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포와 매화도 매화가 언제부터 그림으로 그려졌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6세기 무렵의 무덤 벽화에서 매화가 등장하는 것을 볼 때 그 유래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후 회화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게 되는 당나라 때부터 화조화의 일부로서 그려지기 시작했다.
북송 시대에는 문인들이 회화 이론을 발달시켰는데, 매화를 상찬하는 글과 함께 시가 발달했다. 이에 따라 매화도 또한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즉 매화도는 문인화로서 문사(文士)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그림이 되었다. 여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사람이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아들 삼아 고산에 은거하던 북송의 대표적인 은일시인 임포였다.
특히 그의 시 「산원소매(山園小梅)」에 나오는 ‘성긴 그림자(疎影)’, ‘은은한 향기(暗香)’, ‘달그림자(月黃昏)’ 등의 시어는 후대까지도 매화도의 화제(畵題)로 널리 애용되었다.
이때부터 달과 함께 그린 ‘월매도(月梅圖)’, 물가에 가지가 거꾸로 자라는 도수매(倒垂梅), 비스듬히 비껴 나온 한 가지 등이 그려지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는 임포가 고산에서 은거하는 모습을 그린 ‘매화서옥도’ 또한 유행하게 되었다.
2. 중인, 최초의 묵매화가 신종(神宗) 때 화광사(華光寺)의 주지였던 중인(仲仁)은 먹으로 매화를 그린 최초의 묵매 화가였다. 이 때부터 묵매도(墨梅圖)가 시작되었다. 현재 중인의 그림은 남아 있지 않다.
중인의 화법은 남송으로 이어져 양무구(揚无咎)의 <사매도(四梅圖)>에서 그 전형을 읽을 수 있다. 양무구는 물기 없는 붓으로 가는 줄기에 꽃이 적은 늙은 매화를 그렸다. 그는 다른 작품에서도 간결한 구도에 고목의 한 가지를 간략히 표현하여 응축된 정신성을 보여 주었다. 더구나 그는 꽃잎을 윤곽에 따라 그리는 권법(圈法)을 창시하여 묵매법을 더욱 발전시켰다.
한편 마원(馬遠)과 마린(馬麟) 같은 궁중화가들은 매화를 문인 사대부들의 초탈한 아름다움과는 달리 섬세하고 고운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마린은 <매화도(梅花圖)>에서 대나무와 함께 매화를 그렸는데 이는 흔히 ‘궁매(宮梅)’라고 부른다. 매화의 가는 줄기와 호분을 바른 정교한 꽃잎은 아직 간택받지 못한 궁녀의 냉담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남송 시대는 매화에 대한 열정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기로, 매화도는 문인화가와 궁정화가들에 의해 가장 애호되는 화재였다.
3. 세한삼우와 사군자 매화를 세한삼우(歲寒三友) 즉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그리거나 사군자(四君子) 즉 난초, 국화, 대나무와 함께 그리기도 했다. 이 외에도 매화와 수선화를 함께 그리거나, 대나무나 돌과 함께 그리기도 했다.
이처럼 매화에서 군자의 성정을 읽어 내어 그림으로 표현한 것은 오래되었지만, 이를 몇 개로 묶어 특별한 이름을 부여한 것은 더 후대의 일이다.
사군자가 함께 그려진 것은 명나라 후기에 이르러서였다. 1621년에 간행된 황봉지(黃鳳池)의 화보 『매죽란국사보(梅竹蘭菊四譜)』에는 네 가지 식물을 함께 다루었다. 이 무렵부터 사군자를 함께 그렸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세한삼우를 함께 그린 것으로는 조맹견(趙孟堅)의 <세한삼우도(歲寒三友圖)>가 유명하다. 조맹견은 송나라 왕가의 한 사람으로 몽고족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여러 폭의 세한삼우도에 쏟아 냈다. 조맹견은 세한삼우를 통해 역경 속에서 지조를 지켜 나가는 유교적 미덕을 표현했다.
4. 매화도의 대가 왕면 매화도는 원나라 때부터 의미가 크게 변하지는 않지만 표현상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원나라에서 매화도로 가장 이름을 떨친 화가는 왕면(王冕)이었다. 그는 관리의 꿈이 좌절되자 생계를 위해 화가의 길을 택했다. 그의 그림은 크기와 재료, 화풍이 다양한데 이는 다양한 후원자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왕면을 통해 작품이 상품으로 변환되는 관행을 볼 수 있다.
