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25. 23:45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연재>'하남의 도미나루가 시사하는 백제도성' | ||||||
3. 하남의 도성소재 당위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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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하남에 백제도성이 있었던 이유
삼국사기 권제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BC18)조에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살만한 땅을 둘러보았다. 열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하기를....이곳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하여 하남위례성에 도읍하였다고 하여 한산(漢山)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고 온조왕13년(BC6) ‘가을 7월에 한산아래(漢山下)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옮기고 온조 14년(BC5) 봄 정월에 수도를 옮겼다’ 고 하였으며 온조왕25년(7) ‘봄 2월에 한성(漢城)의 인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하였고 근초고왕26년(371)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라고 하여 백제의 도읍이 한산을 떠난 때가 없었다. 그러면 한산은 지금 어디에 있는 산이라는 것인가. 하남에는 많은 절터가 있는데 대략 열거하면 동사(同,桐寺) 천왕사(天王寺) 약정사(藥井寺) 자화사(慈化寺) 신복선사(神福禪寺) 봉수사(奉水寺) 선법사(禪法寺) 법화사(法華寺) 도미사(渡迷寺) 서양사(상사창동 샘골) 계두사 여가산절 범굴절 사막골절 검단산절 등 상당히 많으며 이들 중 약정사(藥井寺) 신복선사(神福禪寺) 봉수사(奉水寺)는 1530년(중종25)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광주목(廣州牧) 불우조(佛宇條)에서 모두 한산(漢山)에 있다고 명기하고 있다. 그러면 한산(漢山)은 하남시(河南市)에 있는 산이 명백하니 ‘한성백제(漢城百濟)의 도성(都城)이 한산(漢山)에 있었다.’ 함은 ‘한성백제의 도성이 하남시(河南市)에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성산성(二聖山城) 3차 발굴시 산성내의 제1저수지에서 출토된 목간(木簡)에 ‘무진년 정월십육일 붕 남한성 도사..(戊辰年正月十六日朋南漢城道使,,)’40)라는 묵서명문(墨書明文)은 도사(道使)41)라는 관직명으로 보아 고구려나 통일신라시대의 목간임을 암시하고 있지만 목간이 출토된 위치가 저수지 바닥에서부터 1m 위의 쌓인 토사 속임을 상기할 때 토사가 1m까지 쌓이는 기간과 저수지를 사용할 때의 수시로 준설하는 관리 작업이 병행되었음을 감안 할 때 산성(山城)이나 저수지의 조성연대는 훨씬 그 이전으로 계산되어야 할 것이며 명문내용이 이성산성은 남한성(南漢城) 또는 한성(漢城)으로 불리었다는 방증(傍證)으로 이 산성이 한산(漢山)에 있는 성이라는 뜻이므로 이곳이 한산(漢山)이었음을 간접시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백제가 현재의 하남시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처음 도시가 형성된 것이요 그 도시가 유지되었기에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 까지 지역중심도시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2) 하남 춘궁동에는 ‘궁안(宮內) 등 마을이름이 현재까지 통용되고 있다.
(3) 백제 개로왕 시대의 기록인 연하수언(緣河樹堰)과 숭산(崇山)은 하남에서만 고증이 가능하다.
(1) 종합적 방어를 염두에 두지 않은 도성이다.
