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27. 01:15ㆍ美學 이야기
조희룡 미술 이야기
매화에 미친 조선의 문인화가 조희룡의 일생을 살펴보는 책. 조희룡은 조선 후기에 들어온 중국의 문인화를 이 땅에 정착시켜 조선문인화를 창안한 인물이다. 사대부적 여기(餘技)로 존재하던 문인화를 본격적이고 전문적인 예술세계로 독립시켜 새로운 세계로 존재하는 예술의 독립과 자율의 완전한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는 산수와 함께 사군자를 잘 그렸으며, 특히 매화를 즐겨 그리며 매화에 골몰했다.
이 책은「조희룡 문학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경성대 이성혜 교수가 지속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조희룡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조명한 평전이다. 제1부에서는 조희룡 문학예술의 성과와 의미를 총체적으로 제시한다. 제2부에서는 조희룡의 문학론을, 제3부에서는 조희룡의 화론을, 제4부에서는 조희룡의 예술론을 다루고 있다.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종이에 담채 106.1cm x 45.1cm 간송미술관
<매화서옥도〉는 조희룡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 독특한 화풍이 주목된다.
눈이 내리듯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깊은 산골에 둥근 창문의 작은 집이 한 채 있고,
그 안에는 책이 쌓인 책상을 마주한 선비가 앉아 있다.
조희룡은 김정희의 제자로 글씨도 추사체와 비슷하게 썼는데,
이 그림에서도 마치 추사체의 글씨를 부스러뜨려 놓은 것 같은 서예적인 필치를 읽을 수 있고,
거칠고 분방하게 찍어 놓은 점들이 매우 특이하다.
창이 둥근 집의 모습은 《개자원화전》 등 화보에 나오는 집의 모습과 흡사하다.
이러한 화풍은 그의 제자라 할 수 있는 전기(田琦)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며,
이같은 특이한 구성이나 필치는 후에 전개되는 이색화풍과도 연관된다.
홍매도 / 조희룡, 지본수묵 16.6*21.7cm, 서울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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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룡(趙熙龍 1789~1866)은 조선말기의 화가로 본관은 평양이며 자는 치운, 호는 우봉·석감·철적·단로·매수 또는 호산으로 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서울출생이고 조선 후기의 중인 문인서화가로 오위장을 지냈다. 추사 김정희의 문인으로 김정희를 무척 따랐던 그는 특히 추사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림은 난초와 매화를 특히 많이 그렸고 국립 박물관에 홍매화가 소장되어 있다. 석우망년록 이라는 자서전적인 저술과 당시 미천한 계층 출신으로 학문, 서화, 의술, 등에 뛰어난 인물들의 행적을 기록한 호산외사를 남겼는데 이는 조선시대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헌종의 명을 받아 금강산의 명승지를 그렸으며, 1854년 전라도 임자도로 유배되었다. 대표작으로 매화서옥도를 비롯하여 사군자 8첩 병풍·홍매대련·묵죽 8첩 병풍·묵란 등이 있으며, 저서로 중인전기집인 호산외기와 귀양시의 기록인 해외란묵, 회고록인 석우망년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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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룡의 서화예술은 형식과 내용을 고루 갖춘 회화세계를 이룩했다.
그는 고고한 선비의 높은 정신적 사유를 표출하려는 문인화(文人畵)의 사의(寫意)에 반발하여
사의에 형식을 보태고 기예와 재예에 학문의 기운을 더했다.
그리하여 사대부적 여기로 존재하던 문인화를 본격적이고 전문적인 예술세계로 독립시켰다.
추사 김정희는 우봉 조희룡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아울러 우봉의 글씨는 추사와 구별이 어려울만큼 닮았다. 이 점 또한 추사의 제자임을 입증하는데 손색이 없다.
그런데 여기에 의문이 있다.
우봉이 추사의 복심으로 지목되어 유배를 가서는 추사에게 단 한통의 편지도 쓴 편지나 시구가 없다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추사에 대한 기록 자체가 그의 만년에 지어진 『망년록』에 시시껍절하게 언급한 정도이다.
이 점은 추사도 마찬가지다. 다음 글이 전부이다.
