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룡 <호산외사>(1980)

2016. 4. 27. 01:22美學 이야기


          조희룡 <호산외사>(1980)                               
   석기자닷컴 2015.02.26 18:43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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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선시대 신분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한 중인, 서얼 등 여항인들의 삶을 소략하게 정리하고 평가한 글을 모은

귀중한 역사적 기록이다.

여기에 소개된 화가는 최북, 임희지, 김홍도, 이재관, 전기 등 모두 5명이다.

책에 원문이 실려 있지 않아 번역문과 짧은 감상을 모아 놓는다.


崔北

 

   崔北七七이니 도 또한 기이하다. , , , 나무를 잘 그렸는데 그림의 뜻이 푸르고 무성하였다.

향을 피워 놓고 깊은 構想에 잠기곤 하여 마침내 자기의 뜻으로 一家를 이룬 사람이다. 스스로 毫生館이라고 하였다. 사람됨이 激昻하고 오만하며 작은 절도에 스스로 구속되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어느 집에서 達官崔北을 가리키며 주인에게 향하여,

저기 앉은 자의 이 누군가?”하였다. 이 낯을 들어 達官을 보며 말하기를, “먼저 묻노니 그대의 은 누군가?”하였다. 그의 오만함이 이와 같았다.

금강산을 遊覽하다가 九龍淵에 이르러 갑자기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天下名士天下名山에서 죽으니 만족하다.”하고 못에 뛰어 들어 거의 구제하지 못할 뻔하였다.

貴人에게 그림을 요구하였으나 이루지 못하니 장차 그를 위협하려 하였다. 이 성내어 말하기를,

남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린다.”하고 드디어 한 쪽 눈을 찔러서 失明하게 하였다. 늙어서는 돋보기안경 한 쪽만을 낄 뿐이었다. 49하니 사람들이 七七이라고 하였다.


  壺山居士는 말한다.

北風이 맵구나. 王門의 광대가 되지 않았으니 한 것인데 어째서 스스로 괴롭힘이 이와 같은가.

 

(出處: 趙熙龍 著, 南晩星 譯 <壺山外史/里鄕見聞錄>(三星美術文化財團, 1980)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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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전공이었던 한문산문강독시간에 처음 접한 글이다. <금릉집>에 실린 최북에 관한 짧은 글도 함께 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워낙 과문했던 탓에 당시에는 최북의 존재가 생소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 도리어 스스로 책을 구해 읽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칠칠(七七)이란 자는 이름의 북() 자를 둘로 쪼갠 것이고, 호생관이라 함은 붓(그림)으로 먹고 산다는 화가라는 뜻이겠다. 달관은 직위가 높은 이른바 고위 관리를 일컫는다. 이 글을 보면 최북 또한 생전에 금강산을 다녀왔음을 알 수 있다.




林熙之

 

   林熙之는 스스로 水月道人이라고 하였다. 中國語 譯官으로서 사람됨이 慷慨하며 氣節이 있었다. 둥근 얼굴에 빳빳한 구레나룻, 키는 8이나 되었는데 깨끗한 풍채가 道人이나 仙人 같았다. 술을 좋아하여 혹 밥 먹는 것을 폐한 채 여러 날을 술에 취하여 깨지 않곤 하였다. 대와 난초를 잘 그렸는데 대는 姜豹庵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였으나 난초는 표암보다 더 잘 그렸다. 그림을 그리면 문득 水月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반드시 이어 붙였으며 혹은 畵題를 쓰는 일이 있는데 그 글이 簿錄과 같아서 알기 어려우며, 字畫이 기이하고 예스러워서 인간의 글자 같지 않았다. 笙簧을 잘 불어서 사람들이 와서 배우는 이가 많았다. 집이 가난하여 좋은 물건이라곤 없었으나 오히려 거문고거울벼루는 갖고 있었으며, 그 중에도 으로 된 옛 筆架는 값이 7千金이어서 집값의 나 되었다. 또한 姬妾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말하기를,

나에게는 꽃을 기를 동산이 없으니 이 사람을 좋은 꽃 한 송이로 본다.”고 하였다. 살고 있는 집은 두어 간에 지나지 않아서 빈 땅이라곤 반이랑에도 차지 않았건만 반드시 사방 두어 자 되는 못을 하나 판다. 못에 물을 얻지 못하면 쌀 씻은 물을 모아 부어서 물이 항상 가득하였다. 매양 못 가에서 휘파람 불고 노래하며 말하기를,

물과 달이 나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구나. 달이 어찌 물을 선택하여서 비치겠는가.”라고 하였다. 다른 서적은 간직하지 않고 오직 晉書 一部만을 지니고 있었다.