왕면의 <묵매도(墨梅圖)>는 줄기가 S자 모양으로 휘어져 내려오고 가지에는 꽃봉오리들이 가득하다. 그의 필법 또한 빠르고 경쾌하며 활달했다. 화면에는 자신의 시와 함께 당대의 유명한 문인들의 제발(題跋)과 시들을 가득 넣었다. 시어에서는 여전히 문인들의 정신을 노래하고 있지만, 그 표현 방식은 크게 변화되었다.
동 시기 필묵의 묘를 가장 잘 살린 그림으로는 추복뢰(鄒復雷)의 <춘소식도(春消息圖)>가 있다. 추복뢰는 묵매를 전문으로 그린 화가라는 것 이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원나라 말기의 혼란한 시대에 ‘은자’로 살기를 자처한 교양인이었던 것 같다.
추복뢰는 긴 두루마리에 표면이 거칠고 절묘하게 휘어진 매화 한 줄기를 그리고, 곧거나 구부러진 잔가지들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빠르고 힘있는 필선은 꿈틀대는 듯하고 꽃받침과 꽃술, 그리고 이끼들을 나타내는 먹점들은 그림 전체에 생동감을 더했다. 게다가 엷은 먹으로 동그랗게 그린 꽃잎은 한 장 한 장이 사랑스럽다.
원나라 때 매화도의 대가 왕면의 생애와 화풍은 후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명나라의 진헌장(陳憲章)과 왕겸(王謙)은 왕면의 화풍을 이어 꽃이 빽빽하고 꽃술이 많은 매화도로 이름이 높았다. 특히 진헌장의 <만옥도(萬玉圖)>는 부드럽고 탄력 있게 휘어져 내려온 가지 위에 만발한 꽃송이들이 가득하다. 윤곽을 그리고 흰 분을 칠한 꽃송이들은 만옥도라는 이름처럼 옥으로 깍은 듯 정교한 구슬과 같다.
5. 나라 잃은 설움을 표현한 매화도 청나라 때에 들어서서 매화도는 더욱 분방하면서도 다양하게 묘사되었다. 명나라 황실의 후예로서 만주족에게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이기지 못해 평생을 벙어리로 살았던 팔대산인(八大山人)과 명황실의 후예로서 승려로 떠돌았던 석도(石濤)의 매화도에는 그들의 나라 잃은 울분이 표현되었다.
석도의 <세필매화도(細筆梅花圖)>는 매화의 기굴(奇屈)한 모습을 통해 자신의 심경을 나타낸 듯 물기 없는 붓으로 구불거리는 매화 줄기를 그리고 듬성듬성 몇 송이의 꽃을 그려 넣었다. 그는 모진 세파를 견뎌 낸 것 같은 줄기의 모습에 매화의 의미를 부여했다.
청나라의 양주는 상업이 발달하여 물자가 풍부하고, 그림에 대한 수요 또한 많았다. 특히 양주가 있는 절강성 지역은 중인, 양무구, 왕면 등 역대로 매화도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온 곳으로 이를 토대로 개성 있는 화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한결같이 양식, 기법, 제재 등에서 다양하고 명쾌하며 독특한 화풍을 이루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양주팔괴(楊州八怪)라고 칭하는 화가들이다. 그 중 왕사신(汪士愼), 금농(金農), 정섭(鄭燮), 이방응(李方膺), 나빙(羅聘) 등은 매화에 특장을 보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매죽’, ‘매란죽’ 등 다양한 그림을 그려 세한삼우나 사군자의 전통은 이어받았으나, 그들은 그 정신성보다는 기법의 변화에 역점을 두었다.
나빙의 <삼색매도(三色梅圖)>는 백매와 홍매, 그리고 청매가 섞여 있는 모습이다. 긴 화면에 먹의 농담을 달리하여 줄기의 거친 표면을 표현했고, 구불거리는 가지에 활짝 핀 삼색의 매화를 그려 넣었다. 왕면이나 진헌장의 매화도와는 달리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표현한 듯 분방하다.
또한 금농의 <옥호춘색도(玉壺春色圖)>에서처럼 넓은 붓질로 굵은 줄기를 한 번에 그려 평면적인 느낌이 나도록 변형을 시도한 작품도 있다. 이들의 다양한 화풍은 이후 오창석(吳昌碩)이나 제백석(齊白石) 등으로 이어지면서 보다 추상적인 형태로 변화되어 갔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화가들이 매화도를 그렸다. 초기에는 자연 상태의 매화를 관찰하여 그리다가 점차 매화에 상징적인 가치를 부여하게 되고, 점차 매화의 형태보다는 상징적 의미를 강조하게 되면서 일정한 양식으로 발전했다. 그 상징성은 이미 당·송 시대의 문인들에 의해 형성되었던 것으로, 이후 시대에 따라서 화가 개인에 따라서 개성 있는 작품으로 매화의 전통적인 상징성은 표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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