(2) 풍납토성은 주변에 산이 아예 없고 한산으로 지칭되는 남한산(南漢山)과 금암산(金岩山)및 객산(客山) 등이 보이지 않고 숭산(崇山)으로 지칭되는 검단산도 볼 수 없어 이들 산과 연관된 백제사를 풀어나가기 난감한 성이다. (3) 풍납토성 주변에는 하남과 달리 삼국시대는 물론 그 이후의 사찰도 발견하기 지난하며 특히 대형 사찰지가 없다는 것은 도성의 존재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존재한다. (5) 왕성이라면 왕궁지(王宮址)가 있어야 하는데 풍납토성에는 왕궁지와 초석이 발견되지 않았다. (6) 풍납토성은 왕성이 아니고 온조왕이 한강 서북쪽에 쌓은 다용도 성(城)으로 봄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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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하남의 도미나루가 시사하는 백제도성' | ||||||
2. 다른 지역의 도미설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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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송파의 도미설화 2) 충남 보령시 오천면의 도미설화 보령의 도미부인 전설의 내용은 백제 개로왕 시대에 군용마를 기르는 전마뜰(戰馬坪:청소면 진북리의 넓은 들)에 왕이 자주 출행하였는데 왕이 이곳에 와서 들으니 도미라 하는 목수 한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 아내가 천하일색(天下一色)이란 말을 듣고 왕은 욕심이 나서 도미의 아내를 빼앗으려고 하는 내용을 전개 시켜 도미가 살던 마을을 도미(都彌)마을 이라고 하다가 그 후에 도미(都美)라고 하였는데 그 마을이 도미항(都美港:오천면 교성리)이고 도미의 아내가 성장한 현재 도미항 앞의 그림같이 예쁜 섬을 미인도(美人島)라 하며 뒷산은 도미의 아내가 올라가 남편을 생각하고 슬피 울었다 하여 현재의 오천면 선림사 앞에 위치한 산봉우리를 상사봉(想思峰)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1983년 이고장의 향토사에 관심이 많은 허준31)씨가 새로운 지방 전설을 창작하여 만들어 내 ‘내 고장 보령’ 이라는 책자로 발간한 것이 보령 도미설화의 시작이었다. 이 설화를 집필한 허준 씨는 일제강점기 때 고향이 웅천인 역사학자 황의돈(黃義敦)씨와 서울에서 가까이 지내면서 그의 집에 자주 출입하였는데 한번은 도미설화를 알려주고 도미설화의 고장을 알 수가 없으니 자네가 한번 찾아보라고 하여 고향에 내려와 이곳저곳의 지명을 생각해보니 오성면 도미항 부근이 딱 맞아 떨어져 이야기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31) 그것이 지역을 알리고 관광자원화 하고자하는 당시의 시 관계자 및 지역지도자의 호응을 얻어 시 예산으로 도미설화 지역정비 사업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렇듯 보령의 도미설화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였거나 지역의 전통적 전래 설화이기보다는 지역 홍보를 위한 창작 설화로 밝혀졌다. 따라서 보령 도미설화의 지역적 사실성은 검토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3) 진해시 청안동의 도미설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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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하남의 도미나루가 시사하는 백제도성' | ||||
Ⅴ.도미부인이 기지(機智)로 탈출한 백제도성(百濟都城)은 어디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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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미설화의 사실성
그것은 도미설화에서 고구려의 간첩 도림의 기록이나 중심인물인 개로왕의 무능과 어리석음으로 폭로하고 한성백제를 상실하게 한 직접적 이유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삼국사기 발간당시 사서(史書)의 기록을 원용하여 기록되었을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34-1)가 있으며 그 사서의 원전을 704년(성덕왕 3년) 한산주 도독(당시에는 총관)에 임명되었던 신라의 성골 출신이면서 화랑 가문으로 신라의 사학자인 김대문(金大問)이 집필한 한산기(漢山記)로 보는 주장34-2)이 있는데 삼국사기 발간 당시까지도 전하고 있었음에 타당성이 인정되며 부언하여 김대문은 본인이 책임지고 있는 한산주는 약 500여 년간 백제의 도성이 소재한 지역이므로 백제왕의 학정을 부각시킴으로서 백제왕실의 향수를 단절하고 신라에 순종하게 하려는 의도를 염두에 두고 당시 한산주에 널리 회자되고 있는 도미의 실제이야기를 한산기(漢山記)에 수록하였을 것으로 믿어져 설화의 사실성을 객관화 시켜주고 있다. 2.도미부인의 탈출 정황
2) 도성에서 나루터까지의 거리와 시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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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 천왕사지 발굴 유물 돌아오다 | ||||||||||||
박물관, 天王’명기와, 용무늬기와, 청동대접 등 556점 위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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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시 하사창동 일원에서 출토된 천왕사지 용문와당 등 유물 556점이 하남역사박물관이 위탁보관하게 됐다.
하남역사박물관에 따르면 이번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유물들은 天王’명기와, 용무늬기와, 청동대접 등으로 하남 천왕사지 유적을 비롯한 전체 10개 유적에서 출토된 국가귀속문화재 556점이다. 이번에 성사된 국가귀속문화재의 위탁을 시작으로 관내에서 출토된 훌륭한 문화유산에 대한 위탁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며 박물관으로 위탁된 국가귀속문화재는 상설 및 특별전시, 교육프로그램 등의 컨텐츠로서 다양하게 활용할 예정이다.
