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룡의 생애와 예술(요약) 1.출생과 학습 조선 문인화의 세계를 연 화가 조희룡은 1789년 5월 경기도 양주(지금의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보낸 어린 시절은 영조와 정조 치하의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조선에는 진경 문화가 꽃피었다가 퇴락하고 있었다. 중국 대륙에서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서자 조선인들은 중국의 문화를 버리고 조선적인 것을 찾기 시작하였다. 고위사대부와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던 조선진경은 겸재 정선,단원 김홍도 등 대가들을 배출하면서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조선 진경은 지속되었던 문화쇄국으로 말미암아 정체에 빠지고 새롭게 유입되던 청의 발달된 문물로 인해 신선감을 잃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그 폐해로 말미암은 국운의 쇄락과 사회기강의 해이현상이 심화되면서 조선진경은 생명력을 완전히 소진하고 말아 1830년대에 이르면 그 명맥이 완전히 끊어지고 만다. 사회는 사치에 빠지고 타락과 방종이 극에 달하여 당시의 젊은이들은 조선사회가 나아갈 새로운 길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당시 전분야에 걸쳐 도입되고 있던 중국의 신문물을 섭렵하던 중 중국의 남종 문인화에 주목하였다. 진경(眞景)의 현장주의는 문인화의 관념세계로 대체되었고 진경(眞景)의 색정적 속기는 문인화의 고답적 이상주의로 해소될 수 있음을 발견하였다. 탈속한 정취를 전면에 내세우며 관념적이자 고답적 성격을 갖고 있던 남종 문인화에서 진경문화의 말폐현상을 극복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젊은이들은 문인화의 고답성이 조선 백성들의 영혼을 씻어 주리라고 믿었다. 탈속한 정취에의 열렬한 추종이 문인화 운동의 추진력이 되었다.
조희룡은 중국의 문인화가 도입되던 시기에 청년기를 보내며 시서화 삼절을 꿈꾸었다. 그는 당대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었다. 조희룡은 시공부와 서화골동의 수집에 몰두하다가 30세 무렵에 문인화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림을 공부하면서 '남의 수레 뒤를 따르지 않는다'는 '불긍거후(不肯車後)'정신을 견지하였다. 조희룡은 당시 모두에게 익숙하였던 '진경문화'를 답습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중국 남종 문인화에서도 중국 화법이 추구하는 이념과 중국대가들의 기법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서화 모든 분야에서 남이 열어놓고 닦아놓은 익숙한 길을 가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창조적 삶을 영위하였다. 2.작품세계 [매화도와 묵란] 조희룡은 10년이 넘는 고련을 통하여 매화와 난그림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중국 동이수와 나빙의 매화 기법에서 매화도를 시작하여 자신만의 개성을 가진 매화도를 창안하였다. 여섯자 크기의 대작 '장륙매화(丈六梅花)'를 창안하고 소략하였던 꽃을 그리던 데에서 수만송이가 어우러져 핀 화려한 그림으로 발전시켰다. 이어 매화의 상징을 추위를 이기는 선비의 정신성에서 부처의 대자대비로 탈바꿈시켰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더 나아가 매화줄기의 전체적 구도를 용으로 대체해 화려하고 격렬한 역동성을 부여하였다. 매화도 역사에 있어 조희룡 만큼 확실한 자기의 위치를 구축한 화가는 찾을 수 없다. 난 그림에 있어서는 중국의 이념을 배제하고자 했다. 나라를 잃은 중국의 한족들이 난 속에 기탁한 극심한 상실의 정서 대신 시를 통해 얻은 오언절구의 깊고 그윽한 즐거움을 표현하고자 했다. 시를 보편으로 규정하고 난을 외부로 표출된 미의 실체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자신의 이론이 구현된 난을 '경시위란(經詩緯蘭)'이라 정의했다. 난은 그윽한 아름다움이었기에 화가를 구속하는 삼전법이라는 난그림의 기본조차 종종 무시하면서 거침없고 자유스러운 그림을 그렸다. 또 예술은 즐거움을 찾는 행위였기에 뿌리뽑혀 신음하는 난은 그리지 않았고 고통을 멀리하였기에 시달려 바짝 마른 가느다란 잎 대신 살지고 통통한 잎을 그렸다.
[조선문인화] 조희룡은 중국 남종 문인화를 받아들였으나 화법과 이념에서 그들을 따르지 않고 대신 조선인의 감각을 중시하였다. 조선을 전면에 내세우며 우리의 산하와 토봉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그린 시대를 조선진경이라 하듯 조선인의 감각을 중시하는 문인화를 [조선문인화]라 한다. 조희룡은 중국 남종 문인화에서 난과 매화를 배워왔으나 중국인들의 화법과 정신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조선문인화의 단초는 남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는 조희룡 특유의 '불긍거후'라는 제작태도에 의해 마련되었다. 이후 조선문인화는 조희룡이 친구들과 그를 따르는 후배들을 모아 결성한 벽오시사(碧梧詩社)에 의해 주도된다. 조희룡은 벽오사에서 전기, 유재소, 유숙 등 아들뻘에 해당하는 후배화가들을 지도하고 그들과 교류하면서 생경한 중국 문인화를 씹고 소화하였다. 그들의 그림은 조선인의 미감각에 충실한 그림이었다. 전기는 최초의 화랑이라 할 수 있는 '이초당'에서 그림의 감정과 중개활동을 통해 그림의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는 한편 '원 4대가'의 그림에서 황한한 맛을 배제하고 조선인이 사랑하는 순수백의 정감을 최대한 발현된 그림을 그렸다. 유숙은 도화서의 그림과 진경산수와 중국문인화를 섭렵하면서 각자의 장점을 두루 수렴하였다. 벽오사 화가들은 전기가 마련한 그림시장을 통해 중국의 남종 문인화를 조선인의 미감각에 맞추어 나갔다. 남종 문인화에 조선의 고유미가 강조되어갔다. 벽오사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화가들에 의해 '조선문인화'가 첫발을 뗀 것이다.
조희룡은 그림 뿐만이 아니라 역사의식도 강했다. 그는 자신의 역사관을 반영한 역사서 '호산외기'를 저술했다. 호산외기에는 오늘날의 '시민'에 해당하는 '위항지사'들의 전기가 수록되어있다. 조희룡은 위항지사 중에서도 특히 시서화 삼절들의 독특한 성격에 주목하고 그것을 강조하였다. 시서화를 지향하는 그들은 시나 그림 모임을 통해 서로 교류하면서 서로가 스승이 되고 서로가 벗이 되어 지적 자극을 주고 우애를 나누었다. 당시 사회가 개인의 출신성분을 중요시하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그것을 별달리 문제삼지 않았다. 그들은 탈신분적 교류를 일상화하면서 청나라의 문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조선진경의 특수성과 퇴폐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탈신분성과 새로운 문화운동이라는 특수성을 가진 시서화 삼절들은 사회변혁을 시도하고 있었다. 조희룡은 역사공간 속에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이런 특수 집단이 형성되고 있음을 감지하고 이들의 전기를 호산외기에 담았다.
반면 김정희는 중국 정통 남종화의 이념에 충실했다. 김정희는 청년시절 연행을 통해 중국의 신문물에 접한 이후 평생을 통해 중국의 문예를 조선에 도입하였다. 조희룡과 김정희는 조선예술의 국제화를 추구라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수단으로서 중국의 남종 문인화를 선택했다. 그러나 김정희는 '서권기 문자향'이라는 중국 문인화의 이념미를 고집한데 반해 조희룡은 그림에서 중국식 이념을 탈색시키고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등 수예론(手藝論)을 강조함으로써 서로에 대해 지향점을 달리했다. 그러나 그들은 1848년 12월 김정희가 제주유배에서 풀려나 조희룡을 만나면서 점차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1849년 조희룡으로 대표되는 조선문인화의 세계와 김정희로 대표되는 정통 중국 남종 문인화의 세계가 한자리에 모인다. 당대 서예를 대표하는 8인과 그림의 대표임을 자임하는 8인이 조희룡과 김정희로부터 자신들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받기로 하였다. 가 당대 묵장(墨場)의 양대 영수였음을 증명한 것이었고, 조희룡을 추종하는 이들과 김정희를 추종하는 이들간의 모임은 당시 분열적 양상을 보이던 예림(藝林)이 통합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미술계의 소리대동(小異大同)을 확인하는 화합의 자리였다.
그러나 예술계의 대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예기치 않았던 사건으로 깨어지고 침체의 길로 접어든다. 조희룡과 김정희는 1851년 조정의 전례문제에 개입하였다가 각자 전라도 임자도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조치 되고 만다. 묵장의 실질적 영수로 군림했던 양 영수의 유배로 인해 활발하던 문예활동은 시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희룡은 유배지에서 절정의 기량에 이르게 된다. 조희룡은 유배지 적거지에 '만구음관(萬鷗唫館)'이라는 편액을 붙이고 그 속에서 외로움과 고통을 잊기 위해 창작활동에 몰두했다. 당호가 있는 그의 그림 19점 중 8점의 대작그림이 이 때 나올 정도였다. 묵죽법을 새로 발전시켰고 괴석도 그림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나아가 중국의 대가 '곽희'가 만든 산수화의 개념을 수정하여 조선의 산수화에 맞는 개념으로 정리하였다. 이론의 정립과 절정의 기량으로 유배 시기 조희룡의 그림인생은 완숙의 경지에 접어들었다.
또 유배지에서 그의 대표적인 저서를 집필하였다. 섬에서 겪은 일들과 자신을 유배 보낸 사람들을 원망하다가 마음속에서 화해한 내용을 기록한 산문집 ‘화구암 난묵’, 해배 될 때까지 자신의 마음의 행로를 기록한 시집‘우해악암고(又海嶽庵稿)’, 가족들에게 보낸 절실한 사랑과 친구들에게 보낸 우정의 편지글을 모은 ‘ 수경재 해외적독(壽鏡齋 海外赤牘), 치열했던 예술혼을 담은 이론서 ‘한와헌제화잡존(漢瓦軒題畵雜存)이 그것이다. 유배는 개인적으로는 불행이었지만 우리가 조희룡을 알게 된데는 이러한 저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는 점을 감안할 때 역설적으로 그에게 행운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853년 조희룡은 3년간의 임자도 유배생활을 마감하고 돌아온 조희룡은 공식생활을 극도로 자제하고 은거생활을 영위하였다. 은거지에서 사람들과의 접촉을 회피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일생을 정리하는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을 탈고하였고 유재건이 가져온 '이향견문록’과 '겸산당 영물근체시(兼山堂 詠物近體詩)'의 원고를 보고 서문을 잡아주었다. 두 권의 서책은 위항지사들의 전기와 시를 모은 것으로 위항지사들에 대한 의미부여의 작업이었기에 스스로 '위항지사'임을 자부하던 조희룡으로서 마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희룡은 시와 역사와 그림에 평생을 바쳤다. 그러기에 조희룡을 시사화(詩史畵) 삼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말 우리민족에게 조선진경 시대에 이어 조선문인화 시대라는 문화적 경험을 하게 한 조선문인화의 영수 조희룡은 1866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 조선은 곧바로 외세의 침탈에 시달렸고 타율에 의한 문화개방에 나서게 되었다.
조희룡의 생애와 예술(본문) 《차례》 1. 출생과 성장 2. 학습 -시공부 -그림의 시작 -조선 진경 -대안의 모색 -강설당(絳雪堂) 3. 불긍거후(不肯車後)의 작품세계 -불긍거후 -장륙매화(丈六梅花) -도화불사(圖畵佛事) -경시위란(經詩緯蘭) -수예론(手藝論) 4. 조선문인화 -벽오사의 결성 -조선문인화(朝鮮文人畵)의 탄생 -국토 순례와 조선에의 개안 -'호산외기(壺山外記)'의 저술 -조선문인화(朝鮮文人畵)와 중국 정통 남종 문인화의 충돌 5. 유배기 그림 세계의 완숙 -노년의 조희룡 -임자도 유배생활 -유배지에서의 시와 그림 -괴석도 -유배지에서의 집필활동 -곽희의 산수화 정리 -유배지에서의 집필활동 6. 유배기 후의 은거생활 -조희룡과 위항지사 -조희룡의 사망 -조선 문인화의 흐름
1. 출생과 성장 조희룡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의 편저자 오세창(1864-1953)이 '묵장(墨場)의 영수'라고 칭했을 정도로 추사 김정희와 함께 화단의 중심인물이 되어 조선말 우리나라의 문인화단을 끌어갔던 인물이다. 조희룡의 자는 이견(而見), 치운(致雲), 운경(雲卿) 등이며 호는 우봉(又峰), 호산(壺山), 범부(凡夫), 철적도인(鐵 道人), 단로(丹老), 매수(매ㅁ), 매화두타(梅花頭陀) 등이 있다.
