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易)이란 무엇인가?

2016. 5. 18. 00:29잡주머니



       *** 역(易)이란 무엇인가? ***


희성황 (hms****)

주소복사 조회 22 16.05.15 17:17                                         


 


 작년(昨年)쯤인가? 벗이 

'역(易)을 한마디로 표현 한다면 무엇인가?' 묻길래 


"내가 어찌 역을 한마디로 표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卽變, 變卽通, 通卽久)라 하더만"이라고 대답 했었다.


시간이 지나고 역을 온전히 깨우치진 못했어도 나름 역에 대한 나만의 시각이 필요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 보았다. 역시 역을 한마디로 정의 하기는 힘든 일이다. 때문에 무식(無識)하지만 용감한 발심(發心)으로 


''역(易)은 도서(圖書)다''란 생각을 해본다.


하여 얼마전 나름대로 내가 생각하는 역에 대하여 정리해 보았다.





 창상지변(滄桑之變)의 시대적 변화에 따라 지금은 ‘포털 사이트(portal site)’등에서 검색 하나로 쉽게 정보(情報)를 취득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보다 전문적이고 다양한 시각을 얻기 위해선 아직도 좀 더 방대한 자료가 보관 되어진 도서관(圖書館)을 찾게 된다. 한자어 ‘圖書館’이란 명칭은 영어 ‘Library’의 역어로 19세기에 이르러 사용한 신조어라고 알고 있다. 역시 ‘도서(圖書)’란 말은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줄임말로 공자의 십익(十翼)중 계사상전(繫辭上傳)에서 가져온 말이다. 저작(著作)에 대해선 여러 이설(異說)도 있지만, 계사전은 ‘역경(易經)’의 기본원리와 구조를 공자가 설명한 글이다. 때문에 계사전은 철학적 우주관과 역에 대한 총론이 집적되어 있다.


             

 




              


☯.易有太極(역유태극)하니 是生兩儀(시생양의)하고 兩儀生四象(양의생사상)하고 四象生八卦(사상생팔괘)니라 ̴ 河出圖洛出書(하출도낙출서)어늘 聖人(성인)이 則之(즉지)하니 ̴ -(繫辭上中)

 

→역에 태극이 있으니 그곳에서 두 가지 거동(양의: 陰과 陽) 음양이 나왔고, 음양에서 사상(少陽, 太陽, 少陰, 太陰)이 나왔고, 사상에서 팔괘(乾,兌,離,震,巽,坎,艮,坤)가 나왔다. ̴ 황하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에서 글이 나오거늘 성인이 이것을 본뜨고 ̴

 


   하도와 낙서는 공자 이전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왔고, 공자는 주역(周易)을 설명함에 팔괘(八卦)의 생성과정을 선천(先天) 팔괘인 하도와 후천(後天) 팔괘인 낙서로써 계사상전에서 설명하고 있다. 하도를 복희씨(伏羲氏)가 황하에 나타난 용마(龍馬)의 등에 그려진 그림을(55) 보고 팔괘를 얻은 것인지, 낙서를 하(夏)의 우(禹)가 낙수에 나타난 신귀(神龜)의 등에 새겨진 글(45)을 보고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얻은 것인지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접어두고, 그림인 상형(象形)과 수(數) 기호(記號) 그리고 글(契) 서(書)가 이미 오래전부터 점차적으로 발전한 것은 고래(古來)의 유물(遺物)과 충분한 고증(考證)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자료(資料)를 모아 둔 곳이 도서관(圖書館)으로 명명됨이 틀리지 않으며, 역경(易經)은 역경이 생기기까지의 방대한 도서(圖書)의 자료가 집적(集積)된 서(書)이기에, 날줄로써 경(經)의 최고봉이 되는 것이며, 때문에 역경이 한낮 점서(占筮)로써만 취급됨을 경계하는 것이다. 또한 일설에는 선천 팔괘를 그은 복희씨가 동이(東夷)족인바 되고, 고조선(古朝鮮)의 왕자(王子)인 부루(扶婁)가 도산에서 우(禹)에게 치수(治水)를 위해 후천 팔괘인 홍범구주를 전했다 하니 도서(圖書)의 원천 또한 새겨 볼일이다.  