일찍이 배를 타고 喬洞으로 향해 가는데 바다 한 가운데 이르러서 暴風雨를 만나 거의 건너갈 수 없게 되어 배안의 사람들이 다 쓰러져 佛菩薩僧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그런데 熙之는 갑자기 크게 웃으며, 구름은 검고 물결은 희게 치는 사이에 일어나 춤을 췄다. 바람이 그친 뒤에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죽는 것은 누구나 한 번은 꼭 있는 常事이지만 바다 속의 暴風雨의 기이하고 光景은 쉽게 얻어 볼 수 없는 것이다. 어찌 춤추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웃 집 아이로부터 거위의 날개깃을 얻어 엮어서 옷을 만들어 가지고, 달 밝은 밤에 쌍상투를 틀고 맨발에 깃옷을 입고 笙簧을 가로 불면서 十字路의 거리를 걸어가니 巡邏軍이 보고 귀신이라고 하여 다 달아나버렸다고 한다. 그의 狂誕함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나를 위하여 돌 하나를 그려 주었는데 붓을 채 두어 번도 휘두르지 않았으나, 주름 잡히고 구겨지고 구멍 뚫리고도 精巧한 취미를 모두 갖추었다. 참으로 뛰어난 그림 솜씨다.


  壺山居士는 말한다.

이것은 다 太平한 세상에 있을 만한 사람이다. 滔滔한 온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이와 같은 사람을 볼 수 있을는지. 熙之의 바다 위에서 일어나 춤춘 것과 같은 일은 魄力이 확립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出處: 趙熙龍 著, 南晩星 譯 <壺山外史/里鄕見聞錄>(三星美術文化財團, 1980) 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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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지 편은 김억과 하나로 묶여 있어 여기서는 별도로 떼어내 정리했다. 저자는 임희지의 묵죽화가 표암 강세황에 견줄 만하고, 특히 난초는 표암보다 낫다고 까지 평하고 있다. 저자에게 돌그림을 그려준 일화에서 다시 한 번 그의 그림 솜씨에 대한 상찬이 더해진다.



金弘道

 

   金弘道士能이요, 檀園이다. 풍채가 아름답고 마음이 크고 넓어서 구속됨이 없으니 사람들이 신선 같은 사람이라고 지목하였다. 山水人物花草翎毛를 그려 神妙境地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으며 가장 신선의 그림이 뛰어났으니 皴察, 九染, 軀幹, 衣紋前人들의 수법을 踏襲하지 않고 스스로 天稟(천품)을 운용하니 靈妙하고 神粤(신월)한 도리가 소박하고도 서늘하여 크고 아름다움이 사람을 즐겁게 하는 藝術界別調이다.

正廟 때에 內庭供奉하였는데 한 폭이 그림을 올릴 때마다 문득 임금의 마음에 들었다. 일찍이 큰 벽에 粉堊(분악)을 장식하고 거기에 바다 위의 뭇 신선이 모여 있는 그림을 그리고 서서 붓을 風雨처럼 휘둘러 두어 시각도 채 못 되어 다 그려 놓으니 물은 어지럽게 파도쳐 언덕을 무너뜨릴 것 같고, 사람은 터벅터벅 걸어서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듯하여 옛날의 大同殿壁畵가 더 나을 것이 없었다. 金剛山이 있는 四郡의 산수를 그리라고 명하고는 각 고을에 을 내려 經幄之臣과 같이 대접하게 하였다. 대개 보통과 다른 특별한 은총인 것이다.

蔭補로 벼슬이 延豊縣監에 이르렀으나 집이 가난하여 더러는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파는데 매우 기이한 것이었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살 수가 없더니 때마침 돈 3천을 보내주는 자가 있었다. 그림을 요청하는 예물이었다. 드디어 그 중에서 2천을 떼내어 주고 매화를 사고, 8백으로 술 두어 말을 사다가는 同人들을 모아 梅花飮을 마련하고, 나머지 2백으로 쌀과 땔나무를 사니 하루의 계책도 못되었다. 그의 疎曠함이 이와 같았다.