그는 1789년 5월 9일 서울 노원구 600번지 각심(恪心)마을 부근에서 태어나 자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희룡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국하는데 공을 세운 조준의 15대 손으로서 문학적 소양이 있던 아버지 조상연(趙相淵)과 어머니 전주 최씨(全州崔氏)가 낳은 3남1녀 중 장남이었다. 그의 집안은 그의 고조부 조근항이 정3품 당상관이던 첨지 중추부사를 지냈고 증조부 조태운은 문관 정5품인 통덕랑, 할아버지 조덕인은 '인산첨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버지 조상연은 '풍요삼선'이라는 여항시집에 시가 실릴 정도로 관직과 학문의 배경이 있던 양반집안의 자제였다. 조희룡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상당한 여유가 있었다. 젊은 시절 "서호에서 삼일간 놀이를 하면서 함께 노닐던 사람들과 산대를 잡고 기생들에게 뿌린 돈이 삼만전에 이르렀다. 이를 궁한 친척이나 가난한 친구에게 베풀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다"라고 후회를 하는가 하면 그의 친구 유최진이 "조희룡이 새로 지은 집이 만칸에 이른다"고 과장하여 술회하고 있을 정도였다.
2. 학습
- 시공부 조희룡이 보낸 어린 시절은 영조와 정조가 '나라를 밝게 다스려 평화가 계속 되던' 이른 바 '소대(昭代)의 시절' 이었다. 사대부는 아니었으나 어엿했던 집안의 내력과 상당한 재력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조희룡은 옷조차 이기지 못할 정도로 허약한 소년이었다. 열살 무렵 첫 혼담에서는 요절할 것 같다 하여 퇴짜를 맞고 말았다. 그러나 조희룡은 자신보다 두 살 연상의 진주 진씨와 결혼하게 되었다. 조희룡의 유년기 학습과 관련된 자료는 없지만 예닐곱살 때 인근 마을의 서당에 보내져 기초교육을 받고 향교를 마친 다음 조선의 정규 학제에 따른 체계적인 고급교육을 받아야 했으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조희룡은 성균관이나 서원에 진학하지 않은 것 같다. 만일 성균관이나 서원으로 진학하였다면 이후 벗들과의 교류에 있어 그때 사귄 친구들이 당연히 나와야 할 것이나 그 많은 기록에도 불구 교육을 받은 성균관이나 서원에 대한 내용과 그때의 친구들이 거론되지 않고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조희룡이 청년기 이후 강력한 불교와 도교적 성향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학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이나 서원보다는 불교사찰에서 개인적 교육을 받았을 개연성을 높게한다. 조희룡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도 유교교육의 최고 본산인 서원의 학생들을 놀리는 내용이어 이러한 추론을 더욱 뒷받침한다. 그 기록은 조희룡이 스무살 때(1808년) 도봉산 천축사에 단풍놀이를 갔을 때의 일화이다. 화가 이재관(李在寬)과 시인 김예원(金禮源)이 그를 동행하였다. 이재관은 조희룡보다 여섯 살 위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봉양하는 처지였다. 집이 가난하여 생계가 막막하였으나 다행히 그림에 재주를 가지고 있어 그림을 팔아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반면 김예원은 시를 좋아하였고 상당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유명한 시인이자 화가였던 것으로 보아 아버지의 강력한 영향하에 자랐던 청년으로 보인다. 그들이 천축사 절 아래 도봉서원(道峰書院)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었다. 조희룡 일행은 서원에 들어가 하룻밤 묵기를 청하기로 하였으나 서원의 학생들은 일행을 무뚝뚝하게 맞았다. 자고 갈 방 한칸만 내주었을 뿐 끼니때가 되었음에도 밥 먹어보라는 말 한마디 없었다. 조희룡이 일어나 이재관(李在寬)에게 말하였다. "밥도 굶은 채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으나 그래도 연하의 기운이 요기가 될만하니 시화로 기록해 둡시다." 이재관(李在寬)이 그림에 조희룡이 "가을 산에서 시를 찾다"(秋山尋詩圖)라고 제목을 붙이고 제화시(題畵詩)를 썼다.
"우연히 천축사를 찾아가다 제향 받드는 서원에 와 문을 두드렸다. 이번 발걸음이 밥 얻어 먹자는 것 아니니 연하로 벌써 배가 불렀구나." 偶向鐘魚地 來鼓俎豆家 此行非乞食 已是飽煙霞 도봉서원의 학생들이 조희룡과 이재관의 솜씨를 보고 사죄하였다. "찾아오는 유람객으로 서원이 여관처럼 되어버려 정성껏 대접할 수 없었습니다. 어찌 신선들께서 행차하실 줄 알았겠습니까." 그들은 서원의 종을 시켜 저녁상을 차려 올리게 하며 정성껏 대접하였다. 조희룡이 이들을 놀렸다. "우리들은 신선으로 인간세상을 놀러 다닌지가 오백년이나 되었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는데 그대들에게 들키고 말았구려" 조희룡이 돌아와 친구들에게 서원의 일을 이야기를 하자 모두들 배를 잡고 웃었다. 조희룡의 10대 시절 친구들이 돌연 출현하고 있는 도봉서원(道峰書院) 일화는 조희룡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알려 준다. 우선 스무살의 조희룡이 시를 능숙하게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십대 때부터 시짓기를 공부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어 가을 산 그림에 쓴 제화시로 보아 스무살 무렵의 젊은이들이 그 때까지 조선의 주류문화였던 진경산수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들이 진경산수화의 영향아래 있었다면 '김석신'이라는 조선후기의 화가가 진경산수의 화풍으로 도봉산을 그린 다음 제목을 '도봉도'라 한 것처럼 '도봉도'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을 산에서 시를 찾다'라는 의미의 '추산심시도(秋山尋詩圖)'라는 제화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문인화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게 한다. 스무살의 조희룡이 송시열의 제향을 받드는 유학의 본거지 도봉서원에서 '도교'의 신선사상으로 서원의 원생들을 놀리고 있음을 볼 때 이미 조희룡은 완고한 성리학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이처럼 10대후반 20대 초반의 조희룡의 주변에는 시와 그림을 좋아하면서 새로운 문인화 사조에 영향 받은 젊은이들의 집단이 있었다. 당시 시를 짓고 이를 즐김은 매우 고급스러운 지적 유희였다. 시를 즐기지 못하면 지식인 취급을 받지 못하였다. 조희룡도 이십대를 전후하여 많은 책을 읽으면서 시를 공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희룡이 갓 사회에 눈을 뜨던 20대, 조선사회는 세도정치가 본격화되면서 잘못된 정치의 후유증으로 사회의 기강이 급속히 무너지고 있었다. 영조와 정조치하에서 유지되었던 건강한 조선의 기풍이 사라지고, 대신 저속하고 부패한 저급문화가 날로 확산되었다. 사대부와 관리들은 매관매직을 일삼고 있었고 백성들은 이들에 수탈당해 삶의 터전으로부터 유리되고 있었다. 부정한 돈은 사치와 세속적 쾌락을 만연하게 했고 가난에 쫓긴 여자들은 유곽으로 진출해야 했다. 만연한 부패와 사치,세속적 쾌락은 조선역사상 전례없던 수준이었고 나라를 생각하는 젊은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사회기강의 해이현상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희룡도 이를 의식하고 있었다.
"시란 청화의 보고요 중묘로 들어가는 문이다" 詩乃淸華之府 衆妙之門 청화(淸華)란 '맑고 빛남'이요 중묘(衆妙)란 '뭇 절묘함'을 말한다. 조희룡은 시를 공부하면서 시가 맑은 인간의 내면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맑고 고운 시의 세계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그는 "시문과 서화의 격이 무너짐은 속이라는 한 자에 있다. 이 한 글자의 무거움은 큰 기력이 아니고는 뽑아낼 수 없다. 인품도 마찬가지이다"라면서 당시 사회의 저급했던 속기의 범람현상을 지적하면서 시가 가진 탈속미에 경도되었다. - 그림의 시작 조희룡은 20대에는 주변에 화가친구들이 있었으나 그림보다는 시를 수단으로 하여 주위의 친구들과 교유하고 있었다. 그러던 조희룡은 나이 삼십(1818년)이 되었을 무렵 그림을 시작하게 되었다. 시를 공부하고 그림에 입문한다는 가장 모범적 길을 선택한 것이다. 시를 먼저 시작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림의 세계로 들어갔음을 짐작케하는 조희룡의 기록이 있다. "시로써 그림에 들어가고 그림으로써 시에 들어가는 것은 한가지 이치이다. 요즘 사람들은 시를 지으면서도 그림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 시를 먼저하고 그림에 들어가는 것이나 그림을 먼저하고 시에 들어가는 것이 같은 원리더라는 말이다. 시를 먼저하고 그림으로 들어갔던 자신의 경험을 되살리면서 후배들이 시를 뗀 다음 그림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지를 않고 있다 조희룡이 30무렵에 그림을 공부하였음을 암시하는 기록들이 있다. 스물 아홉인 1817년경 조희룡에게 큰아들이 태어났다. 결혼하고 10년이 지난 뒤였다. 10년만에 아들을 얻었으니 어떠한 경사였을지 짐작이 간다. 조희룡은 그 아들의 이름을 규일(奎一)이라 작명하였다. '규(奎)'자는 문운(文運)을 주관한다는 별의 이름이다. 글운이 뻗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 아들의 태몽으로 조희룡은 뜰에 붉은 난초가 가득 자라는 꿈을 꾸었다. 꿈이 하도 상서로워 '홍란음방'(紅蘭吟房)이라고 편액을 만들어 자신의 서재에 내걸었다. 홍란이 꿈에 나올 정도이니 이 때 쯤 난을 가까이 하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조희룡은 만년에 임자도에 유배 가 자신의 오막살이 집에 만구음관(萬鷗唫館)이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수 많은 갈매기를 그리면서 만구음관이라 했다면 수많은 난을 그렸기에 홍란음방이 되었을 것이다. 문운을 주관하라는 규일의 이름은 시에 가깝고 붉은 난이라는 태몽은 그림에 가깝다. 조희룡은 무엇엔가 몰두하면 침식을 잊을 정도로 집중하는 성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서화골동과 그림에 몰두하면서 침식을 잊었던 경험을 갖고 있었다. 조희룡이 청년 시절 중국서화골동에 대한 수집취미가 청년들에게 유행했었다. 그들은 청나라제라 하면 보잘 것 없는 물건까지 가리지 않고 모았다. 조희룡도 이들을 따라 침식을 잊고 서화골동의 수집에 매달렸었다. 특히 벼루 수집에 힘을 쏟아 좋은 벼루를 만나면 무슨 수를 쓰던지 손에 넣고야 말았다. 노력 끝에 조희룡의 컬렉션 목록에는 '선화난정연(宣和蘭亭硯)', '기효람옥정연(紀曉嵐玉井硯)', '임길인풍자연(林吉人風字硯)', 이름조차 특이한 수 십 개의 명품 벼루가 추가될 수 있었다. 그 중 조희룡은 '기효람 옥정연'을 유달리 사랑했다. 우연히 들른 골동품 가게에서 '수사고전서지연(修四庫全書之硯)'과 '기윤(紀 )'이라는 글자가 뒷면에 새겨진 진흙을 구워만든 벼루를 발견한 조희룡은 주인에게 먹을 가지고 오라 하여 명품여부를 확인해 보았다. 볶는 솥에 밀랍을 바르는 듯한 느낌이 조희룡의 손끝에 와 닿았다. 명품은 먹을 갈 때 볶는 솥에 밀랍을 바르는 느낌이 있어야 한다. 진품이었다. 조희룡은 주머니 속의 돈을 있는 대로 털어주고 그 벼루를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기쁘고 사치스러워 벼루를 매만지며 밥 먹는 것도 잊고 황홀경에 빠져있었다.
조희룡은 그림공부에 몰두하면서도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다. 침식을 잊을 정도로 몰두하던 정열의 성격을 조희룡은 갖고 있었다. 정황으로 보아 이러한 몰두의 시기는 조희룡에게 나이 삼십 무렵이었다. 조희룡이 26,7세 때 부모를 잃었으니 부모 사망 직후이다. 조희룡은 부모 사망 후 외부출입을 삼가고 3년 간 시묘살이를 하면서 어머니(1814)와 아버지(1815)를 여읜 빈 마음을 서화 골동 수집과 그림공부로 채웠던 것 같다.