             

         


   


 도서가 하도(河圖)로부터 낙서(洛書)에 이르기까지의 방대한 상형(象形), 수(數). 기호(記號), 글(契), 서(書)의 자료집적(資料集積)이라면, 인간의 사유(思惟)와 철학(哲學)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생생하게 역시 도서 속에 담겨져 가는 것이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컴퓨터 프로그램(computer program)이 집적된 것 또한 라이브러리(library)라 한다면, 우리는 현재까지 집적되어 온 도서 안에서 심오(深奧)한 자료를 라이브(live)하게 검색할 수 있지 않을까? 역경이 오랫동안 그것을 담아 왔다면, 우리는 역경 속에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자료를 어느 정도 얻지 않을까? 또한 특별히 심오한 도서에 집중하다보면 살아가면서 종종 기시감(旣視感:Dejavu)같은 것을 얻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공자의 계사전이 청대(凊代)에 이르러 고증(考證)을 통해 저작의 시기가 의심 되어진 것은 자료집적의 충실함이며, 그 영향이 실로 놀라울 정도로 무궁(無窮)하기 때문이다. 역경의 원리가 서양(西洋)에 헤겔의 변증법, 라이프니츠의 이진법, 카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등 그 미침이 적지 않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컴퓨터의 기본원리가 되고, 스티븐 호킹은 ‘양자역학이 지금까지 해 놓은 것은, 동양철학의 기본 개념인 음양(陰陽), 태극(太極), 색즉시공(色卽是空)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언급을 했다고 하니, 우리는 언제까지 역(易)을 점서로만 생각하고 눈 감을 것인가? 역은 가장 오래전에 오랫동안 인간의 사유가 담긴 도서의 자료를 농축(濃縮)하여 담아낸 경(經)이기에, 그곳에서 자연과학뿐 아니라 심리학에까지 이르는 모든 철학적 영감을 얻어 낼 수 있는 것이며, 현인(賢人)들은 역에서 경세경륜(經世經綸)하는 도(道)를 구하려 한 것이다.

                                                                                                                

     

                            

               

 

  인간은 오랫동안 눈이 있어 보게 되고, 귀가 있어 듣게 되고, 코가 있어 맡게 되고, 입이 있어 맛을 알게 되고, 피부가 있어 느끼게 되었다. 이 모든 감각(感覺)을 말로써 표현하게 되고, 머리로써 사유하게 되었을 때 소통의 도구로 말만으론 부족했을 것이다. 더구나 좀 더 많은 공동체생활을 영위해 나가기 위해선 상징(象徵: Symbol)도 필요 했을 것이다. 때문에 기립(起立)으로 손이 자유로웠던 인간은 나무, 불, 흙, 돌, 물을 다룰 뿐만 아니라, 세고 긋고 그릴 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선천(先天)에서의 하도(河圖)는 바로 이러한 자료의 집적(集積)이다. 하도는 어느 날 갑자기 황하에서 용마가 등에 지고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지역 사람들이 그때까지 자연과 함께 살아온 경험과 사유를 수(數)로써 헤아려 상형(象形)과 기호(記號)로 기록했는데 바로 이러한 자료를 집적(集積)한 것이 하도이다.

 

 인간의 공동체 생활이 점차 확대되는 과정은 스스로의 확장뿐 아니라 대결과 결합을 통해서도 확장해 나가게 됨으로 서열이 생기고, 상대방이 그간 모아놓은 자료까지도 통일해 나갔다. 역시 공동체 생활이 확대됨에 따라 인간은 생각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지게 되었고, 그만큼 손도 바빠지게 되었다. 이는 가치(價値:서양은 眞 善 美, 동양은 仁 義 禮 智 信인 五常)에 대한 사고를 확장시켰고, 인식(認識)의 경계(境界)를 파괴해 나갔다. 이 모든 자료를 집적하기 위해선 상형과 기호만으론 턱없이 부족 했으며, 새기어 넣는 방식의 끌(契)의 한계도 있었다. 추상적(抽象的) 사고가 진전 되면서 지사(指事)의 글(契)이 확대되고 이는 점차적으로 회의(會意), 형성(形聲), 전주(轉注), 가차(假借)의 육서(六書) 대분이 생겨남에 따라 기록의 양과 시간이 늘어났고, 끌(契)의 강함보다 붓의 유순(柔順)함이 보다 많은 양(量)의 자료를 좀 더 빠르게 글(書)로써 쓸 수 있었다. 이러한 글(書)의 탄생은 공동체를 더욱 확장 시키고, 공동체간의 정보교류를 촉진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더구나 공동체의 확장과 정보교류는 글을 모으고 사유하는 전문직(專門職)을 탄생 시켰으며, 이들은 모든 자료를 서(書)로써 집적(集積)하였다. 때문에 낙서(洛書) 역시 어느 날 갑자기 낙수에서 신귀가 등에 지고 나온 것이 아니라, 후천에 모아진 선천의 하도까지 포함하는 방대한 자료의 집적이다. 따라서 도서는 미래를 점치는 참고서의 역할도 하였지만 역사서이며, 역서(曆書)이기도 했던 철학서이고, 수리(數理)가 담겨진 실용학문이기도 했다.