 

   그의 아들은 良驥(양기)千里며 호는 肯園이다. 그림에 家法傳授한 바 있어 산수와 집과 수목을 잘 그리는데 아버지를 지나치는 眼目이 있다. 나와 더불어 친선하였는데 이제는 죽은 지가 이미 두어 해 되었다.


   贊하기를,

倪迂(예우)는 그림이 全人들보다 뛰어나고 瀟洒(소쇄)함이 티끌세상 밖에 나가니 江左의 사람들이 倪瓚(예찬)의 그림을 갖고 안 가진 것으로써 人品의 아존하고 비속한 것을 評定하였다. 나라 때에 이름난 화가들이 성대하게 일어났건만 雲林居士가 높이높이 뛰어난 것은 특히 人品이 높기 때문이었다. 檀園兢齋豪生館古松流水館 사이를 獨往獨來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러므로 人品이 높아야 그 筆法도 또한 높다고 하는 것이다.

 

(出處: 趙熙龍 著, 南晩星 譯 <壺山外史/里鄕見聞錄>(三星美術文化財團, 1980) 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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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났던 단원 김홍도는 위 본문에서 우봉 조희룡이 말했듯 도석화 분야에서 가히 따라올 자가 없었다고 한다. <간송미술 36 회화>의 저자 백인산 또한 이런 사정을 논하면서 단원의 득의의 분야는 단연 도석화라 했다.



李在寬

 

   李在寬元剛, 小塘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집이 가난하여 그림을 팔아서 어머니를 奉養하였다. 그림은 私淑한 바로 없는데 옛 법에 들어맞았으니 거의 하늘이 준 그림 재주라고 하겠다. 烟雲草木짐승벌레물고기의 그림이 모두 精妙境地에 들어갔으나 가장 초상화에 뛰어나 上下百年 사이에 이에 견줄 만한 그림이 없다. 日本 사람들이 東萊館으로부터 小塘翎毛를 사들여 해마다 빠지는 일이 없었다.

太祖御眞 한폭을 永興府璿源殿(선원전)奉安하였더니 丙申年 겨울에 도적의 훼손한 바 되었다. 丁酉年 봄에 原本慶熙宮에 옮겨 모시고 在寬에게 명하여 다시 模寫하게 하여 도로 本殿奉安하고, 在寬에게는 특히 登山僉使(첨사)除授하였다.


   贊하기를,

布衣로서 임금의 知遇를 만남은 千載에 드물게 보는 일이다. 임금의 초상을 다시 模寫한 것이 4百年 뒤의 일이니 아마 時期하여 탄생함이고 헛되게 난 것이 아니로다. 花鳥의 그림 一派가 또 섬오랑캐에게 있다.

일찍이 贈呈하여 이르기를,

 

彩筆은 일찍이 帝王肖像을 그리는 데 바치었고

꽃과 새의 그림은 이미 또 오랑캐의 땅에 전파되었네.

(彩筆昔曾供日角 花禽已復到蠻荒)

 

라고 하였다. 사실대로 적은 것이다.

 

(出處: 趙熙龍 著, 南晩星 譯 <壺山外史/里鄕見聞錄>(三星美術文化財團, 1980) 76~77)



田琦

 

   田琦瑋公, 古藍이다. 인물이 헌걸차고 빼어났으며 그윽한 情趣와 옛스러운 韻致가 왕성하여 唐時代의 그림 속의 人物 같았다.

그림을 잘 그렸으니, 山水煙雲을 그리면 그 蕭寥簡澹(수료간담)筆致가 문득 나라 때 그림의 妙境에 들어간다. 그의 그림의 의사는 우연히 그 경지에 도달한 것이니 을 배우지 않았으나 나라 南畵妙境에 들어간 것이다.

그가 를 지으면 기이하고 깊은 맛이 있었으니 대개 남이 말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의 眼目筆力은 압록강의 동쪽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나이 겨우 30세에 病卒하였다.


   壺山居士는 말한다.

古藍는 다만 當世에 짝이 적을 뿐 아니라 上下 百年을 가지고 할 만하다.

昨年 가을에 내가 남쪽으로 내려갈 때 나를 찾아와서 서로 헤어지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뜻을 보이더니, 어찌 뜻하였으랴, 이것이 마침내 천고의 永訣이 될 줄이야!