3. 조선 진경의 시작과 쇄락 조희룡이 그림 공부를 시작하던 당시 조선 사회에는 진경문화가 꽃피었다가 퇴락하고 있었다. 명이 망하고 오랑캐의 나라로 여기던 청이 들어서자 자존심이 상한 조선은 중화(中華)가 청나라로 넘어 간 것이 아니라 명(明)이 사라진 순간 대륙에서 사라졌다는 논리를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조선은 명나라를 이은 중화의 후계자로 자처하였다. 조선을 소중화(小中華), 문화의 중심국가로 보았다. 그리고 청나라에 대해 겉으로는 복종하되 속으로는 불복하였다. 청나라와의 교류는 형식적인 것만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중단되었다. 실질적인 문화쇄국상태에 돌입하였다. 청나라와 담을 쌓은 조선의 내부에서는 모든 분야에서 조선적인 것이 조명되고 '조선'이라는 소재가 각광을 받았다. 미술계에서도 중국풍의 그림이 배척되었다. 조선의 화가들은 중국의 화풍과 중국적 소재를 배척하고 조선의 산수와 백성들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학계에서는 '조선'이라는 소재가 각광을 받던 이러한 시대에 대해 '조선진경(朝鮮眞景)'이라는 용어로 시대를 구분하였다. 조선진경은 문화쇄국상태에서 집권층과 백성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호응을 얻었고 정선, 김홍도같은 거장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실질적 쇄국은 조선진경의 한계를 노정시켰다. 문화는 외부로부터의 다양한 자극을 받아들이며 발전해 나가나 실질적 쇄국에 의하여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장기적으로 차단되자 조선진경이 그 한계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쇄국의 대상이었던 청나라에는 오히려 고증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대두되어 국운이 흥륭하였다. 조선의 젊은이들이 청나라를 통해 중국의 신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주장이 일었다. 홍대용(洪大容)을 필두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청나라를 다녀왔고 정조임금은 규장각을 설치하여 제도적으로 신문물을 받아들였다. 청나라의 신문물은 진경에 갇혀살던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감동과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조선 진경을 낡고 고루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진경의 화가들은 '조선의 산하와 우리의 풍속을 그린다'는 진경의 이념에 충실하면서 여전히 조선의 산하와 백성을 그리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고자 한 조선의 산하와 백성은 정선과 김홍도 시대의 그것이 아니었다. 진경의 그림에는 세도정치에 흔들리던 타락한 사회상이 담겨지기 시작하였다. 뒷골목의 풍경이 화폭에 담겨지기 시작하자 빛났던 진경의 이념과 신선한 건강미는 설 자리를 잃었다. 이러한 그림에 대해 젊은이들은 호응을 보내 주지 않았다. 그들은 진경의 대안을 찾기 시작하였다. 젊은이들이 떠난 조선진경은 생명을 다하였다. 조선진경의 소멸은 급격하고도 전면적이었다.
- 대안의 모색 문화계의 젊은이들은 타락과 속기의 진경을 버리고 대안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 모색의 시기에 조희룡은 그림을 시작하였다. 조희룡 역시 자신의 그림에서 속기를 뽑아 내고자 했다. 조희룡의 기록이다. "시문과 서화의 격이 무너짐은 속(俗)이라는 한 글자에 있다. 이 한글자의 무거움은 큰 기력이 아니고서는 뽑아낼 수 없다. 인품 또한 그러하다. 사람의 속됨은 어떠한 약물로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 젊은이들이 중국으로부터 새로 도입된 남종 문인화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남종문인화에서 탈속의 경지를 보았다. 영혼까지 씻어주는 맑음을 문인화 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문인화의 맑음이 조선 땅과 조선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기를 희망했다. 맑음에의 열렬한 추종이 문인화 운동의 추진력이 되었다. 현실의 속기를 그림으로나마 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젊은이들의 문인화로의 대안모색에는 정(正)에서 반(反)으로의 극적 전환이 있었다. 진경(眞景)의 사실주의는 문인화가 가진 관념세계로 대체되었고 진경(眞景)의 타락한 속기는 문인화의 고답적 이상주의로 해소되었다. 또 진경의 문화적 쇄국주의는 문인화가 가진 개방적 국제주의로 극복 될 수 있었다. 중국을 다녀온 이들은 물론 이재관과 조희룡처럼 중국을 가보지 못한 젊은이들도 중국 남종 문인화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열렬하게 중국에서 수입되어온 그림 이론서들을 탐독했고 중국 화보(畵譜)를 구해 대가들의 솜씨를 흉내내며 문인화의 세계로 몰입해 들어갔다.
-홍란음방(紅蘭吟房) 조희룡이 자신의 방을 '홍란음방(紅蘭吟房)'이라 편액하고 거기에서 그림을 배우려 하였으나 문인화를 가르쳐 줄 스승이 없었다. 그때는 진경시대의 끝이자 문인화의 도입기로서 중국 남종 문인화를 배우고 싶어도 국내에는 가르쳐 줄 사람이 없던 실정이었다. 청나라를 다녀온 몇 사람이 중국의 신문예에 대해 식견을 가지고 있었으나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젊은이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화본을 놓고 문인화의 이치를 스스로 터득해야 했다. 조희룡은 이러한 자신의 학습에 대해 "누구로부터 배우지 않고 우연히 난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옛사람의 그림과 같았다" 고 말하였다.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조희룡은 매화와 난의 은은하면서도 격조 높은 아름다움에서 현실의 어지러움과 혼탁함을 씻어주는 영약을 찾았다. 매화는 꿋꿋하게 피어 기개가 고결하였고 난은 청절하고 수려하였다. 화선지 위에 펼쳐지는 그림 세계에 빠져 조희룡은 친구도 멀리하고 즐기던 시회도 소홀히 하였다.
5. 조희룡의 작품세계
[탈속과 즐거움의 예술세계] 조희룡은 자신의 저서 곳곳에 10년간 매화를 공부하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서른 무렵에 그림공부를 시작하였으니 마흔이 넘어서야 매화그림의 이치와 경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스스로 "10년 동안 담금질을 한 결과 칠분 정도는 흉내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가 10년의 고련 끝에 얻어낸 매화도는 탈속과 기쁨의 세계였다. 그 속에는 향설과 연하가 자족하였고 비루함으로 채워진 속인이 그 세계에 들어오도록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다. 순흑의 먹에서 빙자옥질의 매화꽃이 피어오르는 감각의 현상을 놀라워했다. 특히 난은 즐거움의 세계였다. 시 공부를 통해 얻은 오언절구의 깊고 그윽한 정취를 난의 형상을 빌어 표현할 수 있었다. 시를 통해 함양된 마음속의 세계를 그림으로 형상화 하였다. 조희룡은 그림으로 체득한 즐거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그림은 즐거움을 위하여 그린다. 그려 즐겁고 보아 즐거워야 한다. 강태공들에게는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것이 즐거움이듯 화가들에게는 붉은 물감 연지로 꽃을 그리는 것이 즐거움이어야 한다." [불긍거후(不肯車後)] 조희룡은 중국의 화본을 본따는 문인화의 기초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누구도 모방하지 않는 자신만의 그림세계를 원하였다. 조희룡의 저서《한와헌제화잡존(漢瓦軒題畵雜存)》에 독창의 경지를 찾으려는 조희룡의 의지를 피력한 구절을 만날 수 있다. "좌전을 끼고 정현(鄭玄)의 수레 뒤를 따르지 않으려오 (不肯車後). 외람될지 모르나 나 홀로 길을 가려 하오" 조희룡의 예술세계를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구절이다. 정현(鄭玄)이란 학자는 유학을 거론할 때 빼놓지 않고 이야기되는 한나라 유학의 거장이다. 정현의 수레를 따르지 않겠다는 남의 뒤를 따르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림공부에 있어서 대가를 그대로 추종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단호히 표현한 글이다. 자신만의 길을 가겠다는 기백의 언어이다. 참 아름다운 구절이다. 은유법으로 포장되어있는 명문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영혼 속에 맑게 울려 들어오는 소리이다. 조희룡은 당대 최고 수준의 종합적 교양을 갖춘 젊은이였다. 그는 20대 시절이면 이미 시에 대해 범상한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30대에는 서화골동을 비롯한 중국의 문물에 깊은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그가 당시의 주류적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시대를 여는 진보적 삶의 행로를 취했다. 모두에게 익숙하였던 조선진경의 길을 가지 않고 새롭게 나타난 중국 남종 문인화 사조에 발을 디딘 것이다. 이후 조희룡의 생애는 '남의 수레 뒤를 따르지 않으리'라는 이 '불긍거후'의 정신이 내내 관류하면서 자신의 독창적 예술세계를 열어가는 창조적 삶의 연속이었다. 남이 열어놓고 닦아놓은 익숙한 길을 가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함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희룡은 그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경詩境, 문경文境, 화경畵境은 험준한 언덕과 골짜기에 가벼운 수레가 익숙하게 다닐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이다. 이는 조희룡의 홀로 탄 수레, 외로운 길이다." 그가 연 진보적 삶의 행로는 홀로 길을 가는 수레와 같았으나 반드시 그 길은 외롭지만은 않았다. 그 길에는 반가운 이들도 있었다. 속기를 버리고 고답적 정신세계를 찾아 나선 문인화의 길에는 같이 갈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미투리를 신고 불긍거후라는 일산을 어깨에 둘러매고 아무도 없던 전인미답의 길을 함께 걸어나갔다. [매화도에 있어서의 불긍거후] -장륙매화(丈六梅花) "근래 사람이 그린 매화 중 내 눈으로 직접 본 바로는 동옥(童鈺) 전재(錢載) 나빙(羅聘)의 작품이 일품이다. 그러나 좌전을 끼고 정현(鄭玄)의 수레 뒤를 따르지 않으려 한다. 외람될지 모르겠지만 나 홀로 가려한다. 누구도 숭앙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속한 바 없다......." 조희룡은 매화도(梅花圖)에 있어서도 앞사람들을 그대로 본뜨려 하지 않았다. 장륙매화(丈六大梅)는 이러한 정신에 의하여 창안되었다. 조희룡이 붓을 들고 지금까지 의 매화치는 법을 일부러 무시하고 가로 세로 마음껏 휘둘렀다. 글씨의 필법을 매화줄기에 그대로 응용하면서 화선지 가득히 붓을 휘둘렀다. 화선지 위에 줄기와 가지가 거침없이 뻗어나갔다. 조희룡이 붓을 멈추고 보니 엄청나게 큰 매화 한 그루가 그 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지금까지 법에 따라 그려오던 성긴 가지, 작고 아담한 줄기와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모양새였다. 키가 일장 육척이나 된다는 석가모니불이 연상될 정도였다. "석가모니불을 장륙금신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 매화를 장륙대매(丈六大梅)라 할 수 있지 않는가?" 조희룡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고 스스로 놀랐다. 그는 새로 발견한 이 세계를 부처의 장륙금신을 본따 '장륙매화'(丈六梅花)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그 뿌뜻한 자부심을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장륙매화(丈六梅花)는 나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丈六梅花 自我始也" 조희룡의 마음속 소리침이다. 역대 아무도 그려보지 못한 그림이었다.
-매화도(梅花圖)의 계보 '불긍거후'는 조희룡에게 새로운 길을 계속 압박해 왔다. 매화는 최초로 송나라의 화광화상에 의해 그림으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한다. 이후 양무구(揚无咎)가 본격적으로 매화를 연구하여 묵매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화가들이 양무구(揚无咎)의 뒤를 면면히 이어가며 묵매를 발전시켰다.
【扬无咎《四梅花图卷》_水墨梅花图卷传世名画全卷赏析】
*그림 : 양무구(揚无咎),사매화권(四梅畵卷) 부분,북경고궁박물관
매화도(梅花圖)의 계보 가운데 조희룡 매화의 위치는 청나라 동이수(童鈺)와 나빙(羅聘)의 중간지점에 독자적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 조희룡 스스로가 자신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양무구(揚无咎)라는 사람이 매화 그리는 법을 창안하였다. 그 법을 이어받은 '석인제(釋仁濟)'는 '40년만에 비로서 원숙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모여원(茅汝元)' 등이 매화그림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꽃이 드문 것을 구하고 번잡하게 핀 매화도를 그리지는 않았다. 천 송이 만 송이의 꽃을 그리는 법은 왕면(王冕)으로부터 시작하여 근래의 전재(錢載) 나빙(羅聘) 동옥(童鈺)에 이르러 극성하였다. 나의 매화그림은 청나라 화가인 '동옥(童鈺)'과 '나빙(羅聘)' 양인 사이에 위치한다. 그것이 나의 매화치는 법이다." 조희룡은 장륙매화(丈六梅花)를 창안한 다음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꽃이 무성하게 핀 매화를 그렸다. 몇송이의 꽃에서 수많은 꽃송이로 변화한 것이다. 매화의 줄기가 장륙으로 커졌으니 필연적으로 꽃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했다.
