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27. 02:14ㆍ美學 이야기
향은 똑같을지라도 먹빛은 다 다른 법이오
조정육 2013.02.26 07:18
-그림, 삶을 그리다 ⑦오달제, <묵매>/조희룡, <매화>
“향은 똑같을지라도 먹빛은 다 다른 법이오”
매화는 겨울 추위가 끝나지 않은 이른 봄에 핀다. 눈 속에서 피는 꽃이라서 설중매(雪中梅)라 한다. 잎사귀도 없는 메마른 고목에서 고운 꽃송이들이 방울방울 피어날 때 생명의 경이로움과 신비함이 눈부시다. 매화는 꽃이 되고 싶은 열망이 사무쳐 겉옷도 걸치지 않고 속곳차림으로 뛰쳐나온 꽃이다. 연약한 꽃잎이 확신을 갖고 열어가는 아름다움의 세계는 두려움이나 망설임 같은 흉흉한 단어가 발붙일 곳이 없다. 실망이나 절망 같은 쪼잔한 단어도 입장불가다. 오직 생기, 열정, 기다림, 은근함 같은 싱싱한 단어만 허락된다. 수준이 비슷해야 대화가 통하는 법. 매화 곁에 있으려면 희망과 설렘과 기대와 끈기 같은 기품 있는 봄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매화는 난초, 국화, 대나무와 더불어 사군자(四君子)로 분류된다. 사군자는 도덕적인 품성이 훌륭해 존경받을 만한 사람을 빗댄 표현이다. 또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을 대표하는 꽃이다. 매화가 사군자로 칭송받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꽃과 향기가 청순하고 맑기 때문이다. 겨울로 상징되는 고난의 시간이 힘들다는 의미도 담겨 있으리라.
오달제, <묵매>, 종이에 먹, 104.9×56.4cm, 국립중앙박물관
절개와 지조의 상징을 그린 오달제
살아있는 나무일까. 보는 사람의 안타까움이 전해지기라도 한 듯 늙은 매화 등걸에서 새로 난 가지가 하늘로 뻗어 있다. 가지에는 흰 매화꽃이 듬성듬성 달렸다. 매화나무의 몸체는 서예의 비백(飛白)처럼 먹빛 속에 흰 부분이 드러나게 하는 필법을 써서 고목의 느낌을 잘 살렸다. 새로 돋아 난 줄기는 비백 대신 몰골(沒骨)을 썼다. 속이 들여다보일 듯 여린 가지의 느낌을 전해주기 위함이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좌측에서 우측으로 휘어지면서 뻗은 매화나무의 배치가 자칫 진부할 수 있는 단조로움을 걷어냈다. 오달제(吳達濟:1609-1637)가 그린 <묵매>는 전체를 먹 한 가지 색으로만 그려 담백함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오달제는 매화꽃의 외형적인 아름다움에는 관심이 없다. 붉은 꽃이든 흰 꽃이든 꽃 색깔도 무관심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매화가 지닌 상징성이다. 사람들은 추위를 이기고 꽃이 핀 매화를 보고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한다. 추위는 외부적인 시련이다. 살면서 맞닥뜨리는 완강한 불행이다. 눈 속에서 매화꽃이 피었다는 것은 중첩된 위기를 극복하고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는 뜻이다.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헝클어지지 않고 지조와 절개를 지켰다는 의미다. 매화가 보여준 상징성은 의식 있는 선비라면 마땅히 지키며 살아야 하는 묵직한 삶의 철학이다. 선비들은 중국의 북송(北宋:960-1124) 때부터 사군자를 문인화의 소재로 그렸다. 그림을 보면서 자신이 견지해야 할 삶의 자세를 다잡기 위함이었다. 오달제도 그런 선비 중의 한사람이었다.
윗부분이 잘렸으면서도 끝끝내 견디며 온전한 꽃을 피워내는 <묵매>는 오달제의 특별한 삶과 대비되면서 충절의 메아리처럼 느껴진다. 그는 병자호란 때 조선이 청나라에 무릎 꿇는 것을 반대한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이다. 결국 뜻을 굽히지 않아 청에 잡혀가 죽임을 당했다. 오달제의 의로운 충절을 기려 영조(英祖:1694-1776)는 어제시(御製詩)를 내렸고, 그의 현손 오언유(吳彦儒)는 그 내용을 화면에 기록했다. <묵매>는 오달제의 다짐이자 삶의 기록이다. 상징과 다짐이 분리되지 않듯 삶과 그림도 쪼갤 수 없다. <묵매>는 오달제다.
