혹 그 언행에 기
록할 만한 것이 있으며, 혹 그 시문에 전할 만한 것이 있더라도 모두 적
막한 구석에서 초목처럼 시들어 없어지고 만다. 아아 슬프도다! 내가 호
산외기를 지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80)
조희룡은 십년 전에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본 이름난 경치와 이름
없는 언덕들에서 깨달은 바를 이향견문록 서문을 통해 드러냈다. 지금
은 이름이 없지만 이름난 봉우리와 다를 바 없이 빼어난 언덕과 봉우
리들도 많은 것을 보고 자연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그러하다고 하였다.
이름 없는 언덕들 가운데서도 빼어난 것 혹은 그윽한 것 같은 여항의
인물들이 곧 호산외기에 실린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신분이나 명성의
고하를 떠나 개개인의 가치와 의미를 읽어내려 한 것으로, 이러한 인
식의 저변에는 여항인으로서의 현실적 불만이 깊게 내재되어있다.
그런데 호산외기의 서문과 이향견문록의 서문은 비슷한 내용의
전기집에 동일인이 쓴 것임에도 약간은 다른 입장을 볼 수 있다. 호
산외기 서문에서는 사마천의 사기 열전 처럼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후세에 전한다는 사관으로서의 임무에 더 의미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향견문록 서문은 입전한 인물들이 다양한 능력에도 불구
하고 진정으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비분의 감정이
더 노골화 되어있다. 여항인의 영물시집에 쓴 서문 겸산당영물근체
서 에서 “나 또한 여항인”이라고 했던 것처럼, 그도 스스로 갖는 자부
심에 비해 이름을 얻을 수는 없는 처지였기에 이들의 처지에 더 공감
80) 이향견문록서 , 조희룡, 수경재해외적독 외 조희룡전집 5, 168쪽.
붓 끝에 쏟아낸 울분 213
하였고, 안타까운 마음에 호산외기를 지은 것이라는 뜻이 더 강하
다. 여항인들의 처지에 비분강개한 마음을 가졌던 것은 젊은 시절부터
였기에 일찍이 호산외기의 저술을 시작하였겠지만, 그러한 심사를
12년이 지난 이향견문록의 서문에 더 절절히 적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사이에 유배를 겪으며 느낀 불평등이 강렬한 분노 표출의 촉매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시기의 전후를 떠나 조희룡이 중인들의 전기를 써 남기고자 했던
가장 적실한 뜻은 “모두 적막한 구석에서 초목처럼 시들어 없어”진다
는 절박함이다. 여기에는 소수의 사대부들에 의해 주도되는 현실 제도
에 대한 중인층의 울울한 심사와 반발감이 서려있다. 그는 작가적 감
성으로 자기시대의 그늘을 감지하고 이를 대변하고자 호산외기를
쓴 것이다.81)
조희룡의 호산외기를 이어 震彙續攷(1854~1862), 里鄕見聞錄
(1862), 熙朝逸事(1866), 逸士遺事(1918) 등 이와 유사한 중인전기
집이 출간되었다. 중인들의 전할 만한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연이어
발간되는 변화의 선구에 조희룡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Ⅳ. 맺음말
여항문인화가 조희룡의 삶과 예술을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던
슬픔, 분노와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물론 조희룡의 삶이 전반적으로
우울하고 힘겨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신분의 제약이 있었다고는 하나
시서화에 두루 능하여 여러 문인 친구들을 사귀었고, 경제적으로도 풍
족하였으며, 자손들도 있어 그다지 쓸쓸한 삶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항인으로서 그의 삶과 예술에 주목한 것은 이 글이 단순히 조희룡
81) 한영규, 앞의 책, 163쪽.
214 韓國人物史硏究 제19호
의 전 생애를 서술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19세기라는 격동의 시기를
산 여항 지식인으로서 느낀 고뇌와 아픔에 더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
다.
여항문인화가로서 조희룡은 중인으로서의 신분적 자각이 철저하였
다. 중인들의 시사인 벽오사를 중심으로 시사활동을 하였으며, 여항화
가들의 좌장으로서 묵장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회화예술의 독자적 의
의를 강조하고, ‘수예론’을 통해 전문화가로서의 특별한 재능을 중시
하였으며, 성령론에 입각하여 창작자의 眞情과 개성을 표출할 것을 주
장하는 독자적 예술관을 가졌다. 남종문인화풍의 세계를 견지하면서
도 격조보다는 예술가의 감정표출을 더 중시하며 자유로운 회화세계
를 지향한 그의 독특한 회화관과 화풍은 19세기 조선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대변하는 것이다.