王冕 《南枝春早图》
纵151.4厘米 横52.2厘米 绢本水墨 台北故宫博物院藏
*그림 : 왕면(王冕),南枝春早,비단에 수묵,臺灣 故宮博物院 소장
清 童钰 《梅花图》 童钰的墨梅,苍老古朴,墨气雄厚,时称“绝技”。画中题诗云:不藉清阴叶护持,更无媚骨与柔枝。生成冷面难谐俗,占得春光岂命时。似我带酸终无语,几人破冻为裁诗。年年偃卧江□里,长伴云根也自宜。 (责任编辑:admin)
拍品描述: 作者介绍:童二树,名钰(童钰),字璞岩、二树、二如,号借庵、树道人、二树山人等,浙江绍兴人。善山水,以草隶法写兰、竹、木石,尤善写梅,宗扬无咎法,生平画梅不下万本,每画必题诗,故有“万幅梅花万首诗”印。浸月,起拍价:12000.00,预出售价:22000.00,实际成交价:0.00、目前状态是(已结束)
童钰),月下梅花图_百度图片 image.baidu.com - 查看全部381张图片
【名称】清 童钰 月下墨梅图 【年代】清代 【简介】纸本,墨笔,纵164.8厘米,横56.4厘米。扬州市博物馆藏。 此图裁取梅树一角,老干苍劲,新枝挺发,繁花密萼,正反转侧,一片生机。枝干苍老古朴,花蕊挺劲清秀,运笔密而不乱,繁而不杂,墨气雄厚,一轮圆月,影照梅花,分外清 月下墨梅图图片 - 关 键 词:
- 月下墨梅图 国画 梅花 花鸟 文化艺术 绘画书法 国画花鸟 设计图库 72DPI JPG
- 图片描述:
- 月下墨梅图 童钰 立轴纸本 墨笔 纵164.8厘米横56.4厘米 扬州市博物馆藏 此图裁取梅树一角,老干苍劲,新枝挺发,繁花密萼, 正反转侧,一片生机。枝干苍老古朴,花蕊挺劲清秀,运 笔密而不乱,繁而不杂,墨气雄厚,一轮圆月,影照梅花, 分外清逸。 童钰(1721—1782),字璞岩,又字二如,号二树,又 号札岩、借庵子。会稽(今浙江绍兴)人。布衣、擅山水,以 草隶法写兰、竹、木、石。尤擅写梅,宗扬无咎法。工诗, 亦以咏梅为胜,兼工草隶,精篆刻。传世作品有《月下墨 梅图》。
*그림 : 동이수(號:童鈺),月下梅花圖,종이에 수묵,楊州市立博物館 소장
*그림 : 나빙(羅聘),三色梅圖 (?), 종이에 채색,吉林省博物館 소장
-도화불사(圖畵佛事) 줄기가 커지고 꽃의 수가 늘어나는 형태상의 변화에 이어 조희룡의 매화는 질적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의미의 변화를 시도하였다. 조희룡은 추위와 외로움을 이기고 혹독한 환경에 굴하지 않는 선비의 의미를 가진 매화를 이제 천수관음의 자애로운 마음을 가진 부처상의 의미로 바꾸었다. 매화가 선비의 상징에서 부처의 상징으로 변한 것이다. 이제 매화도(梅花圖)는 부처가 되었다. 벽에 걸린 매화도(梅花圖)를 감상하는 사람들은 법당에서 부처를 보고 예불을 올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게되었다. 매화그림으로 불사를 이루는 화법이 창안된 것이다. 매화꽃이 선비를 상징하는 유교적 사군자 개념에서 불교의 부처 개념으로 전환되었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이념이 바뀌었다. 딛고 있던 땅이 바뀌는 대전환이었다. 본질의 변화는 혁명이다. 매화도는 조희룡에 이르러 혁명적 변화를 맞게 되었다. 아직 아무도 조희룡이 매화도의 의미를 뒤바꾸어 버리는 혁명을 하였다고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 조희룡은 스스로 말하였다. '그림으로 불사를 이루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었다(以圖畵 作佛事 自我始也)'
-용매도 조희룡의 매화도(梅花圖)는 중국풍에서 완전히 탈피하였을 뿐아니라 자신의 고유양식을 갖게되었다. 조희룡 고유양식의 매화는 호암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희룡의 대표작 한점으로 그 실체에 다가설 수 있다. 작품의 이름은 '홍매도대련'(紅梅圖對聯)이다. 조희룡의 홍매도대련은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왔던 매화그림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그림이다. 우선 수많은 매화송이가 있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화려한 줄기가 있으며 적지않은 규모감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대련에서 눈을 떼어 멀리서 보면 줄기가 살아 꿈틀거리고 가까이 다가서 보면 붉은 꽃송이들이 천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래된 등걸에 핀 몇 송이의 매화를 그린 일반 매화도와 이 홍매도 대련 이에는 아마추어의 눈에도 차별의 강이 흐르고 있다. 기존의 매화도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유를 알 수 없이 당혹스럽다.
조희룡 홍매 대련(紅梅對聯)
*그림 : 조희룡,홍매도대련(紅梅圖對聯) 종이에 옅은 채색,154.0×42.2cm,호암미술관
조희룡은 처음에는 육척의 매화를 창안하였다. 스스로 장륙매화(丈六梅花)라 이름 붙였다. 꽃도 변했다. 소략하게 핀 몇송이의 매화그림에서 천만송이의 꽃이 핀 그림으로 변모되었다. 또 매화의 이념도 선비들의 고결한 심성에서 부처의 자애로운 마음으로 변했다. 3단계의 변화를 거친 조희룡의 매화가 다시 한번 4번째의 진화단계로 돌입하였다. 그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매화를 그릴 때 얽힌 가지, 오밀조밀한 줄기에 만개의 꽃잎을 피게 할 곳에 이르면 나는 용의 움직임을 떠올리면서 크고도 기이하게 굽은 변화를 준다."
조희룡의 여섯자 매화줄기가 돌연 격렬히 떨기 시작하였다.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하였다. 대련을 다시 살펴보자. 매화의 줄기가 용이 되어 하늘로 비상하고 있다. 조희룡은 매화줄기를 나무에서 용이라는 생명체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조희룡의 홍매도를 용매도(龍梅圖)라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홍매도 대련은 우주로 비상하는 용의 역동성과 모든 이들의 고통을 어루만져주는 천수관음의 자애로운 마음을 형상화한 그림이다. 수천 송이의 붉은 매화는 천수관음의 손길이었고 꿈틀거리는 매화줄기는 격렬히 요동치는 용이었다. 대련이 주는 당혹감은 기존의 것을 뛰어넘는 조희룡의 전혀 새로운 예술세계가 던져주는 새로움으로부터 온 자극의 다른 느낌이었다. 쏟아져 내리는 규모감은 부처와 용이 살아 움직이는 삼라의 우주공간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조희룡의 고유의 양식이 완성되었다. 조선의 그림 사상 조희룡 만큼 창의적 매화그림을 그린 이를 발견할 수 없다. 그는 매화가 그려진 이후 화단에 홀로 서서 화려하게 산란하고 격렬하게 요동치는 매화를 그렸다.
- 묵란도에 있어서 불긍거후 [묵란도(墨蘭圖)] -경시위란(經詩緯蘭) 조희룡은 난은 그의 예술관을 함축하고 있다. 조희룡은 시를 배우면서 그윽한 즐거움을 시로써 표현하였고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는 자기의 가슴속에 스며든 시를 그림으로 형상화 하였다. 그는 난 그림을 "시를 날줄로 하고 난을 씨줄로 교직하여 경영된 것" 이라 정의하고서 그러한 자신의 난의 세계를 '경시위란(經詩緯蘭)' 이라 하였다. 경전의 진리를 불변으로 전제하여 날줄로 인식하고, 변화하는 역사를 씨줄로 생각한 것이 '경경위사(經經緯史)'이다. 경(經)은 보편적 진리를 설파한 것이기에 인류의 보편적 진리를 바탕으로 하고 거기에 인간의 구체적 행동결과인 역사가 교차한다는 동양의 우주관이 함축된 단어이다. 조희룡은 마음속의 시를 난에 교직시켜 그림으로 형상화하였다. 시의 아름다움을 보편으로 하고 그것을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표출해 낸 것이 조희룡의 난이었다. 마음속의 시가 꿈틀거리고 시를 자양분으로 하여 난이 자랐다. 시를 통하여 그림으로 나아갔다는 그의 말에 완전히 부합되는 말이다. 그는 경시위란(經詩緯蘭)의 저작권을 자신의 이름으로 등록하였다. "경시위란은 철적도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經詩緯蘭自鐵 道人始)."
-즐거움의 난 조희룡 난은 지향점이 매우 선명하다. 그가 난 그림 속에 그리려 한 것은 즐거움과 아름다움이었다. 그의 난은 고통 그 자체도 아니요, 고통을 극복하려는 의지도 아니었다. 그의 난 정신은 '노동하는 이들을 위로한다'는 자신의 묵란도(墨蘭圖) '위천하지노인'(爲天下之勞人)에 선명히 드러난다.
조희룡, 난생유분 蘭生有芬
*그림 : 조희룡,난생유분도(蘭生有芬圖) 종이에 수묵,44.5×16.3cm,간송미술관
'위천하지노인도'의 주제는 '애쓴 뒤의 즐거움'이다. 거기에는 힘들게 노동한 이들이 생각지도 않게 5일이나 10일간의 휴가를 얻었을 때의 기쁨이 흥분되어 나타나 있다. 답답한 일상과 거기에서 탈출하는 기쁨이 하늘로 날듯 위로 솟아오르고 있고 멀리 떠나가는 해방감이 좌측으로 주욱 뻗어있다.
위천하지노인도
묵란이 문인화의 소재로 각광받은 것은 원나라 때부터였다. 원나라에 나라를 빼앗긴 중국 송나라 유민들은 망국에 따른 '상실의 정서'나 '시련을 이기려는 의지'를 난그림에 형상화했다. 그래서 그들의 난은 국토를 잃은 백성들 처럼 뿌리를 드러내거나 비쩍 마른 잎줄기를 난이다. 그러나 조희룡은 이들과 달리 '시의 유장함'과 '힘쓴 뒤의 산뜻한 즐거움'을 형상화했기에 난 잎은 통통하고 살져있으며 기름진 땅이나 고아한 동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조희룡은 중국 남종 문인화에서 난을 배워왔으나 그들의 정신과 기법을 답습하지 않았다.
[수예론(手藝論)] 조희룡은 처음 정판교의 대그림 이론을 배우다가 "대나무를 그리려면 먼저 가슴 속에 대나무가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라는 흉중성죽(胸中成竹)의 논리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중국인들은 그림에 앞서 '서권기(書卷氣) 문자향(文字香)이 가슴속에 들어 있어야 한다' 고 했고 산수를 그리려면 "가슴속에 언덕과 절벽이 들어있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조희룡은 비록 가슴속에 '서권기 문자향'이나 '대나무, 언덕과 절벽, 서권기 문자향이 이루어져 있다 하더라도 손의 기량이 따라주지 않으면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산이 높고 달이 작다' 라든지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 라는 개념들은 그림으로 그릴 때 가슴속의 그것과는 별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손의 기량에 그림의 성패가 달려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는 가슴 속의 이념보다 화가로서의 기량을 중시하는 화론을 새로이 정립하였다. 이를 조희룡의 수예론(手藝論)이라 한다. "글씨와 그림은 모두 수예(手藝)에 속하여 수예가 없으면 비록 총명한 사람이 몸이 다하도록 배워도 할 수 없다. 그것은 그림이 손끝에 있는 것이지 가슴속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향점의 차이] 조희룡은 중국의 화가들이 소위 '심의'를 절대시한데서 더 나아가 '화가로서의 기량', 즉 '수예'를 중시하게 되었다. 그는 중국의 화가들이 신성시하던 '흉중에 서권기와 문자향이 있어야 한다'라는 절대명제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지향점의 차이는 그림에 있어 이념과 기법의 차이를 불러오게 되었다. 조희룡이 중국과 다른 그림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조희룡은 조선에 도입된 중국 남종 문인화에서 '심의'라는 중국의 얼룩을 세탁하고 조선인의 감각을 우선시 하는 조선인의 문인화를 추구하였다. r조선화 된 문인화는 남의 수레 뒤를 따르지 않으려는 조희룡의 불긍거후 정신에 의하여 빗장이 열렸다.
[조선에의 개안, 《호산외기(壺山外記)》의 저술] 직접 중국에 가볼 기회가 없었던 조희룡은 문헌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나마 중국에 대한 지식을 넓혀 갔고 중국제 문화예술품들을 수집하면서 대륙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조희룡도 초기에는 북학파(北學派) 1세대들처럼 중국의 신문물에 압도적으로 경도되었으나 그는 곧 '조선과 중국은 다르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중국에 빠져 있던 조희룡이 조선의 독자성에 어렴풋이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에 대하여 균형적 시각을 갖게 되어 취사선택이 가능하게 되었다. 중국제를 무조건 제일로 치는 시각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졌다. 그는 중국 문물의 선진성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실제 그런지 시시비비는 가려야 했다. 그림도 벼룻돌도 사람에 대해서도 그랬다. 충청도 산 남포석(藍浦石) 벼루가 결코 중국제에 못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실제 써보지도 않고 중국제 명품벼루만을 찾았다. 조선인들도 중국의 성현에 비해 못지 않음에도 불구 남포석 벼룻돌과 같은 처지였다. 중국인들의 행적은 기록으로 남겨져 후세사람들에게 사표가 되고 세계의 기준이 되고 있었으나 조선의 민초들은 단지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말미암아 모두에게 잊혀지고 있었다. 1844년, 조희룡은 역사서 《호산외기(壺山外記)》를 집필하였다. 조희룡은 이 책에서 중국의 명품 단계연·흡주연에 뒤지지않는 토종 남포석들의 삶을 전기형식으로 정리하고자 했다. 조선민초들의 유한한 삶에 무한한 생명을 불어넣고자 했던 것이다.