조희룡, <매화도>, 종이에 연한 색, 113.1×41.8cm, 고려대학교박물관
무거운 상징을 걷어내고 매화의 민낯에 주목한 조희룡
매화를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면 안될까. 고운 모습에 취해 감탄사를 터트리는 대신 지조 있고 절개 있는 군자의 표상으로써만 바라 봐야 할까. 정신세계를 건성으로 보고 외양을 중요시하면 격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손가락질당할까. 어몽룡(魚夢龍:1566-?), 허목(許穆:1595-1682), 조속(趙涑:1595-1668), 오달제 등 많은 선비화가들이 매화의 겉모습이 아닌 상징성을 높이 샀다. 그들은 한결 같이 군자의 덕을 지닌 매화를 칭찬했다.
이런 경직성에 반기를 든 작가가 중인 출신 화가 조희룡(趙熙龍:1797-1859)이다. 그는 매화에 강요된 상징성을 걷어내고 외형적인 아름다움과 조형성에 주목했다. 그는 조선 중기까지의 보수적인 매화 그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회화관을 표현한 독창적인 작품을 제작했다. 조희룡의 <매화도>는 오달제의 <묵매>와는 전혀 다른 미감이 반영된 작품이다. 꿈틀거리듯 굴곡진 굵은 둥치에 흰 매화와 붉은 매화가 격렬하게 피었다. 매화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기에는 단색보다 채색이 더 적절하다. <매화도>에서처럼 조희룡이 흰 매화보다 붉은 매화를 선호했던 이유도 수신(修身)용이 아닌 감상용 회화를 의도했기 때문이다. 이끼가 낀 듯 두꺼운 나무껍질과 어지럽게 뻗은 잔가지들이 ‘미친 듯이 칠하고 어지럽게 긋는다(狂塗亂沫)’는 몰입의 순간을 대변하는 듯하다. 파격적인 붓질과 표현력이다. 거칠 붓질과 채색이 두드러진 <매화도>에서 지조와 절개 등의 상징성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조희룡은 오히려 앞 시기 작가들이 극구 감추려고 했던 손재주를 자신 있게 드러냈다.
장식성이 강조된 조희룡의 매화는 사의성(寫意性)을 중요하게 여기던 그의 스승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예술관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는 ‘글씨와 그림은 모두 솜씨에 속하는 것이니, 그 솜씨가 없으면 비록 총명한 사람이 종신토록 그것을 배울지라도 능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능한 솜씨는) 손 끝에 있는 것이지, 가슴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예술관을 피력했다. 김정희는 조희룡과 정반대 입장이었다. 김정희는 수많은 책을 읽고 수 만 리의 여행을 한 후에 얻을 수 있는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묻어 나와야 진정한 그림이라고 평가했다. 김정희는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고 안목이었다. 그런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조희룡이 당당하게 자신의 예술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그것도 신분이 낮은 중인 출신 화가로써 말이다.
조희룡 같은 개성 있는 작가가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시대배경도 한몫했다. 매화는 조선 말기의 여항문인화가들이 특히 좋아하는 소재였다. 조희룡을 비롯하여 김수철(金秀哲:?-?), 전기(田琦:1825-1854), 허련(許鍊:1809-1892), 유숙(劉淑:1827-1873)등이 모두 매화에 빠졌다. 그들의 매화 사랑은 장승업으로 계승되어 근대 화단으로 전해졌다. 그 출발점에 조희룡이 서 있다. 무릇 예술가는 어떤 자세로 작품에 임해야 하는 지 조희룡은 <매화도>로 보여주었다. 전통을 아끼되 얽매이지 말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것. 거기에 창조가 있다. 그림도 글도 그리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포스코미술관(02-3457-1665)에 가면 매화 전시회가 한창이다. 심심산천에 숨은 매화를 보지 못해 애달파하지 말고 미술관으로 탐매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이 글은 '이데일리' 2013년 2월 25일자에 실렸습니다.
blog.daum.net/sixgardn/15770585 조정육의 행복한 그..
'美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37강(치운/趙熙龍조희룡) 1789정조(13년)~1866 (0) | 2016.04.27 |
---|---|
조희룡의 생애와 예술 (0) | 2016.04.27 |
중국, 중인에서 시작한 묵매 (0) | 2016.04.27 |
조희룡/ 畵我一體 (0) | 2016.04.27 |
조희룡 <호산외사>(1980) (0) | 2016.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