 

平生梅花訣 알지 못하여

가슴 속 모나게 얽힌 마음 괴로워 평안치 않더니

홀로 涪翁(부옹)을 향하여 妙理參與하여

오싹 차가운 맑은 새벽에 孤山에 이르네.

(平生不識梅花訣 胸裏槎牙苦未平 獨向涪翁參妙理 嫩寒淸曉到孤山)

墨汁을 휘몰아 草書를 쓰는데

반드시 鐵圈珠筆을 기다리지 않네

가물거리는 짧은 촛불 갈대 주렴 밑에서

銅坑山梅花 눈처럼 지는 꿈을 꾼다.

(墨汁縱橫當草書 不須珠筆鐵圈於 幢幢短燭蘆簾底 夢落銅坑雪霽初)

푸른 오얏 머리 가지런히 온 나무가 봄인데

五兄의 아름다운 글귀 맑고 새로움을 다투네

나지막 병풍을 둘러치고 新詩境地에 머무를 때

<巡檐索笑人> 읊은 杜子美 생각하는가

(靑李齊頭一樹春 五兄佳句鬪淸新 短屛圍住新詩境 憶否巡檐索笑人)

 

라고 하였다. 그윽하고 淡淡하여서 외울 만하다.

돌아보건대, 70老人인 내가 30少年의 일을 쓰는 것을 옛사람의 일을 쓰는 것처럼 하게 되었으니 이 일을 차마 어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이에 絶句 한 수로써 통곡한다.

 

티끌 세상의 남은 負債가 뜻이 전혀 외롭기만 하네

비록 土壤이란 心情이 없는 물건이라 한들

과연 이 사람의 열손가락을 썩혀 없앤단 말인가.

(自子遽爲千古客 塵寰餘債意全孤 雖云土壤無情物 果杇斯人十指無)

 

(出處: 趙熙龍 著, 南晩星 譯 <壺山外史/里鄕見聞錄>(三星美術文化財團, 1980) 9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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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살에 요절한 비운의 천재 고람 전기는 추사 김정희가 총애하는 애제자였다. 허나 단명했다는 점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이 거의 없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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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자서재 (15)


   유재건 <이향견문록>(1980)



석기자닷컴 2015.03.04 14:27






  우봉 조희룡이 서문을 썼다.

조희룡의 <호산외사>와 유사한 목적으로 씌어진 책이나,

전자가 철저하게 자신의 견문에 의존한 것과 달리

유재건은 개인 문집까지 샅샅이 뒤져 관련 기록을 정리한 점이 다르다.

전자는 체제 비판적 의식의 산물이나, 후자는 그런 의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도 차이가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섣불리 수긍하기 힘든 내용도 꽤 있어서 더욱 흥미롭다.

장생의 손가락 그림은 지두화(指頭畵) 즉 손가락 끝으로 그림을 그리는 기법의 대가였던 듯하다.

완역본이 아닌 까닭에 더러 빠진 것이 있기는 하겠으나,

여기에 소개된 화가들에 관한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는다.




畵師 李上佐 子 崇孝興孝, 孫 楨

 

  李上佐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山水畵人物畵는 한 시대에 가장 뛰어났다. 中廟가 특히 그를 圖畵署所屬으로 할 것을 하고 中廟御眞圖寫하게 하였다. 嘉靖丙午년에는 功臣像을 그리고 原從功臣으로 錄勳되었다.

 

그의 아들 崇孝伯達이니 그림을 잘 그렸으며, 아들 興孝仲順이니 또한 그림을 잘 그려서 明宗御眞을 그렸다.

 

崇孝의 아들 , 懶齋(나재)崔簡易에게서 詩文을 배웠으며 또 그림을 잘 그려서 中宗明宗 兩朝御眞을 그렸다. 5때에 붓을 휘둘러 중의 모습을 그린 것이 매우 잘 되었으므로 그의 叔父 興孝가 기이하게 여겨 傳家筆法을 가르쳤으니 10에 이미 大成하였다. 나이 12때에 金剛山 長安寺改築하였는데 그 山水天王 諸軀의 그림은 다 그가 그린 것이다. 震彙(진휘)續考 (185)


 

畵師 金鳴國

 

   畵師 金鳴國仁祖 때 사람이니 그의 氏族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스스로 蓮潭이라고 하였다.