4. 조선문인화(朝鮮文人畵)
[벽오사(碧梧詩社)의 결성] 1847년 봄, 조희룡은 친구·후배들과 함께 모여 벽오시사를 결성하였다. 벽오당(碧梧堂)은 유최진(柳最鎭)의 집 이름이다. 유최진을 맹주로 하고 그들 주변의 인물들이 참여하여 시와 그림으로 우정을 나누었다. 맹원은 모두 아홉이었다. 조희룡은 59세로서 나이가 가장 많아 좌장이었고, 유최진과 이기복(李基福)은 동갑으로서 57세, 전기(田琦)는 23세, 유숙(劉淑)은 21세, 나기(羅岐)는 20세, 유재소(劉在韶)는 19세의 나이였다. 전기는 여섯 번째에 해당하였다. 그들은 의형제를 맺고 서로를 형님 동생으로 부르면서 '혈육을 넘어선 관계'를 표방하였다. 조희룡과 유최진 이기복은 지긋한 나이가 되어있었고 전기 유숙 유재소는 아들뻘에 해당하는 젊은이들이었다. 이들 중 전기와 유숙, 유재소는 그림에 빼어난 재주를 가진 젊은이들이었다. 조희룡은 그곳에서 젊은 후배화가들에게 그림을 지도하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였다. 특히 전기에게는 산수화와 매화도를, 유숙에게는 매화도에 대해 화풍에 있어 큰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벽오시사에서 시와 그림에 대해 논하면서 조선인에게 낯선 중국의 문인화를 소화하였다. 조희룡과 후배화가들이 그려내는 작품들로 조선의 문인화 화단은 꽃이 만개하게 되었다. 꽃보라의 시대가 열렸다. 조선 화단의 역사에서 이러한 경험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벽오사는 그러한 시대를 연 화가들의 요람이 되었다. [조선문인화(朝鮮文人畵)의 탄생] 진경시대가 지나가면서 그림 시장이 새로운 그림을 요구하였다. 시장의 변화된 욕구에 일군의 화가들이 반응하였다. 반응은 세가지의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의 흐름은 조선의 미감이 반영된 문인화였다. 이것은 벽오시사의 화가들이 주로 담당하였다. 그들은 초기에는 중국 남종 문인화로부터 직접적 영향을 받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진경 시대에 이미 '조선'이라는 유쾌한 주체성을 경험했던 백성들은 문인화에 담겨있는 중국의 이념미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으려 했다. 시장은 조선화된 문인화를 원했다. 특히 벽오시사의 맹원중 전기라는 화가가 '이초당'이라는 자신의 집에서 당대 문인화단의 그림을 중개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그림을 감식하고 중개에 열중하면서 시장이 요구하는 문인화를 찾고 있었다. 시장이 요구하는 그림은 당연히 조선인의 미감에 충실한 그림이었다. 그러한 그림이 생산되기 위해서는 먼저 이론이 뒷받침 되어주어야 했다. 여기에 중국의 화론과 지향점이 다른 조희룡의 이론이 뒷받침되었다. 그것은 조선인의 미감이 반영된 화론이었다. 이론과 시장과 생산자가 있던 곳이 벽오시사였다. 벽오시사의 화가들에 의해 중국의 남종 문인화에 조선의 고유미가 반영되어갔다. 사람들은 벽오사 화가들의 그림을 보았을 때 중국의 남종 문인화에서 보지못했던 신선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서권기와 문자향'이라는 이념미가 탈색되고 조희룡의 '수예론'에 입각한 프로의 기량으로 처리된 조선적 감각의 색채미가 있었다. 조선문인화(朝鮮文人畵)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의 요구와 조희룡의 이론이 반응하는 과정에서 탄생되었다. 또 하나의 흐름은 중국 정통 문인화였다. 이 시장을 의식한 이는 추사 김정희(金正喜)와 소치 허유(許維)로 이어지는 맥이었다. 추사 김정희는 세도가문이었던 경주김씨 가문의 후예로서 고위 사대부의 길을 걸었다. 그는 젊은 시절 중국 연경을 방문 그곳에서 당대의 최고 석학들로부터 중국의 신학문과 문예이론을 소개받았다. 그는 귀국이후 고위직을 역임하면서 중국 남종문인화의 전도사 역을 자임하였다. 그에 의해 중국의 문예이론이 국내에 착근될 수 있었다. 그는 진도의 청년 허유를 제자로 거두었고 훗날 대원군이 되는 이하응에게 중국의 난법을 가르쳤다. 김정희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은 그의 제자들과 수많은 문인화가들이 중국의 화론에 철저하게 충실한 그림을 생산하였다. 그들은 '가슴속에 서권기 문자향을 담아야 한다' 라는 명제에서 한치의 어긋남도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서권기문자향이 없는 그림은 비판받았으며 조선적 그림은 고루한 것으로 내침을 당했다.
조희룡과 김정희로 대표되는 문인화의 두 물줄기 사이 전통의 그림시장도 여전하였다. 전통의 그림은 도화서의 화원들이 공급하였다. 도화서 화원들을 대표하는 화가로 이한철(李漢喆)이라는 최고 권위의 화가가 있었다. 그는 왕의 어진은 물론 당대 대표적 세도가문이었던 풍양조씨 요인들의 초상화를 전담하였다. 왕과 세도가문의 사랑을 받고 초상화 당대일인자이었으며 도화서의 대표화가였던 이한철은 그림에 흐트러짐 없는 권위를 강조하였다. 풍랑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안정감과 불난 집에서도 초조하지 않을 여유로움이 그의 그림의 특징이다. 왕과 세도가들을 그리면서 이한철이 그림속에 보이고자 한 것은 서세동점의 위기를 극복해 낼 조선 사대부의 권위와 안정감이었다. 그러나 사회는 이미 요동치고 있었다. 이한철이 그린 권위있는 조선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과거의 추억이었기에 이한철은 그림 속에 과거의 영광을 재현코자 하는 복고주의자였다.
[조선문인화(朝鮮文人畵)와 중국 정통 남종 문인화의 충돌] 1848년 조희룡은 벽오시사의 중심인물이 되어 맹원들과 함께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역할에 주목한 후인들은 그를 '묵장(墨場)의 영수'라고 평했다. 그의 활동은 이러한 표현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추사 김정희는 게딱지 집에서 여름에는 지독한 모기떼에 쫓겨야 했고 겨울에는 삭풍 부는 제주도의 혹한을 견뎌야 했다. 절망 속에서 유배생활을 이어가던 김정희가 서울의 조희룡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예순 세살, 제주유배 9년째의 이 '제주도 발(發) 편지사건'은 좌절에 빠져있던 김정희의 마음과 함께 조희룡과 김정희가 가고있던 길의 차이를 알게 해준다. 그것은 아들 김상우에게 보내는 편지에 담겨 있었다. "난초를 치는 법은 예서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은 후에야 얻을 수 있다. 또 난치는 법을 가장 꺼리니 만약 화법이 있다면 그 화법대로는 한 붓도 대지 않는 것이 좋다. 조희룡의 무리(趙熙龍輩)들이 내 난초그림을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슴속에 문자기가 없기 때문이다."
'조희룡의 무리'라 함은 벽오사의 맹원들을 말함이다. 조희룡과 김정희는 청나라의 문물을 도입하며 조선예술의 국제화를 추구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세살 터울로 태어나 중국의 신문물로부터 강렬한 영향을 받았다. 다만 김정희는 자신이 직접 청나라의 석학을 만나 중국의 문물을 직접 접할 수 있었고, 조희룡은 청나라에 직접 갈 기회가 없어 중국을 왕래하던 사람들이 들여온 전적을 통해 중국의 문물을 익힐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중국 문화에 대한 지향점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김정희는 고답적인 중국문인화 정신의 충실한 고수를 고집하였다. 문인화를 하고자 하는 이는 가슴속에 '서권기문자향'을 담아야 하며 그것이 그림 그리는 사람의 창자에 뻗치고 뱃속을 떠받쳐 손가락으로 흘러나와 그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중국 문인화의 핵심이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김정희에게 '서권기문자향' 이론에 충실하지 않은 그림은 안목만을 흐리게 하는 것이어 펼쳐볼 필요도 없는 그림에 불과하였다. 조희룡과 그의 친구들은 달랐다. 그들 역시 서권기와 문자향을 기르기 위해 고련을 거듭하고 화법대로 난을 치는 행위를 금기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중국 것을 도입하되 정신과 화법은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서권기문자향'도 중요시하였지만 '수예론'에 입각한 손의 기량도 그에 못지 않게 중시하였다. 김정희는 이념과 화법을 직도입하고 그것을 엄격히 지켜갔으나 조희룡과 그의 벗들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조선화를 시도하였다. 조희룡과 그의 벗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정통 중국 남종 문인화가 아니라 조선인의 미감에 맞는 문인화, 즉 '조선문인화(朝鮮文人畵)'였다. 이러한 입장 차가 '제주도발 편지사건'의 핵심 원인이었다.
조희룡의 벗들과 김정희가 추구하던 그림은 주제면에서도 메울 수 없는 거리가 있었다. 김정희는 9년여 제주도 유배라는 좌절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유배를 통해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시련을 이겨내는 인간의 의지'에 있다고 보고 그것을 '세한도(歲寒圖)'를 비롯한 작품들에 형상화하였다. 반면 조희룡과 그의 벗들은 시서화 활동의 최고가치를 '즐거움의 추구'로 규정하였다. 조희룡은 '즐거움'을 강조하였고 김정희는 '세한의 극기'를 강조하였다. 조희룡과 김정희는 서로 다른 땅을 밟고 있었다.
[조희룡과 김정희의 관계] 많은 이들이 김정희와 조희룡의 관계에 대해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일부에서는 조희룡을 김정희의 제자라고까지 한다. 유홍준도 '완당평전'에서 조희룡을 김정희의 제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근거가 취약하다다는 것이다. 김정희를 조희룡의 스승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훗날 조희룡이 김정희와 함께 유배를 간 것에 대해 그가 김정희의 제자였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점은 둘이 같은 사건에 연루되었음을 말할 뿐이지 사제관계의 증거로는 채택될 수 없다. 또 조희룡이 추사체를 쓰는 등 김정희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 조희룡은 서법으로 중국의 예서에 열중하였다. 김정희 역시 중국의 예서를 바탕으로 자신의 독특한 추사체를 창안하였다. 예서체를 공통점으로 가질 수밖에 없다. 양보하여 조희룡이 추사체의 글씨를 쓰고 있다 하여 김정희의 제자로 결론 내리면 다른 이들이 송설체를 구사한다 하여 송설체의 창시자인 조맹부(趙孟 )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설득력이 떨어진다. 조희룡의 난 그림이 삼전의 묘를 살리고 있다하여 김정희의 제자가 분명하다고도 말한다. 삼전법은 김정희의 법이 아니라 난 그림의 보편적 기초화법이다. 기초적인 화법 사용여부로 사제 관계를 논한다는 것은 지나치다. 조희룡이 김정희의 제자라는 근거는 아무데도 없다. 김정희는 어디에서도 3살 아래의 조희룡을 제자로 생각한 적이 없다. 조희룡 역시 김정희를 추호도 스승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 결론적으로 조희룡은 김정희의 제자가 아니다. 그들 두 사람이 남긴 각종 기록과 저간의 정황을 살펴보면 김정희와 조희룡은 사제관계라기 보다 오히려 경쟁 관계이다. 조희룡을 김정희의 제자로 만드는 것은 김정희에 대한 용비어천가에 불과하다. 김정희 띄우기와 조희룡 깎아내리기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작용하고 있다. 김정희만을 내세우는 근대 미술사의 입장에 의해 김정희의 문인화와 별도로 독립하는 조선문인화(朝鮮文人畵)의 세계가 간과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5. 조희룡의 관직생활 조희룡은 1848-1849년 무렵 이조의 속했던 액정서에 근무하였다. 액정서(掖庭署)는 왕의 붓과 벼루, 궁궐문의 자물쇠를 관리하는 부서였다. 그의 공직생활에 대해 세가지의 기록이 있다. 조희룡 자신의 기록으로는 '금문(金門)에 봉직하였다'는 언급이 있다. 정부문서에는 '액속(掖屬)'으로 기록되어 있고 평양 조씨 족보에 의하면 '오위장(五衛將)'의 벼슬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액정서의 공직자로서 그가 했던 일 3가지가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1848년 여름 조희룡은 헌종의 명을 받아 신축한 중희당 동쪽 누각의 편액에 '문향실(聞香室)'이라는 편액의 글자를 썼다. 조희룡이 짓고 쓴 홍매시 한 수가 궁중의 벽에 양양하게 걸리게 되었다. 그 시는 이랬다.