하남역사박물관은 문화재청 및 경기도청 등 관계기관과의 지속적인 협의를 통해 지난 2015년 '국가귀속문화재 위탁기관'으로 지정된 바 있다. 하남 천왕사지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어 있는 보물 제332호인 철조석가여래좌상이 출토된 하남시 하사창동 일대의 고려시대 사찰 유적이다. 2000년 대 이후 발굴조사가 부분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조사 과정에서 ‘天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기와 등이 출토되면서 『고려사』, 『세종실록』등의 문헌에서 고려 및 조선의 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전하던 천왕사임이 밝혀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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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옛 도읍지를 찾아서 (1) 우리들 이야기
<맑은 바람> 용선식 동문이 강동구 풍납동의 백제 토성과 하남시 춘궁동 일대의 백제 유적을 답사했다는 글을 읽고 옛 백제의 수도를 잠시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는 중학교 수학여행을 부여로 다녀 왔지만 그 때의 배움으로 인해 백제의 수도라면 먼저 공주나 부여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부여가 백제의 수도였던 기간은 서기 583년부터 660년까지 77년, 공주가 수도였던 기간은 475년부터 583년까지 108년에 불과하고, 온조가 백제를 건국한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475년까지 거의 500년에 달하는 기간 백제의 도읍은 강동-송파 지역의 한강변이었던 것이다. 백제를 건국했던 온조(溫祚王)는 고구려 동명성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온조는 동명성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왕이 되려는 꿈을 꾸어 왔으나 이복형인 유리(琉璃)왕자가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동복형 비류(沸流)와 함께 경기지역으로 남하하게 된다. BC 18년, 온조는 먼저 한강 이북지역에서 나라의 터를 잡았으며 그 중심은 오늘날 미아리-우이동 일대, 세검정 일대, 파주-고양 일대 또는 상계동 일대로 추정된다. 온조는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고 왕성(王城) 둘레에 목책을 둘러 위리(圍里)를 축조했는데 이 위리는 우리 말에 울(울타리) 또는 우리(cage)에 해당되며 이를 한자어로 위례(慰禮)라 하여 수도를 위례성(慰禮城)이라고 불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나중에 한강 이남으로 세력의 중심을 옮기기 전까지 이 도읍을 특히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이라 한다. 건국 당시 백제의 도읍지는 전북 익산(益山), 충남 직산(稷山) 지역이라는 설도 있으나, 경기도 광주(廣州)와 서울 강남 일원에 위치한 위례성이라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위례성의 위치에 대하여는 충남 천안시 입장면 호당리였다는 주장이 최근에 대두된 바 있다. 이후 온조는 한강을 건너 오늘날 강동구 풍납동, 송파구 방이동, 강남구 삼성동 일대에 토성을 쌓고 주민을 다스리면서 세력을 확장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바꿨다. 이때 세력의 중심은 풍납토성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 토성에 도읍을 세우고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 했다. 온조왕은 이후 한산(漢山) 밑에 다시 성을 쌓아 수도를 한산성(漢山城)이라 하고, BC 5년 수도를 위례성에서 한산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 한산성의 위치 또한 확실하지는 않으나 한산(漢山)이 오늘날 남한산성의 주봉인 남한산(南漢山)으로 추정되고 있고, 그 북쪽 산자락에 위치한 하남시 춘궁동, 교산동 일대에서 백제의 유적이 대량 발견되고 있어 그 일대가 한산성 터였다는 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춘궁동 일대는 속칭 고골 또는 고고을이라 하는데 이는 옛 고을(古谷)이라는 말이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춘궁동 고골초등학교 앞 일대는 옛부터 "궁터"라고 불리우고 있는데 지금도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파다보면 옛날 건축물의 기왓장이나 주춧돌이 발견되곤 한단다. 이 한산성은 후에 한성(漢城)으로 부름이 바뀌고 근세까지 서울지역의 명칭으로 전해 내려온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남한산성의 주봉인 남한산은 지금은 청량산(淸凉山) 또는 일장산(日長山)으로 불리고 있다. 오늘날 남한산성에는 연장 9Km에 달하는 산성(山城)이 둘러져 있다. 성남시 쪽에서 산성을 올라가 남문을 통과하고, 남문에서 성곽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청량산의 주봉이 보인다. 여기서 수어장대를 지나 서문 앞까지 올라 갔다가 다시 이 산성의 중심인 산성로터리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숭렬전(崇烈殿)이라는 사당을 만나게 된다. 이 사당이 곧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
cafe.daum.net/snuh18/EjB/1715 서울사대부고 18회 동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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