그의 그림은 옛 것을 으로 하여 배워 얻은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얻어진 것이다. 人物畵水石을 가장 잘 그렸는데, 水墨淡彩를 사용하였으며 風神氣格로 하고, 절대로 세속에 유행하는 붉은 빛과 칠로 아름답게 꾸며서 남의 눈에 들려고 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사람됨이 疏放하고 諧謔을 잘 하였으며, 술을 즐겨하여 능히 한 번에 두어 말 술을 마신다. 그가 그림을 그릴 때면 반드시 大醉하여 붓을 휘두르면 붓은 더욱 奔放하고 뜻은 더욱 무르익어, 筆勢는 기운차고 濃厚하고 순수하여 神韻流動하는 것을 얻게 된다. 대개 그의 得意作醉後에 그린 것이 많다고 한다. 그의 집에 가서 그림을 요구하는 사람이면 반드시 큰 술독이 뒤따라야 하고 士大夫가 그를 자기 집에 맞아 가는 자는 또한 술을 많이 준비하여 그의 이 흡족하도록 마시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한 뒤라야 비로소 즐겨 붓을 잡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그를 酒狂이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이는 더욱 더 기이하게 여긴다.

일찍이 嶺南의 한 중이 大幅의 흰 비단을 갖고 가서, 冥司圖를 그려주기를 빌면서 고운 삼베 數十필을 예물로 주었다. 鳴國이 기뻐하며 받아서 그 베를 집사람에게 내어주고 말하기를,

이것을 술 사오는 資金으로 使用하되 나로 하여금 두어 달 동안 통쾌하게 마시도록 하라.”하였다. 얼마 뒤에 중이 와서 뵈이니 鳴國이 말하기를,

너는 우선 물러가서 나의 筆興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게 하라.”하였다. 이와 같이 한 것이 두어 번이었다. 하루는 痛飮하고 하게 되었을 때에 드디어 비단을 펴놓고 생각을 가다듬으면서 한참 동안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다가 한 붓으로 휩쓸어버리었다.

殿宇의 위치와 鬼物의 형용과 빛깔들이 森森하고 기운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머리털을 꺼둘러 앞으로 끌려가는 자, 끌려가 刑罰을 받는 자, 切斷되어 불에 태워지는 자, 찢어지고 갈려지는 자들이 있는데 거의 다 중들로 되어 있었다. 중이 보고 깜짝 놀라서 숨을 헐떡이며 말하기를,

아아 공께서는 어째서 우리의 큰일들 그르쳐 놓았습니까.”하였다. 鳴國이 두 발을 쭉 뻗고 앉어서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들 무리가 一生동안 하는 惡業은 세상을 의혹하게 만들고 백성을 속이는 일이니 地獄에 갈 자는 너희들이 아니고 누구이겠느냐.”하였다. 중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기를,

은 어째서 우리의 큰일을 그르쳐 놓았습니까. 원컨대 이것은 불살라버리고 우리의 베를 둘려 주십시오.”하였다. 鳴國이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 무리가 이 그림을 완전한 것으로 하고자 하거든 술을 더 사오라. 내 장차 너희를 위하여 고쳐 주겠다.”하였다.

중이 술을 사가지고 오니 鳴國이 쳐다보고 웃으면서 이에 잔 가득 마신 뒤에 醉氣에 의지하여 붓을 잡더니 머리털을 발갛게 깎았던 자에게는 머리털을 그리고 수염이 없는 자에겐 수염을 그리며, 緇衣(치의)를 입은 자와 衲衣를 입은 자에게는 채색으로 그 빛깔을 바꿔 놓으니, 잠깐 사이에 이루어져서 그림은 더욱 새로워 보여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기를 마친 뒤에 붓을 던지고 다시 크게 웃고 나서 잔 가득 마시었다.

중들이 둘러 앉아서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감탄하기를,

은 진실로 天下神筆입니다.”하고 절하고 갔다. 지금도 그 그림이 남아 있어서 沙門의 보물이 되었다고 한다.

鳴國이 죽은 뒤, 그의 門徒浿江 曺世杰이라는 가 있어서 그의 遺法하여 水墨畵, 人物畵로 이름이 있다. 그러나 그 神髓를 체득하지는 못하였다.