"신선이 영약을 씻는 곳에 단액이 샘물에 흘러드네 초목이 모두 멍청히 서 있는데 매화만이 먼저 기를 얻네" 仙人洗藥處 丹液入流泉 草木皆癡鈍 惟梅得氣先 이어 회갑 때(1849년 5월)에는 조정에서는 그에게 회갑을 축하하면서 먹과 벼루와 책을 하사하였다. 조희룡은 자기에게 내린 궁중의 빛에 감격해 했다. 그는 은혜를 잊지않고 임금의 명을 받아 글을 쓴 사람의 자부심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1849년에는 헌종의 명을 받아 금강산에 가서 금강산의 실경을 묘사한 시를 지어 바쳤다. 이처럼 조희룡은 헌종임금으로부터 총애를 받으며 궁중에서 '문한(文翰)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가 궁에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은 글씨와 그림과 시에 출중한 역량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조정에서도 조희룡을 당대 대표적인 시서화 삼절로 인정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6. 예림갑을록
김정희가 유배지 제주도로부터 상경하였다. 1848년 12월에야 9년에 걸친 유배를 마친 것이다. 이 때 서울에서는 서화계의 젊은이들이 서화와 서예분야에서 실력과 명예를 다투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이들은 스스로를 '화루(畵壘) 8인' 이라 하고 글씨를 쓰는 이들은 스스로를 '묵진(墨陣) 8인' 이라 하였다. 화루팔인이란 당대 미술계의 대표자 8명이란 뜻이고 묵진팔인이란 서예계의 대표자 8명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당대의 미술계와 서예계를 대표한다는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벽오시사의 전기(田琦)와 유재소(劉在韶)는 글씨와 그림 모두에 능해 화루와 묵진 양쪽에 포함되어 있었으니 당대의 재인이라 할만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조희룡과 김정희 양인으로부터 평가받아보기로 했다. 예림에서 누가 제일인지 다투기로 한 것이다. 그 이벤트 행사가 1849년 6월 20일부터 7월 14일 사이에 개최되었다.
조희룡은 화루팔인이 제출한 작품에 화제시를 써주었고 김정희는 묵진팔인의 서예작품과 화루팔인의 그림에 평가를 가하였다. 화루팔인은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전기, 유재소, 유숙,김수철, 조중묵,허유,이한철, 변인석이었다. 조희룡과 김정희의 이들에 대한 몇몇 평가를 보자.
전기(田琦)는 이 때 '추강심처도'(秋江深處圖)라는 작품을 내었다. 그는 벽오사의 매우언이다. 조희룡은 "고람을 알게 된 뒤로는 막대 끌고 산 구경 다시 안가네. 열 손가락이 봉우리 무더기와 같아 구름안개 바야흐로 한없이 흐르네" 라는 제시를 주었다. 김정희는 "쓸쓸하고 간략하고 담박하여 원나라 사람의 풍치를 갖추었다. 그러나 요즘에 갈필은 석도와 남전 만한 사람이 없으니 다시 이 두 사람을 따라 배우면 문인화의 정수를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한갓 그 껍데기만 취한다면 누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는가"라 지도하였다. 김정희는 여전히 전기가 내용 없이 껍데기만 베끼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원나라 화가들의 심의를 따르지 않는 전기의 그림에 못마땅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다.
김수철이란 화가는 '매우행인도'(梅雨行人圖)를 제출했다. 김수철은 전기와 막역하였으니 조희룡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그 시대 최고의 세련된 감각으로 누구도 흉내 못 낼 휘황스러운 미감을 갖춘 작가였다. 조희룡은 "산을 그리길 실제의 산이 그림 속 산과 같네. 사람들 모두 실제의 산을 사랑하지만 나는 홀로 그린 산에 들어간다오"라는 화제를 써주었다. 김정희는 "배치가 대단히 익숙하고 붓놀림 또한 막힘이 없다. 다만 색칠을 할 때 세밀하지 못하고 또 우산 받치고 가는 사람은 조금 환쟁이의 그림같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한철은 '죽계선은도(竹溪仙隱圖)'라는 작품을 내었다. 이한철은 같은 도화서의 화원인 유숙이 벽오사의 맹원이 되는 등 작품활동에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끌어들인 것과는 달리 일체 외도를 하지 않고 화원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했다. 조희룡은 "가슴 속에 구학(邱壑)이 가득 차 있어 마음 한가하니 붓도 따라 한가롭다. 혜숭의 안개비 속에 곽희(郭熙)의 산을 점찍어 냈구나" 하였다. 그러나 김정희는 "전생의 인연이 있는 솜씨로 붓놀림과 풍경의 선택이 무르익었다. 속세를 벗어난 기운이 조금 부족하다" 하였다.
유숙은 소림청장도(疎林晴 圖)를 내었다. 유숙은 벽오사 맹원이다. 조희룡은 "한 언덕 한 구렁의 정, 이 땅에서 티끌 세상 인연이 되었네. 어찌 그림 속 한가로움을 얻어 한 평생 그림병풍을 보며 살까" 하였다. 김정희는 "그림에는 반드시 손님과 주인이 있어야 하니 이를 뒤집어 놓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 줄 알 수 없게 되었다. 붓 놀림은 재미있는 곳이 있으나 부득이 2등에 놓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화루팔인은 당대 미술계를 대표하던 기린아들이었다. 그들 중 전기(田琦), 유재소(劉在韶), 유숙(劉淑)은 벽오사(碧梧社)의 맹원으로 조희룡과 의형제 지간이다. 김수철(金秀哲)은 전기(田琦)와 막역한 관계에 있었다. 조중묵은 조희룡과 김정희 모두와 관계가 있었다. 허유(許維)는 김정희의 제자이다. 다만 이한철과 변인석이 참석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이한철은 명실상부 당대 제일의 화가란 평판을 얻고 있었다. 그러한 그가 문인화가들의 취미활동에 동참한다는 것은 자존심에 있어 결코 내키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도화서의 전통을 굳건히 지키는 일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임에 참여한 것은 아마도 자신의 후원자 그룹이었던 풍양조씨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던 김정희의 낯을 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조희룡과 김정희가 당대 묵장(墨場)의 양대 영수였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당대 제일을 자부하던 젊은이들이 조희룡과 김정희로부터 평가를 받고자 할 리가 없다. 그들은 양인을 양대 원로로서 대우하고 있다. 조희룡을 추종하는 이들과 김정희를 추종하는 이들의 모임은 당시 지향점이 다르던 예림을 통합하였다. 다양한 입장의 젊은이들이 함께 한 그 날의 행사는 미술품 품평의 자리를 넘어 미술계의 소리대동(小異大同)을 확인하는 화합의 자리였다.
그 모임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문화예술계의 집단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날의 모임을 두고 백 오십년 후의 미술 비평가 최열은 '긴장된' 사건이라고 성격을 부여하였다. 최열의 느낌대로 실제 이들의 화해는 얼마 되지않아 예기치 않았던 사건을 불러왔다. 김정희와 조희룡의 유배가 그것이다. 그러한 조짐의 냄새를 맡았기에 최열은 긴장했을 것이다.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 2개월 후 전기(田琦)와 유재소(劉在韶)가 이초당(二草堂)의 국화 그림자 아래에서 만났다. 그들은 화루와 묵진의 정예들이 받은 양대 영수의 평가를 책자로 엮었다. 그리고 책자의 이름을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이라 하였다. 책 이름의 뜻은 '예림의 갑을(1,2위)을 다툰 기록'이라는 뜻이다.
7.유배 [예송논쟁] 헌종 재위시절 안동김씨와 풍양조씨는 서로 번갈아가며 세도정치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헌종이 죽자 안동김문은 강화도에서 이원범을 데려와 보위에 올렸다. 그리고 안동김문은 풍양조씨 인맥에 대해 압박을 가하였다. 그들은 철종의 친할아버지였던 '진종'의 위패를 어디에 봉안해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를 두고 자신들과 의견이 달랐던 풍양조씨계열의 영의정 권돈인을 공격하였다. 1851년 6월 비난은 권돈인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와 친했던 김정희와 조희룡, 오규일(吳圭一)로 까지 확산되었다. 사간원과 사헌부가 나서 이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였다. "통탄스럽습니다. 김정희는 약간의 재주는 있으나 한결같이 정도를 등졌으며 억측하는 데는 공교했지만 나라를 흉하게 하고 집안에 화를 끼치게 했습니다. 몇년 전 사면을 받아 귀양에서 풀려났으면 조용히 살다가 죽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낌없이 방종하였습니다. 성안에 출몰하여 조정의 일에 간여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이번 일에도 김정희는 우두머리가 되고 아우 김명희와 김상희는 심부름꾼이 되어 간섭하였습니다. 거기에 오규일(吳圭一)과 조희룡 부자는 액정서 소속으로서 하나는 권돈인(權敦仁)의 수족으로, 하나는 김정희의 심복으로 삼엄한 곳을 출입하고 어두운 밤에 왕래하면서 긴밀하게 준비하였습니다."
마침내 권돈인 김정희 조희룡 오규일 모두가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유배에는 겉으로 드러난 예송논쟁 외에도 1851년을 전후해 발생한 국내외의 사건들이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나라밖 중국에서는 멸만흥한(滅滿興漢)과 신분 해방을 부르짖은 태평천국의 난이 있었고 나라안으로는 서자출신들이 자신들도 양반과 동등하게 관직에 진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건의한 '서류통청'이라는 집단행동이 있었다. '서류통청'에는 도화서(圖畵署) 화원들이 79명이나 참여하였다. 조정이 내외의 이러한 신분해방운동에 긴장하지 않았을 리 없다. 더욱이 2년 전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 회동이후 문화예술인들은 신분을 뛰어넘어 서로 교유하면서 활발한 집단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철종은 명령하였다. "김정희의 일은 매우 애석하지만 그가 만약 근신하였더라면 꼬투리를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개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니 북청부에 유배하고 그의 아우들은 향리로 추방하라. 오규일(吳圭一)과 조희룡 두 사람은 권돈인(權敦仁)과 김정희의 심복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으니 절도에 정배하라. 조희룡의 아들은 거론할 것 없다." 조희룡은 전라도 임자도(荏子島), 권돈인(權敦仁)은 강원도 화천, 김정희는 함경도 북청, 오규일(吳圭一)은 전라도 고금도(古今島)로 각각 흩어졌다. 조희룡은 예순셋,김정희는 예순여섯의 노구였다.
[임자도 유배생활] 1851년 8월 22일 유배길에 나선 조희룡은 지금의 전남 신안군 임자도 이흑암 마을에 있던 조그만 오두막집을 유배지 거처로 정하였다. 그는 그 속에 틀어박혀 자신을 유배 보낸 사람들을 원망하였다. 밥맛을 잃었고 잠도 이루지 못하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떤 악업을 지었기에 이처럼 억울한 고난을 당하여야 하나?' 하고 괴로워했다. '살아 돌아갈 희망이 없는데 남을 원망해 본들 무엇하겠는가'라며 스스로 위로해도 해안을 두들기는 파도처럼 분노가 부서져내려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처음 바닷가에 나가 고래가 입을 벌리고 자라가 기어 나오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열심히 시를 지었다. 그러나 시 모두가 위태롭고 고독하고 메마른 것뿐이었다. 유배지에서 시를 짓다가 울적한 심사를 쏟아놓은 것이 잘못 전달되면 불만을 일삼고 있다하여 더욱 엄중한 형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음을 직감하고 시보다 그림에 열중하였다. 자신의 유배지 거소를 만구음관으로 편액하였다. 만마리의 갈매기 우지짓는 집이란 뜻이다. 두어 칸되는 움막집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한 부분은 침소로 정하고, 또 한 부분은 부엌으로 쓰고, 나머지 부분은 그림 그리는 화실로 만들었다. 그 속에서 그는 손 가는 대로 칠하고 마음가는 대로 그어대면서 가슴속의 불만을 표출해 내었다.
[공포, '황산냉운도(荒山冷雲圖)'] 조희룡은 유배초기 절해고도 임자도의 낯선 환경 속에서 공포의 나날을 보낸다. 섬 주위 개펄 위에서 횡행하는 도깨비불이 조희룡을 놀라게 했다. 깜깜한 밤이면 개펄 위로 푸른 빛깔을 띤 도깨비 불이 수없이 나타났다. 많을 때는 땅 가득히 나타나 '쉬-쉬' 소리를 내며 오가곤 하였다. 권돈인의 유배지가 화천에서 경상도 순흥으로 옮겨졌다는 무서운 소식도 들려왔다. 대사헌에서 '권돈인은 옛 선현을 모욕한 사문난적이요 나라의 흉적이니 중도부처가 아니라 그 죄에 해당하는 법을 시행해야한다'고 상소하여 그리 되었다는 것이다. 모골이 송연하였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아직도 그들의 목을 조르려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생각만 해도 간장이 오그라 붙었다. 유배지의 밤은 무서웠다. 집 뒤의 황량한 산 위에서 찬 밤바람이 불어 내려오고 숲 속에서는 귀신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때 조희룡은 '황산냉운도(荒山冷雲圖)'를 그렸다. '거친 산 찬 구름'이라는 뜻의 이 그림에 조희룡은 자신의 심사를 표현하는 글을 썼다.
*그림 : 조희룡,황산냉운도(荒山冷雲圖) 124×26cm,개인소장 “孤寄海島, 目所覩者, 荒山瘴煙冷雲而已也. 乃拓目所覩處, 橫途竪抹以寫臺 鬱之氣, 畵家六法豈爲我輩設耶.”