 

 선후천을 가르는 두 즈믄해가 지나고, 주나라의 문왕(文王)은 그간의 하(夏)나라의 연산역(連山易 重山艮卦), 은(殷)나라의 귀장역(歸藏易:重地坤卦)등을 바탕으로 중천건괘(重天乾卦)를 시작으로 하는 주나라만의 독특한 6비트(bit) 메모리를 만들었다. 역시 점(占)에 있어서도 조짐(兆朕)을 보지 않고 설시(揲蓍)를 사용했다. 또한 64괘에 자신의 인생철학과 정치철학을 담아 하도와 낙서로써 집적된 자료를 바탕으로 괘사(卦辭)를 지어 넣었다. 여기에 그의 아들 주공(周公)이 문왕의 사후에 64괘 각 효(爻)마다 효사(爻辭)를 달고, 중천건괘와 중지곤괘에 용구(用九)와 용육(用六)을 넣어 386개의 문장을 첨가하니, 이것이 총 450개의 문장으로 오늘에 전하는 주(周)나라의 주역(周易:重天乾卦)이다.


   

       

 

 그로부터 50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춘추시대(春秋時代) 말엽에, 주공의 식읍지에서 태어난 공자(孔子)가 47세가 되던 해에, 공자가 불쏘시게로 산 죽간(竹簡)중에서 450개 문장의 주역을 처음 대하게 된다. 그간 서체(書體)의 변화도 있었겠지만 문물과 사상도 변했을 것이다. 때문에 공자는 도서로써 2000여년의 자료가 450개의 문장으로 집적된 주역을 처음 대하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54세에 이르러 역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가 선택한 것은 주유천하(周遊天下)였다. 13년간 공자가 주유천하를 하면서 역경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 수집은 도서로 된 정보뿐 아니라, 그간 처자식과 애제자를 잃고 상가집개 취급을 받는 쓰디쓴 인생경험이 무엇보다 주효했을 것이다. 공자는 아프고 시린 삶의 경험을 통해 사유(思惟)를 촉진시키고 감흥(感興)을 불러들여 농축되어진 도서의 진리(眞理)를 보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고향에 돌아와 역경을 서술함에 술이불작(述而不作)하고 역경을 이해하기위한 십익(十翼)을 스스로 전(傳)으로써 달았다.

 

 이 시기 삼경(三經)으로써 역경은 그 존재감을 이어 갔지만 여타 다른 경(經)들과 경쟁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할 수밖에 없었고, 공자 스스로도 노자(老子)에게 예(禮)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세상은 각 나라마다 도서의 집적을 달리 해석하고 사유도 다양하게 진화 발전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백가쟁명(百家爭鳴)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미언대의(微言大義)로 기록된 성인(聖人)들의 경구(經句)는 현인(賢人)들의 전(傳)을 통해 재해석되고 여타 다른 경전(經典)들과의 통합된 해석(解釋)이 가해졌다. 한(漢)대에 이르러서 유교(儒敎)의 오경(五經)중 춘추(春秋)에 대한 해석이 특별 했는데 춘추삼전(春秋三傳: 公羊傳, 穀粱傳, 左氏傳)이 그 예이다. 주역(周易)에 있어서도 공자의 시대엔 팔괘(八卦)를 논(論)하는 이는 오행(五行)을 논하지 않았고, 오행을 논하는 이는 팔괘를 논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전국시대 들어와 하도와 낙서의 상생(相生)하고 상극(相克)는 순환구조와 제(齊)나라의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를 바탕으로 하는 음양오행가의 학설(學說)이 종종 뒤섞이었다.


 진(秦)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하면서 나라만을 통합한 것이 아니라 문자, 화폐, 도량형, 법률에 까지 이르렀는데 무엇보다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통한 사상(思想)을 통합하려 했던 것은, 많은 도서자료들의 유실(遺失)을 가져 왔다. 그나마 유가(儒家)의 종주(宗主)께서 경서(經書)만을 공벽(孔壁)에 감추고 역경은 점서(占書)로써 전해 졌으니 다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문자(文字)의 통일은 진나라 이후에 보다 많은 지식인들을 배출하고, 보다 많은 전적(典籍)을 양산해 낼 수 있었다. 주역 이전의 귀갑수골(龜甲獸骨:甲骨文)은 사라진지 오래고, 고문(古文)인 대전(大篆)은 간독(簡牘), 백서(帛書), 맹서(盟書:죽간이나 목간)로써 보존 되었다. 진의 이사(李斯)에 의해 소전(小篆)으로 처음 문자통일을 시작한 것이 한 대에 이르러 좀 더 편리한 예서(隸書)가 나옴으로 다양한 경전(經典)의 해석이 이루어 졌는데. 분서갱유에서 살아남은 학자들에 의해 예서(隸書)로 쓰여 진 경전인 금문경학(今文經學)과, 공벽(孔壁)에서 살아남은 고문(古文)으로 쓰여 진 경전을 중시(重視)하는 고문경학(古文經學)의 다툼에, 참위(讖緯)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경전은 다양한 해석이 난무하였다.