내가 15, 16되었을 때 어떤 衣冠家에서 그의 弟子라고 일컫는 자를 만나 蓮潭의 일을 대략 들었으며, 洞里의 늙은이에게서 冥司圖의 이야기를 들었고, 또 그의 遺墨을 보니 넓고 기이하고 卓絶하여서 그 사람을 想像할 수 있었다. 浣巖集 (186~189)


 

張生

 

   張生嶺南 사람으로 京師遊學하였다.

매번 술에 취하면 墨汁 두어 사발을 들이 마셔가지고 大幅의 종이에 뿜어놓고는 손가락 끝으로 뭉개서, 淺深大小에 따라서 松竹도 그리고 花草도 그리며 새짐승도 그리고 魚龍도 그리며 간혹 篆字隸書行草飛白을 만들기도 하는데 濃淡曲折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어서 보는 이가 그것이 손가락 끝으로 장난한 것임을 알지 못하였다. 秋齋紀異 (189~190)


 

不染子 金喜誠

 

   金不染子 喜誠仲益이니 벼슬은 泗川縣監이다. 그림을 잘 그렸는데 가장 眞影을 잘 그렸다. 豹菴 姜尙書가 일찍이 그의 畵帖에 쓰기를,

 

不染子 金君은 그림 잘 그리는 것으로 一代에 명성이 있었다. 그의 그림을 御覽에 바치면 곧 임금의 뜻에 들었다. 벼슬이 縣監에 그친 채 不幸早逝하였다. 그의 아들이 또한 家業을 잘 繼承하였으며, 그의 아버지의 遺跡收集하여 여러 권의 책으로 裝幀하였다. 軸中(축중)次韻하여 贈呈한다.

夫君의 뛰어난 聲譽 畵壇에 홀로 높았는데

絶世藝術을 그 어찌 짧은 나이에 한계를 지었는고

遺墨을 거두어 간직하는 착한 後嗣가 있으니

孝道스런 그 마음이 冥冥한 속의 을 위로하기에 넉넉하겠네.

(夫君妙譽丹靑 絶藝何如限短齡 遺墨收藏賢嗣在 孝心其足慰冥冥) (191~192)


 

畵師 秦再奚

 

畵師 秦再奚英廟 때에 그림으로 名聲을 독차지하였는데 가장 사람의 眞影을 잘 그렸다. 大宗伯 徐尙書가 일찍이 筵中에서 아뢰기를,

賊 睦虎龍을 공신으로, 그 화상을 그릴 때에 秦再奚가 굳이 사퇴하고 畵筆을 잡지 않으니 金一鏡의 무리가 거듭 공갈하였으나 再奚가 말하기를, “이 손이 이미 先大王睟容(수용)을 그렸는데 어찌 차마 다시 虎龍을 그릴 수 있는가.”하여, 지금까지 凜凜生氣가 남아 있습니다. 들으니 그의 손자가 빈궁하여 스스로 存續할 수 없다고 합니다. 청컨대 軍門相當한 벼슬자리를 除給하여 조금이나마 그의 忠義에 보답하게 하소서.”하였다. 君上이 옳다 하여 別付科에 임명하여 別軍職에 승진시켰다. 特別恩典인 것이다. (192)


 

復軒 金應煥

 

  復軒 金應煥永受니 벼슬은 尙衣別提, 召村察訪이다.

그림으로 세상에 명성이 높아 檀園 金弘道와 이름이 가지런하였다.

가장 山水를 잘 그렸으니, 正廟 戊申年에는 王命을 받들고 檀園과 함께 金剛山內外山을 고루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려서 그림의 묶음을 만들어 바쳤으니, 己酉年에는 또 嶺南을 고루 돌아다니며 명산을 죄다 그렸는데 그 畵帖大內에 간직하여 있다.

그때, 復軒檀園보다 낫다고 일컬었다.

그의 손자 和鍾도 또한 先業을 계승하여 그림을 잘 그렸다. (193~194)


 

古松流水館 李寅文

 

   李畵師 寅文文郁, 古松流水館이다.

少年時節부터 山水 그리기를 좋아하였다. 10數年工夫를 쌓는 동안 雨景을 그린 것이 많았다.