"외로운 섬에 떨어져 살았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거친 산, 고목, 기분 나쁜 안개, 차가운 공기뿐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필묵에 담아 종횡으로 휘둘러 울적한 마음을 쏟아놓았다. 화가의 육법이라는 것이 어찌 우리를 위해 생긴 것이랴." 조희룡의 두려움과 위기감이 그림에서 흘러나온다. 피할 수 없는 공포가 그림 전체를 감싸고 있다. 그림 속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다면 조희룡이 거주하는 자그마한 집뿐이다.
[유배지에서 얻은 두 제자] 두 명의 앳된 섬마을 소년이 조희룡을 찾아와 배움을 청하였다. 홍재욱(洪在郁)과 주준석(朱俊錫)이라는 나이 스물의 동갑내기 소년들이었다. 조희룡은 그들을 제자로 거두었다. 그들은 낮에는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고, 저녁이 되면 조희룡을 찾아와 공부를 배웠다. 그들은 조희룡의 손발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온종일 일하여 피곤할만도 하건만 물감통을 비우고 먹을 갈고 붓을 씻었다. 조금도 게으름부리지 않고 조희룡을 따르면서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벼루와 붓사이의 일을 배웠다. 글씨를 놀랍도록 잘 썼고 시도 청묘하였다. 조희룡은 역사이래 서화가 없던 섬 지방에 글과 그림을 꽃피울 수 있는 재목들임을 알았다. 재능만이 아니었다. 마음이 따뜻하여 사람을 모시는데 있어 깊은 정이 있었다. 조희룡은 진실로 '물고기와 새우의 고장'(어하지향:魚鰕之鄕)에서 그런 아름다운 젊은이들을 얻어 자신의 시름을 위로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유배지에서의 작품활동]
-화아일체 임자도 유배는 조희룡에게 가장 큰 위기였다. 조희룡은 유배지 만구음관 속에서 그림에 몰두하였다. 원망과 외로움의 시기가 지나자 그런대로 유배생활에 적응하게 되었다. 섬에 사는 사람들의 작으나 진솔한 삶의 모습이 보이게 되면서 유배지에 대해 애정을 느꼈다. 섬마을 사람들의 고기잡이 일과 사대부들의 글공부가 다를 바 없고 하찮은 고기잡이에게까지 연하의 기운이 넘쳐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섬 생활이 받아들여지자 상상할 수 없었던 변화가 그의 마음에 일었다. 임자도가 파도 속에 핀 그림이 되어 다가왔다. 자신이 그 그림 속에 살고 있었다. 과거 즐겨 그렸던 황량한 산과 고목, 엉성한 울타리와 초가집이 바로 유배지에서의 게딱지 집이었다. 자신이 그림 속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조희룡은 자신 스스로가 그림 속의 한 물체가 되었고 그림 속의 존재가 그림 그리는 일을 하니 곧 그림 속의 그림이었다. 조희룡은 화아일체(畵我一切)의 경지를 체험하였다. 조희룡은 유배기에서 그의 그림이론이 완성되고 화가로서의 기량도 최고조에 이르렀다. 63세의 노구를 이끌고 만구음관 게딱지 집에서 창작활동에 전념한 결과 당호가 있는 그의 작품 총 19점 가운데 8점이 이시기에 집중되어 있을 정도로 수많은 그림을 생산하였다. 더욱이 그 시기의 작품 상당수가 병풍이나 화첩, 대련일 정도로 대작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유배가 개인적으로는 불행이었으나 그의 예술혼을 불사른 축면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괴석도 임자도에서 만난 김태(金台)라는 유배인을 통해 바닷가의 괴석을 그리게 되었다. 김태는 함경도 회령에서 수군 통제사를 지낸 인물이었다. 그는 조희룡보다 2년 앞서 그곳에 유배되었다. 바닷가의 '괴석'을 모으며 유배의 외로움을 삭히던 그와 사귀며 조희룡은 괴석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지금까지는 거의 취급하지 않았던 '괴석도'를 그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실제의 돌을 사랑하지만 나는 그림 속의 돌을 사랑한다. 실제의 돌은 외부에 존재하고 그림 속의 돌은 내면에 존재한다. 그런즉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거짓 것이 되고 내면에 존재하는 것은 참된 것이 된다."
김태와 함께 괴석을 사이에 두고 사귀면서 괴석도의 화법을 새로이 터득하였다. 그는 농묵과 담묵을 마음 내키는 대로 종이 위에 떨어뜨리고 큰 점 작은 점을 윤곽의 밖까지 흩뿌려 농점(濃點)은 담점(淡點)의 권내로 스며들게 하고 담점은 농점의 영역에 서로 비치게 하였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준법(皴法)과 전혀 다른 방법이었으나 괴석 특유의 기이한 격이 새로 나타났다.
-매화도 조희룡의 특장은 매화이다. 매화도에 있어서 우리나라 회화사상 조희룡과 비견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의 매화도는 거침없이 격렬하며 화려하다. 임자도 유배지에서 조희룡의 매화도는 더 이상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유배지에서조차 그의 매화도는 주문이 밀렸다. 영광군수가 술 실은 돛단배를 보내 매화도를 청하였고 서울의 친구들도 매화도를 찾았다. 친구 유최진에게 옆에 걸어놓고 자신을 보듯 하라며 '만매서옥도(萬梅書屋圖)'를 그려 보냈고 아우 전기에게도 보내주었다. 유배지의 조희룡에게 가장 많은 그림을 요구한 이는 그림 수집에 취미가 있던 벽오시사의 동생 나기(羅岐)였다. 그의 그림요청은 그를 가만 놓아두지 않았다. 손가락이 망치를 매단 듯이 무거운 날이라도 나기의 요청에 응해야 했다.
"개펄 독기서린 바닷가에서 곤경에 빠져 있는 나에게 편지를 보내와 매화그림을 그려 달라 한다. 그의 맑은 마음속을 상상해 볼 수 있겠다. 죽지않고 살아 잠시라도 고향에 돌아가 나기(羅岐)와 같이 좋은 벗들과 함께 매화음을 벌일 수 있을까?" *그림:나기에게 준 매화 추운 날이면 추위에 곱은 손을 녹이며 매화도를 그렸다. 서울의 친구들이 임자도에 찾아와 그를 위로한 다음 매화도를 부탁하고 올라갔다. 조희룡은 친구들의 그림부탁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고마운 일이나 되는듯 정성을 다하였다. 어떤 날이면 매화의 화폭이 너무 커 달팽이 같이 작은 집속에서 그리지 못해 눈 내린 땅에 펼쳐 놓고 붓을 휘두르기도 했다. 그림을 그린 다음 서울로 올라갈 인편을 구하여 어깨에 메고 올라가도록 하였다.
홍백매화도 8폭
*그림:임자도에서 그린 대작병풍
대작의 매화도를 그리려면 먹물을 많이 담을 수 있는 대형벼루가 필요하였다. 그 벼루는 우연히 얻은 남포석(藍浦石) 돌을 쪼아 만든 벼루를 사용하였다. 남포석 돌을 얻었으나 다듬을 힘도 없어서 평평한 부분을 대충 오목하게 쪼아 겨우 먹물 한 되들이 벼루를 만들었다. 엉성하게 움푹 패인 벼루에 먹을 갈아, 촌 늙은이가 쓰는 서푼짜리 큰 개털 붓으로 한 발 여섯 자 크기의 홍백매도를 그렸다. 힘들고 구차하였으나 좀벌레처럼 늙고 개똥벌레처럼 말라가는 조희룡에게는 과분할 뿐이었다. 임자도에서도 용매도를 그렸다. 그 그림은 이화여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매화도는 조희룡이 임자도 이흑암리 앞바다에서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는 오룡의 이야기를 듣고 그린 그림으로 추정된다. 조희룡은 임자도에서 실제로 용을 볼 뻔하였다. 천둥이 치고 비가 크게 오던 어느날 새벽 갑자기 사람들이 다투어 소리를 치고 있었다. "오룡(五龍)이 승천한다!" 조희룡이 놀래 급히 문밖으로 뛰어 나갔다.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이미 용은 사라지고 난 뒤였다. 사람들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그에게 용의 형상을 설명하였다. "마치 기둥과 같은 꼬리가 늘어져 말렸다 풀렸다 하면서 유유히 동그라미를 그리다가 구름사이로 들어가 없어졌어요" *그림:이화여대 소장의 매화도 조희룡의 매화도는 유배기간 중 최고의 경지에 오른다. 고목등걸에 연분홍 입술 연지같은 꽃을 피워 올려놓은 그의 묵매도는 먹이 피워 올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매화는 검은 곳에서 피어오른 순결한 백과 홍의 세상이었다. 격렬한 동선위로 그윽한 향기와 발군의 색감과 고결한 영혼이 흐른다. 조희룡이 기나긴 몰입의 과정을 통해 피어올린 매화는 아름다웠다. 미술 평론가 최열은 그의 매화를 "조희룡 이후 조희룡만큼 흐드러진 매화그림을 그린 이를 알지 못한다. 19세기 중엽 화단에 우뚝 서서 화려하고 섬세하며 풍요로운 양식의 매화를 그렸다."고 평했다.
-묵죽도 조희룡은 서울에서는 대나무는 거의 그리지 않고 주로 매화와 난을 그렸었다. 그러나 만구음관 주변의 오죽을 보며 대나무의 세계에 다른 눈을 갖게되었다.
*그림 : 조희룡,묵죽도(墨竹圖) 127.0×44.8cm,8폭병풍 중 하나,지본수묵,국립중앙박물관
그것은 '성난 기운으로 대나무를 그린다(怒氣寫竹)' 라는 대가 가진 분노의 세계였다. 조희룡의 유배지 만구음관 주위에는 오죽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의 집앞에 오죽을 심어 기르면서 대나무와 함께 마음속의 울분을 나누었다. 유배가 없었더라면 조희룡은 분노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그의 대나무 그림에 숨겨져 있다.
-산수화 이론의 수정 유배후기에 들어서면서 조희룡은 산수화 그림에서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되었다. 영향을 받지 않은 화가가 없을 만큼 후대의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송나라의 '곽희'가 수립한 산수화 이론을 수정하였다. 곽희는 '산수화는 자연의 의미를 표현하여 조정의 사대부가 집안에 앉아 산수화 감상을 통하여 산천에서 자유롭게 소요하는 것처럼 정신적 만족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계절에 따라 산이 변화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이 말은 훗날 깊은 영향을 주어 화가들이 산수를 그릴 때 절대의 기준이 되었다. "봄산은 담담히 꾸미어 미소짓는 것 같고, 여름산은 짙푸르러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고, 가을 산은 산뜻하여 분바른 것 같고, 겨울 산은 참담하여 조는 것 같다" 유배 초기 공포에 떨던 조희룡은 유배생활이 계속되면서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유배 2년, 그는 바다 섬의 사계를 모두 겪어 보았다. 바닷가의 산은 계절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면서 곽희의 그림으로는 설명되지 않은 조선의 미감을 조희룡에게 선보였다. 조희룡은 겹겹이 펼쳐지고 안개 몽롱하고 쌓여있듯 울창한 조선의 산수를 이렇게 정리하였다. "봄산은 어둑하고 몽롱하여 안개가 낀 듯하고, 여름산은 깊고 울창하여 쌓여 있는 듯하고, 가을 산은 겹치고 끌어당겨 흐르는 듯하고, 겨울산은 단련되어서 쇳덩이와 같다." - 유배지에서의 집필활동 조희룡은 만구음관(萬鷗唫館) 호롱불 아래서 두 제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집필활동을 전개하였다.그가 임자도에서 쓴 책은 모두 4권이다. 섬에서 겪은 일들과 자신을 유배 보낸 사람들을 원망하다가 마음속에서 화해한 내용을 기록한 산문집 《화구암 난묵(畵鷗 墨)》이 있고, 해배 될 때까지 자신의 마음의 행로를 기록한 시집 《우해악암고(又海嶽庵稿)》, 가족들에게 보낸 절실한 사랑과 친구들에게 보낸 우정의 편지글을 모은 《수경재해외적독(壽鏡齋海外赤牘)》을 집필했다. 또 청년 시절 이후 치열했던 예술혼을 담은 그림이론서《한와헌제화잡존(漢瓦軒題畵雜存)》을 정리하였다. 이러한 저서들은 19세기 문화예술계의 모습을 알려주는 중요한 가치를 가진 책이 되었다. '화구암 난묵'의 서문이다. "서울 번화한 거리 속에서 황량한 산과 고목 그리기를 좋아했다. 엉성한 울타리와 초가 사이에 사람을 그려 넣지 않아 그림 속의 집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집이 지금 내가 사는 집이 되었으니 명나라 동기창이 말한 화참(畵讖)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참(讖)이란 머지않아 닥칠 일의 조짐을 말하는 것이니 지금 나의 바다 밖 귀양살이는 진실로 면할 수 없는 것이었는가? 연기와 구름, 대나무와 돌, 그리고 갈매기가 지금 나에게 그림의 정취를 주고 있으니 내 어찌 그림 속의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실제의 산과 물은 사람마다 알고 있지만 그림으로 그린 산과 물은 그림을 아는 자가 아니면 알 수 없다. 그림은 실물이 아니어서 사람의 필묵과 기백과 운치에 따라 그 이치가 다양하다. 이 때문에 그림을 아는 자는 드물다. 나의 저서 '화구암난묵'을 보는 사람들도 이것을 한 폭의 졸렬한 그림쯤으로 보지 않을까? 그림을 그리는 자가 6법을 궁구하지 않고 함부로 칠하고 그어대놓고 칭찬 받기를 바란다면 어리석거나 아니면 망령된 일이다. 책을 쓰는 것도 어찌 그림 그리기와 다르다 하겠는가? 개펄 독기 서린 바다의 적막한 물가에서 얻은 이 책을 하찮은 것쯤으로 돌려버리지 못하는 것은 차마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 버릴 수 없는 것이라 하여 다른 사람에게까지 버리지 말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한번의 웃음거리를 마련해 보는 것이다. 조희룡이 만구음관 가을 등불아래에서 쓴다."