 

 서체(書體)는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 초서(草書)로 다시 빠른 서체인 행서(行書)로 발전하고, 특별히 유교(儒敎)의 경전이 수많은 현인(賢人)들을 통해 재해석되어 나갔는데, 주역(周易)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역에 대한 다양한 해석 중 대체적으로 두 가지의 시각이 있었는데 하나는 역시 동중서(董仲舒)를 필두로 하는 관변학자(官邊學者)들의 금문경학파의 상수역(象水易)이다. 상수는 도서중의 도(圖)와 수(數)에 치중하며 참위(讖緯)와 함께 전개해 나갔다. 또 하나는 주로 민간(民間)의 현학자로부터 시작된 공벽에 살아남은 대전(大篆)의 서(書)를 중시한 고문경학(古文經學)파의 의리역학(義理易學)인데, 비직(費直)과 마융(馬融)이 그 물고를 텄다. 의리역은 유교(儒敎)의 수기치인(修己治人)과 서(書)에 치중하며 도의(道義)를 중시 하였는데 역에 우주론(宇宙論), 인간론(人間論), 인식론(認識論)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여 주었다. 24세에 요절한 왕필(王弼)이 의리역과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주석(註釋)함이 놀라운 일이거니와 정이천(程伊川)이 이를 본받아 의리역으로 정전(程傳)을 써 넣었다. 남송(南宋)의 주희(朱熹)는 성리학(性理學)에 그 공을 두었음에도 역(易)만큼은 소강절(邵康節)선생의 상수학(象數學)의 역리(易理)를 받아들여 주역본의(周易本義) 지어 넣었으니 도서(圖書)의 해석이 하나 됨을 주장한 것이다.


   

           

 

 역경(易經)을 이해하는 방도로 공자(孔子)의 십익(十翼)이 시대에 따라 첨삭(添削)이 가해졌더라도 작금(昨今)에 이르러 십익의 역리(易理)를 제외하면 역경은 그야말로 점서(占筮)의 기록에 불과한 것이, 집적된 도서(圖書)의 원리를 풀어내기가 그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역시 의리역학적인 측면에서 우주론, 인간론, 인식론의 철학적 사유의 기반은 공자의 십익속에 담겨져 있는데 계사상하전(繫辭上下傳)은 이런 십익의 총론(總論)이다. 열개의 날개인 십익(十翼)을 나눔에 있어서도 여러 이설(異說)이 있으나 대개 역경의 상경(上經: 30괘)과 하경(下經:34괘)의 구분에 따라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십익은 단전(彖傳) 상하, 상전(象傳) 상하, 계사전(繫辭傳) 상하, 문언전(文言傳), 설괘전(說卦傳), 서괘전(序卦傳), 잡괘전(雜卦傳)의 7종 10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전중에 괘사(卦辭)를 설명한 것을 대(大)상전이라 이르고, 효사(爻辭)를 설명한 것을 소(小)상전이라 이르며, 문언전중에 건괘의 도리(道理)를 밝힌 것을 건(乾)문언전, 곤괘의 도리를 밝힌 것을 곤(坤)문언전이라 이른다. 어떻든 단전은 돼지 어금니 단(彖)으로 멧돼지의 어금니처럼 괘사(卦辭)를 딱 잘나 판단한 것이고, 상전은 괘사(卦辭)와 효사(爻辭)의 뜻을 본받아 해석한 것이다. 계사전과 문언전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고, 설괘전은 64괘의 형상을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서괘전은 자연과 인간사회의 변화원리에 따른 괘의 배열(排列)순서이며, 잡괘전은 서로 대립되는 괘의 성정(性情)을 잡기(수필) 식으로 쓴 것이다.

 

 이렇듯 역(易)은 주의 문왕이 지은 64개의 괘사(卦辭)와 그의 아들 주공이 지은 386개의 효사(爻辭)에 공자가 십익(十翼)을 달아 현재 주역(周易)으로 전하는 것이다.

 

 이상 ‘주역(周易)’으로 현재 전해져 내려오는 역의 생성과정과 진행과정을 나름대로 간략하게 풀어 보았다. 일부의 주장은 본인의 사견(私見)이니 고증(考證)한바는 없다. 다만 역(易)을 쉽게 이해시키고자 서적(書籍)으로 보여주신 많은 선배들의 글을 참고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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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易)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