‘난초를 치는 법은 예서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듯이 문자의 향기와 서권의 정취가 있은 다음에야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난을 치는 법은 그림 그리는 법칙대로 하는 것을 가장 꺼린다.
만일 그림 그리는 법칙을 쓰려면 일필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조희룡 같은 무리는 나에게서 난초 치는 법을 배웠으나 끝내 그림 그리는 법칙 한 길을 면치 못했으니,
이는 그의 가슴 속에 문자의 향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이라는 시각예술은 현재성만을 그려낸다. 문화의 역사성은 화폭에 그려지지 않는다.
조희룡은 그림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화적인 심층과 철학적 깊이를 화폭에 더하기 위해 시를 쓰고 제화를 쓴다.
그러나 조희룡은 시각예술의 한계를 언어예술로 보완하려는 것일 뿐, 그림을 관념의 육화로만 이용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감각적인 회화시를 썼다.
그는 모든 사물을 화의(畵意)로 보기 때문에 외재한 현상을 내재적 이미지로 형상화함에도 역시 감각적이 된다.
배에 지는 노을 한 조각 실어
붉은 구름 없어지자 흰 구름 나네
바람 타고 노 젖는데 도리어 멈춰 선 듯
다만 푸른 산이 물 위를 달리네
창 안에 하늘빛 석 자나 넓고
유리창 한 면엔 가는 구름 가득 걸쳤네
지난해 동해를 지나던 일을 생각하며
누워서 고래 두어 마리 가는 것을 본다
시화일치(詩畵一致)는 소식이 왕마힐(왕유)의 시를 음미하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함으로써 단초를 열었다.
조희룡이 주장하는 시화일치는 그림으로 말미암아 시로 들어가는 유화입시(由畵入詩)이다.
은근하게 시의 이치를 증명해주지만
깨우쳐 줌에 엉성함이 부끄럽다
그림에 임하여 웃으면서 말했네
시에 들어가는 것 이 길로 말미암는다고
시 속의 일을 알려면
모름지기 먼저 그림을 배워야 하리
시를 짓는 방법에 대해서 묻는 사람이 있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할 뿐만 아니라,
구름이 흘러가고 비가 오고 새가 날고 벌레가 우는 모든 자연현상이 하나도 마음에 관섭되지 않는 게 없다.
길을 가거나 멈추거나 앉거나 눕거나 잠시도 잊지 않고 이 생각의 길을 따라가면 된다.
그림을 그리는 일도 평소 많은 독서와 깊은 사색, 그리고 삶에 대한 관조가 이루어져서 마치 구름이 가고
노을이 물드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렇지 않고 붓을 댈 때 오로지 기발한 생각에 의지해서 억지로 삐치고 그리면 제대로 이룰 수 없다.
자연스러움 속에 기발함이 녹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희룡 산문은
첫째, 길이 면에서 100자 내외이다.
둘째, 구어를 사용한다.
셋째, 의문과 감탄 그리고 문답형이 있다.
넷째, 내용 면에서는 일상적인 소재를 사용한다. 그리고 말의 재미를 찾으며, 말하는 방법은 뒤집기를 쓴다.
뿐만 아니라 해학적이며 이전의 가치관과 다른 관점을 갖는다.
특히 그의 문체는 다른 소품체와 다른 점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거두절미하는 글쓰기이다. 내뱉듯이 툭 던지는 말로 시작하여 뭔가 말할 만한 시점에서 그쳐버린다.
불가의 화두와 같다. 이러해서 저렇하다는 설명 없이 툭 던지는 말은 그 내면에 찌르는 침이 있다.
또 하나는 쉬운 언어와 짧은 말 속에 깊은 사유를 담아내며 환상적 기법에 의한 회화적 문체이다.
그림에는 문장과 학문의 기운이 있어야 하고, 글씨에는 금석정이의 기운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최고의 경지이다.
난초 또한 그림이지만 문장과 학문의 기운 외에 산림의 유정한 운치와 구학과 연하의 기운이 있어야 한다.
즉 예술에 대한 감각과 흥취가 있어야만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것이 올바른 요체이다.
이것은 그림을 하나의 독립된 예술 장르로 인정하며 전문 영역으로 파악한 것이다.
blog.daum.net/wongis/7089153 그 어느날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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