6. 유배기 후의 은거생활
1853년 3월 18일, 조희룡은 마침내 해배되어 임자도를 떠나게 되었다. 만구음관을 나서며 마당의 대나무와 작별인사를 하였다. 유배를 와 수심 속에 심었던 오죽이 훌쩍 자라 자신보다도 더 커져 있었다. 3년 세월의 만단정회가 대나무 잎 잔가지에 걸려 흔들거렸다. "나의 정 도리어 무정한 곳에 극진 했거니 어찌 어조(魚鳥)에게만 그랬으랴 창 앞 두어 그루 대나무 있어 꼿꼿하게 붙들고 지켜준지 삼년이었네"
조희룡은 거룻배에 올라 임자도를 떠났다. 거룻배 위에서 임자도와 환송하는 제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는 서울로 돌아온 후 공식적인 생활을 자제하며 근신하며 지냈다. 김정희와 권돈인(權敦仁)이 해배 이후 은거하며 지냈던 것으로 보아 조희룡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김정희의 두 번째 유배를 전후하여 '유배를 다녀왔으면 조용히 있다 죽을 일이지 함부로 돌아다녔다'고 김정희를 비난하였던 조정의 정서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배에서 돌아온 조희룡의 주변여건은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젊은이들은 몰라보게 자라있었고 친구들은 늙어있었다. 그 동안 조희룡이 애써 구해두었던 수십개의 명품벼루들도 모두 흩어져 버렸다. 그의 유배비용을 대기 위하여 가족들이 내다 판 것이었다. 벼루뿐만이 아니었다. 벽오시사의 친구들도 앞서거니 뒷서거니 그를 떠나갔다. 벽오시사의 중심인물이 되어 눈부신 활동을 했던 전기가 봄날의 꽃잎처럼 바람에 날려 떨어졌다. 갑자기 병에 걸려 침과 약을 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짧은 서른 해였다. 조희룡의 조사는 목이 메인다.
"자네가 별안간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때부터 이 인간 세상에 진 빚을 갚을 길이 없게 되었구나 흙덩이가 무정한 물건이라고는 하지만 어찌 이 사람의 열 손가락을 썩히고 말 것인가" 自子遽爲千古客 塵 餘債意全孤 雖云土壤非情物 果朽斯人十指無
1856년 겨울 김정희도 타계하였다. 조희룡은 김정희와 자신과의 인연이 다하였음을 아쉬워하면서 만사를 영전에 바쳤다. "완당 학사의 수는 70하고도 하나. 봄이 짧아 500년만에 다시 오신 분. 하늘에서 지혜의 업을 닦으시다가 인간세상에 잠시 재상의 몸으로 현신하였습니다. 강과 산악같은 기운은 쏟아 놓을데 없었고 팔뚝 아래 금강처럼 강한 붓은 신기가 있었습니다. 예도 지금도 아닌 별도의 길을 열어나갔으니 정신과 능력이 이른 곳은 금석학(金石學)이었고 구름과 번개 무늬는 글씨로 무늬를 덮었습니다. 빛나고 평화로우면 응당 일이 생기는 법, 어찌타 삿갓 쓰고 나막신 신고 비바람 맞으며 바다 밖의 문자를 증명하였을까요. 공이시여! 공이시여! 고래를 타고 가셨습니까? 아! 아! 만가지 인연이 이제 다 끝났습니다. 책 향기 땅으로 들어가 매화로 피어나니 이지러진 달, 빈 산 속에 달을 가리웁니다. 침향목 깎은 상은 잘 부서지니 백옥으로 쪼고 황금으로 빚으리다. 눈물이 저같이 박복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옵니다."
- 문인화의 흐름 조선문인화의 흐름을 이어갈 아이가 나타났다. 벽오시사의 유숙이 일자무식이었으나 그림재주가 비상한 장승업이라는 아이를 제자로 거두었다. 그 아이가 훗날 벽오사(碧梧社) 시대 조선 문인화의 여러 세상을 수렴하여 완성해 내게 된다. 장승업(張承業)의 대작 10폭 병풍 '홍백매도'는 조선 문인화가 낳은 절정의 아름다움을 담은 작품이다.
吾園 張承業 紅白梅圖 十曲屛圖 [오원 장승업 홍백매도10곡병] 종이에 엷은 먹, 90 × 433.5 cm, 호암미술관 소장. *그림:장승업의 10폭 병풍 홍백매도
중앙에서 엄청난 규모감으로 팔을 벌리고 뻗어나간 매화나무 두 그루의 힘은 장엄하다. 꿈틀대는 먹선을 따라 눈송이처럼 흩뿌려진 흰색 붉은 색 매화송이들이 비상한 생명감을 자극한다. 조희룡의 그림에서 흘러나오는 매화도의 맥이 장승업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조희룡의 매화법에 그 연원을 두고 있음이 한눈에 분명하다. 장승업의 그림에 '서권기문자향'이란 없다. 장승업의 시대에 오면 그의 앞 시대 선배들이 그토록 고민하고 상대방을 비난했던 기준들은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장승업의 그림에는 김정희가 말한 '서권기문자향'이란 정신성을 던져버린 채 벽오사의 '수예이념'에 가득 차 있다. 김정희가 지키고자 했던 '중국 남종 문인화'의 '정신성'은 조희룡의 '즐거움의 정신'으로 해체되고 '조선의 색감과 조선의 아름다움'이 가미되어 있다. 중국정통문인화는 1857년 김정희의 제자 허유가 진도로 귀향하면서 호남 남화로 이어졌다. 허유는 고향 진도에 운림산방을 짓고 자신의 그림세계를 열어나갔다. 그의 그림은 후손들과 제자들에 의해 내림되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쳐오면서 물려받은 중국 정통 남종 문인화 특유의 이념미에 새로운 시대미를 더해갔다. 나라를 몽고족에게 빼았겼던 원 4대가의 이념미가 김정희에의해 도입되었고 그 상실의 정서가 다시 허유와 그의 제자들로 대물림되었다. 나라 잃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유민들은 이들의 그림에 정서적 공감대를 느끼며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받을 수 있었다. 1861년 1월 15일, 조희룡과 벽오사(碧梧社)의 옛친구들이 모여 시회를 가졌다. 조희룡이 모임을 원하여 유최진(柳最鎭), 한치순, 이팔원(李八元), 이기복(李基福), 김익용이 참석하였다.
풍속화 콘텐츠 벽오사소집도
유숙, <벽오사소집도>, 지본담채, 14.9x21.3cm, 서울대학교박물관 *그림 : 유숙(劉淑),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 14.9×21.3cm,지본담채(紙本淡彩),서울대박물관
이날 조희룡은 한 폭의 난을 치고 시를 지었다. 제자이자 후배였던 유숙(劉淑)으로 하여금 정경을 그리도록 하였으니 그것이 서울대 박물관 소장 '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 이다. 벽오사소집도는 조희룡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유일한 그림이자 조선문인화를 창안했던 벽오사 모임의 실경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 속에 조희룡이 있다. 그는 나이 서른에 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하였고 수렴이 성성했다. 네모얼굴에 성긴 수염과 칠척의 풍모를 갖고 있었다. 칠척이라 하면 2m가 넘는 큰 키이다. 전체적으로 엉성 삐쭉하였다 한다. 그를 아는 사람들도 그의 외모를 "휘적휘적 학 나린 들판의 가을 구름"이라고 문학적으로 표현하였다. 벽오사소집도 중 가운데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가 조희룡이다. 그는 묵장의 영수라는 후인들의 평가처럼 모임의 한 가운데 학처럼 앉아 자신 이후 500년을 이어갈 조선문인화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은거 조희룡은 자신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강가에 집을 마련하고, 은거에 들어갔다. 사람들도 만나려 하지 않았고 서세동점이 가져오는 세상의 파열음에도 귀기울이지 않았다. 조희룡의 은거지로 유재건(劉在建)이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집필 중이던 위항지사들의 시를 모은 《고금영물근체시(古今詠物近 詩)》의 원고를 보여주었다. 조희룡은 감탄하였다. 젊은 날의 자기처럼 위항지사들의 언행과 시문들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취미로 모으고 있을 뿐이라 했으나 조희룡은 출판을 권유하면서 서문을 자청하였다. "위항(委巷)사람들의 글은 지는 꽃, 흩어지는 수초와 같은데 누가 주워 모으겠는가. 나 또한 위항(委巷)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후세 사람들이 위항(委巷)지사들의 시문학의 융성함을 알 수 있게 하였으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랴" 한해 뒤, 유재건이 또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이란 책을 탈고한 다음 다시 조희룡을 찾아왔다. 자신의 호산외기처럼 보통사람들의 일생을 전기형식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조희룡이 또 서문을 잡았다. "벼슬이 높고 글을 잘 쓴 사람들의 이름이 세상에 전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위항지사에 이르러서는 칭찬할 만한 업적까지는 가지고 있지 않다손 치더라도 혹 언행과 시문 중 전할 만한 것이 있는 경우라도 모두 풀처럼 시들어가고 나무처럼 썩어버리는 실정이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 책을 저술한 것은 참으로 큰 의미가 있다" 조희룡에게 '위항지사'란 집단의 의미는 각별하다. 조희룡에게 '위항지사'란 조선후기 변혁의 시대에 신분을 뛰어넘어 조선의 국제화를 추구하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시서화에 깊은 소양을 가지고 아래로는 하층민신분으로부터 위로는 영의정, 세도집안의 사대부, 심지어 왕족까지도 포함된 집단적 교류를 가졌다. 조희룡은 이러한 '탈신분의 특수집단'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대두되고 있음을 문화예술계 인사로는 최초로 발견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호산외기》와 《고금 영물근체시》의 서(序), 《이향견문록》의 서문이 바로 그러한 의미부여의 작업이었다. 몇 안되는 위항지사들에 대한 기록물이 조희룡의 손을 거치고 있다는 점을 통해 조희룡의 역사적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조희룡은 역사공간에 나타난 특수집단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들을 규합하였으며, 그들의 언행에 대한 기록화 작업까지를 마친 연출가였다.
그런 점에서 오세창이 조희룡을 '묵장의 영수'라고 한 것은 너무도 예리한 지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조희룡에 대해 세 가지의 평가가 있어왔다. 하나는 당대의 실력자들인 안동김문의 시각이다. 그들은 조희룡의 이러한 행동을 정치적 행동으로 평가하고 탄압하였다. 조희룡의 특이한 활동에 대해 위기감을 가진 그들은 김정희를 유배보낼 때 조희룡도 묶어 함께 유배해버렸다. 그들의 대응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조희룡 유배 이후 조희룡의 동료들의 활동은 현저히 둔화되었다. 벽오사(碧梧社)는 사실상 힘을 잃었다. 오세창의 '묵장의 영수'라는 평가는 날카로운 것이다. 그러나 이 평가도 조희룡의 주도적 역할만을 인식하였을 뿐 탈신분이라는 특수집단을 최초로 인식한 사람이었다는 점은 놓치고 있다. 조희룡의 의미는 '묵장(墨場)'이라는 곳에 가두어두기는 너무도 아깝다. '서권기와 문자향이 부족한 조희룡의 무리'라는 김정희의 평은 제대로 된 평가가 아니다. 김정희는 '무리'지어 움직인다는 것까지만 보았지 그 '무리'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조희룡은 그림세계에서 조선후기 탈신분 계층을 최초로 발견하였고 문인화를 조선화 시킨 영수였고, 시서화 삼절을 추구하던 지식인이었으며 나아가 이를 역사적 의미로 짚어낸 역사인이었다.
10. 조희룡의 사망 조희룡이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866년 7월 11일의 일이었다. 후손으로는 진주진씨와의 사이에 규현(奎顯), 성현(星顯), 승현(昇顯)의 세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그는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중곡리에 안장되었다. 1929년 이후 증손자 조명호가 개성에서 인삼조합 간부가 되면서 북한소재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영통동 가족묘지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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