조희룡의 특징적인 화풍은 60대에 완성되었다. 한 평생 그림을 그린
화가로서 60대 무렵이면 화풍이 가장 무르익을만한 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63세에 겪었던 유배의 아픔은 그의 삶과 예술을 심화시키는
중요한 계기였다고 본다. 3년여에 걸친 유배기간에 그는 그곳에서 느
낀 심정을 글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마음껏’. ‘미친 듯’ 붓을 휘둘러
‘먹을 쏟아 붓는’ 화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이 ‘손가락 사이에서
터져 나오듯’ 가슴속 울분도 터져 나와 매화가 되고 난이 되고, 대나
무가 되었으며, 돌이 되고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가기도 하였다.
조희룡의 ‘여항인으로서의 울분’은 그의 예술의 원동력이었다. 사대
부들과 달리 여항인이라는 신분이 역으로 그림에 대한 자유로운 사고
를 가능케 한 힘이 되었으며, 유배의 아픔은 그의 삶과 예술을 심화시
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로써 유배생활 또한 예술로 승화시켜
그의 회화일생을 대표하는 역작을 유배 중에 창작해내었다. 그러한 그
의 화풍은 당시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쳐 19세기 화단을 역동적이고
탐미적인 회화세계로 이끌었다.
조희룡이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퀴나스가 말한 것처럼 자신
붓 끝에 쏟아낸 울분 215
은 문인이자 화가로서의 자부심에 차 있었지만 그를 대하는 세상은
냉정하기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희룡은 울분을 견디기 위해 붓
을 들어 미친 듯이 긋고 칠하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글의 말미에
늘 ‘웃을 笑’를 썼다. 창작의 기쁨에 겨운 웃음도 있었으나,82) 실없는
소리를 해놓고 “한 번 웃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고서도 어찌
할 도리 없으니 “웃을 수밖에요”라고 했던 허탈한 웃음이 있다. 차별
과 배제의 아픔을 겪을 때마다 그는 “한 번 웃을 수밖에” 없었고, 그
웃음은 또 화사한 매화로 태어났다.
조희룡은 여항인으로서 신분의 한계에서 오는 울분을 개인적 차원
에 두지 않고 자신이 가진 재능을 이용해 사회적인 문제로 드러냈다
는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 그의 많은 저술에는 그의 여항인으로서의
우울한 심사가 표현되어 있지만 빼어난 재능이 있는 중서층 인물들의
전기집인 호산외기를 써서 이들의 행적을 후세에 알린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조희룡이 알린 울분은 당시 양반사대부가 아닌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러 형태로 느낄 수밖에 없었던 문제에서 기인하기 때문이
다.
여항문인화가, 조희룡, 수예론, 울분
논문투고일 : 2013. 2. 8. / 논문심사완료일 : 2013. 3. 7.
주제어
82) “명리 외에 다행히 그림 그리는 한 가지 일이 천지간에 있어서 나로 하여
금 그 일에 일생을 소견케 하니 마음에서 얻어 입으로 나오는 것이 웃음
이다.” 조희룡, 화구암란묵, 조희룡전집 2, p. 46.
216 韓國人物史硏究 제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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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Resentment Expressed Through Painting -
Jo Heeryong's Life and Art as a Common
Literary Painter
Lee, Seonok
This study looks into the life and art of Jo, Heeryong(趙熙龍, 1789~
1866) who led the literary trend of the 19th century as a common painter,
focusing on his resentment to society. He was completely aware of his status
belonging to the commoners. The commoners were actively engaged in writing
poetry centering on Byeokosa(碧梧社) which was a place for literary activity
club, and the common literary painters were the center of the club.
Jo Heeryong emphasized independent meaning of painting art and special
talents of specialized painters based on ‘The Theory of Handcraft’ Suyeron(手
藝論). Also, he had a unique point of view on art which suggests true
representation of individuality based on Seongryong Theory(性靈論). He put
more emphasis on expression of painter's feeling rather than style while
adhering to Namjong Literary Painting Style(南宗文人畵), and spoke for a
new tendency of Joseon painting circle in the 19th century as he had the
unique point of view on painting while pursuing for a free painting style.
His resentment as a commoner became energy for his art. It inspired him
to think freely for his painting and pain caused by exile became an important
chance to deepen his life and art. He sublimed painful experience of the exile
as a commoner into art and created masterpieces during the exile. His
붓 끝에 쏟아낸 울분 219
painting style influenced painters of the time and led the 19th century
painting circle to dynamic and esthetic painting world.
His writing revealed depressed feeling as a commoner. In particular, he
wroteHosan Ouiki(壺山外記), a collection of biographies of common people
who were unknown though they were talented, through which he told their
achievements. It has a great meaning in that he promoted his resentment
caused by status differentiation to one of social issues.
Resentment, Jo, Heeryong, Common literary painters, Theory of
handcraft, Sooye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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