1조각 종이의 그림에도 깊고 멀기가 千里인 듯한 氣勢가 있어서 사람들이 嘆賞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내가 일찍이 內省에서 李公이 솔 그리는 것을 보았는데, 運筆하는 것이 능란하고 淋漓(임리)하여 70老人筆致 같지 않았다. 잠깐 사이에 다 그렸는데 그 서리고 굽고 높고 꿋꿋한 줄기와 말쑥하고 깨끗하고 푸른 잎들이 축축 늘어진 것이 逼眞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神筆이라고 일컬었다. (194)

 


兢齋 金得臣 子 建鍾夏鍾

 

  金兢齋 得臣賢輔復軒의 조카이다. 일찍부터 畵藝를 업으로 하여 人物翎毛를 잘 그렸다.

正廟가 일찍이 그 부채 그림을 보고 말하기를 金弘道와 더불어 伯仲하다고 하였다. 그때 鑑賞하는 이가 다 말하기를,

바로 吳顧境域에 들어가고 邊張局限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의 두 아들도 모두 잘 先業을 계승하였다.

建鍾大中, 松菴이니 肖像畵를 잘 그려서, 純廟晬容(수용)을 그리고 으로 監收官除授되었다. 임금이 일찍이 그의 아버지에게 下敎하기를,

너의 아들이 骨格非常하고 그림 재주가 일찍 이루었다.”하였다.

 

夏鍾大汝, 留堂이니 山水를 잘 그리는 것으로 명성과 稱譽가 있었다. (195~196)


 

畵師 張漢宗 子 駿良

 

   畵師 張漢宗廣臾, 魚蟹(어해)를 잘 그렸다. 少年時節에 숭어잉어자라 등속을 사다가 자세히 그 비늘과 껍질을 살펴보고 模寫하였다. 매번 그림이 이루어졌을 때에는 사람들이 그 逼眞함을 感歎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의 아들 駿良도 그림 솜씨가 또한 뛰어났는데 가장 魚蟹의 그림을 잘 그렸다. 대개 家庭에서 배워 얻은 것이다. (196~197)

 


畵師 李潤民 子 亨祿

 

   畵師 李潤民載化文房諸具를 잘 그려 上流家庭屛風障子 등은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는데 그때에 높이 뛰어남이 짝이 없다고 일컬었다.

그의 아들 亨祿도 또한 家業을 계승하여 精工極致를 이루었다. 나에게 그가 그린 數幅文房圖屛이 있었는데 매양 방에 쳐 놓으면 간혹 와서 보는 자가, 책들이 書架에 가득하다고 錯覺하다가 가까이 와서 보고는 웃곤 하였다. 精妙하고 逼眞함이 이와 같았다. (197)

 


畵師 金諟

 

   司圃 金諟國朝名畵이다. 일찍이 楓岳遊覽하여, 마음껏 外金剛內金剛을 보고나니 畵意가 가슴에 넘치었으나 그림 그릴 종이가 없어서 그릴 수 없었다. 歸路旅舍에서 한 선비가 견대 속에 많은 좋은 종이를 갖고 있는 이를 만났다. 司圃가 말하기를,

내가 그림을 약간 그릴 줄 압니다. 이제 內外金剛을 보고 매우 그리고자 하나 종이가 없습니다. 그대가 만약 두어 의 종이를 빌려 준다면 앉은 자리에서 곧 붓을 휘둘러서 그대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대의 의사가 어떠하십니까.”하니, 士人이 말하기를,

바야흐로 李玉山을 가 뵈옵고 그의 글씨를 받고자 하여 종이를 갖고 온 것이니 그대의 말에 좇을 수 없습니다.”하였다. 玉山栗谷의 아우 니 그곳에 살면서 글씨 잘 쓴다는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司圃失望한 모습으로 갔다. 士人이 가서 玉山을 보고 그 일을 이야기하기를,

先生의 글씨를 받기 위하여 좋은 종이를 많이 갖고 왔는데 길에서 遊山客을 만났더니 그림을 잘 그린다고 自稱하면서 종이를 청하였습니다. 可笑로운 일입니다.”하니, 玉山이 애석해하여 嗟歎함을 마지못하면서 말하기를,

金諟遊覽왔다는 말을 들었는데, 상상컨대 그림 構想이 가슴에 가득하여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絶世名畵이다. 名畵가 산을 보고 그리고자 하여 탄식하는 때에 만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대는 이 좋은 기회를 만나서 헛되게 지내버렸으니 可惜하다.”라고 하였다. 士人이 비로소 크게 한탄하였다고 한다. 左溪裒談(부담) (197~198)



2015-03-04 14:27:06

유재건 <이향견문록>(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